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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溪 理發說의 易學的 理解
송 인 창(대전대)
[한글 요약]
本 論文의 主要內容은 退溪의 易學思想을 退溪의 哲學과 關聯시켜 退溪 易學思想의 基盤, 退溪 易學思想의 內容과 特性, 退溪 易學思想의 現實的 具現 等의 問題이다.
1) 退溪 易學思想은 周易을 占筮의 冊으로 認識하고 그 바탕 위에서 義理易과 象數易을 綜合한 朱子의 解釋에 基盤하였다. 그 核心은 河圖洛書와 先後天易을 自身의 역學體系 안에서 統合하여 易道를 밝히고 天下萬物의 所以然 法則과 當然法則인 理를 宇宙萬物의 本源이자 總則으로 보는 理學의 哲學體系의 竪立이다.
2) 退溪는 朱子 易學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體用一源’의 論理로서 河圖와 洛書를 分析하고 ‘理發說’의 哲學體系를 定立하였다. 이와 같은 易學적 立場은 朱子와의 差異를 分明하게 方向지었고, 또 그 差異에 의해 哲學的 內容이나 性格을 보다 뚜렷이 浮刻시키는 틀을 마련하였다. 理優位論的 理氣二元論에 바탕을 두고 理를 ‘自發․自動․自到․能生․先動’하는 活物로 規定하는 哲學體系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退溪는 用보다는 體를 爲主로 하여 體用關係를 論했고 또 理의 絶對性과 理의 能動性을 强調하는 尊理哲學을 竪立하였다.
3) 退溪의 現實認識 乃至 具現은 그의 尊理哲學을 社會 現實에 適用․發展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退溪의 理尊氣賤 思想이라던가 ‘理發而氣隋之’는 當時의 거듭되는 黨爭과 士禍 속에서 社會的 不條理와 非本來的 狀況이 極盛을 부리던 混亂된 現實과 時代的 狀況에 대한 應答의 結果였다. 이로써 退溪는 ‘能發能生’하는 命物者․主宰者로서의 理에 合致되고 따르는 現實만을 自身의 참된 現實로 認定하였다. 退溪에게 있어서 참된 現實이란 人爲的 慾望에 의해서 造作되거나 屈折됨이 없는 天理․道心으로서의 原理的 世界였고, 人間 삶의 本源性이며 絶對的 標準이 되는 理가 私事로운 人慾을 克復하고 스스로 自己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道德的․倫理的 價値의 世界였다. 때문에 理의 참다운 意味를 現實的으로 具現할 수 있는 人間의 內面的 道德性과 理의 絶對性을 드러내는 實踐 行爲를 强調하였다.
주제분야 : 한국철학, 유가철학, 역학
주 제 어 : 퇴계, 이발설, 하도낙서, 체용일원, 천리, 도심
1. 서언
退溪 李滉(1501-1570)의 철학사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또 그의 易學思想에 대해서도 논의가 없지는 않았다. 그렇기는 하나 퇴계의 역학사상을 그의 철학과 관련시켜 면밀하게 검토한 체계적인 연구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필자는 퇴계철학의 독창성을 담보해 주는 理發說의 이론적 근거가 역학사상, 특히 河圖洛書의 體用論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하도낙서의 체용론만으로 퇴계철학의 특징을 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理發說을 해명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들 가운데 그의 易學사상에서도 그 일단을 고찰할 수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퇴계가 문인인 鄭子中에게 보낸 글의 한 대목 “하도낙서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곧 理數의 근원이고 聖人이 周易 繫辭에서 이미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버리고 易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1)라는 말에서도 이러한 고찰의 타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퇴계 역학 전반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요약된다. 퇴계 역학사상의 기반은 무엇이며, 또 그 내용과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이 그의 현실인식 내지 구현과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가? 또한 퇴계의 역학이론과 준엄한 현실인식의 전개 과정에서 그가 지녔던 인간의 善意志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尊理 의식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퇴계의 철학과 삶 전체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고찰에서 얻어지는 성과에 따라 퇴계철학의 다른 국면들에 관해서도 보다 깊고 새로운 의미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자는 퇴계 역학사상의 기반, 내용, 특성 및 현실구현의 문제를 순차적으로 논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의 검증을 통해 우리는 퇴계 역학의 구조와 특성을 새로이 조명하는 관점을 얻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퇴계 理發說의 체용적 구조와 尊理의식을 정밀하게 살필 수 있는 전망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退溪 易學思想의 基盤
1) 義理易과 象數易의 綜合
退溪의 易學思想에 대한 본격적 논의에 앞서 먼저 朱子의 易說을 간략하게나마 언급하고자 한다. 퇴계의 역설은 朱子의 입장․해석의 기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본 연구의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윤곽을 마련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易理를 파악하고 표현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曆數論理와 卦象論理가 바로 그것이다. 역수논리는 易理의 본질적 내용인 ‘變化之理’를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이 둘이 二元的인 것은 아니지만, 수리나 괘상은 하나의 표현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서, 역리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수리를 이용할 수도 괘상을 이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2) 여기에서 周易을 占筮의 책으로 보는 상수역학과 사상과 철학의 책으로 보는 의리역학의 구별이 나오게 된 것이다. 朱子는 이 둘을 겸하여 역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마련하였고, 또 이를 통해 宋代의 새로운 시대 이념과 윤리관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다름 아닌 易學啓蒙과 周易本義라는 저서이다. 易學啓蒙은 朱子가 周易을 卜筮의 책으로 규정하고 정이천의 易傳에서 결여되었다고 보여지는 象數易을 보완․강화시킨 것이고, 주역본의는 의리에 중점을 두면서도 圖書學과 象數學을 받아들여 정이천의 의리학을 발전시킨 책이다.
