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그를 30번 만날 수 있었다.
마틴 스콜세즈는 1942년생이다.
0/1. 라스트 왈츠 Silence (1978) : 떠나야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을매나 아름다운지
미국 음악사에 대해 무지하므로, 본편의 'THE BAND'의 음악사적 위치에 대해 전혀 논할 자격이 없다.
더불어, 마틴 스콜세즈가 본편에서 행한 음악 다큐멘타리의 연출 변형에 대해서도 음악 다큐에의 문외한으로서
영화사적 언급을 할 자리에 있지 않다. 관객으로서 본편은 밴드 자체의 고별 공연이라기보다 6~70년대 음악인들이
보내는 80년대에 대한 거부처럼 감상되었다. 물론, 본편의 실제 공연은 1976년임에도 이같은 편견은 변경되지 않았다.
이같은 맥락에서 오프닝 전에 '소리를 크게 틀고 봐야한다'라는 큼직한 안내 문장은 오히려 서럽게 오독되었다.
오프닝 이전에 감독과 출연진인 밴드의 대화가 먼저 들리고, 공연 실황보다 앞서 당구 게임을 하는 밴드 구성원의 면면이
프레임에 전시된다. 이는 엔딩에서 그들만 남겨진 고독한 무대에서 왈츠를 연주하는 장면과 비조응의 공명을 생성한다.
실제 공연의 거의 모든 장면은 그들과 관계맺은 뮤지션과의 협연으로 채워졌음을 상기하면 엔딩은 더욱더 비감한 바다.
오프닝의 공연에서 밴드는 어느 공연장의 마지막 무대를 선보이고, 이어진 카메라는 길가에 버려진 자동차들을 담는다.
밴드의 시선일 수도 있는 카메라의 포착은 폐차 직전의 자동차와 밴드를 그리고 70년대 중반의 불안을 우려하고 있다.
프레임은 줄곧 무대를 고수한다. 가끔 건너편의 청중이 포착되기는 하지만, 카메라는 오직 밴드와 그의 지인들을 향한다.
중간중간 삽입된 구성원과 감독의 인터뷰에는 방황하는 자들의 독백이 흩뿌려져있다. 거기에는 심지어, 죽음의 소식도 있다.
개인적으로 음악보다는 로렌스 퍼링게티의 시 詩 'Loud Prayer'의 경박함을 의도한 신성모독의 문장들이 더 흥미로웠다.
마이클 채프먼의 카메라가 이들 밴드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그 자리를 영속화시키기를 염원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밴드의 마지막 공연의 조명등이 서서히 사라지고, 주변의 하얀 등만이 남을 때 이 아련함은 70년대의 悲歌가 된다.
0/2. 노 디렉션 홈: 밥 딜런 No Direction Home: Bob Dylan (2005) : 68은 60년대의 끝에 도착했다.
진정으로 분열하는 자는 감독일 수도 있다. 마틴 스콜세즈는 본편에서 의뢰받은 바에 충실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관심사를
기록하는 데 좀 더 열의를 보인다. 사실상 밥 딜런의 성장 출세기라기보다는 1960년대라는 변화의 시기를 자료 화면으로 거의
그대로 옮긴다. 이것이 곧 밥 딜런을 저항 가요 음유 시인으로 지정하는 시선에 동의하는 면모는 결코 아니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60년대의 상황들이 프레임에서 전시되는 것에 대해 의무와 자긍을 감추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본편은 일렉트릭으로 전환한
밥 딜런에 대한 당대의 반발을 전달하고, 60년대 이후 밥 딜런의 활동을 삭제함으로서 압축적으로 60년대에 거의 머물고 있다.
단순히 일렉트릭, 밴드 등으로 이동으로서의 밥 딜런이 마틴 스콜세즈의 분열자 계보에 놓였다기보다 그를 저항 가수로 지정한
60년대의 한가운데에서 밥 딜런 자신이 완결된 통일성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한 지점에 감독의 또다른 인물로서 밥 딜런이 있다.
노골적인 전기 기타 연주와 야유로 시작한 오프닝은 안개에 쌓인 겨울 나무들로 편집됨으로서 앞선 공연이 선명하게 인지될 수
없음을 진술한다. 마치 작금의 PC 대 예술의 기이하고도 불가능한 대립의 과거사를 소환하듯이, 하나로 고정되기를 거부하는
밥 딜런과 그의 반대편에서 정치적 옳바름에서 정착했던 조안 바에즈는 이 분열의 초상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인터뷰한다.
2부의 오프닝, 거리의 상점 안내문구의 단어들을 교란배치하는 밥 딜런의 행위를 프레임은 오래 지속한다. 물론, 이것이 일종의
언어놀이를 통한 자기변명으로 감지하는 것은 현명한 오독일 수 있다. 아직 완전히 도착하지 않았지만, 이는 거대서사에 대한
포스트 모더니즘의 흉내일 수도 있는 해당 숏은 누군가에게는 포스트모던이 미국에서 받은 환대를 상기하듯이 한낱 상업주의로
선회한 자의 퍼포먼스에 불과할 수도 있다. 본편이 일렉트릭과 포크의 대과거/과거를 교차편집할 때 여기에는 위 지점에 대한
판단중지가 드러난다. 제목 ' No Direction Home'을 정처없음으로 해석한다면 그나마 관객은 참된 공평을 발화할 수 있다.
0/3. 샤인 어 라이트 Shine a Light (2007) : 카메라는 담을 뿐 !
