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의 글은 대한 예수교 고신교단 기관지인 월간『생명나무』(구 『월간 고신』)
2008년 12월호에 게재될 원고임. 내용은 동일하나 제한된 지면 때문에 위의 내용을 줄인 것이다.
숨겨진 인물 10
복음성가의 아버지 화단(火壇) 유재헌목사
이상규(고신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네.”
유년 주일학생 때 수 없이 불렀던 찬송, 시편 23편을 소재로 한 이 찬송은 누가 쓴 찬송일까?
오랜 의문을 가지고 지내던 나는 우연히 ‘화단’(火壇)이란 이름의 100여편이 넘은 성가집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가 주일학교 때 배웠던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의 농촌은,... 산기슭 초가집에 예수님 모시고,... 기쁜 찬송 감사기도...
주님이 베푸신 낙원이로다”로 시작되는 <기독농민가>를 비롯하여 <예수는 내 생명, 나의 기쁨>,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목놓아 불렀던 <승천가> 등을 작시하신 유재헌목사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아이작 왓쯔라고 할 수 있는 유재헌목사의 생애 여정은
한국근대사의 아픔과 고뇌가 그리고 믿음과 승리가 그대로 스며 있다.
유재헌(劉載獻, 1905-1951)목사는 1905년 3월 21일 서울에서 유흥열(劉興烈, 1863-1945)장로의 아들로 출생했다.
유흥렬은 당시 선교사와 동사하던 초기 전도자이자 조사였다.
즉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장심리에서 출생한 유흥렬장로는 원두우(H. G. Underwood)의 전도로 1894년 세례를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등과 함께 광주, 용인, 안성, 평택 등 경성지방 순회전도자로 활동했다.1)
후에는 제중교회, 곧 현재의 서울 남대문교회 조사로 시무하였다.
유흥렬은 순회전도를 통해 1902년에는 피득선교사와 함께 광주군 고산리교회를,2) 1903년에는 광주군 송파교회를,
1904년에는 피득선교사, 손흥집과 함께 전도한 결과로 광주군 소재 심곡교회, 세곡교회, 둔전교회를 설립하였다.3)
1905년에는 광주군의 고령교회, 용인군의 금양, 원촌교회를 순회 시무하기도 했다.4)
이처럼 유재헌은 아버지가 순회전도자로 활동하던 때에 출생했다.
후에 아버지 유흥렬은 용인군, 대갈리교회에서 시무하기도 했고(1909),5) 1919년에는 장로가 되었는데,
50여년 간 무급 전도자로 혹은 장로로 봉사하시고 1945년 8월 17일 8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처럼 전도자의 아들로 출생한 유재헌은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1921년 경신고등학교를 거쳐 피어선성서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4년 일성회(一成會)를 조직하고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아리실(牙利室)교회의 서정의양과 결혼하였다.
결혼 이듬해 유재헌은 일본으로 건너 가 고베(神戶)성서신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하면서 1928년에는 재일 조선인교회 다하라마찌(田原町)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다.
1930년 이 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동경의 미가와시마(三河島)교회에서 전도사로 시무하던 중 1931년 12월 25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고베, 요꼬하마, 동경 등지에서 전도하며 조선 기독교 독립교회를 설립하였고 부흥사로 활동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교포들에게 애국사상을 전파하고 반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피검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그는 이국의 하늘아래서 힘겹게 살아가는 동포들의 삶의 현장에서 오직 복음만이 유일한 위로라고 생각하였고,
나라 잃은 조선인의 아픔을 경험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신앙과 고백,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그가 작시한 복음성가였다.
그가 지은 노래들은 다듬어진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믿음의 전선에서 오직 주님 바라보며 소망으로 살아가는 내면의 소리를 시화(詩化)한, 자신의 표현처럼, “화장하지 않고 나온 피맺힌 노래”였다.
