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산약초 농장 만들기
 
 
 
 
 

카페 통계

 
방문
20240808
79
20240809
54
20240810
60
20240811
46
20240812
63
가입
20240808
1
20240809
0
20240810
1
20240811
1
20240812
1
게시글
20240808
6
20240809
1
20240810
4
20240811
1
20240812
7
댓글
20240808
0
20240809
0
20240810
0
20240811
0
20240812
0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살아가는이야기 스크랩 지난 세월(10) - Home sweet home
산적 주정필 추천 0 조회 119 15.12.18 10:1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세월(10) - Home sweet home


수퍼에서 전갈이 왔다.

나를 좀 보잔다.


이른 아침에 둘이 엉켜 자고 있는 현장을 들키고 말았으니 각오는 하고 있었다.

긴머리 아가씨는 골방 귀통이에서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있고 오빠 두분과 아버님이 대기하고

계셨다.


- 앞으로 어떻게 할껀가?

- 이제 공무원 시작이니 3년안에 결혼 하겠습니다.


- 안되~! 3개월 안에 하도록 하게나

- ..... 네


나중에 들은 애기로는 긴머리 아가씨는 오빠들과 아버님으로 부터 혼쭐이 났단다.

당시 꽤 괜찮은 혼처를 골라 맞선을 보러 다니곤 했었다.


- 그렇게도 시집이 가고 싶더냐~? 

- 시집 가고 싶다고 두살이나 어린 남자를 골랐냐~?

- 빈털털이 말단 공무원한테 시집가서 어떻게 살려고~ 

- 장남인데~


그날 부터 결혼 작전을 세웠다.

집에 알리니 다들 반기는 눈치이다. 이미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력 좋은 큰누님이 전세금으로 100 만원을 지원해주셨다. 그돈으로 상하방을 구할수 있었다.


주례는 중학교 다닐 무렵 다녔던 궁동의 동부 교회 백 영흠 목사님을 모시기로 했다.

그리고 결혼식장을 얻을 형편이 안되므로 목사님 사택 정원 잔디밭으로.

하객들을 대접할 형편이 안되므로 평일 오후 2시에 시간을 잡기로 했다.


공무원 첫 봉급 받을때 계장님이 내 봉급 명세서를 보자하셨다. 첫 수령액 8만원.


- 60년대랑 다를께 없구만. 나도 첫 봉급 쌀 두가마 받았다네.


당시는 한가마 80 kg 이니 쌀 두가마이면 요즘 20 kg 8포대. 시세로 따지면 35 만원 남짓.


그동안 내 글을 읽던 분들은 눈치 채셨으리라 보지만 우리 어머니는 경제적인 능력이 전혀 

없던 분이셨다. 광주 서방의 부자집 외동 막내딸로 태어나 일제 시대에 중학교까지 졸업

하셨던 인텔리셨지만 갑자기 몰락한 우리집을 일으켜 세우실 경제적 능력이나 의지가 없던 

분이셨다.


나는 8만원 봉급의 절반을 뚝 잘라 어머니 생활비로 드리곤 했던 차라 저축은 꿈도 못꾸고

있던 터. 9월달은 3/4 분기 보너스 달이어서 수당 포함 20 만원 정도 수령할수 있기에 그돈을

활용하기 위해 봉급날 이틀후인 9월 22일 화요일로 D day를 잡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큰 아들 장가 가는데 금반지도 안해주시냐며 떼를 쓰셨다.

하는 수 없이 결혼 비용으로 쓰려고 잡아둔 예산에서 금반지를 해드려야 했다.

반지 비용이 무려 12 만원. 남은 돈은 고작 8 만원 뿐.


드디어 결혼식 날.

하객들 대접할 처지가 안되므로 가급적 알리지 않았건만.. 

친구들도 양쪽 모두 각각 두명 정도씩만 참석했으나...

양가 친척들이 대거 참석하고 내가 근무하던 동사무소에서는 선배 직원들과 인근 통장님들까지

새마을 모자를 쓰고 나타나셨다.


신랑 신부 동시 입장~! 을 선언하신 목사님 때문에 장인 어른은 큰 딸 손도 못잡아보고 말았다.




잔디 밭에서 조촐한 다과 파티로 끝내려 했던 결혼식 피로연은 대거 참석한 손님들 식사 대접

으로 바뀌게 되어 당시 조그만 사업을 하던 손위 처남만 바빠지고 택시등을 대절하여 상무대에서

대인동까지 손님들을 안내하고 식사 대접을 해야만 했다. 물론 그 비용은 모두 처남 몫이 되고

말았다.



우린 근처에 있던 터미날에서 정읍 내장사행 버스를 타고 1박 2일 신혼 여행을 떠났다.

평일이어서 적막감이 흐르던 내장사.

우린 맘껏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곤했다.


그렇게 시작한 결혼 생활.

가난했지만 무척 행복했다.

얼마 안되어 임신을 하게 되었으나...




결혼 당시 울각시의 체중은 42 kg, 허리 둘레 24 인치였다.

어찌나 입덧을 심하게 하는지 물 한모금도 토해내고 두달을 지나고 나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 언저리가 꺼져 dark circle 까지 생겼으니 속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갓 결혼한

새댁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수근 거렸다.


산부인과에 찾아가니 체중 37 kg 이므로 산모가 위험할수 있다며 유산을 권했다.

두번째 임신은 좀 나을거라며...


일년쯤 후에 다시 임신이 되었다.

이미 혹독한 입덧을 한번 겪었기에 나름 대비한다고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그시절 바나나는 엄청 비싼 과일이었다.

나는 당시 시세 5천원에 바나나 한송이를 사들고 밥이 안들어 가면 이거라도 먹으라 했지만

무언가 먹기만 하면 속이 뒤집어져 먹을수 없다 했다. 심지어 밥과 반찬 냄새도 맡기 힘들어

하는 바람에 나는 부엌에서 석유 곤로에 밥을 해서 혼자 쪼그려 앉아 밥을 먹어야 했다.


다시 찾아간 산부인과 의사는 이번에도 포기하면 영영 애 낳을 생각 말아야 한다며 버틸수 

있을 만큼 버티라 했다.


어느날 퇴근하니 산발한 머리에 칙칙한 고동색의 임신복을 입고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온힘을 짜내는듯 겨우 내게 말을 건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