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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지진의 소나무 두 그루. |
단군 이래 유구한 역사가 이루어진 국토박물관. 지리상 한강, 예성강, 임진강 어귀에 처해 있어 서울의 관문이었던 강화는 한국사의 축소판으로 ‘저항과 긍지의 숨결이 어린 땅’이다.
설날 연휴에 짬을 내어 근교의 마을순례를 계획하고 떠나는 길. 수일 전 개인전(인도, 탄자니아)을 모두 마쳤기로 스스로의 긴장을 풀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포에서 강화로 연결된 초지대교를 지나 잠시 초지진(草芝鎭)에 오르는 순간 생각은 어느새 분열이 일어난다.
외세와 굴욕에 맞서 싸워야했던 선인들의 영혼이 강물처럼 흐르고, 그 공고한 기상이 뿌리 깊은 소나무 두 그루로 솟아난 듯하다. 포탄의 상흔 속에도 형형한 기세의 소나무는 솔잎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 또한 특이하다.
차는 염하강을 끼고 저항과 방어기지였던 덕진진, 광성보, 오두, 화도, 용당, 가리산돈대를 거쳐 선원면 지산리 산중턱의 선원사지(禪源寺址)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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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사지와 연꽃 논두렁 스케치. |
선원사 주지 성원(誠願) 스님이 맞아주니 불과 수일 전 인사동 학고재화랑(‘나는 인도를 보았는가’)을 찾아준 인연이 오늘에 이른다. 수 년 전(1993년)에 팔만대장경의 판각과 훗날 해인사로 간 이운경로 행사를 의미 깊게 느끼고 심중에 두었는데, 마침내 판각의 산실인 선원사지로 오게 되었다. 옛터의 발굴과 함께 복원의 청사진을 지닌 곳이 선원사이고, 그 불사의 중심인물이 성원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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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사 대웅전 주련과 성원 스님의 글. |
발굴이 진행 중인 복원사지를 오르며 생각한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로 도읍을 옮긴 후 고종 23년(1236년) 최우가 창건한 사찰터가 이곳인가. 39년간 항쟁을 치루면서 그 뼈아픈 시련을 떨치고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일으키고자 팔만대장경을 조판한 흔적이 서려있는 곳이란 말인가.
솔숲으로 둘린 산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예전 대장도감이 설치된 곳이라 하여 도감산으로 부른다는 설(성원 스님)이다. 다만 선원면의 주산인 혈구산(穴口山·466m)을 중심으로 내려뻗은 남쪽의 얕은 산들 중에는 금월리, 지산리, 연리 등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혈구산은 팔만대장경을 만든 선원사를 비롯해 당시 23개 사찰터가 있었다고 한다. 또 현재 선원면(仙源面)의 명칭은 고려 때의 권신 최우가 애초 선원사(禪源寺)를 창건한 데서 유래했지만, 그 후 조선 중엽의 충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호를 따 부르게 되었다(<선원면지>).
발굴터에서 나온 유물을 보관 중인 전시장을 둘러보고 스님의 차로 해가 지기 전까지 인근의 철종 외가(냉정리)와 찬우물약수터(냉정약천)에 다달았다. 전해오는 강화 그림으로 ‘철종 임금 등극행렬도’를 살펴보면 당시 철종 외가댁의 길목과 찬우물약수터에서 임금님의 첫사랑 봉이와 사랑을 나누던 향수가 묻어나는 듯하여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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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사지와 지산 마을(94×55cm). | 이어 충렬사(忠烈祠)를 향해 선행리로 간다. 주산인 혈구산과 남산 아래터에 자리한 사당은 이곳이 예전의 선원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학계에서 주목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긴 당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기 위해선 선원면 전체가 판각장소요, 도감의 설치장소였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사당은 인조 14년(1636년) 김상룡 선생의 순절과 충의정신을 높이 받들고자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이후 여러 애국지사들의 위패(29위)를 함께 모신 곳이다. 매년 음력 10월(양력 11.15~20)에 제향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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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연 스케치. |
날이 저물기로 절이 있는 지산 마을로 돌아와 매년 ‘논두렁 연꽃축제’가 열린다는 논두렁을 돌아본다. 겨울 논은 온통 흙 속에 고개 파묻고 허리 꺾인 죽은 연들의 행렬로 끝이 없다.
