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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서울 문학기행
-인제대학교 학생 43명
■ 일시: 2018년10월26일(금)
■ 진행 및 강의: 김경식 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13:30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남
13:30~17:00 선학원,별궁길,감고당길, 경기고보터(정독도서관),서울교육박물관,
성삼문집터, 김옥균집터, 재동백송(헌법재판소), 이상재집터,
손병희집터, 가회동길, 중앙고등학교(학교와 협의), 휘문고보터,
만해당, 여운형집터, 박인환집터
■ 일시: 2018년10월27일(토)
■ 진행 및 강의: 김경식 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09:00 서울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1번 출구 앞에서 만남
09:00~13:00 조지훈집터, 방우산장기념물(조지훈), 최순우옛집(방문 협의)
길상사, 수연산방, 심우장, 비둘기소공원(김광섭 시인), 북정마을
진행 및 강사 소개
-김경식(시인, 기행작가)
1960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문학과 역사, 지리를 집중 탐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5년부터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을 시작했으며,
학교 및 단체에서 수백 회의 인문학기행을 진행했다.
저서로 <사색의향기문학기행>,<서울문학지도>외 다수가 있으며,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지학사)에
문학기행 <이병기시인을 찾아서>가 게재 되었다.
2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에서 문학특강,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였다.
몇 년간 서울문화재단 주최의 <서울문학기행>을 진행하였으며,
2013년부터 서울특별시가 주최하고,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하는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문학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1. 서울 문학기행
-북촌 문학기행
김경식 (시인, 기행작가)
■ 문학기행의 의미
문학기행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탐방이 시작된다. 사람이 살았던 곳에는 어디나 이야기가 있다. 다양한 이야기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이것이 문자로 기록되면 문학이 되고 역사가 된다. 역사와 문학에는 사람과 지명이 등장한다. 처음 이야기를 시작한 사람의 고향과 삶의 길이 있다.
이 여행은 아득한 역사의 뒤안길을 가기도 하고 얼마 전의 이야기를 찾아 길을 나서기도 한다. 그 길은 자동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걷기도 하지만 항상 우리 눈에 보이는 길만 가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길과 상상의 길인 보이지 않는 길도 함께 따라 가는 것이다. 누군가 처음에는 길이 아닌 곳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기에 길이 만들어 졌다. 역사문학기행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가는 여행이다.
작가와 작품을 알지 못하고 역사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길은 보이지 않는다. 역사문학기행은 이런 길을 찾고 만드는 여행이다.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만나러 가지만 그 만남은 생시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우리네 현실적인 삶은 가정이나 직장, 이웃 사람들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일상적인 삶의 한계는 공간이 좁고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문학작품이나 답사처에서 만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가공인물이거나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다. 그러나 현실보다 더 확실한 모습으로 다시 살아 와 내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느끼게 만들곤 한다. 그들은 나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지만 기행이 끝나면 시대를 초월하여 만나는 그들의 열정적인 삶을 엿보게 되고 또한 그 곳에서 만난 주인공들에 대한 연민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기에 이른다. 역사와 문학작품 속의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더듬거리며 찾다 보면 죽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들을 찾아 가면 어디선가 살아서 돌아온 듯 착각을 하게 된다. 무언으로 말을 하며 그 장소를 떠날 때까지 지켜보는 듯하다. 이런 기분으로 답사를 하면 문학의 향기는 소리 없이 피어나는 안개와 같다. 스멀거리면서 퍼지는 향기는 코를 자극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혼을 울리기도 한다. 이 영혼이 머리를 타고 흘러 내려 와 가슴을 흔들면서 향기있는 생명력으로 꿈틀거리게 하는 마력을 가지게 된다.
문학기행은 고독한 사람들에게 많은 지인들을 만나게 하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믿는다.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적지, 작가의 생가와 고향마을 고샅길을 걸어 온지 몇 년 이던가. 역사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에게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의미 있게 살다가 떠나간 이들이 남긴 삶의 흔적들을 찾다 보면 이런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역사문학기행은 남아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응시할 수 있게 하며 작가와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대화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다. 역사문학기행을 통해서 만나는 역사적인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갈 미래의 삶 속에 좌표가 될 수 있다. 이 여행에 함께 동참한 사람들은 처음 만남이라도 그 친밀한 동질감에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기행이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이다. 일상의 삶을 떠난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며 자기의 존재 인식을 통해서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역사문학기행은 역사적인 인물과 문학적인 만남을 제공한다. 역사와 문화, 자연과의 만남이 있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만나며 찾게 되기도 한다. 자신이 지금 가고 있는 인생길의 목표점과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역사문학기행은 답사와 여행의 장점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면서 "나는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단하는 특별한 여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학은 자유와 사랑을 위해 많은 장애물을 넘나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라와 민족마다 자신들의 역사와 문학을 가지고 있으며, 민족사학자와 민족작가는 자신의 조국이 위기에 처하거나 민족이 말살될 때, 역사와 문학으로 저항하게 된다. 어느 민족에게나 이런 역사와 문학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도 민족사학자와 민족문학의 작가들이 있다.
■북촌의 역사적인 의미
문학기행에서 수도 서울이 차지하는 의미는 대단하다. 서울은 조선 시대에는 한양이란 이름으로 500년 이상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36년과 대한민국 수립 70년 동안 여전히 수도이다. 환란과 전쟁으로 건축물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다. 다만 서울을 답사하여 역사적인 사실과 그 시대의 인물을 탐구하며, 문학적인 상상력을 가지고 여행을 하는 것이 서울역사문학기행의 의미다.
넓은 의미로는 북촌은 청계천과 종로 북쪽을 의미한다. 경복궁과 창덕궁을 잇는 도로인 율곡로의 북쪽을 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는 율곡로 북쪽 중에서도 주로 삼청동길(사간동길)에서 창덕궁길(원서동길)까지를 북촌으로 부르고 있다.
율곡로에서 북촌으로 이어진 길은 대략 6개 길로 분류된다.
북촌 제1길은 동십자각에서 삼청공원 쪽으로 올라가는 삼청동길, 제2길은 풍문여자고등학교에서 시작하는 감고당길, 제3길은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별궁길, 제4길은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하는 가회로(재동길), 제5길은 현대빌딩에서 시작하는 계동길, 제6길은 창덕궁 담장을 따라 난 창덕궁길(원서동길)이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둔덕에 위치한다. 명당이다. 궁궐에 근무하던 세도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된 것은 일견 당연하다. 남산 근처는 남촌이라 했다. 주로 가난한 선비나 하급관리들이 모여 살았다.
일제는 북촌의 맥을 빼기 위해 남산 근처를 개발한다. 명동과 충무로의 등장이다. 북촌은 일제하에 명맥을 상실하게 된다.
세도가들이 살던 북촌은 퇴락하기 시작한다.
재력을 상실한 집안들은 유물들이나 세간들을 팔려고 내놓기 시작한다.
이 거래가 시작된 곳이 인사동이다. 결국 오늘날의 인사동으로 변모의 초기의 모습은 북촌의 망해가던 사람들이 팔려고 내놓은 물건들이 나오던 장터에서 시작되었다. 북촌의 경계가 되고 있는 율곡로는 인사동 초입의 길이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 때 창덕궁과 종묘의 맥을 끊기 위해 만든 도로다.
지하철 3호선 안국역1번 출구를 나오면 별궁길이 시작된다. 이 길을 따라 100m 쯤 올라가면, 안동교회와 윤보선 고택과 만난다.
별궁은 고종(1852~1919) 황제가 왕실의 가례(嘉禮)를 위해 건립했다.
이곳은 순종(1874~1926)혼례의 가례 장소로 사용되었다. 가례는 왕의 혼인이나 즉위식을 의미한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 화재를 당하였으며, 1936년 민간에 매각되고, 결국 풍문여고 교사와 한양컨트리클럽 휴게실로 사용되기도 하는 비운을 당한다. 조선 왕조의 건축물들은 이렇듯 풍비박산이 났다. 별궁은 1950년대 까지만 해도 풍문여고 운동장 한 가운데 있었지만, 별궁의 현광루와 경연당은 현재 부여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이전 복원했다. 별궁길을 걸으면서도 그 역사적인 의미를 모르면, 역사의 뒤안길이 아닌 풍문여고 담장과 상가만 보일 따름이다.
감고당(感古堂) 길은 조선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해 건축했다.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에 감고당에서 거처한 이후, 민씨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명성황후는 이 집에서 왕비로 책봉된다. 덕성여고 본관 서쪽이 감고당이 있던 터다. 지금 감고당은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 옆으로 이전 복원 되었다. 명성황후는 자신이 왕비로 책봉된 일을 회상하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 별궁길, 감고당길, 안동교회(소허당)을 중심으로
지하철 3호선 안국역1번 출구를 나오면 별궁길이 시작된다. 이 길을 따라 100m 쯤 올라가면, 안동교회와 윤보선 고택과 만난다. 별궁은 고종(1852~1919) 황제가 왕실의 가례(嘉禮)를 위해 건립했다.
이곳은 순종(1874~1926)혼례의 가례 장소로 사용되었다. 가례는 왕의 혼인이나 즉위식을 의미한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 화재를 당하였으며, 1936년 민간에 매각되고, 결국 풍문여고 교사와 한양컨트리클럽 휴게실로 사용되기도 하는 비운을 당한다. 조선 왕조의 건축물들은 이렇듯 풍비박산이 났다. 별궁은 1950년대 까지만 해도 풍문여고 운동장 한 가운데 있었지만, 별궁의 현광루와 경연당은 현재 부여 한국전통문화학교로 이전 복원했다. 별궁길을 걸으면서도 그 역사적인 의미를 모르면, 역사의 뒤안길이 아닌 풍문여고 담장과 상가만 보일 따름이다. 감고당(感古堂) 길은 조선19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친정을 위해 건축했다. 인현왕후가 폐위된 후에 감고당에서 거처한 이후, 민씨들이 대를 이어 살았다. 명성황후는 이 집에서 왕비로 책봉된다. 덕성여고 본관 서쪽이 감고당이 있던 터다. 지금 감고당은 여주의 명성황후 생가 옆으로 이전 복원 되었다. 명성황후는 자신이 왕비로 책봉된 일을 회상하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안동교회는 1909년 세워진 교회이니 100주년이 넘은 개신교회다.
이 교회는 양반들이 주축이 되고, 평신도들이 세웠다. 교회 앞에는 솟을 대문과 행랑채로 이어진 높은 담 길이 이어진다. 누가 보아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한옥이 교회 앞에 자리잡고 있다. 윤보선 고택이다. 윤보선 대통령이 안동교회를 출석했다.
별궁길에 인접한 안동교회의 본당 옆에는 소허당(笑虛堂)이라는 한옥 별채가 앉아 있다. 이 한옥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안동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안동교회에서는 매주 토요일 소허당(笑虛堂)을 개방하여 문화강좌도 열고,지나가는 길손에게 차를 대접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소담스럽고, 단정한 소허당은 바깥으로 툇마루를 내어 누구나 앉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소허당(笑虛堂)이라는 현판을 보면 마음이 편하다. ‘허심한 마음으로 웃는 집’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교인들에게 공모해 정한 이름이라고 하며,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자체를 집자했다. 소허당은 인사동 같은 길이지만, 사람 드나듬이 적어 조용하고 정갈하다. 소허당은 별궁길의 운치를 닮으려는 듯 옛 모습 찾기에 힘을 보탠 집이다. 이 교회의 사회적인 의식이 소허당에 담겨있다.
1908년 안동교회 출신인 박승봉. 유성준 등을 중심으로 기호학교가 설립된다. 기호학교는 현재의 '중앙고등학교'이다. 1909년에 김창제의 집에서 안동교회가 시작된다. "안국동에 있는 교회"란 뜻이다. 이윤재 선생은 안동교회 장로로 시무했다. 그는 일제시대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한 분이 아닌가.
별궁길 중간지점에 조선어학회터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윤보선 대통령은 부친 때부터 안동교회의 교우였다. 그러나 나는 안동교회의 뿌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초기에는 양반교회를 자부했기 때문이다. 안동교회는 본래 승동교회에서 분립된 개신교 교회이다. 백정출신의 박성춘이 선거로 장로에 선출되자, 양반교우들이 불복한다. 이들은 승동교회를 떠나1909년 안동교회의 설립한다. 승동교회는 무어 목사가 1893년 설립했다. 승동교회의 본래 이름은 <곤당골교회당>이었다. 곤당골이란 조선 선조 때 역관(譯官) 출신인 홍순언(洪純彦)의 집이름 에서 유례 한다. 홍순원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가 군대의 파병을 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때 그에게 상으로 내려진 관직이 당능군(唐陵君)이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집터를 하사해 주었고, 이를 토대로 대저택을 건축했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이란 글자가 쓰여 있는 담길은 아름다워서 '고은담골'이라고 불려 졌으며, 이를 줄여서 부르면 '곤당골'이 되었다.
한자로 풀이하면, '미장동'(美墻洞)이 '미동'(美洞)이란 지명이 되었던 이유다. 현재 미동의 위치는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 부근이다. 무어 목사는 1893년 봄에 곤당골에 있던 한옥을 매입한다. 이곳에서 처음에는 16명이 예배를 보았다. 교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날 백정 박성춘이 출석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당시는 양반과 상민의 구별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양반들은 박성춘과 예배를 드릴 수 없으니 그를 다른 교회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무어 목사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회를 떠난 것은 오히려 양반들이었다. 박성춘은 무어 목사에게 미안했다.
양반들이 떠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는 열심히 전도한다. 경기도 일대의 백정 마을을 탐방하면서 열정적인 전도를 한다. “백정을 사람대접하는 인격적인 종교가 있다”는 말에 백정들의 교인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기독교 선교를 통해 신분의식의 해방을 경험한 백정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에 투신한다. 조선 조정에 탄원서를 제출한다. 그의 탄원서는 1895년 4월 정부 칙령이 내려진다. 백정들도 양반처럼 갓을 쓰고 도포를 입게 된 것이다. 박성춘은 민중의 지도자로 변신한다. 1898년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가 개최된다. 그는 단상에 올라 백정 대표 연설도 한다. 이 무렵 곤당골 교회를 떠났던 일부 양반들이 회개하고 돌아온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1904년 가을에 곤당골 교회를 팔고, 절골(寺洞)에 한옥을 구입한다. 당시 절골은 지금의 탑골(파고다)공원 인근과 인사동 일부를 칭한다. 구입한 절골의 한옥을 개조하여 1905년 8월1일 예배를
시작한다. 절골이란 마을은 지금의 탑골(원각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스님이 거쳐하는 동네라고 하여 '승동'(僧洞)이라 불렀다. 교인들이 중승‘僧’ 자가 붙는 이름이 싫어 승동(承洞)교회가 된다. 1907년 평양에서는 바람처럼 신앙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는데, 대부흥회의 명사인 길선주 목사가 승동교회를 방문한다.
“절골(僧洞)과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勝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 길선주 목사에 감명 받아, 이길 승(勝)자의 승동(勝洞)교회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박성춘은 장로 후보감으로 물망에 올랐다. 그러나 다시 양반출신들은 술렁거렸다.
백정 출신 박성춘은 결코 장로로 추대할 수 없다며 저지했다. 그러나 평민 출신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박성춘에게 양반 출신들은 당할 재간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1908년 가을, ‘승동교회’를 떠나 재동에 예배 처소를 마련한다. 안동교회의 설립의 기초가 되었다.
■ 정독도서관(경성제1고보터) 답사
-서울교육역사사료관 탐방
-중등학교 발생지
-성삼문, 김옥균 집터
□ 심 훈. 한설야. 박헌영, 이효석을 중심으로
경기고등학교는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공립 고등학교이다. 서울 북촌의 서쪽 입구에 있는 정독도서관이 그 터다. 이 학교는 1974년에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문 고등학교였다. 1900년 현재의 종로구 화동에 터를 잡고 한국 최초의 중고등학교로 개교한다. <경성제일고보>이다.
경기고는 1976년 강남 개발 정책에 따라 삼성동으로 이전한다. 다행히 이곳을 정독도서관으로 개관하였기 때문에 학교의 모습은 대체로 그대로다. 사옥이나 개인에게 매도되었으면 아마도 답사할 수 있는 장소가 되지 못했으리라. 동쪽 북촌 입구에 있었던 휘문고등학교가 그 예다. 현대사옥이 자리 잡으면서 해방공간의 역사무대였던 휘문고교 교정의 옛 모습은 찾을 방법이 없다. 정독도서관이 개관되었을 때에 이곳은 남산도서관과 함께 가장 인기 있던 도서관이었다. 북촌 길의 감고당 길과 별궁 길은 정독도서관을 찾던 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니던 길이었다. 풍문여고 입구를 통해 고샅길을 걸으면, 이내 덕성여고에 정문을 통과하고 100m 쯤에 정독도서관 정문에 닿곤 했다. 또 다른 길은 지금의 헌법재판소(옛 창덕여고) 담 길을 휘돌아 좁은 한옥 골목을 통과하여 정독도서관에 이르는 방법이었다.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그 유명한 <인왕산제색도>를 그렸다.
정독도서관 정문을 오르는 계단 옆에는 다양한 표지석이 서있다. <화기도감터>라는 표지석에는 이곳이 조선시대 총포를 제조하던 터라고 기재되어 있다. <중등교육발상지>라는 표지석도 보인다. 1900년 이곳에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관립중등학교가 건립된 것을 기념하고 있다. 서울교육박물관 건축물은 1927년에 건축되어 지금은 교육박물관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구 경기고 본관 건물은 1938년에 준공 했다. 경사지를 따라 세 동의 건물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세 동의 긴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정독도서관이 되었다.
예전에는 정독도서관 정문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궁궐 건축물이 보였다.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이다. 현재는 국립 서울미술관으로 다시 원위치로 옮긴 종친부는 조선시대 국왕의 족보와 얼굴 모습을 그린 영정을 받들고, 국왕 친척들의 벼슬을 주는 인사 문제와 제반 사항을 의논하고 처리하던 관아였다.
고려 때의 제군부(諸君府)를 세종 15년(1433)에 고친 이름이다. 종친부 건축물에서는 역대 왕들의 족보와 임금의 초상화를 받들어 모시고 관혼상제 등의 사무를 보았다. 종친부 건물 중에 살아남아 이곳으로 이전 복원한 건축물은 중당(中堂)과 남쪽의 익사(翼舍), 익랑(翼廊)이다. 중당(경근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의 큰 건축물이다.
궁궐 건축답게 세벌대와 네벌대, 화강석 장대석 기단을 설치하였다.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워 건축했다. 그러나 3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은 회화나무다. 늙은 회화나무 아래서 필자는 이 학교 출신들 중에서 특별한 인연이 되었던 사람들의 삶의 궤적이 흥미로웠다. 그들의 삶과 문학, 죽음에 이르는 길을 더듬다 보면 가슴이 흔들렸다. 그래서 필자는 정독도서관(옛 경기고 터)을 가거나 찾을 때, 세 명의 경기고 출신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곤 한다. 심 훈, 한설야, 박헌영이다. 이들은 모두 경기고 출신으로 3,1운동 때에 만세운동을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심훈의 삶과 문학
심훈은 1901년에 서울 노량진에서 태어났다. 소설 상록수로 친숙한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또한 영화인이었으며, 독립 운동가였다.
