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임내용 | 권정생선생님은 1937년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66년부터 1982년까지 마을 교회 종지기로 살았다. 권정생선생님은 ‘리얼리즘적’ 글쓰기를 통해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한한 사랑으로 희망을 주고 고난 극복의 정신을 심어주어 아동문학계의 중요한 한 흐름을 선도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권정생선생님은 삶과 문학이 한 몸을 이룬 작가로 일제강점기, 해방 그리고 6.25전쟁 등을 두루 체험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이념으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왜곡된 역사인식과 시대의식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7년 05월 17일 지병이었던 결핵과 신부전증이 합병증으로 악화되어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에서 71세 나이로 사망했다.
[몽실언니]
가난과 전쟁으로 인한 암흙같은 세상에 소외된 우리들의 모습이 사실적이지만 고통과 비극이 맞물리며 처참하기까지한 비극적이고 슬픈 동화이며, 오래전(1990년)에 매스컴에 방영되어 눈물 쏙 빼며 시청했던 기억과 함께 읽어내려갔다.
몽실언니는 1947년 봄. 정몽실 7살 때부터 시작된다. 몽실언니는 1941년생이다. ‘가난에 장사 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밀양댁은 댓골 김주사댁의 부인으로 들어간다.
댓골에 김영득(1948년)태어나면서 몽실언니는 눈치를 보며 살아간다. 순덕이와 빨래터에 갔다가 오면서 살랑마을로 돌아가고 싶다는 속마음이 내비친다. 눈치 안보고 마음 편히 살고 싶은 몽실이의 마음이 헤아려진다. ‘없이 살아도 마음 편한게 짱이다.’ ‘ 겉보리 서말이면 처가살이를 면한다.’ 옛 말이 생각난다.
“몽실아, 애미가 잘못했구나. 하도 배고프고 어려워서 내가 잠시 생각을 잘못했단다. 부디 아버지한테 가서 건강하게 잘 자라라……” 밀양댁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몽실언니 까치바위골 앵두나무 집 할아버지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렇지 않아요. 빨갱이라고 아버지와 아들은 원수가 될 수 없어요. 나도 아버지가 빨갱이가 되어 집을 나갔다면 역시 떡 해 드리고 닭을 잡아 드릴가여요.” “내 말이 맞죠?” 몽실언니는 생각이 확실하고, 주관이 뚜렷하여 판단력이 있다.
몽실언니가 “다리가 다친건 대 팔자예요.” 라고 말하며 눈에 가득 괸 눈물이 뺨으로 주르르 흘렸다. 환경과 처해진 상황으로 일찍 철이 든 몽실이는 마음 씀씀이도 넉넉하다. 한참 응석 부릴 나이지만, 모든 것이 본인이 감수해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듯하다.
1950년 07월 17일 새어머니 북촌댁은 난남이(난리통에 태어나서 난남) 딸을 낳는다. 몸이 약한 북촌댁은 난남이 태어나고 3일후에 눈을 감는다. 초유, 젖도 못 먹은 난남이와 핏덩이를 두고 가는 엄마의 마음.. 근대동화를 읽으면서 엄마인 내가 무병장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끝임없이 들었다.
6.25전쟁이 나오니 [사과나무밭 달님]의 안강댁이 생각났다.
꿈에서조차 두 어머니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외면과 쓸쓸함만이 감도는 묘사는 앞으로 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며, 처해진 환경에서 혼자 꿋꿋하게 헤쳐나가야함을 암시 하는 듯해서 무서웠다.
(발췌)순덕이는 몽실이 없었던 그동안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너희 엄마 너를 보내고 나서 많이 울었다. 매일매일 운다고 했거든. 김씨하고 많이 싸우기도 했단다. 영득이 두고 몽실이 찾아간다고 집을 나서기도 했어. 김씨가 그때서야 손이야 발이야 빌어가지고 엄마를 붙잡았단다…….”“그랬었니? 우리 엄마가…….” “자기 자식 다리 병신 되도록 두들겨 팬 사람하고 어떻게 살 수 있겠니? 영득이만 아니었어도 엄만 너한테 갔을 거야.”
