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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15일 목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 3,13-20
그 무렵 떨기나무 한가운데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16 가서 이스라엘 원로들을 모아 놓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17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너희를 끌어내어,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
18 그러면 그들이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함께 이집트 임금에게 가서, ‘주 히브리인들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걸어가, 주 저희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여라.
19 그러나 강한 손으로 몰아세우지 않는 한, 이집트 임금은 너희를 내보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20 그러므로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그런 뒤에야 그가 너희를 내보낼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8-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우리의 지친 마음과 영혼의 치료소
위례성모승천성당 이기양 요셉 신부님
복 음 : 마태 11,28-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병원을 찾아갑니다. 어디가 아프냐에 따라서 병원도 여러 과목들로 나뉘어지지요. 이가 아프면 치과에, 눈이 아프면 안과에 가고 배가 아프면 내과를 찾는 등 신체 부위에 따라 다양한 진찰과 치료를 받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영혼이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할까요? 여러분은 마음이 아프면 어디로 갑니까? 마음이 아플 때 어디를 찾아가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음의 병이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마음이 아프면 몸이 아프게 되어 있지요. 간혹 이 병원 저 병원 아무리 쫓아 다녀보아도 의사는 별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본인은 아파서 죽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병이 난 것이지요.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은 사람에게는 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정신과 영혼이 있지요. 그 정신과 영혼이 병들고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몸이 아프면 수시로 병원에 들락거리며 치료를 받지만 마음의 병은 치료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심란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은 미아리로 점을 보러 갑니다. 불안하고 어찌해야 될지 모른다며 길을 묻지요. 그런데 대부분 점쟁이들은 나쁜 것을 하나씩 지적하고 넘어갑니다. 불안해진 사람들을 더욱 의지하게 만들어 다시 찾게 해야 하니까요. 예를 들어 결혼을 앞둔 남녀 두 사람이 소위 말해서 궁합을 보러오면 안 맞는 것이 있어서 어느 한 쪽이 크게 다치니 결혼은 안 되겠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들은 당사자나 부모들은 쉽게 그 말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다시 가서 그 불운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고 의탁하게 되지요. 결국 점치는 사람의 궁극적인 목적은 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행위가 지금도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점쟁이를 만나서 해결이 되겠습니까? 한편 어떤 사람들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갈 수 있지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들이라고 불안한 마음을 다 치료해 주고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이처럼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정신과 영혼은 어디에서 어떻게 온전히 치유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8.29)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신께로 오라고, 당신이 편히 쉬게 하겠다고, 우리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어하는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와서 안식을 누리라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다른 곳으로 가서 헤매고 다니다가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안타까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이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다 나에게로 오너라.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먼저 갈 터이니 ‘죽음이여, 어서 오라.’ 이런 뜻일까요? 아니지요. 하느님께 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생각하고 하느님 안에서 쉰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구약과 신약성경에 잘 나와 있지요. 바로 ‘기도’를 통해서 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과 성현, 성인들은 조용한 공간에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커룹들 위에 좌정하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세상의 모든 왕국 위에 당신 홀로 하느님이십니다. 당신께서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2열왕19,15)
유다 왕 히즈키야가 아시리아의 공격 앞에서 하느님께 올린 기도입니다. 이런 고백은 구약성경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이지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뜻을 끊임없이 받아들이고 확인하고 실행하실 때 외딴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마르1,35)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안에서 쉬고 하느님 안에서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제일 미개한 것이 점쟁이를 찾아가는 것이고, 가장 지혜로운 길이 참 진리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오너라.”고 하신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지요. 그 말씀의 힘은 지난 이천 년 동안 끊임없이 발휘되었고 지금도 한결같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의 모습은 다릅니다. 편히 지내서 살이 붙고 성형으로 가꾼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는 달리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에서 오는 편안하고 넉넉한 모습은 따로 있지요. 그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여유가 있습니다. 깊은 기도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은 하느님 안에 사는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지요.
우리는 성인 성녀들의 모습에서 안식을 얻은 사람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모르는데요.”
기도 얘기만 나오면 주눅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기도학교>를 통해 계속해서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배우는 것은 시작입니다. 끊임없이 스스로 연습하고 실행해야 하지요. 제일 좋은 방법은 성체 조배실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성체 조배실에 들어가면 금방 나올 수도 없고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가 편치 않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럴 수 있습니다. 금방 나와도 괜찮습니다. 차츰차츰 익혀나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다보면 자리잡기 시작할 것입니다.