본명이 대섭(大燮)이었으며, 호는 해풍(海風)이다. 본관은 청송이다.
아버지 심상정과 어머니 해평 윤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다. 1915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경기고)에 입학한다.
1917년에는 왕족 출신인 이해영과 결혼하는데 그의 나이 18세 때다. 이런 조혼은 당시 우리의 풍습이었다. 1919년 3,1운동은 그에게 민족주의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만든다. 6개월 투옥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고 결혼을 하였지만 직업이 없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당시 그가 감옥에서 쓴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면, 애국심에 가슴이 흔들린다.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니 같으신 어머니가 몇 천 분이요, 또 몇 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이 땅의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니보다도 더 크신 어머니를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 마다 눈물겨워 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니께서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져도 흘금흘금 쳐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던 것이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 1919년 심훈의 옥중편지 인용
이 때 심훈이 선택한 길은 중국 망명이었다. 1920년 어느 날, 중국으로 남몰래 떠난다. 북경, 상해, 남경을 거쳐 항주의 지강대학에서 수학하다가 1923년에 귀국한다. 이 무렵 그는 민족주의 운동을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해 ‘극문회’라는 염군사의 산하단체를 조직한다.
이듬해에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고 이해영과 이혼한다. 1925년에 영화 장한몽에 출연하는데 이것은 그가 처음 영화와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된다.
문학적으로는 카프(KAPF)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며, 1926년에는 동아일보에 ‘탈춤’을 연재한다. 이 작품이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이다. 시련이 닥친다. '철필 구락부‘ 사건으로 동아일보사에서 해직을 당한다. 이 때 함께 해직 된 사람이 박헌, 임원근, 허정숙 등이다. 철필 구락부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의 사회부 기자들이 1926년 일제의 민족 언론탄압에 항거하여 언론옹호연설회를 개최하기도 했던 단체다. 심훈은 자신의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늘 미래를 준비했던 사람이다.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후 마음고생을 하던 심훈은 영화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 ‘먼동이 틀 때’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한다. 자신의 작품을 가지고 직접 감독을 맡아 단성사에서 개봉한다. 이 영화에 대해 임화와 한설야에게는 계급적이지 못한 작품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훈이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해는 1928년이다. 기자로 입사해서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 하는가?’라는 제목의 평론으로 작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30년에는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고 이듬해 조선일보사에 퇴사한다. 일 년 이상을 직업이 없이 지내다가 그가 집필을 위해 찾아간 곳은 자신의 조상들이 대대로 살았던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였다. 1932년에 이곳으로 낙향한 심훈은 ‘영원의미소’(1933)와 ‘직녀성’(1934)을연이어 발표하며 작가로 자신의 이름을 알린다. 그러나 그는 우리 민족에게 위대한 시를 두고 떠나갔다. <그날이 오면>이다.
1936년 동창이었던 한설야. 박헌영을 두고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나갔다. 그의 죽음에 친구들은 모두 참여하지 못한다. 수배나 구속 중 이였기 때문이다.
그 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 시 ‘그날이 오면’ 전문
이 시는 영국 옥스퍼드 시학 교수 바우러의 저서‘시와 정치’(1966년)에서
파스테르나크와 세페레스와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과 함께 뛰어난 시로 평가 받았다. 이 시에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의 소중함을 향한 간절한 절규를 지니고 있다. 이때의 시대 상황을 인식하게 만든다.
■ 한설야의 삶과 문학
한설야(1900년~1976년)는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출생한다. 심 훈, 박헌영과 경성제일고보 동창이다. 그러나 그는 경성제일고보를 졸업하지는 못한다. 재학 중에 자신의 고향 함흥고보로 전학을 했기 때문이다. 1925년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조선문단에 소설 <그날 밤>으로 등단한다. 그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 때부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34년 일제에 의해 카프 문학인들의 검거가 시작되고 한설야도 체포되어 구속된다. 수감이후에 그는 계급성에 입각한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황혼>이다. 황혼은 노동자의 삶과 자본가의 삶을 대조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해방이후에 그는 북한을 선택한다.
그의 고향이 함흥이고 성향이 사회주의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부장과 조선문학가동맹 위원장을 역임한다. 한 때 그는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정치적인 성공을 누린다. 1953년에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월북문인들의 숙청을 주동하기도 한다.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교육상과 인민상을 수상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1962년 숙청을 당한다.
모든 것을 잃고 그는 노동교화소로 추방되었다고 전하며, 1976년 사망했다는 설만 무성하였다. 특이한 것은 그가 ‘애국렬사릉’에 묻혀 있다는 것과 1993년에 북한이 발간한 <문학예술사전>에 그의 장편소설 ‘황혼’에 관한 설명이 등재되어 있다. 복권을 의미한다. 북한은 아마도 그들이 중시하는 예술에서 수령형상소설의 발기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리라. 세 친구 중에 한설야가 가장 오래 살았다.
■ 박헌영의 삶과 아들 원경 스님의 시
박헌영(1900~1956)은 충남 예산군 신양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박현주는 몰락 양반 출신이며 지주였다. 박헌영은 첩의 아들이었다. 어머니 이학규와 부친은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부친 박현주는 본처의 아들 박지영, 박신기 등이 있었다. 박헌영 보다는 모두 10세 이상의 이복형제들이다. 박헌영이⟪경성제1고보⟫에 입학할 때, 가정환경조사서에는 아버지 신분은 양반이며 상업으로 되어 있다. 어머니 이학규는 부친과 결혼하기 전에 딸이 한 명 있었다.
남편이 사망하고 삶을 위해 예산군 광시면 서초정리에서 국밥집을 하고 있었다.
이 무렵 그곳을 드나들던 박현주의 아내가 되었다. 박헌영은 서당을 다니기 시작한다. 이미 4세에 글을 쓸 줄 알았다.
1915년 그는 고향의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성제1고보⟫에 진학한다.
이때 심훈과 한설야를 만난다.
서자의식이 강했던 그는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경성고보 재학 중에 언더우드의 YMCA청년부에도 적극 참여하여 활동한다. 이때의 활동 때문에 북한에서 미국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숙청된다.
1919년 3월 1일 무렵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퇴학은 간신히 모면했다. 친구 심훈과 한설야는 구속된다. 3‧1운동으로 민족의 독립을 갈구한 그는 독립운동에 자신의 생을 바칠 각오를 하게 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1920년 9월 일본의 밀항선을 타고가 고학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에서 결코 자신이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해 11월 중국 상해로 망명한다. 이곳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접한다.
1921년3월에 고려공산 청년회 상해지회의 비서가 된다. 그해 5월에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도 입당한다. 이때에 상해로 유학 온 주세죽과 결혼한다. 여운형(1886~1947), 김규식(1881~1950), 이동휘(1873~1935) 등과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다. 1924년 4월에는 동아일보에 입사한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지만 비밀리에 조직한 것이었다.
동아일보 기자직은 일제의 압력에 의해 해직되고, 다시 조선일보에 입사하지만 일제는 그의 기자직을 용인하지 않아 해직된다. 결국 그는 막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이후 그는 수차례 감옥에 수감되면서 가혹한 고문을 견디는 투사로 거듭난다.
지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관련된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불지 않았다.
단식과 정신이상자 흉내를 내기도 하고,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병보석을 받아 고향집에도 머물기도 하고, 함경남도에 있는 사찰 석왕사에서 요양을 하기도 했다. 그가 가는 곳 마다 현지 경찰서는 그를 철저히 감시했다. 아내의 고향인 함흥에서 지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일제 경찰은 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이미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으며, 시베리아횡단열차 안에서 아내 주세죽은 딸을 낳았다. 이때 낳은 딸 이름이 <박 비비안니>이다. 이들의 탈출사건은 신문에 보도되고,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박헌영의 이런 탈출에 감동을 받아 유행한 노래가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두만강 푸른물에 노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매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국민 가수였던 김정구(1916~98)가 평생을 불렀던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사 ‘그리운 내 님’의 ‘님’은 박헌영을 지칭한다. 1927년 제1·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박헌영은 정신병자 행세를 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1928년 임신한 아내 주세죽과 함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모스크바로 탈출한 사건은 극적이었다. 당시 영화배우이며, 연출가 김용환의 도움이 있었다. 가수 김정구는 그의 친동생이었다. 당시 무명가수였던 김정구는 박헌영 탈출사건을 주도했던 박승직(두산그룹 창업주)의 도움으로 OK레코드사로 옮겨 1935년 <눈물 젖은 두만강>을 녹음했다. 두만강의 가사는 김정구의 형, 김용환이 ‘박헌영 탈출 성공’을 박승직에게 보고하기 위해, 신문에 기고했었던 시 ‘눈물진 두만강’을 수정한 것이다. 두만강의 ‘님’은 독립자금을 제공했던 박승직과 박헌영 사이의 암호였다.
백석 시인의 정인이었던 ‘자야’(김영한)가 운영했던 대원각(지금의 길상사)의 주인은 박헌영의 이복누나 조봉희의 소유였다. 자야 김영한은 조봉희의 딸이다.
극적으로 탈출했던 박헌영 가족은 모스크바에서 환영을 받는다. '정치망명 객들을 위한 집'이라는 임시 거처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김단야의 추천으로 박헌영은 1928년 11월 국제레닌대학교에 입학한다. 주세죽도 동방근로자대학에 입학한다.
박헌영은 이무렵 자신의 ‘이정(而丁)’가명을 사용한다.
“논을 가는 써레와 농작물을 끌어 모으는 고무래”의 한자어를 합치면 '이정(而丁)'이 된다.
러시아 발음으로는 '이춘'이다. “평생을 하층 농민계급으로 살겠다”는 그의 의지는 이렇듯 자신의 가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33년 7월 상하이 부두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심문과 고문을 당한다.
5년 만인 1939년에 가석방되어 나오니 자신의 부인 주세죽이 김단야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주세죽은 박헌영이 감옥에 수감된 줄을 몰랐다. 자신의 아내의 이런 행위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주세죽에게 돌을 던지지 말라고 하며 함구를 부탁했다.
출옥이후 박헌영은 일제경찰에 의해 A급 불령선인으로 지정하고 감시를 강화한다. 박헌영은 경성과 인천, 청주 등을 오가면서 일제 경찰과 밀정들의 감시를 따돌린다. 1941년 2월까지 청주와 서울, 대전 등의 비밀 아지트에 숨는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 무렵 피신처에서 한 여인을 만난다. 정순년(2010년 사망)이다. 물론 둘 만의 약속이었다. 아지트에서 함께 숨어 있던 정순년과 부부의 연을 맺었다.
정순년은 정태식의 5촌 조카였다. 당시 정태식은 박헌영의 동지였다. 피신처에서도 아이는 태어난다. 1941년 3월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朴秉三1941~ )이 태어난다.
박병삼은 한국전쟁 때 한산 스님을 만나 화엄사에서 출가한다. 1960년 용화사에서 사미계를, 196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조계종 원로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원경(속명 박병삼) 스님(77세)은 조계종의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받았다. 대종사는 수행력과 지도력을 갖춘 승랍 40년 이상 스님에게 주는 법계다.
대종사 법계를 받아야 조계종 최고 어른인 종정이 될 수 있다.
원경 스님은 2010년 시 230편을 묶은 시집 ‘못다 부른 노래’를 출간했다.
아버지! 세월이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언제나 낯설은 산등성 위에서
당신을 기다렸던 어린 것이 벌써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런대로 심심찮게 외로움을 달래주던
정겨웠던 사람들은 모두 다 돌아올 수 없는
저 세상으로 떠나가 버린 지금은 텅 빈 외로운 곳
오늘도 쓸쓸하고 외로운 적막한 산등성 위에 홀로 서서
무리를 잃어버린 외기러기마냥 그리움에 쌓여
저녁노을 넘어가는 아랫마을만 바라봅니다
- 원경 스님의 시 <그리움> 일부
어린 박병삼은 김삼룡(?~1950)의 아내 이순금이 키운다. 이후 어머니 정순년은 친정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목수에게 시집을 갔다.
은신처에서 박헌영의 생활은 비참했다. 전남 광주에 있던 방직공장 변소 청소부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벽돌과 기와를 굽는 공장의 인부로 위장취업을 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의 책임을 지고 김일성에 의해 박헌영은 1956년 사형을 당했다.
반당, 종파분자, 간첩방조, 정부전복 음모 등의 조작된 죄목을 붙인 재판이었다. 박헌영의 죽음은 북한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정통 공산주의 종언을 의미한다.
김일성을 핵으로 하는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가 승리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봉건세습 전체주의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며 오늘에 이른다.
■ 이효석의 삶과 문학
가산(可山) 이효석(李孝石 1907~1942)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 681번지에서 아버지 이시후와 어머니 강경홍 사이에 태어났다. 창동리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의 봉평에 관한 많은 추억들은 평창공립보통학교를 6년 동안 다니면서 만들어 졌을 것이다.
1920년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효석은 조선의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여 대학재학중에 단편소설‘도시의 유령’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31년 함경북도 경원출신 이경원과 결혼하고 일본인 은사인 쿠사부카 조오지의 소개로 조선총독부 도서과에 취직하나 잠시 근무하다가 주변의 눈총으로 그만둔다. 이 무렵 단편소설 '노령근해'를 발표하지만 작품성이 떨어지는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유진오, 이무영, 채만식, 조벽암, 박화성, 유치진등과 함께 '동반가 작가계열'에 속하기도 하였다. 동반자 작가는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당시 공산주의 운동에는 직접참가 하지 않으면서 혁명운동에 동조하던 작가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우리나라의 동반자 작가 활동은 계급주의 문학운동이 왕성하게 일어난 1920년대 말부터 계급주의 문학이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으며 해체되기 시작하는 30년대 초반까지 이루어졌다.
문학도 일종의 경험이라고 말한 사람은‘릴케’이지만 이효석 자신이 달빛에 의지하여 산길을 걸어본 경험이 없었다면, 결코 메밀꽃이 피어나고 있는 산마을의 분위기를 이토록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리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효석의 문학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지만 도덕과 윤리적 관계, 인간의 역사보다는 애욕과 자연이 함께하는 인간의 문제를 다룬 작품세계를 표방하였던 심미주의 세계관을 가진 작가다. 특히‘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 현대 단편소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원초적 본성인 애욕적인 사랑을 시적이며 건강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했다.
이 향토적이며 낭만적인 표현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요인은 작가 자신이 산골의 밤길을 홀로 걸어보지 않고는 도무지 어려운 창작이라고 여겨진다.
이효석은 유년시절에 밤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생가와 평창읍까지는 100리 산길, 비록 하숙을 하였다고 하지만 주말이면 산길의 풀섶을 헤치고 도랑을 건너 집으로 가곤 하였을 터인데, 이때의 경험들이“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같은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었으리라. 이런 서정적인 서술들은 달밤에 산길을 가지 않은 사람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 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 단편<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인용
그는 구월 초의 어느 날 쯤에 달빛에 의지해 산길을 가면서 고향주변의 산비탈에 있는 밭에 산재(散在)에 있었던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들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산길을 가던 사람들 중의 한 부류였던 허구의 인물이며 장돌뱅이들인 허생원과 동이, 조선달 이라는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아름답고 가슴 아린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소설‘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기억해 본다.
허구지만 작품에서 허생원의 짧지만 애틋한 사랑을 만들어 낼 줄 알았던 것은 이효석 본인의 마음을 드러낸 일면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평창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보았을 흥정천가의 어떤 물레방앗간을 은밀한 사랑의 장소를 만들었다. 당시에 육체적인 사랑을 하기에 물레방앗간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을 터이다. 소설속의 물레방앗간이 절묘하게 개울 건너에 그대로 조성되어 있다. 물레방아는 물레와 방아의 합성어로 물레가 돌아 방아를 찧는 것이다. 디딜방아는 사람의 힘을 이용하고, 물레방아는 물의 힘을 이용하여 방아를 돌린다. 물레방아는 굴대에 달린 2개의 축에 의해 2개의 방아를 동시에 움직일 수 있어 사람의 힘을 들이지 않고 디딜방아보다 몇 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늙은 허생원은 냇물을 건너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바람에 물에 빠지고, 동이의 등에 업힌다. 동이가 왼손잡이며 그의 어머니 친정이 봉평이라는 것을 듣는 순간 동이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확신한다. 그들은 동이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제천방향으로 함께 걸어간다.
이 부분에서 허생원의 사랑의 추억을 동정 할 수 있는 사람은, 삶과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효석 작가는 1942년 5월 25일 불과 36세에 결핵성뇌막염이라는 병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평창군 진부면 논골 이라는 곳에 안장되었다가, 1998년 영동고속도로 확장공사로 묘소가 파주로 이장되었다.
■ 북촌기행에서 만난 선학원(禪學院)
별궁길에서 만나는 <선학원>은 일제 때에 한국의 전통불교를 수호하고 사찰정책에 저항하기 위해 창립되었다. 선학원은 항일불교의 본산이다. 일제의 불교정책에 저항하고, 그들의 사찰령과 사법(寺法)을 피하기 위해 사찰이름에 절 사(寺)자를 쓰지 않았다. 당시 일제는 모든 사찰 주지의 취임은 물론 동산과 부동산의 변동사항까지 보고하고 사찰하였기 때문이다. 선학원은 유명한 박한영. 만공스님 같은 큰 스님들이 설법을 하였을 뿐 아니라, 백담사에 수행하던 한용운 선생은 당시 경성에 오면 이곳에서 숙식했다. 그러나 북촌의 별궁길 중간에 위치한 선학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불교는 교리 연구와 수행 방법의 차이로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양분된다.
교종은 불경과 경전 낭독을 필수로 행하는 종파이며, 선종은 참선. 묵상. 명상으로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종파이다. 선학원을 선종 교리를 설파하는 곳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선학원은 그런 곳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종교는 종교법에 의해 관리를 받는다. 불교의 경우 모든 재산은 종단에 속한다. 조계종 소속이면 조계종단의 재산에 소속된다. 결국 정부의 간섭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선학원은 이에 반해 사립재단을 설립하여 종단에 소속되는 것을 막고, 간섭에서도 벗어났다. 종파가 아닌 재단법인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불교정책은 일제화와 총독부로의 종권의 이전이 목적이었다.
스님이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한 대처승의 권장과 사찰령으로 표면화된다.
이런 불교의 조치를 통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조선불교는 식민통치의 대상으로 전락되고, 민족불교의 전통성이 거세되기에 이르렀다. 일제가 만든 사찰령은 주지의 횡포를 낳았다. 주지임명권을 총독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학원은 이에 대한 반발의 상징이다. 조국의 해방 후에 불교계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친일 불교계 인사들과 타락승을 포함한 일제 불교 청산이 중요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선학원을 포함한 7개 단체 인‘불교혁신총연맹’이 불교정화운동을 전개했다.
불교정화운동의 요지는 4가지로 압축된다.
1) 사찰령에 의한 주지 전횡의 폐지한다.
2) 불교의 대중화에 힘쓴다.
3) 부패된 교단을 혁신한다.
4 사찰재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 상을 확립한다.
불교정화운동의 이런 운동을 통해 그들은 독립된 조국의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동참을 인식한다. 불교혁신운동이 민중운동으로의 확산을 우려한 미군정과 보수적인 어용 총무원은 불교내의 진보세력을 좌경과 용공으로 매도하면서 탄압을 시작한다.
