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 지식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글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일감이 있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글 쓸 시간이 없다. 최근 며칠간의 상황이 그렇다.
밭을 갈 때 호미를 든다. 너른 밭을 한땀한땀 매야 한다. 요령이 있을 수 없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일을 마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인쇄회로기판(PCB) 설계작업 하는 것도 다름이 아니다.
무려 이십모델을 라우팅해야 한다. 이미 일주일전부터 일은 진행되어 왔다. 이제는 파이널 작업이다. 마라톤선수가 막판에 ‘스퍼트’하듯이 임해야 한다. 백권당에 오자마자 내달렸다.
밭을 맬 때 쉬는 시간도 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오십분 일하고 십분 쉬는 것이다. 설계작업 할 때도 휴식을 가져야 한다. 무리하게 사용하면 몸이 고장 날 수 있다.
어느 정도 한숨 돌렸다. 마무리 작업만 하면 된다. 이럴 때 잠시 시간이 난다.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글을 쓰는 것이다.
어제 글을 올리지 못했다. 일하느라 너무 바빴다. 지치기도 했다. 주로 글은 아침에 쓰는데 아침부터 일을 한 것이다. 마치 밭 매는 자가 뙤약볕 나는 낮을 피해 선선한 새벽이나 이른 아침에 일을 하는 것과 같다.
글을 쓸 때는 미리 주제를 생각해 둔다. 주제가 정해지면 씨나리오도 따라 온다. 주로 경전을 근거로 하는 글쓰기를 말한다.
의무적으로 써야 하는 것이 있다. 금요니까야모임에 대한 글은 의무적이다. 왜 그런가? 일년이 지나면 책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이 되려면 최소한 서른 개 가량의 글이 있어야 한다.
1. 이곳저곳에 경전공부모임이 있는데
유월 첫 번째 니까야모임이 6월 14일 금요일에 열렸다. 여러 개의 경을 합송했다. 그 중에 ‘학문적 지식과 종교적 지혜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제목의 경이다. 지식과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경의 제목은 ‘이치는 있는가의 경(Atthinukhopariyāya Sutta)’(S35.153)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방법이 있는가 경’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빅쿠보디의 영역에서는 ‘Is There a Method?’라고 제목을 붙였다. 어떤 내용일까?
요즘 이곳저곳에서 경전공부 모임을 본다. 특히 니까야경전읽기 모임이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서 경전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가장 많이 채택 되는 경전은 아마도 ‘맛지마니까야’가 아닐까 생각한다.
밴드에서 어떤 경전모임에 대한 글을 접했다. 맛지마니까야 독송모임이다. 두 번 읽었다고 한다. 1회독에 2년 걸렸고, 2회독에 1년 반 결려서 3년에 걸쳐서 읽었다고 말한다.
경전을 읽을 때 스승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자가 이끌어 준다면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곳이다. 그러나 단지 읽는 것으로 그친다면 수박 겉핥기식이 될 수 있다.
2. 전재성 선생의 니까야모임은 저자직강과 같은 것
금요니까야모임에서는 한달에 두 번 니까야모임을 갖는다. 경을 읽고 설명을 듣고 토론하는 방식이다. 단지 독송하며 진도나가는 방식이 아니다. 먼저 경험한 자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가장 크다.
금요니까야모임은 전재성 선생이 이끈다. 니까야번역자이기 때문에 경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 경에 대한 해설과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모임에 참여하는 가치를 느낀다.
고교시절 학원에 다녔다. 여유 있는 학생들은 과외를 했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종로2가에 있는 학원에서 영어, 수학, 물리, 화학 등 부족한 과목을 들었다. 그런데 학원에는 저자직강도 있다는 것이다. 물리과목이 그랬다.
저자가 직강하면 신뢰가 있다. 책을 지은 저자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고교 2학년 겨울 방학 때 물리과목에 대한 저자직강을 들었다. 그 결과 물리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학원 다닐 때 명강사들이 있었다. 관철동 시사영어학원에서 ‘수학의 정석II’을 가르쳤던 그 선생도 명강사였다. 키가 크고 깡마른 선생의 교실에는 백명이상이 들었다.
고교시절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미션스쿨에서 적응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일학년 때 하위권을 맴돌았다. 반에 육십명 있었는데 오십등 대에 해당된 것이다.