조배실에서 기도하는 좋은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성경과 노트, 펜을 가지고 들어가 천천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어떤 단어나 구절이나 상황에서 뭔가 다른 느낌이 올 때 거기에 머무르십시오. 사람마다 느낌이 오는 부분은 다 다릅니다. 불안한 사람은 평화가 와닿고,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용서가 와닿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머무르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때의 느낌을 적을 수 있으면 그대로 솔직히 적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10, 20분 시간이 금방 지나가지요. 그 말씀이 좋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큰 분심 없이 들어온다면 계속 머무십시오. 이런 식으로 기도 생활을 서서히 준비해 가면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하게 되고, 그것이 쌓이면 이제 밤이 늦어도 조배실을 떠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머지 않아 그는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과 평화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
좋은 성당이란 잘 지어진 건물이나 세상의 명성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느님 안에서 쉬고 지혜를 찾는 개인과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몇 년 전 폴란드에 갔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유서 깊은 성당들을 둘러보는데 가는 곳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 신자들은 지나가는 길에 성당이 있으면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래서 ‘공산 국가인 폴란드에서 교황님이 나셨구나.’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지요. 반면에 이태리에 들어서니 로마의 성당들은 화려한 예술품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그 웅장함과 규모에 많은 사람들이 경탄하며 찾고 있지요. 그러나 그 곳에는 신자는 없고 관광객들만 가득했습니다. 왜 그곳이 공동화되는지를 알 수 있었지요.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하시며 지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치료소가 바로 예수님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고 찾아낼 수 없고 치료할 수 없는 모든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순식간에 어루만져 치료해 주십니다. 이는 문둥병자를 치료해 주시고 버림받은 과부와 고아를 치료해 주신 이천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기적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매번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천 년 전 옛날 이야기 속의 예수만을 기억할 뿐입니다. 참 쉼은 시골을 찾아가는 것도, 찜질방을 가는 것도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차원이 다르지요. 하느님 안에서 쉬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인지요?
2021년 7월 15일 연중 15주 목요일<덜 고생하고 더 가볍게 짐을 지는 법>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오늘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이렇게 짧은 말에 그토록 많은 의미와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생각이 되며 감탄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짧은 말로 완벽한 말씀을 하시는데
제가 여기에 뭔 말을 덧붙인다는 것이 괜한 짓이 아닌가,
더 나아가 주님 말씀을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도 오늘 주님 말씀에 이런 토를 달아봤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시고,
그러면 우리는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안식도 주님께서 주셔야 받을 수 있는 것인가?
재물이나 능력은 하느님께서 주셔야 우리가 얻는다는 것은 인정하겠으되
안식도 하느님께서 주셔야 얻을 수 있는 것이냐는 의문이 이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역시 주셔야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안식을 바로 주시는 것이라기보다는 안식을 얻는 법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에게 고기를 잡아주기도 하지만
바로 고기를 주기 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사랑이기에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숙과 관련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는 잡는 법을 알려줘도 소용없으니 고기를 바로 잡아줘야 하고,
나이를 먹어 배울만한 나이가 되면 그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 하지요.
그런데 자식들 중에는 커서까지 아이짓을 하며 잡아달라고 하고,
부모들 중에는 나이 먹어서까지 고기를 잡아줘 자식을 망칩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이 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도 고생하고 무거운 짐진 우리에게 안식을 준다고
하시면서도 고생을 없애주시겠다거나 짐을 내려놓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은
결코 하지 않고 그저 안식을 주시겠다고만 하십니다.
그러니 그 고생과 그 무거운 짐 그대로 가지고
안식을 누리는 법을 알려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벗겨주시겠다고 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르쳐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안식을 얻는 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그 편한 멍에를 매고
주님의 그 가벼운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멍에는 왜 편하고 짐은 가볍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멍에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기 때문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생이 있고, 왜 나의 짐은 이렇게 무겁냐고 따지고,
그것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왜 나는 더 고생스럽고
내 짐은 더 무겁냐고 불평불만하는 마음으로 짐을 지면
마음이 불편하기에 짐이 훨씬 더 무거운 법이지요.
반면에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짐을 지면 같은 짐인데도
덜 고생스럽고 덜 무거운 것이 멍에와 짐의 이치이지요.
그런데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랑으로 짐을 지게 되면
그 짐을 더 가볍게 지게 됨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가리봉동 공동체 <여기 선교의 집>/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2021년 7월 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축일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저희 작은형제회의 제2의 창설자라고 불리는 성 보나벤투라 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순례 여정이 버겁고 힘겨운 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에 함께하고 싶어 이 세상에 오셨지요.
그분은 멍에와 짐에 짓눌려 다리에 힘이 풀리고 휘청대면서 갈길을 몰라 헤매는 우리에게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 정신력이 약하다'는 식으로 냉혹하게 채근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고통의 극치를 당신이 친히 직접 겪으셨기에, 연민 가득한 사랑의 시선으로 애틋이 바라보시며 어떻게든 좀 더 나은 삶으로 옮겨 주시려고 애쓰시지요.
제1독서에서는 당신 백성을 새로운 삶으로 옮겨 주시려는 하느님의 마음이 드러납니다.
"나는 너희를 찾아가 너희가 이집트에서 겪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이집트에서 겪는 고난에서 나희를 끌어내어,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탈출 3,16-17)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시기 전에 이미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과 울부짖음을 들으셨고, 친히 그들을 찾아가 그 참상을 살펴 보셨습니다.
