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사랑의 시작
바하마의 아름다운 해변선을 따라 벌써 태양이 힘차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으며 아침 일찍부터 휴양지로 몰려든 관광객들로 인해 붐비기 시
작했다. 바하마의 웨스턴 롱 비치가 한눈에 들여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미보셤 호텔
의 17층 전용실에서는 메드닉이 아직까지도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이미 메드닉의 침실 밖에서는 경호원들이 오전 6시에 있는 임무 교대를 마친 상태였
고 개인 비서 레베카 더글라스와 주치의 앤소니 프레이저가 출근을 마친 상태였다. 총
지배인 프레디는 각 부서의 부서장 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밤새 날아온 팩스를 정리하면서 정신이 없었다. 시계는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레베카는 서둘러 앤소니를 호출했다. 전화기에서 앤소
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앤소니입니다."
레베카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간밤에 잘 잤나요?"
어쩐지 앤소니의 목소리는 약간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레베카, 지난 밤에는 너무 즐거웠어요. 언제 다시 그런 선물을 받아볼 수 있을지..."
레베카는 앤소니의 말을 가로막으면서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업무 중이에요. 그러니까 용건만 간단하게 말하겠어요. 붕대는 언제 풀
죠?"
"아마 내일이면 풀 수 있을 겁니다."
앤소니가 상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그렇다면 내일 밤에 다시 만나기로 해요. 바로 그 장소에서 말이에요."
"알겠습니다."
레베카는 전화를 끊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다는 듯이 다시 수화기를
귀에 대고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앤소니."
"무슨 일이죠?"
"오늘 오전에 회장님을 정기 검진할 때 설마 주사 놓는 걸 잊어버리지는 않겠죠?"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레베카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녀는 손에 든 팩스 뭉치를 챙겨 들고 복도를 나
섰다. 복도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레베카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복
도를 따라 걸어가던 레베카가 멈추어 선 곳은 경호실장의 사무실 앞이었다. 레베카는
가볍게 방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사무실에서 약간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베카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호실장 마틴이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 놓고 있었다. 마틴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레
베카를 발견하다 잠시 당황한 듯이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틴, 좋은 아침이에요."
"어서 오세요, 레베카.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내가 보고
하기 위해 찾아갈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레베카가 경호실장으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는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물론 레베카
가 경호실장의 방으로 와서 보고를 받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경호실장 마틴은 1분도 늦지 않은 7시 30분 정각에 레베카의 사무
실 문을 두드렸고 엄격한 업무 확인을 받았다. 때로는 호통을 들었고 때로는 칭찬을
받아가면서 열심히 근무했다.
그런데 레베카가 오늘따라 보고 시간이 되기도 전에 경호실장의 사무실을 방문한 것
이다. 이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호실장 마틴은 매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는 푹신한 소파에 앉으면서 다리를 꼬았다. 그 순간 레베카의 짧은 치마가 위
로 말려 올라가면서 길고 하얀 허벅지가 환하게 드러났다. 레베카는 그런 자세로 물끄
러미 마틴을 응시했다.
"마틴, 오늘은 보고할 필요가 없어요."
평소의 레베카와는 말투가 달랐다. 그렇지만 마틴은 지금 레베카의 말이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소파에 앉은 그녀의 쭉 뻗은 다리에 온 신경이 가 있었던 것이다. 가슴
선이 깊이 패인 블라우스의 안쪽에서 풍만한 육체가 숨을 쉬고 있었다. 금발에 진한
화장 또한 미녀 레베카의 자태를 눈부실 정도로 빛나게 하고 있었다. 경호실장 마틴은
레베카의 농염한 모습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마틴, 경호실의 예산 편성에 대해 이의가 없나요?"
그 말을 들었던 마틴은 매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6개월 전부터 경호실의 예
산이 상승하기는 했지만 다른 직원들에게는 일체의 보너스도 올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당황한 마틴은 꼬리가 잡힌 게 아닌가 걱정하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전혀 이의가 없습니다."
레베카는 꼬고 앉았던 다리를 슬며시 바꾸면서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
다.
"경호실 예산 사용내역을 볼 수 있을까요?"
마틴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횡령이 들통났
을 거라는 생각에 매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레베카는 그러한 마틴의 눈동자를 정면
으로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레베카는 마틴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면서 담배를 꺼냈다. 그녀는 매우 익숙한 동작
으로 탁자 위에 있는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담배를 문 레베카는 길게 한 모금의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마틴은 점점 더 당황하는 기색을 나타내었다.
"서류 정리가 미처 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염한 태도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레베카의 면전에서 마틴은 온몸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레베카의 말은 한 가닥 희망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까지는 할 수 있겠죠?"
"물론입니다. 레베카."
마틴은 안도의 한숨을 돌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마틴은 레베카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퍼지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나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좋아요. 그렇다면 오늘 저녁 9시까지 서류를 들고 내 별장으로 찾아와 주세요."
"알겠습니다."
레베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마틴이 레
베카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동안 레베카가 뒤로 돌아서면서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 말
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레베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긴장이 풀린 마틴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틴
의 머리 속에는 온통 장부에 대한 생각이 가득 차 있었다. 위조한 서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마틴은 사무실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다.
잠시 후에 마틴은 책상 위에 두 다리를 올려 놓은 다음 생각에 잠겼다. 영수증을 조
작하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될 것이다. 하지만 한꺼번에 6개월 동안의 영수증을 모두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레베카의 별장으로 나를 불렀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하라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마틴은 레베카의 이상한 행동이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의 레베카라면 공적
인 업무와 사적인 일을 완벽하게 구분하면서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레베카는 마틴을
결코 한 번도 자신의 집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일이 많을 때에는 자신의 사무
실에서 야근을 하거나 밤을 세워 업무를 끝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레베카
가 자신의 집으로 일거리를 들고 가는 모습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틴은 조금 전에 보았던 레베카의 모습에서 갑자기 커다란 의혹을 느꼈다. 그 행동
은 일종의 유혹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틴은 어쩌면 이 일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 놓으
려는 레베카의 달콤한 유혹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틴의 생각은 점점 더 이
상한 상상으로 빠져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회장님?"
레베카는 결재를 받기 위한 서류를 들고 메드닉의 침실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그녀
는 두 손으로 주스 잔이 올려져 있는 쟁반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겨드랑이 사이
에는 검은색 서류철이 끼워져 있었다. 레베카는 메드닉의 침대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쟁반을 내려 놓고 겨드랑이 사이에서 서류철을 뽑아들었다.
