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6막46장 (2부)
"후"는 면접시험도 무난히 합격하였고,"전두○"정권의 총탄이 박힌 도청 인근 조선대에 입학하였다.
아내와 나는 "후"를 데리고 학교 인근 하숙방을 얻었고 냉장고,에어콘,티브이,기타 생활용품을 장만하였다.
불쌍한 놈.
엄마 아빠 떠나 타지에서 얼마나 외로울꼬...
나는 "후"가 대견스러웠다.
나는 젊은시절 "청주"에 예비고사를 합격 나고도 객지에 홀로 있고 싶지 않아 대학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 "후"는 나보다 더 성숙한 이미지를 부각하며 나를 훈시하는것 같았다.
"나는 아빠하고 틀려..."
그래
너말이 맞다.
"후"를 홀로 두고 서울로 돌아오는 서해안 고속도로에서 아내는 눈시울을 드리웠다.
그후 아내와 나는 종종 전남 광주를 찾아갔고,그래서 호남권의 명소는 전부 다니고 만것이다.
호남권에 대한 지역 감정.
그곳에는 지역 감정을 찾아볼수가 없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나는것은 두가지 였다.
첫번째는 전남대 앞 인도에 끝도 없이 이어진 노점상들이었다.
노점상이 리어커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백발의 할머니들이 머리에 하얀 두건을 쓰고 시골티가 나는 검으티티한 얼굴에 길거리에 앉아 대야에 허드레 채소를 팔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가 재래시장 바닥도 아니건만 대학교 정문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인도를 점령한 어르신들의 무리를 보는 순간 나는 슬픔에 잠기게 되였다.
지역감정이 무엇인지.
어찌 이지역에는 먹고살 터전조차 없단 말인가?
대기업 큰공장은 아니더라도 조그마한 공장도 넉넉치 않아 모두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 하는 이지역의 아픔을 이해하고 싶었다.
그 여파는 늙은 어르신들까지 길거리로 나와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니 격세지감을 느끼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