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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예산 문인
예산은 충청남도 서북부에 위치해 있다. 그동안 각종 문물의 집산지이자 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해 왔다. 동쪽에는 차령산맥과 서쪽 우뚝한 덕숭산 기슭에 수덕사 자리하고 있다. 국사당보는 옥토로 바꾸고 농업생산력 증진에 기여했다. 넓은 내포평야의 공급원인 예당호의 수려한 호반에서 무한천이 흐르고 삽교천이 합류하여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예산은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여 예부터 부자 고을이다. 독립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와 추사 김정희와 같은 불세출의 예술가가 예산에서 탄생하였다. 예산은 수많은 명현을 배출하여 예향이라 불린다. 추사문화재를 비록해서 연중 다양한 문화 예술 행사가 열리고 있다. 예산은 조선시대 문인, 학자, 예술가 다양하게 배출하였다. 귀중한 문학적인 작품과 관련된 유적이 다양한 형태로 남아 전한다. 그 의의가 매우 크다.
과거로부터 문학은 인간의 삶의 표현이다. 개별화된 구체적인 기록이다. 생명이 있는 표현으로 역사와 변별성을 가진다. 당시대의 개별적인 삶과 그 삶을 통하여 상상화 된 구체성을 띤다.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위해 문학이 기여했다.
한문학의 문헌상 최초의 예산문인은 고려 중엽 대흥 사람인 한문준과 절의의 문인 청송당 도응 선생이다.
조선시대 문인은 자암 김구, 우천 이약수, 정존재 이담, 선석 신계영, 포저 조익, 아계 이산해, 용계 이영원, 야곡 조극선, 관봉 현상벽, 병계 윤봉구, 암촌 한홍조, 면암 최익현, 수당 이남규와 실학의 문인으로 혜환재 이용휴와 금대 이가환 부자, 추사 김정희 등이 계승하였다. 조선시대 예산문인 박두세의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는 교과서에 실린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 훌륭하신 박두세 선배문인의 작품을 읽을 때 마다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선석 신계영 『월선헌십육경가(月先軒十六景歌) 』가사는 2020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국어영역시험에 출제된바 있다. 신계영은 관직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예산지역의 16개 자연경치를 아름답게 묘사했다. 예산지명을 유래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남정일헌은 예산읍 간양리로 시집와 어려운 생활 속에 여성으로 「정일헌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많은 글을 남겼다. 그곳 간양리의 산천경계애서 벌어지는 사계절의 변화와 느끼는 감응을 한문과 한글, 한시와 가사로 한시로 술회했다. 조선시대 여성정일헌의 문학 활동은 우리나라의 문학사적 가치가 크다.
남인 실학의 성호학파의 본부인 덕산, 여주이씨驪州李氏의 이용휴 가문이 고덕면 상장리에 자연스럽게 정착하여 자유롭게 학문에 정진하여 실학파를 형성하였다. 성호 실학에 있어서 예산(덕산, 고덕)이 중요한 지역임을 문학작품에서 간접으로 여러 편이 나타난다. 이런 사상은 수학을 주목하거나 사학邪學으로 위험시되던 천주교와 관련이 있다.
일제 강점기와 현대시대에도 예산지역에서 많은 문인이 활동을 하였다.
앞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예산 문인의 뛰어난 작품이 우리나라 문학에 끼진 영향 등의 연구가 절실하다. 조선시대 선배문인을 만나 행복하다. 선배문인의 예산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방대한 양의 자료를 설명하기란 역부족이다. 조선시대 예산에서 활동한 문인에 대하여 조사와 연구가 미흡한 관계로 문인개인별 개략적으로 올리려고 한다. 빠진 부분과 자세한 글은 추후 연구하고 정진하여 재차 쓰려고 한다. 그런 방대한 일이 나의 욕심이 아니길 바란다.
