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영 박사가 들려주는 <현대사 100년과 올바른 우리
역사>
1900년에서 21C에 이르기까지 100년이란 격랑의 세월을 살아온, 더욱이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하신 분이라서 일반 시민들에게 생생한 역사관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그 의미가 큽니다.
또한 현대 한국의 문제점과 대안,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의견도 전 분야에 걸쳐 말씀하신 데다 너무나 탁견입니다.
지금도 최태영 박사는 조금도 떨림이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뛰어난 기억력, 지팡이조차 의지하지 않고 인천 자택에서
서울에 있는 학술원이나 서울 YMCA에까지 혼자 전철을 타고 다니시는 강건함, 특히 지금도 역사책을 보시면서 한국의 역사와 비전에 대해 연구하는
젊고 건강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루가 늦기 전에 그가 일생의 정열을 쏟아 부은 상고사와 한, 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와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 1995년 11월 30일 이후 최태영 박사께서 해주신 말씀을 바탕으로 하여 작업에 들어가 1998년 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문답식으로, 구술 받아 정리작업을 진행하여 1999년 1월 31일에 마무리하였으며,
* 이 작업은 강태현이 대담과 기록을 계속하는 가운데 현경병이 진행,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동환(연세대 경영학과
4년), 장기홍(연세대 문헌정보학과 3년) 두 사람도 그 기록을 하였음.
Ⅰ. 역사회복 작업에 나서다
1. 국가고시에 국사(國史)를 필수과목으로 편입시키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고시령(考試令)을 제정할 때 사법고시를
비롯 국가고시에 국사(國史)를 필수과목으로 편입시킨 사람이 바로 본인입니다.
서울대 평위원겸 법대학장으로 있을 때인 1948년
9월 대한 민국 '법전편찬위원'과 '상임수석고시위원'으로 임명되었는데 1949년 들어 '고시령'을 제정하면서 필수과목으로 '국사'를
포함시켰습니다.
이때 '국사' 필수의 원칙은 고등고시뿐만 아니라, 보통고시와 하급공무원 시험에 이르기까지 모두 적용하였고 특히
고급공무원(특정관) 특채에도 이 원칙을 적용하였는데 특정관 특채 시에는 고시위원한테 '역사' 구술전형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고시령을 제정하면서 분량이 많고 힘든 '상법'을 선택과목으로 돌리고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포함시켰는데 선택과목으로 돌린 상법은
바로 내 전공과목이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모르는 국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일관된
지론으로 그리고 이렇게 법으로 일단 엮어만 놓으면 자연히 당시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의 책을 가지고 공부하게 되리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이 무렵에는 나와 가까웠고, 올바른 '역사'를 하는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장도빈 선생 등 사학자들이 모두 계실
때이고,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됐던 우리 '역사'가 '한글' 보급과 함께 서서히 부활되던 때였습니다.
그 당시
'전형'은 내가 맡았고, 초안작성과 문안정리 등 보조 업무는 신진 변호사였던 양회경(梁會卿; 1912~1998)씨가 수행하였습니다.
양회경 변호사는 그 뒤 13년 동안 대법관으로 재임하면서 면도칼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엄격한 법관으로 이름이 나있는
법조인입니다.
나는 일제침략시대말기 폭압 속에서도 밤에 이불을 쓰고 연세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아들(의학박사 최원철)에게 우리 '역사'와 '한글'을 가르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광복 후
단군조선을 비롯 우리 역사
광복 후 한글 보급과 함께 서서히 부활되던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가 다시 굴절된 것은 1963년
국사교과서 내용을 통일하면서 그리고 1974년 '국정국사교과서'부터 부정, 축소되는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1963년이면,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선생 등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납북된 뒤이고, 장도빈 선생마저도 몸져누워 계실 때이고, 내가 왜곡, 말살된
우리 '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전입니다.