이학년 올라 갔을 때 열반에 떨어졌다. 두 달 후에 우열반은 없어졌다. 입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학년 겨울방학 때 독한 마음을 먹었다. 과외는 꿈도 꾸지 못했으므로 종로에 있는 학원으로 향했다.
공부도 전환점이 있다. 고2 겨울방학 두 달 동안 키다리선생으로부터 ‘수학의 정석II’를 들은 것이 결정적이다. 낮에는 강의를 듣고 저녁에는 동네 독서실에서 복습했다. 자정 가까이 귀가 하는 나날이 되었다.
무엇이든지 정신을 집중하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마치 운동선수가 동계훈련에서 부쩍 성장하듯이, 고2 겨울방학 두 달 죽기살기로 공부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
고3이 되었을 때 반에서 4등한 적이 있다. 그때 담임이 따로 불로 물었다. 혹시 과외 한 것이 아닌지 물은 것이다. 담임은 생물선생으로서 과외를 지도하고 있었다.
일학년 때 50등대의 학생이 3학년 때 10등 때가 되었다. 일학년 때 종교가 맞지 않아서 방황 했었다. 불교중학교에서 기독교고등학교 다닌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때 ‘어떻게 하면 학교를 탈출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 했었다. 전학을 생각했었으나 마음속으로만 그쳤다.
공부를 잘 하려면 선생을 잘 만나야 한다. 고교시절 학원 다녔기 때문에 선생을 찾아 다녔다. 물리는 저자직강을 들어 기반을 다졌다. 수학은 가장 잘 가르친다는 선생을 찾아서 들었다. 수학과 물리 문제가 해결되니 다른 것은 자동적으로 따라 오는 것 같았다.
여러 경전공부모임이 있다. 삼삼오오 모여서 경전을 독송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좋은 것이다. 더 좋은 것은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다. 저자와 함께 하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전재성 선생의 니까야모임에 참여한지 만 칠 년 되었다. 저자로부터 직접 듣는 저저자직강과 같은 것이다. 더구나 전재성 선생은 또 다른 그룹의 모임에 참여 하기도 한다. 정신과 전문의 모임이 이에 해당된다. 그곳에서 토론 된 것을 들려 주기도 한다.
3. 아라한선언하는 것은
사람들은 주로 들어서 알고 있다. 남들에게 들은 지식이나 정보는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또한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일까 경에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와 별도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는 궁극적인 앎을 설명할 수 있는 이치가 있는가?”(S35.153)
경에 아라한선언이 있다. 이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선언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스스로 선언하는 것은 공부가 다되었음을 말한다.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는 상태이다.
아라한이 되려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청정한 삶을 살아야 아라한선언을 할 수 있다.
아라한선언은 깨달음선언과 같다. 깨달음에 대하여 누군가가 인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아는 것이다. 마치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다.
4. 세상의 지식 다섯 가지
아라한선언은 세상의 지식이나 상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경에서는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와 별도로” 아라한 선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믿음, 취향, 전승, 상태에 대한 분석, 견해에 대한 이해는 어떤 것일까?
전재성 선생은 믿음, 취향, 전승, 상태에 대한 분석, 견해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세상의 지식’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유튜브에는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이다. 검색창에 키워드만 넣으면 원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의 지식은 깨달음에 도움이 될까?
지식을 접하면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전재성 선생은 믿음에 대하여 “타자의 믿음에서 지식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지식을 접하면 만족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만족은 개인적인 선호에 대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매일 유튜브를 본다. 그런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사실이다. 이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좋아하는 것만 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에 대하여 진리라고 우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경전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깔라마의 경’(A3.65)이 있다. 경에서는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라.”(A3.65)라고 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말은 ‘성전’이다. 이를 불교경전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때 성전은 바라문교 성전이나 외도의 성전을 말한다.