나는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지방직 공무원이다. 조선시대 예산문인을 발굴하고 방대한 양을 축소하여 수필집을 발간한다는 것은 욕심이다. 이 책을 발간한 후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감수를 위해 나는 그동안 나름대로 새벽에 일어나 틈틈이 예산관련 책을 읽었다. 예산의 문화재와 문인의 활약상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내가 수필집에 담은 조선시대문인은 꼭 예산이 고향이 아니더라도, 잠시 예산에서 머물렀던 문인도 포함하였다. 예산에서 관직을 하는 동안이나 가족과 살면서 활동한 문인을 포함하였다. 심지어 예산에 묘지가 있는 사람도 예산문인에 일부 포함했다. 이 글을 읽는 예산 독자들은 이점을 폭넓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예산군은 예산지명탄생 1100주년 사업을 앞두고 2017. 6월 ‘디지털예산문화대전 편찬사업’을 정부에 신청하여 선정되었다. 예산군은 국비 1억 5000만원, 군비 3억 5000만원 등 총 사업비 5억 원의사업비로 관련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하고 용역을 주어 예산의 역사, 지리, 정치, 행정, 문화, 인물, 교육, 민속 등 다양한 정보를 발굴하고 기록한 2018년 ‘디지털예산문화대전’을 편찬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주관으로 편찬한 ‘디지털예산문화대전’은 기존의 책자위주에서 발간 방식을 탈피했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웹 서버 디지털 방식으로 다양한 사진과 정보를 수록하여 검색하면 필요한 자료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했다.
조선시대 예산문인 소개한 이 책의 글은『디지털예산문화대전』과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검색하여 대부분을 인용하였다.
조선시대 초기 예산지역의 문학은 조선 4대 명필이며 인수체의 창시자이며, 문장가였던 「화전별곡」의 자암自庵 김구金絿(신암)로부터 시작했다.
조선중기에는 우계 성혼과 성호 이익의 조카로 성호가학을 이여 왔으며,『혜환시초(惠寰詩抄)』의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고덕)는 아들 이가환과 함께 당대 최고의 한시 작가였다.
조선후기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신암)은『완당전집(阮堂全集)』에 300여 수의 한시를 남겼다.
가사 문학 작품으로는 신계영의 『선석유고(仙石遺稿)』에 나오는 「월선헌십육경가月先軒十六景歌)」이 전한다. 일본통신사, 속환사로 일본과 중국을 넘나들었던 『선석가사(仙石歌辭)』의 선석仙石 신계영辛啓榮(신암)과, 동암東岩 박두세朴斗世(대흥)의 고소설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등은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명맥을 이어갔다.
『정일헌시집』을 남긴 예산여류 시인 남정일헌南貞一軒(예산읍)은 조선후기 예산문인을 이어갔다.
일부 언급하였지만, 예산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가 많았다. 성리학자 많이 배출하였다. 앞으로 이런 예산문인에 대한 자료 발굴 수집은 필요하다. 또한, 예산군에 산재되어 있는 예산문인과 관련된 유적 발굴도 요구된다. 글을 발표한 후 예산지역에서 다양한 문학포럼과 선조 예산문인의 발굴을 위해 세미나 개최 등이 자주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것은 후배 예산문인의 몫이며 사명이다.
지난 5월 덕산 가야산 주변 ‘가야구곡’을 다녀왔다. 유구한 세월동안 화려한 자태를 뽐내던 문화재 흔적이 변색되어 있어 조선시대 문장가들이 칭찬일색의 흔적은 반감되었다. 덕산면 옥계리 ‘옥병계’에 산라 때 서령(서산)태수로 왔던 고은孤雲 최치원이 바위에 새긴 ‘세이암洗耳嵓’ 석자 글자와 숙종조때 죽천 김진규 판서가 덕산으로 귀양을 왔을 때 이곳 경치를 좋아하여 자주 방문하여 귀양의 시름을 달랬던 이곳 암벽에다 새기어 남긴 ‘옥병계玉屛溪’ 와 성수침이 주자서체로 ‘수재대水哉臺’ 석자 글씨를 보는 순간 만감이 교차되었다. 책에서 읽었던 전국의 대학자와 관료가 이곳에 모여 학문을 토론 한곳이다. 입구 바위에 이병제李秉悌, 하정일河靖日 등 여러 사람의 이름이 바위 이곳에 새겨져 남아 있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수년전 군으로부터 개발행위허가를 받아 ‘옥병계’ 글자 아래 부분 하천을 메꾸어 글자가 도로변 밑에 있어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았다. 이곳 ‘옥병계’는 관료들이 즐겨 찾던 예산의 유서 깊었던 명소이다. 소중한 문화재의 의미를 다시 살렸으면 한다.