메드닉의 눈 앞에서 레베카는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듯이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뒤로 하고 서 있었다. 뛰어난 미모와 윤곽이 뚜렷한 얼굴에는 지성미와 함께 요염한
향기까지 풍겨 나왔다. 그녀의 몸매에서 나타나는 실루엣을 보면서 메드닉은 항상 레
베카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평소의 메드닉이었다면 아침에 신선한 꽃향기를 맡는 듯한 기분으로 레베카와 몇 마
디 대화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별로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레베카가 들어왔을 때, 메드닉은 여전히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조금 전부터 잠에
서 깨어나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메드닉은 아무런 생각이 없
는 사람처럼 그저 레베카를 응시할 뿐이었다.
건강이 악화된 이후로 항상 즐거운 마음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던 메드닉 해리슨이었
다. 하지만 오늘의 그는 어쩐지 달라 보였다. 메드닉은 무언가 깊은 사색에 빠졌다가
막 깨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지난 몇 년 동안 아침마다 만났기 때문에 레베카는 메드닉의 상태를 너무나 잘 읽어
낼 수 있었다.
"이제 야채 주스는 질색이야, 레베카. 아침엔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한 잔 줄 수 없
겠어? 제발 부탁이야."
레베카는 다정하게 메드닉의 침대 위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감기에 걸린 소년을 대
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커피는 회장님의 건강상 절대로 안 된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어린 아이처
럼 투정을 부리시면 안 돼요, 알겠죠?"
레베카는 탁자 위에 놓인 주스 잔을 들고 메드닉을 부축하면서 일으켰다. 마치 엄마
가 어린 아이에게 주스를 먹이듯이 레베카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럽고 친근해 보였다.
노인은 레베카의 손길에 따라 몸을 일으켰다. 레베카는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조금 힘드시더라도 아침엔 이걸 드셔야 해요."
메드닉은 아무런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는 조심스럽게 주스 잔을 기울
였다. 노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레베카가 먹여 주는 야채 주스를 천천히 마셨다.
텁텁한 야채 찌꺼기들이 메드닉의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갔다.
벌써 3년 전부터 매일 아침 9시에 레베카는 메드닉에게 업무를 보고하기 위해 그의
침실을 방문하고 있었다. 레베카가 업무 보고를 할 때에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레베카에게는 이 시간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고 그것은 메드닉 해
리슨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메드닉은 지난 밤 사이에 올라온 각지의 호텔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그날의 업무
를 지시했다. 중요한 결정 사항에 대해서는 언제나 레베카가 문안을 작성해서 메드닉
의 결제를 받았다.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업무 가운데에서 언제부터인가 레베카는 자신이 직접 메드닉
이 아침마다 마시는 주스 잔을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침실에 들어오자 마자
업무를 시작하기 이전에 회장에게 주스를 먹여 주었다. 까다로운 성격의 메드닉도 아
름다운 여비서의 행동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메드닉은 가끔씩 그런 레베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레베카도 그런
메드닉의 행동을 전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레베카는 회장을 만나기 전의 자기 모
습에 대해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옷을 바꾸어 입었으며 날씨에 따
라 달라지는 화장술 그리고 더욱 메드닉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은 아침의 신선함을
더욱 잘 느끼게 해 주는 레베카의 향수 냄새였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가 홀로 된 노인과 요염한 여비서 사이에 있을 법한 비밀스
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단지 메드닉은 자신의 비서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손녀딸처럼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도 회사의 상사라기보다는 할아버지
를 대하는 듯한 기분으로 자연스럽게 메드닉을 대했다.
메드닉이 주스를 다 마시자 레베카는 빈 잔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 굳어지기 시작한
노인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메드닉은 레베카가 가지고 온 서류철을
들여다보면서 결재란에 자신의 서명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메드닉은 조금은 색다른 농담을 곁들이면서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결재를 마무리했
다. 그는 서류철을 덮고 길게 침대 위에 드러누우면서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레베카?"
회장의 다리를 주무르던 레베카는 문득 손을 멈추고 메드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 회장님."
"특실을 하나 예약해 둬."
"중요한 손님이 오시나요?"
"물론이지. 아주 특별한 손님이 올 거야."
"혹시 저도 아는 분인가요?"
레베카가 의아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마 레베카도 무척 좋아하게 될 거야."
레베카는 메드닉의 기분이 매우 좋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메드닉의 이야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레베카는 다시 침대 위에 걸터 앉아서 메드닉의 다리를 주
무르기 시작했다.
"매우 궁금하군요, 회장님."
레베카는 활짝 웃으면서 회장을 바라보았다.
"음, 내 손녀 로라 해리슨이 오기로 했어."
메드닉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순간 레베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마치 억지로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메드닉을 향해
여전히 활짝 웃는 얼굴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머, 그래요? 축하해요, 회장님. 그러고 보니까 벌써 졸업할 때가 되었군요."
"그렇지. 그 어린 아이가 벌써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었어. 세월이 참 빠르군."
메드닉은 지난 과거를 떠올리기라도 하듯이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눈을 감았다. 그
런 메드닉의 표정을 바라보던 레베카는 탁자 위에 놓인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린
시절의 로라 해리슨이 사진속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레베카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
졌다.
잠시 동안 메드닉과 레베카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레베카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로라 해리슨이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게 된 것이다. 메드닉의 다리를
주무르는 레베카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무거운 정적을 깨는 듯한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레베카는 비로소 자신이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허허."
메드닉이 눈을 뜬 채 웃고 있었다. 레베카는 회장을 향해 시선을 보내면서 다시 미
소를 지었다.
"레베카."
"네, 회장님."
"그 아이가 너무 기특하단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하루라도 빨리 사업을 돕고 싶다는 거야.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아이가 아주 당돌
하게 말이야."
"로라 해리슨 양은 경영학을 전공했으니까 회장님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
요."
"그 알량한 경영이론들이 실전에서 과연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레베카도
잘 알고 있잖아. 그런 것들은 모두 말장난이라는 것을..."
"물론이에요, 회장님."
"하지만 레베카, 나는 로라를 아주 혹독하게 훈련시킬 생각이야. 내 사업을 이어받
으려면 절벽을 기어오르는 호랑이가 될 필요가 있거든. 안 그래, 레베카?"
"물론입니다. 회장님이 이룩하신 사업을 이어가려면 그 정도의 훈련은 당연히 있어
야죠."
두 사람은 함께 가벼운 미소를 주고 받았다. 잠시 후에 메드닉은 다시 눈을 감고 사
색에 잠겼다. 그러한 메드닉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레베카의 얼굴에는 미
묘한 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건 마치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질투심을
연상시키는 표정이었다.
