** 당시의 유럽의 정세 **
1562년 #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s) 전쟁 : 칼뱅파 신교도와 구교도와의 전쟁
1563년 # 영국 구빈법(救貧法) 공포.
1566년 # 네덜란드, 민중폭동 일으킴.
1568년 #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무어인 반란.
# 네덜란드 독립전쟁(∼1648) → 독립운동 초기의 지도자 에흐몬트 백작
(∼1522), 총독 알바 공(1508∼82)
에게 참수됨.
1569년 # 스페인, 아라곤의 반란.
1572년 #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네덜란드 독립운동에 원군을 보냄.
# 프랑스, 성 바스톨로메오 축일(祝日)의 대학살 : 위그노(신교도) 다수 살해됨.
** 프랑스의 전후 배경 **
앙리 2세가 죽은 1559년은 프랑스사(史)에 한 획을 그었다.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둘러싼 합스부르크 가(家)와의 왕조전쟁은 끝나고 새로이 종교적인 내란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티즘 운동은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들어 온 것으로서 여기에 대해 역대 왕들은 대체로 박해와 탄압을 펼쳤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뱅파는 프랑스 내의 도시민·부농 및 귀족층에 전파되어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리하여 앙리 2세가 죽은 직후 파리에서 칼뱅파의 전국조직이 결성되고 곧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6세기 프랑스는 카톨릭을 믿는 프랑스와 개신교(프로테스탄티즘)를 국교로 하는 나바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카톨릭군은 기즈남작이 이끌고 개신군은 꼴리니 제독이 이끌어 왔다. 즉 앙리 2세의 사후 궁정세력은 두 가문에 의해 차지되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는 개신교이며 다른 하나는 카톨릭이었으므로, 정치적 경합은 곧 종교적 결합으로 될 소지가 있었다. 앙리 2세의 뒤를 이은 프랑소아 2세(1559∼1560)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정권은 왕비의 가문인 기즈(Guise) 家에 의해 좌우되었다. 프랑소아 2세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샤를르 9세(Charles Ⅸ : 1560∼1574)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왕의 모후인 카트린느(Catherine de" Medici)는 섭정으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카트린느는 편애하던 둘째아들 앙주에게 평화로운 프랑스의 국왕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프랑스는 이 두 종교의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그래서 카트린느는 극단적으로 대립한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자기 아들로 하여금 차례로 왕위를 차지하게 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카트린느의 첫 조치는 당시 위그노(Huguenots)라고 알려진 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트에게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였으나, 종교적 자유를 부여하는 칙령을 공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중도적(中道的) 정책은 좀 더 완전한 자유를 원하는 위그노에게나 프로테스탄트의 탄압을 바라는 카톨릭에게 다 같이 불만을 안겨 주었다. 기즈 公은 1562년 정권을 잡고 카트린느에게 칙령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무력에 의해 신앙을 수호하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양파간에 전쟁이 일어났다. 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의 칼뱅파 교도인 위그노와 카톨릭교도 사이의 투쟁에 귀족간의 대립, 귀족과 왕실 사이의 대립, 왕위계승 문제 등이 얽혀 장기간의 복잡한 투쟁으로 발전하면서 프랑스를 거의 무정부 상태에 빠뜨렸다. 위그노 전쟁 이후 위그노와 카톨릭은 각각 영국과 스페인이라는 외국세력까지 끌어들여 격렬한 싸움을 계속하였다. 1570년에는 휴전조약을 체결하여 한때 양파는 타협에 도달하였다. 그리하여 조약을 굳게 하기 위해 그들은 양파 간의 혼인을 성립하게 되었다. 카트린느는 그녀의 딸인 구교도 마고(Margot, Margaret)와 나바르의 새로운 왕인 신교도 앙리(Henry)를 결혼시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카트린느의 엄청나고도 무서운 음모가 숨어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위그노 지도자들을 없앰으로써 프랑스 왕권을 안전하게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8.24)에 새벽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하게 되었다. 그 결과 비록 프로테스탄트들이 굴하지 않는 항쟁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는 하나, 위그노의 세력은 대체로 프랑스의 일부지방에 국한된 미약한 세력이 되고 말았다. 