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자의 자서전 1
양극성정동장애(조울증)를 의사로 부터 판명 받은지 40년이 되었다.
전라북도 군산에 있는 정신병원, 군산개정병원에 1980년 첯 입원 했을 때 밤새도록
악쓰고 고함을 치며 발광을 했고 그 이후로 종합병원 등 30여차래 입 퇴원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30년을 근무하고 어렵게 지탱해왔던 교사 생활을
명예퇴직을 한지도 벌서 10여년이 흘렀다.
조증상태로 붕 - 떠서 깡패같은 사람들과 밤새워 술을 마시고,
많은 사람들과 다투고 싸우고 새벽에 아는 사람 집에 가서 깨우고
말 걸고 이야기하고 차 마시고 낮이고 밤이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수도 없이 전화하며 교회를 찾아가기도 했다.
새벽 일찍 사람들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이 교회나 술집 밖에 없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을 찾아
수도 없이 돌아다니니까 발에 물집이 생겨 걷기도 힘들었다.
그럴 때면 주위사람들과 의사와 아내는
병원의 힘쓰는 사람(보호사)들을 동원하여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을 시켰다.
퇴직 후 고스톱 치러 몇번 왔다 갔다 한 것 같은데 10여년이 흘러갔다.
퇴직 후 할 일은 없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오로지
노름하는 것 밖에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돈을 잃어도 재미있고 돈을 따면 더욱 재미있었다.
그 외에는 재미있는 일이나 보람있는 일이 없었다.
먼 발치에서 아는 사람이 오면 돌아서 피해가기도 했다.
이럴 때는 대부분 우울증으로 떨어진 상태이며 주위 사람들에게는
병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제 나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한마디로 나는 절망이었다.
죽음이 두렵거나 무섭지않아 아무렇게나 행동 했으며
이왕이면 교통사고나 나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교통사고 보상금이 나와 자식들이나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돈이 전혀 없어 무일푼 이었으며 매달 나오는 200만원의 연금도
빚을 값기 위해 모두 지출 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어떻게 하면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수면제를 몽땅 사가지고 모텔을 잡아
자살 시도를 한번 해봤지만 실패했다.
한 약국에서 많이 팔지 않아 여러 약국을 돌아 다니며 많이 사서 먹은
수면제가 독한 수면제가 없고 모두 수면 유도제로 약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뇌출혈로 좌반신 불수가 된 아내의 감시가 소홀하고 무뎌진 틈을 타
조울증 약을 서너달 먹지 않았더니 바로 조증 증세로 붕 - 떠서
서울 은평시립병원에 입원하고 다시 입원료가 싼 경기도 용인시의
백암병원으로 옮겨가 연거푸 2번이나 7개월, 또 다시 퇴원 했다가 6개월 입원했다.
입원 환자가 30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었으며
이곳에서만도 10년 20년을 입원한 사람이 상당히 있었다.
퇴원해서 경기도 하남시에서 어렵게 돈을 마련해서 산 단독을 팔아
집이 없는 관계로 경기도 광주시 오포의 작은 아들 집으로 가서 살게 되었으나
가장이 되어버린 두 아들과 상의 하니 오포읍의 작은 도시의 반경 1Km 안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에 돈 한푼 없이 슬리퍼에 옷 입은체로 가출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조울증약을 먹지 않아서 조증 상턔로 붕 떠가지고 여기저기 돌아 다니며
경찰들과 싸우고 벌금 딱지를 여러개 떼고 핸드폰을 구입하면서 보상해 주는 돈으로 살다가
행정입원이라는 형태로 경찰들에게 끌려 서울시 용마산로에 있는
국립정신건강센타에서 3개월을 입원하게 되었다.
2020년 퇴원 하면서 사회복지사의 소개로 "지역사회전환시설 누리봄" 이라는 곳에 오게 되었다.
월 30만원을 내고 주거와 식사를 해결하고 6개월 내지 9개월을 살 수 있는 정부의 복지 기관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지만 1층 2층으로 되어있는 단독 집에서
16명 정도의 회원과 8명 정도의 사회복지사 선생님의 보살핌으로 번갈아 가며
밥하고 설겆이 하고 반찬 만들고 구역별로 나누어 청소하고 자주 샤워하고 의복을 갈아입고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정해진 시각에 자고 일어나는 법을 실천하고 배워 실행했다.
하루의 일과로 샤워하고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정해진 곳에서 담배 피우고 정해진 곳에 꽁초 버리는 것 등의
일상 점검과 정신질환의 여러가지 유형과 약의 효능과 부작용 공부 및
서울 여행 동아리,, 체력 증진 동아리 공예 동아리와, 회원들끼리 칭찬 하기
정해진 시각에 약 먹고 싸인하기 등의 프로그램을 65세로 가장 고령인 나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내 생각에 정신병이 사회생활 부적응 현상이라고 판단하고
여러가지 규칙과 법을 지키게하고 집안 일과 일상 점검을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나가서 일반 시민들과 같이 정상적으로 생활하고 독립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연습같아 보였다.
누리봄에 오기 전에는 내가 조울증 약을 먹는 것은, 마누라를 위해서 먹어준다고 생각했다.
당시 마누라는 항상 내가 약을 먹는 것을 감시하여 왔고
내가 약을 먹지 않으면 죽어버린다고 했는데
굉장히 강직한 마누라가 단순히 겁을 주려고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마누라를 위해서 먹어준다고 하고 하루도 빼 먹지 못하고 먹었다.
그런데 이제는 같이 살고 이야기 해보니 누리봄에 있는 회원들도 여러번
반복해서 병 증세가 나타나, 여러번 입원 했으며 조울증이라는 병에 대해서 알고 느끼고 실감하게 되었다.
지금은 약을 틀림없이 먹어야 낫는다는 생각이 들고, 내 병을 스스로 인정하여 약을 먹는다.