레베카는 메드닉의 다리를 주무르던 손길을 멈추었다. 레베카는 메드닉 회장이 결재
한 서류를 확인하기 위해 일어섰다. 레베카는 서류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며칠 후에 있
을 주요한 행사에 대한 결재가 빠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회장님?"
"무슨 일인가?"
"원로 영화배우 길버트 씨 부부가 골동품 스키를 헐리우드 박물관에 기증하는 행사
를 우리 호텔에서 갖고 싶다고 제의를 해 왔습니다. 그 스키는 길버트 부부가 함께 출
현했던 영화에서 사용한 소품입니다. 하지만 그 행사를 열려면 먼저 회장님의 결재가
필요합니다."
"영화배우 길버트 씨라... 그래, 그렇군. 내가 그 서류에 결재를 하지 않았지."
레베카는 서류철을 다시 메드닉 앞으로 내밀었다. 메드닉은 그 서류철을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이나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서류에는 영화배우 길버트 부부의
행사에 관한 건이라고 적혀 있었다.
메드닉은 갑자기 영화배우라는 말에 신경이 쓰였다. 배우라는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
가 날 정도로 싫어했던 메드닉이었다. 그는 갑자기 니콜과 앤드류에 대한 생각이 떠오
르기 시작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메드닉은 과거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려는 것을 억누르
려고 애를 썼다. 어쩔 수 없는 과거, 그것은 그에게 고통 그 자체였던 것이다. 메드닉
은 고래를 흔들면서 애써 자신의 정신적인 고통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음, 괜찮아."
메드닉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프레디를 떠올렸다. 프레디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고
있는 호텔의 지배인이었다. 사실 관행에 따른다면 프레디가 아미보셤 호텔의 업무를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메드닉은 프레디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
다.
"아미보셤 호텔에 관한 일이라면 프레디에게 맡기면 되잖아, 레베카. 내가 왜 굳이
그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을 써야하는 거지?"
레베카는 마치 메드닉의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 미리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또박또박 대답하기 시작했다.
"이번 행사는 각계 각층의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회장님의 결
재가 필요한 이유는 먼저 수많은 인사들의 신변 보장과 경호를 위해서 충분한 예산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길버트 부부가 기증할 스키의 가격이
몇 십만달러를 호가하는 골동품이기 때문에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보안장치와 도난시
의 배상을 위한 귀중품 보험을 따로 들어야 합니다. 그것도 회장님의 이름으로 직접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는 행사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이미 예약되어
있는 손님들 이외에는 일반 투숙객을 거의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은 프레디
보다는 회장님의 결재가 필요합니다."
레베카의 말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레베카의 말을 듣고 나서 메드닉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바하마와 스키라... 별로 어울리지 않는군."
메드닉은 다시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베카는 아무런 표정이 없는 얼
굴로 눈을 감고 있는 메드닉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베카의 그러한 표정에
서도 무엇인가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과거
가 두 사람 사이에 놓여 있는 침묵의 골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메드닉의 얼굴에는 길버트 부부의 스키 기증식 행사에 대해서 무엇인가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듯한 표정이 담겨 있었다.
얼마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메드닉은 드디어 눈을 뜨고 레베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하필이면 바하마지? 그리고 우리 호텔을 선택한 이유는 뭐지, 레베카? 이곳은 헐
리우드와 별로 상관이 없는데 말이야.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야?"
열대의 바하마와 스키가 어울리지 않듯이 아미보셤의 메드닉 해리슨과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과거에 메드닉이 헐리우드의 영화배우를 만
났던 것은 파국의 시작이었다. 메드닉은 그 아픈 기억을 결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길버트 부부는 처음 결혼했을 때 신혼 여행을 이곳 바하마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 50주년을 맞는 기념여행으로 다시 한 번 바하마에 올 생각을 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그 기념일에 맞추어서 스키 기증식을 이곳에서 열려고 하는 겁니다, 회장
님."
레베카는 말을 마치고 나서 메드닉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메드닉은 그저 눈
을 감고 있었다. 메드닉은 여전히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메드닉의 생각
이 길어지자 레베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길버트 부부의 초대인 명단에는 리차드 상원의원도 들어 있습니다. 리차드 상원의
원은 회장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얼마 전에 리차드 상원의원이 연락을 했는데 이
번 파티에 참석하면서 회장님을 한 번 만나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요하게 의
논할 일도 있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메드닉은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눈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행사는 언제 있을 예정이지?"
"일 주일 후에 있을 겁니다."
메드닉은 안경을 끼고 볼펜을 집어들었다.
"좋아, 지금부터 일반 투숙객의 신상을 모두 파악해 두도록 해. 신원이 불명확한 손
님의 예약은 받지 말도록 하고... 그리고 경호실에 지시해서 모든 보안에 만반의 준비를
기하도록 해. 성대한 파티도 물론 계획되어 있겠지?"
"네, 회장님."
"그래, 레베카가 나서서 아주 특별한 파티를 기획해 보는 거야. 모든 사람들의 기억
에 남도록 깜짝 놀랄 만한 파티를 여는 거지. 특별히 생각하고 있는 거라도 있나, 레
베카?"
미소를 곁들인 메드닉의 질문에 레베카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웃으면서 대
답했다.
"바하마에 킹콩이 등장하는 건 어떨까요, 회장님?"
"아주 훌륭해."
메드닉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레베카에게 서명한 서류를 넘겨 주었다.
"편히 쉬십시오, 회장님."
"수고하게."
레베카는 서류철을 들고 방을 나섰다. 레베카가 방을 나간 다음 혼자 남은 메드닉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오래 전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메드닉은 거의 대부분의 사간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지냈다.
발코니에는 메드닉이 쉬기 편한 안락의자가 놓여 있었다. 메드닉은 안락의자에 몸을
맞기고 몇 시간이고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자신의 의자에 맞추어 숨을 쉬었
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바다를 바라보던 메드닉 해리슨은 갑자기 음악이 듣고 싶어졌다. 의자 옆에 놓여 있
는 탁자 위에는 소형 카세트 라디오가 놓여 있었다. 카세트 라디오는 메드닉의 유일한
친구였다. 카세트 라디오의 전원 버튼을 누른 메드닉은 안락의자에 앉은 채 소형 카세
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빠져들었다.
