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의 인식 6편 : 한국전쟁사의 쟁점(7)-중국군은 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는가
한국전쟁사의 쟁점
책이름 : 해방전후사의 인식 6편
펴낸곳 : ㈜도서출판 한길사
펴낸날 : 개정 제7판 발행 - 1990년3월5일
글쓴이 : 박명림
글순서
1부 : 오늘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인가
2부 :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시각
3부 : 남한의 북진통일론과 북한의 평화통일론
4부 : 6.25전쟁 전 미국의 대한정책을 둘러싼 논쟁
5부 : 6.25전쟁에 즉각 개입한 미국의 논리
6부 : 미국의 38선 돌파 북진정책 결정과정
7부 : 중국군은 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는가
8부 : 휴전, 전투는 끝났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9부 : 한국전쟁이 남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에 끼친 영향
7부 : 중국군은 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는가
6. 중국군 참전의 배경과 원인
▷ 중국군은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참가하면서부터 1953년 7월 휴전에 이르기까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과 종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 그러나 이와 같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중국군이 한국전쟁에 왜 참전하게 되엇는지
그 배경과 원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물론 한국전쟁의 원인을 설명하는 일군의 전통주의 계열 학자들 중에는
중국이 한국전쟁 발발시부터 이미 소련과 함께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는
중소음모설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나(힌튼, 달린, 바네트, 슐만, 박두복 등)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전통주의에서조차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그렇다면 한국전쟁 발발시에는 전혀 관여치 않던 중국이
왜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1950년 10월에 가서야 참전을 결정하게 되었는가.
그 배경과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
한국전쟁의 국제전화를 가져왔던 중국의 참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 이에 대한 기존의 견해는 대략 두 가지로 대별된다.
- 하나는 모택동이 스탈린의 지령 또는 압력으로 참전을 하게 됐다는 견해이고
(힌튼, 박두복 등)
다른 하나는 미국의 북진으로 인한 중국의 안전에 대한 스스로의 우려가
참전의 주요 동기였다는 견해이다(파이팅, 푸트, 오고노키 등).
(커밍스와 할리데이는 중국군의 참전이유가 북한에 대한 '호혜의 원칙'이
일차적 원인이고 그 다음이 자국의 국경선방어, 세번째가 북하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배제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좀더 면밀한 분석을 요하는 해석이다.)
- 전자는 소련의 지시와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당시 중, 소관계의 성격에 비추어볼 때 1950년 10월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결정은
소련의 압력에 의한 파동적 결정이라는 주장이며
후자는 중국이 미군의 북진으로 인해 점증하는 위협에 직면하여
사회주의 건설 초기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전쟁이 자국 영토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참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전자 즉, 스탈린의 지시나 압력에 따라 중국이 참전했다는 주장은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는 추세다.
▷ 그렇다면 중국은 진정 왜 참전했을까.
- 간단한 사실 재구성을 통하여 추적해보자.
중국은 이미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미국이 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파견하자
이것이 중국 영토에 대한 제국주의적 무장침략이라면서
즉각적으로 예민한 반응을 보엿다.
그러나 대만문제를 제외하고는 중국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대해
그것은 '조선의 내부문제'라며 어떤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 중국이 한국전쟁에 대해 직접적인 관심을 표명한 것은
1950년 8월 17일 주유엔 미국 대표 오스틴이
유엔군의 군사적 목표가 전쟁전 원상회복, 즉 38선회복에 있지 않고
한반도의 통일에 있음을 명백히 선언하면서부터였다.
이에 대해 중국은
"미제의 조선침략이 특히 중국의 안전에 중대한 위협"을 주고 있으며
중국 인민은 "그러한 조선침략을 허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 9월 말까지 중국은 때로는 외교부장 주은래 등이 성명을 통해,
때로는 북경 주재 인도대사 파니카를 통해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중국 국경으로 진격해올 경우
중국은 절대로 좌시하지 않고 참전할 것임을 강경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이러한 중국의 계속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중국의 참전이 점차 명확해지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일단의 논쟁을 거쳐 결국 38선을 넘어 북진을 결행했고
계속 확전 일변도로 나아갔다.
- 미국의 승인 아래 한국군이 38도선을 넘자
모택동은 10월 2일 당간부들을 소집하여
중국인민 지원군의 이름으로 군대 일부의 조선 파병을 결정했다.
이때 모택동이 중국군의 한국전 참전을 결정하기 앞서
사흘 낮, 사흘 밤을 혼자 고심하고 번민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 국가건설기에 산적한 국내 문제와 세계 최강 미국군의 참략 위협에 직면하여 내린
참전 결정은 모택동으로서는 모든 것을 건 어려운 결정이었다.