재언할 필요도 없이 朱子는 기본적으로 卜筮의 시각에서 周易을 이해하였다. 다음의 예문들은 이를 입증하는 좋은 단서가 된다.
易은 본디 卜筮의 책이라서 후인들은 다만 복서에 그쳤다. 王弼에 이르러서는 (易을) 老莊의 학으로 풀이하였다. 그 뒤로는 사람들은 단지 理만을 위주로 하고 복서로는 여기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역시 잘못된 일이다.3)
聖人이 상을 살펴서 괘를 그리고 시초를 셈하여 효의 이름을 지어, 천하의 후세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의심스러운 것을 해결하고 망설임을 결정하여 길한 것과 凶한 것, 후회함과 인색함에 미혹되지 않게 하였으니 그 공은 대단하다 할 것이다.4)
文王의 卦辭와 周公의 爻辭는 모두 卜筮를 위한 것이었다. 후대에 孔子는 이 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어떤 이치가 있어서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음양이 消長하고 盈虛하는 이치로부터 進退 存亡의 도리를 이끌어 내었다.5)
위에서 보듯이 朱子는 周易을 복서의 책으로 인정하였고, 또 그것을 통하여 聖人이 作易한 뜻과 우주생성변화원리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주자에 의하면 복희가 作卦하고 문왕․주공이 卦爻辭를 짓고 孔子가 十翼을 지었는데, 그것은 공자의 十翼을 빼고는 모두 占筮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주자는 “내가 보기에 성인이 易을 지으신 것은 오로지 卜筮를 위해서였다. 후대의 선비들이 이것이 卜筮書임을 말하기 꺼려하고 그것이 가진 卜筮의 뜻을 전적으로 추구하지 않음으로써 정력을 낭비하였던 것이다.”6)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朱子가 易이 가진 의리적 측면을 전적으로 무시하거나 배척하고 卜筮의 기능만을 강조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괘효상과 괘효사로 이루어진 역경과 孔子의 십익을 구분해야 한다고 하면서 “孔子가 傳을 찬함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의리로서 가르침을 삼게 되고, 복서만을 오로지 하지 않았다.”7)라고 한 말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여기서 주자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易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복서 기능의 회복과 그것의 철학화에 있다고 할 수 있다. 朱子의 다음 말은 이를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가 된다.
易이란 책은 본래 卜筮를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의리가 정미하고, 광대하게 모든 것을 갖추어 하나의 방법으로 논의할 수 없다. 대개 이 理가 있으면 이 象이 있고, 이 象이 있으면 이 數가 있으니 각각 묻는 자에 따라 뜻을 느껴서 통하게 해준다. 예컨대 ‘利涉大川’이란 말은 강을 건넌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험난을 헤쳐나간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미리 고정시켜 설명할 수 없다.8)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朱子의 역 이해가 卜筮와 의리와의 종합을 시도하고 그것을 통하여 劃掛 作易한 성인의 참뜻을 밝히려고 한 데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경우 의리가 體가 되고 복서가 用이 됨은 물론이다. 朱子가 의리역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漢易 象數學을 배격하고 상수에 의해 점을 치는 풍조를 배척하여 周易을 점복술에서 해방시켰다.”9)는 정이천의 易傳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하여 주자는 “易은 다만 하나의 빈 사물”10)이고, 易을 읽을 때는 먼저 物象과 卦․爻辭와의 관계를 살펴 경문의 본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고 하면서 伊川 역학의 문제점을 아래와 같이 비판하였다.
程子는 ‘理는 형체가 없으므로 象을 빌려 뜻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여 先儒의 고착되고 지리한 폐단을 깨뜨려 후학들이 卦爻辭와 占을 완미할 수 있는 방도를 열어 주었으니 매우 훌륭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풀어놓은 뜻을 살펴보면 직설적일 뿐 易에서 象을 취한 근거가 없어『시경』의 比․興이나『孟子』의 비유와 같이 여겼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다면「說卦傳」의 지음이 『周易』과 관계없는 것이 되고, ‘가깝게는 몸에서 취하고 멀게는 사물에서 취하였다.’라는 말이 또한 군소리가 되고 말 것이다.11)
朱子에 의하면 易의 괘효사는 ‘空說의 道理’, 즉 추상적 의미이므로 周易의 해석은 반드시 象을 취한 근거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朱子는 伊川과 달리 卦變論과 十二辟卦論 및 互體 등의 兩漢 象數易學의 이론들을 卦爻辭 해석에 과감하게 수용하게 된 것이다.12) 그렇다고 朱子가 漢代 상수역 이론을 전부 받아들이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생각한 바 漢代 역학자들은 「說卦」의 物象에만 고집한 결과 역학과는 무관한 번쇄한 이론적 천착이라는 문제를 야기시켜 역학의 본의를 왜곡시키고 말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3) 그리하여 朱子는 漢代의 상수학자나 왕필 이후의 의리학자나 “둘 다 모두 한쪽에 치우쳐서 의심나는 것까지 억지로 해석하고자 한 병폐가 있다.”14)고 혹평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朱子에게 있어서 周易은 복서이며, ‘역이란 하나의 비어 있는 사물’일 뿐이다. 朱子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특히 복서 기능에 대하여 비교적 합리적인 해설을 가하였고,15) 또 점치는 방법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周易, 「繫辭傳」에 근거하여 옛 筮法을 새롭게 복원시켜 이를 역학계몽 「明蓍策弟三」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점은 그 좋은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朱子의 관심과 노력이 물론 卜筮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朱子의 주된 관심은 복서역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원리를 해명하는 데 있었다. 그가 周易, 「繫辭傳 上」 11장의 ‘神以知來, 知以藏往’을 풀이하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에서도 이 점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한 괘 속에는 무릇 爻卦에 실려있는 聖人이 말한 내용이 모두 이미 드러나 있다. 바로 그 도리가 곧 ‘지난 일을 온축함’(藏往)이란 말이다. 그리고 점쳐 이 卦를 얻어서 이 도리로 말미암아 미래의 일을 추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앎’(知來)이란 말이다.16)