깔라마경에서 성전의 권위에 끄달리지 말라고 했다. 이를 확대해석해서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는 니까야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빈데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깔라마경을 보면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오.”라는 가르침이 있다. 어떤 이는 이 구절을 확대해서 부처님 말씀이라도 믿지 말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마치 “부처님은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깨달은 자가 말하면 진리가 된다. 깨달은 자는 진리만 설한다. 깨닫지 못한 범부의 말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세상의 지식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외도의 성전 역시 진리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부처님은 깨달은 그날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팔만사천법문을 설했다. 이런 법문은 경, 응송, 게송 등 구분교로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구분교의 가르침은 진리이다. 왜 그런가? 깨달은 자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가 말한 것은 진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성전의 권위에 끄달리지 말라는 말을 니까야에도 적용하여 니까야에 대하여 단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로 본다면 경솔한 것이다. 또한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로지 스승에서 제자에게 마음과 뜻으로만 전달되는 것이라 하여 “부처님은 한말씀도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도 경솔한 것이다.
경에서는 “믿음, 취향, 전승, 상태에 대한 분석, 견해에 대한 이해”(S35.153)에 대한 말이 나온다. 이런 말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조목조목 설명했다.
5. 부처님 당시에도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이
전재성 선생은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에 대해서는 오늘날 ‘자연과학’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에 대해서는 오늘날 ‘사회과학’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탁월한 분석이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고도로 발달했다. 스마트폰 시대에 경전을 보고 있다. 그것도 수천년된 것이다. 이런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낡고 오래되고 케케묵은 것을 보고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한때 경전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물질문명시대에 경전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십대 중반에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초기불교를 접하고 결정적으로 바뀌었다. 빠알리삼장에 진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불변의 진리이다.
물질문명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을 원시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는 단순히 물질문명의 기준으로 비교한 것이다. 그러나 정신문명은 다르다. 정신문명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무상정등각’이라고 한다.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깨달음을 말한다. 정신문명의 절정이자 최고봉을 말한다. 오늘날 물질문명 기준으로 본다면 컴퓨터시대 이상인 것이다.
니까야에는 부처님 가르침이 실려 있다. 이는 정신문명의 진수에 대한 것이다. 정신문명의 극한에 대한 것이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부처님의 깨달음 이상의 정신문명은 없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정신문명은 절정에 이르렀다.
부처님은 오늘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세상의 지식을 말했다. 이에 대하여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과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으로 설명했다.
경에서‘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재성선생은 자연과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 보는 것처럼 물질을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상태를 고찰하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진리로 받아 들인다.
경에서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전재성 선생은 이에 대하여 오늘날 사회과학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견해를 뜻하는 딧티(diṭṭhi)라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 온갖 견해가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갖가지 견해에 대하여 시유하고 이해하고 난 다음에 진리로 받아 들인다.
6. 과학적 사고방식에 지배당한 현대인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방식에 지배 당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물질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궁극을 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물질에 한정된다. 그럼에도 이를 확대 해석하여 과학적으로 검증된 것만 진리라고 여긴다면 낭패 보기 쉽다. 왜 그런가?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나올 때마다 이전의 이론은 깨지기 때문이다.
인문과학은 정말 진리일까? 마르크스의 이론은 오늘날에도 통용될까?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될까?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그럴싸한 이론을 만들어 놓아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것만이 진리이다.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이다.”라는 견해가 있다면 이는 진실된 것은 아니다.
7. 다섯 가지 세속적 지식도 출세간의 도에 도움이 된다면
부처님은 다섯 가지 세속적 지식에 대하여 말했다. 그것은 “1)믿음(saddhā), 2)취향(ruci), 3)전승(anussavā), 4)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 5)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S35.153)를 말한다. 전재성 선생은 이 다섯 가지에 대하여 “세상의 진리는 이 다섯 가지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세속적 진리는 이 다섯 가지 범주 안에 모두 들어가는 것임을 말한다.
진리에는 세간의 진리도 있고 출세간의 진리도 있다. 세상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진리는 1)믿음), 2)취향, 3)전승, 4)상태에 대한 분석(자연과학), 5)견해에 대한 이해(사회과학)가 된다. 왜 이런 것이 세속의 진리가 될까? 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믿음(saddhā: 信)은 타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어떤 것이 진리라 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2) 취향(ruci: 欲) 개인적인 선호에 의해서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3) 전승(anussavā: 聞)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은 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4) 상태에 대한 분석(ākāraparivitakkā: 行覺想)은 고찰하여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여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5)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 見審諦忍)는 사유하여 이해한 뒤에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섯 가지 세속적 진리는 불필요한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진리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밧디야의 경’(A4.193)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으로 확인 된다.
