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라이터니까 글을 잘 쓰지
‘카피라이터니까 글을 잘 쓰지.’ 내가 가장 많이 받는 오해다. ‘가장 많이 받는’ 오해이니만큼 매번 펄쩍 뛰며 부인하기엔 머쓱하고, 가장 많이 받는 ‘오해’이니만큼 꼭 그 오해를 풀고 싶다는 욕망이 마음 한편에 있다.
물론 카피라이터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맞다. 다만 ‘어떤’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다. 광고주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글을 잘 쓰는 사람, 판매가 부진한 상품을 팔리게 만드는 글을 잘 쓰는 사람, 새로운 제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개하는 글을 잘 쓰는 사람, 오해받고 있는 기업의 진심을 몇 문장으로 정리할 줄 아는 사람.
카피라이터는 소설가가 아니고 시인이 아니고 수필가가 아니다. 수많은 정보와 풍성한 논의와 깊은 고민 끝에 글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카피라이터는 그런 글을 잘 쓰는 사람인 것이다.
처음 카피라이터가 되었을 때 나는 매우 든든한 배 한 척을 마련한 느낌이었다. 든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써서 벌어먹고 살 수 있다니. 그게 가능하다니. 그게 얼마든 간에 글을 써서 매달 월급을 받는 경험은 안정적이었고 심지어 따듯했다. 때론 파도가 밀려오고 때론 바람이 거셌지만, 대체적으로 밝은 햇빛 아래 튼튼한 배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심지어 같은 배에 올라탄 선배들은 얼마나 믿음직했는지. 나는 그 배의 성실한 뱃사공이었다.
배에도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모두가 잠들고 바다마저 잠잠한 밤. 그 밤이 되면 나는 나만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렸다. 그러나 무엇을 쓴단 말인가. 나는 소설가도 시인도 수필가도 아닌걸. 하지만 그 무엇이 아니더라도 쓰고 싶다는 욕망은 쉬이 잠들지 않았다. 그 욕망을 잠재우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쓰는 것. 그게 무엇이라도 쓰는 것.
일기를 썼다. 그걸 일기라고 불러야 할까. 하루에도 몇 번이나 썼으니. 마음이 일렁일 때마다 썼으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쓰지 않을 때는 쓸 게 없었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대충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먼지처럼 흩어지는 순간들. 흔적을 남기지 않는 매일들. 매일 같은 길로 출근하고 같은 사람들과 밥을 먹고 비슷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굳이 써 내려갈 필요는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쓰기 시작하자 그 비슷비슷한 매일이 바뀌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일이 다 별일이 되었다. 같은 일이 하나도 없었다. 매일은 조금씩 다르게 조각되었다. 오늘과는 전혀 다른 어제가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록들을 모으자 책이 되었다. 책을 몇 권 냈더니 나를 ‘작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내가 쓴 글을 읽고 용기와 위로를 얻었다는 독자들이 찾아왔다. 어느새 나만의 글 세계가 생긴 것이다.
카피라이터로 불리든 작가로 불리든 내가 보내는 매일은 별반 다르지 않다. 시작은 언제나 간단하게나마 어제의 일기를 쓰는 일이다. 아직 이십사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어제의 먼지를 탈탈 털고 햇빛 아래 밀려 본다. 돋보기를 준비해 꼼꼼히 어제를 들여다본다. 별것 없는 어제에도 기억하고 싶은 귀퉁이가 존재한다.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와 평소 안 가 본 방향으로 산책한 순간, 길만 건너도 여행이 시작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 순간을 고이 접어 일기장에 옮겨둔다. 광고주 미팅 다녀오는 길, 동료가 무심코 던진 말에 그 사람의 진심이 슬쩍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역시나 내가 좋아하기엔 힘든 사람이라는 진실도 함께 드러난 순간이었다. 그 순간을 낚시해 일기장에 박제해 둔다. 매일 비슷해 보이지만 하나도 같지 않은 창밖 풍경도 건져 올리고, 오늘은 또 처음인 남편과의 대화를 기록해 둔다. 매일을 다른 모양으로 기록한다.
힘 빠지겠지만, 이게 뭐 별거인가 싶겠지만, 나는 이런 방식으로 ‘내 글도 쓰는’ 카피라이터가 되었다. 광고주를 위한 카피뿐 아니라 나를 위한 글도 쓸 수 있는 작가가 되었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매일 기록’이라는 작고도 단단한 보석을 쥐여 주고 싶다. 그것이 내가 찾은 유일한 답이므로. < ‘좋은 생각(한화생명, 우수콘텐츠잡지 2021년 7월호)’에서 옮겨 적음. (2021. 9.17.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