이처럼 朱子는 易을 ‘비어 있는 사물’로 간주하고, 占辭 속에 숨겨져 있는 道理를 밝혀내는 작업을 통해 “周易에 온축된 추상적 도리로부터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에 관한 인식”17)을 끌어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朱子는 성인들이 易道를 드러내는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각각의 차이가 있지만 보편적 원리, 즉 道理를 말한 점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이 점은 朱子의 다음 말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易이란 책은 세 분 성인을 거치면서 체재가 달라졌다. 복희씨의 象, 文王의 辭는 모두 복서에 의거하여 가르침을 삼았으나 그 법은 각각 다르다. 孔子가 傳을 찬함에 이르러서는 한결같이 의리를 가르침으로 삼게되고, 복서만 오로지 하지 않았다. 세 분 성인이 어찌 고의로 달리한 것이겠는가. 세속의 순박함과 잡박함, 안정과 난리의 상태가 달랐으므로, 그 교법으로 삼는 내용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道는 같지 않음이 없다.18)
위의 예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易學을 연구하는 근본 목적은 괘효상과 괘효사에 갖추어져 있는 ‘사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추상적 도리’를 밝혀내는 데 있다. 朱子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劉牧의 圖書易과 邵康節의 象數易을 자신의 역 철학 체계에 포함시키고 그것을 심도있게 탐구하였다. 그 바탕에는 易을 變易과 交易의 두 가지 뜻을 지닌 것으로 보는 朱子의 역학관이 내재해 있다. 朱子에 의하면 易은 변역이고 교역일 뿐이다. 변역이란 유행한다는 뜻이고, 교역이란 서로 상대한다는 뜻이다.19) 이 경우 流行變易이란 轉化를 가리키고, 待對交易이란 對立을 가리킨다. 周易을 논하면서 변역을 강조한 사람은 정이천이고, 교역을 강조한 사람은 소강절이다. 朱子는 이 둘의 설, 즉 변역설과 교역설을 자신의 역학체계 안에 끌어들여 종합하였다. 주자의 河圖洛書와 先後天易에 대한 탐구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를 좀 더 부연한다면 朱子는 이론적 배경을 달리하는 河圖洛書와 先後天易을 자신의 역학체계 안에서 통합하고 이의 연구를 통해 易道를 밝히고,20) 천하만물의 당연법칙과 소이연 법칙인 理를 우주만물의 본원이자 總則으로 보는 理學의 철학체계를 더욱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21) 다음 장에서 살펴 볼 퇴계 易學思想 역시 이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퇴계는 朱子의 ‘상수’와 ‘의리’를 계승하여 이를 하나로 귀결시켰고, ‘交易’과 ‘變易’의 종합적인 역학사상을 터득하여”22) 體用一源의 본체관23)에 입각한 理發說을 주창하였기 때문이다.
2) 河圖洛書의 體用關係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朱子 易學의 특성은 그가 周易을 占筮의 책으로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의리역과 상수역을 종합하고 또 그것을 통하여 易理를 해명하려고 노력한 데에서 찾아진다. 이는 朱子가 ‘상수’를 떠나 ‘의리’만을 고집하거나, 괘효상과 괘효사에 천착하여 역리를 견강부회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태도 또한 찬성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朱子는 하도낙서와 선후천역의 연구를 통해 만물의 존재구조를 밝히고 거기에서 理를 근본으로 하는 철학체계를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이 논문의 주제가 되고 있는 퇴계 역시 ‘理數學’24)의 시각에서 만물의 존재구조를 밝히고, “理를 만물을 주재하는 至上의 입법자로 규정하는”25)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여기에서 ‘理數의 學’이란 상수와 의리를 종합한 學을 의미하며 혹은 數理學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면 하도낙서에 대하여 퇴계가 취한 기본적 태도는 어떤 것이었던가? 그의 啓蒙傳疑를 통해 이 문제를 풀어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易道를 통찰하고 이를 표현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曆數原理와 卦爻原理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 역수논리는 “天之曆數의 시간적 생성변화원리를 推數論證하는 理數원리”26)를 말하는데, 그것은 언제나 역수의 생성변화 관계를 통해서 표상된다. 이와 같은 역수원리를 陰陽的 측면에서 표상한 것이 다름 아닌 河圖洛書이다. 그런데 이 하도낙서가 周易에서는 성인의 劃卦作易의 근거 내지 준칙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천지변화와 인간세의 길흉을 표상하는 神物로서 규정되고 있다.27) 오늘날 현존하는 하도낙서의 圖象이 완성된 것은 宋代의 朱子와 蔡元定에 이르러서이고, 그 결과물로 집적된 것이 소위 易學啓蒙이다. 朱子는 여기에서 河圖十數說을 주장함으로써 기존의 洛書九數說과 더불어 易道의 數的 체계를 하도낙서와 연계시켜 정착시켰다. 朱子는 특히 하도와 낙서를 體用․ 經緯․ 表裏 관계로 이해하고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劉歆이 말하기를 복희씨가 天命을 계승하여 王이 되었을 때 하늘에서 내려 주신 하도를 받아 이에 근거하여 그린 것이 八卦이며, 夏禹가 홍수를 다스릴 때 하늘이 주신 낙서를 받아 그것을 법칙으로 하여 펼친 것이 홍범구주이다. 하도와 낙서는 서로 經緯가 되며 八卦와 九章은 서로 표리가 된다.28)
하도는 5개의 生數로서 5개의 成數를 거느리며 같은 방위에 거처한다. 대개 이는 그 완전한 수를 들어서 사람에게 보여 그 일정함을 말하니 이는 數의 본체를 말한 것이다. 낙서는 5개의 홀수로서 4가지 짝수를 거느리며 각각의 방위에 거처한 것이니, 대개 陽을 주로하여 陰을 거느리고 그 변화를 일으키니 이는 數가 작용하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29)
위의 예문에 의하면 하도낙서가 서로 통하므로 경위가 되고, 팔괘와 구장이 서로 표리가 된다. 하도는 十數로서 體를 드러낸 것이며 낙서는 九數로서 用을 드러낸 것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한다면 하도는 體의 측면에서 시간성의 구조원리를 표상한 것이고, 낙서는 用의 측면에서 시간성의 작용원리를 표상한 것이다.
