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대국(上海對局)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로소이다.’ 중국 청년의 정중한 초대에 내가 쾌재를 부르며 떠올린 고사성어다.
‘시간이 있으면 우리 집에 가서 한 수 하자.(你有空的話, 到我家一起去下圍棋, 好嗎?)’는 식으로 청했을 것이다. ‘몇 시까지 시간을 낼 수 있느냐, 동료들과의 약속은 어찌 되느냐, 숙소는 여기서 먼가?’ 꼼꼼히 챙겨주는 예절도 밉지가 않다. ‘좋아 좋아, 신경 쓰지 말아요.(好好, 沒關係.)’쯤으로 화답했을 것이다.
봄날처럼 화창한 상해의 하늘 아래서 한중 바둑 애호가 한 쌍은 서로 나름대로 신명이 났다.
중국말을 배운답시고 합숙에 아침 구보까지 해가며 용을 쓰기 10주. 어학 연수과정의 끝머리에 으레 보너스로 주어지는 중화인민공화국 현지 연수 7일 기간 중의 일이었다. ‘예산 절감과 실용 회화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4인 1조의 배낭여행 현지연수란다. 주마간화(走馬看花)식으로 배낭을 맨 채 대륙을 누비기 6일째, 단체행동이 따분해질 즈음 우리 조는 아예 개인행동을 해보자는 반칙에 합의했다. 튼튼한 두 다리를 밑천 삼아 목적 없이 떠돌기를 좋아하는 나 역시 배회 체질이다.
97년 11월 5일 오후 1시경 나는 상해의 넘치는 인파에 혼자 몸을 맡기게 된 것이다. 약간의 긴장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묽어지기 마련이다. 전형적인 쾌청의 중국날씨, 우리네와 비슷한 풍물……. 땟국이 흐르는 인민들의 생김새나 엉망진창인 거리 질서는 차라리 안도감을 배가시키는 요소였다.
남경로(南京路)를 동서로 가르는 인민공원은 상해의 심장부다. 그 인민공원에 인민폐 1원(元, 우리 돈 120원)을 내고 입장한 것은 그날 2시쯤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긴장감에 대신해서 본전 생각―대구시민의 세금인 여행경비, 중국어 실습이란 공적 목표가 가슴을 짓누른다. 이곳저곳 기웃거려 보지만 막상 혼자서 말 붙이기가 영 만만찮다.
그러다가 어떤 흡인력에 이끌려서인지 벤치에 혼자 앉아 열심히 책을 보는 한 젊은 친구 곁에 앉게 되었다. 얼른 보니 바둑 책이었고 우리의 세계적인 자랑 이창호, 유창혁의 사진이 보이지 않는가. 그제야 입이 떨어졌다. 입이 떨어질 정도가 아니라 내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인정 신문 비슷한 신상 얘기는 기본이고 바둑 얘기까지 양념으로 일대일 대화가 생광스럽다. 그러다가 내가 한국의 바둑 5단이라니 이 친구 깜짝 반색을 한다. 당장 한 수 하잔다. 공인으로서의 내 고민을 일거에 해소시킨 중국 원어민의 초청[請客]은 실로 우연이었던 셈이다.
29세. 왕(王)군의 미목이 수려한 것은 소주(蘇州) 인근 의정(儀征)시 태생인 탓이리라. 급한 김에 내가 택시를 타자니까 택시 값은 20원이고 버스 값은 둘이서 2원밖에 안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덕분에 상해 인민이 타는 버스를 타게 되었고, 시 동북방의 사천대로(四川大路) 어딘가에 내려 바둑판을 산 후 허름한 뒷골목[胡同]을 한참이나 걸어갔다. 고색창연한 잿빛의 건물들, 펄럭이는 빨래, 잡다한 먹거리 가게, 저변층의 살아가는 몸짓들, 왕군과 얘기하느라 생소한 풍물을 살피느라 나는 정신이 없다.
4시경 도착한 곳은 그의 상해 거소인 금북초대소(錦北招待所). 초대소는 중국인만이 묵을 수 있는 값싼 숙박시설로서 우리의 옛날 여인숙 수준이랄까. 방 한 칸에 침대, 빽빽거리는 흑백 TV, 낡은 탁자 하나가 전부였다. 생애 최초의 대고수(對高手) 대국에 흥분된 주인과 말 배운다는 욕구에 들뜬 동방의 손님, 우리는 이심전심 어울리는 짝이었다.
손님 대접은 냉수 한 컵, 더 나올 것도 없었고, 재떨이용 세숫대야에 한중 양국의 담배꽁초만 수북이 쌓여간다. 아마 5단, 20년 경력의 나와 처음으로 바둑판을 산 중국청년의 대국은 일단 맞바둑으로 시작된다. 금방 결딴을 내고 4점, 5점 아니 9점까지 접게 되면 싱거워지고, 그러면 나가서 술이나 마실까. 내 나름의 계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바둑책을 엄청 많이 보았던지 기초가 매우 탄탄하였고, 끈질기고 진지한 대국태도는 무려 2시간 이상 나를 긴장시킨다. 가까스로 한 판을 이기고 난 후 ‘중국인’의 이미지를 떠올렸다면 지나친 비약이 될까.
