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중에서도 교회는 승리한다 마23:9 히11:33-38 계17:4-6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조용한 시골 Wittenberg에서 한 이름 없는 34세인 가톨릭 신부였던 루터가 위텐베르그 성당 정문 게시판에 95개 논제를 붙이므로서 1000년 동안 종교암흑기를 개혁하는 개혁의 불꽃은 타오르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하여 기독교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고, 나아가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95개 논제란 당시 로마 천주교의 잘못된 것을 항의하는 글을 통하여 로마카톨릭교회로 부터 그것이 옳은가 답변을 듣고 싶다는 것을 써 붙이인 것이 종교개혁이 시작하였다 그중 몇가지만 예로 든다면
1. 로마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예수님- 베드로- 바울- 어거스틴에 이어서-기독교 교회 전통이 전승되었다고 하는데 AD300년까지는 순수 복음만 있었지 교황이나 마리아 숭배나, 성체 숭배나 연옥설을 성경 66권 어디에서도 말한 적이 없었다. (마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2. 구원의 핵심은?(롬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6. 교황이 하나님을 대리하여 죄를 사하여 줄 수 있는가?(롬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7. 바티칸의 공식 인명부에 교황의 직책은 로마주교였는데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사도의 계승자라고 할 수 있는가?
11. 베드로가 42-67년에 로마 제1대 주교였는가?(44년 예루살렘 총회, 53년경 갈2: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교황(PAPA)을 ? (마23: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4. 교황제도가 이교에서 온 것은 교황이 쓰는 삼층 면류관, 옷, 열쇠)
16. 성경을 읽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이유?(교황제도, 마리아숭배, 고해성사, 성수, 성자 숭배가 이교적이고 반성경적이기 때문에)
17. 로마 교황은 말하기를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순종하리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나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신의 대리자인 나도 단 하나의 교회를 가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교황청의 공식문서 보관소에 있는 보니페 이스 8세에 관한 문서에서 발췌함. 1302,11,18.기록)
29. 성경은 죄 사하는 권세를 교회에게 주는가?(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도 죄를 사해 줄 수 없었다)
3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인간 중보자가 있는가?(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마리아나, 교황이나, 신부가 중보자가 될 수 있는가?(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41. 마리아는 평생 동정녀로 살았는가?(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2.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인가?(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여자여! 라고 불렸다. )
48. 베드로는 독신자인가?(막1: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자온대) 오늘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전후 성도들이 고난받은 실화와 어떤 말씀을 모토로 하여 종교개혁을 이끌었는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혁명은 뒤집는 것이라면, 개혁은 잘못된 것을 고치어서 처음 것으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종교개혁을 Reformation 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을 개선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종교 개혁은 우리 기독교 특히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몇 번의 전기를 맞이했다. 일반적으로 세계 역사를 고대사, 중세사, 근대사로 나누고 있는 것은 교회 역사의 구분에 따르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도시대부터 590년까지를 고대 교회사라고 하고, 590년-1517년 까지를 중세 교회사라 하며, 1517년 이후 현대까지를 근세 교회사라고 합니다. 그리고 590년-1517년 까지를 또 다른 말로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 시대라고 하며, 다른 말로 이 1,000년의 로마카톨릭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도 합니다.
