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사위성에 사는 어떤 사람이 아내가 죽자 출가하여 비구가 되었으나 그는 혼자 사용하려고 부엌과 창고가 딸린 화려한 집을 짓고 창고에는 여러 가지 식량을 가득 채워놓고 옛날 부리던 하인을 불러 요리를 시키고 탁발도 나가지 않고 호화판으로 지내면서 가사도 낮과 밤에 다른 가사를 걸치고 지내며 사원 가까이에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비구객스님이 이곳을 지나다 빨랫줄에 여러 벌의 가사를 보고 누구의 가사인지를 묻고 자기 것이라 하자 객스님이 세존께 그 사실을 아뢰자 세존께서 그를 불러 검소하게 살아야 하는 비구가 그러면 안 된다고 타이르나 그는 화를 내며 옷을 벗어 던지고 대드는 자세로 버티고 서있자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비구여 너는 과거 생에서는 겸손하려고 노력하고 죄를 부끄러워했었다. 네가 물에 사는 야차였을 때는 십이 년 동안이나 겸손하려고 노력하고 죄를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존귀한 부처님 아래로 출가한 비구가 어떻게 가사를 벗어 던지고 겸손이나 죄에 대한 부끄러움은 눈꼽만큼이라도 찾아볼 수 없고 사부대중들이 보는 가운데 그렇게 뻔뻔하게 서있을 수 있단 말이냐? 그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태도가 공손해지며 가사를 바르게 입고 세존께 삼배를 드리고 한 쪽로 물러나자 다른 비구들이 그의 전생 담에 대하여 묻게 되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과거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미래에 붓다가 되실 보살(석가세존)께서 왕의 첫 왕비의 장남으로 태어나고 동생도 이어 태어났다. 왕비가 죽자 둘 째 왕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녀도 아들을 낳게 된다. 왕은 아들을 본 기쁨에 왕비에게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나 왕비는 나중에 말하겠다고 하고 자기 아들이 성년이 되자 그 소원은 자기 아들에게 왕국을 물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 청을 거절하나 끈질긴 요구에 왕은 두 아들이 해를 당할까 두려워 두 아들을 불러 자치자종을 설명하고 나라를 떠나 숲에 살다가 자기가 죽은 후 돌아와 왕국을 물려받으라고 한다.
두 왕자가 떠나는 길에 배다른 동생을 만나고 동생도 그 사연을 듣고 자기도 함께 떠나겠다고 하여 세 왕자가 함께 히말라야로 떠난다. 중간에서 물도 마시고 목욕도 하려고 큰형이 막내 동생에게 물을 떠오라 하자 그 호수는 사천왕의 관할 하에 있는 야차의 소관인지라 만약 이 호수에 들어오는 사람은 잡아먹을 권리가 있지만 고귀한 법을 아는 사람은 잡아먹지 말라는 옵션을 가지고 있는 호수의 야차여서 왕자가 오자 고귀한 법이 무엇인지 아느냐 물으니 해와 달이라 대답하자 너는 고귀한 법을 모른다면 물속의 집에 감금한다. 막내가 돌아오지 않자 동생을 보내나 역시 같은 질문에 동서남북 이라고 대하자 역시 물속에 감금한다. 두 동생이 오지 않으니 발자국을 따라가서 물속으로 잡혀간 것을 알고 야차가 있음을 간파한 왕자는 야차에게 고귀한 법을 알고 싶은가라고 되묻고 법을 들으려면 먼저 깨끗하게 목욕해야 한다며 마실 물과 새 옷과 화려한 의자에 앉아 야차를 내려다보며 법을 설한다.
겸손하고 죄를 부끄러워하며 착하고 바른 법을 고귀한 법이라고 부른다.