결국 불교혁신총연맹은 47년 11월 해산 당한다.
해방공간(1945~1948)동안 불교의 관권 탄압을 피해 혁신연맹의 중요인물 56명이 월북한다. 이후 불교 종단은 초기 비구승과 대처승의 싸움을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까지 일반인들이 볼 때, 목불인견이었다. 나는 이것이 조선의 억불숭유정책과 일제, 미군정, 불교에 비우호적인 대통령, 욕심 많은 스님들이 만들었다고 본다. 1953년 이승만 정권 때에 대처승을 스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 한 예다.
가끔 나는 북촌 길을 걷다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머물며 참선하던 선학원을 바라보곤 한다. 그와 함께 일본 불교 조동종(曹洞宗)과의 연합을 반대했던 석전 박한영(1870~1948)을 기억한다. 그는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불교대중화에 힘쓴 인물이다.
또 한 분은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이다. 그는 여산 송(宋)씨로 속명은 도암(道岩)이다. 수덕사에서 보인 도인 같은 만공스님의 일화들은 기인으로서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졌다. 1931년 조선총독부가 한일불교를 합병하기 위해 조선 13도 도지사와 31본산 주지가 모였다. 이때 만공 스님은 누구도 제대로 한국 불교를 변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시 총독 미나미(南次郞)에게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당시 그는 마곡사의 주지를 역임하고 있었다. 만공스님이 입적할 때에 마지막 화두는 불자들에게 아직도 회자 되고 있다.
1946년 10월 20일 그는 목욕을 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독백한다. “자네와 나는 이제 인연이 다 되었네. 그려”하며 웃으며 입적하였다. 삶과 죽음을 초월했던 그의 삶을 그대로 입적시에 보여 주고 떠났다. 그의 고향은 전북 태인군이며, 스승은 경허(鏡虛, 1849~1912)스님이다. 그가 스물일곱에 지었다는 ‘오도송’은 은유가 강한 한시처럼 읽혀진다.
그의 뜻 모를 한시 속에는 어떤 화두가 머리를 친다. 황소바람이 휘몰아 가는 북촌 고샅길에서 선학원 출신의 고승들을 생각하며 걷는다. 다시 한번 그의 오도송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空山理氣古今外 공산의 理氣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고
白雲淸風自去來 백운과 청풍은 스스로 오고 간다
何事達磨越西天 왜 달마는 서천에서 넘어 왔던가
鷄鳴丑時寅日出 닭은 축시에 울고 인시에는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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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공스님 오도송 김경식 번역
■ 재동 백송을 바라보며
-갑신정변을 중심으로
별궁길을 따라 북촌기행을 할 때에 나는 언제나 재동 백송에 인사를 하면서 시작한다. 600살이 넘은 백송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갑신정변, 6,25전쟁에도 살아남아 아직도 그 흰 육체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백송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이곳이 박규수와 홍영식, 최린의 집터였으며, 광혜원터였기 때문이다. 백송은 헌법재판소 북서쪽에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서 있다.
재동 백송을 올려다보면 1884년 12월4일 갑신정변에 죽어간 홍영식 선생의 삶과 죽음이 어른거린다. 어디 그의 죽음뿐인가. 갑신정변에 참여 했던 젊은이들의 가족들도 죽어가야 했다. 그 뿌리는 박규수의 삶과 연관이 깊다. 박규수의 집에 모인 젊은이들이 그가 죽고 난후에 갑신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먼저 박규수의 삶의 궤적을 찾아보자. 1884년 12월 4일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혁명의 주동자들은 이 날을 정권 쟁취의 날로 잡았다.
일본군의 후원을 받았지만 준비가 미약하고, 백성들의 지지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주역들 스스로도 불안했으리라.
안동별궁에서 방화하여 그 혼란을 틈타서 거사를 시작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루어 지지 않았다. 안동별궁은 현재의 풍문여고 자리에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순종이 세자일 때 가례청으로 이용하려고 건축한 궁이다,
갑신정변의 주역중에 지금의 덕성여고 터에 살았던 사람이 서광범이다.
그는 이곳이 담을 넘기가 쉽고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이곳에 불을 지르면 이곳으로 시선이 집중될 것을 알고 있었다.
거사가 시작되자 서재필이 보낸 자객이 민영익을 죽이기 위해 여러군데 칼로 찔렀다. 당시 한국 정부의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 출신 묄렌도르프에 의해 민영익은 간신히 피신한다. 세관본부로 사용하던 자신의 집으로 민영익을 옮기고 알렌의사를 부른다.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칼에 찔려 끊어진 혈관은 동양의학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왕진을 온 한의사 14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모두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알렌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중상자 민영익은 이미 출혈이 심하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사망직전이었다. 오른쪽 귀부분의 두개골 동맥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있었다.
다행히 목 옆쪽 경정맥도 세로로 상처가 나 있었지만, 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등 뒤로 크게 나 있었는데,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 표피가 잘리며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알렌은 자신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그에게 바쳤다. 알렌의 치료후에 민영익은 치유되기 시작했다. 죽음직전에 살아난 민영익은 알렌을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했다. 알렌에게 현금 10만 냥을 제공하고, 고종의 재가를 얻어 참판 벼슬까지 하사한다. 민영익의 쾌유는 조선 서양의학을 극대화 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서양의학과 외과의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절호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서양병원 건립이 과제였던 알렌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병원이 건립된다. 1885년 봄 조선 정부는 병원설립을 허락한다. 광혜원이 개설되었다. 40개 침상을 갖춘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이었다.
홍영식의 집에 관한 알렌의 고백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패자의 길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광혜원 건물은 전에 홍영식이 쓰던 집이었는데, 그는 최근의 갑신정변 때에 살해되었다. 우리가 그 집을 인수받았을 때에 극심한 약탈 때문에 집은 뼈대만 남아 있었다. 방에는 사람의 피로 추정되는 핏덩이로 덮여 있었다.
그 집을 병원으로 꾸미는 데는 600달러 내지 1천 달러가 들었는데, 모두 정부에서 지불하였다. 일 년에 약 300달러 상당의 약품대가 소요되고, 경상비는 정부에서 담당할 것이며, 지불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의약품과 시술이 무료로 된다.
약 40개의 침대를 수용할 만 한 방이 있고, 더 많이 수용할 수 있도록 확장할 수도 있다.”
홍영식의 식구들이 모두 자살한 집에서 우리나라의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은 설립되었다. 결국 이곳은 피의 땅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옛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박규수의 집과 홍영식의 집이 이곳에 다시 복원되어야 한다. 결국 그곳이 우리나라 병원의 첫 시작점이기도 하지 않는가.
광혜원을 다시 이곳에 복원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그 광혜원이 홍영식의 집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이곳에 있는 것은 잘 한 일이 아니다.
임오군란(1882년)으로 청나라와 일본은 더욱 대립한다. 이 무렵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형성한 세력들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했다. 이들은 청나라에 조선을 의탁하여 난국을 극복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을 사대당이라 한다. 민영익, 김홍집, 어윤중, 민승호, 김만식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청나라에 기반을 두려는 사대당을 반대하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에 고무된 일단의 청년들이 있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등이다.
임오군란의 사과를 위해 사절로 일본에 갔던 박영효는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큰 변혁을 이루어 부강한 나라가 되고 있는 모습에 고무되어 귀국한다. 개화파의 개화와 정치개혁의 의도를 알아챈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집권파와 긴장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이 무렵 청나라는 독일출신 묄렌도르프를 경제고문으로 추천한다. 그는 당오전이란 화폐를 만들게 한 장본인데 이로 인해 인플레가 극심했다. 이로 인한 사대당의 불만은 대단했다.
1884년 청나라가 프랑스에게 패배하였다는 소식은 개화파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와 개화파 주역들은 일본 주둔 병력을 무력화하여 쿠데타를 도모한다.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이들의 쿠데타 모의 첫모임 장소는 박영효의 집이었다. 1884년 11월 4일이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 주역들은 한 달 후에 있을 우정총국 개설축하를 혁명일로 삼았다. 이 모임에는 일본 공사관의 시마무라(島村久) 서기관도 참석하였다.
그는 서울에 주둔하던 일본군 150명이면 청군을 막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였다. 3일 천하 마지막 날 경복궁을 둘러싼 청군은 1,500명이 넘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이 시작되자 김옥균, 박영효 등은 창덕궁으로 달려간다. 고종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고종에게 그들은 거짓으로 사대당과 청군이 오히려 변을 일으켰다고 증언한다.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대피시킨다. 경우궁은 규모가 작아 수비가 수월하였기 때문이다. 경우궁으로 고종과 명성황후가 옮겨가자 사대당의 핵심들인 윤태준, 한규직, 이조연, 민영목, 민태호, 조영하 등은 궁 입구에서 차례로 살상한다. 12월 5일 창덕궁에서 정변의 주역들은 논공행상식 나눠먹기 자리 배정을 한다. 각국 공사 및 영사에게 신정부의 수립을 통보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때 이재선은 좌의정에 홍영식은 우의정에 김옥균은 호조판서, 박영효는 한성판윤, 지금의 외무장관 격인 외무독판에는 서광범이 임명된다.
서재필은 병조참판에 임명되는데, 그는 전위대로 공을 세웠다.
12월6일에는 혁신정강 14개조를 공표한다.
그러나 명성황후 측의 보수 수구파들은 청나라 총독 원세개에 편지를 보내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청나라군 1,500명이 갑신정변을 진압하기 위해 경복궁을 공격한다. 당연히 일본군과 대격전을 벌여야 했지만 일본군은 쉽게 퇴각한다. 홍범식은 고종을 모시고 북관종료로 가다가 청군에 살해당한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법 서재필 등은 일본공사관으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한다.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입지를 튼튼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은 조선쟁탈전에 와신상담하기 시작하는 발판이 되었다. 결국 1885년 4월 천진조약을 맺고 청·일 양군의 공동철수가 결정되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 병사 고작 150명이었지만 청나라 병사는 무려 3천 명이었다. 일본이 실리를 추구하였음은 물론이다.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개화파들은 일본에서 냉대를 받는다. 결국 김옥균은 상해로 떠났다가 그곳에서 명성황후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을 당한다.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와 절두산에서 부관참시를 당한다. 혁명의 실패는 보복의 죽음과 피바람이 살기를 부른다. 그러나 명성황후도 1895년 일제가 보낸 낭인들에 의해 창덕궁에서 비참하게 살상당한다.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한다. 재동 백송은 인간들의 이런 참극을 기억하며 오늘도 그곳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겨울을 맞이하고 있다.
■ 홍영식의 삶과 죽음
홍영식(1855~1884)은 인생을 짧지만 굵게 산 인물이다. 그의 부친은 영의정 출신의 홍순목이다. 그러나 그는 큰 아버지 홍만식의 양자가 된다.
22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그의 부친은 그가 관직에 나가기는 부족한 것이 많아 독서를 더 할 것을 강권한다. 2년간 그는 독서에 몰두한다.
이 무렵 그는 박규수의 문하생이 되어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서재필등과 친밀한 관계가 된다. 훗날 이들은 모두 갑신정변의 주역이 된다.
그가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계기는 일본을 다녀오면서 부터이다.
1881년(고종18년)에 그는 신사유람단의 일행으로 김옥균, 박정양 등과 함께 일본을 탐방한다. 일본 기행에서 그는 이상재를 만난다. 이상재는 박정양의 수행원이었다. 1883년 미국사절단의 부사로 미국을 탐방한다. 민영익, 서재필도 이때 함께 동행하였다. 미국 방문에서 그는 개화의 필요성과 혁명적으로 조선이 혁신되어야 하는 확신을 얻는다. 그는 우리나라 우편의 선구자다. 일본 방문에서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업무는 우편이었다. 일본 우편의 아버지는 ‘마에지마’이다. 그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는 홍영식과 만난 일화가 담겨 있다.
홍영식이 우편에 관해 질문한 내용과 직원들이 우편실무를 설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마에지마는 이때 홍영식에게 조선에서도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
1884년 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이 창설된다. 그는 우정국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드디어 10월1일 서울과 인천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시된다. 그러나 그의 운명에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왔다. 1884년 12월4일 그들은 혁명을 도모한다.
이들의 쿠데타는 3일 만에 실패한다.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군에 의해 살해 된다. 그의 가족은 모두 죽음을 선택한다. 홍영식의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가족이 모두 가 음독자살한다.
혁명적인 사고와 실천행위는 이런 비극으로 끝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재동 백송을 보면 죽어야 했던 그의 가족들의 한숨소리를 듣는다. 슬픈 역사의 물결이 몇 번이고 가고와도 아직 끄덕없이 살아있는 재동 백송이 소중한 이유다.
■ 선각자 박규수의 삶
박규수(1797~1877)는 본관이 반남이며, 호는 환재이다. 서울 계동 현재 헌법재판소가 있는 장소에서 출생했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이며 집안이 가난하여 어려서는 주로 아버지에게서 글공부를 하였다. 15세 무렵에 이미 글 공부는 대단한 경지에 올랐지만 곧이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상심하여 거의 20년간 칩거하며 독서만을 한다. 특히 자신의 할아버지 박지원의⟪연암집⟫을 읽고 실학의 학풍에 심취한다.
1848년(헌종14년)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한 후에 사간원 정언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벼슬 운이 좋았다. 부안현감(1850), 동부승지(1854), 곡산부사(1858)를 역임한다. 특히 1860년(철종11)애 중국 북경 부근의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청국을 다녀왔다.이 기행을 통해 그는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과 구미 제국주의 침략의 실상을 파악한다.1862년에는 진주민란의 안핵사로 활동한 사실은 유명하다.
진주민란후 백성들을 다른 곳 보다 많이 처형하지 않은 것은 안핵사로 조정에서 파견했던 박규수(1797~1877)의 보고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규수는 조정에 진주와 인근의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섰다고 보고한다. 물론 관리자들의 책임이 있었음을 보고했다. 아마 박규수의 진주민란 진상보고가 삼정의 문란이 아닌 일방적인 백성들의 책임으로 몰았다면, 조정은 최소한 수 천 명의 진주 사람들을 참살하였을 것이다. 당시 농민시가 노래처럼 불러졌다.
이 거리 저 거리 각 거리
진주 남강 또 만강(滿江)
짝 발로 헤앙금
도래미 줌치 장도칼
구시월에 무서리
동지섣달 대서리
-진주민란 때의 민요시
겨울밤이었을 것이다. 유년시절 마실을 가서 친구들과 함께 다리를 일렬로 가지런히 놓고 다리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던가.
물론 당시에 어떤 의미의 노래인지는 알 수는 없었다.
노래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이 거리 저 거리의 모든 거리 백성들아
진주 남강변을 채우도록 모두 모여라
한 쪽 발에는 대님을 묶고(동지라는 신호)
도래미 줌치(허리춤에 차는 복주머니)속에 장도칼을 지니고,
구시월에 무서리처럼
동지섣달 대서리처럼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다. 1866년 셔먼호 사건 때는 평안감사였으며 경복궁 중수의 책임자였다. 그는 조선 후기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삶을 가슴아파한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한 뒤에도 승진은 계속되어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대사간 같은 요직을 역임한다.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천주교의 박해를 반대하고 쇄국을 풀고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강골적인 면을 보여 준 인물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그는 계동 자신의 사랑방에서 젊은 양반자제를 대상으로 실학적 학풍을 전한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같은 인물들이다. 중국에서 익힌 견문으로 그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여 젊은 지식인들을 모아 지금 식으로 하면 의식화를 한다. 1875년 일본은 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수교를 요구한다. 박규수는 최익현 척화(斥和)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역설한다. 결국 강화도조약을 맺게 된다. 그의 마지막 벼슬은 수원유수였다. 저서로는 ⟪환재집⟫과 ⟪환재수계⟫가 남아 있다.
⟪환재집⟫에는 다음과 같은 한시가 게재되어 있어 그의 문학과 시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제목은 (送李元常在恒歸報恩송이원상재항귀보은)이다.
“원상 이재항이 보은으로 귀거래사”이다.
친구가 낙심하여 분노의 노래를 부르네.
수중에는 산을 살 돈이 없지만 늘 바위 골짜기에 살기를 바랐었네.
산골의 비바람 휘몰아치는 저녁에 무엇으로 상대의 사상을 위로할까.
한 말 술이 없다면 고독하여 살아가기 어려우리라.
-대동시선 제9권 인용 김경식 번역
이 시는 <환재집>의 한시를 인용한 것이다. 1831년(순조31)에서 1841년 사이에 박규수가 지은 오언절구 6수 중 한편이다. 시에 등장하는 <이재항>은 그와 이웃하며 살던 친구였다. 그들은 자주 산골에서 함께 살자고 논의했을 것이다. 마침 이재항이 보은에 산을 구입하여 은거하기 위해 떠나는 모습을 그린 시다. 박규수는 함께 보은에 은거하지 않고 재동에 살면서 젊은이들과 사랑채에서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제자를 키웠다.
■ 혁명의 풍운아 서재필의 삶
서재필(1864~1951)은 전남 보성출신이다. 그러나 그의 본가는 충남 논산이다. 어느해 이른 봄날 필자는 그의 본가를 찾아 파란많은 삶에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 갑신정변 당시에 그는 지금의 정독도서관 북쪽에 살고 있었다. 그의 부친은 서광효와 어머니는 성주 이씨였지만, 부친의 6촌 동생 서광하의 양자가 된다. 결국 7촌 아저씨의 양자가 된 것이다. 양어머니의 동생 중에 김성근이 있었다. 그는 이조참판으로 현재 북촌의 정독도서관 근처에 살고 있었다. 서재필은 바로 이 집에서 숙식하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1882년 과거(증광시, 병과3)에 급제한다. 처음 벼슬은 ‘교서관 부정자'였다. 경서 인쇄 및 관인을 관리하던 직책이다. 이 무렵에 서광범, 김옥균 등을 만난다.
서광범을 통해서 개화파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서재필은 김옥균을 정신적 지주로 모신다.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과 교류한다. 이들이 만나 토론하던 장소는 봉원사였다.
지금의 이대 후문 쪽에 있는 사찰이다. 이 무렵 봉원사의 주지는 이동인(1849~1881)이었다. 그는 개화파 승려였다. 이동인은 양산 출신인데 일본말을 잘 했다. 당연히 일본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신지식을 습득했다. 이것을 개화파 젊은이들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봉원사는 이런 젊은이들의 모임장소였다.
김옥균의 권유로 1883년 봄에 서재필은 일본으로 공부하러 떠난다. 이때 14명의 평민출신 청년들도 함께 동행한다.
서재필과 일행은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여 6개월간 수업을 받는다.
토야마 육군 유년학교(戶山陸軍學校)에서 신식 군사 훈련을 받기도 한다. 1984년 1월부터 7월 동안 약 7개월간이었다.
개화파들은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하여 조련국을 설립할 것을 권유하였지만, 청나라와 명성황후의 반대로 무산된다. 일본에서 교육받은 사관생도들은 궁궐수비대로 편입된다. 결국 1884년 12월4일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어 전위대의 책임자가 된다.