실제 카톨릭의 권력은 로마가 476년 멸망하고 이어서 10나라로 나뉘었는데 로마카톨릭이 등장한 것은 이 10중 3나라가 로마카톨릭에 반기를 들었다가 마지막 정복된 나라가 동코트(이탈리아) 538년 이므로 이때부터 카톨릭의 권력이 들어선 것이다 서로마는 황제체제가 사라지면서 교황체제로 종교, 문화, 예술, 학문, 정치로 전환 =>동로마는 1453년 멸망
그리스도인인 그라시아노 황제가 교황이라는 제도를 우상이라고 거절하여 사용하지 않은 이 교황제도를 주교 데마수스가 바벨론 종교 승원장으로 선출된 것이 로마교황제도의 시초가 됨. 그 당시 이방 종교제도라고하여 황제가 버린것을 교회가 흡수한 것으로 교황이라는 교권이 만들어진 것이만 로마카톨릭이 들어서기전 2000년전 시작된 초대교회는 온갖 핍박 속에 박해를 받아 오면서 지하 카타콤이나 동굴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면서, 때로는 수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과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며 당시 로마 제국까지 기독교는 전파되었습니다. 64년 네로 황제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고 그후 15년 지난 도미티안 황제때도 엄청난 핍박을 받았음에도 굴하지 않고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 드디어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국교로 인정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 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국교가 되고 나니 당시 태양신인 미트라교를 믿던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게 되었고 그로 인해 교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어 필연히 대형 예배당을 짓는 일이 불가피할 정도로 변화가 왔습니다. 이제는 권력을 장악한 기독교는 정치화 되어가면서 서서히 부패와 부작용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돈과 권력을 잡으면 교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화 되어가는데 당시에는 예배에 이교적이며 세속적인 요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마리아 중보사상을 비롯한 교황칭호 초상화 성자숭배 유골숭배 많은 유물사상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교회가 급격히 부패되기 시작했습니다.
신부수녀독신(1079) 면죄부(1091) 고해성사(1215) 성경구독금지(1229) 연옥설(1439) 등 성경에 없는 전통들이 자연스럽게 교회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먹는 음식물도 부패되면 먹을 수 없듯이 세속화된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실리 만무한 것입니다. 교회당은 으리으리하게 잘 지었고 교회는 교인들로 꽉꽉 들어찾지만 성경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형식화되고 의식화되면서, 급기야 우상에 대한 견해 차이로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되었다. 그래서 11세기부터 그리스를 중심으로 동유럽과 중동 지역에 있는 교회를 동방교회라고 불렸고,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즉 로마 교황이 다스리는 서로마제국 안에 있는 서방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로마카톨릭 교회가 유럽의 정치 종교를 지배 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모든 것이 교회를 떠나서는 어느 것 하나도 이루어 질 수 없는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영적으로 중세 암흑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암흑시대를 지나오면서 교회가 크게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교회 지도자들의 직제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되었던 자로 바뀌게 되는데 주교를 신부. 신부위에는 사제, 사제위에는 추기경, 그리고 최고 지도자를 교황이라고 부르는데 교황은 거룩한 아버지라는 의미로 이미 이교에서 종교의 최고 지도자를 부르는 호칭이기도 하였다.
마리아라는 인간 중보자가 등장함으로써,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나가는 대신에 마리아라는 여인을 바라보도록 가르침 받기도 하고 수도원이라는 곳에서 고행을 하기도 하고 교회지도자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교의 직제를 딴 교회의 최고수장인 교황은 죄를 면제해 주는 권세도 있고 필요하다면 계명을 폐지시키는 권세도 있다. 즉 성경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고 하니 고회성사라는 제도를 통해 사람의 죄까지도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갖게 되었다(카톨릭 백과사전)
교황은 교회의 교리나 전통을 지키지 않은 자에겐 형벌을 내릴 수 있고 처형도 행하게 된다. 이런 교회의 제도적인 것들이 결국은 초대교회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에겐 핍박과 고통이 따라오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에도 천주교회는 교회전통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학살하였는데 도미니칸 수도회의 가장 뛰어난 사상가이며 천주교회의 최고 신학자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교회가 이단자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단들에게 관용을 베출어서는 안 되고 한 두 번의 훈계로도 그들이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출교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세속권력에 넘겨져 박멸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로마 천주교회는 로마 제국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1. 종교개혁 이전에 종교재판
(1) 이단자로 낙인 찍혀서 박해받다
중세기에 타락한 교회가 너무 공공연하게 썩어 버렸기에, 많은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항의하여 일어선 이유를 우리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교황의 거짓 주장들을 반대하고 그 대신 구원과 진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본 고귀한 영혼들이 많았다. 이들은 “이단자”로 낙인 찍혔고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참혹하게 박해 당했다.
