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꿈을 꿀 때는 그 꿈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꿈이니까요.
우리는 소설도 진짜라고 생각하며 읽습니다.
하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모순되는 상황은 소설의 본질에서 옵니다.
소설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동시에 믿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둡니다. 우선 나는 이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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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소설 속 단어들을 읽는 게 아니라, 마치 어떤 풍경화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작가가 시각적인 세부 사항을 주의 깊게 묘사하듯, 독자도 상상 속에서 단어들을 커다란 풍경으로 전환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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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의 진정한 희열은 세계를 외부가 아니라, 안에서, 그 세계에 속한 등장인물의 눈으로 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다른 그 어떤 문학 형식도 제공하지 못하는 속도로, 전체 풍경과 찰나의 순간을, 일반적인 생각과 특별한 사건 사이를 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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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운전하면서 버튼을 누르고 페달을 밟고 기어를 변환하고 수많은 규칙에 따라 운전대를 좌우로 돌리고 도로표지판을 읽고 의미를 해석하며 교통 신호를 살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운전자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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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세기 오노레 드 발자크 소설을 자연스러운 실체로 보고, 거기에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세계의 모든 소설가가 불만스러웠습니다.
지금도, 35년이나 소설을 쓰고 내 안에 있는 소박한 소설가와 성찰적인 소설가 사이에 균형을 찾았다고 믿고 싶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어느 시인이 더 소박하고 어느 소설가가 더 성찰적인지에 관한 논쟁에 흥미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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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는 세상을 데카르트주의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한 가지 이상의 사고를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내부에 서서히 현실성의 삼차원, 소설 속 세계의 복잡한 차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서로 모순되지만, 동시에 받아들여지고 묘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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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예술의 심장부에는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적절한 형태를 부여한다면, 현실에 관한 귀중한 정보가 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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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소설 예술은 인간을 심판할 때가 아니라, 이해할 때 가장 고매하고 탁월한 성과를 낸다는 것을 잊지 말고,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않도록 합시다.
소설을 읽을 때 도덕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소설 주인공을 겨냥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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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인 소설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전체 관계망은 책의 분위기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책을 읽을 때 주의를 집중하여 찾고 있고, 찾아야만 하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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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사랑하고 소설을 습관적으로 읽는 것은 논리와 상상력, 이성과 몸이 충돌하는, 중심부가 하나뿐인 데카르트주의 세계의 논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설은 서로 모순되는 사고들을 우리가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고, 동시에 이해하게 만드는 특별한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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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어떻게 소설이라는 장르가 부상하고 허구라는 아이디어가 정착되었는지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서구 세계 작가들이 소설 예술을 수입하여 자국 독자들에게 호소하면서 발견하고 찾아낸 해결책들에 대해서는 별로 알지 못합니다.
특히 서구의 허구라는 개념을 어떻게 자신의 주변에 적용했는지는 더더욱 모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그들이 내놓은 새로운 목소리와 형태의 핵심은 서구의 허구라는 개념을 현지 문화에 유용하도록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금지와 금기 그리고 권위적인 국가의 압력에 맞서 싸울 수 밖에 없는 비서구 세계 작가들은 서구에서 들여온 소설의 허구성을, 마치 한때 서구에서도 그러했던 것처럼, 드러내 놓고 표현할 수 없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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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바로 이것을 위해, 실재와 상상을 혼동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 순간 우리가 느낀 것은 소박하면서도 동시에 성찰적이 되고 싶은 바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소설 읽기는, 마치 소설 쓰기처럼, 이러한 두 가지 정신 상태를 끊임없이 오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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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예술의 강력한 특징은, 우리가 작가를 가장 많이 잊는 순간, 그가 텍스트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작가를 잊는 순간, 작가의 세계가 자연스럽고 실재라고 느끼며, 작가의 거울을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거울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완벽한 거울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거울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소설을 읽기로 결심한 모든 독자는 자신의 취향에 따라 하나의 거울을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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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성은 우리로 하여금 문학을 통해 모든 인류를 상상하게 하고, 세계 문학에 대한 생각으로 이끕니다. 하지만 마신 커피 잔을, 떠오르는 태양을, 첫사랑을 모든 소설가가 각기 다르게 경험하고, 각기 다르게 표현합니다.