최근 ‘충남문화재단’에서 이번 수필집 발간을 위해 창작지원금 일부 지원을 받았다. 가문의 영광이다. 앞으로 나의 문인활동은 예산에서 지속될 것이다. 내가 쓴 제4집 『평정이 바라본 조선시대 예산문인』수필집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이해해주시고 격려를 해주었으면 한다.
앞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예산문화재 ‘예산군의 旌閭(孝行)이야기’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예산군의 정려문과 예산문인 발자취 연구를 위해 주말마다 함께한 아내 최금비님 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1. 조선전기의 예산문인
조선 전기 예산군 문인으로는 김구, 성수침, 성혼, 이약수, 이담, 이계전, 성수종 등이 있다.
김구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구의 학문은 도학을 주로 하는 경학의 연구가 극에 달했다. 시문에도 능숙하였다. 또한, 음률에도 능통해 중종이 악정樂正에 임명하는가 하면 조선 전기 서예계의 4대가로 손꼽힐 정도로 글씨에도 뛰어났다. 남해 유배지에서 경기체가 형식으로 지은 <화전별곡>은 호방하게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드러낸 문학적인 작품이다. 사후에 예산 덕잠서원德岑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자암집(紫巖集)』이 전한다.
예산지역의 서원은 『덕잠서원德岑書院』과 봉산면 봉림리 『회암서원晦巖書院』 이 있었다. 대원군 때 훼철된 이후 서원은 현재 터만 남아 있어 아쉽다.
회암서원에 배양된 조극선은 일기문학의 대가이다. 『인재일록』과 『야곡일론』은 표제를 달아 내용을 분류하는 방식으로 일기를 작성되어 있어 문학적 가치가 크다.
덕산현 출신으로 회암서원에 제향된 정존재靜存齋 이담李湛, 조극선趙克善[1595~1658], 취암醉庵 이흡李洽[1549~1608], 풍애楓崖 안민학安敏學 등은 학식과 덕행이 높아 후세의 모범이 된 인물이다.
1543년 성수종이 덕산현감에 부임하여 성혼, 성수침 일가가 예산지역에서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였다. 우계학파 우계 성혼을 중심으로 한 성혼은 율곡의 학문적 동지로서 학문과 실천에 훌륭하여 많은 존경을 받았다. 성혼 부친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고려말 정몽주, 길재의 학통을 이어 받았다.
1.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 ∼1534]
김구의 본관 광산光山.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이다. 1488년(성종 19) 서울 동부 연희방[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에서 출생했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493년 6세 때 이미 ‘석류石榴’ 한시를 지었다. 1507년(중종2)20세 때 생원시와 사마시 모두 장원했다. 1513년(중종 8) 문과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왕도 정치의 쇄신을 꾀하다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개령, 남해, 2)임피 등으로 14년간 유배되어 1533년에 46세 때 풀려났다. 남해 유배 중 부모가 사망하자 유배지에서 예산으로 돌아와 여막을 짓고 부모님 산소에서 시묘를 지내며 살았다. 뒤늦게 복을 입고 눈물을 흘려 묘소 근처에 풀이 마를 정도였다. 예산에서 조선시대 효행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34년 11월 47세의 나이로 예산 서면西面 3)왕자지王字池 별장에서 사망을 했다. 선조가 종계변무 때에 김구가 지은 표문을 써서 명나라의 허락을 얻었다하여 특별히 이조참판에 추증하고 4)광국종훈光國從勳에 기록했다. 아들 균은 사마시에 장원을 했으나 일찍 사망했다.