1252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발표한 비인도적인 “박멸에 관하여”는 그러한 박해들을 명령한 문서도 있다. 이 문서에서 이단자들을 “독있는 뱀처럼 박살 내 버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에서는 세속 권력으로 이단자들을 화형시키라고 명령하였다.
(계17:4-6) 4 자주색 옷과 주홍색 옷을 차려입었고 금과 보석들과 진주들로 꾸몄으며 가증한 것들과 자기의 음행으로 인한 더러운 것으로 가득힌 금잔을 손에 가졌더라. 5 그녀의 이마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신비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창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으므로 내가 그 녀를 보고 크게 놀라며 이상히 여기니
금잔을 든 여자가 성도들의 피에 취한 존재로 묘사된 음녀는 로마카톨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오직 하나의 로마카톨릭 교회가 긴 박해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인들 수천만명을 살해할 것이라는 것이 계시록에 계시되어 있다. 중세기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지성인이라면,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종교재판을 통해서 이단이라는 죄목 하에 잔혹하게 죽어간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실제로 “로마 교황은 로마교회가 강요하는 가르침과 우상숭배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성서를 믿으며, 죽음도 불사하면서 피로서 항거한 5천만명의 성도들을 종교암흑시대 동안에 살상한 것으로 추산된다.” “일찍이 인류역사 가운데 존재했었던 어떤 제도보다도 로마교회는 더 많은 무죄한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이 인류역사상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박해한 원인도 다양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소유했기 때문에, 라틴어 대신 일반 언어로 성경구절을 말했다는 이유로, 즉 교황권의 정책을 부정했기 때문에 무수히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고문과 학살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화형은 일찍이 로마제국이 초대기독교도들을 박해할 때 종종 사용하던 형벌이었는데 죄인을 산채로 태워 죽이는 형벌로서 이 잔인한 처형 방식을 로마 교황이 이단으로 정죄된 기독교도들을 사형에 처할 때 사용되었는데 사례를 좀 더 실감나게 소개하면 이렇다. 화형에 처할 죄수가 있을 경우 미리 선정된 화형집행대에 해당하는 기둥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사람의 키 높이까지 짚과 장작을 몇 겹씩 쌓아올린다. 기둥 주변에 죄인이 들어갈 수 있는 입구와 죄인을 묶기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만들어져 있다. 죄수에게는 불에 잘 타게 하기 위해 죄수복 대신 유황이 칠해진 셔츠를 입혔다. 이윽고 죄수를 줄과 쇠사슬로 기둥에 단단히 묶은 후에는 죄수가 들어가던 입구 통로까지도 짚과 장작으로 채워 넣었다. 이렇게 한 후에 불을 붙이면 사방 장작더미가 일시에 불이 붙는다고 한다. 산 사람을 화마 속에 넣는 행위가 그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이것이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하는 로마 교황이 개신교도를 처형하는 방식이었다.
(2) 각종 고문대 도구들
이 시대 사람들을 극심한 고문과 고통을 줄 수 있는 가장 널리 애용된 방법 중 한가지는 고소당한 사람의 손과 발을 묶고, 뒤로 눕혀서 밧줄로 감아 죄여 올리는 긴 평판의 고문대였다. 이 고문 과정으로 관절이 탈골되어 격심한 고통을 일으키게 하였다. 무거운 집게로 손톱을 뽑아내거나 신체의 민감한 부분들을 뜨겁게 지져댔다. 날카로운 칼날과 송곳들이 쭈삣쭈삣하게 나온 로울러를 가지고 이단자들 앞에 앞뒤로 굴렸다.
손가락 관절을 탈골시키는 도구인 엄지손가락을 비틀어 죄는 기구가 있었고, 다리와 발가락을 짓이기는데 사용하는 “스페인 구두”도 있었다.