이처럼 직접 찾아오시어 삶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훗날 이루어질 성자 예수님의 강생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있는 나"(탈출 3,14)이신 참 존재자이시면서 피조물의 행복을 위해 역동적으로 움직이시고 섭리를 풀어나가시는 분이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의지에 최선의 노력으로 응답하면서 구원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멍에를 지기 위해 먼저 세상의 멍에와 짐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고생스러웠던 경험뿐만 아니라 안락하고 자기중심적이었던 욕망도 함께 떨쳐버려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으려면 세상살이에서 즐겨 애용했던 우월의식, 이기심, 교만, 자기영광 따위가 큰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계획을 믿고 떠나긴 했지만 자유와 해방이 당장 거저 주어진 게 아니었습니다. 반항하고 불평하고 심지어 이집트의 시간을 미화해 그리워하기까지 하게 만든 광야의 험난한 시간을 피할 수 없었지요. 그들을 찾아오셔서 이끌어내신 하느님의 사랑을 무참히 배반한 순간도 성경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광야는 계약의 백성이 되기 위한 준비의 시공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진정한 안식을 얻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광야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배우는 과정 안에는, 우리가 진정 자판기 아닌 인격신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내 이익만이 아니라 형제와 이웃의 공동선을 바라는지, 자기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지 성찰하게 만드는 사건과 관계들이 줄을 잇게 됩니다. 이 검증의 광야를 거치면서 차츰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멍에를 진 그분의 벗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안식은 혼자만 누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이웃과 형제, 세상이 모두 평안하지 않으면 우리의 안식은 그저 먼 일일 뿐이지요. 하느님의 피조물인 우리 모두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우리가 절절히 체험하는 바이지요.
우리 모두 탐욕과 자기영광, 이기심을 내려놓고 정말로 가뿐히 주님의 멍에를 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하고 가벼이 안식하기를 축복합니다.
성 보나벤투라,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부드러움과 겸손으로 지고 가는 내 멍에>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제자다워지려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11,28-29)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멍에는 613가지나 되는 율법의 규정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담은 율법이 어느새 오히려 사람들을 구속하는 멍에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11,30)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사랑이요, 그분의 짐은 자유와 해방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과 자유와 해방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께 지고 가야 할 율법의 멍에는 우리 삶 자체에서 오는 고통과 시련, 그리고 영혼의 짐을 뜻하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십자가의 길이요, 고해(苦海)라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때로는 자신의 십자가만 지고 가기에도 버거운데,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라니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여 모든 것을 다 팽개쳐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신앙마저도 짐스러워 어떤 분들은 괜히 세례 받았다며 후회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로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힘들고 고통스런 인생의 짐을 진 사람은 누구든 당신에게 오라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고통을 받아주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고통과 외로움을 안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의 삶의 무게를 지고 나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대책도 없이 오라 하실까요? 아닙니다. 그 짐을 함께 지고 가시려고 오라 하시는 것이지요.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예수님께서 함께 져주시겠다니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그 짐을 지고 갈 사랑의 힘을 주시려고 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짐을 지고 걸음으로써 자유와 해방을 체험하도록 해주시려고 오라 하시는 것이지요. 그렇게 내 고통과 어려움과 불편의 짐을 지고 예수님께 가는 자체가 ‘인생 휴가’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멍에를 지는 두 가지 자세를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온유와 겸손입니다. 인생 십자가를 질 때 먼저 필요한 것은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이 있을 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받아들여짐은 함께함이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드러움으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품어주셨습지요.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고, 사회적 약자들과 늘 함께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낮춤이요 비움이며 더 작아짐입니다.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려는 마음 없이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하느님이 자리 잡으실 때 하느님의 힘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겠지요. 내가 더 작아질수록 하느님께서 앞장서 나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겸손하게 내 인생의 짐을 지고 가야 합니다.
내가 외로울 때, 너무 힘들어 절망의 숲속을 헤맬 때, 숨조차 쉴 수 없는 고통의 순간 주저하지 말고 주님께 나아갑시다. 함께 내 인생의 짐을 져주시겠다 하시는 주님께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내 짐을 함께 져주시며 사랑과 자유와 해방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부드러움으로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불의에 저항하며, 겸손한 자세로 삶의 십자가를 졌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작은형제회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탈출기 3,13-20 마태오 11,28-30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님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찌는 듯한 무더위에, 거듭되는 재확산에, 그에 따른 경제적·정신적 고통에 다들 얼마나 힘드십니까?
어디 그뿐인가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상처입고, 그 상처 부여안고 눈물 흘리고...
이런 우리에게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오 복음 11장 28~30절)
우리가 그분께로 다가갈 때 마다 환한 미소와 함께 활짝 열린 두 팔로 환대하시고, 꼭 안아주시고,
고생 많다며 등을 토닥여주시는 주님을 생각하니 순식간에 피로가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는 주로 부릅뜬 눈으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여차하면 진노하시고 징벌을 내리시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하느님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소개하시며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표현하시니,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고생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안식을 주시긴 하시는데, 거저 주시지는 않으시겠답니다.
당신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편안한 안식을 주시겠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그 큰 고통에다, 그 숱한 짐을 지고 힘겹게 하루하루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특히 죽음과 내세에 대한 공포로 더욱 힘겨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친히 우리 짐을 가볍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모두가 외면한다 할지라도 나만은 너를 외면하지 않겠다, 나만은 너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고통, 지고 가고 있는 많은 짐들을 순식간에 없애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나눠지시겠다고 하십니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우리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결국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인 마음의 고통, 정신적인 고통을 없애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거기다 고통의 끝판왕인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언제나 고통과 십자가를 이고 지고, 손에 들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주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시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단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 곁에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에 못 이겨 신음할 때
우리 옆에서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당신 나라로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복된 그날까지 매일의 고통을 기쁘게 인내하면서 살아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7월 15일 나해 연중 제15주간 목요일(마태오 11,28-30)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는 ‘철부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겸손하게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행동을 바꿔서만 되는 게 아니고 생각을 바꿔서 끝나는 게 아니며, 가장 깊이 있는 인간의 핵심인 마음을 바꿔야만 합니다. 오늘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지배를 받습니다. 마음은 욕구를 자아내는 본성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을 봉헌하고 당신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평안한 안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아이언맨 1’(2008)의 이야기입니다.
