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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새로운 사상의 등장⑩⑪⑫[이덕일의 事思史]
이장희 추천 0 조회 12 14.05.23 16:1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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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인산일에 6·10 만세운동 주도한 고려공청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⑩ 2차 조선공산당

 

대일 항쟁기 때 조선공산당은 일본공산당과 함께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의 잘 정비된 고등경찰은 조산공산당이 본격적 활동을 개시하기도 전에 일제 검거로 무너뜨리곤 했다. 그러나 조공도 여기에 맞서 순종 인산일에 6·10만세 시위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했다.

 

 

1926년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 시위 장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1926년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 시위 장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과 서울의 주요 대학 학생들이 주도했다. [사진가 권태균]

 

 

신의주 사건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조선공산당(이하 조공)과 고려공산청년회(이하 고려공청)는 일경의 급습에 대거 붕괴되었다. 중앙집행위원 7명 가운데 김두전(金杜佺), 유진희(兪鎭熙), 정운해(鄭雲海)가 검거되었고, 고려공청 책임비서 박헌영도 체포되었다.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출국한 조동호를 제외하면 김재봉(金在鳳), 김찬(金燦), 주종건(朱鍾建) 세 명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코민테른 파견원으로 거처가 불분명했던 김재봉·김찬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원 검거’였다.

서울 돈의동 명월관 뒤 김미산(金美山)의 한옥에 은신해 있던 김재봉은 김찬·주종건과 후계당(黨)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세 사람은 간부 후보였던 강달영(姜達永), 홍남표(洪南杓), 김철수(金綴洙), 이봉수(李鳳洙), 이준태(李準泰) 등에게 후계당을 맡기기로 했다. 책임비서 김재봉은 조선일보 지방부장 홍덕유(洪悳裕)를 통해 조선일보 진주지국장 강달영(姜達永)을 만났다.

경남 진주·합천의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복역했던 강달영은 중앙에 그리 알려지지 않았기에 후계당 재건에 적임자였다. 민족주의자였다가 사회주의로 전향한 강달영은 1924년 4월 화요회 계열의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이기도 했다. 또한 동아일보 경제부장 이봉수(李鳳洙), 시대일보 업무국장 홍남표(洪南杓)와는 같은 언론계 인사로 안면이 있었고, 새로 고려공청 책임비서가 된 권오설과 이준태와는 같은 영남 출신에 노농총동맹 집행위원으로서 친분이 있었다. 김철수와 이봉수는 상해파였지만 분파적 견해를 내세우지 않아 김재봉 책임비서 시절처럼 극심한 내분이 없었다.

 

6·10만세시위를 주도한 권오설. 박헌영이 투옥된 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강달영은 조선일보 진주지국장 자리를 조공 경남 간부인 김재홍(金在泓)에게 넘겨주고 상경했다. 1926년 2월 경운동 29번지 구연흠(具然欽)의 집에서 회의를 개최해 책임비서 강달영, 비서부 차석 이준태, 조직부 이봉수·홍남표, 선전부 김철수로 구성된 후계당을 출범시켰다.

고려공청의 새로운 책임비서 권오설은 당 규칙에 의해 자동으로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전덕(全德)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러시아 공산당학교 출신의 김정관(金政琯)까지 모두 7명이 중앙집행위원이었다. 일경의 집중 추적을 받던 김재봉과 김찬은 해외 출국 기회를 엿보았다. 이준태가 일제 신문 조서에서 “자기들(김재봉·김찬)은 일시 조선을 떠날 뿐이고 해외에 나가서도 간부의 성질은 조금도 다름이 없으니 그때그때 적당히 지휘할 것(‘강달영 외 48인 조서’)”이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망명지에서 계속 조공을 지휘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재봉은 고급 담배가 다수 소비되는 것을 매음굴로 의심한 일경에 의해 12월 19일 체포되고 말았다. 상해 밀항에 성공한 김찬은 강달영에게 자신과 조동호·조봉암을 ‘중앙간부 해외부’라고 자칭하면서 ‘대내·대외의 중대한 문제는 언제라도 자신들과 협의해 처리해야 하며, 국제(코민테른)에 보내는 보고문 및 기타 중대한 교섭 같은 것도 전부 임시부(중앙간부 해외부)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달영은 조공 중앙집행위원회 황산(黃山:강달영)이란 가명으로 답장을 보내 조봉암을 중앙위원으로 인정할 수 없고 ‘우리가 대리일지라도 정원을 모두 정해 중앙의 실권을 잡고 있는 이상, 두 동지(김찬·조동호)는 중앙간부 직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중앙의 지도를 받아 일에 종사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레닌이 스위스로 망명해 볼셰비키당을 지도한 적은 있지만 강달영은 김찬 등을 조선의 레닌으로 대접할 생각은 없었다.

