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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어등산나무꾼 추천 0 조회 190 16.05.19 15: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당 이회영  일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말할 때 백사 이항복의 11대 후손인 우당이회영(1867~1932)

집안을 빼놓을 수 없다. 8대를 이어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던 이 집안 6형제는 나라가 망하

1910년 12월혹한에 59명의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 에 뛰어들었다.현재

시가로 따지면 6백억원에 이르는 3만섬의 재산을 처분하고 나서 였다.

 

 

 국내에서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이역땅에서 펼친 우당 일가의 치열한 독립운동 뒤엔

아나키스트적 삶을 살았으면서도 지도층 으로서의 명예와 책무를 위해 재산은 물론 형제들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았던 처절한 가족사가 숨겨져 있다. 역사상 전례가 드문 우당 일가의

숭고한 독립투쟁은 지배층이 그에 걸맞은 사회적·도덕적 책무를 외면하는 이 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으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사진은 유하현 삼원보 유가가 지방 에 세운 싱흥무관학교 이다 .)

 

◇6형제 중 5형제가 순국=우당의 6형제 중 5형제가 사실상 중국에서 순국했다. 이회영은

마흔네살, 이던 1910년 만주로 망명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 20년이넘게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마련한 자금이 떨어지고 난 뒤 22년 독립

운동의 세월은 가난의연속이 었다.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91)에 따르면“1주일에 세끼를

먹으면 잘 먹을 정도였지만 궁핍이 아버지의 독립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1932년 11월 이회영은 무등(武藤) 관동군 사령관 암살과 한·중·일 아나키스트들의 공동

유격대 결성 등을 위해 만주로 가던 중 대련(大連) 수상 경찰에 붙잡혀 고문치사 당하고

만다. 환갑이 훨씬 지난 예순여섯의 나이였다.

 

 

   ( 따리엔 < 대련: 大連> 항만 과 당시 이회영 선생을 검거한 수상경찰서<水上警察署>)

 

6형제 중 첫째 이건영(1853~1940)의 둘째 아들 이규면(1893~1930)은 신흥학교 졸업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 병사했다. 이건영의 셋째 아들 이규훈(1896~1950)은 만주

에서 독립운동한 뒤 귀국, 국군 공군 대위로 복무 중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제일 가는 재산가였던 둘째 이석영(1855~1934)은 자신의 농토를 팔아 망명생활비와

경학사·신흥학교 창설 운영 자금에 보탰다.

 

 

독립운동 자금 등으로 재산을 다 쓴 이후 중국 각지를 홀로 떠돌아 다니다 상해에서

사망했다. 이석영의 장남 이규준(1899~1927)은 김원봉 의 의열단원 으로 이해명 과 함께

밀정 김달하와 박용만을 암살하고 한구(漢口)에서 독립운동하다 20대 나이에 병사했다.

 

  

   

     (사진은 박용만 , 하와이 의 대조선군단을 이끌다 이승만 의 모략충돌 로 중국에 와서 암살을 당했다 .)

 

 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일한 셋째 이철영(1863~1925)도 병사했다. 넷째인 이회영의 둘째

아들 이규학(1896~1973)은 사촌 이규준과 함께 밀정 암살에 가담했다. 셋째 아들 규창은

친일파 암살사건으로 경찰에 체포, 13년의 징역을 살다가 광복 뒤 석방됐다. 만주북경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섯째 이호영(?~1933)은1933년 소식이 끊겼다. 이호영의 아들이규황(1912~1933), 이규준(1914~1933)도 함께 실종됐다. 6형제 중 유일하게 고국으로 돌아온

 

다섯째 이시영(1869~1953)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광복 뒤 초대 부통령까지 지냈다. 하지만

이승만의 전횡에 반대하며 결국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 학살사건 등 , 이해할수 없는
1인 천하 의 독재만행에 부통령직을 사임,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가문의 전통을 보여주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아나키스트로서의 이회영은 덜 알려진 편이다. 2000년대 들어서야