1963년 5월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국사학자와 검인정국사교과서 집필자,
국사담당교사 등 28명이 12차례의 회의를 열고, {단군은 민족의 '신화'로 취급한다! 삼국의 건국에서 삼국의 시조인 주몽, 온조, 박혁거세는
부족사회에서 다룬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때는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재위 ; 53~146), 백제는 제8대 고이왕(재위 ;
234~286), 신라는 제17대 내물왕(재위 ; 356~402) 때부터 또는 몇 세기부터라고 한다!} 등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이후입니다.
이런 결론은 일제가 '취사선택'한 사료를 바탕으로,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를 왜곡,
말살하면서 (일제가) 내렸던 결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5, 16 군사 혁명정부가 민족사관을 강화하기 위해 검인정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통일하도록 한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단군조선을 비롯 삼국의 시조와 삼국의 초기 역사마저 '신화'로
왜곡하고 축출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말이 5천년 역사이지 2천년도 채 못되는 {머리 없는 역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1910년 강점 전, 후와 광복 후 '국사교과서 변천과정'은 바로 일제와 한국인 ○○○, ○○○ 박사 등 식민사학자들에
의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 말살실태를 체계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됩니다.
결국 정인보, 안재홍, 손진태 선생 등을 비롯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6, 25 때 납북된 영향입니다.
이들이 납북이 안되고 '역사' 회복에 나섰으면 내가 이 일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6, 25 때 납북만 안되었다면 일제와 식민사학 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역사'
그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와 가까웠고, 보전 교수로도 같이 있었던 손진태(孫晋泰; 1900~?)씨는 나한테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문의를 많이 했었는데 서울대 문리과대학장에 재직 중 납북됐습니다.
그는 《조선민족사개론(朝鮮民族史槪論)》과
《국사대요(國史大要)》를 저술했습니다.
장도빈(張道斌) 선생이라도 좀 더 오래 살아 계셨으면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이렇게까지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장도빈 선생과는 서울대 법대학장을 역임한 뒤, 단국대에도 있었는데 이 때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단국대 초대학장을 지내시기도 한 장도빈 선생은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를 복원하려고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단국대 교가는 장도빈 선생께서 작사한 것입니다.
선생은 3, 1운동 당시 경성여고(현
경기여고) 학생으로 3, 1운동을 주도했던 김숙자(金淑姿) 여사와의 사이에 5남1여를 뒀습니다.
장치혁(張致赫; 1932~)
고합그룹 회장이 장도빈 선생의 4남입니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장도빈 선생을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았던 장치혁 회장은
러시아에 대규모 농업개발사업과 가스전 사업을 펼치고 있고,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국립 극동대학에 {한국학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습니다.
장도빈 선생은 오산학교에도 재직했었는데 당시 한경직(韓景職; 1902~) 목사의 역사교사였습니다.
현재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명예회장과 한국선명회 명예이사장으로 있는 한경직 목사는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나와
한경직 목사와는 3, 8선이 생기고 그가 서울에 내려오면서부터 인연을 맺었고, 특히 1954년 기독교 장로교학교인 숭실대학교 재건에 함께
참여하면서 더욱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에 불을 댕긴 사람이 한경직 목사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전례가 없는 많은 수의 장로교회를 성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미주 지역에 이르는
해외선교사역을 펼쳐나간 선교의 한 상징적 인물입니다.
한경직 목사는 국가관에 있어서도 뛰어난 애국자인데 그의 애국정신은 오산학교의
민족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나와 장도빈 선생과는 '역사' 문제로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습니다.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항일구국운동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장도빈 선생은 참으로 애국자이셨습니다.
나는 법률학자로서의 학문연구를
《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책으로 총 정리하면서 완결시켰습니다.
이 책은 1977년에 낸 원고지 1만 4천장의 방대한
저서로, 숙명여대 제자들이 원고 교정을 보고 숙대 출판부에서 책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원고 교정을 보느라 학생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 책을 내놓으니까 출간 1주일만에 학술원에서 저작상을 주더군요.
이 원고를 끝낸 직후인 1977년부터는 장도빈 선생에
이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회복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특히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우리민족의 건국사이면서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고조선)'을 신화로 교육하는 것을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3.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해외소재한국학연구자료조사위원'으로 일본에 다녀오다.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단군조선(고조선)'과 '한, 일관계사' 연구를 위해 사료(史料)발굴 차 1985년 전후로 일본 각지를 여러
차례 답사했습니다.