글씨에도 뛰어나 안평대군·양사언·한호 등과 함께 조선 4대 명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김구의 서체는 강건하고 독특하여 거주하던 인수방의 이름을 따서 인수체仁壽體라고 하였다. 『고향을 그리면서』은 한시로 유배생활을 겪으며 내적심정을 토한 작품이다. 남해 생활에서 고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로 읊기도 했다. 남해 유배지에서 경기체가 형식으로 지은 <화전별곡>은 호방하게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저서 『자암집(自庵集)』, 유품 중종이 하사한 벼루와 교지 『자암필첩(自庵筆帖)』, 『우주영허첩(宇宙盈虛帖)』, 『이겸묘지(李謙墓誌)』 등의 필첩이 있다.
예산의 덕잠서원과 전라북도 군산시 임피의 봉암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 부인 김해김씨의 묘와 함께 있다.
1) 개령: 전북 군산시 옥구읍
2) 임피 : 지금의 전북 군산시 옥구읍
3) 왕자지王子池 : 예산군 신암면 화손옹주 묘 아래쪽에 있던 연못
4) 광국종훈光國從勳 : 1590년 선조 때 명나라 역사에 이씨 세계가
잘 못 기록된 것을 시정함
1. 석류(6세 때 지음)
보물을 아끼면서 몸을 아낄 줄 몰랐다니
고호의 어리석음이 가소롭구나.
어쩌다가 스스로를 아끼지 못하여
몸을 갈라 밝은 진주를 숨겼단 말인가?
2. 오작교(여덟 살 때 운을 받아서 지음)
가을 하늘 은하수는 더욱 멀고먼데
까마귀와 까치가 어찌 먼 거리를 어그러뜨리리.
누가 인간 세상에 좋은 소식을 전할까
푸른 하늘의 신비한 만남은 다리를 필요치 않는다네.
산수 내린 골에 삼색도화 떠 오거늘
내 성은 호걸이라 옷 입은 채 들오이다.
꽃이란 건져 안고 물에 들어 솟과라.
3. 고향을 그리면서
고향 그리워 날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니
소식은 아득하고 바다와 산은 겹겹으로 이어졌네.
음식이 떨어지자 아내는 약을 넣어 보내왔고
그릇이 왔는데 어머니께서 만드신 옷가지를 부치셨네.
궁핍한 길에 홀로 시를 읊조려도 흥을 두기 어렵고
근심하는 곳에 술잔을 깊이 마시니 효과를 보기 쉽구나.
스스로 생애가 남쪽 땅에서 늙어갈 것을 아니
한 줄기 시원한 소리는 북쪽에서 온 기러기일세.
4. 화전별곡花田別曲
제 1장
天地涯(천지애) 地之頭(지지두) 一點仙島(일점선도)
左望雲(좌망운) 右錦山(우금산) 巴川(봉내)高川(고내)
山川奇秀(산천기수) 鍾生豪俊(종생호준) 人物繁盛(인물번성)
偉(위) 天南勝地(천남승지) 景(경)긔엇더닝잇고
風流酒色(풍류주색) 一時人傑(일시인걸) 再唱(재창)
偉(위) 날조차 몃분이신고
하늘의 가이오, 땅의 머리인, 아득히 먼 한 점의 신선 섬에는,
왼쪽은 망운 산이오, 오른쪽은 금산, 그 사이로 봉내와 고내가 흐르도다.
산천이 기이하게도 빼어나서 유생․호걸․준사들이 모여들매, 인물들이 번성하느니,
아! 하늘의 남쪽 경치 좋고 이름난 곳의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노래․술․아리따운 여인들과 더불어 모여들었던 한때의 인걸들이,
아! 나까지 보태어서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제 2장
河別侍(하별시) 芷芝帶(지지대) 齒爵兼尊(치작겸존)
朴敎授(박교수) 손저이 醉中(취중)
姜綸雜談(강륜잡담) 方勳鼾睡(방훈한수) 鄭機飮食(정기음식)
偉(위) 品官齊會(품관제회) 景(경)긔엇더닝잇고
河世涓氏(하세연씨) 발버훈風月(풍월) 再唱(재창)
偉(위) 唱和(창화) 景(경)긔엇더닝잇고
河別侍의 치자로 물들인 허리에 띤 黃帶는, 나이와 관작이 겸하여 높으도다.
