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교회 태동 역사 - 22 - 재림교회의 교육사업의 구상과 세계적 선교의 기 반을 닦다
재림교회의 교육사업의 구상과 세계적 선교의 기 반을 닦다
재림교회가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어 놓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당신의 원대한 사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여야 할 것들이 많았던 시대적 상황을 1863년 이후에 우리들이 맞게 된 것이다. 교회는 조직이 되었고, 또한 교회조직이 되어지던 해에 다행하게도 건강에 대한 빛들이 전하여져서 그것이 교회에 가르쳐야 할 구원의 기별과 함께 접목하여 중요한 것으로 대두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계기 마련은 되었으나, 이때에 제대로 구비되지 못한 분야가 교육이었다. 재림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세상 교육이 별반 필요했던 때가 아니었다. 교회가 운영하던 학교도 따로 없었고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음이 특별 계층의 사람들에게만 부여된 것이지 일반인에게는 거리가 너무도 벌었다.
서구 유럽은 과거에 찬란한 문화와 교육 운동으로 선진화를 이루어나갔으나 신흥 대륙인 미국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들을 늦걸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과거 유럽권은 언어 중심의 전통적인 명작 학습에만 매어 달렸던 것으로 이곳 미국 신대륙 세계가 처한 곳과는 아주 이질적인 세상이라서 교육 혁명에 불을 당긴 이로서는 1830년대의 호레이스 만이라는 분이 있어 그는 교육의 일반화와 실용성과 그리고 건강을 강조하였다. 고등교육 분야에는 오벌린 대학이 선두로 라틴어와 희랍어의 고전을 배제하고, 성서적 세계관에 중점을 두었으며, 노작 교육을 실시하여 실제로 배우고,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 습득과 지육과 체육 간의 균형을 도모하며 전인교육의 필요란 부분을 충당하게 하였다.
재림교회가 태동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순위를 보게 되면, 처음에는 출판사업, 다음에는 의료사업으로, 그 후에는 교육사업으로 돌아가 교단적으로 학교를 세우게 되었던 때는 1872년이 되었다. 재림운동이 끝난 지 28년이 되기까지 도무지 진전되지 못하였던 우리들의 낙후된 모습을 보게 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되집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주님의 오심을 믿고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믿음만이 중요한 것이지 세상에서의 교육을 받는 데에 바치는 열정과 시간과 재정은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세상에서는 선 보다도 악을 더 많이 배우는 곳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여 학교에서 배우는 일이 합당하냐는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에, 재임스 화잇은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사실이 사람의 두뇌를 계발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주의 오심을 믿는 확신을 갖는 속에서도 자녀들에게 빈둥거리며 노는 아이들이 되지 않고 배우는 일에 문호를 터놓게 되었다.
재림교회의 학교 교육사업은 정말로 더디었다. 학교의 시작은 뉴욕의 벅스 브릿지와 미시간의 베틀크릭에서 시작이 되었으나 처음부터 예상된 난항이었다. 그러던 중 구들로 하퍼 벨이란 이가 등장하였다. 벨리 본 재림교회가 경영하는 요양원을 친구를 따라와 치유를 요하게 되었다가 너무나 좋은 인상을 받아 그곳을 다시 찾아왔다가 자기를 위하여 늘 기도하여 주는 오스본이라는 재림교회 청년을 알게 되면서 그는 재림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할 것과 노동을 할 것을 권유받아 나무를 베는 작업을 하다가 재임스 화잇의 아들인 에드슨을 만났다. 에드슨은 자신이 문법을 배우는 것을 싫어한다 하기에 잘 가르치면, 문법은 가장 재미있는 과목이라고 답하여주었던 일로 인하여 그가 베틀크릭에서 교사로 채용이 되어 1872년에는 대총회가 그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회가 운영하는 최초의 학교가 되는 일을 하게 하였다. 교육의 자질이 있는 유능한 한 인물을 성실한 믿음의 자세로 기도하는 일로 인하여 영혼을 인도한 오스본 형제의 공로를 우리로서는 잊을 수가 없다.
재림교회는 엘렌 화잇 선지가 1854년에 최초로 가정교육과 부모의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였었다. 그러던 것이 1872년이 되어서야 학교가 설립될 수 있게 된 영향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어졌던 것에 의해서였다. 그 당시에 교육은 적절한 교육이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 및 종교적 교육으로 균형진 교육을 모색하였다. 무지를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들을 잘 개발하여 신앙을 잘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본 재림교회에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가 재임스 화잇 목사였다. 그가 추구하던 교육의 이념은 세 천사의 하나님의 기별을 선포할 수 있는 적절한 인물이 되게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먼저가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목사의 성화된 교육과 마음에 역사되는 교육사업에 있음을 보았다. 교육사업의 비전은 목사의 양성과 선교의 개척 분야였다.
