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묘역
오지 탐험 해본일이 없거늘 농장이 원시림에 있다는 쥔장 광고에 팽팽한 호기심으로 법원읍 35번지의' 태평농장'을 향해 길을 나섰다. 2년전 5.000평의 땅을 확보하여 집을 짓고 비닐 하우스를 세우고, 울금등 각종 산야초와 열무, 무우, 총각 무,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뒷산 에서는 툭 툭 밤 떨어진 소리가 들리는 청정지역에 들어섰다. 귀촌 아닌 귀농은 정년퇴직 이후 많은 사람들의 꿈이지만 기본적으로 땅이 있어야 하고 농사나. 채소 또는 화훼에 대한 지식과 노동력이 겸비되어야 하는데 시골 태생의 남편은 아예 관심 밖 이니 다른 사람의 농장 구경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열무 김치와 막걸리 일순배 돌고 한 시간 동안의 알밤줍기가 시작되었다. 밤은 다람쥐의 식량이라 너무 작은것은 줍는걸 피하라는 주의사항이 끝난 후 밤나무 아래로 시선을 던진다. 산 밤은 작은데다 어제도 농장에 내방객이 많았다 하니 밤 줍기에 열을 내지않고 오랫만에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푸르미님과 수다에 정신놓고 있으니 속 터진 주인장이 손수 밤을 주워 주는데 눈썰미가 다르신가 두 사람한테 안보이던 굵은 밤톨이 금방 앞치마에 가득하다.
주은 밤을 큰 그릇에 쏟아 합친 후 비숫하게 나누고 여행님이 가져오신 여주 쌀과자와 푸르미님의 월병이 이사람, 저사람의 허기를 살짝 채우는 중에 주문한 짜장면이 왔소이다. 식후에 커피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금전초 달인 물이 인기 1순위 자리를 차지했다. 접심식사 후 솎은 열무 한무더기, 햇빛에 잘 익은 된장까지 챙기고는 황금들판에 가리마를 내며 60년전의 세월을 거슬러 영국군 참전비가 있는 설마리를 향해 달린다.
1951년 6.25 사변 발발로 중공군 3개 사단이 서울을 향해 적성 연천지구 침공에 대 공격을 감행한다. 이에 설마리에 파병된 영국군이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는데 그만 중공군에 밀리고 말았다. 지역이 너무 방대하여 인명 피해가 컸다. 이곳에서 1,109명이 전사하고 2671명이 부상을 당하고 67명만이 탈출했고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180명 이었는데 3년간의 포로 생활중 34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영국군 전적비
글로스타사 연대 제1대대
제 170 독립 박격포대 C포대
영국 정부의 도움을 받아 육군 공병대대가 68년 9월7일에 착공하여 동년 11월 30일 완공했다고 되어있다. 얼마전 영국에서 영국군 참전비 행사를 위해 지금은 노인이 된 당시 생존 병사들이 이곳에 다녀 갔는데. 지금은 길이 좋지만 60년전에 이곳은 어떠했을까? 에 생각이 미치자 생각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다. 현재도 산을 깍아 길을 넓히고 있었다.
영국군 참전비
1951년 중공군 63군의 3개 사단은 서울로 향하는 적성
연합군 침공로에 대 공격을 감행하여 왔고 적군에 진격로에는
영국군 제 2여단이 임진강이 굽어 보이는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 비는 한국전쟁 당시 설마리 전투에서 고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혈전을 벌이다가 전사한 영국군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주변의 돌들을 채석하여 쌓아 올리고 양쪽 각각 2개씩 모두 4개의 비를 부착하여 만들었다. 위쪽에 있는 비2개 가운데 왼쪽에는 유엔기를 세기고 오른쪽에는 희생된 영국군의 부대 표지를 새겼으며 아래 쪽 왼쪽 비에는 한글로, 오른쪽 비에는 영문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기록하였다. 유엔군의 참전 상황을 심층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 유산이다. 키가 큰 나무들로 그늘이 져서일까 . 참전비 주변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 같이 간 푸르미님도 왠지 음습한 느낌이 난다고 한다. 이국 땅 깊은 산골짜기에서 스러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청춘들이 머물러 있음이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산화한 젊음이 아깝고 생이 다하는 날까지 아픔을 가슴에 안고 떠났을 그들의 부모가 생각났다.