朴敎授가 손을 휘두르며 흔드는 술취한 가운데 버릇과.
姜綸이 잡담과 方勳이 코골며 자는 모습, 그리고 鄭機가 잘 마시고 먹는 모습들,
아! 품계를 지닌 벼슬아치들이 가즈런히 모여드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河世涓氏가 漢詩의 발인 韻字로서, 겨루는 시 짓기인 吟風弄月에서,
아! 韻을 부르면 화답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제3장
徐玉非(서옥비) 高玉非(고옥비) 黑白頓殊(흑백돈수)
大銀德(대은덕) 小銀德(소은덕) 老少不同(노소부동)
姜今歌舞(강금가무) 錄今長鼓(녹금장고) 버런學非(학비) 소졸玉只(옥지)
偉(위) 花林勝美(화림승미) 景(경)긔엇더닝잇고
花田別號(화전별호) 名實相符(명실상부) 再唱(재창)
偉(위) 鐵石肝腸(철석간장)이라도 아니 긋기리 업더라
徐玉非와 高玉非의 검고 흰 머리가 아주 다르고,
큰銀德이와 작은 銀德이는 늙거나 젊거나 서로 다르도다.
姜今의 노래와 춤․綠今의 장굿소리, 잘 벌었는 學非와 못났는 玉只.
아! 꽃수풀의 아름다움을 오히려 이기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花田의 별호가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하느니,
철석같이 굳고도 단단한 지조라 할지라도 아니 끊어질 리 없도다.
제 4장
漢元今(한원금) 以文歌(이문가) 鄭韶草笛(정소초적)
或打鉢(혹타발) 或扣盤(혹구반) 間擊盞臺(간격잔대)
搖頭輾身(요두전신) 備諸醉態(비제취태)
偉(위) 發興(발흥) 景(경)긔엇더닝잇고
姜允元氏(강윤원씨) 스렝딩소 再唱(재창)
偉(위) 듯괴야 드로리라
漢元今은 글로써 노래부르고, 鄭韶가 풀피리를 잘 부느니,
혹은 바릿대도 치고․혹은 소반도 두드리고, 그 사이마다 잔대도 쳤도다.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몸을 뒤척이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취한 모습들을 갖추었으니,
아! 흥이 발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姜允元氏가 스라렝딩하며 타는 거문고소리를,
아! 듣고서야 잠이 들리로다.
제 5장
綠波酒(녹파주) 小麴酒(소국주) 麥酒濁酒(맥주탁주)
黃金鷄(황금계) 白文魚(백문어) 柚子盞(유자잔) 貼匙臺(첩시대)예
偉(위) 브어 勸觴(권상) 景(경)긔엇더닝잇고
鄭希哲氏(정희철씨) 過麥田大醉(과맥전대취) 再唱(재창)
偉(위) 어제 슬플저기 이실고
綠波酒와 小麴酒에 麥酒와 濁酒 등 여러가지 술에다
黃金빛나는 닭과 흰 文魚 안주에다 柚子盞을 접시대에 받쳐들어,
아! 가득부어 잔을 권하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鄭希哲氏는 밀밭만 지나쳐도 크게 취해버리느니,
아! 어느 때 슬플 적이 있을고.
제 6장
京洛繁華(경락번화)ㅣ야 너 불오냐
朱門酒肉(주문주육)ㅣ야 너 됴냐
石田茅屋(석전모옥) 時和歲豊(시화세풍)
鄕村會集(향촌회집)이야 나 됴하 노라
서울의 번화로움을 너는 부러워 하느냐.
붉은 단청을 올린 지위높은 벼슬아치집 대문안, 거기 있는 술과 고기를 너는 좋아 하느냐.
돌무더기밭 가운데 있는 띠집에서나마, 사계절이 화순하여 오곡이 풍등하게 되면,
이 향촌에서 갖는 모임을 나는 좋아 하노라.