이러한 상이성은 소설가의 모든 등장인물에게 이어져, 작가 고유의 문체와 서명을 이루는 배경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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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자들이 나의 등장인물들의 모험을 보며 내가 경험한 일이라고 생각해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 주장에 반박하여 나를 보호할 허구에 관한 이론이 내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소설 이론이 실재로부터 상상의 독립성을 지켜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어떤 독자가 나의 소설에서, 그것들을 ‘나의 것으로 만든’ 나의 진짜 삶의 경험을 감지했다고 말하면, 나는 내 영혼에 대한 은밀한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그 고백을 다른 사람들이 읽기라도 한 것처럼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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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기서 소설 쓰기와 읽기가 주는 즐거움이 두 부류의 독자들에 의해 완전히 망쳐진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1.전적으로 소박한 독자들 : 이 사람들 손에 들린 책이 소설이라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들은 텍스트를 작가의 자사선 또는 경험담을 약간 고친 연대기라고 생각합니다.
2.전적으로 성찰적인 독자들 : 이 사람들 손에 책이 작가의 가장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바탕으로 했다고 아무리 경고해도 소용없습니다. 이들은 모든 텍스트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진 허구라고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들을 절대 멀리하라고 경고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설 읽는 즐거움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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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나는 소설을 진지하게 여기면서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순문학 소설은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으며 우리의 개인적인 결정들이 모여 우리 삶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우리에게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폐쇄적, 반폐쇄적인 전통 사회에서는 소설 예술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소설 예술이 발전하게 되면 소설은 인간의 사적인 특징, 감각, 선택 들에 대한 치밀하게 구성된 문학 서사를 제심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끔 이끕니다.
전통적인 서사를 제쳐 두고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신, 황제, 장군, 군대, 국가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와 선택도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나는 끊임없이 소설을 읽으며 자유와 자신감이라는 감각을 충격적으로 경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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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쓸 때 나의 내면에서 가장 처음 고개를 드는 강한 충동은, 내가 알고 있는 일련의 소재들을 단어를 통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도 말로 표현된 적 없는 삶의 어떤 지대를 탐색해 나와 같은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이 겪는 상황, 생각, 느낌을 처음으로 단어로 옮기는 것입니다.
먼저 내 머릿속에는 사람, 사물, 이야기, 이미지, 상황, 신념,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란히 한데 모여 형성된 어떤 짜임이 있습니다.
이 짜임을 위해 상상한 일련의 뜨개질 본도 있습니다.
캐릭터가 강하건 (내 소설에서 나오는 것처럼) 약하건 간에, 나는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새로운 지대와 아이디어를 탐색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내 소설 속 주인공의 캐릭터는 마치 실제 삶이 그러한 것처럼, 그 안에 경험했고 경험하게 될 이야기와 상황들을 통해 결정됩니다.
소설에서 이야기 또는 플롯은 설명하고 싶은 여러. 상황을 연결하는 어떤 선이며, 주인공은 이 상황들을 거치며 실체가 구체화되는 한편, 이러한 상황들이 잘 설명되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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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것이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소설 예술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순간은 소설가가 정치적 관점이나 소속 정당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문화, 계층, 성별 등에서 우리와 전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려 노력할 때입니다.
도덕적, 문화적,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공감을 통해 동일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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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소박한 (천진하고 즐겁고 쉽게 동일화되는) 면이 성찰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자각하고 소설 기법에 대해 고민하느라 분주한) 면과 갈등을 빚거나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인 사례를 꼽자면, 각각의 작가에게는 다른 사람과 동일화하는 데 어떤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소설 예술은 우리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 우리 자신처럼 말할 수 있는 기량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하여 다른 사람처럼 언급할 때 한계가 있듯이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의 처지에 놓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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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기의 가장 즐거운 측면 가운데 하나는, 작가가 자신을 소설 캐릭터의 위치에 놓고 탐색하고 상상력을 발휘해 나가면서 자신이 서서히 변해 가는 과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소설가는 오로지 주인공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고, 서서히 주인공과 닮아 가기 시작합니다!
나 자신의 관점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소설 쓰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설가로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동일화되고 나 자신 밖으로 나가, 이전에 내가 소유하지 않았던 캐릭터를 가졌습니다.
이렇게 35년 동안 소설 쓰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위치에 나 자신을 놓으며 내 영혼을 길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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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밖으로 나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고, 가능한 한 많이 보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동일화 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소설가는 광대한 풍경의 시적인 면을 포착하기 위해 높은 산으로 올라간 옛 중국 화가와도 닮았습니다.