그저 역사적인 공연실황에 불과할 수도 있다. 마틴 스콜세즈는 거의 어떠한 영화적 첨언도 하지 않았거나 자제했다. 물론, 종종
과거 인터뷰 자료 영상들이 삽입되기는 하지만, 이를 해당 공연의 청중들이 아닌 극장 상영시 관객들만이 감상할 수 있다해도
그것들은 그저 일종의 보충 기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오프닝의 흑백 필름은 본편의 제작 과정이 순조롭지 않음을 진술한다.
하나의 통일성으로 구조를 생성해야하는 영화감독과 이와는 달리 매순간의 반응과 감성으로 흐르는 즉흥성 사이에서 본편은
결국 나름의 결론을 구축한다. 그들 곁에 있는 것, 공연순간에서 감성을 포착하는 것, 결국 이들을 비상시키는 것으로 완결된다.
오프닝에서 첫 발화는 믹 재거의 '장난감 인형집 같다'라는 평가다. 이는 뮤지션들이 구조로서의 영화에 대해 내리는 단언이다.
작은 종이 인형으로 만들어진 집의 프레임은 곧 마틴 스콜세즈의 손짓으로 하나의 현장으로 진화한다. 이어서 감독의 헛수고
토로는 본편의 중핵을 직설적으로 고백한다.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고 수백개의 기획도 무산된다는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발화를
굳이 감독 스스로 진술한다. 기획은 혹은 연출은 곧 '인형의 집'인 것이다. 본편은 <라스트 활츠>와도 같이 초반부에 당구게임을
하는 뮤지션들을 삽입한다. <컬러 오브 머니>와는 달리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는 공의 회전성이 두 실황 공연을 지시한다.
공연이 아닌 그것을 카메라로 포착한 본편에서 관객은 과연 이같은 예술적 분열의 징후들을 프레임 안에서 감지할 수 있을까?
이건 결국 카메라의 동선을 통한 영화 언어의 구사를 확인하는 까다로운 감상이 될 것이겠지만, 문제는 이 과정에서 롤링 스톤즈
공연의 감흥이 휘발되거나 배제될 위험이 있다. 본편이 그러하듯 독자 역시 이에 대한 마음가짐을 초반 10분 안에, 공연 시작 전
마쳐야한다. 공연이 종료되고 롤링 스톤즈가 뒷문 출구로 걸어나갈 때 마틴 스콜세즈는 스스로 2번이나 모습을 이형환위하여
연출을 지시하는데, 카메라는 뮤지션을 프레임에 담지 않고 그대로 공연장 현관에서 빌딩 숲을 지나 허공으로 비상함으로서
롤링 스톤즈를 '구르는 돌'이 아니라, 천공의 달과 동일한 위치에 놓는다. 이것이 영화가 40년 경력의 뮤지션에 바치는 헌사다.
0/4.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2011) : 머리에 꽃을.....머리에 음악을
평전이라기보다는 전기다. 위 세 편의 음악 다큐와는 달리 본편은 인물이 이미 육체에서 영혼이 이별을 고한 후에 제작되었다.
물론, 생존 중인 인물에 대한 다큐에서도 하나의 관점 하에서 카메라가 진술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죽음은 이에 대해 어떤
무게를 부과한다. 가령, 본편 속 방송 인터뷰에서도 언급되지만, 마틴 스콜세즈의 <에비에이터>는 이같은 방식의 전형을 보인다.
결국 문제는 감독이 조지 해리슨이란 뮤지션에 대해 가지는 시각인데, 이 지점에서 본편은 기존의 신비화 혹은 대중 우상화에서
그다지 이탈하지 않고 있다. 감독 세계의 중핵인 분열하는 자의 기준에서도 본편의 뮤지션은 입체의 적극성이 사실상 결핍된다.
물론, 사생활이나 동료와의 반목을 부각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정작 조지 해리슨이 인도 종교와 철학으로 전환하는 지점의 내적
사유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고, 그 자리는 인도의 명상, 음악가들이 대체한다. 이는 마치 <노 디렉션 홈: 밥 딜런>에서 밥 딜런이
일렉트릭으로 전환한 심연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것과도 같다. 본편 속 무수한 뮤지션의 가족, 지인들의 인터뷰가 과연 인물을
이해하는 데 적층으로서 기능했는지 의문스럽다. 오히려 기존 자료 필름 속에서 건져올린 파편적인 이미지들의 틈입이 인물의
정좌를 소개하는 활력을 보인다. 수미상관의 꽃밭 속 조지 해리슨의 움직임은 그가 속세에 존재하되, 소속되지 않음을 적시한다.
조지 해리슨이 대중 뮤지션으로서의 길에서 인도 철학으로 옮겨가 그것을 평생 삶의 정도로 도입한 것과 비틀즈의 동료들이
서로 다른 여정을 지속했던 차이가 진술되지 않을 때, 본편은 적잖이 조지 해리슨에 대한 옹호의 위험을 내장하게 된다. 영화 속
다양한 방면, 뮤지션-드라이버-영화계 인물들을 모두 포용했다는 조지 해리슨의 관계의 철학에 영화는 헌사를 보내고 있다.
이는 어쩌면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장벽과도 관련되면서 6, 70년대 서구 히피들의 인도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입장 표명과도
그리 멀지 않다. 본편은 이에 대해 기실 솔직하거나 용감하지 못하다. 그것이 평전 아닌 전기로서 본편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