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청주 옥산면 국사리 강감찬 묘(풍수로 묘주인을 가려보자)
1. 진양강씨 강감찬과 현종
* 진양(진주)강씨는 주나라 강태공의 후예로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597년 수나라 30만대군을 격파)을 시조로 한 오래된 씨족이고 인구는 130만명(2021년)으로 우리나라 6위이다.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대장군(시중공)파, 은열공파, 인헌공파가 오대파(五大派)인데 박사공파가 1백만 인구로 가장 많고 인헌공파에 강감찬이 있고 은열공파에 강감찬의 부장 강민첨이 있다.
* 고려 삼한벽상공신 강궁진(姜弓珍)은 인헌공파의 시조이고 금천(지금의 서울 관악구 금천)에 살았던 연유로 일부가 금천(衿川)강씨로 분성하였다. 강궁진의 아들이 강감찬(948~1031)으로 키가 작고 풍채는 볼 품 없었다고 하나 청렴하고 인품 좋고 전략가이었다. 36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0세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70세에 귀주대첩을 거둔 뒤 식읍8백석을 받고 문하시중에 올라 84세에 졸(卒)하였다.
* 흔히 병자호란과 거란의 2,3차 침공을 대비하는데 병자호란 때 척화론자들이 대책없이 친명을 주장하여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과 달리 강감찬은 사전대비를 하면서 승전의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병자호란 때 대표적인 주전론자인 김상현은 백성이 희생되더라도 명나라를 섬겨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임란 때 10만 양병설이 채택되지 않았으나 귀주대첩 때 강감찬이 동원한 군사는 20만명이었다.
강감찬장군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또 다른 받침은 현종의 전적인 신임이다. 현종은 많은 신하들이 거란의 기세에 놀라서 항복하자고 하였음에도 주전론을 펴는 강감찬을 믿고 군사 통솔권을 주었다. 선조나 인조 같이 의심과 시기심 많은 옹졸한 임금은 역모를 겁내어 백성이 따르는 영웅을 그냥 두지 못하는 법이다.
* 현종은 누구인가? 고려 태조 왕건의 8남 욱(郁)은 과부가 된 조카 며느리 헌정왕후 황보(5대 경종의 비)와 이웃에 살다가 불륜관계를 맺어 992년(성종11년) 아들 순(詢)을 낳았다. 성종은 욱을 사천 능화촌에 귀양 보냈는데 순의 어머니가 산고로 죽자 순을 불상히 여겨 2세되는 순을 능화마을 고개넘어 배방사로 보내어 아버지 욱을 만나볼 수는 있되 함께 살지는 못하게 조치하였다. 욱은 매일 고개 넘어 순을 만나는 낙으로 살다가 귀향온지 4년만에 사망했다. 욱은 죽을 때 고개마루 인근 귀룡동에 장사지내되 시체를 엎어 묻으라고 유언했다. 순은 6세때 개경으로 귀가하였고 18세 때 유일한 혈통계승자로 왕위에 오르니 제8대왕 현종이다. 사람들은 욱이 엎어진 상태로 묻히어 속발하였으므로 풍수지리의 고수이었다고 본다.(사천 능화리 복시면장혈 간산기 참조) 현종은 고려의 기초를 확고하게 다진 현명한 임금이었다.
2. 거란과의 전쟁
* 제1차로 993년(성종12년) 거란 소손녕이 수십만 군사를 이끌고 서경까지 침범하였고 이에 서희가 담판하여 외교적으로 수습하였다.
* 제2차로 1010년(현종1년) 거란 요나라 성종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침범하였는데 고려의 집권자 강조가 대패하고 전사하자 항복론이 우세하였으나 당시 60세된 강감찬이 한사코 반대하고 현종을 나주로 피난시킨 다음 양규등과 수성에 힘쓴 끝에 퇴각시켰다.
* 제3차로 1018년(현종9년) 소배압이 정예기병 10만명을 동원하여 침공하였는데 70세의 강감찬이 총대장으로 전쟁을 지휘하여 흥화진에서 수공으로 타격을 입혔다. 소배압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서경으로 진격하였다가 고려군이 식량과 말먹이를 치우고(淸野전술이다) 항전하는 바람에 후퇴하여 귀국하는 것을 구주(龜州, 귀주라고도 함)에서 강민첨 김종현을 부장으로 삼아 결전을 벌리어대첩을 거두었다.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명에 불과하였고 이로써 고려는 동북아의 세력균형에 한 축(軸)이 되어 요나라가 1125년 송나라에 의하여 멸망할 때까지 120년간 평화가 유지되었다.
