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인용 : 영화 <백만장자의 첫사랑>
* 내용 모티브 : 드라마 <쇼핑왕 루이>, 드라마 <환상의 커플>
* 내용상 언어 유희를 위하여 본 제목은 맞춤법 '억만장자'가 아닌 '엉망장자'로 기재함을 밝힙니다!
엉망장자의 첫사랑
9
김영훈
24.
결핍은 누구에게나 있다. 물성이 있는 재화로도 채울 수 없는 게 있다. 예외는 없다. 영훈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부(父)자리가 비어 있는 것 때문도, 형을 따라 여러 나라로 주거지를 옮겨가는 것 때문도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간단한 사유를 할 수 있을 때부터 영훈은 스스로 생각했다. 내 문제는 내 안에 있다. 이걸 아무도 해결해줄 수 없다. 잔인하지만 현실이었다. 좋은 말로 생각하면 기민했고 나쁜 말로는 예민했다. 사람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관찰하는게 지겨웠고 똑딱거리는 초침 소리가 남들보다 크게 들렸다. 예민함은 시각과 청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날세우게 했다.
"영훈이 저랑 같이 유학 갈게요."
"...그럴래?"
"한국에서는 영훈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밖에 나가면 좀 괜찮을수도 있어요. 제가 물어봤을 땐 괜찮다고 했어요."
형의 제안에 따라 외국을 나간 것도 별 생각 없었다. 영훈은 애써 담담히 두 형제를 보내는 엄마를 껴안았다. 영훈의 엄마는 아빠 없이 두 형제를 부유하게 키웠고 사업 수완이 좋았다.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 혼자 남겨질 자신의 엄마보다 자신을 더 걱정해야했다. 영훈을 아는 사람들이면 모두 그에 대해 입을 모아 말했다.
영훈이는 좀 뭔가... 잘 모르겠어 사람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훈도 자기 자신을 잘 모르겠다. 늘 날을 세우고 다녀서 마음을 터놓고 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아도 마스크를 쓰고 다녔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도수도 없는 안경을 썼다.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싶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우연히 본 다큐에서 이걸 우울증의 증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영훈은 수긍하지 않았다. 영훈의 기억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자신은 늘 이랬다. 그러면 타고난 기질이 이렇다는건가.
"병원 잘 다녀왔어?"
"응."
"그럼 푹 쉬어. 나 학교 때문에 늦어."
자신이 부정적인 쪽으로 기민하다면 형은 반대쪽이었다. 분위기를 잘 캐치하는 습관은 당연히 가족인 영훈에게도 닿았다. 형을 따라 처음에는 영어권 국가, 그 다음에 유럽권 국가에서 같이 학교를 다닐 때도 늘 살뜰히 영훈을 챙겼다. 영훈의 무기력을 걱정해서 늘 근처에 있는 심리상담소를 알아봐줬다. 가서 무슨 말이든 뱉고 오지만 사실상 그게 진짜 자기마음인지 스스로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잘 모르겠어요. 글쎄요. 심리상담가의 질문에 영훈의 대답은 늘 애매모호했고 답이 없었다. 어느것도 확정지을 수 없었다.
"영훈아. 이번에 지원한 NGO 붙었는데..."
"축하해 형."
"베트남이래. 괜찮아?"
"나야 뭐... 언제 짐싸면 돼?"
그냥 흐르면 흐르는대로. 밀면 미는대로. 살면 사는대로 살았다. 처음 형을 따라 유학을 왔을 때 인종차별을 당했을 때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무응답으로 대처하다보면 놀리는 자도 흥미를 잃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영훈은 십대 중후반을 기준으로 키가 쑥 컸으니 쉽사리 건드리기도 쉽지 않았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고,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다. 외톨이라고 부르기에도 애매하고 엉성했다. 영훈은 외로워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원래 혼자인 사람 같았다.
"이번에는 한국 같이 갈래?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하셔."
"응. 그래.'
제안에는 대부분 수락했다. 장기간 비행을 하면 유독 멀미와 두통이 심했다. 그걸 아는 건 형이 유일했다. 영훈은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형은 자신을 배려해서 분기마다 한국에 들어가는걸 혼자 갔고, 엄마에게는 에둘러 설명했다. "영훈이가 유학 생활이 바쁜가봐요. 반년에 한 번씩은 한국 들어오게 할게요.".