토니 스타크는 천재로서 전자회로를 4살에 만들었고 6살에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었으며 17세에는 수석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21살에는 부모가 죽어 스타크 인더스트리 회사의 수장이 됩니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군수물자를 수출하는 회사였기에 토니 스타크는 평소처럼 아프가니스탄에 무기 소개를 하러 가게 됩니다.
그러던 중 테러단체에 공격을 받고 납치를 당합니다. 그중 그의 심장에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되고 함께 있던 인센이란 과학자가 그의 심장에 ‘아크 리액터’라고 하는 에너지원인 전자석을 만들어 넣어줍니다.
스타크는 무기를 만들라는 테러리스트들의 말을 듣지 않고 몰래 자신을 덮어씌울 마크 1이라는 것을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인센은 “낭비하지 말아요. 당신의 삶을….” 이라고 말하며 숨을 거둡니다. 스타크는 자신이 만든 슈트 1을 입고 탈출에 성공합니다.
돌아와서는 아직도 거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인센이 만들어준 심장을 버리고 더 세련된 ‘아크 리액터’를 만듭니다. 그리고 마크 1보다 더 세련된 마크 2를 만듭니다.
그의 아버지의 동업자였던 오베디아는 스타크의 생각에 반대하여 몰래 계속 무기를 판매합니다. 그리고 마크 1을 기반으로 엄청나게 큰 무기를 만듭니다.
결국, 토니 스타크와 오베디아는 각자 자기가 만든 무기를 입고 싸우게 되는데 오베디아는 자신이 만든 무기에 아크 리엑터를 장착하기 위해 토니 스타크 가슴에 있는 아크 리엑터를 빼내 갑니다. 그러면 토니는 심장이 없어 죽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낭비하며 살지 말라고 하며 죽어간 인센이란 과학자가 만들어준 오래된 낡은 아크 리엑터를 버리지 않고 둔 페퍼라는 비서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죽기 직전 다시 옛 심장을 넣고 오베디아와 싸워 승리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사람을 육체와 영혼과 영으로 봅니다. 영은 심장에 있다고 여기기에 육체와 머리와 심장으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
토니 스타크가 만들어 입은 슈트는 육체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토니 스타크는 영혼이고 머리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를 다 살릴 수 있는 것은 가슴에 넣은 심장입니다. 이 에너지가 없다면 슈트도 그 안에 든 사람도 죽은 목숨입니다.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영화에서는 인센이 그 심장을 만들어주었지만 토니 스타크는 계속 자신이 만든 심장을 사용하려 합니다. 그러다 결국 인센이 넣어준 심장을 재장착하고 싸움을 승리로 이끕니다. 여기에서 목숨을 내어주며 스타크에게 심장을 전해준 인센이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당신 심장을 성체를 통해 우리에게 줍니다. 여기서 페퍼는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페퍼가 아니면 다시 그리스도의 심장을 장착할 수 없습니다. 물론 오베디아는 내 교만한 심장으로 세상을 정복하려는 사탄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심장을 받아도 사용하기 싫으면 사용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장을 사용하지 않게 될 때는 내 마음으로 살겠다는 교만이 커질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당신 심장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옳다고 여길 때는 그분의 심장이 빠지고 나의 심장으로 살게 되며 그러면 나도 죽고 육체도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심장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토니가 인센 덕분으로 살 수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살라는 인센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말고 인센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의 심장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됩니다. 심장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센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심장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여야 그리스도의 심장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나를 봉헌하고 나를 그리스도로 여길 때 내 안에 온유하고 겸손한 심장이 작동합니다. 그러면 나도 살고 내가 만든 슈트도 삽니다. 그렇게 세상을 이기고 많은 이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철부지 어린이처럼 된다는 말은 나에게 심장을 주시는 그분께 온유하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분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예수님의 심장으로 살아갑시다. 내가 그리스도이고 그래서 나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을 하루에 수백 번이라도 반복합시다. 그러면 정말 믿어질 것이고 그러면 정말 아이언맨이 될 것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내가 ‘아이언맨’입니다.”입니다. 그가 한 일을 숨기라는 많은 사람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힙니다.
이는 자신의 심장이 인센이 준 심장임을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
2021. 7. 15.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마태 11,28-30)<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님송영진 모세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예수님은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해방’이 바로 ‘구원’입니다.)
‘짐’과 ‘멍에’를 유대교의 율법들로만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겠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는 일이고, 중요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유대교 율법들과 상관없이 살고 있고,
그 율법들이 우리에게 ‘짐’과 ‘멍에’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유대교 율법은 그냥 다른 종교의 율법일 뿐입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 ‘짐’과 ‘멍에’는 인생살이의 여러 가지 고통들입니다.