여기서 朱子는 우리에게 易理는 하나일 뿐이며 그 易理가 하도로도 표현될 수 있고 낙서로도 표현될 수 있음을 數의 체용관계를 이용하여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朱子는 하도는 둥근 것이며 그 수는 10이고 낙서는 네모난 것이며 그 수는 9라고 하면서 하도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도의 자리는 1과 6이 함께 바탕이 되어 북쪽에 있게 되고, 2와 7이 한 무리가 되어 남쪽에 있게 되며, 3과 8은 같은 길을 가며 동쪽에 있게 되고, 4와9는 벗이 되어 서쪽에 있게 되며, 5와 10은 서로 보살펴 가운데에 있게 된다. 대개 그 수가 되는 것은 한 개의 음과 한 개의 양, 한 개의 홀수와 한 개의 짝수에 불과하니 음과 양, 홀수와 짝수 두 가지를 가지고 오행으로 했을 뿐이다.30)
朱子에 의하면 하도의 수는 한 개의 음과 양으로 되어 있고, 그 도상은 1에서 10까지의 수를 五分하여 四方과 중앙에 배치하고 있다. 朱子는 또 낙서에 대해서는 비록 孔子가 말한 바는 없으나 하도의 수와 낙서의 수는 서로 통한다고 하면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낙서는 거북이 상에서 취했다. 그러므로 그 수가 9를 머리에 이고 1을 아래에 밟으며, 왼쪽에 3, 오른 쪽에는 7, 그리고 2와 4는 양어깨에, 6과 8은 두 다리 쪽에 배치한다.31)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도․낙서는 역수원리를 음양적 시각에서 표상한 것이고, 그것은 서로 표리․경위․체용 관계에 있다.
3. 退溪 易學思想의 내용과 특성
1) 河圖洛書와 體用一源
朱子는 하도낙서에서 괘상과 음양, 수 등이 모두 나왔다고 주장했는데, 퇴계 역시 朱子의 이와 같은 주장에 동의하여 河十洛九說을 자신의 설로 체계화했다. 뿐만 아니라 明堂제도와 州의 井田法의 근거가 된 洛書까지도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퇴계가 啓蒙傳疑 「명당편」에서, “294․756․618은 석자씩 잇대어야 마땅하다. 대개 낙서를 가로 잘라서 셋으로 나누어 말한 것이니, 九宮을 본떠서 明堂제도를 만드는 것이 마치 州의 井田을 그리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32)라고 한 말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이처럼 朱子의 설을 대폭적으로 수용한 퇴계는 하도의 수를 10으로 낙서의 수를 9로 정의한 다음 그것을 통하여 하도낙서에 대한 體用論的 해명을 시도한다. 「八卦全不用十」을 풀이하면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은 하도를 괘로 그린 것이다. 그 중앙의 5와 10은 비워서 쓰지 않는 것이다. 5는 말하지 않고 10만 말한 것은 윗글의 본설에 ‘하도는 수의 전체를 갖추었으나, 그 실은 10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만 10을 쓰지 않는다.’고 하여 그 뜻을 끝맺은 것이다.…… 朱子는 ‘하도의 偶는 靜하여 體가 되고, 낙서의 奇는 動하여 用이 된다.’고 하였는데, 劉氏는 낙서의 나뉘어서 각기 제 곳에 있는 것을 體로 삼고, 하도의 합치어 같이 그 方所에 있는 것을 用으로 삼았다. 대개 유씨의 설도 한 뜻이 되니, 하도와 낙서가 서로 體와 用이 되는 것이 그러한 것이다.33)
여기서 ‘體用’이란 어떤 것(物)의 體가 있으면 바로 그 가운데 用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34) 退溪는 이를 道理의 세계에 있어서의 體用과 사물의 세계에 있어서의 體用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도리의 세계에서의 體와 用이란 理의 본체와 작용을 말하고, 사물의 세계에서의 체용은 사물의 몸체와 작용을 의미한다.35) 퇴계는 이를 다음과 같이 논했다.