강달영이 후계당을 이끌 무렵인 1926년 4월 26일 마지막 황제 순종이 세상을 떠났다. 조공은 순종 인산일인 6월 10일에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일제는 대대적인 단속에 들어갔지만 비밀리에 후계진용을 갖춘 조공과 고려공청이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상해로 망명한 김찬은 직접 “곡복(哭服)하는 민중에게 격(檄)함. 창덕궁 주인의 서거에 제(際)하여”라는 격문 5000장을 이삿짐으로 가장해 만주 안동현을 거쳐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權五卨)에게 보냈다. 황제라는 표현 대신 ‘창덕궁 주인’이라고 쓴 것이 이채롭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은 고려공청 책임비서 권오설이었다. 그는 ‘6·10운동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공 학생부의 프랙션 조직인 ‘조선학생과학연구회’를 통해 시위를 준비했다. 권오설은 천도교 청년동맹 간부이자 조공 야체이카 책임자였던 박래원(朴來源)에게 원고 5종과 200원을 주면서 인쇄를 부탁했다. 박래원은 민창식(閔昌植)과 명치정(明治町:중구) 앵정(櫻井)상점에서 인쇄기 2대를 구매해 약 5만 장의 격문을 인쇄했는데, 서울은 물론 지방에도 배포해 3·1운동 때처럼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상해의 김단야가 보내기로 한 거사자금이 도착하지 않으면서 차질이 생겼다. 그래서 격문을 일단 천도교 잡지사인 개벽사 구내에 있는 손재기(孫在基)의 집에 숨겨두었는데 뜻밖의 사건으로 시위 계획이 탄로났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중국 화폐 위조사건이 발생한 뒤 오사카 경찰서에서 한국인 연루자 세 명의 체포를 종로경찰서에 요청한 것이 계기였다. 이들이 체포될 때 위조지폐와 격문 한 장도 압수되었다.

격문의 출처를 탐색한 결과 권오설이 평북 선천에서 금광을 경영하는 안(安)씨에게 주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단야로부터 자금이 오지 않자 권오설은 안씨에게 5000원의 자금 지원을 부탁하면서 격문 서너 장을 준 것이 발각된 것이라고 동아일보(1926. 6. 19)는 보도하고 있다. 격문을 인쇄했던 박래원은 손재기 부인과 친했던 개벽사 제본부 여직공이 격문이 담긴 상자를 우연히 발견하고 1~2장을 가지고 간 것이 지폐 위조사건을 수사 중이던 일경에 발각된 것이라고 달리 증언했다.

일경은 천도교 계통의 개벽사 수색 와중에 손재기 집안에 보관 중이던 격문 상자를 발견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것이 6월 4일께였는데 조공의 많은 간부가 체포되거나 수배당했다.

6월 10일 인산일 하루 전 조선총독부는 용산 조선군사령부 소속의 보병·기병·포병 5000여 명에게 시내를 행진하게 하고 3·1운동 발생지였던 파고다공원에 주둔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순종의 시신을 실은 대여(大輿)는 6월 10일 오전 8시에 돈화문을 떠났다. 기마경찰대가 애도행렬을 주시하는 가운데 인산 행렬이 황금정(黃金町:중구 을지로)까지 늘어섰다. 순종의 후사였던 이왕(李王:영왕)과 이강(李堈:의왕)이 탄 마차가 대여 뒤를 따르는 와 중에 8시40분쯤 행렬이 송현동(松峴洞)에 이르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학생 수십 명이 격문을 뿌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격문이 이왕의 마차 부근까지 휘날리는 가운데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가세하고 기마경찰들이 달려들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9시쯤에 종로 3정목 동양루(東洋樓) 앞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교)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격문을 뿌렸고, 9시20분쯤에는 황금정 부근의 도립 사범학교 학생들도 가세했다. 인산 행렬이 동대문을 지나던 오후 1시쯤에는 동대문 부인병원(婦人病院) 앞에서 양복을 입은 청년 한 명이 깃발을 들고 호각을 불며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자 군중이 대거 가담했고 장사동(長沙洞) 부근에서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뿌렸다. 3시쯤에는 동묘(東廟) 앞에서 중동(中東)학교 학생들이 격문을 뿌리는 등 인산 행렬이 지나는 곳곳마다 만세시위가 발생했고 일경과 기마경찰이 달려들어 아수라장을 이뤘다.