학살 이후 앙리 3세가 즉위하였고, 기즈 公의 지시가 받기 싫증이 나서 그를 죽인 앙리 3세는 결국 기즈 公 일파의 자객 도미니꼬派 수도성직자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앙리 3세가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교도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동란 와중에 살해된 후, 앙리 4세(Henry Ⅳ : 1589∼1610)가 프랑스의 왕위를 차지하면서 부르봉家 시대가 열렸다. 앙리 4세는 즉위 후 반대세력을 융화하기 위하여 카톨릭으로 개종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낸 1598년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공포하여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에게도 종교적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였다. 즉 낭트칙령으로 인해 위그노들은 카톨릭교도와 같이 공직에 취임할 수 있고 대학에도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법의 보호를 받는 요새지역에서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분쟁이 발발한 지 거의 4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프랑스는 종교적 관용을 실천에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위그노 전쟁은 끝나고 프랑스에 새로운 왕조가 성립하였지만, 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은 17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앙리 4세는 그 밖에도 독일의 신교세력과 제휴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에 대항하고 교황청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2. 여왕 마고(La Reine Magot)
카트린느가 마고와 앙리를 결혼시키려고 한 이유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왕국의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앙리가 개신교를 버리고 또한 신·구교가 힘을 모아 밖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트린느의 검은 속마음에는 무서운 음모가 도시라고 있었다. 그 첫 시도로 카트린느는 꼴리니 제독을 죽이려 하나 실패하고 개신교도들의 분노와 증오만 사게 된다. 마고는 앙리에게 그는 희생자가 될 뿐이라고 떠나라고 권고하지만 앙리는 오히려 마고에게 비밀계약을 맺어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복종시키자고 제의한다. 카트린느는 마고와 앙리의 결혼식에 온 많은 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하고 강간을 하고 짖밟는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들처럼 무참히 죽어간다.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룰 지경으로 위그노들을 살해하고, 카톨릭 교도들은 시체들을 큰 구덩이에 내다 버린다. 그들은 신의 정의로움으로 살인을 자행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렇다면 신교도들의 신은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들에게 신이 정의를 위해 개신교도들을 죽이라고 계시를 내렸다면 개신교도들의 신은 그들의 죽음을 허락했단 말인가? 이것은 허울 좋은 구실에 불과할 뿐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신은 그들을 죽이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뜻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끝내 앙리는 더 이상의 개신교도들에 대한 살육을 막기 위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카톨릭으로 개종을 한다. 그는 카톨릭교도들 앞에서
" 진정한 목자들이 있는, 사도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 고대로마의 성
당으로 돌아간다. 이단인 루터교와 칼뱅교도의 모든 잘못을 버린다."
고 맹세한다. 그는 살기 위해, 개신교도들을 살리기 위해 개종을 하고 만 것이다. 삶을 연장시키기 위한 개종이 과연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가 있었을까? 물론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는 구차하게 보일 수도 있으나 그런 방법으로라도 살아서 앞날을 도모할 수 있다면 헛되이 죽는 것보다 나을 지도 모르겠다. 이 학살에 대해 개신교도들은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자금을 받아 반격을 준비한다. 한편 카트린느는 수차례 앙리를 죽이려고 시도를 하나 결국에는 자신의 아들인 샤를르 9세를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지나친 권력욕을 소유한 어머니로 인해 자식들이 불행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샤를르는 죽기 전 그가 죽으면 앙리를 남은 사람들이 죽일 것이라면서 그를 개신교도들과 함께 떠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하여 앙리는 개신교 교회에서 다시 받아들여지고 프랑스를 정복할 준비를 하게되며, 샤를르 9세가 사망한 후 카트린느가 그렇게 바라던 아들인 앙리 3세가 즉위하게 된다.