작은 스피커를 통해 삼박자 풍의 왈츠 곡이 흘러나왔다. 메드닉은 왈츠의 리듬에 맞
추어 안락의자를 흔들었다. 자신의 머리까지 맑게 하는 화음이 줄곧 흘러나왔다. 여
러 개의 현악기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은 마치 메드닉의 온몸 구석구석을 치유하는 치료
제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메드닉은 건강 상태가 양호했을 때에도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편이었다. 특히 젊었
을 때에는 재즈의 감미로운 리듬에 깊이 빠져들었다. 클라리넷이나 플롯 같은 관악기
들이 토해내는 재즈의 선율을 들으면 젊은 메드닉은 언제나 열광했다.
어느 정도 숨이 들어가면 메드닉은 꼭 트럼펫 연주를 들었다. 메드닉이 특히 좋아했
던 것은 루이 암스트롱의 음악이었다. 재즈가 메드닉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어떻게 보면 그의 젊은 시절과 재즈의 스케일이 비슷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재즈를 무척 좋아했던 메드닉은 특히 빌리 할러데이의 재즈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그가 빌리 할러데이에게 매료된 것은 그녀가 재즈 특유의 리드미컬한 필링에 감미로운
적막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었다. 비록 사업에서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성공
을 거두었지만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온 메드닉은 빌리 할러데이의 인생과 재즈 음악에
담긴 허무감이나 좌절감에 공감을 느꼈고 그것들이 삶의 차원에서 오히려 그윽한 향수
로 승화되고 있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메드닉은 왈츠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재즈의 선율을 피하고
왈츠를 감상하는 것으로 음악적 취향이 변한 것은 건강 상태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
하면서 비롯되었다.
재즈는 매우 정열적인 코드와 스케일을 사용하기 때문에 호흡을 맞추면서 음악을 감
상하려면 끊임없이 연주에 맞추어 감정이 고조되는 흥분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했다.
고음으로 올라갔다가 갑자기 처음으로 이어지는 블루노트의 스케일과 끊임없이 반복되
는 싱코페에션 주법 때문에 재즈를 듣는 사람들은 한 순간도 잔잔한 감정으로 감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메드닉은 건강 상태가 나빠진 이후로는 듣기 편하고 리듬이 한결
안정된 왈츠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비록 재즈에서 왈츠로 취향을 바꾸기는 했지만 메
드닉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매우 높았다.
메드닉이 카세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왈츠에 열중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청년이
아침 식사를 들고 발코니로 들어섰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젊은이는 탁자 위에 식사
를 내려 놓기 시작했다.
청년이 아침 식사를 차려 놓자 메드닉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면서 그에게 호의를 나
타낸 후에 손짓으로 물러가도록 했다. 하지만 그 청년은 약간 뒤로 물러났을 뿐 돌아
가지 않고 발코니로 막 들어서는 또 다른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런 기척이나 노크도 없이 발코니로 들어선 사람은 메드닉의 주치의 앤소니 박사
였다. 앤소니 박사는 발코니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메드닉을 향해 다가섰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밤새 잘 주무셨나요?"
"앤소니, 벌써 10시가 넘었나?"
"아닙니다. 오늘은 제가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들어왔을 뿐입니다. 회장님."
"오, 앤소니. 난 아침부터 좋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메드닉은 앤소니를 무시하고 탁자 위로 손을 내밀어서 수프가 담긴 그릇을 열었다.
그리고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제가 방해가 되었다면 정말로 죄송합니다. 하지만 회장님께서 아침 식사를 어떻게
드시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내가 아침 식사를 계속 남긴다고 그러는 모양인데, 이것을 좀 보게. 이렇게 잘 먹
고 있지 않나."
"네, 정말 잘 드시는군요."
앤소니는 메드닉의 안락의자 옆에서 선 채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너무나 전
망이 좋은 장소였다. 나도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날 정도였다. 앤
소니는 갑자기 야릇한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얼마 남지 않았어. 나에게도 이런 곳에서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올 거
야.'
앤소니는 해변에 펼쳐진 모래사장을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메드닉이 식사를 거의 마쳤을 때, 앤소니는 시선을 돌려서 메드닉을 바라보았다. 앤
소니는 늙어 버린 메드닉의 모습을 바라보자 갑자기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불쌍한 노인.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명줄을 붙잡고 살아가려고 애
쓰고 있다니...'
앤소니는 자신의 감정을 숨긴 채 물끄러미 메드닉을 응시했다. 아칸소 주립병원에서
근무하던 젊고 유능한 앤소니를 주치의로 추천한 사람은 바로 레베카였다. 레베카가
메드닉의 비서로 일하기 시작한 지 꼭 2년째 되던 어느 여름이었다.
앤소니는 레베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매력에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앤소니는 레베카의 미모와 지성에 매료되었고 그녀 특유의 능력에 반해
있었다.
메드닉의 주치의를 맡기 전부터 앤소니는 완전히 레베카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앤
소니는 이미 레베카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와 앤소니는 몇 년 전에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리던 날 처음 만났다. 그리고 며칠 후에 앤소니는 레베카의 집으
로 초대를 받았다.
앤소니가 집에 도착했을 때 레베카는 마침 샤워를 마친후였다. 방금 샤워를 마친 젊
은 여성의 촉촉하게 젖은 육체에서는 싱그러운 향기가 감돌았다. 지한 향기가 코를 자
극하자 앤소니는 거의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물에 젖은 레베카의 기다란 황금빛 머리
카락도 앤소니에게는 매우 환상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잘 오셨어요, 앤소니 박사님."
레베카는 젖은 머리카락을 말리지도 않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레베카는 샤워를 마
친 후의 알몸을 커다란 타올로 감싸고 있었다. 앤소니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지만 레베카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앤소니는 다알리아 꽃다발을 레베카에게 전해 주었다. 레베카의 향기는 다알리아 꽃
향기와 어우러지면서 앤소니를 완전히 취하게 만들어 버렸다.
레베카는 곧장 주방으로 들어가서 미리 준비해 놓았던 포도주를 들고 돌아왔다. 앤
소니는 포도주를 들고 걸어오는 레베카의 풍만한 몸매를 보면서 마른 침을 꿀꺽 삼켰
다.
"자, 앤소니. 우리의 사업과 미래를 위하여..."
앤소니는 레베카가 따라 준 포도주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러자 곧 짙게 깔린 재
즈의 선율이 거실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재즈는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가
로놓여 있었던 어색함을 모두 앗아가 버렸다.
레베카는 뜨거운 숨길을 내뿜으면서 앤소니의 목에 한 쪽 팔을 감았다. 앤소니도 레
베카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두 사람은 이제 하나의 몸이 되기 위한 준비에 들어서고
있었다. 재즈의 음색이 조금씩 장중한 저음에서 고음으로 올라가자, 두 사람이 느끼는
흥분도 점점 더 고조되고 있었다.