또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일 런닝머신을 90분씩 타며,
제일 부실하고 가끔 마미가 되는 하체를 중점적으로 꾸준히 체력단련을 하고 있다.
누리봄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재활을 열심히 하게 되면 일자리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차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내 나이 이제 65세, 옛날에 절망 상태였을 때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는데
이제 희망이 조금씩 생기니 죽음과 건강이 다시 생각되어진다.
"생각이 변하면 마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면 행동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면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이 달라지면 운명도 달라질 수 있다.
또한 뜻밖의 사랑도 만날 수 있다."
누리봄에서 내가 얻은 교훈이다.
이제 정신없는 놈에서 탈피하고 정신을 추슬러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야겠고
내 마음을 잘 다스려 재발하지 않도록 애써야겠다.
나는 1956년 전라북도 부안군의 전형적인 농촌 가정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돌이켜 생각컨데
어린 시절 명랑 쾌활하고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것으로 생각 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항상 놀기를 좋아했다.
대부분 공부 성적은 중간 정도 하면서 패치기 못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자치기 술래잡기 야구 축구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어서 배구하기 정월 보름날 오곡밥 얻어 먹기
불놀이 불싸움하기 집에서 키우던 말 잘 듣는 똥개를 데리고 달리면서 놀기
바람개비를 가지고 달리면서 놀기 굴렁쇠 돌리며 달리기
방죽에서 썰매 타기 눈싸움하기 눈사람 만들기 두꺼운 얼음을 둥그렇게
괭이로 잘라 꺼내어 썰매처럼타기 단추 따 먹기, 쌈치기로 돈 따먹기 화투로 돈 따먹기
포커로 돈따먹기 곤충 채집하기 잠자리 잡기 식물 채집하기 방죽에서 미역감기 방죽의 마름 건져서
돌맹이로 깨어 알맹이 빼먹기, 왕 잠자리를 잡아 실에 묶어 빙빙 돌리면서 숫 잠자리가 붙게하여 잡기
연날리기 수박 참외 복숭아 서리, 감자 서리를 해서 쪄 먹기 닭서리해서 삶아 먹기.
등등을 했으며 패치기를 해서 방 한 구석에 수북이 싸 놓았고
적당히 물렁한 땅에 박힌 상대방의 못을, 내 못이 땅에 박히게 하면서
상대방의 못을 쓰러트려 따먹는 못치기,
너무 못치기를 많이 하여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에서 피가 나기도 했다.
자치기를 하다 눈탱이를 맞아 피가 철철 흐르기도 했으며 명절날 배구 할 수 있는
돼지 오줌보를 얻기 위해 넓은 우물가에서 어른들이 돼지를 잡는 것을 구경하며 기다리기도 했다.
배고픈 시절에 집집에서 얻어온 오곡밥은 정말 맛이 있었고
불싸움하다가 머리를 태우기도 했으며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다가 물 속에 빠져
형들이 피워 놓은 모닥불에 말리고, 집에 돌아와서
불냄새가 심하게 나는 것을 부모님이 알아차려 된통 혼나기도 했다.
돈 따 먹기를 산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하다가 쌈지돈을 다 잃어버리기도하고
산지기한테 들켜서 꽁지 빠지게 도망 가기도 하고 눈싸움 하다가 막판에는
눈뭉치 속에 돌맹이를 넣어 던지다가 싸우기도 했다.
팽이치기로 싸움을 할 때는 닥나무 껍질로 만든 채로 팽이를 치면 딱딱 소리도 멋지게 나고
최고로 잘 돌며 연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유리병을 깨트려 바숴서 풀이나 밥을 으깬 것을 연실에 발라
친구의 연실을 끊어 멀리 날려 이기는 재미도 좋았다.
친구의 연은 가만히 있는데 내 연을 빨리 감았다 풀어 주기를 반복하면
친구의 연실이 끊어져 이기는 것이었으며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면서
신나게 노는 재미있는 놀이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말 잘 듣는 우리집 똥개를 대리고 산으로 들로 대로를 뛰어 다니는 것도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의 이치를 이때 많이 배운 것 같다.
초등학교 때 구구단을 못 외워 나머지 공부를 하고 시각을 잘못 알아
9시50분을 여러번 10시 50분이라고 답해서 많이 야단 맞은 것이 생각 난다.
중학교 때는 아무도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를 앞에 나가 칠판에 풀어서
많은 칭찬을 받았고 고등학교때 국어 시간에는 선생님과 거의 단 둘이서 수업을 한적도
있었지만 잘 했던 시간은 그 때만 반짝 잘 하고 성적은 대체적으로 중간정도였다.
항상 노는 것을 좋아한 나는 여러 친구들과 놀다가 하나 둘씩
집으로 돌아 가도 나는 마지막 남은 한사람의 친구와 어두워서 구슬이 안보일 때까지
놀다가 집으로 늦게 돌아 가서 부모님께 무수하게 야단 맞았다.
특히 아버지는 엄한 정도를 넘어 극히 무서웠으며 꼭 밥 먹을 때 야단 맞고 혼줄이 났다.
전날 전전날 집에 늦게 들어와 야단 맞았으면서 또 다음날 늦게 들어가 야단 맞는 아이였다.
부모님은 항상 "알아야 면장한다"며 공부 지상주의였는데 우등상은 한번도 받지 못하고
12년간 초 중 고에서 개근상을 받은 것이 자랑거리의 전부였다.
왜 그런지 나는 공부만 할려고 하면 졸음이 와서 집에서건 학교에서건 힘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를 졸라 6발 달린 연자세가 있었고 나무에 못 밖힌 스케이트와 썰매가 있었으며
방바닥에 앉아서 공부하는 책상과 의자에 앉아서 공부하는 테이불이 있었다.
우리 6남매는 주로 토요일 일요일이 되면 부모님의 인건비 절약 방침으로 논 밭 일을 하곤 했다.