“밧디아여, 그래서 소문을 들었다든가, 전승되어 왔다든가. 여론이 그렇다든가, 성전의 권위라든가, 추론에 의한 근거가 있다든가 논리적인 귀결이라든가 형상에 대한 분석이라든가 견해에 대한 이해라든가 유력한 사람의 말이라든가 이 수행자가 우리의 스승이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따르지 마십시오. 그러나 밧디야여 그대가 스스로 이와 같이 ‘이것들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이것들은 비난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들은 식자에게 책망 받을 만한 것이 없고, 이것들은 착수되고 실천되면 이익과 행복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되면, 밧디야여, 그것을 성취해야 합니다.”(A4.193)
참으로 놀라운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세속적 진리도 인정한 것이다. 출세간을 추구한다고 하여 세간적 지식이나 진리를 모두 멀리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다만 조건이 있다. 그것은 꾸살라담마(善法), 즉 착하고 건전한 것이야 한다.
세상에는 갖가지 믿음이 있고, 갖가지 취향이 있고, 갖가지 전승이 있다. 또한 세상에는 갖가지 자연과학의 성과물이 있고, 갖가지 인문과학적 견해가 있다. 이들 모두가 선법은 아니다. 불선한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출세간의 진리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는 선법이라면 받아 들여야 한다.
다섯 가지 세속적 진리를 받아 들이는 데는 조건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이것들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이것들은 비난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들은 식자에게 책망 받을 만한 것이 없고, 이것들은 착수되고 실천되면 이익과 행복으로 이끈다.”라고 알게 되면 성취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8. 부처님 가르침의 유연성
오늘날 물질문명은 극도로 발달되어 있다. 부처님 당시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발전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정신문명도 따라서 발달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물질과 정신은 다른 것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물질에 대한 것을 탐구 하는데 그친다. 정신영역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미 정신영역에서 최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는 최상의 깨달음으로 설명된다. 무상정등각이다.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미 부처님 당시에 정신문명은 최고조에 달한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물질문명의 발달과 무관한 것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해도 무상, 고, 무아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연기법 내에 있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세속의 진리는 배워야 한다. 그것이 착하고 건전한 것이고, 비난 받을 수 없는 것이고, 실천하면 이익과 행복이 되는 것이라면 세속적 진리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부처님의 유연성을 보게 된다.
9. 세속적 진리의 한계
세속적 진리는 한계가 있다. 어느 것도 연기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것도 무상, 고, 무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라드와자여,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현상은 지금 여기에서 두 종류의 과보를 갖습니다. 바라드와자여, 잘 믿어지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믿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아주 만족스럽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아주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잘 전승되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전승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잘 형상이 분별되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형상이 분별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견해가 잘 이해되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견해가 잘 이해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바라드와자여, 진리를 수호하는 현자라면, ‘이것은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M95)
세속적 지식에는 1)믿음), 2)취향, 3)전승, 4)상태에 대한 분석(자연과학), 5)견해에 대한 이해(사회과학)가 있다. 이런 세속적 지식은 세속적 진리가 되기 쉽다. 그런데 어떤 때는 진리가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때는 진리가 되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진리라고 할 수 있을까?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변함 없어야 한다. 전자공학에 디지털논리가 있다. 투르스테이블이라 불리우는 진리표를 보면 인풋(입력)에 둘 다 일(1)이 되어야 한다. 하나라도 제로(0)가 되면 출력은 제로가 된다. 진리가 아닌 것이다.
세속적 진리는 때에 따라 진리이기도 하고 때에 따라 진리가 아니기도 하다. 이를 트루스테이블에 넣으면 아웃풋(출력)이 제로가 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성과물에 대하여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말한다. 부처님 당시 외도의 견해도 그랬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을 믿는다. 과학이 종교가 되는 세상이 된 듯 하다. 과학자들이 말하면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 뒤집히는 경우는 많다. 빅뱅이론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부처님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한계를 이미 이천오백년 전에 꿰뚫어 보았다. 그래서 자연과학에 해당되는 ‘상태에 대한 분석 (ākāraparivitakkā)’에 대하여 “바라드와자여, 잘 형상이 분별되더라도 그것이 공허한 것, 거짓된 것, 허망한 것이 되기도 하고, 잘 형상이 분별되지 않더라도 그것이 실재하는 것, 사실인 것, 진실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M95)라고 말했다.