지난해(2005년)까지 3회의 연꽃축제를 열었다는 스님은 이곳 지산 마을을 연꽃마을로 가꾸기 위해 주민들과의 유대와 홍보, 현실적인 수익창출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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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사의 구관조. |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2006년) 주민 제안서를 군청에 제출한 추진위원장이기도한 스님은 벼농사 외에 지산 마을의 특산물로 배와 연(蓮)을 내세운다. 그 중 연은 연꽃축제 등 경관의 아름다움, 관광자원을 넘어 연을 가공한 식품개발로 주민소득증대 차원으로 이끌고 있다. 즉 연꽃차, 연잎차, 연대차, 연근차, 연말차를 개발, 시판에 착수했다. 또 웰빙식품으로 연 요리를 개발하여 현재 창리에서 ‘좋은 연’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스님의 생각은 절이 수행터전과 함께 생활터전이 되어 자립과 함께 이웃의 삶에 봉사하는 현실에 기초한다. 즉 종교끼리의 반목을 허물기 위해 타종교인을 적극 끌어들이고, 주민의 합의에 따라 농촌개발을 추진해 나간다는 취지다. 논두렁 연꽃축제 때 신부, 목사, 원불교 교무, 수녀들을 초청하여 함께 행사를 나누고, 지역 갈등해소와 연꽃마을의 미래상, 즉 경관과 소득, 문화와 경제의 합리화를 꾀하려는 것이다.
한편 인근 지역에 황토불한증막을 조성, 외지 사람들을 부르는 휴식공간으로 지역 특성을 모색하고 있다. 나그네도 하룻밤 그 황토불한증막에서 철철 땀 흘려 보니 느낌이 각별하다. 어쩐지 찌들고 고단한 육신과 세속 티끌이 흘린 땀으로 마음이 씻기는 듯 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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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사 성원 스님. | 이튿날 아침 배낭 메고 스님방에 도착하자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 추진위원인 연리의 권국원씨(51)가 다담(茶談)을 나누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권씨는 순무재배농장 순무골의 대표요, (주)강화명품 연구소장으로 순무에 관한한 최고의 전문가요 경영인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순무에 미친 사람이다. 지금껏 순무의 효능과 상품 출원을 위해 상표등록(5개), 특허출원(5개)을 따냈다. 순무가공 제품으로 즙, 농축액, 환, 조청, 잼, 찐순무씨, 국수, 김치, 엑기스, 약쑥 등으로 개발해 상품화하고 있다. 이 또한 연꽃과 함께 선원면의 명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는 순무재배공장 사무실에서 강화의 옛 지도와 그림을 보여주고, 강화도 역사문화 여행의 길라잡이 윤용환씨(강화도닷컴 대표) 연구실로 나를 안내했다. 덕분에 강화 역사와 지도에 미친 또 한 사람을 만났고 윤씨의 지도 두 장을 얻었다.
권씨는 이어 권율 장군의 생가터로 알려진 곳으로 차를 몰았다. 권율 장군 생가복원을 생전의 숙원사업으로 꼽고 있는 그는 농토 매입, 문화재 관계자의 협조를 학수고대하는 열정어린 장군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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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무골 대표이자 순무연구소장인 권국원씨. | 이제는 홀로 차분히 밑그림을 그려야함으로 동행과 헤어져 선원사지 건너편 산언덕을 오른다. 넓은 터에 산신각을 마련해둔 당우는 편리한 요사채까지 갖추어 놓아 작업하기가 편리하다.