이때 적당히 눈치를 보아 공부한다고 말씀 드리면 공부 하라고 승낙하는 때가 많았다.
고등학교는 문과 한반 상과 한반이었는데 중간 정도의 순위로 공부하는 나는 요즈음의
수능 시험과 비슷한 예비고사와, 대학 시험에 합격 하기가 곤란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용하게도 부모님과 선생님의 걱정을 뿌리치고 예비고사와 전주교대에 합격했다.
어느날 친구 집에서 놀고 있는데 아버지가 전주 교대에서 온 전보를 들고 와서는 전보에
"시력 재 검사" 라고 써 있는 것은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일 거라며 가슴 설래게 한적도 있었다.
전주 교대를 다닐 때도 중간 정도의 실력과 교사 적체 때문에 졸업후 2년 정도를 기다렸다가 발령이 났다.
수줍고 말 주변이 없어서 연애 한번 못해보고 지냈던 것이 부끄러움이었으며
1977년 25살의 나이에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초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하숙 하면서 근무를 하고 2년 정도 되는 어느 일요일날 출근을 하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가는 옆좌석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목적지의 중간 터미널에 내리기 전까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며 한시간 남짓 버스로 달렸다.
말 주변이 없어 말을 잘 하지 못하고 특히 여자와의 대화는 잼뱅이었던 내가 그럭저럭 말이 통했다.
우리는 여관을 잡아 맥주 몇병과 과자를 놓고 밤새워 대화를 하고서는 동틀 무렵에 결혼 하기로
굳게 약속하고 일주일 뒤에 만나서 먼저 나의 부모님을 찾아 가서 뵙자고 다짐했다.
깜짝 놀란 양가 부모님의 승락을 받은 우리는 몇달 뒤에 전격적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몇달을 상당히 행복하게 살던 우리 가족은 어느날 고부간의 갈등이
엄청나게 큰 것을 알고 극도로 화가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요일 아침 일찍 친구 트럭을
시골에 있는 우리집 마당에 대게 하고서 이사짐을 싣고 학교옆 어느집 별채에 이사를 해 버렸다.
천둥 번개 치듯 화가난 아버지의 용서를 받기 위해 우리 부부는 토요일 일요일이면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집 농촌으로 가서 모심은 것을 돌보기도 하고 논밭으로 점심과 새참을 날르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님은 눈 길 한번 마주치지도 않았고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결혼 후 2년 후쯤 되었을 때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병원이라는 정신병원에 첫 입원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퇴근해 보니, 학교 옆에 있는 우리 가족 셋이 사는 집에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시는 당숙과 작은아버지와 아내가 빙 둘러 앉았다.
으아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고 빙 둘러 앉은 우리에게
회의를 하자며 아버지께서 어렵게 말씀을 꺼내셨다.
학교 생활은 어떠냐고 서두를 꺼내면서 불만이 무어냐? 술은 얼마나 먹느냐? 등 질문을 하셨다.
술은 동료 선생님들과 주로 먹고 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놀이의 공도 충분히 사 주지 않는다고 적당한 이유를 대었다.
사실은 아버지는 일찍 오셔서, 내가 살고있는 바로 옆집에 사시는, 또한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과 친한 작은 아버지와 아내로부터 평상시에 내가 술을 너무 마시고 또한 싸움도 하고
교장에게도 마구 대들고 싫은 말을 여러번 했다는 말을 들은 뒤였던 것이다.
또한 부부 싸움도 지역사회의 눈이 있으니까 소리 안나게 날새기 하며 싸우고
다음날 수업을 하는데 졸음이 와서 내가 담임인 우리 5학년 학생들을 자습 시켜 놓고
그 교실 교사용 책상 아래에서 잠을 자다가 교장선생님에게 발각 되어 혼줄이 나기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무슨 병원인지도 자세히 모르고 진찰만 이라도 받아보고 가자는 말씀에 대답을 하고
의사 선생님과 대면하여 몇마디 대화도 하지 않은채로 입원 감금 되게 되었다.
이 곳 군산시 개정정신병원에서 두달 정도를 보내며 독한 약을 먹고 더 강한 주사를 맞아
조증 상태로 들떠있던 정신과 육체가 좀 진정 되어 가지고 퇴원했다.
발악을 하며 지낸 기나긴 병원 생활도 잠깐 동안에 지나 갔고 가정과 학교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지역사회와 교장선생님과의 불협화음으로 더 지내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경기도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많이 필요하여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내신하게 되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밑의 조현초등학교에 부임해서 근무하게 되었고
전 근무지에서부터 키우고 관리해 왔던 몇통의 양봉 벌통도 관리하고 키우게 되었다.
세들어 사는 집 여주인과 선생님들에게도 분양하여 양봉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이곳에서 2년을 근무하고 다시 경기도 하남시로 전근하면서
나의 교사 생활과 정신병원 생활은 시작 되었다.
교직 생활 합계 30년 경력에 10개의 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또 퇴직 하고서 다닌 정신 병원, 입퇴원이 30여번이었다.
나는 플러스 마이너스의 양극을 달리는 양극성 정동장애로, 기분장애로,
다시 말하면 기쁠조, 우울할 울의, 한자말을 딴 조울증이라는 정신병으로
조증일 때는 성격이 날카롭고 난폭하며 말이 많고 술을 많이 잘 마시며
몸과 힘이 엄청나게 좋아지고 대소변이 잘 나오며,
우울한 울증일 때는 말을 별로 하지 않고 목욕과 머리 감기가
무척 힘들고 하기 싫어 한달에 한번 샤워도 하고, 일주일에 한번 정도
머리를 감기도 하여 비듬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울증일 때는 별다른 사고도 치지 않으니 병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가도
조증으로 뜨면 정신병이라고 했다.
