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장성이 품은 임권택시네마테크에서 한국 영화 반세기를 만나다

[크로바]

▲ 장성문화예술공원 내의 시·서·화 동산. 오른편 위쪽에 있는 건물이 임권택시네마테크다.

영화감독 임권택. 그의 이름 앞에는 ‘한국 영화의 역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감독 개인사가 한국 영화의 역사라는 말. 이보다 더한 오마주가 있을까. 
   
   임권택 감독은 지금 102번째 영화 ‘화장’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2010년 ‘달빛 길어올리기’ 이후 4년 만이다. ‘화장’의 주인공은 안성기. 1981년 영화 ‘만다라’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던 그다.
   
   임권택 감독은 1934년생이다. 우리 나이로 81세. 그의 연령과 체력을 감안했을 때 ‘화장’이 마지막 작품이 될 가능성도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88세에 마지막 작품 ‘가게무샤’를 연출했다.
   
   올해는 노감독에게 잊지 못할 해가 될 것 같다. 고향인 전남 장성 북하면 문화예술공원에 임권택시네마테크가 3월 20일 개관했다. 2013년 부산동서대에 임권택영화박물관이 문을 열었지만 아무래도 고향에 세워진 임권택시네마테크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인물의 박물관과 기념관이 각각 만들어진 것은 임권택이 유일하다.
   
   장성호의 상류 지역인 쌍웅리 일대에는 장성문화예술공원이 있다. 문화예술공원은 평지와 동산으로 이뤄져 있는데, 평지에는 이미 임권택 감독이 의자에 앉아 촬영을 지휘하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동산에는 시(詩)·서(書)·화(畵) 조형물 수십 점이 전시 중이다. 조형물을 감상하며 쉬엄쉬엄 거닐다 보면 30~40분이 금방 지나간다. 동산 꼭대기의 전망대에 서면 장성호의 풍광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지난 3월 24일 오후 임권택시네마테크를 찾았다. ‘임권택시네마테크’의 글씨는 임 감독의 친필이다. 건축설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이종호 교수가, 전시설계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김홍준 교수가 했다. 장성군은 2011년 공사를 시작해 국비를 포함 36억원을 들여 기념관을 완공했다. 장성군은 현재 숙박이 가능한 별관 캠프동(棟)을 전시관 옆에 건설 중이다. 연말까지는 입장이 무료. 2015년부터 유료화를 검토하고 있다. 문화관광과 소속 유승화씨가 관장을 맡고 있다.
   
   기념관 입구 벽면에 임 감독의 커다란 사진이 붙어있고 ‘한국 영화의 역사’라는 글씨가 보인다. 석자 위 전사인쇄 방식이다. 복도를 내려가면 ‘오프닝 크레디트’ 원본 타이틀로 만든 이미지 월(Image Wall)이 관람객을 맞는다. 올해 개봉하는 ‘화장’을 포함해 영화 102개 원본 타이틀이 벽면을 장식했다. 그의 영화를 기억하는 관람객은 ‘오프닝 크레디트’ 앞에서 자신이 봤거나 기억하는 작품의 제목을 찾는다. 그러면서 그 영화에 얽힌 지나간 시간들을 회억한다. 유승화 관장은 “개관한 지 사흘이 지났지만 관람객들이 오프닝 크레디트 앞에서 기념촬영을 많이 한다”고 설명한다.
   

▲ 오프닝 크레디트의 원본 타이틀로 만든 ‘이미지 월’.

   기자가 임권택 감독을 알게 된 것은 20대이던 1980년대 초. 기자가 본 영화의 오프닝 크레디트를 하나씩 찾아내려갔다. ‘만다라’ ‘안개마을’ ‘서편제’ ‘씨받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아다다’ ‘태백산맥’ ‘길소뜸’이었다.
   
   ‘오프닝 크레디트’에서 놀란 것은 제목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작품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 위에서부터 내려오니 ‘속눈섭이 긴 여자’ ‘복부인’ ‘황야의 독수리’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 ‘낙동강은 흐르는가’ ‘남자는 안 팔려’ ‘밤차로 온 사나이’ ‘아내들의 행진’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 ‘아벤고 공수공단’ ‘돌아온 왼손잡이’ ‘단골지각생’…. 유치하게도 보일 수 있는 제목도 여러 개 보인다.
   
   임 감독은 정규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하지 않았다. 조감독 생활을 거쳐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한흥영화사가 제작한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기억하는 팬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약한 항일투사들을 그렸다. 출연진을 보면 박노식, 장혁, 황해, 황정순, 이대엽, 문정숙, 엄앵란, 허장강, 장동휘다.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의 스타들이 총출동한 느낌이다.
   