시위는 고려공청 산하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소속 대학생들과 중앙고보·중동학교 학생들이 중심인 통동계(通洞系)에서 주도했다. 사건 당일 종로경찰서에 105명, 동대문서에 50여 명, 본정(本町)서에 10여 명 등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순종 인산일에 발생한 6·10만세시위사건이다. 일경은 김찬이 상해에서 화물로 위장해 보낸 격문의 교환증이 강달영을 거쳐 권오설에게 들어간 사실을 확인하고 강달영 체포에 전력을 기울였다.

드디어 7월 17일 명치정(중구)에서 바나나 행상으로 변장한 강달영을 체포했다. 일제의 ‘제2차 조공당 검거(朝共黨檢擧)’라는 사료에 따르면 강달영이 체포 후 일절 자백을 거부한 채 몇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고 전한다. 당시 일제 고등계의 심문은 상해 영사관 경찰에게 고문 받던 병인의용대원 이영전(李英全:본명 이덕삼)이 숨진 데서 알 수 있듯이 혹독하기로 유명했다. 나중에 자신이 책임비서라고 자백한 강달영은 투옥 후 고문후유증으로 한때 정신이상이 발생했다.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권오설도 1930년 고문 후유증인 폐렴으로 옥사했다. 전국적으로 100여 명의 관련자가 체포되면서 조공과 고려공청은 또다시 붕괴되었다.

 

 

 

 

조공, 악조건 속 당 재건 … 일경 대검거로 또 붕괴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⑪잇따른 수난

 

대일 항쟁기에 조선공산당(조공)의 역사는 조선총독부 고등계 형사들과의 숨바꼭질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운동가와 ‘주의자’를 검거·고문하는 총독부 고등계의 능력과 실력은 세계 제일이었다. 그러나 조공은 이런 일경의 대대적인 검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당을 재건했다.

 

 

제3차 조선공산당은 ML당으로 불렸다. ‘마르크스·레닌당’이란 뜻이다. 1928년 초반의 대검거로 인해 제3차 조선공산당도 또 무너진다. [사진가 권태균]

 

일본 오사카에서 발생한 중국 위조지폐 사건에 대한 불똥이 조공으로 번지면서 1926년 6월 4일께부터 조공과 고려공산청년회(고려공청)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조공과 고려공청은 6·10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조선총독부 고등계가 눈에 불을 켜고 관련자들 체포에 광분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해 8월까지 무려 130여 명에 달하는 관련자가 체포되었다.

겨우 검거를 피한 제2차 조공 선전부 책임자 김철수(金綴洙)는 1926년 9월 3일 오후 9시쯤 서울 동소문(東小門:혜화문) 부근의 삼림 속에서 중앙위원 후보 원우관(元友觀)·신동호(申東浩)와 오희선(吳羲善)을 만났다. 한밤중에 동소문 삼림 속에서 조공 재건회의가 열린 것이었다. 이후 강달영의 거처였던 서울 인사동 42번지 집과 동소문 부근 산중에서 10여 차례 회합한 끝에 조공을 재건했다. 이것이 강달영의 뒤를 이은 김철수 책임비서 시대의 제3차 조공인데 조직부 오희선, 선전부 원우관, 무임소 신동호 등을 선임했다.

정상적인 당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김철수가 훗날 일제의 신문조서에서 ‘10회에 걸친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결의는 당원 모집 및 서울계(서울청년회) 동지의 입당 권유였다’고 전하는 것처럼 당원 숫자를 늘리고 서울청년회를 끌어들여 명실상부한 국내 사회주의 세력의 정당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김사국의 묘비 일부. 원래 서울 망우리 묘지에 있던 것이다. 김사국의 묘는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다.