2) 멍에에 관한 예수님 말씀 바로 뒤에는, 바리사이들이 어느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비난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습니다(마태 12,1).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배고픔은 보지 않고,
밀 이삭 몇 개를 뜯어 먹는 것만 보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안식일 규정’이 멍에일까? ‘배고픔’이 멍에일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진짜 멍에는 ‘배고픔’입니다.
잘못된 율법 해석과 적용은 그 멍에를 더욱 무겁고 괴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에 초점을 맞춰서
그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마태 12,3-4).
그리고 안식일 규정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으셨고,
바리사이들의 잘못된 해석과 적용을 비판하셨습니다(마태 12,7).
3)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우리의 멍에와 짐을 없애시는 분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안식’은 모든 멍에와 짐을 벗어버린 상태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 앞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3-14).”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2-34).”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든 것은 ‘참된 안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신 것은,
온갖 멍에와 짐에 짓눌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는 말은,
안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것은 전부 다
멍에와 짐들의 억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신 일입니다.
4)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은, “참된 안식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과 배운다는 말은,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멍에’는 반어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멍에’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안식’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뒤를 따라가기 위해서 져야 하는 십자가는 멍에인가, 아닌가?”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지고 가는 십자가는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안식을 얻기 위해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은총의 도구’입니다.
멍에와 짐을 벗겨주는 도구. 신앙생활은 멍에를 메는 생활이 아니라 멍에에서 해방되는 생활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이 ‘멍에’를 메는 생활이라면 그런 생활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제의 경우, 사제 직무는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기쁜 일’입니다.
그 일은, 사제 자신이 먼저 안식을 누리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만일에 자신의 사제 직무 수행을 ‘멍에’나 ‘짐’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딱한 일입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에는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사랑하니까 멍에를 참고 견딘다.”는 말은 궤변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멍에란 없습니다.>
5)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이 말씀도 반어법적인 표현인데, 뜻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와 짐을 없애고 너희에게 편안함과 가벼움을 주는 열쇠이다.”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도 아니고 짐도 아닙니다.
우리를 멍에와 짐에서 해방시켜 주는, 그리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는 ‘은총의 열쇠’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무거운 멍에를 편한 멍에로, 무거운 짐을 가벼운 짐으로
바꿔 주신 것이라면, 그것은 안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말했지만, 안식이란 멍에와 짐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멍에와 짐에서 벗어나라고 우리에게 ‘열쇠’를 주시는데,
그 열쇠를 또 다른 멍에와 짐으로 오해하거나 착각한다면,
멍에와 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참된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탈출기 3,13-20 마태오 11,28-30 -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이 ‘야훼(에흐예)’, 곧 ‘있는 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야훼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나는 있을 것이다.’ 또는 ‘나는 있다.’입니다.
이 낱말은 명사가 아니라 있음, 곧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이름은 단순히 그 사람에게 붙여지는 의미 없는 낱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또 어떤 사명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려 줍니다.
하느님의 이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특징, 곧 ‘우리와 함께 항상 계신 분’, ‘아브라함 때도, 이사악 때도, 야곱 때도 계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 더 나아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도 늘 함께 계셔 주시는 분’이라는 특징을 잘 드러내 줍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억압받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참으로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셨음을, 당신이야말로 참된 ‘야훼’이심을 알려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밝히시며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권고하십니다.
여기서 ‘온유하다’라고 번역한 그리스어는 ‘프라위스’입니다.
이 낱말은 본디 히브리어 ‘아나빔’(가난한 이들)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온유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온유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온유한 이들은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마태 5,5 참조).
곧,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그 땅,
하느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목 -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복음)
사는 것은 고통의 바다라던가?
삶과 죽음에 관해 끊이지 않는 동서고금의 성찰과 견해는 다름 아닌
어떻게 이 삶의 수고와 피곤함에서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물음과 제안들이다.
그런데 안식을 주시겠다니 눈이 번쩍 뜨이는 제안인데, 어떤 안식일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안식을 얻기 위해 다시 멍에를 메라고?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이에게, 멍에를 더하는 것이 어떻게 안식을 얻는 길일까?
목숨이 있는 한 멍에는 없어질 수 없다. 인간 됨의 조건이 그렇다.
그러나 어떤 멍에를 멜 것인지 선택은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멍에"를 메라고 이르신다.
예수님의 멍에가 아닌 모든 멍에가 내가 선택한 나의 멍에라고 볼 수 있다.
나의 멍에란 내 힘으로 살며 내 능력으로 무엇을 이루려는 태도다.
이 상태는 삶의 피로와 절망을 더할 뿐 해방은 요원했다.
왜냐하면 내 멍에 안에서 그 멍에의 궁극적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멍에란 삶의 한숨과 피로, 고통의 의미를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는 태도다.
당신은 삶의 고통과 죽음을 넘어선 분이시기에 내 삶과 죽음에 궁극적 의미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부활의 빛에 비춰서 내 삶을 다시 보는 당신의 멍에는 정녕 편하고 가볍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생명의 충만을 당신 안에서 보게 하는 멍에를 메고 살라는 초대를 듣는다.