서재필의 책무는 왕을 호위하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임무를 맡는다. 개화당에 참여하였다가 배신한 환관 유재현을 살해하고,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은 고종이 지켜보는 현장에서 살해한다. 이때 고종은 큰 충격을 받는다. 정권장악 후에 그는 이조참판이 된다. 3일천하 후에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다. 그가 망명한 후에 부모와 3형제등은 처형 당했다. 처는 독약을 먹고 자결한다. 두 살난 아들도 이때 사망한다. 와신상담하면서 서재필이 살았던 인생역정은 누구나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1885년 5월 26일 서재필,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미국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박영효와 서광범은 미국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재필을 달랐다. 와신상담하며, 주경야독하여 의사가 된다. 서재필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갑신정변의 실패원인을 첫 번째는 개화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이라고 후회하였다. 이쯤에서 서재필에 관한 이야기는 접어야 한다. 그의 이야기는 길고 언젠가 새롭게 조명할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들이 그 젊은 나이에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혁명을 도모하였던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로 인해 죽어야 했던 부모와 형제들, 처와 자식의 비명소리를 들어보라. 혁명이 어디 아무나 하는 것인가. 그는 미국에서 와신상담하여 성공하였지만,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슬픔이며 상처였으리라.
■ 만해당
-잡지 유심 발간 장소
북촌의 계동 43번지는 한용운 선생이 살던 집이다. 1918년 9월 창간된 잡지 유심은 이곳에서 발행되었다. 이 잡지는 그해 12월까지 발행하고 중단된다. 이 집은 최린이 한용운 시인을 찾아 불교계를 3,1운동에 참여하게 만든 곳이다.
최린은 당시 이승훈과의 회합을 통해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운동 일원화 시켰다. 3·1 독립운동 후 법정에서 ‘서울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유심>지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그는 내설악 오세암에 머물고 있었다. 만해는 이 <유심>지를 통하여 세계 정세의 흐름을 널리 알리려 하였다 ,
한용운 시인이 <유심>지는 현상문예란을 만들어 독자 투고를 계속 홍보하였다.제3호에는 그 첫 번째 현상문예란의 당선작을 발표하였다. 당시 견지동 118번지에 살던 방정환이 ‘고학생’ 과 ‘마음’등 소설로 입선되기도 했다.
■ 몽양 여운형 집터에서 단상(斷想)
서울 종로구 계동 140-8번지는 몽양 여운형이 살던 집터다. 그의 집은 예전에 헐리고 그 터에는 안동손칼국수 집이 영업중이다. 경사진 언덕길에 있던 그의 집터를 알리 없는 사람들은 무심히 그 길을 오고 간다.
국수집 건너편에 방치된 듯 서 있는 표지석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 몽양 여운형은 어떤 인물인가?. 북촌 길에서 이곳을 지날 때면 역사의 뒤안길이 얼마나 비정한 것인지를 묻곤 한다.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분의 대우가 이래도 되는가?.
이 집은 몽양 여운형 선생의 항일운동 중심지였으며, 해방공간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의 집무실이기도 했다.
역사의 현장인 그가 살았던 한옥은 헐리고 지금은 허름한 국수집이 되어 씁쓸한 역사의 무대로 변모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33년부터 1947년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던 공간이다. 일제하에 그는 살림집이 없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을 했는데도 거처할 곳이 없자 주주들이 사장주택으로 제공했다. 조선중앙일보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 우승할 때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폐간된다. 대지 48평, 건평 38평의 한옥인 계동집 은 몽양 여운형 집의 소유가 된다. 세월이 흘러 그의 삶과 죽음이 희미해 갈 무렵인1989년 도로확장 공사로 헐리고 국수집이 들어섰다. 여운형의 죽음은 전설처럼 아득하다. 그러나 역사적인 진실은 아직도 선연하다.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 두발의 총성이 울린다. 트럭 한 대가 갑자기 여운형이 탄 차를 가로 막는다. 누군가 차 위로 올라와 선생을 향해 총알 발사한다. 총알은 심장과 복부를 관통하였다. 민족의 지도자는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극우 테러단체의 조종을 받던 한지근 이란 자의 범행이었다. 이전에도 여운형 선생은 열 번 정도의 테러를 당했다. 해방정국에서 그의 궤적은 그토록 위험했다. 1947년의 여름은 뜨거웠다. 몽양 여운형 선생의 장례식 때문이었다. 당시 그는 민족의 지도자였다. 1945년 11월 서울 시민들에게 물은<누가 가장 뛰어난 지도자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 그는 이승만을 제치고 1등을 한다. 여운형 33%, 이승만 21%였다. 당시 여운형은 이승만과 김구보다 더 역량 있는 지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살던 집도 보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역사의 뒤안길이 왜 이토록 그에게 불리하고 고독하게 되었던가? 그의 삶의 궤적을 찾아 떠나보자. 몽양의 독립투쟁과 인간적인 매력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몽양 여운형은 자신을 감시하던 일제의 형사나 자신을 죽이려고 덤비는 자객도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인간작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의 본관은 함양이며, 호는 몽양(夢陽)이다. 경기도 양평에서 1886년 태어났다. 유년 시절에 한학을 공부한 후 고향집에 광동학교를 설립한다. 1907년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1908년 개신교의 교인이 되어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민족의식을 학생들에게 습득시켰다. 그러나 1910년 강제합병으로 국권이 상실되어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선교사 클라크와 함께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견학한 후에 해외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유다. 남경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기도 하면서 이론적인 학습을 익히다가 1918년 상해로 이주하여 신한청년당을 발기하고 김규식 선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한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이 된다.
이 무렵 일제정부는 여운형을 동경으로 초대하여 회유하고자 했다. 오히려 그는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대동하고 일제 조야에서 한국독립과 정당을 역설하여 일제 수뇌부의 가슴을 조이게 만들었다. 그의 연설은 일본과 서구 신문에 대서특필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그의 담대한 언행에 일제의 거두들은 기가 질렸다. 1929년부터 3년간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조국 광복을 낙관하면서 독립을 위해 준비했다. 이때 그가 쓴 시 한편이 그의 당시 심정을 대변한다.
머리 들어 달빛을 보니 아름답구나 (擧頭望月色皎皎)
벽에 기대어 벌레소리 들으니 낭낭하네 (側倚聽蟲聲朗朗)
철창에 의지하여 왕성한 기운을 토했더니 (依鐵窓吐口鬱氣)
온몸에 끓는 피가 천길을 솟네 ( 滿腔血沸騰千丈)
- 몽양 여운형 선생 옥중시 김경식 번역
1929년 일제는 그를 체포하고 3년간 감옥생활을 하고 1933년 출옥한다.
몽양 여운형의 대자적인 민족성향과 대중적 영향력은 조선 총독이나 정무총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제의 패망과 국제정세의 상황인식도 빨랐던 그는 1944년에 이미 해방을 준비하는 건국동맹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당시 조국에는 약 80만 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무사 귀환과 10만의 일본군의 철수를 논의하기 위해 일제는 여운형을 적정한 인물로 선정한다. 이에 그는 조선총독부에게 정치범 석방, 식량 확보, 건국사업에 대한 불간섭 등을 요구한다. 일제는 몽양의 요구를 수용한다. 1945년 8.15 꿈에도 그리던 광복이 되었다. 안재홍(安在鴻)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그러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한다. 이후 근로인민당을 조직하며 열정을 보였지만 극좌와 극우 모두에게 소외당하고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중에 암살을 당한 것이다.1947년 7월18일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그의 가방에는 어떤 문서가 들어 있었을까?
가방에는 우리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문서가 들어 있었다. 여운형 자신이 펼친 정치적인 포부가 담긴 문서와 북한 관련 관계를 담은 서류였다. 이 서류는 누구에게 보여줄 문서였는가?. 미군정의 3인자이며, 미군정청의 최고책임자인 민정관 존슨에게 보여주기 위한 문서였다. 암살당하던 당일 오후, 존슨의 집에서 비밀회동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마도 민정장관을 여운형에게 제의하는 자리였으리라 추정된다.
이것은 이정식 교수가 발굴한 존슨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확연하다.
“과도정부는 야심적인 한국 정치 지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게 되었는데, 어느새 극우세력이 경무국과 법무부의 모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안재홍은 공식적으로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정부 내 우익 인물들의 협력을 받지 못하고 있었고 또 좌익 쪽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우리들이 한국 사람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좌익은 거의 모두 무시돼왔다. 정부의 주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우리들은 과도정부 내에서 날로 자라나고 있던 우익 쪽의 영향을 막는 동시에 자유주의적인(liberal) 세력과 중간좌파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엇인가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을 수 있는 한국 사람들과 의논했는데, 그들은 유명한 중간좌파의 지도자 여운형에게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맡기는 것이 현명한 책략일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우리 집으로 초청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정식 저 <여운형,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 --서울대출판부, 2008년 인용
당시 민정관 존슨의 이 문서를 읽어보면,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민당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부패 세력으로 인정하고 있다. 또한 박헌영 등의 극좌와는 대화조차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여운형은 중도좌파로 대중적인 지지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런 그를 민정장관으로 임명하여 해방공간의 과도정부를 원만하게 운영하고 싶은 것이 당시 미국의 판단이었다.
역사에는 가정법 과거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 여운형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그는 미군정의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미국 정부는 3년 동안 한국에 총 5억4천만 달러 원조 안을 승인했다. 대단한 규모였다. 부패정부가 아니라면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확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한민당의 부패 매판 세력들은 이 자금을 거덜 내고 있었다. 토지개혁은 늦어지고 정치는 암살과 테러로 치달아 갔다. 이 틈을 비집고 일제 부역의 인사들이 대거 흡수되면서 반민특위도 무산된다. 여운형이 민정장관으로 임명되었다면 최소한 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다. 1936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아예 신문을 폐간 한다.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안재홍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든다.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정국의 가장 힘이 있던 조직이었다. 이후 그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여 극좌와 극우를 배격하고 중도를 표방하며 하나의 조국을 부르짖었지만 극우 청년 한지근에게 암살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몽양이란 호는 어머니 꿈에 기인하다. 몽양의 어머니 경주이씨는 그가 태어나기 전날 꿈을 꾼다. 꿈속에 볕이 하도 좋아서 치마를 펼치고 햇살을 받았다고 한다. 여운형은 태몽을 자신의 아호로 삼는다. 몽양, 꿈 몽(夢)에 볕 양(陽)이 아닌가.
몽양은 4남3여를 두었다. 두 아들은 광복전에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2남 3녀는 모두 월북했다. 그의 딸 여연구는 북한의 거물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몽양에게는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수유리 묘소에 잠들어 있다.
■중앙고등학교 출신 작가 탐방
-서정주 시인. 이상화 시인과 채만식 작가를 중심으로
외세가 물밀듯이 밀려오던 구한말에 선각자들은 학교를 세우기 시작한다.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으로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구국정신으로 세워진 중앙고보는 1908년 건립된 기호학교가 전신이다. 흥사단이 운영하던 융희학교와 1910년 통합한다. 중앙고보의 발전은 이 학교의 제1회 졸업생인 김성수가 1915년 인수하여 육성하면서 크게 발전했다.
중앙고보는 북촌 계동의 좁은 골목길 끝에 자리 잡고 있다. 경사진 정문을 통과하면 정면에 석조로 지어진 서구풍의 본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터는 본래 독립운동가 노백린 선생의 집터였다. 본관 건물은 1937년에 당시 유명한 건축가 박동진이 설계하였다. 그는 고려대학교 본관 건물을 설계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 두 건축물은 유사점이 많다. 중앙고보 서관 건물은 1921년 건립되었다.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설계하였다.
빨간 벽돌로 건물의 외장을 마감하고, 화강암을 일부 혼용한 고딕풍이다. 지붕은 경사지붕이며, 돌출창을 만들었다.
중앙고보의 동관은 1923년에 준공된 고딕풍 건축물인데,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서관 건축물과 유사하다.
대부분의 창문은 수평아치로 제작하였다. 돌출된 2층 창문은 뾰족아치로 멋을 부렸으며, 아치에 화강암을 끼워 넣었다. 이는 통일된 적벽돌 외벽면에 변화를 주기 위함이다. 지붕에는 삼각형 돌출창을 제작하여 굴뚝을 노출시켰다.
중앙고등학교 개교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인문학박물관은 그 규모가 고등학교 박물관으로는 최고다. 3,1운동의 발상지나 다름없는 이 학교 교정을 거닐다보면, 역사의 숨결이 느껴진다.
이 학교 출신의 문인들이 많다. 그중에서 이상화. 채만식. 서정주 시인의 시비와 문학비가 교정에 세워져 있다. 이들의 삶과 문학을 찾다보면 이곳이 우리 근대문학의 중요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 서정주 시인
서정주 시인은 1915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동네 서당에서 한문수업을 받고,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하여,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한 후 구속되기도 했으며, 고향의 고창고보에 편입학 한 후 이후 자퇴하여 계속적인 방황을 한다.
이 시기에 그는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는 민족문제와 가난하고 천대받는 현상의 극복을 위해서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에 빠진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살았으며,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직전으로 직면하기에 이른다.
톨스토이의 “공정한 물질의 분배가 행복을 주겠는가?”라는 선언에 감동을 받아 사상의 자유로움을 강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번민과 방황을 통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한다. 김달진. 김동리. 김광균등과 더불어 ‘시인부락’이란 동인지를 창간한다.
1938년 첫 번째 시집 ‘화사집’을 발간하여 원색적이며, 악마적인 시풍으로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부상하는데, 이런 관심의 일환으로 한국의 보들레르로 불려 지기도 했다.
해방직후 보수문단인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자신의 일제하 친일문학행위를 포장하려고 하였으며, 70년대 말 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생전에 1000여 편의 시를 15권의 시집에 담아 출간했으며, 그의 유품은 모두 1만5천여점에 이른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5차례 추천되기도 했지만, 결국 2000년 세상을 떠난다.
일제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 등의 친일행적으로 군부 독재자 선출과정에서 전두환 찬조연설, 대통령당선 축하의 축시 헌사, 전두환 지지 발언 같은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았다. 이런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토속어와 질펀하고 흥미진진한 언어구사로 신화적인 담시를 썼다.
그의 시가 초기에는 원색적인 관능미로 출발하였으며, 오십대 이후에는 전통적인 미학탐구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992년 <시와시학>에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중앙고등학교 운동장 입구에는 그의 대표시 ‘국화옆에서’ 시비가 서 있다. 이 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문학적인 업적은 대단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곳에 시비를 세웠다. 서정주시인의 고향마을 질마재에서 멀지 않은 곳인 부안면 인촌리에, 호남 갑부중의 한 명이었으며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던, 인촌 김성수 고택이 있다. 이 집에서 시인의 아버지는 한 때 마름 노릇을 했다는 설이 있다. 아마 이런 인연으로 김성수가 세운 학교에 그가 입학을 하였다가 졸업을 하지 않고 사회주의에 몰입했던 서정주의 유년에 어린 기억을 중앙고보 교정에서 상상해 본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것은 바람이었다.’ 는 싯구절로 인해 청년 시절 나는 온통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가슴 벅찼다. 그러나 늘 가슴을 후벼 파던 ‘나를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었다.’라는 기막힌 은유에 감탄하기도 했었다.
□ 이상화 시인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문인들에게 그 허탈감은 심각했다. 절망감을 승화시키기 위해 젊은 문인들은 서로 힘을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문학동인지의 창간이 그것이다.
창조(1919년 창간), 개벽(1920년 창간), 장미촌(1921년 창간), 백조 (1922년 창간) 조선문단(1924년 창간)등으로 작가들의 원고 발표지면은 많아진다.
이상화. 박영희. 김억. 황석우. 박종화. 홍사용. 오상순. 변영로 등은 1920년대 초에 활동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3,1운동의 실패로 저마다 절망과 슬픔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화 시인은 식민지 시절 민족의 울분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아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한 편의 시를 탄생시킨다.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다. 이 시를 읽으면, 자유의 소중함을 새삼 확인한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중앙고보 출신 이상화 시인이 일제의 암흑기에 쓴 시다. 우리 민족의 가슴을 흔드는 시였다.
빼앗긴 나라에 봄이 오는 것은 슬프고 잔인한 것이라고 여겼던 이상화 시인은 논둑길을 걸었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은 농부에게는 기쁨이지만 일제의 수탈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대자적인 농부에게는 슬픔이다.
조국 전체가 남의 땅인데 지엽적인 땅의 현상들은 의미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개벽 70호(1926년 6월호)에 게재된 이 시는1920년대의 대표적인 저항시다. 이 시의 저항이 깆든 의미론적인 시어에 깊은 감동을 받곤 한다.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은 곧 지평선의 표현이다. 이 지평선은 조국해방이 시작되는 땅이다. 이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는 작가는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는 신념의 언어를 토해낸다.
그러나 조국해방을 향해 그는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조국 해방의 이상과 현실의 벽 사이에서 속울음을 울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가 건강한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3,1운동은 2만 여명의 동포들이 일제의 군경에 의해 살상되었으며, 약 5만 여명이 체포 구금된 세계사적인 대사건이다.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실패한 운동이지만 민족독립투쟁의 불씨를 살려주는 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우리의 동포들은 실망하고 탄식했다. 죽음과 투옥을 작심하고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조국의 현실은 더욱 암담했다. 백조, 폐허, 장미촌의 동인 문인들의 작품들은 이런 조국 동포의 상실감을 반영한 것이다. 이상화의 아버지 이시우, 어머니는 김해 김씨는 4형제를 낳았다. 이상화는 둘째였으며, 큰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였다.
다섯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대구에서 한학을 공부하던 이상화는 1918년에 서울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수료한다.
그는 대구에서 백기만 등과 함께 3,1운동을 일으켰다. 검거를 피해 서울에 있는 박태원의 하숙집으로 피신한다. 1921년 고향 친구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와 만난 후에 ‘백조’ 동인에 가입하였으며,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와 함께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한다.
이상화의 작품활동은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문단 등단 후 초기에는 '백조' 동인과 함께 문학활동을 하면서 '나의 침실로'와 같은 탐미적 경향의 시를 쓴다. ‘나의 침실로’는 ‘백조’3호에 실렸는데 그의 초기 대표작이다. 1925년 박영희. 김기진과 더불어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창립한다. 이 무렵 그는 저항시의 백미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다. 프랑스에 유학할 기회를 얻으려고 일본 동경에서 공부하던 중에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동포들이 살상당하는 참상을 목격하고 귀국하여, 대구 교남 학교(현 대륜 중고교)의 교사가 된다.
1925년 카프에 가입하여 사회주의적인 민족운동을 전환한다. 식민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좀 더 강한 문학행위를 필요로 느꼈을 것이다. 이런 이유가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한 계기가 되어 주었다.
1925년 무렵 사회적인 책무를 느끼면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제목의 저항시로 식민지하의 민족현실을 노래한다. 그는 백조동인의 나약하고 낭만적인 시인에서 향토적인 저항시인으로 거듭난다. "금강송가", "역천", "이별" 등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의열단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된다. 이 무렵부터 그는 일제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주목되어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한다. 집안이 온전할 리 없었으리라.
저항시를 쓰면서 독립 운동 혐의로 몇 차례 감옥생활을 한다. 그는 살아생전 시집을 출간하지 못한 시인이다. 다만 백기만이 엮은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16편의 시가 수록되었을 뿐이다. 1943년 43세에 위암으로 최근에 복원된 그의 고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앙고등학교 교정에는 이상화 시인의 시비가 서 있다.