때에 따라 진리가 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 진리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인문과학에 해당되는 ‘견해에 대한 이해(diṭṭhinijjhānakkhanti)’도 예외가 아니다. 예를 들어, 경제학 이론이 어느 경우에는 적용 되고 어느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면 진리로 볼 수 없다.
10. 세속적 지식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
여기 어떤 믿음이 있다. 많이 믿는 다고 하여 진리라고 볼 수 있을까? 많이 믿는 종교가 진리의 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경우에는 들어 맞고 어떤 경우에는 들어 맞지 않는 다면 진리라고 볼 수 없다.
여기 전승된 성전이 있다. 어떤 경우에는 들어 맞는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의 시대에는 들어 맞지 않는다. 이런 것도 진리의 말씀이라 할 수 있을까? 투르스테이블에 넣으면 제로가 되어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세속적 지식은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된 것인가?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이여,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안으로 탐욕과 성 냄과 어리석음이 있으면, ‘내 안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다.’ 고 분명히 알고, 안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으면, ‘내 안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S35.153)라고 했다. 이것이 출세간의 진리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알았을 때 청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출세간의 진리는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다. 여섯 감역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면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세속적 지식, 세속적 진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과 같다. 여기에 연기법이 있다.
세속적 진리 중에 견해가 있다. 영원주의나 허무주의 같은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일부는 맞고 일부는 맞지 않다. 그래서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연기법은 항상 맞다. 어느 경우에도 맞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진리가 된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 싸빗타가와 무씰라가 문답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싸빗타가 무씰라에게 물었다. 싸빗타는 “벗이여 무씰라여,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와는 별도로, 이와 같이 존자 무씰라는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는 체험적인 지혜를 갖고 있습니까?”(S12.68)라고 물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있다. 이는 ‘체험적 지혜’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론이 아니다. 체험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알고 있으면 지식이 되지만 체험해서 알고 있으면 지혜가 된다. 그렇다면 믿음이나 취향이나 전승이나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와 같은 세속적 지식은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일까?
과학자는 빅뱅을 주장한다. 그러나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다. 체험 한 것은 아니다. 체험하지 못한 것은 진리가 될 수 없다.
연기법은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체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실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실재인가? 생멸하는 실재를 말한다, 생멸하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의 특성이 있다.
세속적 지식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개념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생멸할 수가 없다, 생멸이 없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세속적 지식이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에 해당된다.
11. 오늘도 장문의 글을
오늘도 장문의 글을 썼다. 금요니까야모임에 참여하여 후기를 남기는 것도 보람이다. 이런 글이 차곡차곡 모이면 책이 된다. 연말에 책을 만들어 전재성 선생과 도현스님에게 드리려고 한다. 오늘 유월 두 번째 금요니까야모임 있는 날이다.
2024-06-28
담마다사 이병욱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고향에 가면 늘 가는 코스가 있다. 고분과 학교이다. 예덕리 고분군과 폐교가 된 초등학교를 가본다.
고향 떠난지 얼마나 되었을까? 초등학교 일학년 늦가을에 떠났다. 계산해 보니 1967년 11월쯤 된다. 그때 함평에서 광주로 이사 갔다.
농사 짓는 사람이 농촌을 뜨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농사 지어 먹고 살 수 없어서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때 1966년과 1967년에 대한해가 있었다고 한다. 가물어서 비가 오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기억 난다. 저 멀리 불갑산 가까이 산등성이에서 기우제 지낸 것을 말한다. 밤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밤에 불을 지펴서 하늘에 제사 지낸 것이다.
하늘은 인자하지 않다. 하늘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기우제 지낸다고 해서 비는 오지 않는다. 그러나 비 올 때까지 기우제 지낸다며 비가 올지 모른다.
농촌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농사 지어먹고 살기 힘들었다. 가뭄이 들어, 그것도 연속해서 이삼년 가뭄이 들었을 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남부여대하고 도시로 떠났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시골을 떠났다. 유년시절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골을 떠나기 전 이삼년전 기억은 드문드문 뚜렷하다.