[출처]연중 제15주간 목 -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작성자 말씀에
2021년 7월 15일 목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 야고보 아저씨
숲속의 명카수 까마귀
우리가 짊어지고 사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를 무겁고 고생스럽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정말로 힘들 때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내 짐을 가볍게 하는 방법을 배울 수 없어서 오기와 마음에 독을 품으며 억지로 세상을 살았다는 생각입니다. ‘억지가 사촌보다 낫다.’는 말도 있지만 그렇게 무거운 짐을 나에게 지우셨냐고 하느님을 원망도 많이 하였습니다. 또한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주변 사람들이 답답하고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그 모든 것이 나의 교만은 아니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삶 속에서 예수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방법이었는데 그것을 알았을 때는 늦어버리거나 지난 후였으니 철들지 못해서 죽기 십상이고, 죽을 때야 비로소 철든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솝의 우화에 ‘여우와 까마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소풍을 나왔다가 돌아간 자리에 큰 고깃덩어리를 보았는데 까마귀는 잽싸게 그것을 물고 나무 위로 올라가 혼자 먹으려고 하였을 때 지나던 여우가 그 장면을 보고 고깃덩어리를 빼앗기 위해서 까마귀를 그만 유혹합니다. “숲 속 제일의 명가수 까마귀님, 당신의 노래를 듣고자 온 여우랍니다. 저를 위해서 한 곡조만 불러주십시오.” 하자 까마귀는 그만 감탄합니다. ‘ 아! 단독 오디션이라니!’그래서 “까르륵”하고 입을 벌려 노래를 하자 고깃덩어리는 떨어지고, 여우는 신속하게 고깃덩어리를 물고 사라집니다.> 이솝은 여기까지 얘기하면서 절대로 간교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렇게 뒤를 잇습니다. <여우가 고깃덩어리를 물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까마귀는 반성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렇게 고깃덩어리를 물고 허겁지겁 달아날까? 이건 내 잘못이야, 아무리 오디션이 좋아도, 노래가 좋아도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하면서 까마귀는 숲 속의 모든 동물들을 초대하기로 마음먹고 노래를 더욱 잘하기 위해서 열심히 연습합니다. 어느 날 까마귀는 음식을 푸짐하게 마련하고 숲속의 동물을 초대하고 노래를 들려주느라 바빴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반면에 동물들은 까마귀의 노래가 썩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맛있는 상을 차려 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부르게 먹고 즐겁고 행복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까마귀의 노래는 점점 발전하고 좋아져서 결국은 숲 속의 명가수가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멍에는 다른 사람이나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멍에는 자신이 마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멍에를 세상 탓으로 돌리고 사람들이 나에게 멍에를 씌우고 힘들게 한다고 합니다. 까마귀처럼 멍에라고 생각하지 않고 행복한 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세상이 밝고 아름답겠습니까?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처럼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이라도 열심히 한다면 고생이 다하는 날 행복이 온다는 말을 믿고 지금 멍에를 짐으로 여기고 힘들다고 불평한다면 오늘 우화에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멍에를 메는 방법은 온유하고 겸손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내게 주어진 십자가임을 알고 어려운 환경과 처지를 불평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를 ‘수용’한다고 하는데 이 수용(受容)한다는 것은 내 얼굴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대로 불평 없이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마음일 때 온유하고 겸손한 것입니다. 지금은 성형 수술이 아주 발달 되어서 자기가 원하는 모습대로 얼굴을 바꾸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수용이라는 말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게 주어진 멍에는 내가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무게만큼 잘 가늠하셔서 알맞게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오 16, 24)라고 온유한 자세로 내가 지고 있는 멍에를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겠습니다.
겸손한 방법은 모든 것은 내 탓이라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고 자신의 행동을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잘못을 크게 뉘우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자신을 드러내놓고 내가 잘한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고집대로 세상 사람들을 판단하여 교만이 극에 달하기도 합니다. 교만은 모든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만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섬김의 자세로 살려고 노력할 때 바로 멍에를 메는 방법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방법은 온유와 겸손으로 더욱 가볍고 편안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편하고 쉽게 멍에를 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쉽게 해주셔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래서 희망을 주님께 두며 벅차오르는 기쁨으로 “감사합니다.”를 외칩니다.
주님께서 목수 일을 하셨을 때 예수님의 집에는 "맞춤 멍에 센터" 라는 간판이 걸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집의 주인이셨고, 요셉성인에게서 물려받은 직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소가 귀하고 밭은 돌밭이어서 밭을 갈 때에는 쟁기의 보습이 잘 부러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멍에를 사람들이 주로 끌었는데 어깨에 멍에를 멘 사람들에게 가장 편하고 가장 잘 맞는 멍에를 예수님께서 많이 깎아 주셨는지 오늘말씀에서 어쩜 이리도 절묘하게 말씀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멍에는 내가 만드는 것이기에 무겁게 질 수도 있고 힘들게 질 수도 있고, 고생스럽게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대로 지고 산다면 아주 편하고 쉽다는 말씀을 되새깁니다.
210715.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제1독서 (탈출3,13-20)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4-15)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라고 번역된 '마 셰모'(ma shemo)에서 '이름'을 뜻하는 '솀'(shem)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솀'(shem)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어떤 사람을 부르는 데에만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고,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성격이나 신분 또는 운명등을 반영하였다(창세17,5.15; 32,28).
