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드림 제188회차 12월 정기산행
산행일시:2023년12월10일 산행지:경남 산청 천왕봉(1915m)
A코스: 중산리 탐방지원센타→로타리 대피소→천왕봉(1915m)→장터목대피소→유암폭포→ 칼바위 →주차장
B코스 :중산리 탐방지원센타→자연학습원→로타리 대피소→천왕봉(1915m)→로타리대피소→주차장
《산청 지리산 천왕봉天王峰 1.915m》산행지도
<천왕봉 이름>백두산에서 대간 마지막봉이 지리산이다. 백두대간은 1400km를 한번도 잘리지 않고 국토의 등뼈를
이루며,14개의 큰 산줄기와 수많은 작은 산줄기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북두칠성의 천왕신이 이 봉에 머무는 봉이라하여 기록이 있다. 천왕봉이 라는 이름은 가장 존귀하고
성스로운 이름이다.
옛날에는 만고 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 天王峰 天鳴猶不鳴)이라 남명 조식선생이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
다는 뜻이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지금의 개선문)으로 들어갔다가 '하늘을오르는 문'인 통천문으로 나올
수 있는 산 천왕봉이다.
지리산을 다른 이름으로 ‘두류산(頭流山)’이라 부른다. 꽃봉오리 같은 산봉우리들과 꽃받침 같은 골짜기들이 백두산으
로부터 연면히 흘러내려와 솟구쳤기 때문이다.”
고려 문인 이인로의 설명이다. 지리산 속에 백두산이 머물러있는 형국이라 하여 ‘두류산(頭留山)’이라 하였다.
<제석봉 帝釋峰>제석신이 머무는 봉이다. 제석봉 아래에 제석단과 향적대가 제석봉 아래에 있다. 제석천신은 도리천의
왕으로 불교의 수호신. 불교의 세계관은 세계의 중앙에 수미산(須彌山)이 있이며 그 정상에 도리천 이라는 하늘이 있다.
◎ 제석천신 제석신은 도리천의 선견성(善見城)에 머무르면서 사천왕(四天王)과 주위의 32천왕(天王)을 통솔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그 이름이 단군신화에도 나타난다. 즉, 단군의 할아버지를 석제 환인(釋提桓因)이라고 하였다.
신라 스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중국 청량산(淸凉山)을 참배하였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제석천왕이
석공(石工)을 데리고 와서 조성한 문수상(文殊像)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문수보살이라는 기록이 있다.
<법천계곡. 통신골>천왕봉 서남쪽골 '한 물줄기 계곡을 두 이름으로 신의 통로인 통신골. 법계사를 기준으로 위 쪽은
통신골이고 아래 쪽은 법천골이다. 유암폭포, 무명폭포. 법천폭포가 있다.
<장터목>장터목은 산청쪽인 중산리와 함양쪽인 백무동에서 각각 9km 거리에 위치, 양쪽 모두 무거운 등짐을 지고 올라
물물교환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장터고개 였다.
<유암 폭포>천왕봉 일대 빗물이 모두 유암폭포로 몰린다. 폭포에 기름이 떠는 신비한 현상 이 유암폭포의 이름이다.
이 '신비는 천신 '천왕성모'가 출산한 징후라고 전한다,
<칼바위> 산속의 마을이라 중산리 한다. 칼바위는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에 제일먼저 만나는 바위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의 큰 바위 밑에서 은거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 자를 찾아서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하였다. 그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칼바위가 있는 그 자리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서
유암폭포 아래의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서져 이곳까지 날라와 꽂치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여 이름을
칼바위라고 불렀다 한다.
<문창대文昌臺>법계사 앞 헬기장을 지나 암봉에 최치원이 법계사에 머물 때 책을 읽고, 시를 짓고, 명상에 잠겼던 문창대
(文昌臺)가 있다
문창대의 넓은 반석 앞에는 고운 최치원선생이 지팡이와 짚신을 놓았던 곳이라는 의미의 ‘고운최선생임리지소(孤雲崔先生
淋履之所)’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문창은 선생의 시호이다.
