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부터 천천히 산행을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과거 싸이월드에 남겼던 글인데, 볼 수 없어 안타까웠지만, 다행스럽게 '한서산악회' 게시판에 남아있기에 가져왔습니다. 사진이 없어진 것이 아쉽네요.
2월 27일(일) 예정된 칠갑산 산행에 앞서서 옛글을 읽고, 과거를 추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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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올려다 본 하늘을 통해 산에 오르기 좋은 날씨임을 읽었다. 오늘은 충남의 알프스로 알려진 칠갑산에 오를 예정이다. 칠갑산은 옛날에 칠악산(七岳山)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명산에 대부분 '악(岳)'자가 들어 있는 것처럼 칠갑산도 그렇게 명산 대열에 속해 있었다. 신라 유리왕 5년에 지어졌다는 도솔가의 내용 중에 나오는 "칠악"이 칠갑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백제의 수도가 부여(扶餘)로 정해지고 산천숭배사상(山川崇拜思想)으로 명산대천에 제례하는 행사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면서 이곳 칠악산의 이름을 불가에서의 최고 신선한 이름으로 개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七"은 천지만물이 생성원리인 風, 水, 和, 火, 空, 見, 識을, "甲"은 천체 운행의 원리가 되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으뜸인 "甲"자에서 연유되었다 한다. 다른 유래로는 칠갑산이 금강 상류의 지천을 굽어보는 지형으로 일곱 장수가 나올 甲자형의 일곱 자리 명당이 있어 칠갑산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었다.
9시에 서산을 출발한 산타페는 키 작은 오색 코스모스가 즐비한 국도 29번을 따라 청양에 다다랐고, 청양 읍내에서 좌회전하여 36번 도로로 갈아탔다. 청양 읍내는 도민체전을 준비하면서 말끔하게 단장되어 쾌적해 보였다. 청양 읍내를 벗어날 즈음, 왼편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도로’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4km 정도로 펼쳐진 벚꽃길 구간으로 차량통행이 없고 고즈넉해서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장곡주차장에 산타페를 쉬게 했다. 칠갑산에는 산장로(철쭉로), 사찰로(송림로), 휴양로(계곡로), 지천로(설경로), 장곡로(단풍로), 천장로(호수로), 도림로(온천로), 칠갑로 등 총 여덟 개가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대개 3km ~ 5km정도의 짧은 코스들이 주를 이루었다. 오늘은 장곡로로 시작해 사찰로로 내려올 계획이며, 총길이는 10키로 정도였다.
주차장 옆으로 흐르는 냇물을 징검다리로 건너 소로를 통해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처음 200m정도는 나무계단으로 정비되어 있었지만, 급경사 구간으로 짧은 시간 심장의 RPM 수치를 높여 숨을 깔딱이게 만들었다. 능선에 이르러 숨을 돌리고 앞을 보니, 산악마라톤 코스 구간이라는 표지판이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매년 봄 산악마라톤 대회가 열린다고 하며, 올해 10회째 마라톤 대회가 있었다고 한다. 오르는 것도 힘이 드는데 마라톤을 한다니,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취미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날씨가 좋고, 산행 구간이 완만해 초보자에게 적합한 코스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걸었다. 작은 칠갑산이라고 불리는 삼형제봉에 오르는 길이 조금 힘들었지만, 여느 산들과 비교하면 명함을 못 내미는 깔딱고개였다. 삼형제봉은 칠갑산 정상에서 바라볼 때 봉우리 세 개가 모여 있다 하여 삼형제봉이라고 지어진 듯 했다.