중국 산수화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위에서 모든 것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시점은 오직 상상만으로만 가능하며, 그 어떤 화가도 실제로 산꼭대기에 올라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중국화를 좋아하는 순진한 사람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소설을 구성하는 것은 전체가 보이는 상상의 어떤 관점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 상상의 관점에서는소설의 중심부도 가장 잘 감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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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에서는, 그러니까 위대한 소설에서는 풍경이나 다양한 사물에 대한 묘사, 짧은 일화, 약간의 일탈, 이 모든 것이 소설 주인공의 심리 상태, 기질, 캐릭터를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어떤 소설을 나뉠 수 없는 신경관들로,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바다라고 상상해 봅시다. 이때 각각의 점 안에는 소설 주인공의
영혼의 일부가 들어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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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역사의 굴곡과 어떤 공동체의 특성에서 찾는다고 생객해 왔지만, 내 생각에 이는 오류입니다.
불멸의 소설 두 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입니다.
우리는 이 두 소설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객관적 시간의 존재를 아주 자주 느낍니다.
그러나 이 두 소설에서 깊은 곳에 있는 감춰진 중심부는 역사가 아니라 삶 그 자체, 그리고 삶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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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작가들의 소설에서 사건은 더 이상 달력과 시계가 기리키는 일직선 위에 놓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주인공들의 기억, 극 중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관과 본능에 따라 전체 풍경이 그려지고 그 안에 사건들이 배치되었습니다.
이러한 근대 작가들은 전 세계 독자들에게 인생을 이해하고 그 유일무이함을 파악하는 한 방법으로서 주관적인 시간에 주의를 기울이게 했습니다.
우리는 근대 소설의 도움으로 우리 자신의 사적인 시간과 순간이 가진 중요성을 발견하고, 소설 주인공의 캐릭터, 즉 그의 정신적 감정적 특징을 소설 속 전체 풍경의 일부로 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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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에게 주는 지식이나 지혜는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적 또는 단어적인 것입니다. 소설과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는 톨스토이 역시 때로 같은 강렬함으로 깊은 곳에 도달합니다.
이 두 작가는 같은 시기, 같은 문화 속에서 글을 썼기 때문에 항상 비교 대상이 됩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주는 지식은 대부분 시각적인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문학 텍스트는 우리의 시각적 언어적 지능에 동시에 호소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는 연극일지라도, 예를 들면 햄릿에서도, 오로지 단어들을 매개로 희열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극도로 극적인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일지라도, 예를 들면 악령도 자살 장면을 드러내놓고 보여 주진 않지만 우리에게 강한 시각적인 인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독자를 아찔하게 하는 모든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 또는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을 읽고 나서 우리 머리에 남는 사물이나 이미지,
장면은 별로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세계가 섬세하고 감각적으로 배치된 사물들로 들끓고 있을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은 텅 비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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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눈앞에 떠올린 이미지가 오로지 단어로 옮겨졌을 때만 의미가 있으며, 단어로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하는 법을 배울수록 머릿속에 있는 시각적, 단어적 사고의 중심부들이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쩌면 이 중심부들은 서로 맞물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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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의 관심을 지속시키는 것은 숲속 나무들이, 한 편의 소설을 이루는 수천 개의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이 평범하고 인간적인 세부 사항들 - 대부분은 시각적인 - 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계속 관심을 둘 수 밖에 없는 것은 한 그루 나무 그 자체보다는 그것들이 주인공들에게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들이 주인공들의 생각, 감정, 캐릭터를 드러내는 방식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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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커다란 그림을 볼 때 모든 것을 마주하고 있다는 흥분을 느끼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분량이 많은 소설을 읽고 있을 때는 전체를 보지 못하는 어떤 세계 속에 있다는 아찔한 희열감을 느낍니다.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려면 소설의 나뉠 수 없는 순간들을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 그림으로 계속 전환시켜 나가야 합니다.
한 편의 소설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단어에서 그림으로 전환해야 하는 수천수만 개의 작은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소설 읽기를 그림 보기보다 더 참여적이며 사적인 일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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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작가의 묘사들을 우리 상상 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해야만 세계와 거기에 속한 사물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라고 합니다.
소설 예술은 ‘먼저 그림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단어로 설명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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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머릿속 한편에서 우리가 현실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감각은 그러한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 줍니다.
내 생각에 이러한 모순된 상황이야말로 우리 안에 있는 깊은 결핍감의 원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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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게으른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작가들은 독자가 머릿속에서 떠올려야 하는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이 독자의 머릿속에서 떠올랐을 때 느낄 수 있는 생각과 감정을 독자에게 말해 버리고 맙니다.
