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혁명이 우리에게 남겨준 삶의 터전.
1961년5월16일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육군장교들이 일으킨 군사쿠데타로 인해 제2공화국의 장면 내각은 출범 9개월만에 무너졌고 박정희를 수반으로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했다.
당시 국군에는 이승만 정부 때부터 군의 심각한 부정부패와 비리, 승진가도 중단에 불만을 품고 4.19 혁명 이후 정군 운동을 벌여 미국과 충돌했던 일군의 장교세력들이 있었다.
육군 소장 박정희와 1961년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을 비롯한 육군사관학교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은 이로 인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이 예정되었고, 이에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하게 된다.
박정희 등은 이승만 정부 때 쿠데타를 하려 했으나, 4.19로 무산됐다가 다시 진행한 것이다.
쿠데타 세력은 예비 사단 병력과 포병단, 해병대와 육군 제1공수특전단등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을 비롯 대구시, 부산시 등의 방송국 등 주요 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주한미군과 주한
미국대사관의 공식적인 반대 성명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장도영과 통수권자 대통령 윤보선을 회유함으로써 국무총리 장면을 사퇴시키고 봉기 60여시간 끝에 제2공화국을 무너뜨린다.
결국 쿠데타 세력은 불법적인 수단으로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탈취하여 앞으로 자신들이 조직한 소위 군사혁명위원회가 대한민국의 모든 통치권을 행사한다고 선언한다.
이튿날 아침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를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였으며,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불법화하고 언론 사전 검열을 실시함은 물론,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시킨 뒤 2년 반 가량 군정을 실시했다.
예전에는 이 사건이 군사혁명(보수계 세력), 군사반란(진보계 세력), 군사정변 등 여러 이름으로 통했다. 5.16 주체 세력이 정권을 잡고부터 6월 항쟁 이전까지는 5.16군사혁명
으로 민주화 후 문민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으로 "5.16 군사정변"이 공식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김영삼 대통령 5.16쿠데타로 규정, 5.16은 쿠테타로,
1960년의 4.19 혁명으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수석국무위원 겸 외무부장관
이었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난 상황에서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야 했지만 부통령 장면은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하기 위해 4월 23일 이미 사퇴한 상황이었고 그 다음 대행 순서는 수석국무위원 겸외무부장관이
1순위였기 때문에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허정 내각은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개혁 정책을 펼치고자 했으나, 허정 내각이 스스로 내걸었던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방법으로 단행한다는 슬로건과 같이 개혁을 급격하고 신속하게 추진하기보다는 점진적이고 완만하게 추진하였고,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하야와 국무위원들의 일괄 사직으로 발생한 정부 공백 상태를 해소하고 개헌과 총선거를 치르기 위해 임시적으로 구성된 과도 내각이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허정 내각은 정치 개혁보다는 혼란 수습에 주력하였다.
1960년 6월에 국회는 의원내각제로 정부 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안을통과시켰다.
내각제는 이승만 정부에 대항해온 민주당이 처음부터 고수해온 당론이었다. 민주당은 이승만의 권위주의 정치를 비판해왔는데 4.19는 민주당에게 이들이 주장해온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개헌 후 국회는 스스로 해산했고, 새 헌법에 따른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민의원 의석 233석 중 175석을 차지함으로써 전체 의석의 75%라는 압도적인 승리를 기록했다. 그러나 민주당 내부에는 세력이 비슷한 구파와 신파가 서로 대립하였고, 그들은 무소속 당선자를 자기 정파에 영입하기 위한 경쟁을 벌였다. 그해 8월 국회는 민주당 구파의 지도자 격인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는데, 이는 의원내각제 하에서 대통령은 실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신파가 합심한 결과였다. 실권은 국무총리가 갖고 있었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구파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3표 차이로 인준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신파의 지도자 격인 장면을 국무총리에 임명
하였고 국회에서 단 2표 차이로 인준된다.
구파는 신파와 내각 구성에 있어서 협상을 진행했으나 결국 결렬되었고, 장면 총리는 국무위원들을 신파 일색으로 구성하였다.