또한 나는 평생을 자그마한 단추 따먹기 놀이에서 부터
좀더 큰 돈 따먹기 고스돕 지고땅 섯다 포카를 하고 살았다.
보통 3점에 1000원 내기의 고스돕을 쳤는데 최고 크게는
300만원을 테이불 위에 올려 놓고 포카 도박을 하기도 했다.
거의 대부분은 전부 잃는 때가 많았다.
이 때 아는 사람에게 조금 빌려 달라고 하면, 학교 재직시에는 잘 빌려 주던 사람들이,
학교 퇴직 후에는 빌려 주지 않아 얼굴이 화끈화끈하고 정말 챙피 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말씀 하시던 놀음 하는 놈은
낳지도 말고 상대 하지도 말라는 말이 생각난다.
전주교육대학을 다니던 때 부터 풍금과 컴퓨터와 영어가 아주 서툴렀고
상사 비위 맞추는 것을 몰랐던 나는 30년 교직 생활을 퇴직 하기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힘들었고 교직원들과의 유대도 힘들었다.
그러나 전과목 중에서 도덕은 누구 보다도 잘 가르쳤다고 생각했다.
이제 학교사회와 지역사회의 왠만한 사람들은 내가 정신병원에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행동 했으나
골목길에서 아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것 같으면 돌아서 가기도 했다.
1990년도 쯤에는 국회의원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의 하나로 인터넷 카페의 회원이 1만명 쯤만 되면
국회의원 출마 당선에 도움이 될것 같아서 인터넷 다음에
그 근방 지역 명칭에서 힌트를 얻은 "덕풍골당" 이라는 카페를 만들었다.
"덕풍골당"이란 덕과 사랑의 풍성한 바람이 일어나갸 시작하여
그 기운이 널리널리 번져가는 고을당, 골짜기 당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회원 모집도 어렵고 카페 활동도 힘이 들어 150여명의 회원을 끝으로 취미를 잃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 동안 생각하고 느낀 점을 바탕으로 자그마한 책을
"주인 없는 땅에 똥 싼 개" 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여10여명의 친지와 지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기도 하남시 시청 대회의실에서 출판 기념회를 갖기도 했다.
"주인 없는 땅에 똥 싼 개" 라는 말은 개는 더럽고 전봇대 밑 같은 지저분한 곳에
한 다리를 들고 똥 오줌을 싸는 버릇이 있다.
이와같이 질서가 없고 더러운 곳은 마치 주인이 없는 곳과 같다.
주인이 없는 곳은, 다시 말하면 주인 정신이 없는 곳은, 더럽고 질서가 없으며
도둑을 맞아도 무엇을 도둑 맞았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주인이 없어 관리도 하지 않고 정성을 들여 보살피지도 않기 때문이다.
국가에 사회에 직장에 학교에 가정에 주인 없는, 주인정신이 없는 곳이 많다.
특히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닌것 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나 자신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돌보고 가꾸고 열심히 공부하고
착하게 살려고노력하며 끊임 없이 수양해야 할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주인 없는 땅에 똥 싼 개"는 당당하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더러운 곳에 똥 오줌을 싼다 라는 뜻이었다.
상당히 많은 책을 나누어 주고 팔았으나 어느날 내 책을 다시 보니 챙피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남은 내 책을 아무도 보지 않는 밤에 몽땅 내다 버렸다.
또 동료들과의 술 자리에서 불쾌하게 대하는 선배 선생님을 혼내 준다고
신체 건장한 내가 힘으로 해도 될 것을, 부억칼을 들고 난동을 부린적이 있었으며
체육 시간에 나의 학생 지도 방법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책망한 선배 교감선생님을 크게 혼내주고
난동을 부려 마누라가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손이 발이 되도록 빈 적도 있었다.
한글 서예에 취미를 붙여 집과 학교에서 남는 시간이면 한글 서예 연습을 열심히 하기도 했다.
마땅한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고 모든 한글 서예책을 사서 혼자서 익혔다.
정자 흘림 진흘림을 연습하고 예서체도 연습하여 이사람도 주고 저 사람도 주고,
처음으로 써서 표구한 액자를 선물 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정말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해서 슬그머니 떼어다가 버린적도 있었다.
하남시 덕풍 5일 장날 한쪽에 책상을 놓고 무료로 가훈 같은 짧을 글을 써 주기도 했으며,
시청 민원실에 잛은 가훈 같은 글을 써서 놓아 가져 가게도 했으며
많은 시간이 흘렀던 어느날 엤날에 다녔던 교회에 가니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글을 정자와 예서체로 써 놓았는데,
매우 잘 써져 있어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내 이름과 호가 써 있었으며
낙관이 찍혀 있어 나도 괜찮케 쓰는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서울시 순천향 종합병원에 입원 했을 때는 의사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붓과 지필묵을 갖추어 병원에서 서예 연습을 하며 수양 한다고 써서,
입원실에 있는 많은 정신병 환자에게 나누어 주니 여러 곳에 많이 붙였다가
의사선생님의 지적을 받고 한두장만 붙이기도 했다.
명에퇴직한 후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아내가 대지 32평의 단독 정2층
슬라브 집 달아낸 곳에서 공업용 미싱3대를 놓고서 미싱 작업을 하고
홈패션과 침대포 재단 사우나실용 베게를 만들어납품 하는 것을 도왔다.
또 급하게 들어 오는 미싱 작업을 어렵게 배워서 조금씩 하고 아내의 여러가지 미싱 작업을
도와 하루에 15000원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
도대체 돈이 모아지지도 않고 재미 없고 보람도 없었다.
일주일의 힘들고 보람없는 일을 마치고 토요일과 일요일엔 마누라한테 승락을 받아
50000원 정도를 받아 가지고 고스돕하는 장소로 달려 갔다.
