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무정도(無情刀)를 얻다.
새벽이 오려는 듯 어둠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고택(古宅)의 대문과 건물의 현관 사이 정원을 주기적으로 돌며 경계를 서던 송정기는 후원 쪽에서 급하게 뛰듯이 걸어 나오는 두 개의 그림자를 보며 긴장했다가 상대의 모습이 정원의 불빛에 드러나자 긴장을 풀었다. 정원에 나타난 사람들은 10여 일 전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며 말을 붙이려던 송정기는 떨어지던 입을 합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다물었다. 그의 전신이 벼락을 맞은 듯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앞선 인영의 뒤를 따르던 30대 중반의 사내와 눈이 마주친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살기를 느꼈던 것이다. 뒤에 가는 사내의 시선이 다시 앞에서 걸어가는 사람에게로 돌아가고 난 뒤에야 몸이 풀린 송정기의 눈에 앞서 가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시선이 향한 사내는 40대 정도의 나이로 보였지만 대단한 미남이었다.
훤칠한 키에 군살을 찾아보기 어려운 몸매였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송정기는 10여 일 동안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이 중년인의 눈빛이 강렬하고 깊이가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비벼야 했다. 이런 모습의 중년인을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중년인의 외관은 급하게 나온 것이 분명함에도 깔끔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구비한 정장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 깔끔함은 지금 중년인의 표정과 친히 어울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 근육은 제멋대로 떨리고 있는데다가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부모를 잃고 길을 헤매는 어린아이를 인상시키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사내의 평정이 완전히 무너져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리둥절해하는 송정기의 시선을 뒤로 하고 두 사내는 정원 한쪽에 만들어져 있는 지하 주차장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잠시 후 지하주차장에서 짙은 썬팅으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검은색 대형 벤츠가 굴러 나왔다. 저택의 대문에 벤츠가 가까워지자 목조로 만들어져 있어 그렇게 열리리라고는 생각되지 많은 대문이 안쪽을 향해 미세한 소음과 함께 자동으로 활짝 열렸다. 벤츠는 둔중한 엔진음을 내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누구도 안을 보지 못하게 하고 싶다는 듯 대문은 다시 자동으로 닫혔다. 닫힌 대문에 그려진 거대한 태극도형이 인상적이었다.
벤츠가 도로에 들어선 이후에도 김주혁은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방금 전 그가 받은 전화에서 조인충이 한 보고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시트에 몸을 기댔다. 몸을 가누려고 했지만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운전을 하며 백미러로 힐끗 김주혁을 본 안상건이 어두운 안색으로 말문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후우.. 괜찮을 수가 있겠나?”
“진정을 하셔야 할 듯싶습니다. 남지부장님을 만나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 진정해야지.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는군.”
안상건도 김주혁이 들은 보고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조인충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김주혁이 경춘가도에 버려져 있는 그들에 대한 조치를 지시하고 그것을 이행한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놈이 그들을 공격할 수가 있었을까? 어디에서 정보가 샜단 말인가? 그리고 왜 또 그놈이란 말인가? 임한! 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
김주혁의 목소리는 철천지원수를 대하는 듯했다. 짙은 살기에 물든 김주혁의 중얼거림에서 상처 입은 맹수가 포효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안상건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한국에 들어와 다른 활동을 하다가 김주혁의 휘하에 들어온지는 열흘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도 회에서 무력을 위해 키운 인물이었다.
김주혁의 승승장구와 몰락에 대한 사정을 모를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그 핵심에 임한이라는자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김주혁을 보좌하며 요 며칠동안 그는 한국지회가 그자에 대해 대단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도 조인충처럼 임한에 대한 한국지회 내부의 경계심은 일정 부분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임한이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현실감이 지나치게 떨어져서 도저히 들은 그대로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자에 대한 생각은 한쪽으로 치워둔 상태였는데 오늘 그자가 한 일은 그의 머리에 벼락을 떨어뜨린 것과 같았다. 그 충격이 그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오늘의 실패는 김주혁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다시 김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한, 그놈이 그 돈을 갖고 사라지게 만들면 안 돼. 반드시 다시 찾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뿐만 아니라 자네도 회에서 설 자리가 없어질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인충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려. 정말일까? 그자가 강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그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조인충이 급박한 상황에서 잘못 보았을 겁니다.”
김주혁의 질문에 부정적인 대답을 하면서도 안상건은 조인충이 잘못 보았으리라는 그의 대답이 그대로일 가능성이 전무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인충과 같은 고수가 착각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조인충의 말을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회 내에서도 강기를 사용할 정도의 고수들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성취를 이룬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은 회의 극비로 분류되는 기밀 사항이기도 했다.
안상건조차도 시현(示現)되는 강기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가 그가 모시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대체 그자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김주혁의 나직한 혼잣말이 입을 굳게 다문 두 사람 사이를 부유하듯 떠돌았다.