滉은 體用에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道理에 대하여 말한다면, 텅 비어 아무 조짐도 없는 가운데 萬象이 빽빽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 체와 용이다. 사물에 대하여 말한다면, 배가 물위에서 다닐 수 있고 수레가 육지에서 다닐 수 있는 것이 배와 수레의 체와 용이다.36)
이처럼 體用에는 도리의 체용과 사물의 체용 두 가지가 있다. 퇴계에 의하면 체용의 체란 ‘텅 비어 아무 조짐이 없는 것’이고 ‘배와 수레의 형상’을 말하고, 그 用이란 ‘體 가운데 만상이 빽빽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고 ‘사물의 理가 발현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體用의 體란 근본적인 것, 제1차적인 것이고, 그 用이란 파생적인 것, 제2차적인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37) 이 둘은 물론 서로 없어서는 아니되는 상호의존적 관계이고, 또 서로 발하는 관계이다. 퇴계는 이러한 관계를 근원이 하나라는 의미에서 ‘體用一源’이란 말로 표현하였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세계와 인간의 문제를 해명하는 논리적 도구로 삼았다. 그가 형이상의 세계나 형이하의 세계를 막론하고 체와 용 두 글자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서 “대저 體와 用 두 글자는 살아 있는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며, 원래 포함하지 않음이 없어서 묘(妙)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38)고 한 말에서도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퇴계는 體와 用 두 글자를 사용하여 하도낙서를 설명하고, 하도낙서가 서로 ‘體用一源’의 관계에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가 參天兩地를 풀이하면서 “(生數와 成數) 두 말을 서로 합해야 그 뜻이 비로소 갖추어진다.”39)라고 한 말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역학계몽을 주석하면서 動靜, 奇偶, 圓方, 生成 등의 상호 대립적인 개념을 사용하여 하도낙서가 둘이면서 하나임을 밝히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2) 理發說의 역학적 바탕
물론 체용논리를 가지고 하도낙서를 설명한 것은 퇴계만이 아니다. 그가 자신의 철학의 전범으로 삼고 있는 朱子 역시 하도와 낙서를 체용의 개념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도낙서에 대한 퇴계의 체용론적 이해는 朱子와 별 차이가 없지만, 퇴계가 가졌던 입장은 보다 특이하고 대담한 점이 있는 듯하다. 그는 체용논리를 가지고 하도낙서를 풀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특히 그것을 자신의 ‘理發說’의 철학체계와 연계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40)
그가 苑洛子의 말을 이용하여 하도낙서가 서로 표리 체용관계에 있음을 애써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은 바로 이 생각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우주가 아득하고 만유의 형체가 없을 즈음에 55의 수가 벌써 15의 가운데 갖추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太極이다. 그 55의 수를 15의 밖에 얽히고 설키게 배치하니 이에 비로소 음과 양의 형상이 뚜렷하고 검고 흰 구별이 분명하여 1379는 양이 되며 2468은 음이 되니 이른바 兩儀이다. 대개 양의는 태극에서 생긴 것이다.41)
위에서 보듯이 퇴계는 天數와 地數의 합인 55와 태양수와 태음수의 합인 15는 서로 체용관계에 있고, 태극은 양의를 생하는 주체로 이해한다. 그는 이를 통해 體는 用을 통하여 드러나고 用은 體를 내재시키며 이 둘은 또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임을 확실히 하였다. 이와 같은 기본적 논리와 지향은 성리학적 철학체계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天命圖說」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퇴계는 「천명도설」에서 元亨利貞 四德을 理로 규정하고, 그 사덕을 天이 만물을 생성시키는 이치로 파악한다.42) 이 경우 天 곧 理는 體가 되고 四德은 用이된다. 이러한 입장을 취할 때 用보다 體가 중시됨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퇴계가 「천명도설」에서 “음양과 오행이 유행할 때에 이 4가지(四德)가 항상 그 안에 있어서 만물에게 명령하는 근원이 된다.”43)라고 한 말은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처럼 퇴계는 用보다는 體를 위주로 하여 體用관계를 논했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理를 절대시하고 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44) 이와 같은 생각은 周易에 대한 해석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으니, 그가 經筵에서 宣祖에게 乾卦上九爻에 대한 강의를 통해 군왕의 독주를 제어하고 성리학의 통치론인 신하와의 共治를 주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45) 주지하다시피 乾卦는 周易 64卦 중에서 첫 번째 괘이자 天을 상징하는 괘이며, 퇴계에게 있어서 天은 바로 理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퇴계 역학사상의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이렇게 이해할 때, 퇴계는 體用論理로 자신의 易學이나 哲學을 일관했고 이를 통해 ‘理發說’을 체계화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4. 退溪 易學思想의 현실적 구현
1) 尊理的 思惟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퇴계 역학사상의 특성은 ‘體用一源’의 논리를 가지고 하도․낙서를 분석하고 그것을 통하여 ‘理發說’의 철학체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한 데에서 구해진다. 그러한 입장은 그가 역학계몽에 관한 禹景善의 問目에 조목조목 답한 글의 한 대목 “하도를 위주로 말하면 하도의 對待 관계가 ‘正’이 되고 낙서의 流行이 ‘變’이 되며, 낙서를 위주로 말하면 낙서의 유행이 ‘正’이 되고 하도의 대대가 ‘變’이 된다.”46)에서도 분명하게 확인된다.
퇴계의 이와 같은 역학적 입장은 朱子와의 차이를 분명하게 방향지었고, 또 그 차이에 의해 철학적 성격을 보다 뚜렷이 부각시키는 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理優位論的 理氣二元論47)에 바탕을 두고 理를 ‘自發․自動․自到․能生․先動’하는 活物로 긍정하는 철학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현실인식 내지 구현에도 반영되었다. ‘君主된 이의 한 마음(一心)’과48) 君主의 聖王의 內聖的 修身을 강조하는 그의 道學政治사상 또한 이 문제를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 이는 그의 정치사상의 근본성격이 ‘用’보다는 ‘體’를, 사회구조적인 문제보다는 개인의 도덕적 차원을 더 중시하는데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퇴계가 즉위한지 얼마 안 되는 宣祖에게 “天下의 일이 君位의 一統보다 더 큰 것이 없다.”49)고 하면서 “繼統을 중히하여 仁孝를 온전하게 할 것”과 “聖學을 돈독히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50)을 권면한 것은 그 좋은 예가 아닌가 생각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의 현실인식 내지 구현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사회 현실에 적용․발전시킨 것이다. 그런 점에서 퇴계의 ‘理尊氣賤’ 사상이라던가 ‘理發而氣隨之’는 당시의 거듭되는 정쟁과 士禍 속에서51) 사회적 부조리와 비본래적 상황이 극성을 부리던 혼란된 현실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퇴계의 철학적 사유를 검토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氣의 가치에 대한 경시와 理를 살아있는 活物로 보고 그것을 절대화하는 태도이다. 그가 우경선과의 문답에서 “易傳에 한번 陰이 되고 한번 陽이 되는 것을 道라 한다고 하였으니, 陰陽은 道가 아니다. 한번 陰하고 한번 陽하게 하는 소이로서의 理가 곧 道이다.”52)라고 한 말이나, 李達․李天機에게 “태극이 동과 정이 있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動靜하는 것이며, 天命이 流行하는 것은 천명이 스스로 유행하는 것이다.”53)라고 한 말에서도 이 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퇴계의 역학사상과 현실인식 사이의 특성이 나타난다.