"제가 왜 박사님을 초대했는지 아세요?"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탐닉하고 있을 때, 레베카가 앤소니의 귓볼에 대고 작은 목소
리로 속삭였다.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매우 중요한 일이겠지요."
"저는 매우 중대한 사업을 계획하고 있어요."
"그게 뭐죠?"
앤소니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레베카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점점 더 가
까이 앤소니의 귓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레베카는 앤소니의 귓볼을 가볍게 깨물면서
입맞춤을 한 뒤에 대답했다.
"박사님의 경력이 제 마음에 꼭 들었어요."
"무슨 말이죠?"
레베카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앤소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대었다. 앤소니는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언제든지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제가 모두 해 드리겠어요."
레베카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신선한 풀과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레베카의
향기가 앤소니를 더욱 자극했다. 레베카는 더욱 적극적으로 앤소니를 애무했다.
앤소니의 손이 레베카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는 활처럼 휘어졌
다. 레베카는 앤소니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해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레베카의
몸을 감싸고 있던 타올이 벗겨지면서 풍만한 육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앤소니는 자
기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천사라고 생각했다.
셔츠를 벗는 동안 앤소니는 자기 앞에 드러난 아름다운 레베카의 육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앤소니의 상체가 드러나자 레베카는 자신의 가슴을 그이 상체에 밀착시켰다.
'제 침실을 구경하고 싶지 않으세요?'
레베카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앤소니는 레베카를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
고 가볍게 키스를 주고받으면서 레베카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앤소니의 몸이 안긴 레베카가 방문을 열자 화려한 색깔의 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왔
다. 레베카의 침실에는 수많은 색깔의 촛불들이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카의 침대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앤소니는 파란색 시트가 깔린 침대 위
에 레베카를 내려 놓았다. 그러자 레베카는 앤소니의 허리띠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레베카의 입술이 목덜미에서부터 가슴을 타고 아랫부분까지 내려오는 동안 앤소니는
마치 시간이 영원히 정지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성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던 레베카는 앤소니를 침대 위에 눕혔다. 레베카의 입술이
앤소니의 몸 위를 움직이면서 재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변주곡을 연주하듯이 이곳
저곳을 움직이고 있던 레베카의 입술이 앤소니로 하여금 순간순간 흥분을 감추지 못하
는 탄성을 질러대도록 만들었다.
레베카는 그 약한 음악들이 더욱 고조될 수 있도록 점점 더 깊이 구석구석을 애무했
다. 앤소니는 포로가 되어 버린 아테네의 전사처럼 레베카의 입술에 자신의 몸을 완전
히 내 맡기고 있었다.
레베카의 입술이 자신의 온몸을 부드럽게 애무하고 있는 동안 앤소니는 점점 더 깊
게 비음을 토해냈다. 앤소니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상태에 이르자 레베카는 애무
를 멈추고 앤소니의 상체를 약간 일으켰다. 앤소니는 레베카의 아름다운 육체를 마음
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앤소니는 레베카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육체를 애무
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입김이 부드럽게 가슴을 자극하자 이미 한껏 흥분해 있던 레베카가 탄성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앤소니의 입술은 목덜미에서 풍만한 유방을 향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레베카의 유두가 곧게 일어서면서 앤소니의 입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앤소
니가 입술로 유두를 애무하자 레베카의 허리가 점점 더 활처럼 휘면서 독특한 비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앤소니,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요."
레베카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앤소니의 머리를 두 손으로 힘껏 끌어 당겼다. 두
사람은 깊은 키스를 나누면서 한몸이 되었다. 앤소니의 허리가 레베카를 향해 깊고 부
드럽게 다가가자 레베카는 그의 허리를 더욱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앤소니의 허리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육체는 온통 뜨거운
열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앤소니는 사정을 늦추기 위해 허리의 움직임을 적절히 조절
하면서 체위를 바꾸었다. 레베카의 눈빛은 거의 환상적이 경험을 하듯이 부드럽게 움
직이는 앤소니의 허리 움직임에 맞추어 초점이 흔들리고 있었다.
절정에 달할 무렵 앤소니의 하체 위로 말을 타듯이 올라가 레베카는 능숙한 히프의
움직임으로 깊게 밀려 올라오는 앤소니의 남성을 좌우로 흔들면서 자극했다. 앤소니의
남성위에서 더욱 격정적인 비음을 토해내던 레베카의 육체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길고 빛나는 금발의 머리카락이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두 사람은 거의 똑같이 절정에 도달했다. 절정의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레베카
는 앤소니의 몸 위로 늘어졌다.
레베카는 앤소니의 가슴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 뜨거운 키스를 보냈다.
두 사람은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관계를 마친 두 사람은 함께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했다. 마치 단 한번의 사람으로 깊은 연인 관계가 된 듯한 느낌을 가지
고 서로의 몸을 닦아 주었다. 앤소니는 그 당시의 추억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나누었던 레베카와의 대화도 역시 잊지 못했다.
그날 이후로 앤소니는 레베카에게 더욱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베카는
어쩐 일인지 점점 앤소니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앤소니
는 더욱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앤소니의 간절함이 절정에 달할 무렵에야 레
베카는 마치 어린 아이를 달래듯이 그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 주었다. 물론 뜨거운 정
사와 함께...
앤소니는 매일 밤마다 레베카와 함께 있기를 원했다. 앤소니는 서서히 레베카의 포
로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앤소니가 자신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사실을 확인한 후
에 레베카는 자신의 계획 속에 그를 포함시키기 시작했다.
앤소니는 레베카의 품에서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는 레베카의 음모 속으로 너무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앤소니는 이미 레베카의 분
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앤소니."
메드닉이 그릇을 내려 놓으면서 앤소니를 불렀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나?"
한참 동안이나 레베카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앤소니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메드닉
이 말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앤소니가 머리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내가 환자가 아니라 마치 자네가 환자인 것 같군."
"벌써 음식을 다 드셨군요.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으신 것 같습니다, 회장님."
앤소니는 미소를 지으며 가방 속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메드닉은 라디오를 끄고 나
서 입을 열었다.
"나야 언제나 기분이 좋지. 자네가 이렇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자네는 병원
의 늙은 간호사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 기분이 좋다가도 그 여자들이 와서 주사 한
번만 놓고 가면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거든."
메드닉은 앤소니의 청진기를 쳐다보면서 못마땅한 기분을 노골적으로 밝혔다.
"이런 건 보기도 싫으니까 당장 치워 버리는 게 좋겠어."