그래도 이날은 해방된 재미있는 날이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돈을 모두 잃는 날이면 누가 돈을 빌려 주지도 않아
챙피한 마음으로 구경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느날 고스돕을 늦게까지 치고 돌아와 밤3시쯤 안방에 들어서느데
아내가 가로질러 누워서 더듬는 말로 "화장실을 못 가서 그냥 오줌이 나왔어" 라고
어눌한 말로 하는 것이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마누라 남자 친구이고 나도 잘아는 분 한테
전화를 했더니 바로 뛰어 와서 상태가 이상하고 다급한 것을 깨닫고,
구급차를 불러 평소에 다니던 서울시 아산종합병원으로 달려 갔다.
간단한 진료를 하고난 의사선생님은 뇌출혈로 보이는데 자기 병원에선 응급실도 꽉 차있고
입원실도 없어서 치료하고, 입원 할 수 없다며 서울시 한양대 대학병원을 추천해 주었다.
한양대 대학병원에서 뇌출혈 수술을 받고서 깨어 나지 않는 아내를 보고,
두 아들과 친구와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많은 시간이 흘러 깨어난 아내를 중환자실에 두고 집으로 돌아온 뒤 두 아들은
거의 한장도 버리지 않은 영수증과 통장을 놓고 보면서 컴퓨터에 기록하고 찾아 보면서
빚은 얼마이고 돈은 얼마가 남아 있는가를 빠짐 없이 계산해 내었다.
나의 방탕한 생활로 빚은 터무니 없이 많아서 현금 서비스를 받아 가며 돌려 막기로
생활해 왔고, 모든 것은 아내가 총괄하고 나는 고스돕이나 치며 맥 없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얼마의 빚이 있고 어디어디에 갑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 하기만 했다.
가지고 있던 집도 팔아야 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남는 돈도 없었다.
아내와 나는 1년이 넘게 재활병원에서 재활에 모든 노력을 다 했으며
꼬박 2년의 재활병원 생활을 마치고 더이상 재활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고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요양원으로 옮겨 요양 하기로 했다.
아내도 장애 2급 나도 장애 2급이었다.
아내는 신체 불구자 나는 정신 불구자.
아내는 처음 의사 선생님의 소견대로 별로 좋아진 것은 없었으며
완전한 좌반신불수로 휠체어를 타야 이동 할 수 있었다.
오른쪽 뇌가 터져 왼쪽 눈, 왼쪽 코, 팔 다리, 항문까지
좌측이 마비 되었고 다행히 언어에는 별 지장이 없었다.
특히 화장실에 갈 때와 목욕 할 때가 힘들어서
마누라와 친하게 지내는 남자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재활병원에서 처음에는 말 없이 한탄을 많이 했으나
차츰 농담하고 이야기하고 웃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가 자라고 살았던 가정은 우리집 보다 더 부자로 사는 비슷한 농촌 환경 이었으며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장인 어른은, 무지하게 싸나운 본처로부터 자식을 못나,
일찍 남편을 잃은 친 장모는, 어린 두 남매가 딸린 자식을 데리고 장인 어른의 자식을 낳아 주기로 하고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결혼식도 하지않은체 재혼 했으며
두 남매를 가르치고 논밭도 주기로 약속 했었다고 한다.
처가집에서는 자식을 못나는 관계로 장인 어른의 형제의 아들을 이미 양자로 들여
아내와 완전히 배다른 오빠가 있었고,친 장모로부터 세 딸과 막내 아들을 낳게 되었다.
매우 복잡한 가정 환경임에도 어려서 입양 된것 같은 아내는
그곳에서 굿은 일 하지 않고, 친 남동생과 달리 사랑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내는 선생님으로부터 대단한 신임과 사랑을 받았으며
동내 주민들과는 잘 소통하고 친구들과는 원만하게 지냈다고 한다.
나의 눈에 미인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키에 믿음직스럽고 철저하고 순박한 여인으로 보였다.
홈패션 미싱일도 거의 한번도 실수 하지 않았으며, 거의 모든 전화 번호를 적지 않고 외웠다.
재활병원에서 아내는 침대 위에서 자고, 나는 그 아래에 간이 침대를 놓고 자며 같이 병원 밥을 먹고 지냈다.
말은 또렸하게 잘 하는 아내는, 할 일 없고 심심하니 서로의 이야기를 다 털어 놓게 되었다.
우리에겐 어쩌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결혼해서 많이 사랑하고 즐겁게 살자고 약속 하기도 했다.
뇌출혈 수술을 받은 아내는 이젠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말 소리는 약간 어눌해졌고 날카로웠던 시선과 통찰력과 고집이 많이 줄어 있었다.
그렇게 많이 외웠던 전화 번호를 거의 다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 틈을 타서 번개같이 뇌리에 스치는 것은,
이제는 아내 모르게 여지껏 먹어 왔던 정신병 약을, 먹지 않고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별로 독하게 먹지도 않은약을, 무엇을 빼고 먹어야 될지를 몰라서, 처음에는 5일 먹고 하루 띠고
한참 지나서는 4일 먹고 하루 빼먹고, 한참 지지나서는 3일 먹고 하루 안먹고
나중에는 전혀 먹지않고 버텼다.
하루만 먹지 않앋아도 잠이 잘 오지 않는데 몇번을 먹지 않았더니 정말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약을 먹지 않는 날이 많아지자 온 밤을 뜬 눈으로 지샛다.
간이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핸드폰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했고 어떤 날은 코인노래방에 혼자 가서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또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가 옥상으로 하늘공원에 올라가 담배를 여러개씩 피워 댓다.
모든 행동을 할 때는 병원 관계자나 사람들 모르게 행동해야 했다.
자칫 잘못해 아내가 알면 하루 아침에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이며
병원 관계자가 알아도 이상하게 보여 병원에서 축출 당한다면, 만사 도로아미타불 이었다.
그야말로 완전범죄가 되어야 했다.