신의주 사건과 6·10 만세시위는 제1차, 제2차 조공을 주도했던 화요회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원래 상해파였던 김철수는 그 공백을 서울청년회로 메우려고 했다. 코민테른 파견원들이 주축이었던 화요회는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국내 운동기반이 서울청년회보다 약하다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던 화요회는 몇 차례에 걸쳐 서울청년회와 회합해 통합조건을 논의했다.

1925년 11~12월의 제1차 회합에서 화요회는 서울청년회 리더 김사국을 배제시킬 것을 요구했다. 서울청년회의 영수를 배제하라는 요구를 서울청년회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양파(兩派)의 제2차 회합은 1926년 1~2월에 있었는데 화요회는 제2차 조공의 중앙집행위원 김철수·이봉수가 대표였고 서울청년회는 이영(李英)·박형병(朴衡秉)·이정윤(李廷允)이 대표로 나섰다.

화요회는 김사국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당의 중앙간부 숫자에서도 화요회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김사국은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요양(療養)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울청년회는 화요회의 요구사항을 수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요회는 이를 거부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서울청년회 계열의 합법적 사상단체인 전진회에서 1926년 2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발기를 계획했기 때문이라고 내세웠지만 서울청년회에 주도권을 빼앗길까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자 1926년 5월 서울청년회에서 제3차 회합을 제의했다. 서울파의 이영·이정윤과 화요회의 이준태·김철수가 회합을 했는데, 서울청년회에서 김사국 배제와 당 간부를 화요회가 더 많이 차지해도 좋다고 양보했지만 화요회는 다시 “중앙 간부는 화요회에서 특정하는 인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서울청년회 출신 간부도 화요회에서 선임하겠다는 것으로서 서울청년회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었다. 꼬르뷰로 국내부 출신의 이준태는 “우리 당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은 코민테른 한국지부인 만큼 1대1 합당이란 있을 수 없다”면서 “서울파는 개별적인 입당 절차를 밟고 당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서울파의 실체 자체를 부인했다.

그러면서 서울청년회는 당 대 당 통합파와 개별 입당파로 나눠졌다. 코민테른의 권위에 복종하려는 인물들이 개별 입당파였다. 강달영이 1926년 4월 상해의 김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울청년회 김사국파에 대한 분해운동이 주효해서 개인 입당자가 속출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화요회는 서울청년회를 해체시키거나 약화시켜 주도권을 계속 장악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청년회의 리더 김사국이 1926년 5월 8일 병사하면서 개별 입당파가 크게 증가했다. 그 직후 6·10 만세시위가 터져서 화요회가 대거 검거되면서 김철수가 책임비서가 된 것이다.

김철수는 ‘나를 일부에서는 상해파라고도 하고, 화요회라고도 하지만 나 자신은 파벌 관념이 없었다’라면서 서울청년회 계열 통합에 나섰다. 당 대 당 통합을 반대했던 화요회 출신의 조공 비서부 차석 이준태는 이미 검거돼 투옥 중이었다. 이준태는 고문 피해자들과 연명으로 고등계 형사들을 고문 혐의로 경성지법 검사국에 고소할 정도로 투쟁성은 있었지만 화요회라는 파당적 시각이 너무 강했다. 김철수는 이동휘의 레닌 자금을 국내의 최팔용에게 전달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와세다대 출신의 김철수는 1921년 상해에서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했고, 1922년 9월에는 이동휘의 심복 김립(金立)에게 1만원을 받아서 서울 영락정 욱(旭)여관에서 최팔용에게 전달했었다.

김철수는 자신의 임무는 후계 당 체제 건설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철수는 “우리는 조만간 도망하지 않으면 안 될 몸이므로 후사를 맡길 수 있는 인물을 한 사람 선택해서 중앙간부에 보충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서울청년회도 화요회도 아닌 무소속을 물색했다. 그가 바로 대한제국 시의(侍醫) 안왕거(安往居)의 아들이자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의 의사 안광천(安光泉)이었다. 1926년 9월 20일 입당한 안광천이 3개월 만에 선전부 책임자가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었다.