유년시절 사는 곳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다. 들과 구릉과 산이 있는 산하대지가세상의 다 인줄 알았다. 그러나 저 아스라이 있는 산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몰라도 되는 것이었다.
그때가 몇 살 때인지 알 수 없다. 정자에서 아이들과 있었는데 갑자기 동쪽 하늘에서 굉음이 들려 왔다. 처음 듣는 엄청나게 큰 소리였다.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굉음과 함께 괴물체가 나타났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늘을 나는 것이었다. 그것도 여러 대가 이 쪽에서 나타나 저 쪽으로 날아가서 사라졌다. 형태는 분명히 기억한다.
무엇이든지 처음 접한 것은 강렬하다. 태어나서 처음 접한 괴물체의 이미지는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비행기였다. 군인들을 실어 나르는 수송기 C123이었던 것이다.
그때 전기가 없었다. 밤이 되면 호롱불을 켰다. 그때 가뭄이 들어서 사람들은 걱정했지만 아이에게는 가뭄이 무엇인지 몰랐다. 세상에 근심걱정 없는 세월을 보냈다.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일까? 지체 없이 유년기 몇 년이라 본다. 왜 그럴까? 가만 생각해 보니 근심걱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인 ‘순수의 시기’였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 온 것은 초등학교 삼학년 때이다. 환경은 열악했다. 삼양동 산동네달동네에서 살았다. 농사 지어먹고 살던 사람이 서울에 오면 할 일이 없다. 기술도 없고 자본도 없다. 생계를 위해서 닥치는 대로 일해야 한다. 도시빈민이 되는 것이다.
환경이 바뀌었을 때 늘 꿈꾸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유년기 때 시골에서의 삶에 대한 동경이다. 그때는 가난이라는 것을 몰랐다. 무엇보다 마음이 풍요로웠다. 봄은 봄대로, 여름은 여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사시사철 마음은 충만 되었다.
고향은 늘 꿈꾸던 곳이다. 산동네달동네의 숨막힐 듯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 고향의 산하대지를 떠올렸다.
고향마을은 변함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대로이다. 신작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된 것과 호롱불이 전기로 바뀐 것, 그리고 초가지붕이 기와지붕으로 바뀐 것이 대표적이다.
고향마을에 가면 고분에 가본다. 마을에서 사오백미터 가면 신덕고분과 예덕고분군이 있다. 유년시절에는 이런 것이 있는 줄 몰랐다.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10년 합동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신덕고분은 장고형 고분이다. 장구모양의 무덤을 말한다. 길이가 50미터가 넘는다. 이 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매년 유월이 되면 함평에 간다. 고향에 가면 반드시 고분에 가본다. 왜 이런 곳에 거대한 고분이 있을까?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라고 생각한다.
신덕고분에 대한 발굴이 1991년 있었다. 수많은 유물이 출토 되었을 때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일본 고분시대 때 유물이 나온 것이다. 더구나 관은 금송이다. 금송은 우리나라에 없는 소나무이다. 일본에서 나는 품종이라고 한다. 더구나 일본 고분시대 토기가 나오고 대도(大刀)도 나왔다. 신덕고분은 일본무덤일까?
유튜브에서 신덕고분에 대한 것을 보았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만든 영상이다. 제목은 ‘[비밀의 공간, 숨겨진 열쇠] 큐레이터와의 대화 - 함평 예덕리 신덕고분’이다. 이 영상에서 대도에 대하여 “이것은 일본의 최상위 계층에서 출토되는 그런 칼과 굉장히 비슷하게 생겨서 일본과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소개 하고 있다. 또한 이 무덤의 유물 중에는 백제계통의 것도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되는 동탁과 은잔 같은 것이다. 이는 백제와 관련성 있는 것이다. 또한 투구는 대가야 것이다.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큐레이터는 “일본에서 온 것이 아닌가”라며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추측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가져 온 유물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내외부의 요소들이 굉장히 복합적으로 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 무덤의 주인공을 특정하기는 아직은 어렵습니다.”라고 말한다. 다만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하여 굉장히 개방적은 성향을 가지고 주변지역과 교류를 했던 인물 임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고분은 5세말에서 6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일본의 고분시대보다 백년이 늦은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에서는 옹관묘 고분이 있었다. 신덕고분 바로 아래에 있는 예덕고분군은 옹관묘 형식이다. 이는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이다.