“첩갑 처녀”라는 것은 여인의 크기와 모습으로 된 속이 빈 기구로 칼들을 꽂아두고 죄여 들어가므로 고문당하는 사람은 둘러싸여 들어오는 칼들에 의해서 치명적으로 찢어졌다. 희생자들을 옷을 벗긴 후 단단한 줄로 등 뒤에다 손을 묶어서 도르래를 작동시켜 몸둥이를 공중에 매달리게 하다 떨어뜨리기도 하고, 갑자기 줄을 당겨 버려서 신체의 관절들을 탈골 시켰다. 이러한 고문이 가해지고 있는 동안 사제들은 십자가를 들고서 이단자들에게 그들 신조를 취소시키려고 했다.
로마 교회 가르침을 반대한 사람들의 귀와 입 속에 끓는 납을 부어 넣기도 했다. 눈알을 도려내는 일을 당한 사람도 있었고, 채찍으로 혹독하게 맞은 사람들도 있었다. 종교 재판소의 희생자들은 밤중에는 마루 바닥이나 벽에 꽁꽁 묶여 있어서 고문실들 안에 들끓고 있는 쥐들과 해충의 먹이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3) 베지에르, 라바우르에서 학살
종교 재판소에서 자행된 이 신앙적인 편협이 전쟁을 일으켜 전 도시가 이에 휩쌓이기도 했다.
1209년 베지에르 도시는 이단자들을 소탕하는 군대에 종사하면 사망시 연옥을 거쳐서 곧 바로 하늘에 들어 갈 것이라고 한 약속을 교황으로부터 받았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 도시에서 6,000명이 칼로 살육되어 거리에 피가 강같이 흘렀다.
1211년 라바우르에서는 총독이 교수대에서 처형되었고 그의 아내는 우물 안으로 밀려들어가 돌에 맞아 죽었고 약 400명은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그 즈음에 “박해의 칼잡이들"은 다른 고을들을 점령 포위 공격으로 100,000명의 알비젠스 교도들(개신교도들)이 하루에 죽임에 당하였다. 저들은 이 시체들을 한테 쌓아 올려놓고 불태워 버렸다.
메린돌의 대 학살 때에는, 500명의 여자들을 창고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다. 안에서 창문으로 누가 뛰어 나온 때는 뾰쪽한 창 끝으로 그들을 찔렀다. 여자들은 불쌍하게도 공개적으로 난행 당했다. 자녀들은 보호할 힘이 없는 부모들 앞에서 살육 당하였다.
1562년의 오랜지의 대량 학살 때도 비슷한 방법들이 사용되었다. 교황 비오 4세는 이탈리아 군대를 보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도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가공할 만한 잔인한 방법으로 실행되어져 사람들이 온갖 종류의 수치와 고문을 당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왜 여러세기 동안 살인을 저질렀던가?
면죄부 판매나, 사람들이 신상을 우상으로 경배하는 것, 혹은 교황들이 부도덕하게 살았던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공식적인 법들과 상치되기 때문이다. 교황이 조서로 종교 재판소에 명령했고 계속해서 확인하였다는 사실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치들이 과연 우리의 원수들에게 뺨을 돌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우리를 멸시하는 자들을 선대하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대표자들의 행위라고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고문실의 쾌락』(자작출판사, 2001)이라는 책자에 보면 1796년 1월에 이단자에 대한 화형 집행 장면을 목도한 사람의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에는 화형이 얼마나 참혹했던가를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처형은 정말 잔인했습니다. 여자는 화염에 휩싸여 한 시간 반, 남자는 한 시간 이상 산 채로 고통 속에 몸부림쳤습니다... 죄인이 계속해서 갈구하는 것은 단지 몇 더미의 장작을 더 태워달라는 것뿐인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화염은 타버린 만큼의 장작만 보충하면 똑같은 온도를 유지하며 탔습니다. 그의 간절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땔감이 더 많이 허락되어 죽음이 앞당겨지지도 않았습니다.”