앙리와 샤를르, 마고 그리고 앙주, 거기다가 모든 프랑스 백성들. 이들은 모두 카트린느 한 사람에 의해 유린된 피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앙리는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샤를르는 그녀가 앙리를 죽이려고 만든 독극물에 중독되어 결국은 자기 어머니의 손에 의해 죽는 꼴이 되고 말았으며, 마고또한 어머니의 계략으로 원치않는 결혼을 하여 개신교도와 카톨릭교도 사이에 놓이게 되면서 종교대립의 희생물로 바쳐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앙주는 다른 형제들과는 조금 다르지만 어머니의 편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위해 왕인 형을 무시하는 아주 간악한 인물이다. 카트린느는 모든 자식들을 사랑했다고 하지만 그녀는 역시 이 아들에게만 정을 쏟은 것 같다. 그녀는 메디치 家의 딸답게 독살과 음모, 계략을 서슴치 않고 해내는데 그의 아들이 죽어가는데도 개신교도들을 이일에 어떻게 연루시킬까를 생각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녀의 마음 속엔 과연 어떤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평화를 실현시키기 위해 왕국은 더욱 혼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3. 종교적 불관용 정책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카톨릭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폭력만으로밖에 종교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을까? 자신의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종교를 탄압한다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특히 폭력으로써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것은 그들을 더 자극할 뿐 절대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현재의 입장으로 생각해 볼 때 자신과, 자기가 속한 집단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른다는 것은 상대방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 억지로 그들을 바꾸려고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이다. 그러나 카트린느는 그것이 그녀가 부르짖는 평화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같지 않는 이교도들을 무참히 짖밟아 싹을 없애려고 했던 것 말이다. 아마도 카트린느가 신교도인 앙리를 자꾸만 카톨릭으로 개종하려고 하고, 그를 죽이려고까지 한 이유는 그녀의 세아들이 모두 절명하고 앙리가 왕위를 계승한다는 점쟁이의 말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녀의 아들들이, 손자들이 대대로 왕위를 이어 프랑스를 통치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위그노가 왕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녀가 한 행위는 자신의 프랑스를 위해, 자신이 후손들을 위해 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개신교를 학대하고 죽이며, 전쟁을 벌이는 행위의 대의명분으로 왕국의 평화, 자국민의 평화, 자기 아들의 평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녀가 실천한 모든 것들이 과연 평화를 위한 것이었을까? 그녀가 평화를 위해 취한 일련의 조치들은 평화를 가져오기는 커녕 서로의 적대감과 불신감만 가중시키게 되고 말았을 뿐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무자비한 폭력은 상대방을 잠시는 주춤거리게 할 수 있어도 그 싹을 없애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더 깊은 분노와 복수심만을 심어 줄 뿐이다. 따라서 그녀의 행위들은 개신교도들과 카톨릭교도들의 반목을 일으켰고 그로 인해 왕국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평화를 위해 행한다고 했던 것들이 결국엔 혼란을 가중시키게 된 것이다. 백성들마저도 안정된 생활을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지녔던 것은 야만성에 불과했다. 종교적, 평화적 가면을 쓴 야만성.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악독한 야만성으로 자신들의 자식까지고 파멸로 이끌고 만 것이다. 폭력을 자행했던 것은 신교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카톨릭 교회를 닥치는 대로 습격하여 신부들을 살해하고 수녀들을 강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무수한 도시들에서 카톨릭교도들이 자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다. 종교불관용적인 폭력이 또 다른 폭력을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카톨릭교도들이) 자행하는 모든 행위가 정말 자신들의 종교에 기반하여 행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정말 종교만을 위해서, 그들의 신을 위해서 행해진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들이 진정으로 카톨릭의 신을 위해서 그들을 학살했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카톨릭 교리 어디에도 원수를 사랑하라고 나와있을지는 모르나 이단은 무조건적으로 살상하라고 나와있진 않을테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잔인한 행위들은 그들의 권력욕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교도들이 프랑스를 정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카톨릭만의 프랑스 통치를 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신교도들도 어떻게 해서든지 카톨릭교도들에게서 프랑스를 빼앗아 정복하려고 했다. 다시말해서 여기에는 왕위계승문제가 결합이 되는 것이다. 실례로 앙리 3세가 죽은 후 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계승전쟁이 종교전쟁에 덧붙여졌다. 결국 그의 가장 가까운 남자친척으로서(여동생 마고의 남편이니까) 나바르의 왕이자 칼뱅주의자들의 우두머리였던 앙리 드 부르봉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 때 카톨릭교도들은 이에 반대했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앙리 2세의 어머니쪽의 손녀뻘이자 자신의 딸인 이사벨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개신교도에게 그들의 프랑스를 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왕위계승문제가 결합되면서 프랑스 내에서의 종교동란은 국외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의 각국의 종교동란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프랑스의 경우에도 외세가 개입하여 위그노전쟁은 국제적 분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내적혼란은 외부의 간섭을 불러오는 것이 당연하다. 이 때 영국은 위그노를 지원하고 카톨릭 교회의 십자군을 자처한 에스파냐의 필리페 2세는 카톨릭교측을 지원했다. 그리하여 위그노 전쟁은 복잡한 국제분쟁의 성격을 띄게 된 것이다. 다시말해서 종교불관용 정책은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싼구교와 신교 간의 대립으로써 발생하였다고 보여진다. 즉, 급속히 확산되어 가는 신교도에 대항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계승하기 위한 카톨릭교도들의 신교도 견제에서 나왔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종교적인 것은 둘째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세력다툼이 국제적 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종교적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며, 자기 것만을 고집하고, 평화적으로 방법으로 해결하려고는 하지 않고 그저 억누르려는 생각들이 더 큰 화를 자초하게 된 것이다.
