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끝나가던 날, 거실 창문 가득히 들어온 햇살에 이끌려 걸으러 나갔다. 집안에서 보던 햇살은 따뜻했는데 밖에서 만난 햇살은 꽃샘추위를 몰고 온 바람 때문에 따뜻함도 밀리고 있는 중이었다. 공원을 작게 한 바퀴 돌았는데 가슴으로 파고드는 바람 때문에 더 이상 걷는 것이 무리였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기는 좀 아쉬워 공원 입구에 있는 도서관으로 발을 옮겼다. 도서관 문을 여니 로비에 햇살이 가득하다. 로비 소파에 앉아 추위를 녹이고 열람실로 들어갔다. 책들이 가득 꽂힌 서가를 드나들며 책 구경을 한다. 그중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빌려올 작정이다. 신간 도서를 모아 놓은 곳을 들여다보다 눈에 띄는 빨간 표지의 아담한 책을 집어 들었다.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반비, 2024
슬쩍 보고 책을 내려놓는데 지은이의 이름이 낯이 익다. 그 익숙함이 어디서 오는지 모른 채 책을 빌려와 읽기 시작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독자들이 세 단위의 시간대를 왕복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가 최근 미국 땅을 밟았던 2016년, 그리고 두 형의 석방과 지원활동을 위해 미국의 인권단체와 국무부를 방문했던 1980년대 중 후반, 그리고 이 책에 담긴 글을 쓰던 2019~2020년이라는 시점이다.
지은이 서경식은 1970년대 ‘재일 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조작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서승 서준식 형제의 동생이다. 이 사건으로 서승 서준식 형제는 1심에서는 사형을 2심에서는 무기징역을 구형 받았었고, 그들은 선고 받았던 형기를 다 마치고도 전향을 거부한 이유로 10년을 더 복역, 19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런 형들을 살리기 위해, 서경식은 미국을 방문하고 지원을 요청하고 도움을 구하러 다녔었다. 그는 미국 방문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늘 따라다니는 시선이 있었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비는 시간에 그는 어디서나 미술관에 다녔다고 했다. 그것이 이 인문기행의 그루터기가 된 것 아닐까? 어디에서도 도움을 찾을 길 없었을 때 그는 힘든 가운데서도 선한 아메리카를 경험한 것 같다,
그가 2016년 다시 미국을 찾았을 때는 차별주의자 도널드 레이건이 유력 대통령 후보로 부상할 무렵이다. “우리는 앞으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155쪽) 라고 되 뇌이며 휘트니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 미술관을 우울한 심정으로 거닐었지만 그 반대편에서 ‘선한 아메리카’를 지켜 내고자 하는 이들을 향한 희망의 마음을 접지 않았다,(6쪽)
그는 미국의 세 도시. 뉴욕, 워싱턴 D.C, 디트로이트를 통해 인간을, 세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뉴욕에서는 9.11메모리얼을 찾아가 세계 각국에서 찾아든 관광객과 뒤섞인 채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그라운드 제로(2001년 9월 11일 항공기 납치 자폭 공격사건으로 무너져 내린 세계 무역센터가 있던 자리)에 서서 그는 ‘9.11에 의해 막이 열린 21세기, 인류는 앞으로 얼마나 더 파괴와 살육을 찾아 나가게 될까’ 생각했다.(224쪽)
그는 한국 정치가 만들어낸 가족의 고통 속에서도, 미국의 예술과 정신세계와 나아가는 방향을 끊임없이 드나들며 미국이라는 큰 나라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바로 보려했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것들을 돌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면서 지은이는 ‘선한 아메리카를 기억’하려 애쓰며, 미국이 선한 아메리카로 남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2019~2020년 11월에 7장 ‘아메리카 2’를 집필해 보낸 후 마지막 장인 맺음말이 끝난 것은 2023년 12월 17이었다. 그 3년간 우크라이나 전쟁,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의 전쟁, 피는 끝없이 흐르고 여성과 아이들의 울부짖음이 멈추지 않는 속에서 그는 말한다. “얼마나 더 파괴되어야 하는 걸까? 얼마나 더 죽어야 끝나는 걸까?” 이 전쟁의 그림자 뒤에 미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그는 선한 아메리카를 지켜내고 기억할 수 있게 되기를 다시금 바라며 글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