그가 처음 쓴 성가는 1939년 봄 일본 ‘시오야’학사(鹽屋學舍)에서 작사한 <내 신랑 예수여>라는 5절 가사의 노래였다.
1. 나 세상 발붙일 곳 없네. 내 나라는 위에 있다/ 천국에 가기 원합니다. 내 임금 예수여.
내 비록 세상에 있으나 그 나라 그 의를 위하여/ 충절을 굳게 지키리다. 내 임금 예수여.
2. 약하고 병든 이 몸 보고 위로해줄 친구 없네/ 주님만 의지하옵니다. 내 친구 예수여.
친구여, 지신 그 십자가 얼마나 무겁사오리까?/ 한 어깨 나도 메오리다. 내 친구 예수여.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곡조에 맞춘 이 찬송은,
이국의 하늘아래서 고난의 길을 가는 현실의 아픔을 믿음 안에 승화시키는 노래였다.
기댈 곳 없는 이 세상에서 심리적 이민자의 길을 갔던 동포들의 아픔을 천국의 소망으로 용해하고 있다.
그해 여름에는 <믿음으로 의로워졌다>와 <신유찬송>(일본 明石에서)을 쓰면서 복음성가 작가로의 길을 갔다.
1940년에는 <예수피에 잠그소서>, <예수로 만족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믿기만 하라>, <재림찬송>등을 작시했다.
특히 일경에 의해 체포되고 고베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는 상황에서 쓴, <예수는 내 생명>, <죄인 받으소서>, <임마누엘>등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대망으로 현실의 메임에서 자유를 구하고 있다.
1941년 3월 고베감옥에서 쓴 7절로 구성된 <예수는 내 생명>은 이 때에 작시한 대표적인 찬송이었다.
1. 목마른 사슴이가 물을 찾음 같이/ 갈급한 내 심령은 예수 찾았다네.
2.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해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네.
<후렴> 예수여 예수여 내 중심에 오소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그가 일본에 영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귀국을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조선인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에서 추방명령을 받고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1942년의 일이었다. 귀국했으나 요시찰 인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활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이 간 중에도 마산문창교회 집회를 인도하는 등 제한된 활동을 했고, <선한 목자>(1941. 겨울, 마산), <믿고 나가면 승리한다>,
<불쌍히 여겨줍소서>(1942, 강계) 등의 찬송시를 남겨주었다.
일제 치하에서 고난의 길을 가던 조국에 주어진 해방은 자유와 기쁨과 감사였다.
해방의 소식을 접한 그는 그 감격을 한편의 노래로 쏟아냈다.
그것이 경기도 용인에서 8월 15일 날 쓴 5절로 구성된 <애국의 노래>였다. 해방은 그에게도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 기쁨을 가눌 길 없었던 그는 금강산에 입산하여 40일간 기도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 구원의 대사를 이루어 가기 위한 영적 준비였다. 이 때 쓴 성가가 <하나님은 사랑이다>(1945. 9, 외금강)였다.
해방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자 유재헌목사는 부흥사로 활동하는 한편 선친 유흥렬장로가 시무하였던 용인교회를
계승하여 시무하셨다.
일본에 체재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민족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살았던 그는 집회를 인도하면서 구국기도단을 모집하였는데,
이 연유로 1945년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군탄리에 ‘대한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엘리아의 제단처럼 우상을 불태우는 거룩한 성령의 역사를 희구하면서 수도원을 화단(火壇), 곧 불의 재단이라 했고,
이것이 그의 아호가 되었다. 그가 작시한 찬송에는 자신의 이름 대신 ‘火壇’이라고 적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가 설립한 ‘대한수도원’이 한국에서의 기도원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에 그는 전국 각지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면서 많은 성가를 작시했다.
수도원 설립과 함께 작시한 것으로 보이는 <기도를 하자>(1945. 12), 그리고 1946년 1월에 쓴,
<성신이 오시었네>, <성신이여 오시옵소서>, <도고찬송> 등은 수도원집회 때 부르기 위한 노래였다.