승부의 고비 때마다 홍조를 띠어 가는 안색, 이따금 하오의 정적을 깨뜨리는 거친 숨소리, 왕군은 전력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에 비해 나는 이국 땅에서의 별난 무대 장면과 신기한 해후를 느긋하게 즐기려는 심사가 앞서니 탈이다. 창 밖의 창공에 눈길을 준 채 이 나라 수천 년의 역사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상대를 표 안 나게 훔쳐보며 갖가지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남경(南京)이 지척이니 기성(棋聖) 오청원의 막수호(莫愁湖)가 가슴에 와 닿는데, 기도(棋道)의 달인이 하필 막수(莫愁), 슬퍼하지 말라니……. 이런저런 부질없는 여유가 뜻밖의 고전을 자초한 것이리라. 하여튼 서로가 주어진 시공에서 최선을 다한 한 판이었다.
이윽고 안쓰러울 정도의 긴 한숨과 함께 왕군은 흑돌을 거둔다. 한 수 더 요청하는 그에게 나는 조심스레 복기(復棋)를 제의한다. 고개를 갸웃거리기에 한자를 써주니 금방 알아듣고 더욱 반색이다. 임시 사부(師傅)역의 바둑 강평이 시작되면서, 나는 중국어를 배운 이후 최대의 밀도 있는 자습을 하게 된다. 다소곳하게 경청하면서도 문제되는 국면에서는 의견도 제시하는 품이 책을 어지간히 읽었다는 증좌다. 복기가 끝나자 저녁 8시경, 손님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는 말이 퍽 솔깃하기도 하였으나, 왠지 내가 먼저 한국 음식을 사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이번에는 내 고집을 관철시켰다. 예절[禮貌]과 체면[面子]은 한국인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달까. 저녁 시간, 왕군은 한국의 바둑 정보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에 대한 폭 넓은 지식으로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만들었다.
상해 인근 한 작은 시의 공사(公司)에 근무하는 평범한 직원, 전시대학(電視大學, 우리의 방송통신대)에서 물자관리를 전공했을 뿐인 29세 왕군. 나와의 건너기 어려운 여러 가지 간격에도 불구하고 바둑 한 판을 통해 보여준 당당하면서도 예절 바른 풍모와 진지한 대국 태도는 쉽사리 잊혀 질 것 같지 않다. 중국인의 가슴을 여는 열쇠로 흔히 꽌시[關係]를 꼽는다지만 그와의 상해 대국은 나로서는 소중한 꽌시가 아닐까 싶다.
귀국 후 넉 달이 지났지만 나는 당시 왕군에게 약속한 중국어 편지를 아직까지 쓰지 못하고 있다. 작문의 어려움이 부담스런 것도 사실이지만, 돌이켜보아 외환위기의 먹구름이 시시각각 조국의 하늘을 덮어오던 그 시점, 나는 바다 건너에서 팔자 좋은 신선놀음을 하고 있었다는 자괴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진국 한국을 찬양하고 목표로 삼던 그에게 편지 쓸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언론의 경제 관련 아라비아 숫자에 둔감해질 때까지 내 편지는 지연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쯤은 왕군의 바둑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나와 좋은 승부를 하게 될 것으로 믿는다.
-1998. 4.
첫댓글 제가 상하이에 있을 때 오셨네요.
그 때 뵈었다면 白酒 한잔 올렸을텐데요.
바둑과 축구는 14억의 중국인이
한국 사람에게 열등감 느끼는 종목입니다.
당시 일주일만에 북경,서안,계림,상해를 후딱 돌았습니다.
북경에서는 술 마시고 넘어진 기억(어글리 코리안 사건)밖에 없고, 기록이라곤 이게 전부입니다.
실마리를 제공한 바둑에 감사해야 할까요.ㅎㅎ
좋아하는 바둑을 매개로 중국어회화를 자습하면서
젊은이와 좋은 시간을 가졌었군요...
아마5단 고수와의 지도대국이 그 친구에게 많은 도움이 됐을 것 같습니다.
그 젊은이도 이제 50줄이 넘었을텐데...어떠할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후 결혼한 후 아기 포함 3인 가족사진을 보내왔고, 두번쯤 편지가 왕래했지요.
제가 만약 사업을 했다면 꽌시가 이어졌을 겁니다.
멋진 关系이야기입니다.
그 청년도 누구에겐가 멋진 경험을 수없이
공유했을겁니다.
바둑의 고수시네요.
바둑을 배우려는자 파고다 공원으로 가라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바둑의 숨은 고수분들 그곳에 그렇게
많으시다네요.
그리곤 인사동에서 모임이 있을때면
가끔 종각역쪽으로 가는데
정말 그곳에 세대를 아우르는 바둑을
두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팔방미남 물메님의 라이프...최곱니다~
젊을 때 '바둑 땜에 신세 조진 놈'이란 말을 마니 마니 들었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