퇴계는 태극 곧 理를 “절대적 실체와 같은 명사적 의미와 그 실체의 존재의 자발적인 발의와 자기 표현으로서의 현행과 같은 동사의 기능을 다 갖고 있는 것”54)으로 파악했다. 다음의 자료를 통하여 이를 좀 더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理는 지극히 虛하면서도 지극히 實하고 지극히 無하면서도 지극히 有하다. 動하면서도 동이 없고, 靜하면서도 정이 없다. 맑고 깨끗하여 터럭만큼이라도 첨가할 수 없고 터럭만큼이라도 덜 수도 없다. 음양오행과 만물․만사의 근본이 되면서도 음양오행과 만사․만물의 안에 얽매이지도 않는다.55)
이런 관점에서 출발할 때, 理는 한갓 개념적이고 관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모든 사물의 존재와 운행과 생성의 실재적인 근원자가 되는 것이다. 다음의 예문 역시 마찬가지 각도에서 음미할 만하다.
태극도는 이미 하늘이 생물에게 理를 명해 줌을 위주로 하였으니, 도식의 윗면은 바로 上帝가 性을 내려주는 최초의 源頭로서 만물의 근저의 극치가 된다.56)
여기에서 퇴계는 理를 이상적 현실, 즉 마땅히 있어야 할 현실의 전범으로 생각하고, 그와 상대되는 氣는 언제나 理의 主宰하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 따르면 理에는 ‘至極’의 뜻만이 아니라 ‘標準’의 뜻도 있다.57) 그래서 그는 “무릇 세상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은 理요,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은 理가 아니다.”58)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奇高峯과의 논변을 통하여 마음을 體와 用으로 나누고, 純理와 兼氣를 원리적으로 엄격하게 구별하려고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타난 실제적 노력이었다.59) 이로써 퇴계는 理를 上帝와 같은 인격적 개념으로 이해하여 李達․李天機에게 “理는 본래 존귀하여 상대가 없는 것이어서 物에게 명령을 하고 物에게서 명령을 받지 않는다.”60)라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命物者를 퇴계는 ‘上帝’니 또는 ‘皇’으로 표현한 바 있다.61) 이는 理를 인격적 존재로 생각하는 종교적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理에 대한 퇴계의 관점이 단순히 자연계의 원리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62) 퇴계가 경연에서 地水師卦 上六爻의 ‘大君有命’의 大君을 天子로 해석한 것이라던가,63) ‘聖其合德’을 乾卦 文言傳의 “聖人與天地合其德‘으로 풀이한 것을 상기할 때 이 점은 분명한 것 같다.64)
2) 理發의 實現
그러면 그의 尊理說的 사유 속에서 현실의 진정한 모습이란 무엇인가. 퇴계의 경우 그것은 ‘理發而氣隨之’하는 세계로 집약된다. “좋아함과 미워함으로 서로 공격하고, 강하고 약함으로 서로 다투어, 孝悌忠信의 길이 막히어 행하지를 못하고, 禮義와 廉恥를 버리는 것이 날로 심해져서 오랑캐나 금수로 돌아가는”65) 혼돈의 시대, 신뢰할 만한 어떤 척도도 존재하지 않는 “간흉의 사나운 기운/ 태산처럼 솟기만 하는”66) 상황에서 그는 오로지 ‘能發能生’하는 命物者․主宰者로서의 理에 합치되고 따르는 현실만을 자신의 참된 현실로 인정하였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임금의) 덕화가 향기롭게 풍기어 안과 밖이 융화하고, 조정에는 敬․讓이 지켜지고 가정에는 孝․悌가 행해지며, 선비는 學을 알고 백성은 의리를 알게 되는”67)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퇴계에게 있어서 참된 현실이란 인위적 욕망에 의해서 조작되거나 굴절됨이 없는 天理․道心으로서의 원리적 세계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이해한 마땅히 있어야 할 현실이란 인간 삶의 본원성이자 절대적 표준이 되는 理가 사사로운 人慾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기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도덕적․윤리적 가치의 세계였다.68) 그래서 그는 선조에게 “효는 모든 행위의 근본이니 한가지 행동이라도 흠절이 있으면 純孝가 못되는 것이며, 仁은 모든 선의 우두머리이니 한가지 선이라도 불비함이 있으면 全仁이 못되는 것입니다.”69)라고 말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에 의하면 퇴계의 ‘理發而氣隨之’를 궁극 목적으로 한 尊理的 思考는 어지러운 시대를 근심하고 바른 도리가 실현되기를 희구하는 충정의 표현이며, 氣가 理發의 현존화를 저해하지 않도록 인위적 욕망을 주체적으로 다스리어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해준 바 天理의 純善함을 회복하고 그 천리에 대한 종교적인 외경심을 함양하도록 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이 말은 公的이며 자기 원인을 갖는 실체이고 活物인 理가 私的인 것이며 악한 인욕을 다스리고 변화시켜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순선한 ‘本然之性’을 최대한 확충시켜 “敬과 誠으로써 上帝를 받들어 빛나게 하는”70) 인간의 삶의 궁극적 경지를 가리킨다. 이 점은 「天命圖說後叙」에서 선명하게 나타난다.