그의 사상적 측면이 조금씩 조명받기 시작했다.이회영은 만주 독립운동 시절 우리 민족의

사회 건설 방향에 대해논의하면서 ▲자유 평등의 사회적 원리에 따라 국가·민족간에 민족

자결의 원칙 수립 ▲독립한 민족 내부에서 자유 평등 원칙 실현 ▲독립 후 지방 분권적 지방

자치제 확립·지방 자치제의 연합으로 중앙정치 구조 구성 ▲일체 재산의 사회화 및 사회적

계획 아래 관리▲교육의 사회적 공영화 등을 주장했다.   이회영은 일제뿐만 아니라 모든

독재를 배격했다. 스탈린 체제가 독재로 나타나자 공산주의 와도 분명한 사상적 선을

그었으며 권력다툼의 모습을 보이던 임시정부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의 저자 이덕일 한가람역사 문화연구 소장은 “이회영은

민족주의적 아나키즘’을 추구했다”며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주의’가 아닌 억압당한

자로서 독재에 저항하고 되찾고자 하는 의미의 민족주의였으며 독립후에는 민족간에

호혜평등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이 소장은 “해방의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시대, 그것도 이름 있는 양반가 출신인 이회영

이 자유와 평등, 인간의 참된 해방을 지향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는 것은 경이”이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 체제의 문제점이 많이 드러난 현 시점에 자유 평등에 기초한 그의

이상과 신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말했다.

 

PARK DONG SHIN  
 

[출처] [경향신문] 명문가의 삶 접고 이국땅서'순국한 5형제'
(개혁뉴리더! 이종걸 지지모임)
|작성자 박동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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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독립항쟁사에 3번째로 손꼽히던 대부호(大富豪)가

전재산을 털어 온가족이 독립운동에 매진한 집안은 유일하게

이회영(李會榮)집안 뿐이다 .

 

              망명한 명문가(名文家) 대부호 (大富豪)

 이회영의 본관은 경주(慶州), 호, 우당(友堂) , 서울 저동(苧洞)에서 1867년3월17일 출생 ,아버지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유승 이며 그의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은 일찍부터 개화사상

(開化思想)을 받아들여 결혼식도 교회에서 신식으로 올렸다 , 여성의 재가(再嫁)를 터부시 했던 그

시대에 과부된 여동생이 사망한 것으로 꾸며 부고를 내고 재가를 시켰고 .초대 부통령

이시형(李始榮)의 중형(仲兄)이시다 .

 

 

  (해방으로 귀국한 이시영 선생이 고국땅을 밟고 감격하여 눈물 짓는다 . 우측은 이회영 선생)

 

1896년 (30세) 항일의병 의 자금조달을 위해 개성인근 풍덕(豊德) 지방에 삼포(蔘圃) 농장을 경영

하였으나 일인들의 계획적인 훼손사건 으로 법정투쟁 , 승소. 조정으로부터 탁지부 (度支部)판임

(判任官) 으로 임명 받았으나 사양 , (1901년 35세때 의 일이다)

 

                          을사 (乙巳) 5적 (五賊)

 

 

                           (1905년 , 을사보호조약 체결시 궁궐을 포위한 일본군들 )

 

  

    박제순(외무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대신) 

  

 1905년 이회영의 제(弟) 이시영(李始榮)은 일본과 내통한 이완용(李完用) 박제순(朴齊純)등을사5적

이 고종을 위협하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맺을때 당시 외부(외무부)교섭국장 이 었는데 ,

외상(외무부장관)인 박제순이 철저히 그를 따돌려 조약이 체결되던날 ,  이미 일본군이 궁전을 포위

했음을 알고도 이를 뚫고 들어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부당한 불법조약을 항의하고 외부를 사임한다 .

사임후  그는 을사조약파기 운동을전개하며 나인영(羅寅永) 기산도(奇山度)등과  을사5적 척결에

나서나 실패하고 만다 .

 

                             ( 1907년 년 3월 25일 , 을사5적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의사(義士)들 )                   

                               

                          1906년 (40세)이상설 ,여준(呂 準)장유순(張裕淳)이동녕 ,유완무

                            (柳完懋)등‘ 만주의 독립운동기지 설치계획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설립 . 