산신각 뜨락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발굴 복원중인 선원사지가 한눈에 드러나고, 절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금월리, 우측에는 지산리가 펼쳐진다. 그리고 근경으로 드러난 빈 논에 생명을 다한 겨울연의 물결로 논두렁이 출렁이고 있다. 한겨울 황량한 논밭 대신 무성했던 연꽃의 흔적으로 충만한 논은 사실 처음 느껴보는 풍경이요, 충격이다.
선원사터와 논두렁 전경을 그린 다음 화첩을 끼고 논두렁으로 내려와 쭈구리고 앉아 바라보는 겨울 연들의 자태는 천태만상이다. 오, 한겨울 시든 연잎의 장엄!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허리 꺾인 연 줄기와 고개 숙인 연잎의 판타지아. 마치 죽음의 만다라를 보는 듯한 형체는 온갖 선율의 비장한 곡조요, 죽음의 환상곡처럼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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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종 외가와 묘역. |
그러나 남은 눈과 얼음 사이로 솟아나 있는 연 줄기는 마치 춤을 추는 듯, 아니 영혼과 피안의 세상을 만끽하는 혼백의 숨결처럼 나부끼며 손짓한다. 이렇듯 사(死)의 찬미를 이 겨울연처럼 보여준 예는 내 삶에서 지금껏 없었던 것 같다. 연꽃몽우리가 마치 합장하는 모습으로 연상된다는 종교적 해석과 오랜 불화(佛花)의 상징 속에는 결코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의미부여가 강하다.
한편 꽃이 피면서 열매 맺는 생태는 과정과 결실이 곧 하나임을 깨닫게 하며 생명이 다한 후 목숨은 나누고 돌려주는 것, 즉 회향(廻向)의 뜻을 연에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꽃, 줄기, 잎, 열매, 뿌리 모두 인간에게 유익하게 쓰일 수 있도록 되돌려 주고 있다니. 또 그러한 효능을 발견하고 연구하고 보급하는 이가 있다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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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 연의 노래(94×55cm). | 꽃 피듯 화려한 삶에서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비로소 쓰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연의 가르침이요, 더없이 장엄한 죽음의 서사곡을 보여주는 겨울연의 감동이다. 나는 마침내 화첩을 펴고 그 장엄한 죽음의 노래를 붓질하며 작은 깨달음을 얻는다. 죽음이 이처럼 찬란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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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사 전경(33×24.5cm). | 산신각 요사채에서 묵은 다음날은 오전 내 철종 외가로 가서 화첩을 폈다. 사대부 집안의 가옥으로 1853년에 지을 때는 H형 집이었으나 현재는 ㄷ자 형식으로 남아있다는 안내문을 살펴본 뒤 좌향 야산 중턱의 묘를 답사하니 철종의 외숙부 3인의 묘역임이 살펴진다. 장명등과 망주석, 석양(石羊) 등의 석물은 당시의 위세를 보여주는데, 이상하게도 비문이 움푹 파인 흔적이 있다. 알고 보니 파평(坡平) 염씨 한 사람이 철종 외숙 행세를 하며 궁궐을 출입하기 위해 용담(龍譚)염씨 비문을 파평염씨로 고쳐 놓았다가 들통났다는 일화다. 이러한 사실이 밝혀진 후 비석의 일부를 갈아내고 비문을 다시 고쳐 새긴 흔적이 여실하다.
점심은 스님의 후의로 연 요리 전문인 좋은연식당에서 마을분들과 함께 들었다. 지산2리 조영기(趙永冀·52) 이장, 마을개발위원장 이경순(李京淳) 등 마을분과 연리 순무골의 권국원 소장, 육필문학관의 노희정 관장(시인)들과 연잎에 싸인 향그러운 밥과 나물 등 연 요리를 대접받았다.