김주혁은 다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무너진 평정을 회복해야 했다. 어느새 남국현의 저택이 그의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동편에서 밀려드는 새벽의 여명이 조금씩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한은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태양이 솟아오른 지도 두 시간이 얼추 지났다. 출근준비를 해야 했지만 그는 이층 거실의 소파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등을 소파에 기대고 있는 그의 시선은 정면의 벽에 고정된 채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벽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렇게 정물처럼 정지되어 있던 그의 신체 중 일부가 움직였다.
손이었다. 그의 손에는 묘한 것이 들려 있었다. 흐늘흐늘하게 축 늘어진 물건이었는데 푸르스름한 예기가 흘러나오고 있지 않았다면 허리띠로 착각하기에 딱 좋은 것이었다. 조인충에게서 양도(?)받은 청사편인도였다.
한은 도의 손잡이와 그 끝을 잡아 가슴께까지 들어 올려 살펴보았다. 그는 금속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아서 손에 들고 있는 도의 재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재질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손잡이에서 칼끝까지의 길이는 완전히 펴진 상태에서 90센티미터 정도였고, 손잡이는 20센터미터 정도로 일반적인 도검류보다 짧았다. 그 손잡이에 선명하게 양각된 청사편인(靑蛇鞭刃)이라는 한문이 보였다.
도신은 폭이 손가락 두 개를 포개놓은 것보다도 좁았고 칼끝으로 갈수록 그 폭은 더욱 좁아져서 칼끝 10센터미터 린부터는 창끝처럼 뾰족해졌다.
한은 소파 옆 협탁 위에 놓여져 있던 볼펜을 들어 그 가운데 부분으로 흐늘거리는 청사편인도의 날을 슬쩍 쳤다. 허공을 가르는 느낌이었다. 도의 날과 부딪쳤지만 물건이 부딪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허공에서 반으로 잘린 볼펜이 거실 바닥에 툭하고 떨어졌다. 한의 얼굴에 감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이런 수준의 예리함을 보여주는 도검류를 본 적도 없었고 실재한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현실은 영화와는 달라서 보통 사람이 식칼이나 과도가 아닌 살상용 진검류를 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예 수련을 수십 년 동안 계속해온 한과 같은 사람도 진검을 본 적은 몇 차례 없었다. 그리고 설사 진검을 자주 접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것들 중에 힘을 가하지 않은 상태에서 플라스틱을 잘라낼 정도로 예리한 도검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믿으려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감탄의 기색은 곧 사라졌다. 이런 정도의 병기가 지회의 무력책임자급에게 주어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회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한은 피식 웃었다. 예전에 김주혁과 만나던 회장이란 자가 헬기를 타고 움직이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저들이 상대하기 쉬운 조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들의 꼬리를 잡아 몸통으로 접근할수록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과 부딪치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는 못했다.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한은 도의 손잡이에 적혀 있는 도명(刀名)을 보며 오른손 엄지로 그것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청사편인은 도의 생김새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기는 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손잡이를 잡고 있던 그의 엄지손가락이 반투명한 황금빛 광채로 엷게 휩싸였다. 신비스런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빛이었다.
양각되어 있던 네 개의 글자 위를 그렇게 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몇번 쓰다듬으며 지나갔다. 그의 동작이 계속되면서 손잡이 밑으로 미세한 가루들이 바닥으로 흩날리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청사편인도의 재질은 휘어질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쇠를 두부 자르듯 할 정도로 예리하고 강한 것이었다.
손잡이 부분도 그것은 다를 바가 없었는데 한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을 견디지는 못했다. 그가 손을 멈추었을 때 글자가 양각되어 있던 자리는 손잡이의 다른 부분과 높이가 같아져 있었다. 이미 글자는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을 감싸고 있던 빛이 움직였다. 엄지손가락 전체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꺼지는가 싶더니 검지 끝에서 2센티미터 정도 길이의 가느다란 황금빛이 솟아나왔다.
검지 끝에서 흘러나온 빛은 엄지손가락에서 나던 빛과는 달랐다. 먼저의 빛이 부드러우면서도 신비스러웠다면 지금의 빛은 송곳을 연상시킬 정도로 가늘고 날카로우면서도 단단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한은 그 황금빛의 끝을 도명이 적혀 있던 손잡이 부분 위에서 잠시 움직였다. 그와 함께 손잡이에 글자가 음각되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에서 빛이 사라지자 손잡이에 그가 새로 적어 넣은 도명(刀名)이 드러났다.
‘무정(無情).’
그가 새로 얻은 도에 붙인 이름이었다. 바닥으로 늘어져 있던 무정도가 새로 얻은 이름이 마음에 드는 듯 차가운 푸른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빛은 앞으로 한이 걸어갈 길을 암시하는 것처럼 무정하게 느껴지는 푸른빛이었다. 한은 무정도를 소파 위에 올려놓았던 도갑에 집어넣은 후 옷을 걷어 올려 드러나 있는 오른 손목에 둘렀다. 그의 얼굴에는 평소 거의 볼 수 없었던 만족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산에서 내려온 후 칼을 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산에서 익힌 무예 중 최강이라 할 수 있는 천단무상검도를 펼치기 위해선 칼이 반드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현대에 마음에 드는 칼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몇 곳의 대장간도 가보았지만 그런 곳에서는 진검을 취급하지 않았고 칼 종류를 생산하는 기업체에 진검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진검을 판매한다는 곳도 몇 곳 둘러보긴 했지만 그런 곳에서 파는 진검은 선뜻 구입하기도 어려웠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판매하는 칼들이 그가 원하는 예리함과 강도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고 두 번째는 칼의 형태가 문제였다. 그가 칼을 구하려는 것은 천단무상검도를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함이지만 결국은 회를 상대하려는 것이었다.