그리고 안광천이 소개한 양명(梁明)도 중앙위원으로 선임됐다. 김철수 책임비서 시대는 1926년 9월부터 11월까지 불과 3개월 정도에 그치는데, 김철수는 1926년 12월 6일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제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선임한 것이다. 선전부장 김준연(金俊淵), 선전부원 한위건(韓偉健), 조직부원 하필원(河弼源)·권태석(權泰錫) 등의 진용이었다.
제2차 당 대회에서 조공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을 한다. 민족단일당 결성을 결의한 것이다. 이것이 이듬해 사회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통일전선체인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된다. 이런 작업을 마친 김철수는 1926년 12월 중순 국내를 몰래 빠져나가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조공 재건상황을 코민테른에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모스크바로 갈 생각이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의 ‘선봉(先鋒)’사에서 상해로부터 온 조공 ‘중앙간부 해외부’의 김찬을 만났다.

김찬은 김철수가 재건한 조공은 물론 제2차 당 대회 자체를 부인했다. 자신들로 구성된 해외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재건된 당 조직은 무효이자 규율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김찬은 상해로 가서 극동부 간부의 지시를 받자고 주장했으나 김철수가 거절하고 모스크바로 떠나자 모스크바까지 쫓아와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상해파의 윤자영(尹滋瑛)과 서울청년회의 김영만(金榮萬)도 모스크바로 와서 김철수를 도왔다.

이때 코민테른은 김철수가 재건한 조공을 승인하는 한편 11개 조의 지령을 내려 김찬·조봉암 등으로 구성된 해외부 해체를 지시했다. 11개 조는 ‘①조선운동은 민족혁명 단일전선이 필요한데 노동자, 지식계급, 소부르주아, 일부 부르주아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 당대회에서 결정한 민족단일당 조직을 지지한 것이다. 코민테른은 또 ‘③조선의 현상에서는 단일민족당을 만들려고 하면 단일공산당이 있어야 한다, ④공산주의자 등이 민족단체에 들어가 활동할 때는 공산주의자임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그 단체 안에 있는 노동자·농민을 토대로 하여 전체 단체를 좌경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⑧아직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은 공산주의자들은 유일의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의 기치 아래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조선공산당도 전체 공산주의자를 망라하는 데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해외에 있는 단체 및 개인 등이 조선운동에 접근해서 지도적 간섭을 행하기 때문에 당 파쟁을 야기시킨다. 국제당으로서는 앞으로 지도적 간섭을 행하지 말 것을 엄명하며 중앙간부는 해외부를 철폐할 것을 명한다’고 지시했다. 코민테른의 지지를 얻어 당권을 장악하려던 해외부는 오히려 코민테른에 의해 해체되고 말았다.

안광천은 1926년 12월 6일부터 1927년 9월 20일께까지 10개월 미만의 짧은 기간 동안 책임비서로 있으면서 당 조직을 확장시키고 특히 민족단일당인 신간회를 발족하고, 해외부를 확대했다. 만주총국과 상해부, 일본부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일경이 조공 재건을 눈치채자 1927년 9월 20일께 책임비서를 김준연(金俊淵)으로 교체했다가 3개월 만인 1927년 11월께 다시 김세연(金世淵:본명 김성현)으로 교체했다. 이후 1927년 말부터 김철수 등이 국내로 밀입국했다는 첩보가 입수되다가 이듬해 2월 3일 동아일보에 실린 ‘ML당을 중심으로 종로서(鐘路署) 돌연 검거에 착수’라는 보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검거가 다시 시작되면서 조공은 또 붕괴되었다.

 

 

 

 

‘민족 단일당’ 신간회, 열 달 새 지회 100개로 勢 확장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⑫조선공산당의 해체

 

화요회에서 조직했던 조선공산당(조공)은 김철수 책임비서 시절부터 서울청년회 계열이 대거 입당했다. 제4차 조공에서는 노동자 출신의 서울청년회 계열 차금봉이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러나 일경의 대검거와 식민지 상황에 맞지 않는 코민테른의 재조직 지시로 조공은 해체되고 만다.