특이한 것은 연 가루를 묻힌 고기는 냄새가 배지 않고 연기가 나지 않으며 쉽게 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이 웰빙식품이 될 수 있고, 국내는 물론 해외로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식품이라며 역설하는 스님. 이미 몇 개의 상표등록과 특허를 따놓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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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사 전경(33*24.5cm). |
무엇보다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요망되는 농촌문화의 시대상을 볼 때 주민의 화합 아래 신문화의 창출은 필요선이요, 미래를 향한 청사진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기획과 의지도 공도 의식의 가치 속에서만 꽃피는 법. 이해와 나눔은 지속되어야 하리.
오후엔 충렬사로 다시 가 사당에 참배하고 화첩을 폈다. 20년째 관리를 맡고 있다는 김진건(金振健·67)씨와 지난 얘기를 나누는데, 까마득한 은행나무 위 까치집에 까치가 날아든다. 금년 한 해, 이 땅엔 또 어떤 소식이 전해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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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산2리 이장 조영기씨. 2. 지산2리 마을개발위원장 이경순씨. 3. 충렬사 관리인 김진건씨. 4. 지산2리 부녀회장 김진숙씨. |
차편을 이어 신정리의 더러미미술관에 오자 한겨울이라 잠시 휴관 중이라는 김경민 관장의 말을 들으며 그 동안의 노고를 짐작해야 했다. 그리고 척박한 현실을 잘 이겨내고 부디 지역문화에 기여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빌었다. 이웃한 연리의 육필문학관과 함께 창작과 전시,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를.
사실 이러한 문화적 토양은 강화의 깊은 역사와 함께 숨을 쉼으로 샘이 깊은 물, 뿌리 깊은 나무가 될 수 있다는 자긍심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는 한때 외세의 침입과 약탈, 뼈저린 민족사의 현장으로부터 벗어나 이제 신문화의 창출에 함께 참여하고 기여하는 보람으로 삼아야할 일이다. 그래서일까. 현재 복원된 해안가(연리)의 용당돈대(龍堂燉臺)에 올라 바라보는 감회는 각별한 것이었다. 과거를 떠올리며 현실의 삶을 추스르는 강 바람속의 여운.
그리하여 나그네의 여정은 다시 지산 마을로 돌아와 또 이장을 찾았다. 잠시 부녀회장 김진숙씨(50)를 만난 뒤 이장의 차로 앞마을 언덕 너머 뒷마을 까지 살펴보며 농촌마을의 현실과 내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그 역시 연꽃 농사가 어쩌면 마을의 판도를 바꾸고 새날의 희망을 보게 한다고 내비쳤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 종교의 중심이 아닌 모두의 화합과 협조, 이해와 실천이 매우 중대함을 밝혔다. 그것이 가능한 곳이 어쩌면 연꽃마을 지산리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신뢰하며 주목해 보고 싶다.
다행히도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이 심의를 거쳐 통과돼 점차적인 사업이 진행될 지역은 연리, 지산1, 2리, 신정1, 2리의 선원면 5개 마을이다. 모두 주민제안서에 서명하고 동의한 주민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 근자엔 지방자치마다 축제가 난립하는 과시 행정으로 실제 주민 혜택이 이루어지지 않는 소모적인 행태를 지적해온 바, 다만 지산 마을은 건강한 사례로서 연꽃 축제가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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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당돈대(33×24.5cm). | 그 옛날 국력을 도모하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판할 당시엔 이 논두렁이 모두 물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혜의 조건을 갖춘 높지 않은 산 아래 선원사와 이웃한 절들이 모여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물길로 배가 드나들고 뭍으로 대장경을 이운했던 장관이 펼쳐졌으리라.
당시 한 땀, 한 마음을 모아 새롭게 국력을 신장하던 선현들의 노고와 뜻이 이제 연꽃 물결로 피어나는 오늘의 역사 또한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그리하여 다시 생명을 다한 논두렁의 겨울연을 바라본다. 목숨의 가치가 산화되지 않는 장엄한 죽음을 본다. 존재의 모두를 되돌려주는 회향 속에 희망의 노래를 듣는다.