잠을 자지않고 여러날 조용하게 밤을 지새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끝까지 이를 악물고 참아 냈으며, 몸에서는 점점 힘이 강해지고
항상 반 설사로 나오던 대변이 아주 곧게 잘 나왔다.
대변을을 보고 나서 화장지로 밑을 닦으면 묻어 나오는 것이 별로 없이 깨끗했다.
굉장한 조증 상태가 되는 것을 느꼈고, 나름대로 쾌재를 불렀다.
한참 지나서 이제는 건강과 힘이 생겼다고 판단하고 일 자리를 알아 보았다.
마침 병원에서 내가 간병하던 것을 한 사람이 여러 환자를 간병하는
공동 간병으로 하지 않겠느냐는 문의가 들어 왔다.
아내와 두 아들에게 공동 간병을 하고, 내가 간병비를 벌어서 충당한다고 하니
아내가 더욱 기뻐하며 많은 기초 자금을주어 또 한번 기쁘기 한이 없었다.
자유가 이렇게 좋은지 처음 아는 사람 같았다.
나는 직업소개소에 나가 막노동을 해본 경험을 살려
막노동을 하기로 마음 먹고 직업소개소에 새벽 5시쯤 방문 하여
소장님에게 나 같은 사람도 일 할 수 있는가 물어 보았다.
위 아래로 훌터본 소장님의 출근 하라는 말씀을 듣고
안전화와 작업복을 사고 바로 직업소개소 옆 고시원에 방을 얻었다.
일인실인 고시원에 짐을 풀고 누우니 홀가분하고 내 세상이 왔다고 생각 했다.
막노동을 3일 일하고 점심도 얻어 먹고 10%를 떼고 33만원을 벌었다.
큰 돈이었다.
다음날 일요일 하루를 쉬기로 하고 하남시 노름방에 가서 놀고
막노동판의 돈 벌이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몇일 후 교회 집사님의 소개로 단독 정 2층 집에, 1층의 반을
보증금 없이 월 30만원에 깨끗한 방 2개 짜리를 구할 수 있었다.
갑자기 옛날에 사귄 전국구 깡패인 해결사 동생의 도움으로
자칭 무에서 유를 창조 한다는 해결사는 여기저기 아는 사람에게서
TV, 컴퓨터, 초 소형 냉장고, 자기 집에서 쓰던 밥통 겸 밥솥, 전기 냄비
밥그릇 수저, 약간의 쌀, 겨울용 열풍기 가스버너, 약간의 라면과
여러가지 자기가 입던 옷을 가져 오고, 구두를 가져오고, 못과 벽돌로 옷을 걸수 있게 만들고
깨끗한 단스를 길거리에서 주워와 치장하니 그럴싸한 방이 되었다.
나도 해결사 동생에게금전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처음에는 깨끗한 방 두개와 방바닥에 놓은 옷이 전부였었다.
그 동생은 낮에는 잠자고 밤에만 돌아 다녀서 밤의 대통령, 또는 이순신이라고 별칭을 썼다.
밤 늦게 둘이 앉아 끓여 먹는 라면이나, 카래가 그렇게 맛이 있을 수 없었다.
돈이 없어도 던힐 담배와 달걀 라면, 봉지 커피는 항상 준비를해 놓았다.
궁할 때는 이쪽저쪽 놀음판에서 삼천원 오천원씩 얻어서 2500원 짜리 짜장을 사먹고 담배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문은 잠그지 않고 항상 개방해 놓았으며
잠은 두세시간만 자도 충분했다.
밤중에도 잠이 깨면 이 시간대의 하남시는 어떤가 하고 빙 돌았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으며 돌아 다녔다,
그러던 차에 일찍 이혼하고 기초생활수급자이면서, 나와 똑같은
조울증 환자인 세째 친 남동생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6살 젊은 친 남동생도 나와 같은 시기에
조울증 약을 갑자기 끊고서 연속으로 17일을 잠을 자지 않았다고 했다.
나의 친 남동생은 항상 자그마한 오토바이를 타고 경찰이 있건 말건 전속력으로 달렸다.
승용차는 갑갑해서 못 탄다는 이 동생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과 사당동이 본거지였다.
오래 전부터 선식을 하고 단방약을 연구한 동생은 허준으로 호칭 하기도 했다.
우리 세 별종은 서울시 여기저기 노래방, 단란주점에서 여자까지 불러
술마시고 노래하고 요란 뻑적지근하게 춤췄다.
항상 돈은 수급자인 남동생이 지출하였으며, 자기가 잘아는 무허가 치과 기공소에서
나와 밤의 대통령인, 해결사에게 틀이를 선물해 주었다.
우리 두 별종은 정말 고맙고 기분이 좋았으며 금전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조증으로 기분이 붕 떠 상승하면 노래와 춤도 잘 나왔다.
서로 자기가 제일이라며 떠들었고 내가 총 대장격 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항상 샤워를 하고 시내로 산책을 하던 어느날
중년의 여성에게 "건강 하십시오" 라고 인사를 했는데
이 여자가 갑자기 "왜 기분 나쁘게 말거냐" 고 시비를 하여 다툼이 생겼다.
급기야 경찰 두사람이 와서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여자는 주민등록증도 없고
주민번호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여, 여자는 돌려 보내고 오히려 항상 목청이 큰
나에게 5만원짜리 고성방가 벌금 딱지를 끊게 하였다.
화가 난 나는 이 파출소 순경을, 같은 관할 하남시 경찰서에 고발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며 택시를 잡아 타고 경찰서로 달려가 고발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것들이 잘 안되고 사정관실에서도 잘 안되어
최종적으로 민원실에 가서 다시 고발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또한 주위에 있는 경찰들이 나를 해칠려고 하는 것 같아
항상 적당한 간격을 두고 조심했으며 수상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
간첩 같다고 신고를 해서, 두군데 파출소에서 출동을 하고도 별 효과가 없어
경찰청과 또 청와대까지 신고를 해도, 전화를 받지 않거나 담당자가 없어 적당한 처리가 안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라와 경찰이 썩었다고 외치기도 했다.