두 당파는 서로를 근본적으로 불신하였고, 구파는 별도 교섭단체를 결성하였다가 끝내 신민당(신민주당)으로 분당하며 완전히 갈라졌다.
장면 내각은 10개월 동안 무려 세 차례나 개각을 거듭하였고, 교체 사유는 비리나 정책의 실패 같은 게 아니라 신파와 구파 간 균형 맞추기였다. 당시 장면 내각 각료들의 평균 임기는 2개월. 이러니 정책이 제대로 연속성을 가지고 굴러갈 수 없었고, 국무위원들은 업무를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일쑤였다. 신구파 간 밥그릇 다툼으로 장관들이 바뀌는 모습을 국민들이 좋게 볼 리도없었다. 게다가 윤보선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만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헌법은 대통령이 정당에 속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는 민주당 내에 남아있는 구파나 신민당의 이해를 대변하였고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의된 이 애매한 규정은 대통령과 총리가 사사건건 대립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각료 자리를 둘러싼 2공화국의 국정운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5.16이 성공하는 주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발언 등을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의 혼란은 지속되고 있었음은 사실로 보인다.
일단 3.15 부정선거 ,4.19 혁명 ,이승만 대통령 하야, 허정 과도내각 수립,개헌, 총선 ,장면 내각 수립이라는 엄청난 일들이 1960년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벌어졌으며, 독재 정권이 무너졌는데 세상이 조용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급작스러운 민주주의 회복에 의한 사회 혼란으로 이승만 정부 10여 년 동안 억눌려 온 요구들을 쏟아내는 데모가 연일 끊이지 않았다.
장면 내각 10개월 동안 가두데모는 총 2,000여건, 데모에 참가한 인원이 100만여 명에 달하였다.
매일 평균 7~8건의 데모가 발생한 셈이다. 국민학생들은 교사의 전근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고, 경찰은 국회의원이 뺨을 때렸다고 시위를 하였으며, 육군훈련소
의 훈련병들은 장교가 하대를 한다며 시위를 하였다.
심지어 시위를 그만하라는 시위까지 발생하였다.
이것을 부추긴 것은 당시 급격히 불어난 언론들이었다. 이승만 정부 붕괴 이후 수많은 언론 매체들이 창간되어 일간지는 기존의 41개에서 60년 12월 말까지 390개로 증가하고 주간지, 월간지, 통신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탄생한 언론들은 혼란스러운 사회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고 대부분 정부와 권력 기관을 비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에 정부는 언론규제법을 시행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장면은 안보와 치안의 핵심세력인 군과 경찰을 숙청과 혁신의 대상으로 삼았다.
장면은 선거 공약으로 군 병력 10만 명 감축안을 내놓았고, 집권 후 감군 정책을 추진
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로 30,000여 명을 감축하는 데 그쳤다.
또 잦은 군 지도부 개편으로 1년도 안 되는 재임 기간 동안 국방부장관이 세 번, 육군참모총장이 네 번이나 바뀌는 등 파행을거듭했다.
일제 식민경찰에 복무한 경력이 있던 경찰관들은 4·19를 계기로 숙청의 칼날을 맞았다.
경찰서장 81명을 포함하여 경찰관 17,000명이 해직됐고, 전체 경찰관의 80%를 근무지를 변경시켰다. 민주당 정권 9개월 동안 경찰업무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다섯 번이나 바뀌었다. 그 중 네 명은 각각 한 달 간씩 재직했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민주당 집권기간 중 범죄가 두 배로 늘었지만 범인 검거율은 이승만 정부 시절의 90%에서 65%로 낮아졌다. 경찰력이 허약해진 틈을 타고 깡패와 조직폭력배가 활개를 쳤으나 장면 정부는 공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5.16은 군부가 물리력으로 합헌(合憲)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은 점에서 쿠데타이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뒤 박정희 세력이 이 나라에서 한 일은 근대화 혁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치, 경제, 군사,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혁명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도 그런 혁명의 결과이다.
쿠데타는 수단이고 결과는 혁명이었다.