독자의 상상력을 믿는 작가들은 소설의 순간을 이루는 그림을 오로지 단어로써 묘사하고 설명할 뿐,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껴야 할지는 독자에게 맡깁니다.
때로 - 사실은 아주 자주 - 우리의 상상력은 적합한 그림을 그리거나 거기에 맞는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소설을 이해하지 못했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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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쓸 때 작가는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일화하려고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의 중심부를 (멀리 떨어져서 통합적인 관점으로 제대로 조준해 보아야 알아볼 수 있는 소설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의미를) 교묘하고 노련하게 감춘 채 암시를 던져 주려고 노력합니다.
소설 예술의 심장부에 내재된 핵심 패러독스는 소설가가 세상을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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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정치적인 소설은 전혀 정치적 주제나 동기가 없지만,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하여, 가장 거대한 전체를 구성하려는 소설입니다.
그렇게 그 불가능한 임무를 이루어 가장 심오한 중심부까지 다다르려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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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내가 태어난, 상대적으로 가난한 비서구 세계에서는 누구를 또는 무엇을 대변하는가 하는 문제가 문학에서도 소설가에게도 자칫 악몽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비서구 세계의 가난한 나라에서는 작가들이 대부분 상류층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이라는 서구에서 들어온 장르를 사용한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다는 의미이며 독자층도 한정되는 까닭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소설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질지 하는 문제에서, 모든 소설가에게 내재된 자긍심을 뛰어넘는 예민한 감정에 휩싸여 일련의 반응을 보입니다. 튀르키예에서 40년 가까이 소설을 써 오면서 나는 지나친 자긍심과 지나친 비굴함 사이를 오가는 온갖 종류의 반응을 목격했습니다.
내가 느끼기에, 이런 일은 단지 튀르키예 뿐만이 아니라, 독자층이 비교적 제한된 비서구 세계 국가의 소설가라면 어쩔 수 없이 입을 수 밖에 없는 정신적 상처 때문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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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소설 중 표면적으로는 가장 정치적인 소설인 ‘눈’을 쓰기 위해 카르스 시를 여러 차례 방문했습니다. 마음씨 착한 카르스 사람들은 내가 그들에 대해 쓰리라는 것을 알고 내가 질문을 하면 매번 기꺼이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 질문은 대부분 카르스의 빈곤, 부패, 사기, 뇌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누가 나쁜 사람인지 설명해 주었고, 두려워하지 말고 써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도시에 대해, 자신들의 삶에 대해 그 끔찍한 이야기들을 내 손에 들려 있는 녹음기에 대고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돌아가는 나를 버스 터미널로 데려다 줄 때는 매번 한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묵 씨, 절대 카르스와 우리에 관해 그 어떤 나쁜 얘기도 쓰지 말아 주세요, 알겠지요?” 그러고는 비꼬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배웅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버스 좌석에 앉아, 모든 소설가가 그렇듯, 진실을 쓰고 싶은 충동과 사랑받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갈등하곤 했습니다.
나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실러가 괴테에게서 찾았고, 내가 편견의 눈을 통해 미국 또는 서구 작가들에게서 찾아냈던 ‘소박함’에 기대는 수밖에 없겠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고통에 매몰된 나머지, 그 끔찍한 경험들을 정체성의 일부로 끌어안아 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소박함을 지키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지요.
결국 어느 순간 오로지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카르스에 대해 써 버릴 수는 없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어쩌면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소설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소설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서 박물관을 세우려고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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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문학 소설에서 중심부가 무엇인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마치 삶이 그러하듯이 순문학 소설 역시 쉽게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다른 것으로 쉽게 환원될 수 없음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현대의 세속 독자들은 이런 노력이 부질없음을 내심 알고 있으면서도 읽고 있는 소설의 중심부를 찾으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묻지 않고는 견디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찾는 중심부는 바로 인생의 중심부이자 세상의 중심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중심부가 분명한 소설을 읽지 않고, 순문학 소설을 읽는 기본적인 충동 가운데 하나는 중심부가 무엇이며 삶에 관한 우리의 관점과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를 성찰하고자 하는 필요성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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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연쇄 작용에 대해 얘기하면서, 소설이 삶에 대해 말하려는 심오하고 고유한 의미는 형식과 기법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야기를 서술하고 어떤 소설을 구체화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은 곧 새로운 창문을 통해 삶을 바라본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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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설 창작이란 중요한 것에 대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해 중요한 것처럼 언급하는 예술입니다.