   메인 전시장인 제2전시실로 가는 길. 좁은 복도 유리벽면에는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 연도별로 분류되어 있다. 데뷔 해인 1962년 그는 ‘두만강아 잘 있거라’ 외에도 ‘전쟁과 노인’을 연출했다. 1963년부터는 작품이 늘어난다. 1963년에 ‘남자는 안 팔려’ ‘망부석’ ‘신문고’ 3편을 찍었다. 1964년에는 ‘단장록’ ‘욕망의 결산’ ‘십자매 선생’ ‘단골지각생’ ‘십년세도’ ‘영화마마’ 6편. 이후 1971년까지 그는 매년 평균 6~8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 (좌) 임권택시네마테크에 전시된 임권택 사진. (우) 축소 단성사 모형

   1960~1970년대 초는 한국 영화의 황금기라 불리던 때. TV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전이어서 영화관 가는 게 국민의 오락거리였다. 인기 주연배우들 역시 1년에 10여편 출연을 예사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의 작품 목록에서 이 같은 영화 시대상이 읽혔다.
   
   영화감독 임권택을 기억하는 중장년층은 대부분 1980년대 초부터. 그의 나이 40대 후반. 그는 1980년에 ‘복부인’과 ‘짝코’를 연출했다. 1981년 작품은 ‘우상의 눈물’과 ‘만다라’. 알려진 대로 ‘우상의 눈물’은 전상국의 단편소설이고, ‘만다라’는 김성동의 장편소설이다. 작품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다.
   
   1960~1970년대 영화를 보다 보니 그가 제작사의 요청대로 ‘닥치는 대로’ 영화를 찍었다는 인상을 준다. 1980년대 들어서는 작품성을 심사숙고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1960~1970년대의 모색기를 거쳐 1980년대부터 임권택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복도를 지나면 메인 전시관. 입구에는 조감독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임권택의 모습이 20장의 사진으로 펼쳐진다. 제목은 ‘임권택이 보는 세상’. 주름살 하나 없는 홍안(紅顔)의 조감독 임권택이 보인다. 장년의 임권택부터 각인된 영화팬들에게는 청년 임권택이 여간 낯선 게 아니다.
   
   청년 임권택은 감독이 된다. 메가폰을 들고 뭔가 지시하는 모습, 한쪽 눈을 감은 채 카메라 뷰파이더를 응시하는 모습, 배우와 대본을 보며 뭔가를 숙의하는 모습 등. 임권택 곁에는 당대의 배우들이 스쳐 지나갔다. 팽팽한 피부의 김희라도 있고, 최무룡과 이대엽의 전성기 모습도 보였다. 볼에 젖살이 빠지지 않은 20대 윤정희도 있다. 영화팬은 대부분 본 적이 없는 귀중한 사진들이다. 사진이 거듭될수록 뷰파인더를 보는 눈가의 주름은 밭이랑처럼 굵고 깊게 패어간다. 그러다 16~17번째에 이르면 현재의 얼굴이 된다.
   

▲ 영화 포스터. 오른쪽 끝이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전시설계 책임자 김홍준 교수는 임권택 영화 52년을 전통·사랑·역사·길 네 가지 주제로 분류해 관람객과 소통을 시도한다. 먼저 ‘전통’을 보자. ‘서편제’의 소품담당 김호길이 만든 북이 전시 중이다. ‘달빛 길어올리기’에 소품으로 등장한 한지 약장(藥欌)도 있다. 여기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전통 장례. ‘서편제’ ‘족보’에 나타나는 전통 장례다. 특히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 ‘족보’(1978년)의 경우 종가집의 장례의식이 그대로 복원됐다. 영화가 아니라면 어떻게 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장례의식을 이처럼 기록할 수 있을까.
   
   두 번째는 ‘사랑’. 영화 101편 중에서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 포스터를 모아놓았다.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등의 축쇄 복제본 포스터도 보인다. 복제본 포스터를 전시한 까닭이 궁금했다. 유승화 관장은 “원본 포스터를 붙이면 벽면 공간에 몇 장밖에 붙일 수가 없다”고 설명한다.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영화음악(OST). 영화음악이 영화의 운명을 바꾸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전시관에서 ‘영화음악관’이 작은 부스로 마련돼 있다. 이곳에는 임권택의 영화에 음악을 작곡한 세 명의 작곡가가 있다. 신병하, 김수철, 김영동. 신병하(1947~2005)는 ‘씨받이’ ‘장군의 아들’ ‘개벽’을 작곡했다. 김수철(1957~)은 ‘서편제’ ‘태백산맥’ ‘축제’를 썼다. 또 국악작곡가인 김영동(1951~)은 ‘짝코’ ‘아다다’를 맡았다. 각각의 작곡가 이름을 터치하면 해당 작품이 나오면서 관련 음악이 흘러나온다. 디지털 IT기술이 아니면 구현이 불가능하다.
   