 

 

 

 

안동예안지구 신간회 지회 결성을 기념하는 사진이다. [사진가 권태균]

 

 

서울청년회의 비밀당 고려공산동맹과 화요회의 비밀당 조공은 표면적으로 민족주의 세력과의 민족협동전선, 즉 민족 단일당 결성에 나섰다.
먼저 시작한 것은 서울청년회여서 1926년 7월 조선물산장려회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를 발족했다. 조선민흥회는 “정치, 경제, 산업 등에서 조선민족의 공통의 이익을 목적으로··· 각 계급을 망라한 조선민족의 단일전선을 조직한다”(동아일보 1926년 7월 10일)고 선언했다. 조선민흥회는 발기 취지에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자와 혁명적 민족주의자가 서로 제휴하여 공동전선을 만드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혁명적 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란 일본의 지배하에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민족 개량주의자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1926년 5월 서울청년회의 리더 김사국이 병사하고, 1926년 9월 조공 책임비서가 된 상해파 출신의 김철수가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공 입당을 독려하면서 서울청년회와 화요회의 대립 구도는 약해졌다. 코민테른은 김철수가 재건한 조공을 승인하면서 내린 11개조 지령문에서 가장 먼저 ‘조선은 민족혁명 단일전선이 필요한데 노동자, 지식계급, 소부르주아, 일부 부르주아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시했기 때문에 조공도 민족 단일당 결성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공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신간회(新幹會) 결정을 추진하는데, 1927년 1월 19일 발표한 신간회 3개 강령은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절 부인함’이었다. ‘기회주의’란 물론 자치를 주장하는 민족 개량주의를 뜻했다.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1924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5회에 걸쳐 ‘민족적 경륜’이란 사설을 썼는데 “조선 내에서 허(許)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의 식민 지배 내에서 자치권을 획득하자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동아일보의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그리고 천도교 신파의 최린(崔麟) 같은 민족 개량주의자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要史)는 이에 대해 “사회주의 운동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 및 동경 유학 조선인 일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어 마침내 (동아일보의: 괄호는 인용자의 설명) 일부 간부의 경질까지도 불가피하게 되었다”고 쓸 정도였다. 고등경찰요사는 ‘사회주의자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서로 화합하여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형성해서 각지에 성토문을 발송하는 등 맹렬한 공격을 가했다’고 전한다. 그 여파로 이광수는 동아일보를 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 신간회원 검거를 보도한 중외일보. 신간회가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자 일제는 대검거로 맞섰다. 2 코민테른 대회 광경. 1928년 코민테른이 계급 대 계급 전술을 채택하면서 국내 좌우 합작운동도 위기를 맞았다.

 

 

이광수의 사설 ‘민족적 경륜’은 거꾸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결집시켰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가 공표되자 조선민흥회도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고 신간회와 합동을 서둘렀다.

신간회는 조선민흥회의 합동 조건을 모두 승인해서 1927년 2월 15일 종로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200여 명의 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명실상부한 민족 단일당인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회장은 민족주의자 이상재(李商在), 부회장은 사회주의자 홍명희(洪命憙)였고, 각 부서도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반분했다. 신간회는 창립 10개월 만인 1927년 12월 27일 지회 100개 돌파 기념식을 거행할 정도로 급격히 확장되었다.

일제의 고등경찰요사는 “본회(本會: 신간회)는 조선공산당의 지지가 있었고 각지 사상단체에서도 극력 지원했다”고 분석했다. 신간회의 배후에 조공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1928년 초 전국 지회 총수 143개, 회원 2만여 명에 달하게 되자 이에 놀란 일제는 1928년 2월의 신간회 정기대회를 금지시키는 한편 1928년 2월 2일부터 ML당에 대한 대검거에 나섰다. ML당은 김철수→안광천→김준연→김세연 책임비서로 이어지는 제3차 조공을 뜻하는 것이다. 제3차 조공은 1926년 9월부터 1928년 2월까지 1년5개월에 불과하지만 책임비서가 자주 교체된 것은 일경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때의 대검거로 30여 명이 체포되면서 제3차 조공은 또 붕괴되었다.

그런데 대검거가 진행되는 와중인 1928년 2월 27일 오후 10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阿峴里: 현 마포구 아현동) 537번지 김병환(金炳煥) 집에서 조공 제3차 당 대회가 개최됐다. 이 회의에서 조공 당책을 통과시키고, 코민테른 결정서를 가결했다. 이는 이정윤이 1928년 1월 상해의 코민테른 기관에서 받아온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 결정서’였다.