이 원칙을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하여 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모든 문장에서, 모든 문단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이해하기 위해 중심부를 찾고 상상해야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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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한 소설가가 창작자이자 예술가로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은 소설 형식을 수수께끼로 구성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해답이 바로 그 소설의 중심부인 수수께끼!
가장 소박한 독자라도 이러한 소설을 읽을 때는 소설의 의미, 즉 중심부를 찾으려면 이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순문학 소설에서 수수께끼는 살인자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진정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보르헤스가 ‘모비딕’을 읽을 때 했던 것처럼!
이처럼 복잡하고 섬세한 문학적 수준에 도달했을 때는 소설의 주제가 아니라 형식이
가장 커다란 호기심의 대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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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중심부라고 하는 것도, 사실 우리 자신이 만든 허구라는 것을 상기하게 됩니다. 소설 쓰기란 세상 또는 삶에 우리가 찾을 수 없는 어떤 중심부를 설정하고, 그것을 풍경 속에 - 독자와 상상의 체스 게임을 두면서 - 숨겨 두는 것입니다.
소설 읽기는 같은 작업을 반대로 하는 것입니다.
독자와 작가 앞에 놓인 것은 오직 소설 텍스트뿐입니다.
일종의 즐거운 체스판인 것이지요!
모든 독자는 그 텍스트를 가지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원하는 곳에서 중심부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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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문학 소설을 읽고 또 읽으면서, 서로 갈등하는 주인공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또 보면서, 나는 세상에 유일한 중심부는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정신과 물질, 인간과 풍경, 이성과 상상이 서로 구별되는 데카르트주의 세계는 소설의 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어떤 힘과 권위의 세계가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소설 읽기란 전체 풍경에 대해 전반적인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풍경을 구석구석 샅샅이 보고, 모든 사람을, 모든 색과 모든 음영을 느끼는 일입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전체 텍스트를 판단하거나 논리적으로 규명하는 데 에너지를 동원하기보다는 우리 상상 속에서 세세하고 뚜렷한 그림으로 재현하고, 그 그림들 속에 들어가 사방에 지각을 열어 두려고 애써야 합니다.
중심부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지각을 끝까지 열고 상상력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소설 속으로 순조롭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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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가 중심부에 대해 다른 사람과 논하는 것은 인생관에 대해 논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긴장들이 우리를 소설에 매이게 하고, 이러한 질문들이 우리로 하여금 호기심의 끝을 놓지 못하게 합니다.
소설 속 풍경에서 전진할수록, 다른 좋은 문학 작품을 읽을수록, 서로 모순되는 목소리, 사고, 정신 상태를 흔들림 없이 믿고 동일화하게 되며, 그럼으로써 중심부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을 통해 독자들은 캐릭터와 작가에 대해 성급히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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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지에 의하면 워즈워스는 “평범한 것에 새로움의 매력을 부여하고 초자연적인 무엇인가에 친근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이성을 습관의 마약에서 멀어지게 하고, 우리의 지력을 우리 앞에 있는 세상의 기쁨과 멋짐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썼습니다.
35년 동안 소설을 써 오면서 나는 이 말이 내게 소설 예술을 가르쳐 준 위대한 작가들, 똘스또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토마스 만을 위한 말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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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스또이가 소설 도입부에 상트페테르부르크행 기차에 오른 안나의 한 손에 소설을 쥐여 주고, 한편으로는 풍경을 통해 그녀의 심리 상태가 드러나도록 창문을 배치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소설 예술의 기본적인 모순을 표시하는 무엇인가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만약 다른 소설이 안나의 손에 들려 있었다면, 그녀가 소설 속 풍경으로 들어가 계속 읽어 나갈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소설 속 풍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똘스또이가 경험하고 연구하고 탐색하여 우리를 끌어들이고자 했던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안나가 손에 있는 책이 아니라 창밖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안나의 눈을 통해 우리 독자들의 눈앞에 전체 풍경이 재현됩니다. 그녀의 시선 덕분에 소설 속으로 들어가 1870년대 러시아에 있을 수 있었으니, 우리는 안나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안나가 손에 들려 있는 책을 읽지 못했기에 우리 독자들은 ‘안나 카레니나’라는 소설을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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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대한 소설들을 읽고, 그런 소설을 직접 써 보려고 애쓰면서 소설에 대해 가장 잘 배우게 됩니다.
니체의 “인간은 예술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예술 작품을 창조하려고 애써야 한다.”라는 말은 지당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