선교는 언어를 익히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고, 또한 교육을 통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가 없었다. 지도자들을 하루바삐 지도자 배출을 위하여 대학의 설립에 대한 필요를 깨달아 1874년에 대학을 세웠다. 이러한 원대한 하나님의 사업을 바라보면서 번역사, 편집인 및 문서전도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부단한 인도를 받게 되었다. 대학 설립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이 우선 교수진이고, 다음의 교육 이념의 설립과 경영에 대한 운영이었다. 그 어느 것 하나 마련되어 있지 못한 형편 중에서 시드니 브라운버거 씨가 1869년에 미시간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전공하여 동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분이 고작이었다. 그가 성실한 믿음을 지닌 분으로 대학의 원장에는 취임이 되었다. 그의 학구성은 인정된 분이나 학교 경영의 실무에 대한 경험도 없고 이상도 없는 분이라 학교에 대한 설립 이념을 엘렌 화잇의 권면에 의하여 유지될 정도였다. 그때는 대학 유지의 방법론에 있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학교 사업의 시작은 자신이 잘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을 하였다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실업부를 도입하였으며, 처음에는 라틴어, 고대 희랍어로 된 고전문학을 다루다가 한참 후에야 교육에 절대로 필요한 성경 연구가 교과 과목에 포함되었다. 대학이라고 하여야 전공에 대한 특별한 이상이나 교파적 특징도 없는 그저 밋밋한 형편에 처하여 있는 대학으로서의 발돋음을 하지 못한 채로 1881년에는 초대 학장인 브라운스버거가 사임하고, 2대 후임자로 알렉산더 맬런 씨가 등용이 되었으나 그가 재림교회 신자가 아닌 분으로 개종을 한 분이라서 특수한 학교로서의 이념에는 크게 밑돌아 학교가 얼마 후에는 문을 닫게 되었다. 대학이 학교로서의 갖추어야 할 방향을 모색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분위기로 접어들자 하나님께서는 본 대학을 버리지 않고 제 2의 도약을 위한 무대로 옮겨지게 된다.
지난 2년간 학교의 정상 궤도를 위하여 실무 경험이 없는 우리들이라 남의 것을 모방하여 시도를 꾀하였으나, 남들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인지는 몰라도 도덕적 감화와 종교적 감화를 필히 중요시할 것을 삼도록 하였다. 이에 대한 강조가 하나님의 선지자에 위한 권면으로 추진되고 접목되어야 할 것이었다. 화잇 선지는 교육에 대한 지식을 광범위하게 적용시켜 예술과 과학 전반에 포함시켰다. 그리고나서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성서에 대항 중요성을 강하게 어필하였다. 학교 교육이란 전정과 같은 원리를 지닌 것으로 잘라져야 할 것들은 성장을 위해서는 여지없이 잘라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학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 1883년 가을로 접어들었다.
베틀크릭에 둥지를 틀었던 대학이 미국의 동서로 나누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구들로 하퍼 벨이 메사추세츄로 가서 본거지를 잡은 후에 1882년 봄에 사우스 랭케스터 아카데리를 설립하였다가 후에 아틀란틱 유니온 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시드니 브라운버거는 서쪽으로 가서 1882년 4월에 힐즈버그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가 후에 패시픽 유니온 대학으로 명명되어 두 번 다시 전날의 실패를 갖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힌 상태에서 대학으로서의 갖추어야 할 것들이 전보다는 많이 진보된 상태에서 커리큘럼의 공평한 분배와 학과뿐만이 아니고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균형 있는 교육 유지에 노력한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변모한 힐즈버그의 대학은 베틀 크릭에 있는 종전의 대학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되면서 재림교회의 교육이 본격적으로 새로운 혁명의 기회를 맞게 된 것이 1890년대를 맞게 되면서부터이다.