25.
베트남에서 생활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한국-베트남 국가 수교가 활발해지고 투자되는 사업의 규모도 덩치를 키워갔다. 처음에 형이 경력을 쌓기 위해 왔지만 지금은 마음이 바뀐듯했다. 두발 딛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애정도 생긴듯 했다. 가끔 일손이 필요해서 영훈이 업무지원을 나갈 때면 볼이 상기된채로 뛰어다니는 형을 봤다. 형광 조끼를 입고 현지 아이들을 대상으로 기본 의료교육을 하고, 아이들 예방접종 줄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열정적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도 자신의 삶에 열정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오히려 꺼져버린 재와 가까웠다.
자연스레 베트남 의료 NGO를 거쳐 유니세프나 유엔에 들어가길 희망했던 형의 목표가 바뀌었다. 이제 더이상 현지 과일값에 놀라지 않았다. 땡모반을 보리차처럼 마시고 오토바이 그랩을 한손으로도 부를 수 있을정도가 되었다. 장기로 빌린 집에서 영훈은 시체처럼 누워있었다. 이곳에는 마땅한 심리상담소가 없었다. 벌써 다낭의 마당발이 된 형이 못찾을정도면 없는거나 다름없었다. 대신 형은 영훈을 위해 매일같이 체험프로그램을 신청했다. 모닝글로리로 맛있는 거 만들기. 베트남에서 한식 만들기. 오토바이 체험하기. 아오자이 수놓기. 영훈은 이 모든 행동이 즐겁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또 싫지도 않았다. 그냥 무의 감정에 가까웠다.
"재밌었어?"
"...응. 보여줄까."
"이야. 잘했네. 밥은 먹었어? 엄마가 한국에서 택배로 뭐 보내셨대."
엄마가 유난스러운 스타일은 아니었다. 자기 사업에 바쁘기도 했고, 최근에 송전에 땅과 건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더 바빠졌다고 했다. 그래도 타지살이 하는 두 아들에게 잊지않고 한국음식을 보내왔다. 가끔 작은 쪽지도 덧붙여왔다. 영훈은 택배를 뜯고 냉장보관 해야할 것들은 냉장고에 넣었다. 옆에 끼워진 쪽지도 꺼내들었다. 하나는 제 형의 몫, 하나는 제것이었다. 형이 씻으러 들어갔다. 소파에 등을 기대 앉았다. 형꺼는 두께가 얇았는데 자신의 것은 유난히 두꺼웠다. 늘 간단한 안부와 근황만 전했는데 오늘은 그정도 길이가 아니었다. 영훈은 천천히 편지를 읽어나갔다. 흰 편지지에는 정갈한 글씨체로 꾹꾹 눌러쓴게 느껴졌다.
(……중략.) 엄마는 잠깐 친구보러 미국쪽 다녀왔어. 원래 업무상 들릴곳만 들리려고 했는데 친구가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업무만 보다가냐며 하도 성화여서 관광도 조금 하다왔어.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 내 나이 또래의 여성분이 남편이랑 한국어로 얘기를 주고 받더라. 그 모습이 참 예쁘고 좋았어. 일하느라 바빠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본적이 언제였나,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더라. 그리고 옆테이블이어서 대화가 잘 들렸는데 딸 얘기를 하는 거 같더라. 나도 너네가 생각나고 그랬어. 잘지내지 우리 아들들? 영훈아 그래도 가끔 보내오는 사진을 보면 한국에서보다는 좋아보여서 다행이야. 조금 시간이 지나서 얘기할 수 있지만, 이곳에 살면서 영훈이 네가 참 위태로워 보여서 걱정했어. 힘든 거 있으면 엄마한테든 형한테든 얘기해달라고 했는데 너는 없다고 했지. 그래서 참 걱정을 많이했어.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네. 우리 영훈이도 사랑에 빠지면 좋겠다. 엄마는 알아서 잘 연애할테니 우리 아들들이 걱정이지... 모든 권태와 우울과 무기력의 풀숲을 헤치고 빛나는 널 발견해줄, 혹은 발견할 수 있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 꼭 그럴 때가 올거야. 엄마도 아빠를 만났을 때 내 모든게 바뀌는 경험을 했거든. 베트남에서 산지 벌써 두 해가 지났구나. 네 형 말로는 곧 베트남 사업부가 바뀌면서 한국에 장기간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더라. 이번에 들어오면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쌓자. ^^ - 푹푹 찌는 한국 더위에서, 엄마가 |
영훈은 문장을 또 읽고 읽었다. 나조차차도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있을까. 모든 권태와 우울과 무기력을 이겨내게 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든 답에 자신없던 영훈은 이 질문만큼은 확실히 대답할 수 있었다. 없어.
