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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를 회복하여 예슈아를 닮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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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업을 함께 나눌 자
우리는 몸의 지체들이다. 머리는 예슈아시다. 우리의 부르심을 바울은 하늘의 부르심으로서 유업을 함께 나눌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말은 우리가 감당하는 사명대로 유업도 다르게 받게 됨을 의미한다. 물론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이 요구하신다. 더 좋은 사명이라기 보다 자신이 받은 사명에 얼마나 충성되었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우리가 사명을 나누어 받은 것처럼 그러나 서로서로가 필요한 것처럼 우린 유업도 나누어 받을 것이다. 그건 예슈아께서 머리시므로 왕으로서 통치하시고 모든 왕권과 주권과 나라를 유업으로 얻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선지자의 상이 다르고 의인의 상이 다른 것처럼 우린 모두 유업을 함께 나눌 하나님의 권속들이다. 우리의 머리가 예슈아이기 때문에 우리를 영접하는 자는 예슈아를 영접하는 것과 같고 동시에 그분을 보내신 여호와를 영접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다(마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10:40-42)
2 예슈아께서는 사도이며 대제사장이시다
예슈아께서는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시다. 헬라어로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 즉 '복음의 사신'을 의미한다. 사신은 메시지를 대신 전하는 자이다. 여호와께서 이 땅에 사신을 보내시는(사도) 이유는 당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어떤 말도 보태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메신저(사도)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보태거나 뺀다면 더이상 여호와의 말씀이 아니다. 말씀에 가감하는 이유는 주로 사람을 두려워하여 타협하고 세상의 풍조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사도가 아니라 말씀을 변개하는 우상 숭배자인 것이다. 그에 반해 예슈아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에 일점 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않으셨다. 오히려 더하거나 뺀 전통을 지키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막7:5,7-8). 그리고 스스로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슈아의 삶(길)과 가르침(진리)이 곧 아버지께로 이끌고 생명을 얻게 하는 교훈이기 때문이다(요14:6). 이처럼 예슈아께서는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도이시다. 그 시대에 사람의 전통을 마치 율법인 것처럼 가르치고 지키던 자들에게 진정한 믿음과 온전한 행함을 가르치신 사도이시다(마4:17)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막7:5,7-8)
또한 예슈아께서는 대제사장이시다. 우리는 예슈아께서 새언약을 가르치시고 옛언약을 폐하셨다고 생각하나, 예슈아께서는 이 땅의 어떤 율법도 바꾸거나 중지시키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새 언약을 주신 이유는 율법을 바꾸거나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같은 율법을 돌이 아닌 마음과 생각에 새김으로 준행하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히8:9,10). 또한 예슈아께서는 땅의 임금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임금으로 오셨다(요18:36). 땅의 대제사장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 대제사장으로 오셨다. 실제 어린 양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로 오셨다. 그 말은 이 땅의 어떤 율법도 대제사장 제도를 포함하여 어느 것도 바꾸지 않으셨음을 의미한다. 예슈아께서 하늘 대제사장이라는 이유로 땅의 대제사장 제도가 폐하여 지지 않으며 예슈아께서 하늘 성소에서 자신의 피로 대속을 이루셨다고 해서 이 땅의 희생 제사가 폐하여진 것이 아니며 하늘 성소가 존재한다고 해서 땅의 성소가 없어져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슈아께서 하늘 임금이라 해서 이 땅에 모든 대통령이 존재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하지도 않는 것처럼 하늘과 땅은 서로를 폐할 수 없다. 실체이고 그림자이며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림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그림자의 사명을 다 감당하면 없어질 것이다. 이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육체를 벗게 되었을 때 비로소 율법의 일부가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의 예법으로는 하늘 성소를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히7:16). 그러나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마23:23 고전13:8,13).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8:9,10)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8,13)
3 예슈아와 모세의 차이
모세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종으로서 온 집에 충성했다면, 예슈아께서는 자신을 기름부어 세우신 아버지께 충성했다. 히브리서 1,2장은 예슈아를 천사들과 비교했다면 3장은 그분을 모세와 비교하고 있다. 물론 모세와 예슈아의 지위는 당연히 다르다. 그러나 모세도 예슈아도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로서는 같다(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요20:17)
모세는 레위 지파였지만 제사장은 아니었다. 레위지파로서 여호와의 모든 백성을 섬겼다. 그리고 예슈아께서는 유다 지파였지만 제사장은 아니셨다. 그러나 세상 죄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여호와께 드리시고 부활함으로써 하늘 성전에서 대제사장이 되셨다. 즉 육으로는 유다지파였으나 영으로는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반면 모세는 육으로는 레위지파였으나 영으로는 제사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육으로는 제사장이 아니지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왕같은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벧전2:9). 이는 육체를 따라 된 제사장들도 모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이 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 하늘 예루살렘에 속한 제사장들이 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로서 예슈아께서는 대제사장이시고 모세는 제사장이다(히6:20). 모세는 영적인 제사장으로서 여호와의 백성들을 충성스럽게 섬겼다면, 예슈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여호와를 충성스럽게 섬기신 것이다. 하늘에서 대제사장은 원래부터 신성(하나님)을 입으신 예슈아께서 되셨다면 제사장은 육체를 입었던 모세나 우리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멜기세덱 반차의 제사장 제도는 땅의 제사장 제도를 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활체가 우리의 육체를 폐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땅에서는 육체가 필요하고 하늘에서는 부활체가 필요한 것과 같다. 다만 부활체를 입기 위해 육체를 입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기 위해 합당한 거룩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4 예슈아와 모세는 여호와께 신실했다
