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부터 이미 식상해져버린 집안 미디어 문화의 산실들은 탐탁지 못한 나머지 외면해 버린 지도 꽤 오랜듯하다.
일상의 시작은 그나마 아침 라디오 클래식 음악(Classical Music) 정도에 의존 벗 삼으려 노력한 편이니 꽤나 괜찮은 조용하고 가장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출발이다.
신문과 방송을 제때 겨누어 본지 하도 오래전 일이라 세간의 동정들 또한 다소 어두운 면면들도 있음이다.
게다가 텔레비전이라고는 간혹 일각 스포츠채널, 내셔널지오그래픽과 역사적 동경의 대상지 소식을 나누는 북한 관련 오락성 방송물들이나 때때로 탐닉해 보는 형편이니 이 또한 매우 이색 이질적이지 않고 무엇이랴
우리나라의 대중매체들은 가히 세계적 분수 그 이상의 과다 폭주로 인구 대비 산재하여있는 예배당들과 더불어 세기의 관심 국가가 아닐까 자문해 본다.
오늘날 언론의 사명과 책임은 무한 역할의 기능으로서 올곧음을 표방하며 논쟁과 쟁의를 통해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해 주는 첨병으로 투철해야 하거늘 상업성 먹이사슬의 굴레에서 자생력을 과시하며 정권과 권력의 시녀(侍女)로서 때때로 진영싸움의 선봉에서 사회갈등을 부추기는 치졸한 도척(盜跖)의 개 역할도 스스럼없이 자행한다.
수십 수백여 개에 이르는 언론매체의 각종 채널들은 한마디로 상업적 패악(悖惡)에 일관된 고정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채 베끼고 모방하는 데 열중 개념 없이 따라잡기에 여념이 없어 보이니 안타깝기 그지없음이다.
삶의 희로애락과 생활 정서적 다큐멘터리나 국민 공감적 멘트를 주제로 한 정의로운 시청자 감동의 방송들은 왜 기획 연출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늘 짜인 각본에 의한 모든 방송사 뉴스들의 보도 내용도 토씨 하나 별반 틀리지 않는 어김없는 수순의 정렬된 모순 함들로 신속 단독 운운 앞다투어 장끼 질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 앵무질은 치졸해 보이기까지 한다.
숭고한 사명의 긴박한 상황들에 앞다투어 제공되는 정보들은 독창적이고 진솔함이
묻어 표출된 강직한 이미지의 연출이어야 하거늘 어찌 된 영문인지 무늬만 화려해 보이려는 자태의 열중함에 우선함은 누군가의 또 다른 주문에 의해서인가 왜? 라는 의구심에 앞서 불쌍함과 측은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막장 연속극과 어쭙잖은 날라리판 연예 오락질 이나 일삼는 모든 방송사들은 하루해가 시작되는 아침 일찍부터 하나같이 동원된 쇼닥터(show doctor)들에 의한 질병 건강 운운 장삿질이나 일삼으며 강박질하고 생사지여의 건강지론은 극과 극을 향진시키는데 열혈 들이다.
교과 원론적인 컨셉들에 의해 창출되는 수많은 과제들의 목표 대상은 순수이성적 삶의 척도에서 느껴볼 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고 반문해 보고 싶음이기도 하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원초적 예방함에 근거 생활의 정도와 실태들을 간과한 특정 인물들과 특정 물질들을 동원한 미궁(迷宮)의 강령들은 누구를 위한 주문들인지 모를 일이다
그저 편성된 연예 오락물의 버거운 상징성들로 제공해 주는 자가당착의 향방들일 뿐이다.
실생활의 척박한 환경들 속에서 일상의 안위를 선도하고 지켜내야 하는 수많은 서민들의 애로(隘路)는 모두의 눈높이로서 마땅하고 당연해야 함이던가 되묻고 싶다
누군들 몰라서 해보지 않는 관심밖이어서 그러는 줄 아는 바보들이 따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인간 본류의 생태적 환경을 멸시한 반뷰티함들과 고상함 등을 표방한 굿것들을 위한 방송들은 연일 모질꼽깝떠는 트로트 날라리판으로 도배해버린 작금의 현실들과 함께 종내 모두가 스타인 양 연말 자화자찬 연예 대상이라는 싼 티가 난 저질판으로 한해를 미화시키며 국가와 국민의 정서적 품격을 하락시키는데 앞장서 오기 일쑤이다.
서슬 퍼런 5공 시절 전두환 때 [3s]라고
screen(영화영상물) sex(섹스), sports(스포츠)가 있었다면
지금의 굥까시절엔 [sat]
shit(개판, 똥, 젠장, 배설물, 거지 같은, 제길), arrest(체포, 구속, 구금, 저지, 억류), trot(트로트)이라고 규정짓고 싶음이다.
남겨짐이 없다.
남겨줌은 없다.
남겨주지 않은 기쁨은 없음으로부터 생산적인 가치관을 창출토록 제시해주어야 한다.
없음이란, 무를 유산해 준 또 다른 진의(眞意)는 자성 유구함의 진수를 경험하면서 순고의 진리를 탐닉해서 유구한 행복을 기원해서이다.
자망(資望)스러운 덕인들이 찾는 예사로움들마저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가지려고 지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면서 탈루의 흔적조차 지우려 애쓰는 모습들은 가관이다.
누군가의 미담(美談)들은 뒤로한 체 세상의 요지경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