86세 때인 1985년에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해외소재한국학 연구자료조사위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는데 이 때
유승국(柳承國; 1923~)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현 성균관대 명예교수)과 김홍량 선생의 아들인 김대영(金大泳)씨가 협조를 해주었습니다.
1985년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현에 있는 옥산신사(玉山神社)를 방문한 이유는《세종실록》에도 나와있듯, 단군 조선
때부터 세종대왕 때까지 전하여 오던 역사노래인, 즉 민족제전을 지낼 때 부르던 노래인 세년가(世年歌)와 같은 흔적을 찾으러 간 것입니다.
'단군'을 모신 이 옥산신사는 일본 유학시절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제2행정 조정관으로 있던
김대영씨에게 부탁을 해 미리 예비조사를 하고, 옥산신사의 연혁에 대해 잘 아는 심수관(沈壽官, 73)씨와 서신 왕래를 해 친해진 후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일본 오사카(大阪) 총영사로 있던 유대형씨가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심수관씨는 초대 도공
심당길(沈當吉)씨의 14세손으로 대를 이어 도자기 제작에 전념해 오고 있는데 심수관씨는 와세다 대 정경학부를 마치고 가업을 잇고 있더군요.
{이 옥산신사는 임진왜란 후인 1598년 12월 정유재란 때 일 본으로 끌려온 17성(姓)의 도공들에 의해 1673년에 건립된
것이고, 당시 한복으로 정장한 도공들과 그 가족들은 바다를 향해있는 이 옥산신사에 나가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기원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
{1673년에 건립된 이래 해마다 음력 8월 15일에는 묘대천(苗代川; 현 미야마(美山))에 있는 주민들이 다 함께 이
옥산신사에 나가 제례를 하였는데 제주(祭主)만은 한국의 도포를 입고, 한국음식과 함께 제기(祭器)나 악기도 한국 고유의 것을 썼다. 특히
[오늘이 오늘이라(오늘이 단군 제삿날이다) 제물(祭物)도 차렸다
{오늘이라 오늘이고나 모두 함께 노세 이리도 노세 이리도 노세
제일(祭日)이 제일(祭日)이라(오늘이 제삿날이다) 우리 어버이 단군은 잊지 않으리라 고수레 고수레 자나깨나 잊지 않으리라]라고 불리어 내려오던
축가인 신무가(神舞歌)는 한국말 그대로 하였다}고 하더군요.
1985년 심수관씨를 서울에 초청해 태평로에 있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습니다.
심수관씨는 1989년부터 가고시마현 한국명예총영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간지 1998년 올해로 400년인데 심수관씨는 일본에서 10월 중순부터 11월 하순까지 4백년 제에 대한 대규모 축제를
계획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400년 전 일본에 조선의 도예를 전래하고, 조선 도공의 예술혼을 이어온 심수관가(家)를 조명하는 글이
동아일보에 1998년 6월 15일자부터 연재되고 있더군요.
1985년 심수관씨를 만난 후 동년 10월 일본의 수도 동경(東京,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약 40㎞ 떨어진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 히다카정(日高町)을 방문해, 고구려 신사인 고려신사(高麗神社)에서
관리책임자인 궁사(宮司)로 있는 고려징웅(高麗澄雄, 고마스미오)씨를 만났습니다.
고구려의 왕족인 약광(若光)을 모시고 있는
고려신사의 궁사인 ? 疵좌×邨쓴?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재위: 642~668)의 후손으로, 약광왕자의 59세손(孫)이라고 하더군요.
고려징웅씨는 {본인의 선조가 일본에 건너온 것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평양을 한창 공격하던 서기 666년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반도와 일본은 서로 왕래가 자유로웠다.
668년 나라가 망하자 왕족과 고구려인들이 일본으로 망명,
지금의 동경(東京)근교 무사시노(武藏野) 지방에 터전을 잡고 황무지를 개간해「작은 고구려」를 이루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때 이곳에
모여든 사람은 1천7백99명이었다.