천지의 性에는 인간이 가장 중요하다. 周易에 이르기를 ‘하늘의 道를 세움은 陰과 陽이요, 땅의 道를 세움은 柔와 剛이요, 사람의 道를 세움은 仁과 義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이 人極을 세우면 천지와 더불어 참여됨을 말한 것이다.71)
퇴계에게 있어서 현실과 이상은 결코 모순․대립하는 두 항이 아니다. 참된 현실은 언제나 理想이 구현되는 지평이고, 현실은 이상을 통해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과 현실은 별개의 두 종이 아니라 ‘本源的 現實’을 구성하는 두 요소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이 그의 ‘체용 일원적 철학세계’에 근거한 것임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다음의 예에서도 이 점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하늘에서 명을 받으매, 四德의 理를 갖추어 한 몸의 주재자로 삼으니 마음이요, 사물이 마음속을 감동시켜 선악의 기미를 따라 한 마음의 用이 되는 것은 情과 意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 마음이 靜한 단계에서는 반드시 존양함으로써 그 體를 보전하고, 情과 意가 발한 단계에서는 반드시 성찰함으로써 그 用을 바르게 해야 한다.72)
그러므로 퇴계의 ‘理發而氣隨之’하는 세계란 우리가 논리 전개상 분할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살아있는 통일적 또는 연속적 관계의 실현으로만 성립한다. ‘본원적 현실’은 이 관계가 부서지지 않는 구도로 유지되고 더욱 힘있는 것으로 발전하는 정도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퇴계의 이와 같은 이상과 현실의 動的 관련을 무시하고 그것을 단지 대립적 관계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이 경우 현실을 현실답게 만들고 이끌어 가는 주체는 물론 理想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퇴계는 “氣가 능히 理를 따를 때는 理가 스스로 드러나며, 氣가 만약 理를 反하면 理가 숨어버린다.”73)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는 물론 理와 氣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氣隨보다 理發의 세계를 중요시했고, 이를 통해 義와 不義, 正과 邪를 밝히고 正道를 수호하고자 하였으며 당위로서의 ‘본원적 현실’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여 그는 ‘善의 완전한 실현’과 당대의 바람직한 삶의 길이 理發의 활성화에 있다고 믿었다. 가령 聖學을 돈독케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워야 한다는 퇴계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이를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신은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오직 하늘의 밝은 命을 돌보시고 몸을 공경되이 하여 南面의 자리를 지키시고 腹心에게 정성을 미루시고, 눈을 밝히고 귀를 열어 백성들에게 中을 세우시고, 위에서 표준을 세우십시오. 터럭만한 私意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흔들지 못하게 하십시오.74)
이처럼 尊理的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보았기 때문에 퇴계는 氣가 理에 순응해서 理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인간 본성의 도덕 창생력을 적극 인정했다.75) 여기에서 이른 바 理의 참다운 의미를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적인 도덕성이 문제가 되고, 이 理의 獨尊을 드러내는 실천적 행위가 강조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퇴계는 “군자는 학문을 하여 기질이 편벽된 것을 교정하여 物慾을 막고 덕성을 높여 가장 바르고 지극히 옳은 道에 돌아가는 것이다.”76)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퇴계의 理發에 대한 강조는 義와 利가 상충하고 正과 邪가 심각하게 갈등하는 긴장된 상황적 조건 속에서, 어지러운 세태와 윤리적 패란․정치적 타락을 바로 잡고, 이를 통해 인간사회의 질서화에 기여하는 올바른 도덕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그의 愛君憂國의 간절한 충정의 소산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퇴계는 특히 이 문제를 理發 그 자체이기도 한 治者77)의 높은 도덕성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이 점은 그의 「경연강의」에서 좀 더 소상하게 볼 수 있다.
上九는 자리가 이미 亢極하기 때문에 ‘귀하나 자리가 없고 높아도 백성이 없다’고 했으니 亢龍有悔의 상입니다. 人君이 만약 숭고함으로써 자처하여 어진 이를 소홀히 여기고, 스스로 성스럽다고 여겨 혼자만의 지혜로 세상을 다스리려고 하고, 아래로 내려가려는 뜻이 없다면, 이 상과 마찬가지로 궁한 재앙이 있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겸허하고 묻기를 좋아하여 같은 덕으로 서로를 구제하여야 亢龍의 재앙을 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78)
당대는 理發을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긴급하게 요하는 시대이면서, 그러나 또한 理發의 존립을 유례없이 위협하는 국면이라고 보는 데서 퇴계의 尊理說은 독특한 전개의 길을 걷게 되었다. 天理가 날로 소멸되어 氣隨가 理發을 억압하고 소인배가 君子儒를 구축하는 본말이 전도된 시대에 처하여, 이를 바로잡고 극복할 수 있는 유일의 지표가 理發의 활성화를 통한 의리의 확립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金惇叙에게 보낸 답신의 한 대목 “思慮가 이미 발한 때(理發時)에는 의리가 밝게 드러나서 物欲이 물러간다.”79)는 이 모두를 간명하게 집약할 만하다.
유의할 것은 그의 이러한 尊理的 사고가 숭고한 도덕적 의미를 담은,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삶에 대한 희구인 동시에, “이 세상과의 잦은 교섭을 가급적 피하면서 道心의 정신들이 순수하게 사는 理性의 王國”80)을 구현하고자 했던 한 인물의 필연적인 자기 확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퇴계는 宣祖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 자신을 가지고 힘을 써서, 참(眞)이 많이 쌓이고 노력이 오래되면 자연히 마음과 이치(理)가 서로 함양되어 모르는 가운데 融會貫通하게 됩니다. 그리고 習과 일이 서로 익숙해져서 차츰 모든 행동이 순탄하고 자연스럽게 됨을 알 것입니다. 처음엔 각각 하나를 전공하였지만, 이제는 하나의 근원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81)
충분한 분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우리는 이러한 일련의 검토를 통해 퇴계는 ‘體用一源’의 논리로 理發說을 정당화하려고 했으며, 또 그것이 그의 현실인식 내지 구현과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 핵심을 요약한다면 현실의 삶과 실천을 긍정하면서 이 인간세에서 理의 절대성을 추구하고 구현하고자 하는 지향이다.