앤소니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회장님, 맥박을 측정하기 위해서 청진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
잖아요."
"맥박은 무엇 때문에? 어제도 재어 보았잖아. 도대체 나에게서 뭘 알아내려는 거
야?"
"그야 건강 상태죠. 그게 제가 하는 일이니까요."
앤소니가 다시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메드닉은 특유의 고집스러운 노인의
표정을 지으면서 앤소니를 쳐다보았다. "잘 들어, 앤소니.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
고 난 침실에서 여기까지 산책한 게 고작이야. 그게 전부라구. 그게 그렇게 스트레스
를 받을 만한 일인가? 맥박까지 재어야 하는 일이냐구?"
"그게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뭐야?"
메드닉의 목소리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약간 높아졌다. 앤소니는 메드닉을 바라보
면서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회장님께서는 지금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으십니다. 의사인 저
로서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하지만 메드닉은 고집을 꺾지 않고 앤소니를 노려보았다. 앤소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청진기를 가방 속에 집어넣고 나서 주사를 준비했다. 앤소니가 주사기
를 꺼내자 메드닉도 이 정도의 승리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조용히
소매를 걷어올렸다.
아무리 고집이 센 메드닉이었지만 건강의 문제에 관해서는 의사의 말을 듣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환자는 의사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천하의 메드닉에
게도 어절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주사지?"
"일종의 영양제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피를 맑게 해 주는 주사라고 할 수 있죠."
메드닉은 앤소니가 자신의 팔에 주사를 놓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주사기로부터
누런 액체가 반짝거리는 금속성 바늘을 타고 그이 혈관으로 흘러 들어갔다. 메드닉은
점차 약기운이 퍼지면서 갑자기 기분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메드닉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앤소니가 투여하는 주사약의 성분이 어떤 것인지
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주사를 맞고 나면 금방 기분이 나
른해 진다는 사실 그리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버린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그리
고 언제나 주사를 맞고 나면 한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가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깨어났
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면 신기하게도 마치 청춘을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활기가 생겼
다. 메드닉은 그런 활기를 느끼기 위해서 주사 맞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반복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바하마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가 거대한 구름 사이를 뚫고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
지만 비행기는 수줍은 듯이 이내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 위에서 생기는 기
류의 변화 때문에 가끔씩 비행기의 기체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기내의 승무
원들은 승객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기내 방송을 했고 승객들은 갑자기 놀란 표정에서
이내 곧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바하마로 향하는 보잉 747기에는 수백 명의 승객들이 저마다 휴가를 보내기 위해 가
족이나 연인들과 함께 탑승해 있었다. 로라 해리슨은 비행기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바라본 광경은 온통 하얀 구름층뿐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긴장감과
착륙할 때의 경이로운 광경을 제외한다면 비행기 여행의 오랜 고단함은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똑같은 광경이 계속되자 로라는 지루함을 느꼈는지 창밖을 바라보는 것을
그만두고 주변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승객들의 표정은 매우 밝아 보
였다. 가족 단위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간혹 바하마의 원주민으로 보이는 황갈색 피부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객들은 바하마의 해변으로 휴가를 떠나는 관광객들이었다. 그 사
람들은 모두가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관광객들은 서로 즐거운 듯
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다정하게 속삭이는 연인들과
여행이 피곤한지 잠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내의 통로에는 젊은 여승무원들이 쉴새 없이 오가면서 승객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
다. 로라는 그런 모습들이 너무도 정다운 것처럼 보였다. 날마다 학점과 경쟁에 시달
리던 생활에서 정말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어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더니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울어대었다. 아이의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가 달래 보기도 하고 안고 일어나 기내를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그 아이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런데 여승무원이 장난감을 갖다 주자 어린아이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이 울음을 그
쳤다. 그 아이의 부모는 매우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고 승무원은 괜찮다고 하
면서 더 필요한 장난감이 있으면 부탁하라고 대답했다.
매사에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로라는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발견했다. 비행기의 승객들 대부분은 휴가 때문인지 두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이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라의 바로 옆좌석에 앉아 있는 검은 머리
카락의 건장한 남자는 로라처럼 혼자서 여행하는 것 같았다.
그는 휴가를 즐기는 관광객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한시간 동안이나 계속 <뉴욕 타
임즈>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때마침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던 로라는 그 남자를 자세
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곱슬머리에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1미터 80정도의 키를 한 강인한 근육질
의 잘 생긴 남자였다. 그 남자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정장을 하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매고 있었다. 윤이 반질거리는 갈색 구두는 잘 손질되어 있었다.
로라 해리슨은 고개를 창문으로 돌리면서도 그 남자가 눈치를 채지 않도록 조심하면
서 계속 관찰했다. 그러면서 이 남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했
다.
'아마도 이 사람은 어떤 사업을 하고 있을 거야. 사업차 바하마에 가는 게 틀림없
어.'
로라는 먼저 그 남자가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업가가 아니라 회사의
업무 때문에 출장을 가는 샐러리맨이라면 바하마로 날아가면서 휴양객이 된 기분을 느
끼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마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소매를 걷어올린 채 구
두를 아무렇게나 벗어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옆자리에 앉아 있는 남자처럼 정장을 깨끗하게 차려 입은 모습에 넥타이를
목까지 올려맨 모습은 평소에 그런 옷차림을 하면서 적응이 되지 않았으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사람은 일단 사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렇지 않다면 굳이 옷을 그렇게 차려 입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정장을 차려 입은 것은 바하마의 날씨를 고려할 때 매우 답답해 보일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 사람은 기내에서 누군가를 상사로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
기 때문에 직장 상사에 대한 예의로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있어야 하는 처지인지
도 모른다.
로라가 그 남자의 직업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상상하고 있는 동안, 그 남자는 열심히
읽던 <뉴욕 타임즈>를 덮었다. 그리고 상의를 벗어 좌석의 옷걸이에 걸어 놓고는 자
리에서 일어나더니 통로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로라는 고개를 돌려서 잠시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은 옆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리 더 멋있어 보였다. 그가 통로를 따라 걸어가자 승무원이 와서 뭐
라고 말을 걸었다. 그 남자는 뭔가를 묻는 듯했고 그러자 승무원은 친절하게 웃으면서
통로의 끝 쪽을 가리켰다. 그 남자는 정중하게 승무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통로
끝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후에 그 남자가 통로 끝으로 사라지자 로라는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났다. 그녀
는 옆에 걸어 놓은 그의 양복 윗도리에 대한 호기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 로라는 조심
스럽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다른 승객들은 저마다의 일에 바쁜 듯이 로라의 행동에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로라는 슬며시 좌석에 걸려 있는 양복 상의에 손을 가져갔다. 로라의 손이 상의를
슬쩍 젖혔을 때 양복의 안주머니 위에는 그 남자의 이름으로 보이는 글자가 새겨져 있
었다.
