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사 말
오늘 제 59회 풍산홍씨 남평공계 재경 화수회에 대종회 역대 회장님들을 비롯한, 각 종,파 회장님 또, 전 국회의원님과 병원장을 포함한 법인단체 회장님들께서 공사다망에도 불구하고 왕림해 주심에 재삼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꽃들이 기분 좋은 향기와 빛깔로 반기는, 5월의 끝자락입니다.
늘 바쁘게 살아가는 종친님들의 고단한 삶의 무게에, 싱그럽게 펼쳐지는 녹음방초가, 몸과 마음에 위로와 치유가 되고, 입가에는 미소만 번지는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축원 드립니다.
종사에 관한 홍문의 문헌을 보면, 지금부터 777년 전인 1,242년 4월 신유일, 지자경자 시조님께서 고려 고종 임금님으로부터
향공시 장원급제 증을 받아, 국학의 직학이란 벼슬로, 풍산홍문의 가문을 여시고, 고려 말, 손주인 홍유(洪侑:밀직사사.현 대통령 비서실장)조상님의 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재상의 반열, 명문 대가에 이르렀습니다.
조선 건국과 더불어 홍문의 소용돌이는, ①고려의 패망 때 혼돈을 거듭하여, 5세랑장공께서 1392년 여름, 개경에서 고양, 5세상시공(보)님은 조선 건국에 동참하고, 상시공 아들 6세만은공께서는 이방원이 주도한 개성 두문동화재 전 날, 합천 황매산 두심동으로 은거하셨습니다.
최근에 제가, 이태조 신록 중에서, 1393년 6월 21일(626년 전)
“조선왕조연대기”원문을 들추니, 궁금해 하던 조선 건국 당시 홍보(洪保: 우산기상시-사간원) 조상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②홍보조상님께서 유일하게 조선 건국에 동참했으나, 불운하게 이태조 2년 1393년 6월 19일, 세자빈“현빈 유씨 퇴출”사건이 발생하여, 대간과 형조의 대표인, 5세홍보 조상님께서, 공식기구 법사를 통하여, 자초지종을 밝히자고 상언을 하니, 왕실의 사적인 일을 알려 든다며,
그 이유만으로 이성계로부터 향리인 안동(임하로 추정)으로, 유배란 터무니없는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그래 5세랑장공께서 려조(麗朝)에 태어난 자들은 출사(出仕:대과)치 말라는 유훈(遺訓)과 함께 소과만 응시 세종 때, 남평공-이(현령), 생원공-의(생원), 사정공-숙(사정)의 당하관의 벼슬만 지내게 됩니다.
이후의 변천 과정은,
③1457년 3월 17일부터 4월 13일까지의, 세조 신록에 나타난,
“밀계의사사건”에, 병조의 명문 없이, 군을 동원했다며, 한명회(청주인), 홍달손(남양인), 홍윤성(회인-보은군 회인), 양정(청주인), 권람(안동인) 등이 꾸며 만들어 비밀리에 세조에게 고한 의문의 사건으로,
함길도 경성 절제사(정3품)를 제수 받은, 남평공 장남 홍중손을 역모로 치죄하니, 남평공께서 2남 홍수(부사공), 3남 홍계(군수공)을 화급히, 부사공의 처향, 나주 금안동에 피신시킨 것이, 나주의 입향 동기입니다.
여기에 모인 남평공계 화수회 회원 모두가, 일산 성석동에서 안식을 취하고 계시는 6세홍이(남평공) 조상님 후예 들입니다.
④ 덧붙여, 자긍심 고취를 위해, 풍산홍문이 어떤 문벌인가? 살피면,
조선 건국 187년 후, 1579년(선조12년) 홍이상 조상님께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그 후손에서 영의정 홍봉한님을 비롯, 조선 학문의 10대 대가인 좌의정이며 문형 홍석주님 등, 기라성 같은 수많은 인재가 배출 되었습니다.
1510년(중종 5년) 삼포왜란(三浦倭亂:부산포, 내이포, 염포) 때, 임시 설치 운영하던 비변사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인순왕후-명종 비, 아우 심의겸(서)과 신진사류 김효원(동)의 갈등이 빚은 붕당)들이, 후금(1627년 정묘호란)과 항쟁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상설 관청화 되면서,
비변사 제조 당상 또는 아문(정1품)이라 불리는, 조선왕조에 무소불위 권력기구가 탄생됩니다.
①안동 김씨(金氏)를 중심으로, ②풍양 조씨(趙氏), ③대구(달성) 서씨(徐氏), ④연안 이씨(李氏), ⑤풍산 홍씨(洪氏), ⑥반납 박씨(朴氏),
이 6대 가문이 “비변사 제조당상”인, 아문 자리를 독점(獨占)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벼슬아치에 대한 인사권(人事權)과 군사권(軍事權)은 물론, 비빈(妃嬪)의 간택(揀擇)까지 관장하는 국정의 최고기관을 장악하였습니다.