중국공산당내의 참전 반대파들도 만만치 않아
이들은 북한 지원보다 국내 경제건설이 더 시급하며
아직 미국 군대가 중국 본토를 침략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강력히 참전 반대의사를 개진했다.
- 그러나 모택동은 이와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한 중국이 평화스럽게 경제건설에
전념할 수 있는 정세가 조성될 수 없으며
미국이 한반도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막바로 압록강 연안을 공격할 것이라면서
"우리 군대가 조선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유리하다.
우리의 출병은 우리나라와 그리고 동방과 전세계에 모두 유리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마땅히 참전해야 하며
만일 참전한다면 그 이익이 엄청난 데 비해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 손해가 막대할 것"이라며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참전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10월 7일 유엔이 유엔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측 결의안을 통과시킨 지 하루 뒤의 일이었다.
- 마침내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은
항미원조보가위국(抗米援朝保家衛國)을 명분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국제전화했고
그 결과 그것은 세계역사상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맞붙은
최초의 전쟁이 되었다.
미국의 확전전략이 빚은 결과였다.
▷ 중국의 참전으로 북한정권은 존망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의 북한에서의 행동은 매우 조심스러웠는데
이는 모택동의 지시의 결과로 보인다.
모택동은 참전에 앞서
"우리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 국경 안으로 들어간 뒤
조선인민군, 조선민주정부, 조선로동당과 기타 민주당파 및
조선인민의 수령 김일성 동지에게 우애와 존경을 보이고
군사기율과 정치기율을 엄격히 보여야 한다.
…….또 중국인민지원군은 조선의 산 하나, 물 한 방울,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라도 애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 결론적으로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배경과 원인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 첫째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서
미군의 국경 부근으로의 진겨으로 인한 자국 안보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다.
중국은 점증하는 미국의 침략위험에 대응하여
사회주의 건설기의 산적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보위하기 위해 참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중국은 당시 미군과 장개석군대의 양면공격 위협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으며
(맥아더는 실제로 장개석군대의 본토 투입을 검토하기까지 했다)
최후의 순간까지도 미군이 38선을 넘지 않는다면,
즉 한국군만이 38선을 넘는다면 참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할 정도로 자제하다가
국가 수호를 위한 최후의 승부수로서 참전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 둘째는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서였다.
훗날 모택동이
"스탈린은 언제부터 우리를 믿게 되었나, 그것은 항미원조 때부터다.
'1950년 가을에 가서야 우리가 티토가 아니고 유고가 아님을 그는 믿게 되었다"고 한
언명에 비춰보더라도 한국전 참전의 주요 목적 중의 하나가
그들에대한 스탈린의 불신을 제거하고 그의 신임을 얻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실제로 스탈린은 중국의 유고화, 모택동의 티토화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을 품어왔던 게 사실이며, 그 결과 양국 관계는 매우 소원했고
1949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의 장장 3개월에 걸친 소련 방문에서
모택동은 이를 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중국의 참전이 소련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견해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볼 수 있다.
- 셋째는 북한에 대한 보은, 또는 사회주의 연대성의 원칙이다.
중국은 항일투쟁과국공내전과정에서 입은 조선인으로부터의 도움을
위기에 처한 북한을 지원함으로써 갚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것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국제사회주의 연대성의 원칙을 견지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러나 중국은 '지원' 이상을 시도한 것 같지는 않다.
당시 중국 지도층은
"조선의 통일목표는 장래에 실현될 수 있는 것이지 이 전쟁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것"
이라면서 전조선해방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중국은 자국 군대가 북한지역을 회복하고 38이남으로 진격하여
더 이상 자국의 안보와 북한의 존폐가 위협받지 않게 되자
갑자기 추격정지 명령을 내려 더 이상의 진격을 중지했다.
당시 평양 주재 소련대사 라츠와예프는 계속 진격을 촉구했으나
팽덕회는 이를 거절했고 라초와예프는 결국 스탈린에 의해 즉각 해임되고 말았다.
- 넷째는, 중국 국내문제와의 관련성이다.
당시 중국은 비록 혁명이 성공하기는 했으나
아직 본토 곳곳에는 국민당의 잔류부대, 잔류세력이 남아 있었으며
이들 반혁명세력의 중앙통제력은 중국 전체 국토의 좁은 부분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중국인민해방군의 군벌적, 파벌적 성격으로 인해
전 중국군을 모택동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 일례로 '동북의 통치자' '만주의 군주'로 불리던 고강의 경우
모택동의 통제권내에 있지 않았다.
모택동으로서는 이러한 대내적 상황을 한국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일거에 극복하고
혁명을 촉진시키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모택동은 토지개혁, 반혁명세력 제거,
중앙정부의 통제력 강화, 그리고 대대적인 대중운동(三反, 五反운동 등)의 전개 등을
통해 대내적 통합력의 제고와 사회주의 건설을 급속하게 추진시켜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