     ( 1906년 8월 간도 용정 부첫골 (大佛洞)에 설립 , 근대적 항일민족 교육의 요람이 었다 )

 

 

           

1907년 (41세)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 지하 상동학원(尙洞學院)학감(學監)으로 취임.헤이그 만국평

화회의(萬國平和會議)대표파견 을 고종에게 건의, 백지위임밀서(白紙委任密書)를 내시(內侍) 안호영

(安鎬濚)을 통하여 받아 블라지보스톡에 망명중인 이상설 에게 전달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등이

합류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 으로 출석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을 실패하고 말았다 , 이상설은

언론에 일본의 강제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의 무효성명 과 이준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상동학원을

중심으로 추모하고 이준의 죽음을

 

 

      이상설(李相卨)        (헤이그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 , 이위종 . 이준 ,  3인의 열사들 )

 

 

   ( 자결로 알려진 이준열사 )             (네덜란드 헤이그 에 매장 됐던 이준열사 의 묘 )

 

 할복자결(割腹自決)로 공표하여 국민감정을 분기 시켰다 . 이를 계기로 이동녕(李東寧),

전덕기(全德基), 양기탁(梁起鐸), 이관직(李觀稙) 김진호(金鎭浩)등이 발기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운동 비밀결사체(秘密決死體)인 신민회(新民會)가 조직 됐다 .

 

  이 동녕 (李東寧)       양기탁(梁起鐸)     전덕기(全德基)    이관직(李觀稙)    김진호(金鎭浩)

 

 안창호 (安昌浩). 이동녕(李東寧)등과 함께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 ,

무실역행(務實力行)을 행동강령 으로 독립운동에 전력 하였다 .

 

                                                         도산(島山)  안창호 (安昌浩) 선생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이후 갈수록 일본의 국권침탈이 노골화 되자 이회영 은 그의형제들

과 함께 해외에서 체계적인 독립운동 을 하기위해 무력항쟁(武力抗爭)기지를 설립할 구상

을 하고 전재산을 처분키로 한다 . 그러나 신민회 회원들 계보가 선 (先 )인재양성론

후(後) 독립론 으로 갈라져 서로 이견을 좁히지 못할 때 급진파 인 대한매일신보 계 양기탁 ,

신채호,상동청년학원의 전덕기,이동녕, 무관출신 의 이동휘 , 등은 이회영과 힘을 합해 일본

의 보호국화 와 통감정치를 정복자의 정치라고 못을박고 1909년부터 선(先)독립론을 주장

하며 무장투쟁 으로 급 선회 한다 .이에 맞서 헌정연구회 계열의 윤효정 ,등은 일본의 보호정

치를 한국의 문명개화 를 위한 선진문명의 지도자로 인식하고( 위험한 친일적 사고 <思考> ) 

조선이 부강해 지면 일본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며 일본예찬의 낙관론을 펴며 선(先)인재

양성론에 매달렸다 .그러나 후일 이계보의 인물들은 거의 친일파로 옷을 갈아 입는데 ,오늘

날 일본의 침략을 축복이라고 주장하는 무리들은 이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

 

 

 당시 상동교회 (독립운동 의 요람이 었다 .)                          이은숙 (李恩淑) 여사 (이회영 선생의 부인 )

 

 

             1908년(43세) 10월18일 서울상동교회에서 이은숙(李恩淑)여사와

                            재혼(再婚)한국 최초의 신식결혼 (新式結婚) .

 

                      신민회 비밀정치결사 (新民會 秘密決死) 조직원

 

 

 좌측에서 우측으로 : 이승훈(李昇熏), 이동휘 (李東輝), 이동녕(李東寧), 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

                       김구(金九), 유동열(6.25때 납북), 노백린(盧伯麟), 이갑(李甲), 신채호 (申采浩),

                       문일평(文一平), 차이석(車利錫), 윤치호(尹致昊),조성환(曺成煥),이강(李剛 ?)

 

1909년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간부인 안태국(安泰國),이승훈 (李承薰)김구

(金九), 이동녕(李東寧), 김기홍 (金基弘),조성환(曺成煥)등과 함께 모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방책을 논의 , 그해 여름 , 이동녕(李東寧) ,주진수(朱進洙)등이 독립군 건설의 적지

를 찾도록 만주로 파견되어 유하현(柳河縣)삼원보(三源堡)추가가(鄒家街)지방을 선정하여

개척하기로 한다 .

 

 

             1910년 , 근대적 신교육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위해 경영하던 이회영

       의 삼포(蔘圃) 는 이미 일본인들의 고의적 약탈로 완전실패 하고 만 뒤였다 .