코민테른은 이 문건을 통해 “조선의 전투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임무는 완전한 당의 실현이며, 상존하는 모든 종파 및 그룹의 즉각적인 해체이다. 조선공산당은 편협하게도 지식계급과 학생의 결합체로 되어 있다··· 새 중앙집행위원회와 그 밖의 당 지도기관에 노동자 출신을 더 많이 배치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조공은 이 대회에서 29개 항에 달하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에 보고할 국내 정세’란 논강(論綱)을 채택했다. “유럽과 미국 특히 일본 자본주의의 침입은 조선 재래사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였다. 서양과 같은 근대적 대공업은 당초부터 발달하지 않았기에 조선에는 강대한 부르주아지도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광대한 집단도 없다”면서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낱낱이 보고했다. 예컨대 조선 내 일본인 수는 전체 농민 수의 0.028%에 불과하지만 소유 토지는 56.6%라는 내용 등이다.

보고서의 내용은 이어진다. “조선의 객관적 정세는 혁명적이다. 그러나 직접혁명의 조건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시민적 공화국을 건설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투쟁은 노동대중의 민주적 집권자를 갖는 인민공화국을 위해서 행해져야 한다··· 민족해방운동은 이른바 자치운동을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또한 사업 보고에서는 “홍명희를 수반으로, 권태석·송내호(宋乃浩) 두 사람을 보조자로 신간회 안에 프락치를 설치하고 신간회로 하여금 당 정책을 구현하도록 노력 중”이라고 말해서 신간회를 배후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또한 검거된 간부 대신 새로운 중앙위원을 선임할 전형위원으로 정백(鄭栢)·이정윤(李廷允)·이경호(李慶浩)를 선임했는데, 정백과 이정윤은 모두 서울청년회 계열이었다.

그런데 당 대회가 끝난 28일 당일 정백·이정윤 두 전형위원이 종로서에 체포되었을 만큼 일제 수사망은 바싹 좁혀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위원은 3월 10일 석방되는 윤택근(尹澤根)에게 새 중앙위원 명단을 주어 전형위원 이경호에게 건네도록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안광천, 차금봉(車今奉), 김한경, 한명찬, 김재명, 이성태, 양명, 한해, 윤택근 등이 새 간부로 선임됐다. 책임비서는 차금봉이었다.

차금봉은 용산 기관차화부 견습공 출신으로 서울청년회 계열의 조선노동공제회를 주도했고, 또 1923년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정재달(鄭在達)을 동소문 근방의 산중에서 구타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당 지도기관에 노동자 출신을 더 많이 배치해야 한다’는 코민테른 결정서가 영향을 미쳐서 최초로 노동자 출신 책임비서가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8년 6월 중순 이성태가 체포되자 당 조직이 드러난 것으로 판단한 간부들은 6월 20일 공덕리(孔德里: 현 마포구 공덕동) 뒷산에서 회합해 일시 해산을 결정해야 할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다. 아니나 다를까 1928년 7월 5일부터 다시 대검거가 시작돼 10월 5일까지 모두 175명이 체포되었다. 일제는 중앙위원 한명찬의 압수품 중에서 유독 사상 색채가 없는 ‘재계연구’(財界硏究: 1928년 4월 발행)란 잡지와 명반(明礬)을 발견하고 불에 쪼여 검사한 결과 명반으로 쓴 조공 세칙 및 정치 논강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143명이 검사국에 송치되면서 노동자 출신이 책임비서였던 제4차 조공도 붕괴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의 공산당원은 대부분 지식계급 및 학생”이라면서 조공의 승인을 취소하고 재조직을 요구하는 이른바 ‘12월 테제’를 발표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간회도 새 중앙집행위원장 김병로(金炳魯) 집행부의 온건 노선에 불만을 품은 지회들의 반발이 잇따르다가 1931년 5월 대회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해소 요구로 해체되고 말았다. 이는 1928년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극좌 정책에 따라 코민테른이 계급 대(對) 계급 전술로 전환하면서 국내 좌우 합작운동 지속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한국인의 시각이 아니라 코민테른의 시각으로 한국을 바라봐야 했던 식민지 사회주의자들의 한계였다. (‘새로운 사상의 등장’ 끝. 다음 호부터는 ‘아나키즘이 도래하다’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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