"다니엘 블레이크."
로라는 낮은 목소리로 다니엘 블레이크라고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어디에서 많이 들
어 본 듯한 이름이었다. 다니엘 블레이크. 어쩐지 결코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이름이
었다.
로라는 왜 그 이름이 그렇게 낯설지 않은가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이유
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로라는 계속 그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지만 점점 더 알 수
없는 기억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로라의 눈에 조금 전 그 남자가 보고 있던 <뉴욕 타임즈>가 보였다. 로라
는 그 잡지를 집어들고 아까 그 남자가 보았던 경제면의 기사를 펼쳤다. 그곳에는 '다
니엘이 이끄는 블레이크 그룹'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와 있었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로라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바로 자신의 옆자리에 안장 있던
사람이 바로 유능하기로 소문난 재계의 거물 다니엘 블레이크였던 것이다.
비로소 로라의 머리 속에서 맴돌던 기억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 기억 속에
서 다니엘 블레이크는 경제계에서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일 뿐만 아니라 거의 신화
적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로라는 다
니엘의 성공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사람을 바로 옆자리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놀라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슷한 사람일 수도 있었다. 로라는 자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그 남자의 얼
굴을 정면에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옆모습만 본 것을 가지고 그가 재계의 거물 다니
엘 블레이크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이른 판단인지도 몰랐다.
호기심이 많은 로라는 어쨌든 그 사람의 진정한 정체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 사
람이 올 때까지 약간 긴장된 상태로 재미있는 생각을 하면서...
바하마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로라는 곧바로 아미보셤 호텔
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을 둘려보고 갈 것인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로라는 일단 바하마에 도착하면 호텔로 향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추억이 깃들
어 있던 곳을 먼저 방문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세운 다음에 할아버지가 계신 호텔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앞으로 계속 바하마에 머물면서 할아버지의 사업을 배우며 지낼 생각을 하니 로라의
가슴은 점점 더 벅차 오르면서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유일한 혈육 메드닉 할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간다는 것과 드디어 자신이 호텔 사업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
다는 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경이롭기만 했다.
로라는 가방에서 꺼낸 작은 손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벌써 이렇
게 나이를 먹은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항상 로라에게 이런 말을 했었
다.
"네 안에는 항상 너를 지켜 주는 그 무엇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너 자신이지. 스
스로를 긍정하면서 낙관적인 자세로 모든 일을 처리하거라. 그게 바로 너의 모습이
다."
로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지금까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도 그녀는 줄곧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품고 지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말대로 항
상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낙관적이고 낙천적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로라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동안 드디어 옆자리에 앉았던 남자가 다시 돌아왔다.
그 순간에도 생각에 빠져 있던 로라는 그 남자가 돌아온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라는 계속 창쪽을 바라보면서 앞으로의 바하마 생활에 대해 희망적인 생각
들을 품고 있었다.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뉴욕타
임즈>를 펼쳐 들었다. 로라는 인기척을 느끼면서 그 남자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로라는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얼굴을 정면에
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이다. 로라는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중국제 옥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실수로 흘린 것처럼 그 옥구슬을 옆자리에 앉아있는 남자의 발
밑으로 떨어뜨렸다.
다니엘은 자신의 구두에 부딪힌 다음 통로 쪽으로 굴러가는 옥구슬을 재빠른 동작으
로 잡았다. 대단히 순발력이 빠른 행동이었다.
"이 옥구슬은 용의 여의주로군요."
그 남자의 안목은 정확했다. 그 구슬에 대해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 용의 여의주를 손에 들고 로라를 바라보았다. 그이 얼굴이 정면으로 들어왔다.
로라는 그 남자를 향해 약간은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로라를 바라보면서 옥구슬을 전해 주던 다니엘은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면
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에 다니엘과 로라는 약간 수줍은 듯한 기색으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다
니엘은 다시 잡지를 펼쳐 들었고 로라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서 구름을 바라보았다.
로라는 블레이크 그룹의 총수 다니엘과 이 남자의 얼굴이 닮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가 정말로 블레이크 그룹의 총수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 로라 해리슨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옆자리의 나자가 누구이든 간
에 생각했던 것보다 미남이었으며 예절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로라는 그 남자의
민첩한 행동과 부드러운 미소에서 풍겨나오는 여유가 마음에 들었다.
바하마와 관계된 자신의 사업에 대해 구상하면서 줄곧 잡지를 읽고 있었던 다니엘은
로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아주 좋은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그녀가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쩐지 지적인 향기가 풍기고 있
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옆자리의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자신에 대해 매우 놀랐다. 다
니엘은 사실 지금까지 여자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이 독신주의자인 것은 아니었다. 금욕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
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매력에 이끌려 청혼을 해 오기도 했지만 결혼에 대해 한 번
이라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던 것
이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옆자리에 앉은 여자의 모습이 다니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니엘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무슨 재미있는 기사라도 있나요?"
로라가 먼저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다니엘은 기다렸다는 듯이 <뉴욕 타임즈>를
덮으면서 로라를 바라보았다.
"지난 16년 동안 스물세 명의 사람을 살해한 사람이 있군요."
다니엘의 말에 로라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굉장한 살인마로군요.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꼭 그렇게 살인마라고까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살인의 충동과 파
괴의 속성을 지니고 살아가니까요."
다니엘은 살인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그 대답이 너무나 태연했기
때문에 로라는 다니엘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건 무슨 말이죠?"
"그 사람은 이 사회에서 대학 교육을 마친 인텔리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런 의미에서 그 사람이 범행을 저지른 수법도 또한 매우 지능적이었지요."
"대학가지 졸업한 지능적인 살인자라고 해서 살인마가 아니라는 건가요?"
로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경우에는 살인마라고 부르기보다는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올바를 것 같
군요. 그는 지금 시골에 은거하면서 자신의 사상에 대해 집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리고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얼마 전에 그 사람이 <뉴욕 타임즈>에 보낸 편지가 여기 실려 있습니다. 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살해한 사람들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반드시 죽어야
만 하는 이유를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밝힌 살인 행위에 대한 이유들
이 매우 논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매우 논리적으로 자신의 살인 행
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논리를 쉽게 깨뜨리지
는 못하고 있지요."