26.
어느 때보다 길었던 베트남 생활이 끝났다. 이제는 익숙해진 신식 아파트를 쭉 둘러보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깨끗하게 썼다. 이미 가져갈만한 건 국제택배로 다 보냈는데도 28인치 캐리어가 두당 두개씩은 나왔다. 장기간 생활을 하면 아무리 줄이려고 해도 짐이 늘 수밖에 없다. 베트남 우기가 멈추면 성수기가 찾아왔다. 특히 겨울에는 베트남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출국자보다 입국자가 더 많았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하다보면 대충 아 저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었다. 성수기임을 증명하듯 다낭 공항 곳곳에는 한국어가 들렸다. 오랜만에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직항으로 다섯시간 가는 건데도 너무 오랜만에 비행기였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형."
"응? 아 기내 캐리어 줘."
"다음 근무지는 캄보디아랬나."
영훈은 앞이 아득했다. 직항 다섯시간도 버거운데 경유 두번을 거쳐 꼬박 하루를 날아가는 걸 버틸 수 있을까. 온갖 소음과 사람들의 숨결로 가득찬 공간을 견딜 수 있을까. 생각만해도 힘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순조롭게 한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체크인 단계에서 문제가 생겼다. 형의 사업 철수일이 명확하지 않아서 다급하게 비행기를 예약했던게 화근이었다.
"오버 부킹이 되어서요. 손님 괜찮으시면 다음 비행기로 한 분 옮겨드리고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 해드려도 괜찮으실까요? 두시간 차이입니다. 죄송합니다."
"어... 영훈아 어떻게 할래? 먼저 들어갈래?"
"형이 먼저 가있어. 한국주소 있으니까 내가 다음거 타고 갈게."
좌석 업그레이드면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형 캐리어에 맡겼던 중요 물품만 가방으로 옮겨담았다. 영훈은 형을 먼저 태워 보냈다. 어차피 두시간 간격이고 잠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 끝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베트남과 마지막은 아니었다. 사업 철수 과정에서 단계가 하나 더 늘어나서, 형이랑 반년이 지나기 전에 다시 들어오긴 해야했다. 영훈은 눈으로 다낭 공항을 훑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 엔진소리와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또 유독 크게 들렸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기민성이 폭발했다. 조금 둔감하고 모든 감각을 잊을수만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영훈은 헛된걸 바라지 않았다. 수면안대를 끼고 이어플러그를 꽂았다. 감각이 잦아들길 바라면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섯시간동안 비행은 괜찮았다. 오랜만에 타는거여서 긴장했는데 꽤 잘버텨낼 수 있었다. 거의 일년반에 딛는 한국땅이 어색했다. 다낭공항보다 사람이 훨씬 많았다. 아까 꽂아둔 이어플러그를 빼지않고 공항 출입구를 찾았다. 좌석 사이사이에 놓인 큰 스크린 TV에서는 온갖 드라마, 뉴스들이 나오고 있었다. [인천공항 사기단 조심]이라는 뉴스 헤드 문구를 읽으면서 세상이 더 각박하게 변했구나를 깨달았다. 두 개의 캐리어와를 끌고 겨우 바깥으로 나왔다. 워낙 사람이 많아서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사람이든 짐가방 카트든 어깨를 치일뻔한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영훈은 길게 늘어선 택시 중 아무거나 골라탔다.
"송전역이요."
"예!"