신앙을 함에 있어서 등장하는 두 가지 요소가 교리와 생활 방식에 대한 문제이다. 초창기 재림신자들을 교리가 우선이었다. 따라서 신앙으로 어떻게 살아야 함은 2차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 중에서도 건강개혁이 사람들을 보다 더 효과적인 증언과 선교사로 만들고 우리 믿는 이들의 각자 몸을 치유를 통하여 복음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며, 십일조를 드리는 희생의 정신이 주님께 대한 사랑과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품성을 배양시켜주는 것임을 보게 될 때에, 생활 방식의 중요성은 교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재림교회는 일차적으로 믿어야 할 교리에 대한 중요성을 깊이 자각하도록 하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하여금 생활 방식에 대한 필요한 것들을 부가적인 방법으로 하나 둘씩 보강하여 그리스도인 생애의 균형진 삶을 갖도록 크게 일조하였다.
재림운동이 대형천막을 통하여 전도 집회가 왕성하게 일어난 후에 본 재림교회가 정식으로 태동된 후에도 교회를 흥왕시켜 나간 활동 중에는 야영회가 있었다. 최초의 야영회는 1868년 9월 미시간 주의 라이트에서 열렸다. 이곳 야영회의 목적을 잘 밝히고 있다. 휴양과 놀이를 위하여 며칠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평상시 교회에 출석을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또는 다른 방법으로는 불러들일 수 없는 이들을 많이 참석하도록 하기 위하여 갖는 모임인 것을 주시시키고 있다. 이 모임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도록 함이 근본 목적이다. 이는 즐거운 모임이 되고,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좋은 말씀들을 듣고, 옛 친구들을 만나고, 재림교회 서적들을 구입하며 영적인 축복들을 나누도록 함이어서 많은 이들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연중에서 가장 고대하는 행사로 발돋음하여 교회의 전통이 되게 한 것이 우리들의 역사이다.
야영회는 마치 구속을 받은 이들이 하늘 잔치를 연상하는 모임이며, 이 당시에 어떤 이들이 연사로 등장하였을까 매우 궁금하게 생각이 된다. 경고의 기별들과 세상 사물보다는 하늘의 사물에 대하여 말씀하며, 재임스 화잇, 엘렌 화잇 여사, 앤드류스, 네이던 풀러가 설교하면서 저들 모두에게 현대 진리의 기별로 저들의 온 몸을 뜨거워지게 하였이다. 해마다 화잇 부부를 초청하여 아름다운 집회를 가졌던 그 당시의 모습이 한 없이 연상된다. 평상시에는 참석 인원이 1,000여명, 주말에는 2,000명이 모였고, 비가 오지 않았다면 3,000명이 참석하였을 모임이었다고 회상하고 있었다. 초창기 이후에는 도시에서 가까운 곳으로 야영집회를 개최하면서 좀 더 많은 참석자들을 오게 하였다. 가장 많이 참석하였을 때의 참여자의 수는 매사추세츠 주의 그로브랜드 야영회에서의 2만 명이었다.
재림교회가 태동되면서 저들이 하여야 할 일은 세계 선교였으나 교회 내에서의 닫힌 문에 대한 교리로 인하여 온 세상에 빛을 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찍이 1848년 엘렌 화잇의 하나님으로부터 보여준 강력한 빛줄기가 온 세상에 전하여져야 할 이상을 받았지만 그 작업에 대한 시작을 몸서 실천하지는 못하였다. 다행히도 1852년을 시점으로 닫힌 문에 대한 오해가 사라지면서 다시 열린 문에 대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져 선교사 파송이 1874년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선교의 문을 열게 된 이는 유라이어 스미스였는데 당시에는 이에 대하여 의심하던 이들이 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러 나라의 민족이 와서 사는 나라로서 저들만을 상대하는 것이 온 세상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자들로 인하여 선교의 길이 막혀 있었다.
교단적으로는 선교에 대한 구제적 방안과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재림교회의 출판물들이 모국에 있는 친지들에게 전하여진 것들로 인하여 영원한 복음의 새 기별이 들어가 1860년 초에 아일랜드에는 개심자가 생겨났고, 1864년 아프리카에서는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는 사람이 두 사람이 생겨났다. 그 중에 한 분은 호주로 가져갔다. 개심자들이 하나 둘 생겨나면서 선교사에 대한 요청이 들려지게 되었다. 사실 재림교단이 대총회가 탄생되기 한 달 전만 해도 재림교회가 가진 기별이 세계적인 것을 천명한 바가 있어 유럽에 선교사를 파송할 필요를 지적하고, 그 해 6월에는 선교사 한 분을 파송하려고 하였었으나 인력 부족으로 그 일을 성사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1857년 천주교 신부였던 마이클 벨리나 체코우스키 라고 하는 폴란드 출신인 그가 개종하여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신도가 되었고, 그가 대양을 건너 모국으로 돌아가 영광스러운 재림의 기별을 알리고자 선교사를 자원하여 왔다. 그러나 교단 측에서는 그가 초신자였고, 그의 지닌 인격과 생활 자세가 불안정한 면으로 인식되어 추천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본인의 뜻을 관철시킬 수가 없었다.