두 그룹의 고분이 있다. 신덕고분과 예덕고분이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예덕고분은 옹관묘 형식으로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고분형태이다. 그런데 백년 후에 갑자기 장고모양의 전방후원형 고분이 출현한 것이다. 신덕고분을 말한다.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유튜브를 찾아 보았다.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이곳 영산강 유역에 있는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정착해서 살다가 온 귀환 자의 무덤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문화는 물 흐르듯이 흐른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흘렀다. 특히 영산강 유역은 일본 큐슈 지역과 교류가 있었다고 한다. 해로가 열려 있었던 것이다.
육로보다 해로가 안전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물자는 주로 바다나 강을 이용해서 운송된다. 고대 4세기부터 6세기 때도 그랬을 것이다.
삼국이 통일 되기 전에 국가 개념이 없었다. 민족개념도 없었다. 오늘날과 같은 국경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살기에 적당한 곳을 찾아 이동했을 것이다. 특히 영산강 유역은 일본의 큐슈지역과 가깝고 해로도 있어서 교류도 있었을 것이다.
옛날의 일을 알 수 없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하여 가설을 세울 수 있다. 함평 신덕고분의 주인공도 밝힐 수 있을까?
함평에 다녀 온 후에 후기를 썼다. 매년 쓰는 것이다. 2010년부터 다녔으니 14회가 될 것이다. 나중에 글을 모아 놓으면 책이 될 것 같다.
올해도 신덕고분과 예덕고분에 갔다. 그곳에서 사방을 둘러 보았다. 탁 트인 개활지이다. 낮은 구릉이 연속된 것이다. 저 멀리에는 수키로에 달하는 월야평야가 있다. 그야말로 곡창지대이다.
함평 월야면은 하나의 커다란 고분을 만들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가진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예덕고분 입간판에는 “원래 이 지역은 마한의 소국이 있었던 지역인데 모두 백제에 통합되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함평에 소국이 있었다. 소국은 함평에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너른 평야를 가진 지역 여기저기에 소국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국은 백제에 편입되기 전에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향 마을에 있는 거대한 무덤은 소국의 산물이다. 소국이 있었기 때문에 거대한 봉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대국에 흡수 되었을 때 더 이상 거대한 무덤은 나오지 않았다. 왕의 무덤 보다 더 큰 무덤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산강 유역의 거대한 무덤은 소국시절 경쟁적으로 만든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거대한 무덤은 6세기 이후에 나오지 않는다. 신덕고분은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조성된 무덤이기 때문에 소국 마지막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무덤 주인은 누구일까? 일본 장군의 무덤일까? 그러나 그때 당시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일본 고분시대에는 여러 소국이 있었다. 소국시대의 특징은 경쟁적으로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소국이 대국에 통합되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일본의 3세기부터 7세기에 이르는 고분시대는 소국시대라 말할 수 있다.
소국시대에 큰 무덤이 만들어진다. 소국시대에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들었다. 영산강유역에 큰 무덤이 많은 것은 소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을 때 소국이 있었는데 경쟁적으로 큰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왜 신덕고분과 같은 일본의 고분시대 전방후원형 무덤이 있게 되었을까?
영산강유역에서 발견되는 무덤은 옹관묘 형식이 대부분이다. 전방후원형은 마치 갑자기 등장한 것과 같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집중된다. 그러나 숫자는 14기로 많지 않다.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매년 고향을 다니면서 신덕고분 앞에 섰을 때 참으로 궁금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일본장군의 무덤이라면 곤혹스러운 것이된다. 그때 당시 한반도의 문화가 일본열도 보다 훨씬 선진이었는데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대체 신덕고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페이스북에 고대 한국의 역사에 책을 쓰는 사람이 있다. 정재수 선생을 말한다. 프로필에 ‘역사작가’라고 소개 되어 있다. 최근에는 ‘우리가 몰랐던 백제사’를 출간했다.
정재수 선생에게 물어 보았다.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형 무덤의 비밀을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그랬더니 두 장의 사진을 남겼다. 자신이 지은 책의 일부를 알려 준 것이다. 글을 읽어 보니 궁금해 하던 비밀이 풀리는 것 같다.