특별한 경우 이외에는 칼을 사용할 일이 없다는 뜻인데 회의 인물을 어디에서 만나게 될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특별한 경우이면서도 언제 어디서든 사용가능하기 위해서는 그가 칼을 자신의 몸에 늘 소지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1미터가 넘는 진검을 등에 메고 다니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당장 신문에 날 일이었고 감찰에 불려 다니며 시말서를 써야할 것이다.
무정도는 칼에 대한 그의 고민을 일거에 해결해주었다. 다른 사람이 사용하던 칼을 쓴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무정도를 가져오면서 망설이지 않았다. 무정도는 살기가 너무 강해서 그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와 같은 기물(奇物)을 다시 구한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무정도를 손목에 채운 한은 걷어 올렸던 옷을 내렸다. 무정도의 모습이 사라졌다. 외견상 그가 팔목에 무언가를 차고 있다는 것은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한은 주먹을 거머쥐고 두 팔을 들어올렸다. 그는 얼굴 앞에서 두 주먹을 쥐었다 펴는 동작을 서너 차례 하다가 손을 내렸다.
‘많이 놀란 모양이던데... 회에는 강기를 사용하는 자가 생각보다 흔치 않은 듯 하군. 좋은 사실을 알았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절반의 성공이긴 했지만 실패한 절반과 바꾸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기대보다 못하지 않은 성과였다. 그가 조인충을 마지막에 상대했던 반투명한 황금빛 광채는 강기가 맞았다. 정확한 명칭은 천단무상강기(天壇無常?氣)였다. 그것은 천단무상진기가 구성의 성취를 이루면서 진기가 무형에서 유형으로 변화된 것이었다.
한은 산속에서 보낸 1년 동안 상상 속에나 가능하던 강기를 현실화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한은 입산(入山)하기 전까지 강기란 기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강기를 유형화시키기 위해선 막대한 진기의 무한에 가까운 응축이 필요했다. 하지만 단순히 기를 응축시켜 그 밀도를 높인다고 해서 유형화된 강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강기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무상진기가 팔성에서 구성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은 실패를 거듭하며 강기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실마리를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실마리는 명상과 함께 왔다. 무상진기의 수련으로 몰아일체(沒我一體)경에 빠졌던 그의 마음속에서 어느 순간 강기는 그 비밀의 너울을 벗었다. 각(覺)의 순간이었다.
강기를 이를 수 있는 진정한 비밀은 정신에 있었다. 강기는 그 단어에 기(氣) 자가 들어 있지만 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었다. 내공은 우주에 가득 차 있는 기를 몸 안에 축적시켜 만들어진다. 그때도 정신의 집중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가 내공으로 화한다고 해서 기의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축적될 뿐이다. 하지만 강기는 기가 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막대한 양의 응축된 기가 필요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시전자의 정신이 기(氣)라는 비물질적인 도구를 이용해 외부에 유형화된 것이었다.
한은 명상 속에서 그 비밀을 깨달았던 것이다.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고,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상상 속의 강기는 자연의 이치, 도(道)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끝없는 자기 성찰을 요구하고 강인한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다. 노력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아닌 것이다. 그 때문에 천단무상진기라는 고대의 절기는 그 요결(要訣)에서 오욕칠정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그처럼 강조했던 것이다. 한은 천단무상진기의 세 번째 단계인 연신환허(練神換虛)를 지나 마지막 단계인 연허합도(鍊虛合道)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에서 하산(下山)했다. 그리고 어젯밤 자신이 산속에서 이룩한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았다. 그가 보낸 1년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설도.
그는 조인충과의 대결에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천단무상강기가 도기(刀氣)를 뿜어내는 신병(神兵)을 수월하게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조인충이 그의 무상강기를 보며 나타냈던 반응에서 회 내에 그와 같이 강기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자의 습자가 극히 희귀하다는 것이었다.
한은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근해야 할 시간이었다. 어젯밤의 일은 이미 회의 상부까지 전해졌을 테고 그들은 자신을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궁리하는 중일 터였다.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어제의 일로 회는 한의 뜻을 분명하게 알았을 것이다. 한은 그들에게 그가 회에 대해 침묵하거나 그들에 대한 일을 잊고 살 가능성이 아주 없다는 것을 행동으로 전달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탐색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상황은 어젯밤을 기점으로 급변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강대한 힘으로 그를 제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이 분명했다. 회와 한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고, 한은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관계 악화가 그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의 담담함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커튼이 반쯤 열린 창문으로 쏟아진 햇살이 현관을 향하는 한의 선 굵은 얼굴에 단단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