'신실하다'의 헬라어 '피스토스'는 '믿음만한, 신뢰하는, 확신하는'의 뜻으로 주로 '믿다, 충성하다'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즉 ‘믿음'은 ‘충성'을 포함하는 말이다. 예슈아는 여호와를 확신하는(확실히 믿는) 충성된 종이었고 아들이었다. 우리도 여호와의 종(의의 종)이고 동시에 아들인 것은 예슈아와 같다. 바울은 예슈아도 창조주 여호와를 믿고 그분께 충성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가? 예슈아인가? 여호와신가? 예슈아는 여호와를 믿고 충성하셨다. 왜? 이유는 간단하다. 창조주 여호와는 말씀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슈아는 그 영원한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영광과 빛이 되셨다. 즉 여호와의 말씀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충성된 믿음을 보이셨다. 그것이 그분의 신실함이었다. 우리가 예슈아를 믿기 때문에 더이상 여호와의 말씀에 충성할 필요가 없어졌다면, 다시 말해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필요가 없어졌다면 우린 더이상 여호와를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믿는 예슈아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여호와의 명령을 떠날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면 죄송하지만 다른 예슈아 즉 적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보내신 그리스도가 여호와와 다른 말을 하고 여호와를 떠나게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신13:5). 만약 예슈아께서 여호와를 믿고 충성했다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분은 여호와시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린 머리이신 예슈아처럼 영원한 말씀에 신실해야 할 것이다(골1:18,25).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골1:18,25)
그러므로 예슈아를 믿는 것은 여호와를 믿는 것과 동일해야 한다. 그것이 여호와와 예슈아가 하나라는 의미이다. 우린 진리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영원 전부터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며 처음과 나중이기 때문이다(계1:17,18). 태초부터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명을 다해 여호와의 모든 명령의 말씀에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신6:5). 진리는 영원하신 여호와시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모든 명령이다. 율법은 진리이다(시119:142). 그러므로 예슈아도 여호와도 성령도 우리도 모두 진리인 율법을 말해야 하며 순종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여호와를 향해 우리가 하나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만 율법을 지키는 척하며 자신의 배를 불리던 악한 자들로 인해 하늘의 법도를 거절해서는 안된다(시94:20). 세상 법은 불완전하나 여호와의 법은 완전하다. 사람은 악하나 하나님은 선하다. 외식하는 자들로 인해 진리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주의 공의는 영원한 공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시119:42)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어울리리이까 (시94:20)
5 여호와, 예슈아, 성령은 진리로 하나이시다
예슈아께서도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으면 자신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그러면 아버지의 일이 무엇일까?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이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아버지의 모든 명령이다. 그 명령을 지키라고 하셨다. 즉 아버지께서 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버지의 일이고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아버지가 보내신 것(그리스도)을 믿지 말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슈아 자신도 불순종한다면 믿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슈아는 여호와의 일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을 믿기 어려워도 행하는 일은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즉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말씀을 준행한다면 그것은 믿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호와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동일한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하였고 그분께서 보내신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준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믿지 못해도 그의 삶은 믿으라는 말이다. 즉 그를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셨고 보내셨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신뢰하고 율법을 준행한다는 사실은, 누가 여호와와 하나인지, 말씀과 하나인지, 그분의 종인지, 보내심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진리로 분별할 수 있으며 진리와 하나 되야 한다. 성령도 진리로서 하나이므로 모두 진리이신 여호와를 말하고 있다(요10:37,38 요일5:6).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요10:37,38)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요일5:6)
6 예슈아는 모세보다 영광스럽다
예슈아와 모세의 영광의 크기를 비교하고 있다. 예슈아께서 받으실 영광의 크기는 집을 건축한 사람이 집보다 영광스러운 것과 같다. 집은 사람에 의해 건축된다. 이 말은 예슈아도 사람으로서 집을 건축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슈아는 건축가로서 집인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기에 합당하시다는 뜻이다. 물론 예슈아께서는 사람이지만 신성(하나님)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가 되고 주인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즉 여호와의 영광은 예슈아의 영광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는 홀로 영화로우신 분이다(고전15:24).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고전15:24)
7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예슈아의 집이다
예슈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여호와께 충성(신실)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서 충성(신실)했다. 또한 우리는 성전의 지체이지만 성전의 머리는 예슈아시다. 성전은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고 머리를 예슈아로 둔 예슈아의 집이기도 하다. 물론 성전은 여호와의 거처이다(시11:4). 그러나 동시에 머리를 예슈아로 둔 예슈아의 집이기도 하다. 모세도 우리와 같이 지체로서 성전을 위해 충성했다. 하지만 예슈아께서는 성전의 대제사장이고 아들로서 여호와께 충성하셨다.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아들은 시온 산에 통치자로 세우신 왕을 의미한다(시2:6,7). 그런 의미에서 우린 모두 하나님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예슈아께서 하신 것처럼 끝까지 진리를 믿고 기쁨으로 소망을 붙든다면 우린 예슈아를 머리로 둔 그분의 집이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1:22,23)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11:4)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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