 

 

 

 

   ( 우리나라 의 대표적 매국노 이 완 용 )                  ( 표리부동한 매국노  송병준 )

 

 1910년 10월7일 ,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 조선총독부 는 대한제국(大韓帝國)

멸망(滅亡)에 공(功 )이 큰 76명의 권력가들에게 합방공로작(합방 功 勞爵)을 수여 했다 .

이완용 , 송병준 ,대원군 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순종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명성황후

의 동생 민영린(閔泳璘)등이 귀족작위 를 받았다 .

 

(일본의 수족이된 매국노들 ,이들은 이등박문 (伊藤博文 :가운데 검정옷)의 잘 길들여진 개(犬)였다 .)

 

또 그다음날 1700여 만원의 임시 은사금(恩賜金)을 문무관리(文武官吏)들과 양반 , 유생

(儒生)들 에게 내려 줬는데 , 이들은 뛸듯이 좋아했다고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자서전(自敍傳) 에 적고있다 .

 

                                                                  심산 (心山) 김창숙 (金昌淑) 선생

 

이런상황에 모두 버리고 압록강북쪽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강가에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를 설립 했다 . 아리랑 의 주인공 김산(金山)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

 

   (아리랑 의 주인공 김산(金山)  과 그의 자서전을 출판한 님 웨일즈 ,  출판된 아리랑 표지 )

 

신민회 급진파의 이회영 은 1910년 12월 추운겨울에 60여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을 한다 . 이때 국내에 있던 재산은 모두 처분 하였으며 , 이상룡. 왕산 허위

집안과 함께 기득권을 버리고 독립윤동에 나선 대표적인 가문이 된다 .

 

                                                     왕산(旺山)  허위 (許蔿) 선생

 

일본인 과 매국노들 의 등살에고향을 등지고 먼 불모의 땅 간도로 망명하는 우리의부모 형제들 .

 

  

1911년(45세) 3월 북경에서 원세개(袁世凱)총통과 회담하여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에 독립군기지를 설립한후 각지의 동지들을 모아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후 안동출신(安東出

身)의 경상도유림대표(慶尙道儒林代表) 이상용(李相龍)을 초대회장 으로 추대, 

 

                                                                  이상용 (李相龍)

 

  1912년(46세) 경학사를 기반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후에 신흥무관학교 로 개칭.)를

설치하여 교주(校主)에 이석영(李石榮).교장에 이철영(李哲榮)으로 학교경영, 신흥무관학교

는 1920년까지 계속하여 독립군을 양성 ,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 등 많은 무장

                                독립군을 배출함 (총 배출인원 : 3500명 )

 

  (청산리 대첩전 전열을 정비한 독립군 가운데 앉으신분이 김좌진 (金佐鎭)장군 , 전투후 부상자 운송하는 독립군들 ) 

 

 신흥학교는 1913년 5월 교사가 완공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하고 학제도 4년제의 본과와 6개월의장교반  3개월의 하사관반을 두고 여기를 거쳐간

졸업생은 적어도 2년간 은 학교의 명령에 따라 복무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1914년,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경학사 운영이 어려워지고 동포들의 성금도불가능하게 되자

생도들과 졸업한 학우들이 직접 경작도하고 각자의 기능대로 날품팔이도 하는 등 그 수입을

모아서 학교 유지비 로 충당했다.그들은 “조국을 위해서는 항일투쟁, 모교를 위해서는 경제

투쟁“이라는 표어도 내걸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어려운 가운데도 계속 발전하여 1917년 봄

에는 통화현 제8구 팔리초 소북대(八里哨 小北岱)란 곳에 분교를 설치했다.  

 

 

이곳은 백두산 기슭에 있는 밀림지대로 신흥무관학교 백서농장(白西農莊) 분교(分校)라고

하였다.분교교장은 김동삼(金東三)이었다. 학과는 보병,기병,포병,공병,치중(輜重)등 5개병과

훈련,그외에 내무령,측량학,축성학,육군형법,징발령,위술복무,구급의료, 편제학,훈련교범,전술,전략학 등이 있다.

                                                                     ( 김동삼 (金東三) 선생 )

                                  

 1918년 (52세), 국내동지들 과 국권회복을 협의, 사돈 조정구 (고종의 매부이며 규학(圭鶴)의

장인) 의 아들 조남익(趙南益)과 내시 이교영(李喬永)과 논 , 고종의 망명계획을 추진하였다 .