* 1031년 현종이 죽고 몇 달 뒤 강감찬이 죽었으며 요의 성종도 그 해 죽었다. 귀주대첩에서 용맹을 떨친 강민첨은 1021년 사망하여 충남 예산 이티리602에 묻혔는데 중등초급 명당으로 추측되고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3. 강감찬 묘에 관한 논쟁
* 청주 국사리 산26-2에 강감찬과 강민첨을 모신 충현사가 있고 그 옆에 인헌공 강감찬장군 추모비라는 비석이 있는 묘가 있다. 이 묘에 대하여 실제 강감찬 장군 묘라는 견해와 확인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고 당국은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지 않고 2015.4 청주시 향토유적제104호로 지정하였다.
* 강감찬은 구주대첩 후 충청 천수(天水)에 식읍을 받고 거기에 묘가 있다는 말은 있는데 천수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선조와 광해군 때 강감찬 묘에 나무를 심어 정비하라는 실록기록이 있고 순종 승정원일기에 강감찬 묘를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라는 기록이 있으나 묘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강씨문중은 현지인들 사이에 이 곳 골짜기에 장군묘가 있다는 말이 전해 오고 있고 청주 옥산 동림산에 은거하였는데 거란의 자객이 오는 것을 잡았다는 말이 있는 것을 근거로 수색한 끝에 가시덩굴속에 있는 장군의 묘를 찾아내고 1963년 당국과 함께 묘를 발굴하였다. 묘속에서 넓적한 큰 돌에 글자를 새긴 묘지석을 찾았으나 글자가 마모되어 강(姜)이란 글자와 감찬이란 글자의 일부 획을 판독할 수 있었다. 당국은 그 정도로는 강감찬 묘로 확인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문화재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강씨문중과 유지들이 1967년 추모비를 건립하고 현충사 보존위원회를 결성하여 문화재지정을 추진하고 있으나 출토된 묘지석의 행방도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상황이다.(다행히 사진은 있다)
* 강씨들은 인조가 1645년 소현세자와 1646년 세자빈 강씨를 죽이고 세자비의 아버지 강덕기(강감찬의 17대손)를 사사하자 화가 미칠가 두려워서 장군의 묘를 허물고 도피한 탓으로 실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순종의 승정원일기(1910년 직전의 기록분)와 부합하지 않는다. 다만 임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전쟁후의 대(大) 기근으로 전국토가 유랑민으로 전락하여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하였으므로 그 시기에 조상의 묘를 실전한 경우가 많았다. 고려 때의 시조묘는 대부분 수백년 혹은 천년간 실묘하였다가 찾았다.(각 성씨의 시조묘 참조)
4. 풍수적 고찰
* 인걸은 지령이라 명당에서 인물이 난다. 반대로 명당은 자기에 걸맞는 시설이나 인물을 끌어들인다. 위인의 묘는 명당인 경우가 많고 흉지에 위인이 묻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묘가 명당이라면 범인(凡人)이 아닌 강감찬 장군의 묘일 가능성이 높고 흉지이라면 강장군의 묘는 아닐 것이다. 풍수학회 중에는 주인봉의 오행체와 음분속(音分屬)으로 묘주인의 성씨를 판별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묘의 주인 성씨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다.
* 중국---주산은 상봉산(193M)이고 토산으로 무르고 둥치가 빈약하다. 그러나 입수래룡은 잘 발달되어 있고 현무에서 방향을 조금 전환하면서 뚝 떨어져 내려 앉았다. 中局의 모양새도 좋다. 중등중급의 명당이다.
* 강감찬 묘---입수래룡에 풍천임씨 집장지(2004년 조성)가 있고 주변이 너절하여 볼 품이 없다.
* 풍수적으로 이 묘는 강감찬의 묘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명당이고 앞서 본 자료정도이면 문화재로 지정해야 옳다. 우리의 역사이래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강감찬의 귀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대첩을 3대 대첩이라 한다. 을지문덕은 이북에 사적이 있다. 이순신에 관한 연구자는 수십명에 이를 것 같으나 강감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적다. 강감찬에 관한 드라마는 장군이 왜소하고 풍채가 볼품 없다는 사실과는 달리 꽃미남 최수종을 배역으로 삼아 재미있게 보면서 장군의 묘가 너절하게 있는 것을 방치하는 것은 옳지 않다. (2024.3)
첫댓글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