   그 다음은 임권택 아카이브. 미디어테이블을 이용한 임권택에 관한 모든 중요 자료를 손쉽게 검색할 수 있다. 미디어테이블은 임권택을 잘 모르는 디지털 세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감독의자, 음반 등 9개의 아이콘이 미디어 테이블 위에 흘러간다. 관람객은 그중 하나를 누르면 관련 정보가 주르륵 나온다. 예컨대 감독의자를 누르면 임권택의 중요 어록이 일시와 게재된 미디어와 함께 나타나는 식이다.
   
   ‘역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영화관 단성사를 축소한 모형이다. 서울 종로 3가가 한국 영화의 메카이던 시절,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을 가보지 않은 성인은 거의 없다. 젊은이의 데이트 코스에는 으레 종로 3가가 들어갔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복합상영관이 생기면서 단성사와 피카디리는 1960~1980년대의 명성을 잃었다. 단성사에서는 더 이상 영사기가 돌아가지 않는다.
   
   단성사(團成社)는 대한제국 시절인 1907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영화관. 단성사가 종로3가에 자리 잡으면서 충무로, 종로 일대에 극장·영화사가 몰려 영화가를 형성했다. 고유명사 ‘충무로’는 영화거리를 뜻하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단성사에는 오페라극장처럼 2층 좌석이 양옆으로 있었다. 기자 역시 단성사를 수없이 드나들었다. 단성사의 축소 모형 스크린 앞에 脫帽(탈모), 禁煙(금연)이라는 단어가 써 있다.
   
   궁금증이 발동한다. 전시관에서는 왜 단성사를 축소 모형으로 만들어 놓았을까. 답은 영화 ‘서편제’에 있다. 누가 뭐래도 임권택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결정적 작품은 ‘서편제’다. 1993년 단성사에서 막을 올린 ‘서편제’는 장장 154일간 상영돼 국내 최초로 100만 관객을 불러모았다. 임권택시네마테크에서 단성사를 빠트릴 수가 없는 것이다. 축소 단성사에서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마부’의 주인공 김승호와 황정순이 극장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고인이 된 두 사람은 스크린 속에서 영원을 살고 있었다.
   

▲ 메인 전시관 내부

   마지막 주제는 ‘길’. 영화 매니아들은 ‘길’ 하면 ‘서편제’의 저 유명한 장면을 떠올린다. “사람이 살며는 몇백 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유봉)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구부야 구부구부구부가 눈물이 난다”(송화). 주인공 두 명이 꼬불꼬불한 돌담길을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느긋하게 걸어오는 장면. 카메라를 한자리에 고정시키고 사람이 멀리서 카메라를 향해 다가오는 롱테이크(long-take) 기법의 전형이다. 이 장면은 전남 완도군 청산도에서 촬영됐다. 또 다른 ‘길’은 영화 ‘만다라’에서 주인공인 법운과 지산이 눈에 쌓은 계단식 논길을 걸어 올라가는 장면이다.
   
   메인전시관에서 기획전시실로 가는 복도에는 ‘클로징 크레디트’를 전시한다. 영화제작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름이다. 데뷔작인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읽어내려 간다. 음악 박춘석, 미술 원제래, 조명 윤창화, 특수효과 이문걸, 스틸 정기성, 제작 최관두, 촬영 최호진. 천재 작곡가 박춘석의 이름이 반갑다. 데뷔작은 스태프가 단출하기 이를 데 없다. 단출한 ‘클로징 크레디트’는 1980년대까지 이어지다가 1990년대부터 수십 명으로 늘어난다.
   
   기획전시실을 거쳐 마지막으로 꼭 가볼 곳은 임권택영화관. 20분짜리 영화가 상영된다.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회고전에 나왔던 ‘거장 임권택의 세계’이다.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장면이 파노라마로 흘러간다. 먼지 자욱한 신작로길부터 영종도의 개펄까지. 영화의 주인공들이 키스를 하고 격렬하게 포옹하는 장면이 마치 ‘시네마 천국’의 마지막 장면처럼 펼쳐진다. 20분짜리 영화를 보고 나면 비로소 임권택이 거장으로 불리고 그의 개인사가 한국 영화의 역사가 되는지 깨닫는다.
   
   임권택시네마테크는 초창기이다 보니 몇 가지 부족한 점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시네마테크 속에서 차지하는 전시공간의 비중이 너무 작다. 전시물 또한 그 수가 너무 적다. 유승화 관장은 “동서대 임권택영화박물관 측과 협의를 통해 박물관 소장품을 대여전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