리무진 택시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아까보다는 확실히 고요해졌다. 영훈은 귀에 꽂힌 이어플러그를 빼서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택시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끊임없이 뉴스가 나왔다. [인천공항 택시 사기단의 덜미가 잡혔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범죄유형의 수법이……].
"기사님. 뉴스 좀 꺼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시끄러우세요? 요새 사기단이 워낙 난리라... 들어보셨어요?"
"뉴스로만요."
기사는 몸을 살짝 젖혀서 영훈쪽을 봤다. 아까부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영훈은 손을 뻗어서 창문을 살짝 내렸다. 아까부터 뒷좌석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차 안에 타고 있어야할 사람은 기사와 영훈 둘뿐이어야했다. 은근한 인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보통사람이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영훈의 예민함이 촉을 잡아냈다.
"한국에 오랜만에 오셨나봐요."
"...네. 근데 기사님."
뒷좌석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졌다. 잦아들지 않았다. 영훈은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저 말고 또 누가 탔는데,"
"씨발."
영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는 차를 갓길에 세웠다. 고속도로도 벗어났겠다 한적한 도로와 공터에 멈춰섰다. 거친 욕설과 함꼐 뒷좌석에서 한명이 영훈의 입을 막았다. 힘으로 밀쳐내자 기사까지 합세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이런 일을 당하다니. 아무리 영훈이어도 장정 두명이 몽둥이를 들고 덤비면 별 수 없었다. 차 밖으로 질질 끌려나갔다. 이미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터라 귀에 이명이 들렸다. 어벙벙하게 흙바닥으로 던져졌다. 두터운 밧줄끈으로 영훈의 몸을 묶었다. 해외에서 살면서 이런 일을 아예 겪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린 동양인 남성으로써 온갖 모욕적인 언사를 다 버텨냈다. 영훈은 눈을 꾹 감았다. 짐만 털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이새끼 뭐 없네. 몸 털어."
한두명이 아니었다. 리무진 택시 뒤로 세명이 더 합세했다. 영훈의 캐리어와 짐가방이 다 털렸다. 생활 용품과 간단한 현금밖에 없었다. 어차피 카드를 쓰면 덜미가 잡히니 그들이 원하는 건 없었다. 값나가는 물건이라곤 영훈이 입고 있는 옷과 가방 뿐이었다. 강도단은 영훈의 재킷을 벗겨서 뺏고 가방 안에 있는 소지품을 탁탁 털었다. 바닥으로 떨어져서 깨지는 물품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챙길만한 것을 다 챙겼다 싶었는지 구타가 시작됐다. 영훈은 해탈했다. 어차피 길게 살고 싶은 욕심도 없었다. 강도단 중에 둔탁하 무기를 든 사람이 영훈의 머리를 가격했다. 뜨끈한 피가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머리가 띵해졌다. 아까부터 들려오던 이명이 박차를 가했다. 눈이 점점 감겼다. 흐려지는 건 시야뿐만이 아니었다. 머리가 하얗게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점점 어두워지는 순간 속에서 몸이 차에 태워지고 어딘가로 향하는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정신력으로 버텼다. 강도단은 영훈이 쓰러졌다고 확신했다. 꽤 긴 시간을 달려서 조용한 곳에 도착했다. 더이상 버티는 건 무리였다. 강도단은 영훈을 화단쪽으로 던졌다. 마지막으로 화단에 머리를 부딪히고 완벽하게 정신을 잃었다.
27.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언가 쓰인 흔적은 있는데 지우개로 빡빡 지운 도화지 마냥 떠오르지 않았다. 무언가 있었다는 잔상은 있는데 그게 뭔지, 얼마나 있는지, 도대체 가늠이 되지 않았다.
"뭐 가족이나... 아무것도 생각 안나요?"
"...응."
무언가 생각하려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영훈은 앞에 앉은 여주에게 온전히 기댔다.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나눴다. 여주는 영훈의 가족을 찾아줘야한다며 끙끙거렸지만 영훈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여주와 마주앉아 시리얼을 씹고, 좁지만 아늑한 차에 올라타는게 좋았다. 옷을 골라주고 나비를 데려오는 순간도 즐거웠다. 여주가 일을 하러 나갈 때면 집을 정리하고 미처 치우지 않은 이삿짐들을 정리하는게 행복했다. 가끔 심심할 때가 있긴 했지만 나비가 온 이후로는 그런 순간도 사라졌다. 같이 꾸민 옥상정원에서 파, 고추, 토마토가 자라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나른해졌다.