이 마을의 지도자가 고려(高麗)란 성(姓)의 창시자인 약광(若光)이었고, 이분은 바로 보장왕의
막내아들이었다.
서기 716년 당시 일본정부는 이곳에 고려군(高麗郡)을 신설하고 고려약광(高麗若光)에게 왕(王)의 칭호를 주면서
군(郡)을 통괄하도록 했다.
고려군은 명치(明治)유신 때인 1897년(명치 29년)에 사이타마현(埼玉縣) 이루마군(入間郡)에
편입되어「고려군(高麗郡)」이라는 공식명칭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이 곳은 옛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대대로 이곳에 살면서
신사(神社)를 지키고 족보까지 전수해 오고 있는데 명치(明治)기에 이르기까지 고려(高麗)라는 성(姓)씨는 일본에서 본인 가족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종가에서만 고려(高麗)성씨를 쓰게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방계를 분가할 때는 고마이(駒井), 이노우에(井上)
등의 성씨를 주었다.
즉 장자(長子)만이 '고려(高麗)'라는 성을 그대로 쓰고, 나머지 형제들은 일본 성(姓)을 쓴다.
현재 고려향(高麗鄕)이라고 부르는 고려촌(高麗村) 사람들은 두 가지 전통을 꼭 지켰다.
장자에게 가문의 혈통을
이어주는 것과 다른 하나는 고려촌 내 사람들끼리만 결혼이 그것이다.
고구려 유민들은 동경만 인근 오이소(大磯촵어서오시오라는
남한(南韓)의 방언에서 유래)해안으로 상륙하여 사이타마에 정착, 고려촌을 이루어 살아왔던 것이다.
{자랑스러운 한민족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해 고마(高麗), 즉 '고려'라는 성을 지켜온다}는 고려징웅씨는 {처음 만들어 진 족보는 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이 족보는 7백 여 년
전에 새로 만든 것이다.
족보 첫머리에는 불의의 화재로 소실된 고구려 유품목록과 이를 애석해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고구려인들이 일본열도로 이동할 때 가져간 {고구려 탈}을 보여 주어서 보기도 했습니다.
고려징웅씨는 {고려신사(高麗神社)에 하루 최대 17만명이 참배할 때도 있다}고 말하더군요.
고려향(高麗鄕)의
히다카정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가(高麗家)주택은 일본 정부지정 중요문화재로, 고려씨가 대대로 살아온 곳으로서 그 소유자는 고려징웅씨입니다.
1985년 11월 1일 고려징웅(高麗澄雄, 고마 스미오)씨를 초청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반응들이
좋았습니다.
내가 주선,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공식 초청함으로서 이뤄진 것입니다.
내가 일본에 '역사' 문제로 방문할
때는 의사인 내 아들 최원철(崔元哲; 1928~)이 항시 동행했었습니다.
일본 관동(關東)지방의 사이타마(埼玉)에는
고려신사(高麗神社), 고려천신사(高麗川神社), 고려천역(高麗川驛), 고려교(高麗橋), 고려천(高麗川) 등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
'고려(高麗)'라는 지명이나 유적은 '고구려'를 일컫습니다. 중국 역사책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많이 씁니다.
그 외 내가 방문한
지역들인 긴키(近畿)지방의 히라가타(枚方)에는 백제사지(百濟寺趾),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 백제사적(百濟寺跡)이, 오사카(大阪)에는
백제역(百濟驛), 백제천(百濟川), 백제교(百濟橋), 백제대교(百濟大橋), 고려정(高麗町), 고려교(高麗橋)가, 나라(奈良)에는
백제촌(百濟村)이 있었습니다. 북륙(北陸)지방의 니가타(新潟)에는 신라 박혁거세왕을 지칭하는 신라왕비(新羅王碑)가 있었습니다.