■ 채만식의 삶과 문학 답사
소설가 채만식은 1902년 지금의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 31번지에서 채규섭과 모친 조우섭의 5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임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간의 한학을 배운 후에 서울로 유학하여 1922년에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부속제일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강화의 사립학교 교원으로 지내다가 동아일보 학예부기자로 입사하여 재직하던 중 1924년 단편<세길로>가‘조선문단’에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장한 이후 창작생활을 병행하며 청년기를 보내게 된다.
1936년 기자 생활을 접고 개성에서 금광업을 하던 형 준식을 찾아 갔지만 일 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집은 부농에서 차츰 가난하게 되어 갔고 1940년대 들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민족정서에 어긋나는 글을 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 채만식의 일생에서 가장 혹독한 오점이 되고 있다.
체질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와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가 일제의 제안을 버틸 수 없었던 것이 슬프게 한다. 지식인에게 가난과 정치, 사상이란 것이 변화 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란 것을 다시 채만식에게도 느껴야 하는 것이 먼 길을 달려 묘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실망과 연민의 정이 되리라.
그는 다작의 작가였다. 1950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장편 11편, 중편 7편, 단편 69편, 희곡 28편, 잡문 74편, 평론 32편, 수필 76편, 꽁트 7편, 동화 3편, 동극 1편, 시나리오 2편, 좌담 3편, 기타 15편, 기행문 10편, 서평 6편, 방송극 1편 등 모두 345편에 이르는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1945년 낙향한 그는 고향에서도 부농이 아닌 가난뱅이로 지낼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다시 고향을 떠나 인근의 이리(익산시)로 거처를 옮긴다. 이 무렵 그는 책상도 없이 사과 궤짝을 엎어놓고 폐결핵으로 병든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글을 써야만 했다. 자신이 거쳐할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탁류>의 성공으로 인세(人稅)가 생기자 1947년 기와집을 마련하지만 병이 악화되어 어렵게 마련했던 집을 팔아야 했다. 이 무렵 그는 친하게 지내던 시인 장영창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가난이 가져온 가련한 작가의 애절한 편지를 읽는다.
“장군, 인편에 허락하는 대로 원고용지 한 20권만 보내 주소. 그러면 군은 혹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같이 생각할는지도 모르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임종의 어느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용지를 수북이 놓아보고 싶은 것 일세”
- 소설가 채만식 편지중에서
1950년 6월11일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이 비록 예술가들에게 형극의 길이라고 하더라도 굶주리며 만들어 놓은 작품들은 영원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내가 죽거들랑 보통 상여를 쓰지 말 것이며 화장을 하되 널 위에 누이고 그 위에 들꽃을 가득 덮은 후 활활 태워주오”
그의 고향 가는 길은 군산과 익산으로 가는 27번 국도를 타야한다.
군산에서 임피까지 16km, 15분정도 4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임피’로 내려가는 길이 기다린다. 잠시 더 내려가는 제법 번화한 동네가 반긴다. 과거 2차선도로 때 있었던 고개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교통이 편해 졌지만 옛 추억의 길도 함께 사라졌다. 임피사거리, 채만식선생의 고향마을은 오히려 예전보다 옹색하다. 파출소가 있고 상가가 도열한 마을은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소읍(小邑) 모습 그대로다. 한국문인협회 군산지회가 세운 생가표지석에는 <小說家 蔡萬植先生生家터> 10호정도의 오석(烏石)에 예서체로 써 있고 뒷면에는 ‘선생께서는 1902년 6월 17일 이곳에서 태어나시어 ‘탁류, 레이디메이디 人生, 太平天下,等 百餘篇의 珠玉같은 作品을 우리 文壇에 남기셨습니다.’ 라고 각인되어 있다. 표지석 앞에 차량이 주차하면 생가(生家)표지석은 그나마 꼼짝없이 갇히게 되어 있는 장소에 앉아 있다.
‘명화마을’이라는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둡고 칙칙한 헛간이 나온다. 그곳에 채만식선생의 유년시절에 유일하게 존재했던 우물이 있다. 채만식 선생을 기억하는 것은 오직 이 우물일 것이다. 정치자금 몇 백억을 차떼기로 주고받는 나라에서 소설가의 마지막 남아 있는 생가의 흔적을 이렇게 방치하는 것이 아직은 우리의 현실이다. 가난으로 인한 폐결핵에 시달리면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채만식선생의 고향 마을로 다시 돌아와 고샅을 걷는다. 사운거리며 퇴락하고 있는 임피향교에는 노인들이 마실을 왔지만, 나그네의 발자국들 듣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정자도 겨울에는 무용지물, 그러나 옛적 이 마을의 부흥기를 말해준다. 임피초등학교는 급식소 건물공사 마무리로 분주하다. 비록 겨울이지만 임피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임피는 과거와 현재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마을이다.
채만식선생의 생가를 답사하려고 멀리에서 달려온 사람들의 실망은 당연하다. 그 곳은 생가가 아니고 단지 생가터 이기 때문이다. 이 땅의 작고(作故) 문인들 중에서 자신의 집을 지니고 살면서 생가를 보존하였던 작가는 많지 않다. 대부분이 모진 가난에 집 없이 방랑 하다가 말년에는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던 것이 예술가들의 삶이었다. 생가 터에서 북쪽으로 언덕 같은 산 아래 채만식선생의 모교인 임피초등학교가 있다. 개교 100주년이 넘은 이 학교 정문입구에는 4백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채만식 선생도 이 느티나무를 보면서 학교에 다녔다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다. 임피초등학교는 역사가 깊고 많은 인재를 배출한 학교다. 특히 4회 졸업생인 채만식선생님이 학교 출신이다. 5년 전에 답사 왔을 때 원본 졸업대장을 학교의 배려로 볼 수 있었다. ‘蔡萬植 1914년 졸업’이라는 희미한 펜글씨체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 경험으로 당시에 나는 90년 전 졸업한 채만식선생을 현실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임피초등학교는 향교의 옆자리에 위치하며 옛 빛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채만식선생의 문학비가 없는 학교가 왠지 싫어서 채만식선생의 묘소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묘소는 계남리의 야산에 위치 해 있다. 그의 비석은 봉근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한 개씩 서 있다. 뒤쪽으로는 잘 자란 소나무의 푸르름이 위안일 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의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작고 초라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묘소 바로 아래 채만식 선생이 얼마간 거쳐했다는 집이 쓰러져 가고 있었고,
폐허가 된 빈집 마당에는 포크레인 같은 장비 차량들이 방치되어 있다.
섣달 설한풍에 채만식 선생의 묘소 가는 길은 스산하다. 채만식선생이 임종 직전에 차남에게 했다는 유언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언젠가 들꽃이 필 때 다시 찾아와 선생의 묘소에 헌화하기로 하고 그의 고향 마을을 떠난다.
“외투, 동복, 두벌의 춘추복은 사후에나마 생색이 있도록 팔아서 장래비와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라.”
-채만식 유언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동에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 가지고는 한강이나 영산강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 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이 제주도를 건너보고 뜀을 뛸 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 또 한 번 우뚝 높이 솟구친 갈재와 지리산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 가지고 장수로 진안으로 무주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그놈이 영동 근처에서는 다시 추풍령과 속리산의 물까지 받으면서 서북으로 좌향을 돌려 충청좌우도의 접경을 흘러간다.
그리고 북쪽 줄기는, 좀 단순해서, 차령산맥이 꼬리를 감추려고 하는 경기 충청의 접경 진천 근처에서 청주를 바라보고 가느다랗게 흘러내려오다가 조치원을 지나면 거기서 비로소 오래 두고 서로 찾던 남쪽 줄기와 마주 만난다.
이렇게 어렵사리 서로 만나 한데 합수진 한 줄기 물은 게서부터 고개를 서남으로 돌려 공주를 끼고 계룡산을 바라보면서 우줄거리고 부여로, 부여를 한 바퀴 휘돌려다가는 급히 남으로 꺾여 단숨에 논메, 강경이 까지 들이닫는다.
여기까지가 백마강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녀 적이라고 하겠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가 옳게 금강이다. 향은 서서남으로, 빗밋이 충청·전라 양도의 접경을 골타고 흐른다. 이로부터서 물은 조수까지 섭쓸려 더욱 흐리나 그득하니 벅차고, 강 넓이가 훨씬 퍼진 게 제법 양양하다. 이름난 강경벌은 이 물로 해서 아무 때고 갈증을 잊고 촉촉하다.
낙동강이니 한강이니 하는 다른 강들처럼 해마다 무서운 물난리를 휘몰아 때리지 않아서 좋다
- 채만식의 소설 ‘탁류’ 중에서 인용
■ 북촌 월남 이상재 집터의 단상
북촌에 있는 월남 이상재(1850~1927)의 집터는 손병희 선생 집터와 인접해 있다. 종로구 가회동 156(가회동 주민센터 앞)이다.
이상재선생생가지(李商在先生生家址)는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 있다. 생가에서 남녘으로 펼쳐진 들이 넓은 평야지대다. 들이 끝나는 곳에는 산들이 병풍처럼 종지리 마을과 한산지역을 둘러치고 있다.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복원되었다. 복원전의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전한다. 생가는 1955년에 무너지고 1972년과 1980년에 복원하였다. 이 집의 특징으로는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담이 없는 개방형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이상재선생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이상재 선생은 한양으로 1867년 과거에 응시하러 갔다가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으로 낙방한다. 이에 실망하여 한산의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려 했지만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게 된다. 이상재 선생은 기막힌 유모 감각으로 일화를 많이 남긴 분이다.
을사늑약이 있은 후 우연히 그는 조선 미술협회 창립 축하연이 열렸다. 상석에는 ‘이토히로부미’와 이완용, 송병준이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이상재 선생은 화가 나서 견딜 수 가 없어서 한 마디 했다.
“ 두 대감님들께서는 일본 동경으로 이사를 가시면 좋겠오.”
두 사람이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대들은 나라를 망치는 데는 천재이니,
동경에 가서 살면 일본제국도 망할게 아니겠오?”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총무국장에 임명되어 탐관오리를 척결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힘썼으나 조선의 운명은 기울고 있었다. 참다못한 이상재 선생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윤치호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 보면서 민족의 독립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독립협회는 오래가지 못했다. 1898년 12월 25일 조선의 조정에서 오히려 탄압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미 일제의 마수가 주변에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낙향하여 초야에 묻힌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당하면서 그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일제의 강압적인 민족 압살을 보다 못한 그는 다시 기독교에 희망을 걸게 된다. 1914년 전국의 YMCA를 흡수하는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를 조직한다.
이 시기에 이미 모든 민간단체는 일제에 의해 해산당했으며, 집회와 출판,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직 YMCA만은 해산당하지 않았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그는 3,1운동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한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기도 했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그 해 1927년 3월 29일 사망하여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로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된다. 시신은 한산 선영에 안치되었다가 1957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으며, 변영로(卞榮魯)가 비문을 지었다.
저서에는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靑年爲國家之基礎)’, ‘진평화(眞平和)’, ‘경고동아일보집필지우자(警告東亞日報執筆智愚者)’, ‘청년회문답’, ‘상정부서(上政府書)’, ‘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가 있다.
이상재 선생은 문헌서원과 근방에 있던 ‘봉서사’를 자주 찾는다.
그가 오래전에 걷던 길을 간다. 문헌서원 가는 길에서 오른쪽을 따라 난 길을 따라 완만한 산길을 오르면 그곳이 건지산성이다. 건지산성(乾芝山城)은 한산면(韓山面) 지현리(芝峴里)에 있는 건지산 봉우리에 흙과 돌로 쌓은 백제시대 산성이다. 둘레가 약 1,3KM의 작은 산성이지만 이 성의 의미는 남다르다. 백제가 멸망한 후 다시 백제를 찾기 위해 그 유민들이 이곳을 무대로 부흥운동을 하였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곳이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로 알려저 있던 주류성(周留城)이라는 설이 있다.
■ 북촌 손병희 집터의 단상
의암 손병희(1861~1922)은 충북 청원(청주)에서 출생했다. 손두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둘째부인 최씨이다. 유년시절부터 자신과 같은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을 지니고 성장한다. 그는 가난한 삶에서도 의협심을 가지고 약한 자를 멸시하는 자들을 증오했다. 강자에게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
12세 때 관청에 공금을 납부하러 가던 중 눈길에 쓰러진 사람의 구휼비로 그 비용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감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한기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던 정이 많았던 청년이었다. 그의 나이 22세 때인 1882년(고종19년) 큰조카인 손천민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한다.
1885년 2대 동학교주 해월 최시형을 독대하며 독실한 신도로 거듭났으며,
1892년에는 최시형등 동학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한다. 동학의 대표 40여 명은 광화문 앞에 엎드려 척왜척양(斥倭斥洋)을 외쳤으며, 충북 보은군 장내에서 보국안민과 척왜척양등 조선 조정에 대하여 시위를 벌인다. 이런 일련의 운동대열에서 손병희는 최시형의 참모로 크게 활약한다.
삼정의 문란과 지방 수령의 수탈을 통한 민심 이반은 동학교도들의 교세를 더욱 확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에 전봉준의 남접의 동학교도들은 조정과 싸움을 준비하고 항쟁한다. 남접의 무력 투쟁에 대해 최시형은 타협을 하려고 했다.
이 무렵 손병희는 북접통령으로 임명되어 통령기를 받고 공주전투 등 왜적과 싸움을 전개한다. 북접의 동학교도를 지휘하여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한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크게 패배해 수 많은 동학도들이 이 싸움에서 죽어갔다.
엄청난 절망감을 경험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최시형과 충주부근으로 피신한다. 그러나 최시형과 손병희는 계속해서 관군들의 추격을 받게 된다.
그는 함경도와 평안도지역으로 피신지역을 옮기고 교세를 오히려 확장한다.
이런 행동들로 인해 그는 교주 최시형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는다. 1897년 12월 24일 제3세 교주로서의 실질적인 동학의 책무를 인계 받는다. 1898년 3월 최시형이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6월에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교주가 된다. 교주가 된 뒤에 그는 우리 국토의 많은 기행하며 동학의 재건에 목숨을 건다.
우금리전투에서 대패했던 원인을 찾기 위해 세계사를 공부할 필요를 느낀 그는 미국을 살펴볼 계획으로 1901년에 동생 병흠과 이용구와 함께 나가사키를 거쳐 오사카에서 생활했다. 이곳에서 감시와 목숨에 위협을 느끼자 다시 상해에서 몇 개월간 미국행을 결행하려고 하였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일본에서 당시 유학을 하고 있던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이진호, 박영효등과 가명을 하고 만나기도 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국내외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망명인사들과 일본에 유학생들은 국내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자극을 주었다. 손병희는 오세창, 권동진, 최린 등과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한다.
그는 독립운동의 대중화와 일원화 그리고 비폭력의 3개 원칙을 정했다.
독립운동은 폭넓은 지지를 위해 박영효, 한규설, 윤치호 등과 이완용까지 설득하여 독립구국에 대열에 합류시키고자 했던 사람이 손병희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실패한다. 결국 그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3.1운동이 주체로 준비하였다. 초기에는 민중봉기를 할 생각도 하였지만 결국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을 염려하여 비폭력운동으로 3.1운동을 기획했다.
평화적인 토대위에 3.1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손병희의 전략이었다.
3,1운동 당일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검거되어 3년형을 구형받았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그러나 1922년 5월19일 세상을 떠난다. 그의 사위가 소파 방정환이다.
■ 화가 고희동 옛집 탐방
국내 첫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 1886-1965)은 관수동에서 태어났다.
수송동에서 청년기를 보낸 고희동은 일본유학(1908-1915)을 다녀와 1918년 원서동 16번지에 집을 짓고 이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고희동이 세상을 떠난 후 소유주가 바뀌면서 2003년에는 가옥이 멸실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노력으로 보존되어 2004년에는 문화재로 등록됐다.
고희동이 41년간 주거했으며 화가 지망생들을 가르치면서 작품 창작 활동을 하였던 장소로 한국미술사의 역사가 담긴 집이다. 대지 540㎡에 연면적 250㎡ 규모로 ㄱ자형 구조를 이루는 4동의 단층의 개량한옥이다. 1918년 당시 서양 주택 문화와 일본 주택 문화의 장점을 조화시켜 한옥에 적용하여 지은 실용적인 주택이다. 이 가옥은 건축학적으로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개화기에 서양화를 개척한 인물이 있다. 그는 지금은 사라진 서울 정동에 있던 한성법어학교(프랑스학교)에서 서양미술을 접했다.
화가 고희동(高羲東, 1886년~ 1965년)이다. 화가 안중식의 문하생이 되어 한국화와 동양화를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익혔다. 고희동이 도쿄미술학교에서 졸업작품으로 그린 3점의 유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다. 제목이 〈자매〉라는 그림은 두 젊은 여인상을 그린 것이고, 자화상으로 한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개화기풍의 청년상과 조선의 양반분위기의 자화상의 작품이다.그러나 고희동이 처음부터 서양화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15세에 결혼한 고희동은 1904년 궁내부 광학국 주사로 근무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관직을 사임한다.
정치적인 것을 멀리하기 위해 그가 찾은 것은 화가의 길이었다. 안중식(1861~1919)의 문하로 들어가 전통적인 동양화를 공부했던 이유다. 안중식은 조석진(1853~1920)등과 함께 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던 어진화가(御眞畵家)였다. 호는 춘곡(春谷)이며, 본관은 제주(濟州)이고, 아버지는 구한말 군수를 지낸 고영철(高永喆)이다.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으며 부친의 근무지였던 경상도 봉화, 함경도 고원 등지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서양식 유화작품이 일반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점과, 그리고 작품의 모델이 기생이었다는 점에서 장안의 화제가 되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중앙학교의 미술교사로 근무하면서 유화기법과 목탄 데생을 소개하며 신미술교육의 보급에 노력했다. 서양화에 한계를 느낀 고희동은 중반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양화로 전환한다.
이때부터 그는 미술단체를 조직하고 화단을 발전시키는 운동에 노력을 기울인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그간 조선시대에 전문 화가를 양성했던 도화서제도(圖畵署制度)가 폐지되고 화가들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나 단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양화와 서양화 작가를 포함한 범미술계를 조직적인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민족미술단체 였던 서화협회를 발족했다. 서화협회 회원들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며, 1936년 15회까지 서화협회전이 지속되었다.고희동은 서화협회전의 중단 이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도 거부하며 해방을 기다렸다. 해방공간에서 고희동은 민족미술의 발전을 위해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을 맡으며 친일작가들을 제거했다. 모든 문화단체와 함께 미술단체 역시 이 기간은 좌우익이념의 대립과 주도권다툼이 치열했다. 고희동은 우익을 대변하는 조선미술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한다.
1948년 제1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49년 창립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53년 대한미술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사실상 국전을 주도했으며 8회전까지 동양화심사부 위원장을 6차례 연임했다. 정도로 큰 힘을 발휘 4·19혁명이후에는 정치에도 관여했다. 신민당에 입당하여 참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 휘문고보터 탐방
-정지용, 박종화, 이태준 모교
■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
휘문고보터에는 현재 현대빌딩이 세워져 있다. 그 어디에도 휘문학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은평구애서 정지용 시인을 선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지용은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한국 현대시의 발전에 결정적인 토대를 확보한 시인이다. 대표작으로는 「향수」, 「유리창」, 「호수」 등이 있다.