그의 대부분의 성가들은 1946-1948년 사이에 씌여졌다.
철원군에 수도원을 설립했으나 이곳이 이북지역이고 38선이 고정화되어 감에 따라 남한과의 왕래가 어려워지자 1950년 5월에는 서울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두 달이 못되어 6.25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참화는 그가 무릉도원이라 노래했던 금수강산을 피로 물들게 했다. 거리에 스치는 전쟁의 상흔을 보면서 성도들을 격려했고, 미처 남으로 피난가지 못해 기도원에서 안식을 구한 수많은 이들에게 복음으로 위로했다.
이 때 쓴 찬송이 <순교자의 깃발>(1950. 7. 11)이었다. 293장 “천국에서 만나보자” 곡에 맞춘 이 노래는 7절로 된 비교적 긴 찬송으로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신앙적 결의를 노래하고 있다.
1. 나를 위해 우리 주님/ 피땀 눈물 다 바쳐/ 속죄하여 주셨으니/ 주께 이몸 드리네
7. 나의 목을 잘라가라/ 순교자의 면류관/ 나까지도 쓰고 가니/ 할렐루야 승리다
<후렴> 동족위해 달게 죽자/ 불쌍한 죄인 구령위하여/ 주님 위해 달게 죽자/ 그 사랑 갚아 영광을 돌리자
<도고자의 사명>도 이때 쓴 찬송으로 피신해 온 성도들과 끊임없이 불렀던 찬송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모든 이들이 남으로 남으로 피난 길에 올랐으나 유재헌목사는 피난을 거부했다.
해방된 지 불과 5년, 동족상쟁의 아픔은 또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질곡을 보면서 그는 민족의 아픔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하나님께 호소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임마누엘수도원을 지키며 기도하시며 시련의 날을 지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제자 중 한 사람의 밀고로 공산도배는 기도원까지 급습하였고, 강단에서 기도하시던 유재헌목사와 그 가족은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다.
전쟁이 일어난 지 50일 째가 되던 1950년 8월 15일이었다.
가족들은 구사일생으로 풀러났으나 유목사는 납북되었고, 그 이후 생사를 알 길이 없다. 그가 납북 되던 당시 46세였다.
유재헌목사는 납북되었지만 곧 순교한 것이 분명하다.
그는 기꺼이 순교의 재물이 되고자 했고, 그가 신앙을 버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피랍된 그는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그가 노래했던 것처럼, “내 몸 주께 드리고,” 순교의 길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살을 찢어가라. 거룩한 피 흘리어 주의 흔적 지고 가서 주님 얼굴 뵈련다.” 이 고백은 유재헌목사가 노래했던 순교자의 기도였다.
그가 남긴 110여편의 복음성가는 지금도 한국인의 심정을 주께로 향하게 했던 신앙과 고백의 찬송이었다.
(월간 고신 2008. 12월호)
출처 : 고잔평강교회 New
글쓴이 : 훈훈한님 원글보기
첫댓글 주님사랑과 열정 존경하고 복되십니다 지금 우리신앙은 넘 부끄럽습니다.. ㅠㅠ
그러게나 말입니다. 진실하여 거칠고 투박한 야성의 영성을 되찾아야할텐데요.
유재헌목사님...
대한수도원의 구국을 향한 뜨거운 피가 사라지고 있음이 안타까운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전 작사하신 복음송가를 기도할때 부르고 있습니다ㅠㅠㅠ
맨발의 성자 최춘선할아버지께서도 복음송가를 늘 부르시던 모습을 기억합니다
찬양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심금을 울립니다
주님 동하시면 나도 동하고
주님 정하시면 나도 정하겠네...
자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아시는군요. 저도 신앙생활 초기에 구국기도원 원장목사님을 통해 유재헌목사님의 복음성가를 알게돼 지금까지 애창하며 뜨거운 감동을 누립니다.
와 가사가 진짜 쎄네요
동족위해 달게 죽자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