<작품 해설>
자암 김구가 지은 경기체가 <화산별곡>은 문집 '자암집'에 수록되어 있다. 확실한 제작 연대는 미상이나, 작자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경상도 남해南海에 유배되었을 때 그 곳의 승경勝景인 화전의 풍경을 경기체가 형식으로 지은 작품이다.
모두 6장으로 되어 있다. 1장은 화전의 경치, 2장은 교우交友, 3장은 연락宴樂, 4장은 연락 중의 음악, 5장은 술과 안주의 풍부함, 6장은 자신의 생애를 읊었다. 6장은 앞의 장들과 달리 가사체歌辭體의 느낌을 주는 전체의 결락구結落句이다. 제2장만 경기체가의 형식을 따른 정격형이다. 나머지는 모두 변격 내지 파격형을 보인다. 특히, 제6장은 경기체가의 특징인 '위 ~ 경긔엇더 니잇고'라는 감탄 구절이 단 한번도 실현되지 않고 있어 서정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국문학 작품인 <화전별곡>은 호방하게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개인적 생활을 바탕으로 한 사적 작품이라는 데서 경기체가의 변천기에 해당하는 장르적 위치를 볼 수 있다.
2. 성수침成守琛 [1493 – 1564]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중옥仲玉, 호는 청송聽松, 죽우당竹雨堂, 파산청은坡山淸隱, 우계한민牛溪閒民이다. 아우 성수종成守琮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 14)에 현량과賢良科에 천거되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그를 추종하던 많은 사림들이 처형 또는 유배당했다. 1541년 1)유일遺逸 선비로서 후릉참봉厚陵參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우계牛溪 ◌성혼成渾에 은거하였다. 1564년 사지司紙에 임명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퇴했다, 죽을 때에는 집안이 가난하여 장례를 지낼 수가 없었다. 이에 사간원의 상소로 국가에서 관곽棺槨과 미두米豆와 역부役夫를 지급해주고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추증하였다. 기묘사화로 불가능하게 되자, 2)은일隱逸을 일삼고 산간에 묻혀 자기수양에 힘써 이러한 학풍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아들 성혼成渾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이 배출되었다.
1)유일遺逸 : 과거를 거치지 않고 학덕으로 높은 관직에 임명될 수
있는 선비
2)은일隱逸 : 초야에 묻혀 학자로서만 활동함
산거잡영山居雜詠 /산집에서 하릴없이 읊다.
아침 해 흐릿하여 어두운 듯 밝더니만
하늘 끝 조각구름 일어남을 바라보네.
잠깐 사이 두루 합쳐 번드쳐 비 되더니
온 골짝 급한 여울 한소리를 내는구나.
朝日微茫翳復明 臥看天末片雲生
조일미망예부명 와간천말편운생
須臾遍合翻成雨 萬壑崩湍共一聲
수유편합번성우 만학붕단공일성
※미망微茫: 희미하고 아득함, 예부명翳復明 : 어둡다가 다시 밝아짐,
수유須臾: 어느새. 잠깐 만에, 붕단崩湍 : 무너질 듯 쏟아져 내리는
여울물.
<작품 해설>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흐리다가 해가 나는가 싶더니, 저 하늘 끝에서 조각구름이 피어난다. 들창 사이로 구름의 변화를 지켜본다. 잠깐 만에 사방에서 먹구름이 몰려들더니 삽시간에 큰 비를 뿌려댄다. 골자기로 큰 물결이 몰려들어, 내 집을 허물기라도 할 기세이다. 인간 세상 풍파도 이렇듯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 등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줄줄이 귀양 가서 사약을 받는 것을 보고 날씨에 견주어 노래했다.
3.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原, 호 묵암默庵, 우계牛溪,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543년(중종 38) 여덟 살 때 숙부 성수종成守琮이 덕산현감 부임시 아버지를 따라 외할머니와 잠시 덕산 가야사에서 거주하였다. 1544년 기묘사화 후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다.