그래서 또 혀위로 간첩 신고를 했다고 재판을 받고 벌금을 내야 했다.
나는 내가 매우 중요한 사람이고, 구원자가 따로 있느냐.
많은 사람을 구원 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 하여 노력 하면
구원자가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시내를 배회했다.
고시원에서는 내방에 쓸모 없어 보이는 붉은 벽돌이 3개나 있고
오래된 작은 냉장고의 선반이 날카롭고, 입구에 방치 되어 있는 소주병들은 유사시 무서운
흉기로 변하여 나를 해칠 것 같아, 모두 복도의 한군데로 내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된 고시원의 여주인은, 힘세고 사납게 생긴 사람을 대동하고 나타나
방세를 돌려 줄테니 나가라고 해서 쫒겨 나기도 했다.
또 험상굳게 생긴 여호와 증인 같은 많은 사람들이 골목골목에서 핸드폰으로 통신하고
나쁜짓을 하려고 한다며 대책을 세워야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한밤중에 큰 대로변에서 험상굳게 생긴 사람과 추하게 생긴
악마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하게될 나를 해치려고 몰려 온다고 생각하고 느껴
커다란 목소리로 우리편이 모여들고 또한 모여들 것처럼
"구름처럼 모여라 바람같이 흩어져라" "도망 가는 놈 비겁한 놈이다"
"도망 가는 놈 쫒지 마라" 라고 아주 큰 소리로 외쳤다가 또 딱지를 떼었으며
나에게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아 졸음이 몰려 오면, 여기서 잠들면 중요한 일을 하게될
나는 죽는다고 생각해 줄 담배를 피우며 잠을 쫒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우리가,
아니 내가 수많은 악한 무리를 물리쳐 승리 했다고 생각했다.
우리세사람이 노래방에서 놀고 돈을 다 지불하지 못해 또 재판을 받았다.
2019년에는 국회의원에 출마 한다고 명함을 만장찍어서 여기저기 돌렸다.
선관위를 몇번이나 가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알아 보고
선거법에 걸리지 않도록 명함을 만들어서 선거법에 걸리는 사전 선거 운동을 하며 돌아 다녔다.
버젓이 동사무소와 시의회와 시청 전직원에게 돌리기도 했다.
사무실 마다 가장 높은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돌려서인지 한명도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최신식 핸드폰은 술집에서 잃고, 택시에서 빠트려 잃고, 자꾸 잃어버려 전액 외상으로 구입하고,
만이천원에 증명사진을 찍고, 동사무소에 오천원을 내야 하는, 비싼 돈이 들어가는
주민등록증을 잃어 버려 여러번 재발급 받았다.
갑자기 경찰들에게 서울시 국립정신건강센터에 강제로 행정입원하게 되었으며 3개월 후
정부의 복지기관의 하나인 사회복지전환 시설이라는 "누리봄"에서
한달에 30만원으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게 되었다.
"사회복지전환시설 누리봄"에 거주 하면서, 두 아들과 사회복지사겸 심리치료사인
담당 선생님이, 법적인 문제와 금전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었다.
이 때는 이미 조증의 증상이 가라 앉아 정상적인 사람 같이 되었다.
국내에는 아주 강한 전염병 "코로나19" 로 인하여 경제적 사회적으로
크나큰 타격을 입었고 요란한 태풍으로 시장과 거리는 적막하기 그지 없었다.
우리16명은 산책도 외출도 못한체 답답한 9개월을 보내야 했다.
우리 6남매 중 3형제는 잘 살지 못했고
3자매는 잘 살고 있으며 6남매 모두 서울에서 살고있다.
부모님은 당연히 병증이 가장 심한 장남인 나에게 기대가 컸을 것이고
많은 사랑을 쏟고 엄하고 무섭게 키웠을 것이다.
나와 똑같은 조울증 정신병인 세째 남동생은
병의 원인이, 우리가 특히 어렸을 때 부모님이 너무
무섭게 하고, 매일 공부를 잘 해야 한다고 닥달을 하고
기를 펴지 못하게 하여 생긴 병이라며 의견이 일치 되었다.
우리 말에 "허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오내" 라는 말이 있듯이
특히 어렸을 때 또는 여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엄하고 무섭게 하고 자유를 속박하면 정말로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온다.
친한 친구지간에는 막힘 없이 잘 표현하고 말 하던 사람이
부모 자식간이나 남여간이나 스승 제자 사이에 있어서는
말이 없고 말을 안하고 못하고,
질문과 감정의 표현을 못하고,
사랑 할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랑을 표현 할 줄 모른다.
"저 녀석 말 문이 터졌구나" 라는 어른들의 말씀도 있다.
그러나 결국 병의 원인은 나 자신에게 있는것 같다.
부모나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
받아들이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것 같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있을 때
담당 의사선생님이
"당신은 깊은 우물에 빠져 있는 것" 과 같으며
"깊은 우물에서 동아줄을 잡고 나와 주위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고 말했으며
"유전이 아니면서도 유전 처럼 이어진다" 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바다와 같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 고도 했다.
어떤이는 부모가 지극히 사랑했는데 자기는
사랑을 전혀 받지 못 했다고 생각 하는 사람도 있다.
누리봄에서의 생활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었다.
아침 7시 30분에 기상하여 일상 점검하고 여러가지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12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 6시에 저녁을 먹고 오후 10시에 취침 하였다.
투약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식후에 먹는데 꼭 싸인을 해야 되었다.
돌이켜 보건데 나의 병은 "양극성정동장애" 라는 말의 뜻대로
생각, 기분, 마음, 감정, 신체의 건강 등이
항상 플러스 마이너스의 양극을 달리는 사람 같았다.