야차는 게송을 듣고 믿음이 생겨 두 동생 중 한명만 풀어 주겠다고 하자 막내를 데려오라 한다. 야차가 서열을 무시한 행위라고 하자 자기들이 숲에 들어온 것도 막내 때문인데 만약 야차가 막내를 잡아먹었다 하면 누구도 우리를 믿지 않고 비방을 받게 될 것이다. 야차는 왕자의 말을 이해하고 믿음이 생겨 현자라고 칭송하며 두 동생을 데려온다.
왕자는 야차에게 야차의 삶은 불행을 초래하니 법문을 해주며 오계를 지키게 한다. 야차의 보호아래 숲 속에서 잘 지내다가 부왕이 죽자 야차와 함께 모두 돌아와 큰 형이 왕이 되고 동생은 부왕 그리고 막내는 사령관에 임명하고 야차에게는 쾌적한 거처를 별도로 지어주고 많은 선물과 함께 충분한 음식을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세존께서 전생 담에 나오는 인물에 대하여 설명하시길 그때의 야차는 현재에 많은 물건을 소유한 비구이고 막내 왕자는 아난 이고 둘째 왕자는 사리불 큰 왕자는 나(보살)였다. 비구여 그대는 과거 생에 진정 고귀한 것을 찾고 겸손함과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지금은 비구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를 하고 사부대중 가운데 서서 나도 적은 것에 만족한다. 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 비구가 가사를 벗어 팽개치면 비구가 아니다. 말씀 하신 후 게송을 읊으셨다.
여인천하 수준의 드라마는 아니지만 드라마틱하게 구성된 이야기로 세존 자신이 전생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인데 보살은 곧 수기를 받은 미래의 부처로(석존) 어려운 난관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원만하게 해결하는 해피엔딩의 멋진 드라마이다. 야차라는 존재는 우리나라의 도깨비 수준이나 인도식의 야차는 기운이 세서 보통 사원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거나 문 앞에 문지기로 서 있는 경우가 있는데 몽둥이 같은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남방 불교의 사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야차에게 오계를 주는 대목에서 대승불교의 보살계를 설할 때 법사의 말을 알아듣기만 하면 남녀노소 귀신 야차도 받을 수 있다는 대목이 떠오르는데 여기에서 사천왕이 관리 감독 하에 있는 야차이기에 고귀한 법에 대한 질문을 하고 또 고귀한지 안한지에 대한 판단을 나름대로 한다는 것에 대하여 사천왕이 스스로 불법 수호하기를 맹세하였듯이 그의 권속이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지만 성질과 버릇이 고약한 야차로서 십수 년을 오계를 수지한다는 것과 보살을 수호한다는 수호신적 역할을 한 공덕으로 세존의 회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출가하여 비구가 되나 전생의 습을 버리지 못하여 잘못을 범하고 세존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다시 온순해지나 다른 곳에서처럼 과위를 얻었다는 대목이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수행하는 것과 야차가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는 것이 격이 다름을 보여주는 선례가 아닐까 생각되며 세존의 주변에 중요한 제자나 인물들이 세존과 지중한 인연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이야기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세존 당시의 비구 가운데에서 이러한 독특한 인연으로 출가한 비구가 있는가 하며 당시에 허용되지 않았던 사유재산을 보유한 출가자가 세존 당시에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화로 보아도 될 것 같다. 결국 현상의 세계 사바세계의 각양각색의 살아가는 모습은 출가이든 재가이든 업(습관)을 벗어나지 못하며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과 이 이야기에서 과거 야차의 습관을 가지고 있고 야차로 있을 때 복력도 가지고 있어 세존의 제자가 되나 야차의 습성은 아직 남아 세존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야차시절 보살에게 오계를 받고 지킨 공덕이 비구가 되는 인연이 되지 않았을까?
2563.7.25 법주도서관 심적 대견 합장
자림 시조 단상 141
나체로 걷고 머리를 묶고 재를 바르고 단식하며 몸 매달고 웅크려 부동하고 어떠한 고행이라도 의심남은 해탈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