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 박실마을(두 집에 한집 비율로 100여 집이 명당)
1.보성 양택명당의 순서
보성 양택명당으로 다섯 곳을 들고 그 순위를 아래와 같이 매긴다. ①도개(미력면 도개리), ②당촌(복내면 봉천리), ③박실(득량면 송곡리), ④강골(득량면 오봉리), ⑤예동(보성읍 옥암리)이다. 전부 답사해보니 박실이 으뜸이고 그 다음이 강골 당촌 도개 예동의 순서이었다. 양택명당의 등급을 매기는 기준은 발복의 등급뿐만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이웃들의 숫자와 수준을 고려해야 한다. 이것이 음택명당과 다른 점이다.
2. 박실마을과 애국의 역사
* 박실마을은 원래 다전마을을 포함하였고 풍수적으로는 하나의 중국내(中局內)에 있는 인접한 가신마을 기동마을을 합쳐서 한 개의 큰 마을을 이루고 있다. 나아가 역사적으로는 인접 파청마을과 공동운명체이었다.
* 정유재란때(1597.4)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은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함에 따라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었다. 장군은 즉시 진주 수곡면 원계마을 손경래 고택에서 출발하여 구례 곡성 벌교를 거쳐 보성에 도착하고는 일주일간 머무르면서 수군재건(水軍再建)에 진력하였다. 당시 원균이 1597.7 거제 칠천도 앞 칠천량해전에서 판옥선122척 수군 1만7천명을 동원하여 일본군 600척과 싸우다가 판옥선 12척만 살아남고 수군 1만4천명을 잃어서 지리멸열한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8.9(이하 음력) 고내마을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회수하면서 2박을 한 뒤 8.11 친분있는 박실마을 양산원(족보상으로 양산향, 영해군수이었는데 피난가고 부재중)집에 도착하였다. 부하장수들을 소집하고 정보를 수집하였으며 득량 일대에서 군량미를 보충하였다. 장군은 8.14 보성 열선루로 옮겨 업무를 보던 중 8.15 조정으로부터 육군에 편입하라는 명령(8.7자)을 받고 저 유명한 “신에게 아직 12척의 배가 있다”는 상소를 올렸다. 8.17 장흥을 거쳐 390키로를 행군한 끝에 해남에 도착하고 9.16일 13척으로 적선100여척을 침몰시킨 명랑대첩을 이루고 1598.11.18.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장군의 행군길에 백성들이 울면서 술을 바치는 바람에 장군이 거절하지 못하고 만취하는 일이 있었다. 호남행정당국은 수군재건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순례길을 단장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보성군수 방진의 외동딸에게 장가들어 무과시험을 준비하였고 충남 아산에 있는 가산은 방씨의 재산이었다.
* 박실마을의 백호방에 모의장군 최대성이 주둔한 군두(軍頭)라는 지역이 있고 장군이 1598.6 안치고개에서 전사하자 군두에 충절사를 건립하였다. 최장군은 보성 겸백면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정이 되어 임란때 이순신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보성에서 이순신장군을 다시 만났다. 최장군이 명랑해전에 참가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아들과 가노까지 동원하여 수천명의 의병을 모아 20여 곳에서 전공을 세우고 1598.6 박실에서 멀지 않는 안치(雁峙, 기러기고개, 그럭재)에서 전사했다. 난중일기에 행군중에 왜적이 나타났다고 헛소문을 퍼뜨린 자를 처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왜군은 9월초쯤 보성일원에 출몰하였다고 추측된다. 왜군은 임란때에는 해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호남지역을 장악하지 못했고 정유재란때에는 소규모부대를 보내어 노략질을 하는 바람에 농토가 피폐해 졌다. 안치전투 60년 뒤에 일이승이 안치고개를 넘어면서 비안상천형의 결록을 지었다.
* 항일 의병장으로 보성 출신 안규홍(1911년 대구교도소에서 사형)과 부장 김도규(1885~1967)는 1908년 파청 진산 원봉에서 승전하였는데 그들의 첫 전투지가 박실마을의 청룡등인 파청이었고 김도규의병장기적비가 고개마루에 있다.
3. 박실 마을의 풍수
* 박실마을은 다전마을과 함께 같은 小局내에 있고 가신 기동마을과는 같은 中局에 있으며 이웃에 있는 파청마을 또한 좋은 양택이다. 현지 유지들은 2005년 박실마을사 편찬위원회를 결성하여 자료를 모우고 있다(지금 쯤 책을 발간하였는지 모르겠다.)
* 중국---마을사편찬위는 비조나방형, 와우형, 어망형이란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다섯 개의 자연부락이 모두 명당이므로 다섯 그루의 매화나무에 꽃이 피어 있는 형상이다. 옛날 다섯그루 매화가 있었다는 연유로 마을 연못가에 오매정이 있다.
* 주산---덕암산 삼봉이 풍부한 삶을 보장한다.
* 조안산---오봉산 책상바위가 문과벼슬을 보장한다. 강골마을도 이바위를 안산으로 한다. 아래 사진이 2023년 8억원에 매물로 나온 집이다.
* 물이 좋고 넓은 들이 있고 기상이 청정하다. 거기에 애국의 역사가 있으니 명당이 아닐 수 없다. 다전마을에는 430년된 다(茶)나무가 있고 이순신장군이 다맛이 좋다고 애용하였다고 한다.
* 제주양씨와 진원박씨가 주류이고 한때는 2백여호가 살았다고 한다. 그중에서 1백여호는 명당이다. 박실마을에는 60여호의 주택이 그려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명당마을을 자랑하고 빈집이 되어도 팔지 않는다고 한다.
* 고관과 거부는 없으나 알찬 인물은 많이 배출된다. 현대에 와서 행시2, 사시4, 교수10, 의사13, 관계(官界)13인이 배출되었다고 하고 마을 중앙에 만석지기 집(10년전에 주인이 바뀌었다는데 개방하지 않아 구경을 하지 못했다.)이 있다. 으뜸박실이란 표지석을 세울만 하다. (2024.3)
첫댓글 국세가 아주 포근하고 좋아보이네요
예, 으뜸 마을 !! 경칩이 다가오니 얼굴을 내밀군요. ㅎㅎ
@하남촌장 ^^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 _(*)_
모두들 안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