정지용 초당터 표지판은 시인이 납북되기 전 1950년까지 살았던 곳을 기념하여 2016년 은평구에서 기념표지판을 설치하였다. 표지판에는「녹번리」시가 새겨져 있다.
여보
운전수 양반
여기다 내버리고 가면
어떡하오
녹번리까지만
날 데려다주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아니라
녹번리까지만
날 좀 데려다주소
- 정지용 시 「녹번리」부분
옥천에는 정지용의 시⟪고향⟫을 돌에 새긴 시비(詩碑)가 서 있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더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정지용 시인의 시 <고향> 전문
이 시는‘고향'이란 제목의 시이며 1932년에 쓰여 졌다. 정지용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휘문고보 교사로서 근무할 때다.
<고향>의 분위기와 상황은 국토의 상실감이 원인이다. 고향은 일제에 빼앗긴 땅, 국권상실로 인해 전처럼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도 제철을 알아 울어대지만, 마음은 떠도는 구름이다. 유년 시절의 서정적인 풀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결국 고향에 돌아왔지만 진정으로 고향에 돌아온 것은 아니다. 향수를 쓴 이후 일본 유학을 하는 기간에 이상적 공간이었던 고향의 변질을 목격하면서 쓴 시다. 자신의 갈등이 농축되고 슬픔의 이미지로 형상화 한 고향의 모습은 일제강점기의 민족 애환의 가요로 불려 지게 된다.
노주인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忍冬) 삼긴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서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曆)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정지용 시인의 시 인동차(忍冬茶) 전문
세상을 등진 듯한 노인은 궁벽한 산골의 어느 산중에서 자주 인동차를 마시며 살아간다. 그러나 노인의 삶은 가난해 보이지 않고 고고하다. 방에는 자작나무 숯불이 화로에 발갛고 그 훈기로 한쪽 구석에는 무우순이 파랗게 돋기 때문이다.
때는 겨울, 세상이 싫은 데 달력을 보아서 무엇 하겠는가. 눈 내린 국토는 순결하다. 시인이며, 평론가인 김기림은 정지용 시인을 “조선 신시사상(新詩史上)에 새로운 시기를 그으려한 선구자이며, 한국의 현대시가 지용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소월과 지용은 동갑이지만, 그들의 시를 보면 100년의 차이가 난다”고 유종호 평론가는 평했다. 소월이 민족의 한(恨)을 정서적 바탕으로 한글로 표현하였다면, 지용은 시적 대상의 정확한 묘사력과 언어의 조탁, 시적 기법의 혁신으로 모국어를 현대화시킨 장본인이다.
다음은 <정지용사이버문학관>의 자료를 인용한 정지용 시인의 연보이다.
1902년(1세) 5월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정태국과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한약방을 경영하여 여유 있는 생활을 누렸으나 어느 해 여름 홍수로 집과 재산을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부친의 둘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동생 둘이 있었다. 지용의 아명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태몽을 꾸었다하여 지룡(池龍)이었고, 이 발음을 따서 본명은 지용(芝溶)으로 했으며, 세레명은 프란시스코이다.
1910년(9세) 옥천공립보통학교(현재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한다.
1913년(12세)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한다.
1918년(17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며, 학교성적은 우수하였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교비생으로 재학한다. 휘문재학 당시에 3년 선배인 홍사용, 2년 선배인 박종화, 1년 선배인 김영랑(김윤식), 1년 후배인 이태준 등이 있다. 재학 중에 박팔양 등과 8명의 동인지<요람>을 프린트판으로 10여 호를 출간했다.
1919년(18세)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발생된 휘문사태의 주동자가 되어 이선근과 함께 무 기정학을 받고 1, 2학기 수업을 받지 못했다.
12월 <서광>창간호에 소설 <3인>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지용의 유일한 소설이 며, 첫 발표작 품이 되었다.
1922년(21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의 친구 유복영의 집에서 생활한다. 마포에서 첫 시작품인 <풍랑몽>을 쓴다.
1923년(22세) 휘문고보의 재학생과 졸업생이 함께하는 문우회에서 만든 <휘문>창간호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한다.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에 있는 동지사(同志社)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24년(23세) 시 <석류>, <민요풍 시편>을 쓴다.
1925년(24세) 시 <새빨간 기관차>, <바다>등을 쓴다.
1926년(25세) <학조>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등 9편의 시, <신민>, 문예시대>에 <Dahlia>, <홍 춘>등 3편의 시를 발표하며, 문단활동이 시작된다.
1927년(26세) <벗나무 열매>, <갈매기>등 7편의 시를 교토와 옥천을 오가며 쓴다.
<신민>, <문예시대>, <조선지광>, <청소년>, <학조>지에 <갑판우>, <향수>등 30여 편의 시를 발표한다.
1928년(27세) 장남 구관 출생(음력2월)한다. <동지사문학>3호에 <馬1·2>를 발표한다.
1929년(28세) 동지사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9월 모교인 휘문고보 영어교사가 된다. 종로구 효자동에서 가족과 함께 살면서 12월에 시 <유리창>을 쓰 다.
1930년(29세)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하며, 동인으로 박용철, 김영랑, 이하윤 등이 함께했다. <조선지광>, <시문학>, <대조>, <신소설>, <신생>지에 <겨울>, <유리창>등 20여 편의 시와 역시(譯詩)등 3편을 발표하다.
1932년(31세) <신생>, <동방평론>, <문예월간>지에<고향>, <열차>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다.
1933년(32세) 삼남 구인 출생한다. 6월에 창간된 <가톨릭 청년>지의 편집고문을 맡는다.
1934년(33세) 종로구 재동으로 이사하고 장녀 구원 출생하다. <가톨릭 청년>지에 <다른 한울>,<또 하나 다른 태양>등 4편의 시를 발표하다.
1935년(34세) 첫 시집 <정지용 시집>을 시문학사에서 출간하고, 작품 89편으로 수록되었다.
<가톨릭청년>,<시원>,<조선문단>지에 <홍역>,<비극>등 8편의 시를 발표한다.
1936년(35세)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이사한다. 북아현동 자택에서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조광>, <소년>지에 <옥류동>, <별똥이 떨어진 곳>을 발표하였다.
1938(37세) <동아일보>,<조선일보>, <삼천리문학>, <여성>, <조광>, <소년>, <삼천리>, <청색지> 에 산문 <꾀꼬리와 국화>, 산문시 <슬픈 우상>, <비로봉>, 평론 <시와 감상>, 그외 수필 등 약 30여편을 발표하는 한편 블레이크와 휘트먼의 시를 번역하여 최재서 편 (編)의 <해외서정시집>에 수록하였다. 천주교에서 주관하는 <경향잡지>를 돕는 등 문필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한 해였다.
1939년(38세) 문장지의 시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등을 등단시켜 한국시단의 토대를 마련한다. 당시 소설부문의 추천위원은 이태준 이었다. <동아일보>, <박문>, <문장>, <학우구락부>, <휘문>지에 <수산12>, <백록 담>등 7편의 시와 <시의 옹호>, <시의 언어>등 5편의 평론, 시선후평 및 수필등을 발표하였다.
1940년(39세) <여성>, <태양>, <문장>, <동아일보>, <삼천리>지에 기행문 <화문행각(畵文行脚)> 과 서평 및 시선 후평과 수필, 시<천주당>등을 발표하였다.
1941(40세) <문장>22호 특집으로 <조찬>, <진달래>들 10편의 시가 특집으로 게재되었다. 두번째 시집 <백록담>이 문장사에서 발간되었다.
1944년(43세) 태평양 전쟁을 피해서 부천군 소사읍 소사리로 이사하였다.
1945년(44세) 해방과 함께 휘문중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현재 이화여자대학교)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다.
1946년(45세) 다시 서울의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사하였다.
6월에 <지용시선>이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이것은 <정지용시집>과 <백록담> 에서 <유리창>등 25편을 지용 자신이 가려 뽑아낸 것임. 경향신문사 주간에 임명 되었으며,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분과위원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본의가 아니었으므 로 활동한 일은 없다.
1947년(46세) 경향신문사의 주간직을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강사로도 출강하면서, <경향신문>에<청춘과소년>등 7편의 번역시 (휘트먼 원작)와 <사시안의 불행>등 시문과 수필을 발표하였다.
1948년(47세) 이화여자대학교를 사임하고 녹번리초당(현재 은평구 녹번동)에서 독서와 서예를 하며, 소일한다. 박문출판사에서<문학독본>이 출간되었다. <사시안의 불행>등 37편 의 시문, 수필, 기행문 등이 수록이 수록되었다.
1949년(48세) <산문>이 출간됨(3월), 시문, 수필, 번역시(휘트먼) 등 55편이 수록되었다. 1950년(49세) 한국전쟁이 터지자 북한의 정치보위부로 끌려가 구금되었다.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곳에서 이광수를 포함한 33인등과 함께 수용 되었다가 폭사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71년 부인 송재숙 70세를 일기로 별세한다.
1982년 장남 정구관, 조경희, 송지영, 이영도, 모윤숙, 김동리, 김춘수, 정비석, 김정옥, 한갑수, 박화성, 최정희. 박두진, 조풍연, 윤석중, 백 철, 구상, 이희승, 양명문, 피천득, 이봉구, 이헌구, 김팔봉, 김갑순, 유종호, 이숙례, 이봉순, 문덕수, 백낙청, 노기남, 황동규, 김현자, 이선근, 김학동 등 48명의 문인과 각계인사들이 납북 후 묶여있었던 정지용문학의 회복운동을 시작하였다.
1988년 3월31일 정지용의 문학이 해금됨. 4월 지용회 결성. 초대회장 방용구. 5월 15일 세종문화 회관 소강당에서 제 1회 지용제를 지냄, 6월 25일 고향인 옥천의 관성회관에서 다시 지용 제 개최 이후 16회를 진행했다.
1989년 지용시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제1회 수상자 박두진, 2회 김광균, 3회 박정만, 4회 오세영, 5회 이가림, 6회 이성선, 7회 이수익, 8회 이시영, 9회 오탁번, 10회 유안진, 11회 송수권, 12회 정호승, 13회 김종철, 14회 김지하, 15회 유경환
1997 제2대 회장 이근배 시인이 취임하다.
2002년 5월 정지용 탄신 100주년 서울지용제 및 지용문학심포지움 개최하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안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 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시<향수> 전문
<향수>는 1923년 3월에 쓴 정지용 시인의 대표시가 된 작품이다. 그의 나이 22세 때다. 일본 동지사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쓴 이 시는 전체적으로 자신의 고향 옥천을 생각하면서 쓴 시이지만 꼭 자신의 고향만을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
보편적인 우리 국토의 어디나 향수가 지닌 정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제1연의 작품의 무대는 고향 마을을 주변의 자연적인 공간이다. 넓은 벌판과 그 벌판 동쪽 끝으로 흐르는 옛이야기가 스며있는 실개천이 흐른다.
실개천은 그가 유년시절 물장구치며 친구들과 놀던 장소이다. 고기잡이와 다양한 놀이를 하던 곳이며 황소가 울음을 울며 지나던 곳이다. 봄의 고향의 정경인 벌판 실개천과 황소를 그리워하고 있다.
제2연은 고향의 겨울밤 풍경과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표현하고 있다. 질화로의 재가 식어지면, 문틈으로 찬 바람소리가 들린다. 밤은 깊어지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는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며 잠이 든다. 질화로는 겨울을 상징적인 시어이다. 질화로가 있는 방은 포근하다. 어른들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늙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이 가슴을 흔든다.
제3연은 유년기에 자신이 직접적인 경험했던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회고하고 있다. 고향 땅에서 살았던 유년의 보았던 파란 하늘과 놀이였던 화살놀이를 하면서 뛰놀던 풀섶 등을 그리워한다. 맑고 순결한 마음을 담게 해준 고향의 고맙고 그리운 모습을 표현하였다.
제4연에서는 고향에 살고 있는 어린 누이와 아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시골의 고단한 노동과 생명력 강한 여인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자신을 위해 고생을 하고 있는 조강지처의 모습과 유년 시절을 고향에서 함께 보낸 누이를 그리워한다.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이다.
제5연은 정겨운 농가의 풍경이다. “하늘에 있는 별, 서리 까마귀 우짖고 지나가는 지붕과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아 도란도란” 숭늉처럼 정감 있는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은 정지용 시인이 다시 회복하고 싶은 분위기다.
오빠가 가시고 난 방안에
숯불이 박꽃처럼 세워간다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여
이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
망토 자락을 녀미며 녀미며
검은 유리만 내여다 보시겠지 !
오빠가 가시고 난 방안에
시계소리 서머 서머 무서워
- 정지용 시인의 시 ·무서운 시계(時計)
정지용의 객지체험과 남매간의 정이 오롯하게 담겨 있는 작품이다. 오빠는 대처로 떠났다. 방안에는 화로에 담긴 숯불이 박꽃처럼 하얗게 시들어 간다. 남은 동생은 밤새 타들어가 하얗게 박꽃처럼 사위는 숯불처럼 속이 탄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에 기적소리 들린다. 때는 겨울, 고향 집에서 동생과 이별한 밤기차에 몸을 실은 오빠는 계속 망토자락을 여미며 호롱불도 비치지 않는 차창 밖을 내다본다. 혼자 남은 소녀는 오빠가 떠나고 난 추운 밤, 혼자 듣는 시계소리기 무섭다. “서마 서마”는 소녀의 두려움과 외로운 마음이 함께 담겨 있다.
온 고을이 받들 만 한
장미 한 가지가 솟아난다 하기로
그래도 나는 고와 아니하련다.
나는 나의 나이와 별과 바람에도 피로웁다.
이제 태양을 금시 잃어버린다 하기로
그래도 그리 놀라 울리 없다.
실상 나는 또 하나 다른 태양으로 살었다.
사랑을 위하여 입맛도 잃는다.
외로운 사슴처럼 벙어리 되어 산길에 슬지라도-
오오, 나의 행복은 나의 성모마리아 !
-정지용 시인의 시 <또 하나 다른 태양> 전문
종교적 언어와 의미가 엄선되어 있는 작품으로 간결하다. 성모마리아를 다른 태양으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라지 않는다. 성모마리아를 섬기는 행복이 가장 숭고하다.
■ 박종화의 삶과 문학
월탄 박종화(1901~1981)가 거주했던 평창동 고택은 아름다운 한옥이다. 1975년 충신동에서 평창동128-1번지로 그대로 옮겨와 복원했다. 충신동에 있던 이 집은 문인들의 단골 모임의 장소였다. 충신동에 있던 한옥이 한국전쟁 때에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서 좌익성향의 문학단체였던 <조선문학가동맹>의 사무실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집은 문인들의 사랑방이었으며, 월탄 박종화가 8년 동안 원고지 2만장의 장편소설<세종대왕>을 집필하고 1981년 세상을 떠난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아름다운 정원이 있고 안쪽에 ㄱ자로 이어진 본채와 ㄷ자 형태의 사랑채가 잘 어울린다. 이집이 전형적인 아름다운 고택이라고 찬사를 보냈던 사람은 서울대박물관장을 역임한 김원룡 박사였다. <금삼의피>, <세종대왕>, <자고 가는 저 구름아>등 많은 작품들의 산실이다.
호는 월탄(月灘) 이외에도 춘풍(春風), 조수루주인(棗樹樓主人, 釣水樓主人)의 예명이 있다. 서울 태어났으며, 청소년시절에 이미 12년간 한학공부를 했으며, 1920년 휘문의숙을 졸업했다. 1947년 성균관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1949년 초대 한국문학가협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서울신문사 사장, 1955년 예술원 회장을 역임했으며, 제1회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1966년 제1회 5·16민족상을 수상한 상금으로‘월탄문학상’을 제정했다.
월탄의 문학 활동은 1921년 장미촌 창간호에 처녀작 <오뇌의 청춘>과 <우유빛 거리>의 두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장미촌은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이다. 황석우가 주관하여 장미촌사에서 1921년 5월 24일에 발간했다. 그러나 발행인은 미국인 선교사 필링스였으며, 한국명으로 변영서(邊永瑞)이다. 황석우는 김안서와 함께 <폐허> 창간호를 발간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장미촌>을 발행했다. <장미촌>은 총 24면의 소책자로 창간호가 마지막 호가 되었지만,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이기 때문이다. 창간호 표지의 권두의 <선언 宣言>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인간으로서의 참된 고뇌의 촌에 들어 왔다. 우리들의 밟아 나가는 길은 고독의 끝없이 묘막(渺漠)한 설원(雪原)이다. 장미, 장미, 우리들의 손에 의하여 싹나고, 길리고, 또한 꽃피려는 장미”
사랑의 붉은 실을 얻으랴 하야 삶의 회색방에 취하랴 하야 넘어지는 볕 우에 마음 조리며 핏 빛 휘장을 그는 만지다. 새파란 환영(幻影)을 그가 안아서 달디 단 흰 불을 그가 살을 제 상자(喪者)의 울음이 어디서 나노. 어디서 상자의 웃음이 나노. 슬픈 멜로디에 그가 앉아서 고운 부끄럼에 그가 쌓여서 떨리는 희고 푸른 손가락으로 핏 빛 휘장을 그는 헤치다. 향어린 방 안에 그는 들어서 삶의 회색을 찾으렸더니 늙은 흰 머리 긁고 서 있는 늙은 이 중의 한숨을 듣다. 넘어 서는 엷은 볕 위에 희미한 봄 길 그 넘어에서 푸른 무덤[靑塚]은 그를 부르다.
오열의 피 조수(潮水)에 그는 쓸려서 신음의 눈물을 조수에 뿌릴 제. 붉은 실은 어디로 갔노. 붉은 실은 어디로 갔노.
박종화 -오뇌의 청춘(懊惱의 靑春) 전문
선(線)은 가냘픈 푸른 선은 아리따웁게 구을러 보살(菩薩)같이 아담하고 날씬한 어깨여 사월 훈풍(薰風)에 제비 한 마리 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靑磁器)! 빛깔 오호! 빛깔 살포시 음영을 던진 갸륵한 빛깔아 조촐하고 깨끗한 비취(翡翠)여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 물방울 뚝뚝 서리어 곧 흰 구름장 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호 이것은 천년 묵은 고려 청자기(靑磁器)! 술병 물병 바리 사발 향로 향합 필통 연적 화병 장고 술잔 벼개 흙이면서 玉이더라. 구름 무늬 물결 무늬 구슬 무늬 칠보(七寶) 무늬 꽃 무늬 백학(白鶴) 무늬 보상화문(寶相華文) 불타 무늬 토공(土工)이요 화가더라. 진흙 속 조각가다. 그러나 이것은 천년의 꿈 고려 청자기(靑磁器)!
-박종화 시 청자부(靑磁賦) 전문
1922년에는 백조(白潮)의 동인이 되었다. 백조 창간호에 <밀실로 돌아가다>와 <만가>의 두 편의 시와 <영원의 승방몽>이라는 수필을 발표한다.
시 <흑방비곡>과 <사의 예찬>을 발표함으로써 낭만주의 작가로 자리를 잡았다.
보라!
때 아니라. 지금은 그 때 아니라.
그러나 보라!
살과 혼,
화려한 오색의 빛으로 얽어서 짜 놓은
훈향(薰香) 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검은 옷을 해골 위에 걸고
말없이 주토(朱土) 빛 흙을 밟는 무리를 보라.