그림·글 이호신 한국화가 lhs1957@lycos.co.kr
2006.04. 438호
[산마을 그림순례 (16)] 다시 청산으로 돌아오라
삼척 응봉산 신선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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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의재에서 바라본 신선고을 스케치(49.5×24.5cm). |
겨우내 묵은 김치로 입맛이 바래가는 시간, 밥상에 냉이국이 올라왔다. 향긋한 봄내음이 화신(花信)을 부른다.
“아니, 이 신선한 냉이가 어데서 났소?”
“어제 친정 길에 고모와 함께 한나절 밭두렁을 누볐지요. 그 보다 이 국맛이 어때요. 예전의 된장맛을 오랜만에 느끼겠는데요.”
한 주간 산천을 떠돌다가 집에 돌아오니 삼척 응봉산 심마니 마을에서 보낸 소포가 배달되어 있었다. 화구와 배낭을 짊어진 나그네에게는 그 어떤 선물꾸러미도 짐이 되는지라 당시에 극구 사양하였건만 산골 인심은 아직도 시대를 거스르는 경우가 있는가 보다. 간장, 된장에다 주산물인 가시오가피 농축액을 보내온 살뜰한 마음이 아내에게 봄날의 햇살처럼 느껴졌고, 그 고마운 정성이 냉이를 캐게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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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 응봉산 신선고을(96×138cm). | 뇌물과 선물이 헷갈리는 세상. 그 진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상대에 대한 이해관계를 떠난 경우만이 가능하다. 나의 경험으로 산촌은 해발이 낮을수록 눈칫밥을 얻어먹어야 했고, 해발이 높을수록 인심이 후하고 잠자리가 편했다. 외롭고 사람이 그리워서 반기는 인지상정인가. 아니면 산수(山水)에 물든 자연인의 배려인가. 삼척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려서 427번 지방도를 트럭으로 질주하는 시간. 나를 태운 기사는 노곡면 상마읍리 심마니마을의 안근준(安根濬·57) 선생이다. 마을에서 묵을 요량으로 미리 잠자리를 부탁한 터에 마중까지 나왔으니 그를 통해 마을 얘기를 청해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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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고을 심마니마을의 안근준 선생(39×30cm). | 백두대간 태백동령인 응봉산(1270m), 사금산(1310m), 두리봉(1072m)의 고봉들로 둘린 산빛 아래 둥지를 튼 마을 이야기다. 양리, 대평리, 하마읍, 중마읍, 주지리, 상마읍 6개 마을이 산골짝으로 숨어들었는데, 예전 고려조에 강릉김씨, 밀양박씨가 처음 입산했고, 경주최씨가 뒤를 이었다가 근자엔 점차 각성받이가 되고 있다. ‘마읍’은 고려의 마지막 공민왕이 은거 당시 두리봉의 영험함에 말에서 내려 3번 절 하였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예전에는 화전과 약초, 송이가 주산이었으나 가시오가피, 황기, 당귀, 도라지, 황정 등의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오늘에는 이 산골 청정지역을 ‘강원자연생태 민속촌’으로 가꾸고자 6개 마을을 묶어 ‘신선고을’로 부르기를 원한다.
태백으로 넘어가는 버스(28번)가 하루 6회 왕복하는 깊은 산골길, 신라 때 고찰 신흥사를 끼고 마읍천이 흐르는 길은 산마을로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산골 주민의 민원과 행정을 담당하는 마읍민원중계소에서 소장(김덕호)과 차 한 잔을 나누고 다시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산색은 유난히 푸르고 봄기운이 완연한데 수년 전 태풍(루사, 매미)의 잔해가 강변 곳곳에서 드러난다. 또 급조된 인공의 흔적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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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서들 계곡. |
먼저 마을분들과 인사를 나누기로 하여 늙은 배나무터의 최홍식(崔洪植·50) 이장댁에 들리니 몇 분이 모여 있다. 향긋한 산나물 점심을 물리고 이내 화첩을 펼쳤다. 이장을 비롯한 노인회장 박상규(씨69), 새마을지도자 정의성씨(32), 정씨의 어머니이기도 한 부녀회장 김영자씨(54), 개발위원 윤영희씨(53)를 그린 후 붓을 씻었다.