19세기 이전까지는 일본 전역에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을 모시고 있는 신사가 무려 2700여 곳이나 되었지만, (1868년) 명치
(明治)유신 이후 700여 곳이나 합사되어 지금은 2천여 곳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중국(中國)지방에는
한신신라신사(韓神新羅神社)가 있었고, 구주(九州)지방에는 고려정(高麗町), 고려교(高麗橋), 고려통(高麗通) 등이 가고시마에, 그 외
백제마을(百濟の里), 한국악(韓國岳; 1700m), 가야의 선조들을 모신 한국우두봉신사(韓國宇豆峯神社) 등이 있었습니다.
대마도(對馬島)의 상도(上島, 가미섬)에는 고구려유적인 고려산(高麗山)과 한국연산전망대(韓國連山展望台), 가라(加羅) 등이 있고,
하도(下島, 시모섬)에는 신라신사(新羅神社), 신라성(神羅城) 등 곳곳에 한국지명과 유적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대마도는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갈 때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섬으로, 일본인들은 대마도를 쓰시마라 하는데 이것은 '두섬'이란 '한국말의 일본식
명칭'입니다.
이처럼 북해도(北海道)를 제외한 일본전역에는 한국관련 유적, 유물들과 신사가 있는데 특히 수많은 '신사'들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인물들을 신위(神位)로 모시는 등 한반도와 깊은 연관이 있지만, 즉 일본의 신사는 처음에 우리 한민족에 의해 맨 먼저
지어졌고, 우리 선조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은 우리 자신들도 잘 모르고, '신사참배'를 생활의 일부로 하는 일본인 자신들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일본인들에 의해 심지어는 음(音)만 같고, 그 뜻은 전혀 다른 이름으로 개명(改名) 당하고 있는
신사가 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쉽게 말해 일본의 신사라는 것은 한국사람 중에서 (일본)각 지방의 지도자나 유공자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우리말로 '사당'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신사 사진은 김향수 아남그룹명예회장의《일본은 한국이더라》(문학수첩)라는
책자에 잘 나와 있습니다.
김향수(金向洙; 1912~) 아남그룹 명예회장과는 그가 '역사(한, 일관계사)'문제로 나를 만나자고
해서 가까워지게 됐습니다.
김향수 명예회장은 1968년 당시 최첨단 기술산업이며 전자공업의 핵심이 되는 반도체 산업체를 한국
최초로 창업, 오늘날 한국이 세계3대 반도체 생산국가로 성장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1970년에는 미국에 해외영업을 전담하는
현지 법인을 설립, 세계화 경영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세계 최대 메모리칩 생산업체로 부상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김향수 명예회장의 후원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 한국학 연구회, 이병창 박사
1년 반 동안 운영됐던 {한국학 연구회} 발기인들로는 나를 비롯해 김우현(金禹鉉) 목사, 송지영(宋志英; 1916~1989) 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 숙명여대 총장과 경남대 초대총장을 역임하신 윤태림(尹泰林) 전 숙명학원 이사장, 김재원(金載元;
1909~1990) 전 국립박물관장, 손보기(孫寶基; 1922~) 전 연세대 박물관장(현 연세대, 단국 대 석좌교수), 유승국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현 성균관대 명예교수), 김주현(金周賢; 1919~) 전 숭실대 총장서리 겸 대학원장(현 숭실대 명예교수), 윤내현(尹乃鉉;
1939~) 단국대 사학과 교수(전 단국대 중앙 박물관장), 김선기(金善璂; 1907~1992) 전 문교부 차관(언어학자), 김성호(金聖昊;
1935~)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 저자, 문승연(文承娟) 이화여대 강사 그리고 박진근(朴縝根) 전 광신상고 교장선생 등이
참여하셨습니다.
김주현 숭실대 명예교수는 '영어'에 관한 한 국내에서 권위 있는 분인데 영국 셰익스피어 대학원에서 초청해
초빙교수로 연연히 세미나를 하러 갑니다.
동양에서는 일본 동경대학에 있는 한 사람과 함께 영국에서 인정하는 분입니다.
박진근 전 광신상고 교장선생은 '러시아어'로는 권위가 있는 분입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상고사(단군조선) 복원'에
대해 강의하고, 윤내현 교수는 '단군조선의 강역'에 대해 강의를 했습니다.