<최치원 출생 설화 > 신라 헌강왕 원년(857년)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설화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문창이라
는 곳의 영으로 부임하면서
치원을 잉태한지 넉달만에 금돼지로 부터 변을 당했다. 그후 6개월만에 치원을 낳았다. 아버지는 차마 이 아기를 기를 수가
없어서 치원을 내다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무인도에다 갖다 버렸다. 그런데 밤만 되면 하늘에서 선녀들이 와서 젖을 먹여 키웠고
낮이 되면 오색 무지개가 찬연한 하늘에서 큰 학 한 마리가 날아와서 치원을 품고 있어 아무 탈없이 자라게 되었다.
치원이 무인도에서 책을 읽을 때 소리가 어찌나 낭랑했던지 중국의 황제 귀에까지 들려서 황제는 신라국에 학사를
보내어 시로써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동이라는 칭호를 받은 최치원은 12세 되는 해 당나라에 유학을 하여 명성을 떨쳤고 6년 만인 18세 되던 해에는 중국에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지리산 법계사法界寺》
지리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1,450m)한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5년에 연기(緣起)조사가 전국을 두루 다녀본 후에
천하의 승지(勝地)가 이곳이라 하여
천왕봉에서 약 3㎞ 떨어진 이곳에 창건하였다. 용이 사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산세는 좌우로 급박하게 짜여져서 오직
동남쪽으로만 트였고,
춘분과 추분에는 남극의 노인성(老人星)을 편히 앉아서 볼 수 있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며, 갖가지 동식물
이 많아 경치가 빼어나다.
절의 위치는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쉼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법당 왼쪽 바위 위에
세워진 석탑의 기단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그 어디에도 견줄 수 없다.
법계사는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이성계에 패배한 왜군에 의해 불탔고, 1405(태종 5)년에 정심(正心)선사가 중창했다,
1908년 일본군에 의해 다시 소실되어 방치되었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81년 절다운 형태를 갖추었다.
이 절은 일본과 미묘한 관계가 있는 절로 예로부터 ‘법계사가 일어나면 일본이 망하고, 일본이 일어나면 법계사가 망한다’
고 하여 여러 차례 왜적이 침범하였다.
고려 때 왜적 아지발도(阿只拔屠)가 이 절에 불을 지르고 운봉전쟁에서 이성계의 활에 맞아 죽은 일화가 있다. 일본의
침략을 받고 그 혈맥을 끊기 위하여 일본이 쇠 말뚝을 박은 것을 제거 한 것이 절에 있다.
법당 왼쪽에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법계사 삼층석탑은 높이가 2.5m이며, 약식화된 형태, 조형미의 투박함 등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탑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자연암석을 기단 삼아 물끄러미 하계를 지켜보고 있는 삼층석탑, 어느 석탑처럼 화려한 수식도, 안정된 미감도
갖추고 있지 않지만 하늘 가까이 있어 맑은 푸른빛과 때로는 지리산의 아름다운 운무와 조화되어 있다.
오로지 천계(天界)로 향한 그 상승감 속에서 고려인의 외경심을 읽을 수 있다. 연무 가득한 지리산 자락의 신비감을
법계사 삼층석탑은 지리산 가장 높은 곳에서 항상 지켜보고 있다.
<tip>복전은 불교의 범방경전에서 복을 짓고 지혜를 딲아라의 부처님께서 설법 하셨습니다.
범망(梵網)이란 어부가 그물로 물고기를 잡듯 일체 견해(見解)를 모두 건진다는 뜻이 있다.
복 받는 일 福田
1.삼보를 수호 유지 발전하게 하는 일
2.부모 조상에게 효도하는 일
3.스승 성인들을 공경하고 이웃 친지 가족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일
4.길 닦고 우물 파고 다리 놓는데 보시 봉사하는 일
원종스님 깨달음으로 가는 梵網經. 복과 지혜를 닦아라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