따라서 과거 사람들은 그 이름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았으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창세14,22; 16,13; 17,1).
창세기 14장 2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으로, 창세기 16장 13절에서는 하가르가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으로, 창세기 17장 1절에서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전능한 하느님'으로 소개하고 불렀다.
이런 이름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한편 고대 근동의 임금이나 군주들은 사신을 보낼 때, 그 사신에게 자신의 권위를 전적으로 위임한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이름이 담긴 인장을 주거나 아니면 그 인장이 찍힌 편지를 주었다. 모세는 이러한 차원에서 하느님의 신임을 요구한 것이다.
'나는 있는 나다'
'나는 있는 나다'의 원문은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ehye asher ehye)이다. '에흐예'(ehye)는 '있다'(창세1,2)라는 뜻의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야'(haya)의 1인칭 미완료형으로 '나는 존재한다'(I am) 또는 '나는 ~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셰르'(asher)는 'that, which, what, who' 등과 같은 관계대명사이다. 즉 '~것', '~자'의 의미로, 뒤에 나오는 문장을 묶어 앞뒤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뜻이다. 히브리어에서 동사의 미완료형은 완료되지 않은 동작이나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개념처럼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묵시1,4.8).
이것은 결코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고 무엇인가 앞선 원인에 의해서만 존재하면서 또한 그 원인에 의해서 지배당할 수밖에 없는 여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유일하게 스스로 존재하시며, 따라서 모든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우시고 나아가 다른 모든 피조물이 존재할 수 있는 궁극적 원인이 되어 주시는 하느님의 유일한 자존성(自存性)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영원자존자'(永遠自存者)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여타 피조물과 비교할 때, 당신의 고유한 본질과 성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자존성을 나타내는 칭호를 당신의 이름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것은 초월적 절대자로서 모든 인과(因果) 법칙을 초월하셔서 자존하시는 분으로서 전 우주에 퍼져 있는 여타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 근거와 기반이 되시는 하느님의 자존성(自存性)과 영원성(永遠性)과 절대성(絶對性)을 그대로 반영한 이름이다.
또한 이 이름은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자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여타 모든 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거짓 신들임에 비하여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살아계시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에흐예'(ehye)라는 말에서 유래된 '야훼'(주님)이란 이름은 하느님과 그 백성의 계약 관계를 나타낼 때 많이 사용되었다.
즉 절대 초월자이신 하느님께서 각 계약을 체결하시고, 그 계약들의 신적 기원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계약들이 영원한 하느님처럼 절대 불변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본문만을 보고, 하느님의 이름이 이때 모세에게 '에흐예'(야훼)로 비로소 처음 계시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창세기 2장 4절의 창조 기사에서부터 이 이름이 발견되며, 더군다나 창세기 4장 26절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 즉 공식적인 예배가 드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탈출기 3장 14절과 15절은 지금 계시를 주시는 분이 영원히 자존하시는 주님 ('에흐예'; 야훼)이심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는 의미를 가지며, 그 이름의 진정한 뜻에 대한 신적 해석이 비로소 이때 온전하게 알려졌음을 드러낸다.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우리 삶의 멍에, 그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 맞다, 그러나~
(마태11,25-30)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피조물인 사람의 뜻으로 받으면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해 감추어지게 되는 것.
(1코린1,21-24)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그리스도, 곧 십자가의 대속, 그 죽음, 그 의로움이 구원의 힘이며 진리, 지혜인 것.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ㄱ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시편44,12) 당신(하느님)께서 저희를 잡아먹힐 양들처럼 넘겨 버리시고 저희를 민족들 사이에 흩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적대자들에게 넘기신 것.
(아모6,8) 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걸고 맹세하셨다. 주 만군의 하느님의 말씀이다. “나는 야곱의* 자만을 역겨워하고 그 성채를 싫어한다. 나는 성읍과 그 안의 모든 것을 넘겨 버리리라.”
= 이스라엘(야곱)이 하느님의 지혜가 아닌 사람의 지혜로, 세상 것을 위한 신앙생활을 살기에 적대자들에게 넘겨지는 것,
(이사10,5-6)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 강대국의 힘을 하느님의 진노의 매로 쓰신 것,
그런데 예수님은 ~
(루가24,7)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 예수님께서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생명, 평화 그 복을 주러 왔다, 하시니~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적대자, 로마의 손(힘)에 넘겨 그 힘을 통해 죽인 것, 그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적대자, 그들 모두의 죄를 다 넘겨 받으시고, 그들의 죗값으로 죽으심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곧 하느님의 용서의 권한을 넘겨 받으셨다는 것.
(로마4,25) 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되살아나셨습니다.
= 예수님의 부활도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한 것, 바오로 사도가 불륜을 저지른 자에게 죽음의 판결을 내려야 함을 강하게 말했을 때~
(1코린5,4-5) 4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나의 영이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가지고 함께 모일 때, 5 그러한 자를 사탄에게 넘겨 그 *육체는 파멸하게 하고 그 *영은 주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한다는 것입니다.