{한국학 연구회}가 운영 중이던 1987년,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이병창(李秉昌, 83) 박사와 재일동포들의 후원으로 추진되어, 나에게 책임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해, 내가 책임을 맡기로 한
서울-인천간의 수백 만평 대지 위에 대규모 {한국학 연 구원과 역사관} 등의 설립계획 등은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
이와 같은 계획이 이병창 박사와 이병철(李秉喆; 1910 ~1987) 전 삼성그룹 회장을 중심으로 또 추진됐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올바른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병창 박사와 이병철 회장이 이 일로 자주 만나 결국 이병철 회장이
대규모 {한국학 연구원} 등을 설립해 주기로 내정했었는데 1987년 11월에 갑자기 작고하게 된 것입니다.
나와 친분이 두터운
김주현 숭실대 명예교수와 이병창 박사와는 초등학교 동창생이라고 하더군요.
이병창 박사와 이병철 회장과는 가깝게 지내긴 했으나
친척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일동포사업가 이병창 박사는 전북 전주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뒤, 1949년
초대 한국 주일대표부 오사카(大阪) 사무소장(현 총영사에 해당)을 지냈으며, 현재 일본 도쿄에서 교와(協和)상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병창 박사는 1962년 도쿄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1969년 이후 현재까지 일본「경제전망담화회」간사를 맡고 있는
경제인이지만, 1978년에는「한국미술사개론」을 저술하는 등 한국미술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1999년 1월 22일 평생 모아온
한국도자기 3백1점과 중국도자 기 50점(약 450억원 상당)을 일본의 유명한 오사카시립 도요(東洋) 도자 미술관에 기증했다는 한 재일동포
사업가가 바로 이 병창 박사입니다.
그는 귀중품들을 조국이 아닌 일본미술관에 기증한 이유를 기자들이 묻자『솔직히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재일동포도 일본사회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고 이곳에서 자라나는 동포 후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싶어
결심했습니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89세 때인 1988년 4월 이병창 박사의 초청으로 일본 도쿄에 갔는데 그의 소개로
'궁하(宮下, 미야시다)문서'를 연구하는 삼륜방광(三輪邦光, 미와구니히카리)씨를 만났습니다.
삼륜방광씨를 따라가 후지산(富士山)
밑의 후지황태신궁(富士皇太神宮) 깊숙이 소장된 한자로 쓰여진, 두루마리로 된 일본황실이 백제에서 건너왔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궁하문서를 소장자인
궁하(宮下, 미야시다)씨의 안내로 직접 봤습니다.
궁하문서를 연구, 정리하기에 몰두했던 삼륜의희(三輪義熙; ? ~1933)씨의
아들인 삼륜방광씨의 말에 의하면 {궁하문서는 일본의 국사라고 생각해 온 약1천년 전의《기기(記紀)》(고사기, 일본서기)보다 수 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논급한 사서(史書)이다}, {이 문서에 비하면《기기》는 허구이며,《기기》를 역사서라고 일컫는 것도 잘못이다.}, {궁하문서에
수록된 우가야 왕조사의 진상을 규명하기에 몰두한 결과 1921년에 신황기(神皇記)를 발표하였었다.
그러자 일본의 유력한 신문,
잡지들은 일제히 절찬하는 논평을 실었으나 일본의 권력층과 군부 등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궁하(宮下, 미야시다)문서를 규명하여 선전하는 재단법인
부사문고(富士文庫)는 탄압을 받고, 활동정지 명령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이 무렵이 일제가 조선총독부에서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를 철저히 왜곡, 말살하던 시기입니다.
얼마 전엔 삼륜방광(三輪邦光, 미와구니히카리)씨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박사님이 89세에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이곳에 오셔서 저와 같이 후지산 밑의 후지황태신궁에 소장된 궁하문서를 보고 가셨는데
금년에 제가 벌써 85세가 되었습니다.