교황 인노센트3세(1198-1216)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대리자”, “하나님의 대리자”, “교회와 세계의 최고지배자”라고 주장했으며, 그 외에도 “교황무오설” “화체설”을 주장했고, 고해성사와 종교재판소를 설립했다. 인노센트 3세는 종교재판소를 통해 무죄한 그리스도인들 100만명 이상을 이단으로 정죄하여 살해하였다.
그 로마 황제가 그의 전 통치기간 중에 살해한 숫자보다 그 교황시대때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한 나절에 죽였다. “수많은 교황들이 인명을 경시해온 것은 은폐할 수 없는 역사적 기록이다. 교회가 황제의 비호를 받게 되자 물질적으로 풍성해지고 발언권이 강해지며, 신앙 외적인 것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교회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잃어 가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교황권이 하늘을 찌를 듯해서 황제의 권위까지 짓누르게 되었습니다. 곧 교황이 황제의 우위에 있게 된 것입니다.
(5) 15세기 초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후스(1369~1415)
15세기 초, 교황 마틴 5세는 폴란드 왕에게 후스파를 절멸할 것을 명령하며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아직 시간 여유가 있을 때, 귀하의 군대를 보헤미아로 진격하시오. 전역을 불사르고 살육하고 초토로 만드시오. 왜냐하면 이보다 더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은 없기 때문이오.”
화형 당하는 존 후스는 그의 주요 저서 「교회 위에서(On the church)」를 통해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라고 정의하였다. 후스는 오직 주 하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종교적 관점을 설명할 기회도 받지 못한 채 유죄 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져 죽음을 맞이했다. 존 후스는 화형대에서도 불타 죽기 전까지 앞으로 올 개혁에 대해 가장 깊이 있고 심오한 예언을 남겼다. “당신들은 지금 ‘자신의 이름을 빗댄 거위’를 굽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백년 안에 구을 수도 없고 그을일 수도 없는 고귀한 백조가 나타날 것입니다. 백조가 노래할 때 사람들은 그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살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의 예언대로 1517년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대로 믿는 수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정죄하여 불에 태워 죽였다. 교황권은 요한복음 15장 6절의 말씀, 곧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라는 구절 중에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을 “만일 사람이 교황권을 거절하면”으로 해석하여(교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기에) 천주교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화형시키는 일을 합리화했다. 종교재판소에서는 끔찍한 고문들이 자행되었다. 이단자를 처형하는 방법 가운데 화형에 버금가는 잔인한 방식이 있었다. 네 마리의 말이 사방으로 달려가면 사지는 찢어지고 몸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런 끔찍한 일이 집행되는 동안에 사제는 십자가를 들고 지켜보면서 “네 영혼을 마귀에게 주노라”는 말을 엄숙한 음성으로 선포한다.
“『거룩한 집』으로 불리는 종교재판소는 인노센트 3세에 의해 창설되어 두 번째 교황인 그레고리 9세 때에 완성되었다. 그곳은 이단자를 찾아내어 벌을 주는 교회 재판소였습니다. 누구든지 이단자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해야 했다. 한 번 거기에서 의심을 받게 되면 고발자가 누군지도 모른 채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비밀리에 행해졌습니다. 재판관이 선고를 내리면 죄인은 민법회의에 넘겨져 종신형을 살거나 화형을 당했다. 죄인의 재산은 몰수해서 나라와 교회가 반씩 나눠가졌다. 교황권의 그러한 핍박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신조에서 비롯된다. “이단자란 카톨릭 교회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으로 가르치는 특정한 진리를 분명히 알면서도 이를 고집스럽게 반대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믿을 것과 안 믿을 것을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단지이다.”