5. 결어
이상의 논의를 통해 필자는 退溪의 易學思想을 퇴계의 철학과 관련시켜 퇴계 역학사상의 기반, 퇴계 역학사상의 내용과 특성, 퇴계 역학사상의 현실적 구현 등의 문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것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퇴계 역학사상은 朱子의 입장․해석의 기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이해될 수 없다. 주자는 周易을 占筮의 책으로 인식하고 그 바탕 위에서 의리역과 상수역을 종합하였다. 이를 좀 더 부연한다면 주자는 이론적 배경을 달리하는 河圖洛書와 先後天易을 자신의 역학체계 안에서 통합하고 이의 연구를 통해 易道를 밝히고 천하만물의 소이연 법칙과 당연법칙인 理를 우주만물의 본원이자 總則으로 보는 理學의 철학체계를 수립하였다.
2) 퇴계는 ‘體用一源’의 논리를 가지고 하도와 낙서를 분석하고 그것을 통하여 ‘理發說’의 철학체계를 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퇴계의 이와 같은 역학적 입장은 朱子와의 차이를 분명하게 방향지었고, 또 그 차이에 의해 철학적 내용이나 성격을 보다 뚜렷이 부각시키는 틀을 마련하였다. 理優位論的 理氣二元論에 바탕을 두고 理를 ‘自發․自動․自到․能生․先動’하는 活物로 규정하는 철학체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퇴계는 用보다는 體를 위주로 하여 體用관계를 논했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理를 절대시하고 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尊理철학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3) 퇴계의 현실인식 내지 구현은 그의 尊理철학을 사회 현실에 적용․발전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퇴계의 理尊氣賤 사상이라던가 ‘理發而氣隋之’는 당시의 거듭되는 당쟁과 士禍 속에서 사회적 부조리와 비본래적 상황이 극성을 부리던 혼란된 현실과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의 결과였다. 이로써 퇴계는 ‘能發能生’하는 命物者․主宰者로서의 理에 합치되고 따르는 현실만을 자신의 참된 현실로 인정하였다. 퇴계에게 있어서 참된 현실이란 인위적 욕망에 의해서 조작되거나 굴절됨이 없는 天理․道心으로서의 원리적 세계였고, 인간 삶의 본원성이자 절대적 표준이 되는 理가 사사로운 인욕을 극복하고 스스로 자기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도덕적․윤리적 가치의 세계였다. 여기에서 理의 참다운 의미를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인간의 내면적인 도덕성이 문제가 되고, 이 理의 獨尊을 드러내는 실천적 행위가 강조되는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尊理的 사고는 숭고한 도덕적 의미를 담은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삶에 대한 희구인 동시에 이 인간세에서 ‘道心의 정신들이 순수하게 사는 理性의 王國’을 구현하고자 했던 한 인물의 필연적인 자기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퇴계 易學思想의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본 연구가 원용하고자 했던 퇴계 理發說의 역학적 이해는 종래의 퇴계 철학연구에서 미비하게 다루어졌던 여러 문제 양상들의 재검토에 일단은 유용하였다고 생각되나 충분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퇴계 역학 전반에 대한 연구의 축적이 빈약한 까닭으로 해서 얼마간은 무리한 추론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의 작업은 퇴계 역학 연구에 대한 가설적 접근을 마련하고 그 가능성을 점검하는 일 이상의 것으로 자처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中文要約]
關于退溪理發說的易學的剖析
Song, In-Chang(Taejeon Univ.)
這篇文章的主要內容是, 基于整個退溪的哲學史上基礎上, 闡述退溪易學思想的基盤, 內容, 特點, 以及其在實際上的活用.
其一, 退溪易學思想首先把 周易 認爲占卜書, 在這種看法的基礎上, 他根基于融合義理易同象數易在一起的朱子的解釋. 該思想的特點在于把河圖洛書同先後天易融合在自己的易學系統內, 以便闡明易道, 終于竪立了一系列把天下萬物的必然規範同當然規範以爲宇宙萬物的本源及總則的理學哲學系統.
其二, 盡管退溪基礎于朱子易學, 他却借助于‘體用一源’的邏輯剖析河圖及洛書, 而奠定了所謂‘理發說’哲學系統. 如上所說的理學的看法, 不但明顯的突出他跟朱子思想之間的差別, 幷且依据其差別就塑造了他本身的哲學的內容及特點的筐架. 那特點就不外是, 站在理優位論的理氣二元論, 把‘理’界定爲‘自發․自動․自到․能生․先動’的活物的槪念以建構哲學系統. 進而, 退溪不以‘用’就以‘體’爲中心談到體用之間的聯關, 而且竪立一種以强調理的絶對性及主動性爲內容的尊理哲學.
其三, 退溪的現實認識及其獲得實現, 就是用把自己的尊理哲學來對社會現實適用․發展的結果. 換言之, 退溪的理尊氣賤思想, 或者‘理發而氣隋之’是, 針對在當代繼續不斷黨爭同士禍, 以及漫然不條理的混亂時代情況的批判的産物. 這樣一來, 退溪承認只有符合于‘能發能生’的命物者․主宰者的理的現實, 才承認眞實的現實. 對退溪來說, 眞實的現實不是爲人爲的慾望所塑造, 或者歪曲的世界, 而是原理的天理․道心世界及人的生活的本源性, 以‘理’爲標準的所謂私慾被克復了的, 自在的道德的倫理的價値世界. 所以, 他畢竟强調使人能够體現眞實的‘理’的意義的內面的道德性及‘理’的絶對性的實踐動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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