참전비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내가 다녀간 곳은 이곳이 아닌데, 임진강 걷기에서 다녀온 곳. 폐사지의 한 귀퉁이만 남은듯한 곳이 분명 있었는데 그곳은 동이리에 있는 유엔군 화장장이었다. 이곳은 인구가 많지 않다. 비무장 지대가 가까이 있어서이다. 155m 윗쪽에 남북 분계선이 그어져 있고 6,25 전쟁때 피해가 컸던 연천. 동두천. 적성이 가까이에 있다. 임진강변 황포돗대가 있는 두지리 물길을 따라 내려가면 북한군이 힘 안들이고 건너왔다는 '고량포구'가 있다. 물 깊이가 정강이에 찰 정도라 걸어서 강을 건널수 있다고 한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장이었던 곳이고 6.25 전쟁시, 1.21사태에도 이길을 거쳐 북한군이 침입해 왔기 때문이다.
이왕 나선길, 북한군/중공군묘역도 돌아보기로 했다. 영국군 전적비가 이곳 말고 또 있는데 혼돈한것은 유엔군 화장터였다. 유엔군 화장터는 연천군 미산면 610. 산 77ㅡ2에 있다. 마전 삼거리 .1952년 유엔군 전사자를 화장하려고 급하게 건립했다. 사망한 영국군의 전사자가 워낙 많다보니 이곳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본국에 보낸 것이다. 현재는 굴뚝과 벽체만 일부 남아있다. 한줌의 재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간 젊은이도 있으나 형체도 없이 산화하여 아직도 고향에 가지 못한 아니 영영 갈수 없는 많은 이들이 있다.
길라잡이 보다 더 확실한 네비게이션으로 북한군,중공군 묘역에 닿았다. 세계에서 유일한 적군묘지이다. 1850.6.25~1953.7.27의 전쟁중 전사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다. 파주시 적성면 답골리 산 55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제1. 제2묘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제1묘역은 6,25때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한 북한군 유해25가구와 남파 공작원100여명이 안장돼 있다. 1968년 1.21사태시 김신조 함께 휴전선을 넘어와 파주 법원읍 비학산에서 일박을 하고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사살된 무장 공비들과 1988년 남해안에 침투했던 공작원 유해도 함께 있다. 1987년 대한한공 858기를 폭파하고 자살한 공작원 김승일 묘지는 보안을 위해 인적 사항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21사태의 사람들은 이름이 있었으나 거의 무명인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제네바 협약과 인도주의 정신에 따라 1996년 6 월에 묘역을 조성하였으며 묘역은 총면적 6.099 제곱 미터, 건너편 백학면이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남쪽을 바라보지 않고 북쪽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6.25사변 후 대전 광역시 시립공설묘지. 경기도 남양주군 백석면,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 광치령 고개등에 흩어져 있는 적군 묘지를 한데 모아 관리하기로 하고 묘지 조성 공사에 들어갔다. 제2적군 묘지 주위에는 다정 다감함을 풍기는 소나무 한구루와 상수리 나무 두 구루가 이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고, 이곳을 찾은 길손에게도 풍성한 가을을 듬뿍 안겨 주었다.
도토리가 무수하게 떨어져 있다. 인물좋고 실한 녀석들이 우리의 손길을 반겨 도토리 하트를 제물 대신 묘지 위해 올리고 여행, 푸르미,콩깍지, 은하수 4인이 도토리 줍기를 시작했다. 콩깍지님 가방에 안착했던 녀석들이 자리 좁다고 뛰쳐 나온다. 가을 날씨, 눈 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빛 벌판인 이 곳에 전쟁이 무언지도 모른채 숱한 젊은이들이 총받이 되어 한줌 재로 변해 영면해 있다는 사실이 와 닿지 않는다. 60년전 콩을 볶듯 울려대었던 총소리, 대포소리는 환청으로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너무 평화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태 학습체험도 중요하지만 역사의 한 장을 열어보는 길손의 걸음이 이곳을 밟고 지나갔으면 싶다. 세월이 무심하다.
떄굴 때굴 도토리가 어디서 왔나
단풍 잎 곱게 물든 가을산에서 왔지
첫댓글 은하언니.. ㅎㅎ 이거 1년 지난이야기 아녀요? 도토리묵도 한접시 못드시고..
날받아 다시 뭉쳐봐요, 한방오리 끓여 드릴께여.
깍지 아우님, 방가 방가!
지난해 가을이네요~~
자세히 묘사를 잘하십니다~~
일산 언니 맞으시나요? 깍지님이 사알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