삼형제봉 능선에서 간식을 먹었다. 떡갈나무 등의 활엽수들은 이미 산들바람에도 낙엽을 떨구고 있었으며, 진달래 나무는 이미 동면에 들어간 듯 앙상해 보였다. 장곡로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지 않아서인지, 삼형제봉에 이를 때까지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산행객들을 거의 보지 못했다. 정상 방면으로 한참을 올라 사찰로와 맞닿은 지점에는 이미 자리 잡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산에서 맞는 가장 즐거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300미터 정도 더 가니 넓은 평지가 나타났으며, 한쪽에 제단이 있고, 바로 옆에 칠갑산 정상을 알리는 표석(561m)이 있었다. 멀리 천장호와 칠갑호 등이 들어올 정도로 가시거리가 좋았다. 칠갑산 정상 주변으로 특산물인 구기자가 심어져 있었다.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이 꽤 익살스럽고 귀엽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따뜻한 햇살을 받고 나머지 간식을 먹은 후 하산길을 잡았다. 사찰로(장곡사 가는 길)는 장곡로보다 훨씬 넓었고, 편해 보여서인지 올라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빠른 걸음 탓인지 하산하는데 걸린 시간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장곡사 옆으로 들어가 앞마당에 도착했다. 배고프고 힘이 들었지만, 선생님들과 함께 간단히 절 구경을 하기로 했다. 장곡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국보 2점 등을 비롯한 여러 문화유적을 간직한 유서 깊은 사찰이었다. 특히, 다른 사찰과 달리 대웅전을 상하로 2개 갖춘 독특한 절이었다. 상대웅전은 본래 스님들에 대한 교육기관이었다고 한다. 불가에서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한 스님들을 교화시키는 곳으로, 상대웅전 바닥이 다른 사찰과 달리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스님들이 무릎 꿇고 수행하기 어렵게 만들 것을 보면, 그 교화와 수련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하대웅전은 장곡사에 오는 일반인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었다. 대웅전이 2개였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큐레이터 분의 설명으로는 상대웅전의 ‘철조약사여래좌상’이 국보 제 85호로 겉보기에는 다소 왜소해 보이는 부처님이지만, 전형적인 철조 불상으로 신라불상의 전통양식을 잘 따랐다고 했다. 이 외에도 또 다른 국보인 미륵불괘탱화(국보 300호)가 있으나 규모가 큰 그림이어서 설선당(유형문화재)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장곡사 방문을 통해 나는 아주 간단한 상식을 배웠다. 손에 약병을 들고 있는 부처님은 약사여래부처님으로 중생들의 병을 고쳐주는 부처님이고,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있는 분은 비로자나부처님이라는 것이었다. 각각의 사찰은 그 특징에 따라 주불로 각기 다른 부처님을 모실 수 있었고, 이곳 장곡사 상대웅전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계셨다. 수많은 절에 다니면서 부처님을 대했지만, 기본적인 상식도 몰랐던 내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장곡사에서 한 가지 더 눈에 띈 것은 큐레이터 분이 쉴 수 있게 그늘을 제공해 주는 거의 천년이 된 듯한 나무였다. 큐레이터분의 설명으로는 남자아이를 임신한 여인의 모습이라고 했다. 왜 굳이 남자아이냐고 물었더니, 윗배가 부르면 남자아이라고 하셨다. 세상에는 참 모르는 것도 많고 배워야 할 것들이 많다.
장곡사에서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에 엄나무 백숙을 먹었다. 좋은 곳에서 먹는 좋은 음식이라 그런지 게가 눈을 감출 새도 없이 먹어버렸다. 마당에 놀고 있는 삽살개 두 마리가 그리 정겨워 보였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하는 은행나무 길을 따라 주차장에 이르렀다. 주차장 바로 앞에 상점이 있었는데, 좋은 햇살로 밤을 쪼이고 있었다. 청양의 일곱가지(고추, 구기자, 멜론, 토마토, 밤, 맥문동, 표고버섯) 특산물 중 하나였다. 그 뒤로는 장승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다양한 표정을 담아내고 있는 장승의 모습이 정겨웠으며, 세계 각지의 장승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칠갑산 여행은 여러모로 즐거웠다. 산행 초보자나 여자들이 오르기에 적합한 산이란 생각을 했으며, 맑은 공기와 깨끗한 자연을 벗 삼을 수 있는 최고의 명산이었다. 옛사람들이 ‘칠악산’이라고 불르던 이유를 느낄 수 있었던 산행이었다.
"산은 다양한 열정과 취미를 가진 모든 사람을 포용해 준다."
[2009. 10. 10 청양 칠갑산 여행을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