궁하문서를 같이 보던 기념사진이 박사님께 있을 텐데 저도 그 사진을 간직하고 싶으니 그것을
저한테 하나만 보내주십시오}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우가야 왕조사(일본의 역사가 한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피력하는 역사) 중,
'상기(上記, 우후미) 문서'는 지금 일본 황실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왕실은 이런 사실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는 '우가야 왕조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5. 이병도 박사와의 관계
이병도(李丙燾; 1896~1989) 박사와는 이병도 박사와 와세다대(早稻田大) 사학급 사회과에 같이 다니던 나와 경신학교 동창인
최정순의 소개로 일본유학시절부터 알게 되었습니다.
1947~1949년 내가 서울대 전체 경영방침을 연구, 주관하는 평위원 겸
법대학장으로 있을 때 이병도 박사가 사학과 교수로 있어서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1977년에 나온 내《서양법철학의 역사적
배경(西洋法哲學의 歷史的 背景)》서문(序文)을 이병도 박사가 썼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만큼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병도 박사와 자연스럽게 왜곡되고 말살된 '단군조선' 등 한국사에 대해 토론을 벌였던 것입니다.
조선일보
1986년 10월 9일자 5면에 보면, {단군(檀君)은 신화 (神話)아닌 우리 국조(國祖), 역대왕조(歷代王朝)의 단군(檀君) 제사 일제(日帝)
때 끊겼다}라는 이병도 박사의 '특별기고문'이 실렸는데 이것은 이병도 박사와 3년에 걸쳐 토론한 결과로, 이병도 박사가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이 '신화'로 왜곡되고 말살됐음을 대략적으로나마 말한 것입니다.
내가 이병도 박사와 토론 당시 송지영(宋志英) 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의 격려가 컸습니다.
그리고 친분이 두터웠던 ({국어대사전}을 편집하여 저술하신) 국어학자이신
이희승(李熙昇) 박사와 숙명여대 총장과 경남대 초대 총장을 역임하신 윤태림(尹泰林) 박사도 '단군조선' 회복 에 대해 적극적이었습니다.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신동아(新東亞)〉1989년 1월호에 보면, 《한국상고사 입문》 출간작업팀과 함께 한 사진과 서울 YMCA
원로모임인 계묘구락부의 김우현 목사, 전택부 서울 YMCA 명예총무와 함께 한 사진, 그리고 이병도 박사와 함께 한 사진이 실렸습니다.
《한국상고사 입문》머리말 서명은 같은 필체로 {1989년 1월}라고 기재되어 있을 텐데, 둘 다 이병도 박사 서명입니다.
이병도 박사가 자진해서 같이 책을 펴냈는데 그 뒤 머리말 서명 당시, 내가 서명을 하면 이병도 박사 자기이름을 위에다 놓는다고
이병도 박사가 서명용지를 자기 앞으로 가져다가 내 이름을 위에다 놓고, 자신의 이름을 그 아래에 놓더군요.
이병도
박사가《한국상고사 입문》머리말 서명 당시 신동아 사진기자 박용윤(朴容允)씨, 윤여덕 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임편수원, 박경희 전 학술원 사무원
그리고 이병도 박사 둘 째 아들이 참석했었습니다.
《한국상고사 입문》은 '신화'로만 치부되어온 '단군조선'은 군 주(지금의
대통령)의 뜻을 지니는 수십 명의 단군들이 2,300여 년 동안 통치했던 백두산과 중국 요동을 중심으로 한 강대한 광역국가였다.
라는 것을 밝힌 책이고, '단군'의 개국과 단군조선 시대의 실상을 규명한 책으로, 그동안 중국과 일본 그리고 사대주의,
식민사가들에 의해 왜곡, 말살되어 온 우리 나라 '상고사'를 원래의 상태로 복원, 정립한 역사서입니다.
《한국상고사 입문》은
1988년 미국 알라스카대학 한국문화원 재단의 위촉을 받고 펴낸, 알라스카대학 대학원의 교재인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Ancient Korea》를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이 책은 원래 『한국학 연구회』강좌의 교재를 모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용 전체의 중요한 줄거리는 '이병도, 최태영' 우리 두 사람의 것을 토대로 했습니다.