전자(前者)는 법률적 평가, 후자(後者)는 전자(前者)를 포괄한 더 넓은 의미의 역사적 평가이다.
이 과정에서 2공화국 장면 총리는 진압 노력도 하지 않고 일찌감치 피신해버려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무혈혁명이 되었다.
박정희의 혁명적 발상은 그 당시 한국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민주주의는 신(神)이다'는 신앙에 도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민당에 뿌리를 둔 해방 후의 정치세력을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守舊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들 구 정치인(舊政治人)
이야말로 '덮어놓고 흉내낸 식의 절름발이 직수입 민주주의'를 盲信하는 사대주의자라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의 혁명적 역사관은, 서구식 민주주의 맹신자들이야말로 조선시대의 당파싸움 전문가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위선적 명분론자라고 규정했다. 그는 4.19와 5.16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4.19 혁명은 '피곤한 5천년의 역사, 절름발이의 왜곡된 민주주의, 텅 빈 폐허의 바탕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명제를 던졌고 이 명제에 해답하기 위한 '역사에의 민족적 총궐기'가 5.16이란 것이다.
4.19와 5.16을 동일선 상에 놓는다는 것은 자유당과 민주당을 똑같은 봉건적, 수구적(守舊的) 세력, 즉 근대화 혁명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기억하는 이런날에 어찌 가만 있을 수있나!
5.16당시만 해도 보리고개가 있어 배를 곯아야만했던 그때가 바로 엊그제인데 지금의 절은이들은 그걸 알리가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농촌에선 일손이 없어 외국인 근로자를 쓰는데 일당이 숙식제공에 130.000원이란다.
그것도 양파수확하는데는 180.000원까지 준다는데 우리나라에 일자리 없다는말이 왜 생겨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혁명정부에서의 새마을정신으로 잘살아보세란 노랫말이 지금은 현실로 돌아와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 했는데 정치수준은 하나 변함이 없으니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진짜 한번 잘해봤으면 싶다.
송추계곡입구.
(7시30분 산행시작)
허세의 정원.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여성봉 능선.
송추마을.
북한산 국립공원 송추계곡.
송추골폭포.
송암사 입구.
차가 접근할수 있는 마지막.
비온뒤라 그런지 계곡의 물소리가 요란하다.
삼거리에서 사패능선 분기점으로 진행.
(회룡사거리)
여기서 쉼과 동시 스틱도 조립하고 출발.
자운봉까지 2.3km?
오늘 날씨가 약간 쌀쌀한 편에 천천히 이동 했더니 땀은 흘리지 않았다.
사패산쪽 바위들.
멀리 양주쪽도 바라보고....,
전망이 괜찮을것 같은 바위.
바라만 보고 간다.
머얼리 북한산 백운대도 보이고....,
산불감시초소.
초소를 등지고 간식으로 바나나도 먹고 쉬어감.
오른쪽 윗니가 아려 잇몸이 부어있다.
가야할 방향도 보고....,
아래 시가지도 내려다 본다.
역시 서울은 대단해!
자운봉까지 가려면 아직도....,
올망졸망한 바위들 모습.
코끼리 콧구멍바위.
코주부 바위.
앞으로 한참을 더 가야....,
그냥 지나칠수 없는 바위들의 향연.
책바위.
도봉산 주봉의 바위들이다.
사진으로 보니 오른쪽 뺨이 많이 부어있네!
도봉산의 주봉들.
웅장하고 멋지기도 하다.
좀 힘들겠지만 Y계곡으로 가 보겠다.
올라갈 바윗길을 배경으로,
역시나!
위험하기도 하고 힘도 들었다.
내 나이 80이라 아마 이번길이 마지막인가 싶다. (정말 힘들었다)
도봉산의 최고봉 자운봉(740m)
신선대.(726m)
자운봉.
대포바위.
우이암.
오봉(662m)
신선봉.
상장능선.
오늘은 송추폭포쪽으로 하산.
여러개의 폭포가 있다.
그중 송추폭포.
숭추폭포 삼거리(원위치 함)
6시간30분 산행.
난이도가 있는 도봉산을 간만에 장시간 산행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