= 죽였다 다시 살리시기 위해 적대자에게 넘기시는 그 하느님의 뜻, 그 마음을 인간이 어떻게 깨달아 믿을 수 있겠는가~
27ㄴ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혜, 도덕과 윤리로 무거운 짐이 되어 고생하는 이는 모두 다시 배워라 하시는 것,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 예수님의 멍에, 십자가. 그 예수님의 십자기를 메면 안식을 얻는 것.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죄를 대속한 내 십자가라는 것, 그것이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다시 배워라~ 그러면 그 예수님의 멍에, 대속의 십자가가 주는 하늘의 용서를 깨달아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이신 것.
물론 우리 삶의 멍에, 그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 맞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현실의 먼에를 메는 것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는 다면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곧 그리스도 신앙이 아닌 헛된 신앙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길이 생명의 진리라 하시며 *‘아무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쟎은가~(요한14,6참조)
그 예수님과 하나 되는, 곧 예수님의 멍에(십자가)를 내 십자가로 메면, 믿으면 하늘의 용서로 하늘의 안식을 살게 되는 것.
(로마6,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30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아멘.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8~30)
'고생하고'로 번역된 '코피온테스'(kopiontes)는 '육체적으로 피곤하고 지치다', '감정적으로 용기를 잃고 낙담하다'는 뜻을 가진 '코피아오'(kopiao)의 현재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희랍어에 있어서 분사형이 진행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것은 한 번 낙담하거나 지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지치고 낙담 중에 있는 사람들아'라는 뜻이다.
그리고 '짐은 진 너희는'으로 번역된 '페포르티스메노이'(pephortismenoi)는 '남에게 어떤 짐을 지우다'라는 뜻의 '포르티조'(photizo)의 현재 완료 수동 분사 2인칭 복수 호격이다.
그러니까 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무거운 짐이 지워진 자들'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은 무엇인가?
그 짐은 일차적으로 바리사인들과 율법학자들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구한 무거운 율법적 관행들(마태23,4)이며, 더 나아가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을 뜻한다.
다시 말해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란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며, 당시 종교적 관행이 요구한 율법의 짐과 마귀들의 꾐에 넘어가 지은 죄의 짐 사이에서 눌려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에서 '안식을 주겠다'에 해당하는 '아나파우소'(anapauso)는 '쉬게 하다','영적인 휴식을 주다', '안식하다'라는 뜻을 가진 '아나파우오'(anapauo)에서 유래했다.
특히 '아나파우오'에서 유래한 명사 '아나파우신'(anapausin)은 '쉼'이라는 뜻인데, '안식'과 동의어이다(히브3장,4장).
그리고 '내가'에 해당하는 '카고'(kago)는 '카이'(kai; and)와 1인칭 대명사인 '에고'(ego)의 복합어로서, '그러면 내가'라는 뜻이다. 본문에서 인칭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동작의 주체를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원어의 뉘앙스를 살리면,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오는 지치고 피곤한 죄인들에게 '쉼'을 주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쉼'(안식)은 인간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인데, 현재적인 '쉼'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의미한다(히브3,18~4,11; 묵시14,13).
그리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태11,29)에서 '온유'로 번역된 '프라위스'(prays; gentle meek)은 '친절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리키며(마태5,5), '겸손'으로 번역된 '타페이노스'(tapeinos; humble; lowly)는 높아짐과 반대인 '낮아짐'(야고1,10), 심지어 지위와 신분을 낮춘 '비천함' (2코린7,6), 혹은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겸허','겸비'(2코린10,1)를 나타낸다.
이것을 종합하여 반영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일부러 자신을 낮추는 겸허한 자세를 가졌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고난받는 인자(人子)의 모습을 취하셨고(이사42,2.3; 53,1.2), 모든 권세를 받으신 만왕의 왕이셧으나 동시에 종이 되어 오셨으며, 높은 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종으로서의 삶을 사셨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요구하셨다(마르10,43.44).
예수님께서는 낮고 비천한 자리에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눈높이 교육'을 하기위해 자신을 낮추셨으며,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시고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셨던 것이다.
'진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30)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gar; for)로 시작되는 본문은 '주님의 멍에를 메고 그에게 배우면 왜 마음에 안식(쉼)을 얻는지'에 대한 이유를 밝혀 주는 이유 부사절이다.
그 이유는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의 짐은 가볍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문은 '내 멍에는 편하고'의 전반부와 '내 짐은 가볍다'의 후반부가 동의적 평행 대구로 나열된 형태인데, 둘은 본질적으로 같은 뜻이다.
여기서 '멍에'로 번역된 '쥐고스'(zygos; yoke)는 가축이 짐수레를 효과적으로 끌 수 있도록 목에 씌우는 것을 가리키며, '짐'에 해당하는 '포르티온'(phortion)은 주로 배에 싣는 무거운 짐(burden)을 가리키는데(사도27,10), 여기서는 둘 다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이 '짐'은 율법학자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지운 무거운 종교, 의식적 행위들을 가리킨다(마태23,4; 루카11,46).
또한 '멍에' 역시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까지 강요한 무거운 율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사도15,10).
반면에 주님의 멍에와 짐은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의 방도로 지키고 가르쳐 온 613가지의 교훈 및 규칙과는 다르게, 주님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인 '사랑의 계명'을 비유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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