저서(문집)『금대관집(錦帶館集)』 10책. 저술 『시문초(詩文艸)』 4권 4책, 『시문초』 1책, 『시문(詩文)』 2권 1책,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1책, 『금대전책(錦帶殿策), 성수침의 유고와 아우 성수종成守琮의 『절효선생유고(節孝先生遺稿)』를 부편附編한 유문집 『청송집(聽松集)』
말 없는 청산이요 태 없는
말없는 청산靑山이요, 태態없는 유수流水로다.
값없는 청풍淸風이요, 임자 없는 명월明月이라
이 중에 병病없는 이 몸이 분별分別 없이 늙으리라.
말이 없는 푸른 산이요, 모양이 없는 물이로다.
값이 없이 불어주는 맑은 바람이요, 주인 없는 밝은 달이다.
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건강한 이 몸이 근심 걱정 없이 살겠다.
<작품해설>
성혼成渾은 어려서 초시初試에 들었으나 병病으로 포기하고, 율곡栗谷과 이기理氣의 학문을 서로 토론하였다. 뒤에 율곡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였으나, 자주 물러나고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무언청산無言靑山과 무태유수無態流水를 벗하며,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즐기는 생활을 노래한 시조이다. 말 없는 청산과 꾸민 모양 없는 물을 벗하여 청풍명월을 즐기며, 세상의 속된 욕심으로 근심할 것 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보겠다는 심정이 엿보인다. 자연을 벗 삼아 근심 없이 살려는 심정을 피력했다.
임진왜란 때, 세자 광해군光海君의 부름으로 우참판과 좌참판을 지낸 일 이외에는 60평생을 거의 벼슬과는 인연을 끊고 학자로서만 지냈다. 소재를 다루는 솜씨는 지은이 특유의 독창성이 있어서 독자에게 주는 이미지는 남다르게 참신하다.
4. 우천牛泉 이약수李若水[1486~1531]
본관 광주光州. 자 지원止源, 호 우천牛泉이다. 1486년(성종 17) 현 충청북도 충주시 출생했다.1510년(중종 5) 생원시에 합격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유배되자 성균관 유생 150여 명과 함께 궁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리고 통곡한 일로 중종의 노여움을 사 윤언직尹彦直·홍순복洪舜福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 1521년 평해平海에 유배되어 1531년 대흥으로 이배를 당하고 같은 해 사망했다. 저서로는 『우천유고(牛泉遺稿)』이다.
1605년(선조38) 1)설원雪寃되었고, 1708년(숙종34) 대흥현 우천사牛泉祠[현 우천사우]에 봉향되었다. 묘소는 예산군 대흥면 교촌리 산7-79있다.
1)설원雪寃: 원통한 사정을 풀어 없앰
신묘사월 평해에서 예산으로 옮겨와서
귀양살이 십년에 몸은 병들고
1)씽빈雙鬢이 근년엔 은빛 같구나.
소나기 하늘에서 떨어졌으면 .......
학철부어涸轍浮魚내 신세 소생하련만
- 『우천유고(牛泉遺稿)』 36장
投荒十載炳纏身 雙鬢年來白似銀
투황십재병전신 쌍빈년내백사은
2)霈擇一從天上降 終敎3)涸轍活窮麟
패택일종천상항 종교학철활궁린
1)쌍빈雙鬢: 귀밑에 난 머리털
2)패택霈擇: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모양
3)학철涸轍: 마른 땅의 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라는 뜻.
사람이 아주 궁한 경우를 말함.
<작품해설>
「신묘사월자평해양이예산유감이부 辛卯四月自平海量移禮山有感而賦」와
「대흥촌서독좌유감大興村墅獨坐有感」은 이약수가 1521년 평해에 유배되어
있다가 10년 뒤인 1531년 4월에 예산으로 1)이배될 때 지은 칠언절구 한시이다.
※ 1)이배移配: 귀양살이하고 있는 죄인을 다른 유배지로 옮김
5. 정존재靜存齋 이담李湛[1510~1575]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중구仲久, 호는 정존재靜存齋이다. 예산군 덕산면에 거주하며 일대에서 학덕이 높았던 유우柳藕의 문하가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공조정랑 되어 김굉필의 문인이라 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관직을 박탈당함. 1547년(명종 2) 일어난 이른바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경상남도 양산으로 유배되었다.