카톨릭의 문제로 돌아가서 그들이(카톨릭교도들이) 카톨릭의 정신에 입각해서 신교도들을 대했다고 생각한다면 과연 그 카톨릭교도들의 정신이 올바른 교리라고 볼 수 있을 까? 다시말해 앙리가 카트린느와 카톨릭교도들 앞에서 맹세한 것처럼 "진정한 목자들이 있는, 사도의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 카톨릭, 고대 로마의 성당처럼 순수한 카톨릭 그 자체의 정신이냐는 얘기다. 계속해서 얘기하게 되지만 이것 또한 명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신교도들을 탄압하고 박해하지만 그들도 이미 썩을 만큼 썩어있었다. 과연 그들이 카톨릭을 개혁하고자 일어난 신교를 신의 이름아래 맘대로 학대할 수 있었을까? 그들도 올바르지 못하면서 말이다.
종교적 불관용은 다른이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생겨난 많은 신교들은그 나름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도 그 밑바닥을 파헤쳐 보면 카톨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아무리 카톨릭의 폐단을 지적하고 그것의 보완으로 생겨났다고는 하지만 카톨릭과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톨릭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은 한 뿌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기 것만을 정당화 시키고, 자신의 것만이, 자기가 속해있는 것만이 최선(善)이라는 독선적인 생각에 불과하다. 자기 것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면 남의 사상이나 종교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종교적 불관용은 용납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된다. 비단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불관용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기의 권력유지 수단으로서 여러나라에서 무자비하게 사용되었다. 물론 그것은 야만성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야만성은 국가와 종파간의 실제적인 전쟁뿐만이 아니라 종교문제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나타났던 것이다. 카톨릭의 종교재판 행위, 독일에서 재세례파들에 의한 야만적인 박해 등 수많은 만행이 종교적이라는 미명아래 행해졌던 것이다. 물론 카트린느와 그 카톨릭 일파들도 예외는 아니다. 대체로 이즈음의 종교적 불관용 정책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십자군의 시기를 제외한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더 강화되었다.
종교적 불관용으로, 무자비한 폭력으로, 무참한 대량학살로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앙리 4세처럼 진정으로 평화로운 방법으로 신교를 인정하고 서로 공존하는 체제 내에서 서로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첫댓글 표지를제외한 내용을 2장에서 2장 반까지해서 써야하는건지. 아님 다단을 나누어 써도 되는건지.... 서론본론결론으로 나누어 써야 하는건지 정말 어디서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ㅠ.ㅠ 통합스터디가 언제 어디서 몇시에 열리죠?
1학년 통합스터디:화명동 부산 지역 대학 ,오후7시 ,강의실은 당일 공고...꼭 오셔서 학우님들 만나뵙고 중국어 강의도 들으세요.
가랑비에 옷젖는다고 가뭄에 홍수~~~만났습니더 감사감사 이제쬐메감이오네요?그래도울고싶네요 흑흑흑 다시한번 감사 그리고 수고하셨습니더
전에두 한번 읽었을땐 이해가 잘 안가더니, 영화를 보고나서 다시 이글을 보게되니깐..@.@ 흑 이글이 더 쉽잖어.. 영화ㅡ_ ㅡ; 162분이던가 ..! 이자벨아지니 이쁘단 생각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