또 뵙기로 하고 마을 길라잡이를 자청한 안 선생을 따라 그의 거처인 상마읍 심마니마을 황토집에 배낭을 풀었다. 그리고 함께 마을 주변을 둘러보는 시간. 먼저 신서들 계곡을 오르는데 물빛이 맑다 못해 깊고 푸르다. 여태 응달엔 눈꽃이 시리고 해빙은 멀었다. 하지만 황장목(적송)의 씩씩한 기상이 숲을 이루어 벼랑으로 치달리고 계곡 물소리 기운차다.
예전엔 심마니들이 이 산속에서 겨우내 자신들만의 생활로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았단다. 남들은 폭설로 고립된 마을이라고 하지만, 산사람들에겐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기도 했단다. 지금도 고란이, 노루, 멧돼지, 족제비, 너구리, 산양이 가끔 출현한다는 설산엔 멧돼지 발자국이 눈밭에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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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봉산 심마니마을ⓛ(66×24.5cm). | 하늘봉이 마주보이는 산길에서 잠시 돌아보는 풍광. 빈집에는 산사람이 아닌 도회지 사람이 두어 해 머물다 갔는데, 부탄가스 쓰레기와 가전제품, 침대 등을 버리고 갔다. 입산 때 통사정하여 부득이 빈집을 빌려주었더니 갈 때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단다. 자족하지 못하는 관습은 적응도 안식도 되지 않는 법, 자연 속에서 무엇을 타박하랴. 이 푸른 숲, 저 맑은 물을 바라보며 산속에 홀로 살기가 사실 그리 쉬운가. 누가 홀로 있음이 외롭지 않다고, 세속을 잊겠다고 쉽게 자신하랴. 새삼스레 옛사람의 무위정신(無爲精神)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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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봉이 보이는 심마니집. | 만물은 변천하여 정한 모양이 없는데 이 한 몸 때를 따라 한가하게 지내노라. 요즈음 내 능력은 날로 줄어들어 청산만 바라 볼 뿐 시는 안 짓네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무위(無爲)’
한편 산중계곡도 수해의 흔적이 엿보여 내가 손짓하자 안 선생은 말을 덧붙인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수해지만 자연에서 보면 자기 정화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순리와 섭리를 거스른 인공의 흔적은 가차 없이 파괴되었지만 예전의 지세와 지형은 대체로 변하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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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봉산 심마니마을②(98×65cm). |
안 선생은 이 약초산지와 청정계곡에 대체의학으로 암 환자들을 위한 시설을 꿈꾸고 있다. 실제 말기암 환자들이 이곳에서 치유되고 회복되었기로 그들의 후원으로 일이 추진 중이라고 한다. 이곳 산지의 약초 수종을 묻자, 천궁, 당귀, 오가피, 작약, 황정, 독활, 음나무, 원두충, 마가목, 석창포, 참마, 천마, 백복령(소나무 뿌리)들을 열거한다.