《한국상고사 입문》이 발행되자 올바른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언론인들을 비롯 여러 방면에 계신 분들한테서 격려의 글과 전화를
받았고, 특히 군(軍)에 몸담고 있는 고급장교와 장교들로부터 『우리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6. 1990년대도 역사회복 작업과 함께
91세 때인 1990년 9월에는《한국상고사 입문》의 수정,
증보판인《한국상고사》를 발행했습니다.
《한국상고사》는 '단군조선'과 사국시대(가야,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와 한반도와 일본왕실, 일본신사와의 관계에 대해 기술한 책입니다.
《한국상고사》를 내면서는
독자들의 희망에 따라 김우현 목사, 송지영 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 윤내현 단국대 교수, 김성호씨의 협력을 얻어 서울과 주요도시에서
'순회강좌'를 개최했습니다.
우리말과 우리 글에 서투른 재일동포 2세들의 교육을 위한 출판 요청을 받고《한국상고사》일본어판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1990년 12월 5일부터 12월 7일까지 서울 스위스그랜드호텔에서 {'세계한민족연합' 발기인대회 겸
학술문화교류 세미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때 강영훈(姜英勳; 1922~) 전 국무총리(현 세종재단 이사장), 홍성철(洪性澈;
1926~) 전 국토통일원 장관, 이어령(李御寧; 1934~) 초대 문화부장관(현 이화여대 석학교수) 등 '정부'의 여러분이 후원해 주었습니다.
세미나는 연 3일 동안 수십 명의 기자들과 수백 명의 참석자들이 성황을 이룬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상고사복원 문제'와 '한민족연합
방안'을 2대 주제로 설정했었습니다.
북한 최고의 역사학자는 손진태(孫晋泰)씨의 소개로 내가 경신학교 한문선생으로 채용했던
박시형(朴時亨; 1910~) 김일성 종합대학 역사학부 원사입니다.
당시 세미나에 박시형을 불렀더니 안 오더군요.
1993년 1월 29일에는 1백60여명의 고려대 원로교우들이 참석 한 가운데 교우회관 대강당에서「왜곡된 민족사(民族史)의
규명」이란 주제 강연을 하였고, 동년 9월에는 장학식(張鶴植) 전 인천대 총장(현 한국사회문화연구원 회장)과 지용택(池龍澤; 1937~)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인천 시민들, 기독교(개신교), 가톨릭(천주교) 교인들의 요청과 지원으로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 연구 기반조성과 희귀 자료
수집을 위해 인천대 에 '한국학연구소'를 개설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학부생을 대상으로 「한국사」강의를 1995년까지
하였습니다.
1993년경 국가안전기획부 인천지부에서 '역사'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을 비롯,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국회의원들, 육군, 공군, 해군사관학교 생도들, 군(軍)의 장성과 장교들, 특히 국가안전기획부, 국군기무부대 등
국가정보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국가관과 역사의식}이 그 누구보다도 투철해야 합니다.
나는 1995년 이후 '교회'에서
'단군조선'에 대해 강연을 많이 하였습니다. 1997년 11월에는 안도명 원로목사와 최상순 목사의 부탁으로 서울 용산구 후암동 '산정현
교회'에서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4331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에 대해 강연을 하였습니다.
1998년 현재 내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과, 상과 제자 중 '상고사'와 '한, 일관계사'에 대해 특히 관심을 보이는 이가
법과 제자인 김학묵(金學黙) 전 보사부 차관(현 한국뇌성마비 복지회 회장)입니다.
<대한매일신보〉와 함께 을사조약 무효화
선언 등 항일투쟁의 기치를 올린, 한말의 대표적인 일간신문인 <황성신문>(1898~1910) 주필이었던 김상범(金相範;
1870~1954) 선생의 장남인 그는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진지한 사람입니다.
사회복지사업에 그 누구보다 열성적인 김학묵 회장은
나를 자주 찾아오곤 하는데 KBS 1TV 역사드라마「용(龍)의 눈물」의 연출자 김재형(金在衡; 1936~) PD가 그의 아들입니다.
건강에 대해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1998년 11월부터는 '단군 조선' 등에 대한 역사 강의를 학술원, 서울YMCA 원로모임인
계묘구락부, 후암동 산정현 교회, 한, 일협회 등지에서 할 예 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