저서 『독서연주(讀書鉛朱)』, 『정존수필(靜尊隨筆)』, 『정존재집(靜存齋集)』.
묘소 경기도 파주시 백운산 남쪽 기슭에 있다. 예산군 봉산면 봉림리에 있었던 회암서원晦巖書院에 배향되었다.
6. 이계전李季甸[1404~145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병보屛甫, 호는 존양재存養齋, 시호 문열文烈이다. 1427년(세종 9) 친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집현전학사가 된 이후 다수의 국가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1458년 세조로부터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하지 않고 세조를 도운 공로에 대해 칭송하는 특별 교서를 받았다. 봉산면 봉림리 50-2에 문열공 한산이씨 이계전의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한산이씨 가문은 이홉이 덕산에 입향하면서 세거하였다. 이때 이계전의 부조묘 제향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저서는『청송담』이다. 묘소는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사곡리 가래울마을에 있다.
1452년 문종 2년 『문종실록』 13권, 4월10일 갑술2번째 기사에 “이계전李季甸이 유생 1천70명을 거느리고 헌가요 獻歌謠를 했다.”라는 한시 노래 말이 실려 있다.
임금이 재전齋殿에 돌아와서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의장儀仗과 고취악鼓吹樂을 갖추어 궁궐에 돌아오니, 종친宗親과 백관百官들이 조복朝服 차림으로써 시위侍衛하였다. 도상道上에서 나희儺戱를 설치하고, 또 채붕綵棚을 경복궁景福宮 문전門前에 설치하였다. 성균 박사成均博士 이계전李季甸이 유생儒生 1천 70인을 거느리고 헌가요獻歌謠헌가요를 하였는데, 그 가사歌辭에 이르기를,”
“上還齋殿, 御遠遊冠絳紗袍, 備儀仗鼓吹還宮, 宗親、百官, 朝服侍衛。 道上設儺戱, 又設綵棚於景福宮門前.
成均博士李季專, 率儒生千七十人, 獻歌謠, 其辭曰:”
“상환재전, 어원유관강사포, 비의장고취환궁, 종친、백관, 조복시위。 도상설나희, 우설채붕어경복궁문전.
성균박사이계전, 렬유생천칠십인, 헌가요, 기사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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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임금을 우리가 떠받드니 성덕聖德은 탕탕蕩蕩하여 요상(제)堯顙의 이마와 같았으며, 내가 지은 시詩를 내가 노래하니, 면면綿綿한 질과瓞瓜는 주 왕가周王家에 빛이 났습니다.
백성이 편안하고 풍속이 번성하여 어린애가 부모父母를 사모하듯이 다투어 만수萬壽를 불렀습니다. 신臣의 무리들은 노둔하고 용렬하나 다행히 천재 일시千載一時를 만나서 오늘날을 보게 되었으니, 즐거운 마음을 분발奮發하여 강구연월康衢煙月을 영구히 축원하면서 종사宗社의 안녕을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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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后我仰, 聖德蕩蕩, 類于堯顙, 我詩我歌, 綿綿瓞瓜, 光于周家。
民康俗阜, 嬰慕父母, 爭呼萬壽。 臣輩駑劣, 幸逢千一, 得見今日, 奮肆姁媮, 長言康衢, 歌于蔿于。
아후아앙, 성덕탕탕, 류우요상, 아시아가, 면면질과, 광우주가。 민강속부, 영모부모, 쟁호만수。 신배노렬, 행봉천일, 득견금일, 분사후유, 장언강구, 가우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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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즐거운 마음을 분발奮發하여 국기의 경사 강구연월康衢煙月을 영구히 축원하면서 종사宗社의 안녕을 노래하는 헌가요 일부분이다. 이 헌가요獻歌謠는 문종실록에 등재되어 歌辭가사 전해져 오고 있어 어문학적 가치가 높다가 생각된다.
7. 성수종成守琮 [1495~1533]
자字는 숙옥叔玉, 본관은 창녕, 대사헌을 역임한 성세순成世純의 아들이며, 성수침成守琛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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