이제 해가 저물기 전에 마을 전경을 살피기 위해 트럭을 타고 계곡 산길을 따라 문의재로 올랐다. 주산 응봉산 마루에서 내려다보는 꼬부랑 마을길과 계곡, 그리고 하늘봉을 안산으로 바라보고 두리봉과 사금산을 좌우로 나뉘었다. 그 사잇길로 구불거리며 띠처럼 마을이 둥지를 틀었다. 즉 상마읍 심마니마을에서 중마읍, 하마읍, 그리고 대평을 지나 가물거리는 양리까지 마을길이 이어지는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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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마니마을 안근준 선생댁의 황토집 외부와 내부(각각 33×24.5cm). | 솔숲이 울창한 불경골과 문희골은 옛 궁궐을 지었던 황장목의 산실로 일제 때 수탈의 현장이었다. 그 명예는 지금도 유효하여 미래에 쓰일 적송(赤松)의 모토(母土)를 지닌 소나무 산지다. 푸른 하늘, 푸른 산, 푸른 솔, 온통 푸른 빛 속에 꽃샘바람이 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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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마니마을의 당집. | 산을 내려와서는 안 선생이 손수지은 황토집 일연선사(一然仙舍)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다. 미리 길손을 위해 방을 덥혀 놓았고, 신선한 약초나물과 정갈한 음식을 준비한 부인 김화선씨(46)과 딸 혜인(17)을 만났다. 안 선생은 한 때 지리산에서 살다가 인도로 날아가 3여 년간 수행공동체 마을 간디 아시람(Gandhi Ashram)에 머물던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늦은 결혼이었지만 꿈과 생애를 바칠 만한 터전을 발견했고 딸도 두었다. 한 마디 말없이 아비의 손님맞이를 위해 음식은 물론 차와 곶감을 챙겨오는 딸에 대해서 “또래 아이들이 없어 외롭지 않을까요? 공부는 또 어떻게 하는지?” 하고 물었다. “환경에 따라 성장의 기준도 남다른 법이지요. 도시 아이들이 겪는 난감함에 비하면 자연은 최고의 벗이요, 선생입니다. 집중력도 좋아 검정고시로 중고등과정을 스스로 마치고, 이제 대학입시로 서울 유학을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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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오가피밭에서 바라본 응봉산. |
육신은 흙을 딛고 살되 정신은 시골떼기가 되지 말라는 경우인가. 실제 안 선생의 황토막엔 컴퓨터와 스캐너도 갖추었고, 이곳에서 수년간의 준비로 ‘신선고을 계발 계획서’가 창출되었다. 오전에 그린 인물 초상을 스캐너로 인화해서 본인들에게 선물로 주면 어떠냐는 선생의 제안을 나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였고, 모처럼 한갓진 여로에 농익은 오가피 술은 길손을 대취케 했다.
이튿날은 발을 친 통창에 햇살이 들기도 전 수탉이 울어 잠을 설쳐야 했고, 그 덕에 유난한 산새소리를 베개를 끌어안고 들었다. 이내 발을 걷어 올리자 겨우내 숙성 중인 된장독들이 창에 가득하고, 산색은 새날의 기운으로 생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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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절구와 시루. |
새벽에 일어나 안 선생이 직접 쑤었다는 모두부를 아침식사로 대신하고 문지방을 건너자 뜰엔 산골 삶의 체취가 물씬한 농기구와 생활용기를 모아놓았다. 그 중 돌절구와 옛 시루를 그린다. 시루 위에 얹힌 빡죽(주걱)은 손수 선생이 깎은 것이다. 주걱은 반드시 산벚나무로 깎아야 하는데, 그 까닭은 무취(無臭), 무미(無味)하기 때문이란다.