다니엘은 로라의 눈을 로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로라는 다니
엘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로라의 머리 속으로 이 삶은 확실히 다른 사람
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다니엘은 로라의 눈을 정면에서 똑 바로 응시하면서 매우 설득력 있게 그 살인자의
논리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살인은 살인이고 죄는 죄이며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행위는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은 너무 머
리가 똑똑해서 미쳐 버린 것 같군요. 그 사람은 자신을 변호하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회피하려 하고 있어요."
"글쎄요, 미친 사람은 그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무슨 뜻이죠?"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미친 사람이고 그
사람 혼자만이 정상인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럴 경우에 그를 단죄하는 것은
다수의 미친 사람들이 만들어낸 악법이 되겠지요."
"그건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이군요."
"우리가 이 사회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각 개인들의 존재 가치는 과연 어디로부
터 오는 것일까요? 또 우리는 이 사회에서 악이라고 말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들은 왜 악이고 우리는 왜 선이 되는 걸까요? 한 번 생각
해 보세요. 독립기념일에 수소폭탄을 개발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발표하는 국가에 대
해 박수를 치는 사람들이 정상인으로 대우를 받는 시대가 지금이 아닌가요? 수많은 인
명을 앗아가게 될지도 모르는 폭탄의 제조를 저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을 죽여야 한다
면 거기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다니엘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로라는 일단 말문이 막혔다. 무엇인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마땅히 할 만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로라는 결국 화제
를 돌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가 보죠?"
"아닙니다. 물론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그것이 직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사업을 하고 있나요?"
로라는 일부러 모른 체하면서 물어 보았다.
"뉴욕에 본사를 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참, 인사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로라는 드디어 상대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로라는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 로라 해리슨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런데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그다지 낯
설지 않군요. 혹시 <월 스트리트 저널>의 유명인사 동정란에 자주 등장하는 그 다니
엘 씨가 아닌가요?"
"제가 유명인사라는 사실은 미처 몰랐습니다."
다니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로라의 표정에는 이 사람이 다
니엘 블레이크 총수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엿보였다.
"사실이군요. 만나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다니엘씨."
정말로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사실을 확인한 로라는 이번에는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다니엘은 그녀의 손등에 가벼운 키스를 보냈다.
"당신에 대한 평가는 정말로 굉장해요. 언제인가 기회가 닿으면 당신의 경영방식을
꼭 들어보고 싶어요."
"당신처럼 아름다운 미인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어쩔줄을 모르겠군요. 기회가 닿
는다면 꼭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당신은 어디로 가세요?"
"바하마의 롱 비치 해변으로 갑니다."
"어머, 잘 되었군요. 저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거든요. 그런데 바하마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죠?"
"사업상 일이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곳에는 과거에 저에게 무척 잘 대해 주던 친
구분이 호텔을 운영하고 계시죠. 그분을 만난 지도 무척 오래 되어서 찾아가는 겁니
다."
"어떤 분이시죠?"
"그분의 이름은 메드닉 해리슨이라고 합니다."
다니엘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로라는 다니엘의 입에서 메드닉 해리슨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마음 속으로 깜짝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외면으로 드러
내지 않았다.
"그렇군요. 저도 그분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메드닉 해리슨 씨는 세
계 도처에 유명한 호텔을 많이 소유하고 계시죠. 전 바하마에 있는 그분의 호텔에서
며칠동안 머무를 계획이에요."
"당신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바하마를 방문하는 거군요."
로라 해리슨은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마침 잘 되었군요. 호텔에 도착하면 제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군요. 어떠신지
요?"
"정말 영광이겠어요."
"아닙니다. 저도 이렇게 훌륭한 미인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요."
로라는 그 말을 듣고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로
라는 창밖을 내다 보면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다시 다니엘을 향해 고개
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부스가 가장 먼저 첫발을 내딛은 곳이 바로 이곳 바하마였다
는 사실을 혹시 알고 계세요?"
로라의 질문에 다니엘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 당시에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이 아마 나이키였다지요?"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라는 다니엘의 재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로라는 갑자기 그의 유머에 한 가지 말을 덧붙이고 싶었다.
"그가 나이키를 신고 최고급 호텔에서 며칠 밤을 묵었다지요?"
두 사람은 또다시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아미보셤과 같은 사람에게 물어 봐야 할 겁니다."
다니엘의 재치가 로라의 관심을 더욱 자극했다.
"그 사람이 바하마에서 호텔업이라도 했었나 보죠?"
"맞아요, 로라. 그 사람이 바로 바하마에 처음으로 호텔을 지은 사람이에요."
다니엘은 역사적인 사실을 밝히기라도 하듯이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라구요? 아미보셤이 말인가요?"
"그렇다니까요."
"다니엘 씨,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은 책에 등장하는 해적인
걸요?"
로라의 말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래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하마에 처음으로 호텔을 지은 사람이에
요. 바로 그 해적이 말입니다."
"어머나, 세상에!"
로라는 매우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니엘은 아미보셤 호텔의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로라, 그런 상식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배워야 할 겁니다. 어
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다니엘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로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다니엘 씨. 그리고 그 아미보셤이 지은 호텔보다 더 훌륭한
호텔은 이 세상의 어떤 사람도 지을 수 없을 거에요."
"혹시 그 호텔이 지어진 이유를 알고 있나요? 아미보셤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그 호텔을 지었어요. 그건 아주 낭만적인 이야기입니다. 아미보셤은 세계
를 통틀어서 나 다음으로 멋을 아는 남자일 겁니다."
다니엘이 가슴을 펴면서 말했다.
"그래요. 제 생각에도 아미보셤은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 다음으로 아름다웠던 그녀를 말이에요."
로라 해리슨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라의 재치있는 언변에 다니엘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다니엘은 그런 식으
로 한층 높은 유머를 구사하는 로라가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귀여운 소녀를
만나고 있는 것처럼, 로라를 바라보고 있으면 다정하고 따스한 감정이 저절로 솟아났
다.
무엇보다도 다니엘의 가슴을 뛰게 만든 것은 로라로부터 풍겨나오는 향기였다. 로라
에게는 세상에서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체취가 풍겼다.
잠시 동안의 대화 속에서 다니엘은 로라가 매우 지적이고 냉철하면서도 따스한 마음
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하마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화려한 외모에 내
적인 면모까지 갖추고 있는 여자를 만난 것은 어쩌면 커다란 행운이라는 생각이 다니
엘의 머리를 스치면서 지나갔다.
비행기는 잠시 후에 바하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바하마 인근
의 해변은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모래사장 위로 수
영복 차림의 사람들이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그 뒤로는 울창한 열대림이 우거져 있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