체코우스키는 좌절하였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다른 방법을 찾아 자신의 뜻한 바를 관철시켰다. 그는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는 제일일을 준수하는 재림신자를 찾아가 자신을 후원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저들의 도움을 힘입어 유럽으로 잠입하였다. 이때가 1864년 5월 14일이었다. 그는 예수의 재림을 빙자하여 일요일 대신 안식일을 주장하면서 재림의 기별을 전하는 자로 둔갑되었다. 체코우스키는 일요일을 준수하는 재림신자의 그룹들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아 이탈리아로 가서 재림과 안식일 기별을 전파하였다. 그가 14개월 동안 이탈리아 알프스에 있는 왈덴스 마을을 찾아가 전도하면서 몇 사람에게 침례를 주어 미국 밖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최초의 재림교회 집회소를 개최하는 발군의 전도열을 보였다. 그곳에서 그후에 지역에서 심한 반대로 1865년에 그곳을 떠나 스위스로 갔다. 그곳에서 집집 방문을 하며, 공회당에서 설교하며, 개인적으로 전도지를 인쇄. 판매하며 영원한 복음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그가 스위스를 떠날 때에는 이미 40여 명의 침례자를 얻어 몇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처럼 체코우스키는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 선교사가 되어 유럽의 루마니아, 헝가리와 위에서 언급한 이태리, 스위스를 제외한 여러 곳에 하나님의 세 천사의 기별을 종횡무진으로 알리는 놀라운 일을 이룩하였다. 따라서 교단적으로 선교에 대한 자각을 지닌 상태에서 최초의 선교사인 앤드류스를 유럽에 파송하기 이전에 그는 이미 제칠일안식일을 지키는 신자들을 확보하여 둔 상태에서 일하기가 훨씬 수월하였던 것이다. 비록 사람들은 한 개인의 잠재된 능력을 외적인 용모와 인간적인 판단으로 인하여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한 일에 대하여는 우리 하나님께서 그를 다른 방법으로 사용하신 전례를 남겨 놓았다. 이와 같은 체코우스크의 개인적인 헌신과 노력이 후에 알려진 바 되어 재림교단이 배출한 최대의 학자이며 고매한 인품을 지닌 관록을 지닌 앤드류스가 선교사로 파송되어 장엄한 순직을 당함으로 체코우스키가 못다 한 선교의 뜻을 이룩하기 위하여 헌신하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재림교회가 태동된 장소는 미국 동북부에서 발생되어 미시간으로 확산되어진 상태인지라 아직도 선교의 지역으로 광활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우선 반대편 끝에 위치한 1,500마일 떨어진 캘리포니아가 있었다. 같은 미국 지역인데도 그곳에는 한 사람의 재림신자도 없었다. 그런 곳에 최초로 발을 디딘 이가 1859년 J. H. 캘로그의 이복형인 메리트 캘로그였다. 그는 마차 또는 우마차를 이용하여 장장 6개월의 먼 거리를 여행하여 당도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고, 그가 2년 후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도집회를 열어 14명에게 침례를 베풀었으며, 그후 4년 후에는 신자들이 모금하여 133달러의 돈을 베틀 크릭으로 보내어 파견할 목사를 보내는 데에 여비로 사용하여 달라고 하였다. 1867년 캘로그는 의사의 학위를 받기 위하여 동부로 돌아와 있다가 대총회에 참석하고, 그곳에서 교사를 파송하여 줄 것을 호소하매 재임스 화잇은 누가 갈 것인가 물었을 때에 러프보로우가 일어나 자신의 꿈 이야기를 끄집어내면서 자기의 친척 집에서 천막집회를 인도하던 사람이 있다고 하여 그를 파송하도록 결정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목사로 선택을 받아 가게 된 이는 D. T. 보도우 씨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대비하기 위하여 자신의 부인과 함께 대총회 모임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대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먼 곳에서 왔던 캘로그와 또한 천막집회에서 유능한 설교자로 어디든지 부르면 갈 준비가 되어 있던 보도우 씨 부부 같은 이가 대총회 모임에 참석하였던 일로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선교의 무대가 열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