"너는 왜 술에다 술탄듯 흐리멍텅 하냐?"
"젊은 놈이 벌떡증나게 그렇게 오래도록 늦잠을 자냐?"
"모르면 시켜 주고 높은 자리에 앉혀 줘도 못 한다."
"알아야 면장 한다."
라고 아버님은 말씀 하시곤 했다.
어렸을 때 부터 무척 책을 좋아 했으며 만화책 무협지를
밤이 새도록 눈이 침침하고 아플 때까지 읽었다.
어쩌면 천진난만하고 자유분방한 개구장이가
아버님 덕택에 전주교육대학까지 졸업하고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선생님이 되었지만
지극한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조금도 사랑을 받지 못한것 처럼 생각하고 느꼈다.
그놈의 공부 때문에.
어쩌면 꼴찌 가는 학생은 그 학생에게 맞는
스승이나 교육방법을 찾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내가 부모님에게 반항 하고 차근차근 따지고 이해 시킬줄 몰라서
아무 말 없이 이삿짐 싸서 집을 튀쳐 나올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양극성정동장애인 나는 울증 즉 마이너스 상태일 때는
흐리멍텅 하고 우유부단 하며 통솔을 할줄 몰랐고
마치 자동차에 기름이 떨어져 동력이 귾어진 것같은 상태가 된다.
조증 상태 즉 플러스 상태일 때는 날카롭고 결단력 있으며
말 잘하고 통솔력 있으며, 감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변하는 것 같았다.
조증 증상이 생길 때, 나는 느끼며 알기 시작 하지만
울증 상태일 때는 힘이 없어 머리 감기가 싫었고
간신히 비듬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일주일에 한두번 씻었으며
조증 상태일 때는 힘이 넘쳐 매일 새벽에 샤워하고
청결에도 힘쓰며 오래도록 입던 의복도 자주 갈아 입는다.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여러가지 생각이나 사색을 하게 되고
찰나적인 순간에 아이디어가 생각나곤 한다.
의사선생님과 주위 사람들은 없던 힘이 갑자기 강해지고
말 수가 늘고 감정이 풍부하고 눈물을 자주 흘리는 것 등은
사상누각, 즉 허공중에 지은 집 같이 헛 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조증 상태가 되어 모든 힘이 왕성 해지는 것은
위와 장, 콩팟 등의 작용이 정상인 처럼, 아니
폭발적으로 몇십배 강한 활발한 작용을 하는 것이며
항상 반 설사로 나오던 대변이 정상적이고 아주 좋게 나온다 고 생각하고
마치 에너지, 즉 기름이 없어 달리지 못하는 자동차가
동력, 즉 기름을 주유해서 전 속력으로 달리는 것 같다고 본다.
그러니 가끔가끔 실수를 하고 과대 망상이 생긴다.
남 동생이 연속 17일을 자지않고
정상 생활을 했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있으며
조기축구를 좋아하는 동생은축구 할 때 날아 다닌다고 한다.
기억력 암기력이 아주 나쁜 나는
응용력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
조선시대의 철학자인 이황과 이이의 말씀이 생각 난다.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을 주장한 것을 살펴 본다.
이치이, 기운기, 하나일, 두이의, 한자말을 풀어보면
이기이원론은 이와, 기가 따로따로 둘로 존재하며 작용하고
이기일원론은 이와, 기가 한 몸이다, 라는 말이다.
즉 이치, 공부를 잘 해야 기세가 세어지고
기세가 있어야 공부를 잘 한다 라고 풀 수 있다.
어릴수록 눈은 카메라 같고 귀는 녹음기 같으며
입은 스피커같아 천재 아닌 아이가 없다고 한다.
다만 표현을 하지 못 할 뿐이고
어른들의 방식과 여러 사람들이 정해 놓은
방법과 수식을 모를 뿐이다.
다만 많은 사람과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자랄수록 천재를 바보로 만들어 간다는
학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교육을 사랑으로 하고
사랑을 교육적으로 해야 된다.
교육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가 될른지 모른다.
많은 어린이들이 조기에 언어를 배우고 있어
기억력과 습득력이 좋은 어린이에게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어릴수록 자연과 친해져
자연스럽게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언어를 공부해야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알면 행하라" 라는 말이 있다.
알면서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데
어릴수록 아는 것을 실천하고
규칙과 법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지필평가가 아닌 행동평가에 힘쓰고
학교와 사회에서 바른 행동을 했을 때
적당히 보상을 하는 것 같은
행동평가 방법을 연구하여 실행해야 할 것이다.
이제 정의가 바로 서야 되고
배운 사람일수록,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작은 규칙과 법도 꼭 지켜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정신 빠진놈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고 싶다.
젊었을 때의 내가 아닌
66세의 노인으로도
희망과 꿈이 있는 정상적인 사람,
사람이고 싶다.
적당한 직업을 가지고
나 홀로 독립하고
나라와 사회에 봉사하는
신체와 정신과 마음이 건강한
보통 사람이 되어 살고 십다.
날이면 날마다 사정없이 행복 하소서
긴 밤 지새우고 잠 안 오는 별이 빛나는 밤에
무심 최연호 씀
임시주소 서울 광진구 용마산로 25길 10 지역사회 전환시설, 누리봄
최연호, 김대현, 이미나 02 - 465 - 7065
20년 10월 5일 까지의 주소임
첫댓글 저보다 연세가 좀 있으신데 필체와 안정적인 글들이 개인적으로 많은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감있고 좋을글 짧게나마 잘 보고 갑니다.
저의 글을 관심을 가지고 읽어 주시고
댓글까지 달아 주셔 감사, 감사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사정없이 행복하세유.
귀중한 글 반갑습니다.
공감해주셔서 감사 감사감사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사정없이 행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