고종의 지시로 민영달(閔泳達)로 부터 5만원을 받아 북경(北京)에 고종의 거쳐를 마련 하였으

나 고종의 서거로 좌절 , (고종의 망명계획 을 눈치챈 일제와 친일파들 이 고종을 독살 했다는

 설이 있음 )

 

       (고종황제 의 승하 하루전 )       (고종황제 의 장례를 치르는 왕가의 후손들 )

 

 

 

                          ( 고종의 장례행렬 )                                                       ( 구라토미 유자부로 의 고종 독살 일기 )

 (우리 고유 의 전통장례예복을 벗어버리고 일본놈들 예복으로 차려입어 마치 일본인 인양 

 으시대며 등장하는 똥개같은 친일 매국노들 과 궐밖의 백성들 이들이 국정을 쥐고 흔들었으니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헐벗게 됐다 . 이들의 횡포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별도로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 명칭을 다물단(多勿團

다물이란 복구강토라는 뜻임)이라고 했듯이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투쟁단체였다.후에 다물단,

신흥학우단을 섞어 부르기도 했다.

 

                 김창숙                        신채호 선생                    김원봉 의열단장

 

 봉오동(鳳梧洞 전투 1920년),청산리(靑山里 전투 1921년)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운 인물들

은  대한독립군단(총재 徐一, 부총재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曺成煥),총사령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이청천, 병력 3천여명의 주축이되었다.

 

               전투(鳳梧洞 戰鬪)와  홍범도 장군(洪範圖 將軍 :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대한독립군단장,총재 서일(徐一)    총사령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이청천 (李淸天)

 

                                            대한독립군단 부총재 김좌진(金佐鎭) 

 

 그러나 일본군의 압력을 받아 소만국경지대  로 이동하던중 일본과 소련의 밀약에 의하여

1921년6월 이만市에서 소련군에게 강제로 무장해제 되고 이에 항거하는 약270명의 독립군이 
피살되었으며 9백여명이 포로가 된 쓰라린 참사도 겪었다.이 참사를 독립운동사에서는

흑하사변(黑河事變,또는 자유시 참변이라 기록하고 있고, 이때 희생된 독립군의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소만국경 (蘇滿國境) 우수리강 , 건너편에 소련도시 "이만"이 바라보이는 동만주편 우수리강 .

1921년6월 이만에서 5명의 동지와 함께 헤엄쳐 탈출하다가 3명은 전사하고 이범석(李範奭)장군은

부상을 입기도 했다 . )

 

 자유시 참변이후 만주일대에서의 독립군의 활동은 지극히 저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도 더 이상 독립군 양성이 어려워져서 지하운동으로방향이 전환 되었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꾸준히 양성된 인재들이 후에 임정수립에 따라 광복군에 편입 하였고,또 어떤
이들은 만주에 기지를 둔 무장독립군의 간부로서 밑거름이 되었다.

 

 (하와이 대조선군단 을 이끌던 박용만 , 우측의 2번째 , 그러나 그는 왜 변절했는지 명확치 않다 .)

 

 1925년 (59세), 우당의 조카 이규준(李圭駿)과 아들 이규학(李圭鶴),이성춘(李成春)등 신흥

학우단 이 중심이 된 다물단(多勿團)은 북경(北京)중국유림(中國儒林)에 깊숙히 침투한 일본

고등 밀정 김달하 (金達河) 에게 포섭되어 전향한 하와이 대조선군단 의 박용만(朴容萬)을

암살 ,이일은 큰 파장을 일으키며 박용만의 전향과 일본에 협조한 구체적 사실이 밝혀진 것이

없어 위난을 겪었다 .

 

     이을규(李乙奎)       백정기( 白正基)        정화암( 鄭華岩)         김종진(金宗鎭)

 

1929년 (63세) : 아나키스트 동지인 이을규(李乙奎),정화암, 백정기, 김종진(金宗鎭), 오면직

(吳冕稙 중국명:楊汝舟), 이달(李達), 엄순봉(嚴舜奉:본명:엄형순(嚴亨淳),등을 북만주에 파견

하여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滿朝鮮無政府主議者聯盟)을 비밀리에 결성하는 한편 ,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추진하는 재만한민족연합회(在滿韓民族聯合會)조직에 가담하여 새로

운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시도 ,

 

 일본인들의 이간책동 으로 중국인 과 간도 한인들 간의 살육전이 벌어졌으나  음모가 밝혀졌을땐  양국의 피해는 컸다 . 