(발췌) 애원하는 듯 꾸짖듯이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누구라도, 누구라도 배고프면 화냥년도 되고, 양공주도 되는 거예요.”
(발췌) 어려움에 부딪치면 금방 쓰러져 버리는 나약한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더욱 강하게 일어서서 견뎌 나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몽실이는 아마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발췌) 몽실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한 번씩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인데, 꼭 벌을 받아 죽는다고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착한 사람도 죽는 건 마찬가지야. 새어머니는 너무너무 착했는데도 죽었어.’
(발췌) “엄마 원망 안 해. 사람은 각자가 자기의 인생이 있다고 했어.”
(발췌) 몽실은 기가 막혔다. 천 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내리면 이렇게 캄캄할까?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뜨거운 눈물이 볼을 적시는 것만 느낄 뿐이었다.
(발췌) 절름발이 아이가 밥을 얻으러 다닌다는 것을 아랫마을, 윗마을 그리고 온 장터 사람들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 절름발이 아이의 아버지는 군에 갔다 포로가 되어 도망쳐 왔고, 어머니는 옛날에 집을 나가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다는 것도 알려졌다. 조그맣고 예쁜 계집애는 배다른 동생으로 어미는 6.25때 굶어 죽었다는 것도, 몽실이 다리는 의붓아버지가 두들겨 패서 병신이 됐다는 것도 훤히 알고 있었다. 몽실은 보리가 누렇게 여물 때까지 구걸을 해다 난남이를 먹여 살렸다.
신발가게 최씨네 식모살이로 성인이 될 때까지 몽실언니가 살았다면 어찌되었을까?
부산에 독일 천주교인들이 세웠다는 자선병원에서 아버지 정씨는 진료를 기다리다 객사를 한다. 진료를 기다리다 앞줄에 있던 20살 배근수를 알게 되면서 서금년아주머니를 알게 되고, 난남이와 함께 부산 서금년아주머니낵에서 지내게 된다. 난남이는 부잣집에 양딸로 간다.
30년후 몽실언니는 두 자녀를 둔 꼽추와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산다. 몽실언니는 병든 난남이를 돌보며 강원도에 사는 영순(1950년 07월 20일)이, 우체부를 하는 영득의 안부를 챙기며 맞언니로써 부모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대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내와 강인함 속에서 동생들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잘 견디어 살아왔다. 6.25전쟁이라는 비극이 사랑받고 보호 받아야할 몽실언니와 같은 수 많은 어린이가 삶에 떠밀리어 온갖 고통을 당하며 어떻게든 살아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살아낸 몽실언니와 또 다른 수 많은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께 감사의 찬사를 보냅니다.
전쟁의 희생양, 시대적 아픔을 감동적으로 풀어가며 불편한 몸으로 어린 나이에 동생을 마치 자식처럼 품고 애지중지 돌보며 가난에 맞서 전쟁으로 인한 어두운 세상에 등불 같은 몽실언니에게 따뜻한 엄마처럼 안아 주고 싶다. 이철수 작가님의 목판화그림이 정겨웠고, 그림에서도 사실적인게 느껴졌다.
몽실언니는 한국전쟁 전후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이 겪었던 시련과 고통을 ‘몽실’을 통해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몽실언니는 자신을 절름발이로 만든 새 아버지 김싸의 자식들과 새어머니 북촌댁의 자식을 차별 없이 자기 친동생처럼 보살핀다. 그들을 위해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몽실은 오로지 책임감으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여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몽실언니는 가난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이웃과 세상을 감싸 안으면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아름답게 표현 되어있다.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보여주는 소설이다.
권정생선생님께서 최씨를 좋아하는 것 같다. 초등학교 최선생님 / 인민군 최금순 / 신발가게 최씨네 / 부산 거지빵자수 최인구 / 몽실언니에게 힘이 되어준 사람들이 최씨다.
몽실언니가 살아있으면 8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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