2. 종교개혁 이후 종교재판
종교재판은 종교개혁운동을 말살시키는데 있어 교황권의 주된 역할을 했습니다. 1572년 파리에서 “성 바돌로매의 축제일”에 100,000명의 위그노 교도들(개신교도)이 피의 대 학살을 당하였다. 이때 프랑스 왕은 많은 이단자들을 소탕한 것에 대해 정중한 감사를 드리고자 미사를 드렸다. 교황청에서는 이 소식에 크게 기뻐했고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장렬한 행렬로 성 루이스 교회에 감사드리러 갔다! 그는 교황 조폐국에 이 사건을 기념하는 동전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동전들에는 한 손에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있는 천사와 그 앞에서 한 무리의 위그노교도들이 두려워 떠는 얼굴로 도망하고 있는 그림이 들어있다. 동전 위에는 “1572년 유그노 교도들 살육”을 의미하는 Ugnottrum Stranges,1572"란 말이 새겨있다.
(1) 위그노는 누구인가 16세기에 종교개혁은 단선적이고 획일적인 운동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성격을 띤 운동이었다. 종교개혁 진영은 독일의 루터파, 쯔빙글리와 칼뱅을 중심으로 하는 스위스의 개혁파, 스위스형제단으로부터 시작하여 남부 독일과 네덜란드로 확산된 아나뱁티스트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에서 스위스의 개혁파 종교개혁 운동은 프랑스 등 유럽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었으며 이를 통해 프랑스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위그노이다. 위그노(Huguenots)는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자 장 칼뱅(Jean Calvin, 1509-64)의 개혁운동에 동참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일컫는 용어이다. 칼뱅의 제네바가 특별히 개혁교회의 요람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서 많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칼뱅도 프랑스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온 프로테스탄트 신자가 유난히 많았다. 많은 학생이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건너와서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은 후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프랑스 개혁교회를 위해서 일하였다. 이렇게 로마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안에서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가 세력을 점차 확장하여 갔다. 특히 귀족들의 프로테스탄트 신앙으로의 회심은 프랑스 왕정에 본질적인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위그노 중에는 루이 콩데, 가스파르 콜리니, 나바라의 앙리 등 유력한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1560년대로 접어들면서 위그노는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및 로마가톨릭주의자인 기즈 가문과 심각한 충돌을 빚게 되었다. 결국 1562년 3월 1일 기즈 가문 프랑수아 공작의 군대가 작은 시골 마을 바시(Wassy)의 헛간에서 예배를 드리던 위그노를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프랑스에서 로마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흔히 ‘위그노전쟁’이라 부른다. 1562년 바시의 학살 이후 로마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에는 여러 차례 유혈참극이 반복되다가 1598년 4월 13일 낭트칙령(Edict of Nantes)에 의해 비로소 프랑스의 종교전쟁이 끝이 났다. 이 36년이라는 기간은 프랑스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로, 전쟁, 기근, 질병으로 인해 대략 200-40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에서도 1572년 8월 23-24일 벌어진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은 유럽의 종교전쟁에서 최악의 사건이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 마르가리타와 나바라의 잔 달브레의 아들 앙리의 정략결혼을 위해 파리에 모였던 위그노들이 로마가톨릭 세력에 의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때 죽은 위그노의 숫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파리에서만 위그노의 지도자 가스파르 콜리니를 비롯하여 2,000명 정도가 죽고 지방의 도시들에서도 수천 명이 죽어 전체적으로는 1만 명 가까운 위그노들이 학살을 당하였다. 이 사건은 위그노들에게 로마가톨릭교회는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겼다.위그노전쟁의 막바지에 소위 ‘세 앙리의 전쟁’이라 일컬어지는 갈등 정국이 펼쳐진다. 철저한 로마가톨릭주의자인 기즈 가문의 앙리, 나바라에서 어머니 잔 달브레로부터 프로테스탄트 교육을 받고 자라난 나바라의 앙리, 그리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자 했던 프랑스의 왕 앙리 3세, 이 세 사람 사이에 전략적 싸움이 벌어졌다. 왕이 된 앙리 4세는 자신의 옛 신앙적 동지 위그노들을 잊지 않았다. 앙리 4세의 낭트칙령으로 프랑스 내에서 위그노들이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긴 했지만, 그들에 대한 적대감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1620년대에 이르러 3차례에 걸쳐 로마가톨릭 군대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을 받고 도시가 함락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2만 5,000여 명의 주민들 가운데 1,500여 명만 생존했을 정도로 그 결과는 참혹하였다. 