비변사의 주청은?
국왕이 거부 하지 않는 것이 관례가 되어서, 조선 중기부터 말기까지, 왕권은 비변사 제조 당상에 의해 크게 약화 되었던 것입니다.
1554년(명종 9년) 후반부터, 잦아지는 변경(邊警:변방 경비)이, 을묘왜변(영암, 강진, 진도)으로 이어지면서, “독립된 합의기관”으로 발전,
1555년 관제상의 상설 관아(官衙)로 정식화 했던 것입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난 수습, 타계를 위해, 비변사를 전쟁 수행의 최고기관으로 활용하며, 그 기능을 확대 강화 시킵니다.
즉, ①수령 임명, ②군율 시행, ③논공행상, ④청병(請兵:출병), ⑤둔전(屯田:군량 토지), ⑥공물 진상, ⑦시체 매장, ⑧군량 운반, ⑨훈련도감 설치, ⑩산천 제사, 이외 절정 표창 등, “군정”,“민정”,“외교”,“재정”에 이르기까지 전쟁 사무에 필요한 모든 사무를,
이 6대 성씨가 “합의 처리”했던, 세도가 당당한 홍문인 것입니다.
조선 중기부터 말기까지 왕권이 크게 약화 되자, 1864년(고종 1년) 2월에, 대원군(이하응)이, 비변사와 의정부를 나누는, 분장절목(分掌節目)을 반포해, 의정부를 비변사에서 독립시키고,
왕권을 제약하는 비변사를 해체하는 것으로, 노론 반발을 비웃습니다.
이듬해인 1865년(고종 2년) 3월 초,
“서울과 지방의 사무를 모두 비변사에 위임한 것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체로 보아 그럴 수 없다”고 하며
3월 28일 대왕대비 전교로,
350여 년 동안 유지해 오던 비변사를, 의정부에 흡수시켜버렸습니다.
나라를 떠받히는 구심체를 없애버리니, 그로부터 45년 후인 1910년,
조선은 일본 손아귀에 흡수를 당해, 일제치하란 36년 간 억울한 아픔과 양반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버린 것이지요.
여기에 모인 우리 풍산홍문은?
조선을 이렇게 조선을 이끌었던 위대한 후예들입니다. 더욱더 드높는 자긍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꽃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한들, 종친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겠습니까?
우리 종친 한 사람 한 사람은,
세상 그 어는 것보다 귀중한 피로 맺은, 변할 수 없는 혈족들입니다.
여기 모인 종친 한 분의 기쁨이, 우리 일가님들의 기쁨이고
여기 모인 종친 한 분의 아픔이, 우리 남평공계 종친님들의 아픔이며,
여기 모인 종친 한 분의 영예가, 우리 홍문의 영예임을 강조 드리면서
모두가 화합하여 더 크게 도약할 수 있도록, 혼연일체 되어 흩어지고 이반된 혈족의 힘을 모읍시다.
여러분이 알고계시는 내용보다, 처음 듣는 생소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두서없는 장황한 말을 경청해 주신 일가 여러분께,
정말 감사를 드리면서 일반회원을 위해, 대종회와 화수회 근황을, 간략히 보고 드리겠습니다.
먼저 대종회입니다. 종전 12-3대 회장을 역임하신 “승상”회장님께서 큰 업적(족보편찬, 영안재 신축, 대종회사무실 마련-2건)을 세우시어, 운영에 어려움이 없는 자생력을, 튼실하고 확고히 다지신 입지전적(立志傳的)인 분이십니다(매월 사무실 임대료 180만원)
이제 우리 남평공계 화수회도 5-6평, 작은 원룸 하나라도 가지고 있어, 종친 간 상호 소통의 장소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운 바램을 가져보면서, 인사를 가름하겠습니다.
종친 일가 여러분!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2019년 5월 26일
풍산홍씨 남평공계 재경 화수회
회 장 홍 기 팔 근배
첫댓글 역사 공부 잘 하였읍니다 , 감사합니다
모임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것도 지금부터 시작되는 역사라고 생각되어서 남겨봅니다
귀중한 자료 감사합니다.
역사상 가장 풍홍을 설명한 훌륭한 글 입니다.
회장님 덕분입니다
저는 인사말 듣지도 못 했습니다
밖에서 일을 보다 보니
회장님이 좋다고 하셔서 기팔회장님께 받아서 카페에 올렸습니다
귀한 자료를 못 알아보는 아직은 풍홍새내기 입니다
고맙습니다
참 잘하셨습니다. 다음에 늘 이런기록이 이자리에 게제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페를 지켜주시고 가꾸셔서 늘 감탄이고 감동입니다 그리고 넘 감사하구요
정성과 진정성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