이 곳에 생명이 있나니
이 곳에 참이 있나니
장엄한 칠흑(漆黑)의 하늘, 경건한 주토의 거리
해골! 무언(無言)!
번쩍이는 진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하냐.
아! 그렇다. 영겁(永劫) 위에.
젊은 사람의 무리야
모든 새로운 살림을
이 세상 위에 세우려는 사람의 무리야.
부르짖어라, 그대들의
얇으나 강한 성대(聲帶)가
찢어져 해이(解弛)될 때까지 부르짖어라.
격념(激念)에 뛰는 빨간 염통이 터져
아름다운 피를 뿜고 넘어질 때까지
힘껏 성내어 보아라
그러나 얻을 수 없나니,
그것은 흐트러진 만화경(萬華鏡) 조각
아지 못할 한 때의 꿈자리이다.
마른 나뭇가지에
곱게 물들인 종이로 꽃을 만들어
가지마다 걸고
봄이라 노래하고 춤추며 웃으나,
바람부는 그 밤이 다시 오면은
눈물나는 그 날이 다시 오면은
허무한 그 밤의 시름 또 어찌하랴?
얻을 수 없나니, 찾을 수 없나니,
분(粉) 먹인 얇다란 종이 하나로,
온갖 추예(醜穢)를 가리운 이 시절에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나니.
아, 돌아가자.
살과 혼
훈향내 높은 환상의 꿈터를 넘어서
거룩한 해골의 무리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
- 박종화 시 <사의예찬> 전문
1923년 백조 3호에 발표한 박종화의 <사의예찬>은 이탈리아 출신 작가 다눈치오의 장편 소설 <죽음의 승리>에서 영향을 받아서 쓴 시다.
5연으로 된 이 시는 죽음을 찬미하고 있다. 현실보다 죽음의 세계를 참되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식민지 현실은 죽음보다 가혹하였으며, 그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고 미래가 암담하다.
1924년에 첫시집 <흑방비곡>을 출간했다. 1924년 6월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한 흑방비곡은 박영희의 서문과 월탄의 자서(自序)가 있고 총 55편의 작품을 5부로 나누어 수록했다. 월탄이 쓴 자서는 당시 자신의 심리상태와 문단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내 노래이며 내 울음이다. 이곳에 무엇을 찾으며 무엇을 자랑할 게 있으랴마는 나 젊은 어린 혼이 풋된 마음과 거짓 없는 참을 다하야 밤마다 홀로 읊어 가슴 속 깊이 간직해 두었던 내 노래이다. 위론 선도자 없으며 아래론 내 길로 오는 동무 드물었도다. 거치른 폐허에 외로히 섰는 어린 내 마음이야 얼마나 호젓했던고. 1919년부터 1923년의 다섯 해 동안은 나로 하여금 이 부끄러운 적은 시집을 쓰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 아무러한 큰 힘을 세상에 줌이 없을 줄을 알 때에 내 마음 속에는 애오라지 만가지 회포가 조래(가고 오다)할 뿐이다. 시단은 의연한 초창(草創)의 시절, 문단은 여전한 황폐의 광야! 어찌 뜻 있는 사람이고야 이를 울지 아니하며 마음 없는 사람이 아니고야 어찌 이를 탄식치 아니하랴. 우리의 살림엔 어느 때나 웃음이 임하며 우리의 예술은 어느 때나 꽃이 피일고! 이 시집 속에 있는 <자화상>, <오뇌의 청춘>은 1919년과 1921년 사이에 상징시, 그 경역에 내가 방황할 때 지은 것이며, <흑방비곡>, <푸른 문으로>, <정밀(靜謐)> 등은 1921년부터 1923년 사이에 새로히 내 신경지를 개척하랴는 순진의 관조 아래서 지은 것임을 끝에 임하야 말하야 둔다
- 월탄 <흑방비곡> 서문
1936년에 발표한 소설 <금삼의 피>와 대춘부(1937)는 역사소설은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1940년에는 장편 다정불심(多情佛心)을 발표하여 역사소설 작가의 토대를 확보한다. 민족(1945), 홍경래(1946), 청춘승리(1947)을 발표하고, 임진왜란을 조선일보에 946회를 연재했다.
1961년에 회갑을 맞이한다. 그 기념으로 <월탄시선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조선일보에 <세종대왕>을 2,456회 연재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2. 서울 문학기행
- 성북동 문학기행
■ 김광섭 시인의 삶과 문학
김광섭(1905∼1977) 시인은 <성북동 비둘기>로 많이 알려진 시인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교사로 근무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혐의로 1941년 구속되어 약 4년간 옥고를 치렀던 민족시인이다.
당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기 직전 쓴 시를 읽으면, 당시의 상황이 슬픔으로 다가와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나는야 간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깊은 산 묏골 속에 숨어서 우는 작은 새와도 같이
나는야 간다 푸른 하늘을 눈물로 적시며 알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나는야 간다
- 김광섭 시인의 시< 이별의노래(서대문형무소행)> 전문
김광섭 시인은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3남3녀 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호가 이산(怡山)이다. 1917년 고향에 있는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와 중동고보를 거쳐 와세대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던 지식인이었다.
이헌구(1905~1982)에게 영향을 받아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와세다대학의 동창회지 <R>에 시 <모기장>을 발표하며 문학활동을 시작했고,
1935년 시원(詩苑)에<고독>을 발표하면서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내
하나의 생존자로 태어나서 여기 누워 있나니
한 간 무덤 그 너머는 무한한 기류의 파동도 있어
바다 깊은 그 곳 어느 고요한 바위 아래
내
고달픈 고기와도 같다.
맑은 성 아름다운 꿈은 잠들다.
그리운 세계의 단편은 아즐타.
오랜 세기의 지층만이 나를 이끌고 있다.
신경도 없는 밤
시계야 기이타.
너마저 자려무나.
- 김광섭 시인의 시 <고독> 전문
1937년 극예술연구회의 회원이 되었으며, 문인이었던 모윤숙과, 노천명 등과 교류했다. 김광섭의 첫 시집《동경》은 1938년에 간행되었다.
1945년 광복이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작품 속에도 당시의 문학적인 정서가 담겨 있다. 광복의 기쁨과 민족의식을 표현했던 시<속박과 해방>, <민족의 제전>등은 이를 반영하고 있다.
<한국자유문학가협회>를 창립하고, 회장 때에 자유문학(自由文學)지를 간행했다.
민족주의 문학론을 강조하면서 1946년에 경향신문에 <정치의식과 문학의 기본이념>, 민주일보에<문학의 당면 임무>, 1947년 만세보에 <민족문학의 방향> 1948년 백민에<민족문학을 위하여>등의 평론 등을 발표하면서 조국해방 이후 민족론의 방향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노래했다.
제2시집《마음》은 이를 대변하는 시이며, 제3시집《해바라기》에는 민족과 조국애를 담은 작품들이 많이 담겨 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김광섭 시인의 시 <마음> 부분
물과 백조의 관계를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표현하고 있다.
바람결보다 더 부드러운 은빛 날리는가을 하늘 현란한 광채가 흘러양양(洋洋)한 대기에 바다의 무늬가 인다
한 마음에 담을 수 없는 천지의 감동 속에찬연히 피어난 백일(白日)의 환상을 따라달음치는 하루의 분방한 정념에 헌신된 모습
생의 근원을 향한 아폴로의 호탕한 눈동자같이황색 꽃잎 금빛 가루로 겹겹이 단장한아! 의욕의 씨 원광(圓光)에 묻힌 듯 향기에 익어 가니
한줄기로 지향한 높다란 꼭대기의 환희에서순간마다 이룩하는 태양의 축복을 받는 자늠름한 잎사귀들 경이를 담아 들고 찬양한다
-김광섭 시인의 시 <해바라기> 전문
시 <해바라기>는 독립된 대한민국의 이념을 해로 상징하고 우리민족의 미래를 밝힌 시다. 대표시 <성북동비둘기>는 시집 제목이기도 한 성북동 비둘기는 병상속에서 얻은 인생과 자연과 문화적인 속성을 통찰한 시들이 많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 시인의 시 <성북동비둘기> 전문
성북동의 산을 파헤치며 집터를 확보하고 있던 장면은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살 곳이 없는 것을 비유적으로 하여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현대문명을 비판하면서 자연의 파괴가 가져올 위험스런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비둘기는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이며, 도시화는 도시민의 소외의식을 가중시킬 것을 예언한 시다.
김광섭 시인은 1965년 4월 어느날, 서울운동장에서 야구 경기를 관람하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했다. 시 <성북동비둘기>는 삶이 절망적일 때에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비둘기 떼를 보고 구상했다.
한용운 시인의 고택인 심우장 골목이 끝나는 정상에는 김광섭의 성북동비둘기를 표현한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시 중에 가장 유명한 시는 <저녁에>라는 시다.
유행가의 가사가 되어 불러졌기 때문이다. 1969년 월간중앙에 발표한 시다. 김광섭 시인의 투병 중에 하늘과 별에 희망을 걸었던 이 시를 읽다보면, 노래가 되어 흥얼거리게 만든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시 <저녁에> 중에서
1971년 발간된 시집《반응》은 60년대 이후의 시대적인 모순과 비리 등의 사회성을 담은 시들이 담겨 있다. 1974년 시선집을 간행하고, 1977년 세상을 떠났다.
■ 길상사
-백석 시인과 김영한, 법정 스님의 인연을 중심으로
서울 성북구 성북2동 323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길상사는 문학의 향기가 가득한 사찰이다. 그러나 이곳은 서울의 3대 요정이었던 대원각이 있던 터다. 길상사 극락전은 아미타부처를 봉안한 길상사의 본법당이지만 이곳 역시 대원각의 주요 건물이 있던 곳이다. 길상사는 백석 시인의 정인이었던 김영한이 시주한 터에 1997년 창건되어 20년이 되지 않은 사찰이지만 서울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
백석(1912~1996)은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정서에 기반을 둔 토속어를 가지고 시를 썼던 시인이다. 본명은 기행(夔行)으로 필명이 백석(白石)이다. 필명의 석(石)은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타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애송하였기 때문이란 설이 있다. 백석은 시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등단하였던 소설가이고 했다.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청산학원에서 수학했으며, 1935년 8월 조선일보에 ‘정주성’을 발표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다만 시인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세상에 표현한 것은 1936년 100권을 한정판으로 발행한 시집《사슴》이었다. 최근에 《사슴》초판본이 도서 경매전에서 7,000만원에 낙찰되어 학계를 놀라게 했다.
해방정국과 남북이 분단되기 전까지 60여 편의 시를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백석의 북방에서, 고향, 적막강산 등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이다. 대부분은 자신의 고향 마을과 자연과 사람들의 삶을 대상으로 작품을 썼지만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정서에 어울리는 민속문화와 토착어를 활용하여 유년시절과 소년시절을 회상하는 감상적인 서정시를 쓴 작가로 평가 받고 있다. 서구에 몰입적인 이질적인 문화를 통한 시적 토대를 확보하려 했던 다른 시인들과는 확연하게 그 정서를 달리했던 것이 오히려 당시 우리 시단을 풍성하게 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함흥영생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기생이었던 김영한을 만나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자야는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이백의 시에서 따왔다.
長安一片月(장안일편월) 장안의 하늘에는 조각달이 떠있고
萬尺擣依聲(만척도의성) 가정마다 두드리는 다듬이 소리가 들리네
秋風吹不盡(추풍취부진) 가을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오고
總是玉關情(총시옥관정) 옥관문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일렁이네
何日平胡虜(하일평호로) 어느 날에 오랑캐를 물리치고
良人罷遠征(양인파원정) 언제 내님은 전쟁터에서 돌아오려는가.
- 李 白(이백)의 시 子夜吳歌(자야오가)중에서 김경식 번역
晉(진)나라때에 전쟁터로 남편을 떠나보낸 여인이 불러 구전되었던 노래를 듣고
당나라 때의 유명 시인 이백이 자야사시가(子夜四詩歌)를 지으며, 춘하추동(春夏秋冬) 중에서 가을의 서정을 표현한 시다.
이 한시를 잘 알고 있었던 백석은 김영한에게‘자야’라는 필명으로 지어 주었다.
또한 백석은‘자야’를 위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써 주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 것이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김영한(1916~1999)은 유년시절에 부친을 여의고 집안이 파산하여 15세에 결혼하였지만, 1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난다.
절망했던 김영한은 당시 아악과 가무에 조예가 깊었던 하일규(1867~1960)가 운영하던 정악전습소와 기생학교(권번)에 입학하여 기생이 된다. 당시 기생명은 ‘진향’이었다.
광복과 6·25전쟁이후에도 백석을 만나지 못하면서도 김영한은 서울의 3대 요정중의 하나였다는《대원각》을 운영한다. 1997년 무렵에 이 터는 당시 화폐가치로 700억 원대였다고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다. 대원각의 터와 40개동이 넘었던 건축물을 수필《무소유》의 저자였던 법정스님에게 1987년부터 조건 없이 양도하는 조건으로 사찰로 만들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법정 스님은 김영한의 이런 기부(시주) 부탁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다가 1995년 6월13일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등록시킨다.
1997년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라는 사뭇 긴 이름의 사찰로 이름을 바꾸어 1997년 12월14일 세워졌다. 이 무렵에 김영한은 법정스님에게 ‘길상화’라는 법명과 염주를 받았다. 1999년 겨울 김영한은 세상을 떠나 유언처럼 유골은 길상사의《길상헌》뒷 편에 뿌려졌다.
김영한은 자신의 저서《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회고했다.
길상사의《진영각》에는 법정스님의 영정과 저서와 유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유해가 좁은 뜰에 봉안되어 있다. 아울러 백석과 길상화,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사랑과 인연이 숨겨진 길상사의 숲에는 문학의 향기가 주는 감동이 깃들어 있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에 어떤 기자가 그녀를 찾아 인터뷰했다.
기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재산을 헌납할 수 있으셨습니까?”
김영한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내 재산을 모두 합해봐야 백석 시인의 시 한 줄보다도 못합니다.”
《길상사》는 김영한과 백석의 사랑과 문학, 법정스님의 무소유 철학이 낳은 위대한 헌신이 살아 있는 곳이다.
필자가 길상사를 서울시(詩)문학기행의 답사지로 정한 이유다.
■조지훈 시인 <방우산장> 조형물
서울 성북구 성북동 60-44번지는 조지훈(1920~1968) 시인이 30년간 살던 집이 있었다. 그러나 이 집은 1998년에 헐리고 현재 4층 빌라가 세워졌다. 시인의 집은 사라졌지만 도로변(성북동 142-1번지)에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2014년 봄에 세워졌다. <방우산장放牛山莊> 이다.
방우산장은 성북동에 살았던 조지훈 시인이 살던 집의 이름이다. 조지훈 시인은 1953년 신천지에 기고했던 <방우산장기>에서 “설핏한 저녁 햇살 아래 내가 올라타고 풀피리를 희롱할 한 마리 소만 있으면, 그 소가 지금 어디에 가 있든지 내가 아랑곳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방우산장의 조형물에는 그의 대표시 <낙화>가 시비로 서 있다.
앞으로 이곳은 성북동 문학기행의 거점 공간이 될 것이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조지훈 시인의 시<낙화> 중에서
지조가 사라지고 있다. 지조를 지키다가는 시대의 낙오자가 된다고 야단이다.
지조를 지키며 사는 일은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인지 모른다. 국제화는 급기야 변질과 변절조차 용인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세상사가 답답하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따라가느라 도통 제정신이 아니다. 변절로 얻어진 물질의 풍성함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듯 보이지만, 지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평안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이런 현실이기에 지조를 끝까지 지키며 떠나간 이가 그립고 귀하다. 이렇게 지조있는 선비처럼 살았던 분이 조지훈 시인이다. 그에게는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가훈이 있었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빌리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인불차 (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으며, 세째는 문불차(文不借), 글을 빌리지 않았다.
이런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지조를 가지고 살며 시를 썼다.
조지훈 시인의 삶을 연대순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조지훈 시인 연표>
1920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 출생
본명: 조동탁 호: 지훈
1939년 <문장>지에 고풍의상, 승무, 봉황수
등으로 정지용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
1941년 혜화전문 문과졸업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조직
1946년 시집<청록집>(공저) 발간
1950년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 역임
1952년 시집 <풀잎단장> 간행
1956년 시집 <조지훈시선> 간행
1959년 시집 <역사 앞에서> 간행
1968년 한국시인협회장 역임
1968년 사망
조지훈 시인은 6세부터 조부 조인석 선생에게 한문을 배우기 시작한다.
선비적인 가풍의 영향으로 이 마을에 있는‘월록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혜화전문을 졸업하였지만, 그의 학문은 거의 독학이다.
1939년도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1940년‘봉황수(鳳凰愁)로 문장지로 등단한다. 정지용 시인의 추천을 받았다. 그는 역사와 민족, 민속적인 주제를 가지고 지조 있는 정서를 시풍에 담아 선비적인 시인이 되었다.
박두진(1916~1998). 박목월(1916~1978)과 함께 1946년 동인시집인 청록집(靑鹿集)을 발행하였다. 이 동인 시집 한 권의 위력은 대단했다. 오죽하면 이들을 청록파라 하지 않는가.
조지훈시인의 첫 시집은 풀잎단장(1952)이다. 시의원리(1953), 조지훈시집(1956)등을 발행하면서 왕성한 저작활동을 한다. 이승만 자유당정권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낀 그는 역사앞에(1959)와 지조론을1960년 3월호 새벽지에 게재하면서 독재정권에 대항한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한국민족운동사, 신라가요연구논고, 한국문화사서설 등의 저서가 있다. 그러나 그는 역시 시인이었다.
일제하에 친일하지 않은 몇 안 되는 문인중의 한 분이며, 특히 18세의 나이에 한용운 시인을 찾아가 독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서에서 심한 신문을 받고 오대산 월정사에 숨어 살면서 일제 말에 글로 친일하지 않았다 조지훈 시인의 삶과 문학의 언저리에서 가장 먼저 가슴에 와 닿는 시이기 때문이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훠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 시인의 시‘ 승무’ 전문
인간 번뇌를 신앙적으로 승화시키며 불교적이며 율동적인 성격을 지닌 승무는 사뭇 고전적이 우아한 어조를 띄고 있는 시다. ‘기승전결’로 구성되어 제1연과 9연 반복되는 싯구인“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가 반복되는 수미쌍관의 형식을 지닌다.
승려의 옷차림을 하고 추는 춤이 승무이다. 조지훈 시인은 승무에서 고뇌를 극복하려는 종교적 구도의 모습을 보았다. 이 여승은 생각 없이 추는 것이 아니라 이 춤을 통해서 내면의 마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
승무의 시작은 여승의 아름다운 모습을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승무를 추는 젊은 여인은 아마도 여자인 듯하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어떤 이유로 이 여인이 속세를 떠나 승려가 되었는가는 이 시에서 말하지 않고 있다. 조지훈 시인이 승무를 썼던 것은 알 수 없는 삶의 회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승의 손길과 춤의 동작에 표현하였다.
특히 1연에서 3연까지는 춤추려는 순간 여승의 모습을 조용한 영상의 움직임이 넘실거린다.