결국 낭트칙령이 반포된 지 10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598년 4월 13일, 앙리 4세의 손자 루이 14세는 퐁텐블로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을 통해 할아버지의 낭트칙령을 취소하고 위그노 신앙을 불법으로 규정하면서 프랑스 내에서 강력한 박해가 재개되면서 102년간 박해의 길고도 긴 박해의 시간을 맞는다. 위그노들은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든지 2주 내로 프랑스를 떠나든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대략 30만 명 이상이 프랑스를 떠나 망명길에 올랐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연상시킬 정도의 대규모 피난 행렬이었다. 프랑스 개신교역사는 이 시기를 교회의 광야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영국으로 60000여명, 독일로 30000여명, 네덜란드 65000여명, 스위스22000여명, 뉴욕으로 10000여명이 해외로 피신하였다. 당시 위그노들 가운데는 철저한 개신교 정신으로 숙련된 장인이나 전문적인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이 이주하는 곳마다 수없이 많은 역사를 이루어낸다. 이로 인하여 프랑스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야기된 경제적인 혼란이 결국 프랑스혁명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스위스 이주자들은 낙농산업과 기계산업으로 시계와 세계적십자사들을 일으키는데 공헌하였고 독일로 이주한 위그노들은 독일에서 신기술을 선두하며 철강, 제철, 주조, 정밀금속, 제지, 인쇄등으로 독일을 단숨에 영국과 프랑스에 버금가는 강대국으로 이끌었으며 훗날 독일 벤츠와 바이엘의약품 산업을 일으킨다. 네델란드 이주자들은 금융과 출판분야에서 최대의 금융은행들을 설립했고 개신교를 국교로 만드는데 공을 세웠다. 영국이주자들은 찰스2세의 특별이민법에 의해 적극적으로 영입하여 산업혁명을 이루게 되었다. 미국의 1만여 이주자들은 화학제조업과 철도산업중심지를 이룩하여 미국횡단철도 건설과 탄약기술로 서부개척시대를 열었다. 전세계에서 약30만의 위그노 디아스포라가 발생하게 되었고 신앙의 역사와 믿음의 산업을 이룩하였다. 위그노들의 높은 기술과 지적능력이 탁월했던 이유를 찾는다면 목숨보다 중요한 예배자의 소명과 종교개혁의 정신 만인사제설과 노동을 신성시했던 직업소명설 삶과 직업신앙의 일체화, 근면 성실함을 들 수 있다. 위그노들을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교훈받아야 할 것은 이들은 예배를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말씀을 매일 읽고 매일 가정예배를 통해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다음세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임재가 있는 기도에 힘쓰고 교회와 공동체를 가족처럼 섬기고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에 사명으로 감당했다. 이들의 신앙은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영국의 청교도 신앙과 미국의 부흥운동에 반석이 되게 했다.망명 대신 프랑스에 남아 투쟁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 산악 지역에 숨어 지내면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켜나갔지만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모든 법적 지위를 박탈당했기 때문에 신앙을 지키며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위그노는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었고, 로마가톨릭 교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으며, 자녀들은 학교에 진학할 수조차 없었다. 재산권과 상속권도 박탈당했고, 예배당은 폐쇄되었으며, 죽어서는 정식으로 묘지에 묻힐 수도 없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주민등록증이 발행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소위 ‘광야교회’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위그노의 ‘광야 박물관’(Musée du Désert)에 가면 당시 위그노들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지켜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의 흔적들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모진 박해와 광야의 고난은 루이 16세에 의해 1787년 11월 7일 관용령(Edict of Tolerance)으로 알려진 베르사유칙령(Edict of Versailles)이 공포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박해받던 위그노는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법적·시민적·종교적 지위와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2년 뒤인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면서 로마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교회역사를 통해 들어난 증거들에 의하면 많은 교황들의 인격과 도덕성이 너무 추하고 포악하여 도저히 그리스도 교회의 수장으로 보기에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역대 교황 수는 총305명인데, 그 중 불법교황, 가짜교황이 수두룩했으며, 재위기간이 1년 미만인 교황도 56명이나 되고, 2개월 미만도 24명에 이르고 있다. 이것은 당시 교황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함에 따라 불법적인 자리다툼이 치열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4. 만인 제사장(사제설)교리