"여주!"
"오늘 뭐했어?"
"토마토 물주고, 나비 캣타워 닦고..."
"잘했네. 저녁에 로제 떡볶이 해먹자."
여주의 얼굴에는 피곤이 내려앉았지만 늘 퇴근하고 오면 무언가를 했다. 같이 요리를 한다던지 영화를 본다던지, 아니면 맘먹은 날에는 나비 목욕도 시켰다. 나비가 난리를 피워서 잠옷이 다 젖을 때면 몸을 뒤로 젖히고 웃었다. 영훈은 이 순간들이 계속 지속되길 바랐다. 머리 아프게 기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애써 떠올렸는데 지금보다 행복하지 않았으면 어떡해. 영훈의 안에 자리잡은 걱정이었다. 고민의 심연으로 빠져들 찰나에 늘 여주가 말을 걸었다.
"이불 빨래하자!"
"응!"
토마토 씨앗이 자라고 키가 훌쩍 컸다. 꽃을 맺고 초록색 방울이 지는 걸 함께 지켜봤다. 영훈은 더 바랄게 없다고 생각했다. 여주만 괜찮다면 계속 같이 있고 싶었다. 어쩌면 처음부터인지도 모르겠다. 알아들을수 없는 부동산 용어를 늘어놓아도 재밌었다. 바쁘다면서 근무시간에 짬날 때면 영훈의 셀카에 답장을 보내는 것도 좋았다. 여주가 작게 웃을 때면 작은 앞니가 토끼처럼 드러났고, 크게 웃을 때면 어금니까지 보이게 몸을 젖히는게 좋았다. 영훈은 자신도 모르게 여주의 모든걸 닮아갔다. 더 크게 웃고 자주 웃고 싶어졌다.
"제일 보고 싶은건 뭔데?"
"너."
욕심은 더해갔다. 처음에는 옆에만 있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끝없는 생각이 덧붙여졌다. 같이 손잡고 걷고 싶다. 오래 있고 싶다. 여주랑 웃고 싶다. 그리고 그 욕심은 순간 발휘됐다. 이불빨래 하다가 넘어질뻔 한 여주의 허리를 붙잡았다. 살짝 달아오른 여주의 볼에 짧게 입맞췄다. 행동은 충동적이었지만 감정은 갑자기 결정한게 아니었다. 영훈은 자신의 볼에도 열감이 오르는 걸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옆에 둬주고, 보듬어주는 여주가 좋았다. 영훈은 다음 이불을 가지고 왔다. 얼떨떨하게 서있는 여주를 보며 깨달았다. 여주가 좋다.
"경찰서 가자. 가족 찾아줄게."
그래서 바다를 보러갔을 때도 마음이 이상했다. 가족을 전면적으로 찾아준다는 말은 기뻐해야할 일이다. 내 모든걸 잊어버리고 가까운 사람까지 잃어버린 순간은 분명 불행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려는걸 여주가 막았다. 영훈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작게 흐느끼는 여주의 몸을 알아챘다. 여주야 나 놓지마. 그 말에 목에 턱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가도 돼. 가야지. 영훈아.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기억과 눈 앞에 두 사람이 겹쳐졌다.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이 얼굴들이 익숙했다. 자신을 엄마와 형이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은 날 보면서 울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영훈은 벅찼다. 너무 기쁘고, 좋은 일인데 계속 가슴 한켠이 답답했다. 자신의 어깨를 껴안는 중년 여성을 토닥였다. 여주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도 돼. 가야지. 영훈아. 영식이가 아닌 영훈이라는 이름이 어색했다. 여주가 부여해준 이름은 영훈에게 특별했다. 여주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형이라는 사람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나서면서도 뒤를 돌아봤다. 여주가 손을 낮게 들어 흔들고 있었다. 작은 손바닥이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영훈은 어딘가 꾹 눌린듯한 기분이었다. 떠나야하는 건 영훈인데, 이상하게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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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