정재수 선생에 따르면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전방후원형 고분에 대하여 장군의 무덤으로 보는 것 같다. 이는 무덤에서 철제투구와 갑옷 등 왜계통의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덤의 주인에 대하여 1)왜인설, 2)왜인-마한계 토착세력 무덤 혼합설, 3)마한계 왜인의 재이주설, 4)마한계 토착 세력 무덤설, 5)마한계 토착세력 무덤설 변형, 6)왜계 백제 관료설, 이렇게 여섯 가지 가설을 말한다.
전방후원형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여섯 가지 가설이 있지만 각기 해석상의 약점이 있어서 명확한 정설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재수 선생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해 놓았다.
(무덤주인은 곤지왕이 이끈 야마토세력)
장고형고분의 무덤주인은 축조 시기가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로 제한되고, 철제 투구, 갑옷 등 왜계통 유물이 출토된 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이는 5세기 후반인 476년 곤지왕이 데리고 온 야마토세력과 관련이 깊다. 곤지왕은 고구려 장수왕의 남벌전쟁으로 한성이 몰락하자 급히 야마토세력을 이끌고 귀국한다. 그리고 고구려와 정전협상을 원만히 마무리하고 동생 문주왕을 도와 백제 재건에 힘쓰다가 477년 7월 해씨 세력(문주왕의 왕후 오로치)에 의해 전격적으로 제거된다. 이로 인해 곤지왕 하나만 믿고 한반도로 건너온 야마토세력은 더 이상 웅진(공주)에 뿌리 내릴 근거를 상실한다. 이제 남은 길은 다시금 야마토로 돌아가는 길뿐이다. 그러나 야마토세력의 장수급 일부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충남지역(웅진)을 벗어나 남쪽의 전남지역(모한)에 정착한다. 이들의 본향이 모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지도자 곤지왕을 잃은 까닭에 백제에서도 야마토에서도 환대받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곤지왕이 이끈 야마토세력 중에는 일본열도(야마토)출신도 있지만 상당수는 한반도(모한)출신이다. 특히 이들은 곤지왕과 정치적, 군사적 행보를 함께한다. 곤지왕은 455년 좌현왕에 임명되어 모한을 다스리다 461년 형 개로왕에 의해 일본열도로 추방되는 정치적 숙청을 당한다. 이때 좌현왕 시절에 인연을 맺은 모한의 상당수 수장급 인사들이 곤지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 간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476년 곤지왕이 이끄는 야마토세력의 일원이 되어 다시금 돌아온다. 결국 이들은 지도자 곤지왕을 잃게 되자 백제(충남) 도 야마토(오사카)도 아닌 본향 모한(전남)으로 돌아가 각기 살다가 죽어서 묻힌다.
다만 무덤양식을 장고형고분을 선택한 것은 곤지왕과 함께 야마토에 15년간(461-476) 살면서 직접 목격한 당시 야마토 오사카일대에 조성 되기 시작한 전방후원분 무덤양식을 자연스레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남지역 장고형고분의 주인공은 곤지왕이 이끈 모한(전남)출신 야마토세력의 일부 수장급 인물이다.”(정재수 선생 책에서)
이 글을 보니 어느 정도 의문이 풀린다. 함평 고향마을에 있는 신덕고분의 주인은 이 지역 출신 장군이었던 것이다. 백제 곤지왕이 영산강 유역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협력했던 장군이었던 것이다. 곤지왕을 따라 야마토의 근거지 오사카 지역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유행하던 전방후원형 무덤을 차용한 것이라 한다.
그 옛날 이곳에 소국이 있었다. 함평의 월야평야는 소국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쌀이 나는 곡창지대인 것이다. 하나의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고향마을 무덤을 찾는다. 일본 고분시대 무덤형식의 무덤이 있는 것이 놀랍다. 더구나 무덤에서 갑옷, 대도 등 장군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 정재수 선생의 글에 따르면 정치적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무덤의 주인은 사라졌다. 봉분만 남았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천이백년동안 무덤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기에 왕의 무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실제로 소국의 왕의 무덤이다. 이제야 어느 정도의 무덤 주인의 비밀이 풀리는 것 같다.
2024-06-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