이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개인은, 신부나 사제를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상이며, 속죄의 근거도 철저하게 하나님과 나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카톨릭에서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 기독교는 성고 개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하여 만인제사장의 교리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종교 개혁을 일으킨 루터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죄로부터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교권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소유한 자만이 진정한 자유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의 종이 되거나, 황금과 정욕과 권세와 인기의 종이 되거나, 사람의 종이 되거나, 사업이나 일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명
교회시대 초기에는 지금 같은 교황의 이름도 없이 그저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 장로나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지도자들이 지칭되었고 또 처음 300년대 까지는 꼭 집어서 누가 교회 최고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도 없이, 체계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교황의 교회 최고수위권제도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래 교회권력의 정치권력화의 과정에서 나온 역사적 산물이요 그 뒤로 이 제도를 정당화하며 교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성경의 내용을 인위적으로 해석하는 교리를 만들어 뒷받침한 것이지(곧 이어 교황 무오교리로까지 발전) 처음부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결론을 내리자면 천주교회에서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계승 되어온 정통교회라고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천주교회와 교황제도는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607년에 로마황제로 부터 온 것이요 이때부터 교회최고수위권을 가진 교황들이 자기들의 교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성서위에 두는 교리를 만들므로서 지금의 천주교회가 시작된 것이요 이렇게 로마교회가 인간중심의 종교로(교황의 무오교리, 신부의 사죄권, 마리아의 신격화 등)서서히 변질되고 퇴색하는 가운데 드디어는 성경과 초대교회의 교리와 제도와는 아주 많은 차이가 나게 된 지금과 같은 생명력을 잃은 이단종교로 전락한 것입니다.
교황은 하나님이 세운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우상이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없는 동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하나님으로 섬겼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의 로마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병들고 노쇠해져서 생명력을 다 잃어버리고 서서히 죽어가는 이단교회일 뿐입니다.
초대교회는 박해의 중심 속에서 성장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시작 할 때부터 유대인들로부터 박해 당했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로마제국에서 박해를 했다. 카타콤의 교회는 그러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했던 그리스도인들의 눈물 나는 역사의 유물이다.
한국교회의 역사적 사명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런 박해의 시기를 견딜 때가 있었다. 조선말기와 일제 강점기를 지나며 교회는 많은 박해를 견뎌야 했다. 양반과 하층민의 계급 사이에 있는 분쟁도 거치고 신사참배를 견디면서도 교회는 살아남았다. 시간이 흘러 교회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함께 부흥했다.
70-80년대의 한국교회의 부흥을 영광의 시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고대 교회가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함께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타락하는 과정과 흡사해 보이는 것 같다. 70-80년대의 교회의 부흥 속에서 교회는 성장하였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영혼구원보다는 물질축복을 더 우선시 하지 않았는가 하는 말씀에서 멀어진 한국교회는 로마제국 멸망의 때에 로마의 부패와 타락을 막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 나라의 부패를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하나님의 뜻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으신다. 세워가는 사람들은 변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실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어느 때보다 더 심하게 세속화됐고,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적인 성공 원리를 따라가고, 성도들은 말씀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영적인 어두움과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개혁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거듭나고, 믿음으로 구원의 도리를 증거하는 영적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개혁자의 신앙 정신을 갖고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