이웃한 돌담 위의 감나무집과 당나무. 그리고 당산이 이곳의 산신(山神)이요, 신앙의 모태임을 확인한 후 다시 산길을 내려간다. 가시오가피의 중심마을인 중마읍에 이르자 이장과 주민들이 길손을 오가피 추출 가공 건물로 안내한다. 공장은 의외로 쾌적하며 최신 기계시설을 갖추어 산골이란 선입감이 무색하다. 이어서 두엄이 지천인 가시오가피밭에서 엄나무가 보이는 황토펜션 너머의 풍광을 화첩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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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딜방아. |
꽃이 만발한 가시오가피 축제(7월1~10일) 때 꼭 다시 오라고 청하며 또 점심을 준비해 놓았다는 마을 이장댁. 무슨 잔치마냥 토종닭을 잡고 낮술을 권하니 얼떨떨하다. 내 인사로 안 선생이 스캔 인화한 초상화를 내놓자 모두들 좋아라하여 함께 기쁘다. 한 동안 잠시 쉬었지만 이제 곧 눈코 뜰 날 없을 거라는 주민들의 말에는 오늘 같은 날이 아쉬워서 자꾸 모이고 손님 핑계 삼아 잔을 돌리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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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딜방앗간의 앞과 뒤. |
사실인즉 안 선생이 보여준 선선고을 6개 마을 프로젝트는 강원지역 ‘자연생태 민속촌’이 되고자 모두들 애쓰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오라’(無位自然)는 슬로건을 내걸고 그린투어 녹색산촌 체험과 관광을 곁들인 소득원을 창출하고자 준비 중이다. 예전에 사라진 산촌 생활 주거공간을 복원하여 도시민에게 자연휴양, 천연휴식, 생태체험학습, 친환경 먹거리를 제공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농민과 산골주민의 양적 질을 높이고, 귀연(歸然)하려는 도시민들에게 쾌적한 정주권을 확보해 준다는 것이다.
이에 신선고을 6개 마을은 각기 특성을 살려 6촌(村) 6식(食)을 꾀하고 있다. 즉 자연생태민속촌(상마읍 심마니마을), 가시오가피 약초마을(중마읍), 자연대체 휴양마을(하마읍), 심마니 장뇌마을(주지리), 친환경 오곡마을(대평리), 자연민속 서당마을(양리)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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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마니마을 산골 무덤. |
이 예비계획서를 행정당국에 올리고 추진위원장을 맡은 안 선생은 사실 6개 마을 신선고을의 큰 머슴이다. 과연 이 머슴의 뜻이 관철될 수 있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을들의 유대와 신뢰가 중요하므로 개인이나 소공동체 사업을 지양하고, 마을 전체의 공동 권익을 우선하여 반영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주민 전체의사와 소득분배로 소외계층을 해소해 나가겠다는 취지다.
그리고 추진위원장인 당사자는 이권 개입에서 철저히 물러나 있겠다고 했다. 이것이 인도의 성자 간디의 뜻을 실천하는 간디 아시람에서 배우고 체득한 지혜와 자비정신인가.
간디는 단호히 말했었다. ‘내가 만일 염주를 세는 것과 물레를 돌리는 것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물레의 편에 손을 들어 그것을 나의 염주로 삼을 것이다. 이 나라에 굶주림이 있는 한’(<간디 자서전>).
이제 마을 분들과 해후를 기약하고 대평리로 내려와 매년 삼월 삼진날 흩어진 마을 전체가 모여 한마음으로 서낭제를 지내는 곳에 다다랐다. 망귀현 서낭은 무성한 솔숲 언덕에 위치했고, 당집 뒤로는 수백 년 뿌리 내린 우람한 검은 나무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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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발위원 윤영희씨, 2. 노인회장의 어머니 안옥매 할머니(96), 3. 노인회장 박상규씨, 4. 새마을지도자 정의성씨, 5. 마을이장 최홍식씨, 6. 부녀회장 김영자씨. | 금줄이 쳐진 서낭을 참배하고 배견한 즉, 양쪽엔 장수, 중앙엔 임금과 부인신이 그려진 민화풍의 그림인데, 도난을 당했는가, 진품이 아닌 영인본이다. 서낭 언덕엔 금이 간 비문이 해묵은 세월을 앓고 있으나 골짝의 바람은 신선한 봄기운이다.
오로지 새 술은 새 부대에! 신선고을 산신(山神)이시여, 그대는 정녕 마을의 미래를 아는가? 마을의 안녕을 주관하는가? 다만 인간의 행태를 지켜볼 따름인가요. 부디 살펴 주옵소서. 나그네는 꾸벅 절하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림·글 이호신 한국화가 lhs1957@lyco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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