철도문제로 야기된 중일(中日)간의 격돌은 중일전쟁 의 서곡이 었다 . 일본신문은 일제히 중국군의 습격

이라고 허위보도를 하며 무저항의 중국군을 무차별 사살하며 단숨에 길림성(吉林省)을 장악한다 . 

  1931년(65세):  만보산(萬寶山)사건 과 만주사변(滿州事變)으로 독립운동이 심한 타격을 받자

상해(上海)로 철수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남화한인연맹(南華韓人聯盟)을 결성하고 유자명 을

회장으로 선임 , 기관지로 남화통신(南華通訊)을 발간 했다 .

9월 , 우당은 정화암, 백정기, 김성수(金性壽: 동아일보사장 <친일인사>)중국인 왕아초(王亞樵), 화균실(華均實),일본 아나키스트 전화민(田華民:일본명佐野), 오수민(吳秀民:일본명 伊藤), 7인이 상해에 모여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결성하고 기획, 선전, 연락, 행동 등 부서를 두는 비밀행동조직 (秘密行動組職)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 하였다 .

이 공포단 의 천리방 백정기, 원심창(元心昌), 이강훈(李康勳), 유기문(柳基文)등은 중국 국민당 의 친일그룹인 왕정위(王精衛)를 암살하려 했지만 , 그의 부관만 사살, 아모이(厦門) 일본영사관 을 폭파 했다 .

 

                                     (따리엔 (대련: 大連)  선착장) 

 

1932년(66세):  1월 흑색공포단 은 천진(天津)부두에 군수물자 를 실은 일본기선(日本機船)을

폭파했고 , 천진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여 그 일부를 파괴 했다. 9월 , 중국 국민당 요인

이석회(李石會), 오치휘(吳稚暉), 호한민(胡漢民), 등의 지원을 받아 중국 동북부에 새로운 거

점확보 와 동시에 관동군 사령관 무토(武藤)대장을 암살하여 독립운동 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

코자 북행(北行)을 결심 . 2개월후 11월 17일 , 우당은 만주의 항일의용군 의 결성과 독립운동

기지를 계획을 비밀리에 동지들과 협의 , 결정한 후 대련(大連)으로 이동 했다 .그러나 상해

밀정 에게 정보가 누설되어 대련에 도착하자 마자 일경(日警)과 중국수상서원(水上署員)

에게 검거 되어 모진 고문으로 끝내 순국(殉國) 하시고 말았다 .

 

 

                         의혈단 단원들          민영달(閔泳達)  (고종황제 의 조카사위 이규학 )

                                                                                     ( 이회영 선생 의 둘째 아들  )

  

                                             이럴수가 ...?

              진보 와 보수 의 격돌 ? 아전인수 의 국회 ?

 

장자연 사건의 진상규명 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국회에서 某 일간지

대표를 향해 목청을 돋우는 민주당 " 이종걸" 의원의 멱살을 잡는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 . 국회가 아니라 난장판 이다 .

 

이종걸 의원은 <우당> 이회영 선생 의 직계손자 이다 .  

 

 

보수파 는 자신의 재산과 형제들의 목숨을 국가를 위해 초개와 같이

내던진 분들이 진정한 보수파 일 것이다 . 대한제국 시절 왜놈에게

빌붙어 더럽게 진보를 외쳤던 매국노들 ! 이승만의 비호로 척결이

미뤄지고 6.25동란이 일어나자 이들은 갑자기 <보수>로 변해 오늘

까지 해괴한 덧칠로 진정 국가를 위한 애국자로 탈바꿈 하여 귀족의

반열에서 국민을 노예로 착각하고 있다 .

 

언제쯤 바로 잡힐려나 ? 남북통일 만큼 어려울것 같다 . 또, 이들이

존재하는 한 민족통일 은 구호로 끝날 것이다 .

 

그나마 남북대화 의 물꼬를 튼 김대중 (金大中)전 대통령 의 서거는

우릴 더욱 암울하게 한다 . 누가 또 희생할 것인가 ?

 민주주의 를 위하여 .......

 

 

 

 

 

 

 

 ※ 이글은 이덕일 박사 의  "아나키스트 이회영 과 젊은 그들 " 의 강연 내용을 수록한 글에서 발췌 인용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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