제 4연의 “빈대에 황촉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라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이다.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제 5연은 승무의 빠른 가락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동적인 분위기이다.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라는
제 6연은 동적인 순간의 조용한 분위기속에 명상의 정서가 오롯이 담겨 있다.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
제 7연은 승여의 고뇌가 해탈되는 모습이 엿보인다.
“훠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 제 8연은 춤 동작이 느린 가락으로 휘몰아가고 길고 느린 춤 동작이 긴장을 풀어주고 있다.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9연은 이 시의 마지막 연이다.
춤이 끝나가는 절 마당은 조용한 분위기고 밤의 정적이 흐른다.
승무의 시간은 오직 정적이 흐르는 밤이다. 마당에 떨어진 넓은 오동잎에는 달빛이 비추는데 춤가락이 이루어진다. 승무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추는 춤이 아니라 자신의 고민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간절한 소망의 표현이다. 이 춤의 절정은 제6, 7연에 잘 표현되어 있다. 눈동자를 살포시 올려 밤하늘의 별빛을 응시하는 간절한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하얀 고깔밑에 보이는 얼굴은 슬픈 모습이고, 아름답고 맑은 두 눈에는 어쩌면 번뇌의 눈물이 맺힌다. 그렇지만 세속을 떠나와 욕망의 집착을 버렸기에 고뇌는 별빛처럼 아득한 곳에서 반짝인다. 바로 이 표현이 “훠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인 양하고”이다. 승무의 시작과 끝에 되풀이되는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라는 구절은 전형적인 수미쌍관법이다. 수미쌍관법은 첫 연과 끝 연을 서로 관련시키는 문학적 구성법을 말한다. 문장을 반복함으로써 뜻을 강조하고, 처음과 끝에 같은 운율을 되풀이해 음악적 효과를 살려주기도 한다..
이쯤에서 조지훈의 가계도를 이해해야 한다. 조지훈 시인의 부친 조헌영(1899~1988)은 일본 중앙대 출신의 유명한 한학자였다. 그는 본래 영문학도였는데 친구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허준의 동의보감을 독학하며 의술을 익힌다. 광복 후에 초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당시에 큰 인물이었지만, 6,25때 납북되었다. 조지훈의 조부 조인석(1879~1950)은 호은종택에 영진의숙이라는 신학문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고《초경독본》이라는 책을 저술한 근대 교육자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6,25때 공산당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다가 자결하였으니, 불행한 시대가 많든 비극적인 인물이다.
조지훈 시인의 증조부 조승기(1836~1913)는 일제의 명성왕후 시해 소식을 듣고 의병이 되어 의병대장이 된 분이다. 결국 조지훈의 지조론은 우연하게 스스로 터득한 이론이 아니다.
조상 대대로의 선비정신과 지조적인 혈통을 중시하던 전통을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문중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필연성의 산물인지 모른다.
방우산방
□ 찾기: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에서 성북동 방향으로 500M 거리 도로변
■ 수연산방(壽硯山房)
《수연산방》은 소설가 이태준(1904~ ? )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의 이름이다. 이태준은《수연산방》이란 편액을 걸고 정지용, 이효석 등과 구인회를 결성하여 한국 근대문학을 주도했다. 무엇보다 수연산방은 단편 <달밤>과 <돌다리>, <색시>와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 <왕자호동>, <황진이>를 집필한 문학의 산실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무서록(無序錄)은“두서없이 쓴 글”이라는
겸손의 제목이지만, 지금 읽어도 감동으로 다가온다. 수연산방은 1999년부터 현재까지(2017년)까지 이태준의 외종손녀가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
수연산방은 정지용 시인이 질투를 할 정도로 약간의 호사를 지니며, 당대에는 아름다운 집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감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를 집둘레에 심고 병풍처럼 처진 북악을 바라보면서 작품을 썼다.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 쓴 일각대문(一角大門)을 들어서면 작은 우물과 정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고가가 반긴다. 사랑채의 기능을 누마루를 안채에 붙여 놓은 것이 특징이다.
기와지붕과 처마선의 곡선들은 우리 한옥의 옛스러운 멋이 그대로 살아있다. 당호(堂號)인 수연산방(壽硯山房)은 이 집과 잘 어울리는 현판인데“오래된 벼루서재”란 뜻이다. 문향루(聞香樓)란 의미는“향기를 맡는 집”이라 해석해야 이해가 간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각한 현판이다.
기영세가(耆英世家)는‘덕이 높고 뜻이 고매한 원로를 칭하는데, 조선 시대 나이가 많은 문신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했던 기로소(耆老所)에서 따왔다. 죽간서옥(竹澗書屋)은 ’대나무가 계곡처럼 있는 서재‘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통찻집으로 변했지만 아직도 수연산방은 아름답고 정갈한 분위기를 지닌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상허 이태준은 1904년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용담리에서 부친 이창하와 모친 순흥안씨의 1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 이태준의 가족들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그로 이주한다. 10세 전에 부모를 잃게 된 그들 삼남매는 철원의 친척집에 맡겨진다. 철원의 봉명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자립의지를 불태우며 원산으로 살 길을 찾아 고향 철원을 떠난다. 배재학당에 합격하였지만 입학금이 없어 진학하지 못하다가 1921년 휘문고보에 입학한다. 1924년 학교비리에 맞선 동맹휴교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퇴학을 당하고 더는 조국 땅에 살지 못하고 가까스로 일본으로 유학하여 상지대에 입학하면서 문학에 눈을 뜨게 된다.
1925년 7월13일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조선문단으로 등단하지만 시대일보에 게재된다. 그러나 그는 가난으로 더 이상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귀국하여 1929년에 개벽사에 입사하고, 이듬해 이화여전 음악과 출신의 이순옥과 결혼한다. 1933년에는 박태원, 이효석, 정지용이 포함된 '구인회'를 조직한다. 구인회의 활동은 6,25전쟁이 끝난 후, 북에서 그가 숙청된 이유가 되었다.
1941(38세)년에는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고, 1943년에는 고향으로 낙향하여 낚시질로 소일한다. 상허학회의 자료에 의하면 1945년 해방이 되어 문학가동맹에 참여하게 되고, 1946년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7월에 월북한다. 이 무렵 소설 《해방전후》로 제1회 해방문학상을 수상한다. 1947년 5월에 ‘소련기행’이 남쪽에서 출간되게 된다. 1948년 북조선문학예술동맹 부위원장이 되고, 한국전쟁 중에는 낙동강전선까지 종군하였고, 휴전 후인 1956년 구인회 활동과 사상성을 이유로 비판받고 숙청당했다. 이후 함흥노동신문사의 교정원과 함흥시 블록공장의 탄광노동자지구에 살다가 사망하였다는 설과, 산간협동농장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9년 탈북한 소설가 최진이 선생에 의하면, 이태준선생의 말년과 살아남은 부인, 딸들의 생활들은 비참했다고 증언한다. 그녀는 직접 이태준선생의 딸 이소현, 이소명씨가 쓴 두툼한 분량의 일기와 수기를 입수해 <이태준>이란 소설을 쓴 장본인이다. 최진이 선생이 쓴‘소설의 프롤로그’를 읽는다. 가슴이 아려온다. 그러나 이태준선생은 일제하에서도 자신만의 소설기법으로 글쓰기의 모범을 보인 몇 안 되는 작가중의 한 명이다.
순수예술을 지향하면서 우리나라의 전통적 풍취를 담은 지사적인 작품과 아름다운 글쓰기를 통해 한글표현의 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킨다. 일제의 암흑기가 깊어지던 해방직전에는 붓을 꺽고 은둔하여 일제에 묵시적으로 저항한 것조차 북한은 인정하지 않았다. 북한이 그를 숙청한 것은 문학마저 부정한 제왕적 오만이 만든 무식의 잣대였다. 일제말기 그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침묵을 지킨 부분에 대해서 그나마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남한과 너무나 상이하다. 책을 소중하게 생각한 그는 책을 다음처럼 표현했다.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면
그건 책에게 너무 가혹하고 원시적인 평가다.
책은 한껏 아름다워라.
그대는 인공으로 된 모든 문화물 가운데 꽃이요
천사요 또한 제왕이기 때문이다.
물질 이상인 것이 책이다.”
소설가 이태준이 1933년부터 1946년까지 14년간 살았다는 집에서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는 일은 의미있다. 그는 이곳에 '수연산방'이란 현판을 걸고 정지용, 이효석 등과 구인회를 결성하여 한국 근대문학을 주도하며 왕성한 집필활동을 한다.
무엇보다 이 집은 단편 <달밤>과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 <왕자호동>, <황진이>를 집필한 문학의 산실이다.
정갈하고 단아한 표현을 두고 사람들은 “시는 정지용 소설은 이태준이라네”하여 왔다. 한편 선생은 자신의 고향마을의 지명을 그대로 소설에 인용한 민족주의 소설가였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월정리, 새술막, 떡전거리, 밤가시라는 지명들은 그가 고향에 애정을 가진 향토작가였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고가라고 해서 결코 명소가 된 집은 아니다. 소설가 이태준 선생이 직접 지어 살았으며, 당대에 많은 문인들이 들나들던 집이기에 서울의 의미 있는 문학의 명소이다.
▢ 찾기: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6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1111번, 2112번 버스 승차 후 성북구립미술관에서 하차 10m
주소: 서울 성북구 성북로26길 8(지번) 성북구 성북동 248
전화:02-764-1736
평일(월~금) 11:30~22:30 주말 11:30~22:00
■ 심우장(尋牛莊)
《심우장》은 한용운 시인(1879~1944)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조선총독부가 보이지 않는 성북동 산속에 북향으로 지었으며, 불도피우지 않고 살았다. 동쪽으로 난 대문 입구 왼편에 심우장이 있고, 대문 맞은편에는 벽돌조 단층의 작은 홍보관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 오른쪽 모서리에는 한용운 시인이 직접 심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심우장》이라는 당호는“산속에서 동자가 소를 찾는다”라는 초발심을 비유한 선(禪)의 단계에서 따왔다.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ㄴ'자형 한옥이다. 중앙에 대청 2칸, 오른쪽으로는 부엌 1칸이 있으며, 부엌에서 남쪽방향으로 찬마루 1칸이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온돌방으로 들어가는 대청마루 남쪽과 찬마루 동쪽으로는 쪽마루를 놓았다.
심우장(尋牛莊)이란 편액은 유명한 서예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의 글씨다. 온돌방에는 한용운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어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한용운 시인은 시집《님의 침묵》을 통하여 한국 근대문학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88편의 주옥같은 시는 소재의 보편성을 통하여 민족정서의 확대와 한글문학의 서정을 극대화하였다.
한용운 시인은 시 뿐만이 아니라 시조, 한시, 소설 등 우리 민족의 역사와 진솔한 삶을 토대로 글을 썼던 위대한 문인이었다. 심우장은 만해의 사상과 문학, 독립의지가 집약된 공간이다.
한용운 시인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만해(卍海)다. 만(卍)은 한자로는 '가슴 만'이라고 한다. 부처의 가슴이나 손발에 나타나는 만덕(萬德)을 상징한다. 결국 그의 호 만해(卍海)는 부처님의 덕과 행복과 기쁨이 바다처럼 넓고 깊다는 뜻처럼 우리민족에게 큰 덕을 남겼다.
한용운 시인이 태어나던 시기 조선은 서구열강과 일제의 침략에 속수무책이었다. 1910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그에게는 삶 전부가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런 한용운의 민족운동은 3.1운동의 과정에서 잘 드러나 있다. 이후 그는 신간회, 광주학생운동, 창씨개명 거부 등을 계속한다. 일제말기에 대부분의 민족지도자와 지식인들이 일제의 회유에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그러나 한용운 시인은 죽는 날까지 일제와 어떤 타협도 거부하는 지조를 지켰다. 그 상징적인 집이 《심우장》이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이런 지조가 있었기에 한용운 시인의 시심은 더욱 빛나고 있다. 한용운 시인은 시집《님의 침묵》을 통하여 한국 근대문학을 한 단계 격상시켰다. 이 시집에는 88편의 주옥같은 시가 오롯이 담겨져 있다. '님'이라는 소재의 보편성을 통하여 민족정서의 확대와 서정을 아름답게 실현하였다. 한용운 시인은 시 뿐만이 아니라 시조, 한시, 소설 등 우리 민족의 역사와 진솔한 삶을 노래한 위대한 문인이었다.
'님의침묵'은 한용운 시인의 대표시다.
우리 국민중에 이 시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님의 의미를 가지고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의침묵’에서 님의 의미는 대체적으로 조국, 부처, 연인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님의침묵이 우리민족의 시집이 된 것은《심우장》이라는 상징적인 집이 존재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마지막 죽는 날까지 이 집에 살면서 민족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우장에서 맞이한 그의 죽음으로 인해 《님의침묵》은 민족의 시집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님이란 논란은 여전하다. 이런 님의 논란은 한용운 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승려였기에 님이 부처일 것이라는 추측과 독립운동가였기에 님을 조국으로 상징화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님의침묵 어디에도 님을 조국이나 부처라고 쓰지 않았다. 결국 사랑하는 연인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그의 사상적 흐름은 이것 역시 용인하지 않고 있다. 이런 3가지 애매성이 오히려 님의침묵이란 시의 문학적인 깊이를 더한다. 복합적인 해석으로서의 의미들은 '님의침묵'을 더 풍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로 끊임없이 발전하게 만든다. 여기에 한용운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 시에 흐르고 있는 사상적 흐름은 2가지이다. 불교사상과 타코르의 시와 관련된 명상적인 자연몰입의 신비주의다. 또한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과 애국사상이다. 조국과 민족을 의인화하였으며, 진리와 애인을 사모하는 정에 비유하였다.
한용운 시인의 시는 한글로 쓰여졌으며, 고도의 은유와 비유를 통해 함축성 있게 작품을 구성하였다.‘님의 침묵’은 3,1운동 실패 후, 감옥문을 나온 후에 시대 상황과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노래한 서정시이다.
시적 비유에는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일제에 대한 부드러운 저항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한용운 시인은 1913년에 불교대전을 저술한다.
이 책은 팔만대장경중에서 중요한 구절을 선정하여 분류하고 체계화한 불교사상의 요약본이다. 이 책의 완성은 불교학계로서는 대단한 성과다. 이런 천재적인 불교학자가 3,1운동의 대열에 앞장섰던 것은 그의 삶의 실천력을 말해준다. 민족의 혁명가가 된 것이다. 3년간의 감옥살이 후에 그는 1926년 한글로 《님의침묵》이라는 위대한 시집을 발행한다.
《님의침묵》은 위대한 시집의 제목이 되었으며, 한국인들의 대표적인 애송시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을 낭독할 때, 그는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 말미에 행동강령인 공약3장을 직접 썼다. “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
일제하에서 "우리 민족의 구성원이 단 한 명만 살아남더라도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 고 역설한 한용운 시인의 이 말은 혁명가 같은 단호함이 엿보인다.
한용운 시인이 죽는 날까지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독립에 몰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부터 1945년 해방까지 5년 동안에 72 만 명이 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일본 본토 사할린 남양에 있는 탄광, 금속공업소, 토목공사장 및 각종 공장에서 무자비한 노동착취를 당했다. 국내에서 동원된 강제노역에 동원된 노동력 수는 1938년부터 1945년 동안에 약 460만 명이다. 일본 본토에서 노역을 감당하다가 죽어간 젊은이는 4만5천명이 이상이다. 1937년 이후 일제는 1 천만 석 이상의 한국미를 약탈한다. 이런 약탈을 당한 우리 민족이 당했을 굶주림은 참혹 그 자체였다. 일제는 간악한 인적 물질적인 수탈을 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민족문화를 말살한다. 조선어사용 억제, 창씨개명, 신사참배, 우리말 신문폐간, 조선어교육의 폐지를 감행한다. 이를 관철하기 위해 일제는 체포, 투옥, 고문으로 우리민족을 압살하였다.
당시 우리의 국토는 커다란 감옥이었다. 김대상의‘일제하 강제인력수탈사’에 의하면 일제는 ‘약 2만 7천명의 요시찰인을 구금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학살에 이용할 특수한 지하실을 파놓았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해방이 된 것이다.
8,15 해방으로 우리민족은 생명과 생존의 절박한 위험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방전후사의 역사와 문학에 접근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친일문제는 그 후손들과의 미묘한 갈등은 끝나지 않고 있다. 일반인들 가운데도 일제로부터 당했던 질곡의 역사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은폐론이 숨어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과 6,25전쟁도 우리에게 치욕의 역사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할 때 우리가 당했던 것을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억해야 하는 것이리라. 과거 찬란한 민족의 삶만이 역사가 아니라 조상들이 당했던 오욕과 치욕의 삶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방전후사의 역사와 문학에 접근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해방된 조국 땅은 우리 민족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질식할 것 같던 일제의 칼날 압제하에서 벗어난 문인들은 식민지시대 문학의 청산과 민족문학의 복원하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문학적 이념의 대립과 갈등이 시작된다. 해방공간에서 이념에 따라 달라진 문학과 문단의 변천과정을 탐색하는 일은 현대문학의 비밀스런 부분을 건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한용운 시인은 조국의 독립과 분단 상황을 목격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 시인은 '이제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라는 유언적인 연설을 했다고 전한다. 3·1운동 후에 3년의 옥고를 치른 후에, 이 땅의 불교 대중화와 일제식민지를 배격하는 올곧은 정진을 거듭하면서도 문학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성북동 《심우장》은 조선총독부를 처다 보지 않기 위해 북향으로 집을 지었으며, 죽는 날 까지 일제와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조국해방을 눈앞에 둔 1944년에 세상을 떠나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이렇듯 일제하에 한용운 시인은 민족혼을 잃지 않기 위해 온 몸과 언어로 투쟁했다. 일제의 총칼아래 신음하는 민족의 혼을 일깨우기 위해 한글로 시를 썼다.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그리워서 이 시를 쓴다’시집《님의침묵》의‘군말’에는 그의 사랑과 연민의 정이 듬뿍 담겨 있다.
한용운 시인은 《님의침묵》 한 권으로 우리 현대시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앉아 있다. 이것은 일제 암흑기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찾는 종교적 신념과 현실인식의 사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역사관과 불교적인 신앙이 문학을 만나서 아름답고 영원한 민족문학을 탄생시킨다. 한용운 시인의 시집 《님의침묵》은 이제 우리민족의 보물이다. 아름다운 우리글과 말을 만들기 위해 흘린 한용운 시인의 땀의 결실이 심우장으로 상징된다. 만약 한용운 시인이 일제에 회유당하여 민족을 배신하였다면, 그의 시는 거짓이 되었을 것이며, 민족의 시가 아니라 친일 시로 전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문인들처럼 자신의 평안을 선택하지 않았다. 《심우장》은 고난의 집이기에 한용운 시인의 상징이다. 총독부 반대방향으로 집을 지어 살며, 불도 피우지 않았다. "우리국토의 모든 곳이 감옥인데 무슨 불을 피우느냐"며 역정을 내었다. 심우장이 답사객들의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이유다. 결국 성북동 《심우장》은 역사가 있는 문학의 귀중한 유산이 될 것이다.
▢ 찾기: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6번 출구 버스정류장에서
1111번, 2112번 버스 승차 후 죠이빌리지 앞에서 하차 <심우장>이정표 길
따라 언덕길 80m 지점에 위치
서울 성북구 성북로29길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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