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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때부터 일제는 조선의 청년학도들을 학도지원병이란 이름으로 차출하여 전쟁터로 보냈다. 1943년 이후부터는 볍령을 개정하여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일제 패망 시기까지 최소한 18만명 이상이 징집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학생들이 그저 일제의 징집에 순응한 것만은 아니었다. 학생들은 징집을 거부하고 산악지대로 도피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거나 혹은 중국 대륙을 건너면서 집단으로 탈주하여 광복군에 합류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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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조선의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로 몰아내서 일본군 위안부로 삼았다. 일본군 위안부는 고향을 떠나 수만리 떨어진 전선에 투입되어 그곳에서 꽃다운 삶을 마감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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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독립운동가를 무차별적으로 체포, 구금하고 처형하였다. 얼굴에 용수를 씌우고 포승줄로 묶어서 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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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는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주리틀기 고문 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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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고문(물고문). 고춧가루를 물에 타서 얼굴에 붓는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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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상자' 고문. 상자에다 못을 박고 그 안에 사람을 집어 넣어 이리저리 차면서 못에 찔리게 만드는 고문 도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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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을 집행하는 일제. 일제강점기에 숱한 애국 독립투사들이 고문과 교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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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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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강의 제국주의 침탈 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나면서 조선은 자국의 영토도 제대로 보전할 수가 없었다. 힘들여 개척한 삶의 터전인 녹둔도를 청나라는 제멋대로 러시아에게 내어 주었다. 뒤늦게 항의를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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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우리의 자원과 인력만 수탈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강토를 제 3국에 넘겨주었다. 간도는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들어가 살면서 땅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 특히 을사늑약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마수를 피하여 이곳에 들어와 살던 곳이었는데 일제는 러시아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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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아직도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의 영유권 주장은 는 아직도 일본이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독도는 우리 땅으로 인식되어 오다가 1900년 고종 황제의 칙령으로 정식으로 을릉군의 부속 도서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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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05년 독도를 시네마현에 편입한다고 고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고시는 현재 정식 문서를 발견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고시하였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 효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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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모형 앞에서 열심히 '코끼리 바위'며 '한반도 바위'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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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관한 영상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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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를 정리하면서 아이들이 잠시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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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관 겨레의 함성. 이 관은 3·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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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기고 친일 매국노들이 득세하자 이제는 이름없는 민중들이 스스로 나라를 찾기 위하여 저항의 전면에 나선다. 나라 없는 백성은 정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재산을 압류당하고 결국은 몸뚱아리마저 빼앗기고 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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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장병들이 독립기념관을 찾으면 이날만큼은 휴가 기일에 산정되지 않는다. 결국 휴가가 하루 더 길어지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곳에 왔다고 다 방문이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기념관에서 낸 과제를 다 수행하여야 비로소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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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을 건너는 독일군.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은 결국 세계대전으로 파국을 맞는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을 축으로 유럽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후 미국과 일본, 이탈리아 등이 협상국으로 참전하면서 전선은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이때 일본은 약삭빠르게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는 중국의 칭따오를 공격하여 연합국으로 공로를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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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전사자. 전쟁은 900여 만명의 전사자를 내고 협상국의 승리로 귀결된다. 1818년 11월 11일 독일이 휴전에 동의하면서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난다. 이 전쟁이 종식되면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린다. 일본은 이 시기 전쟁을 기회로 참전국들에게 무기와 생필품을 팔아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미국에 이어 세계 수출 2위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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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 전후의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을 간단하게 도면으로 정리하였다. 1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미합중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주창한다. 이어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 때를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 '대외적으로 독립을 청원하고 국내적으로는 독립 시위 운동을 한다.'는 기본 전략 아래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고 만세운동을 대규모로 전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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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앞 줄 맨 오른쪽) 1918년 8월 여운형, 김규식 등이 중심이 되어서 상하이에서 창립된 '신한청년당'에서는 조선 독립 청원서를 미합중국 대통령 윌슨에게 전달하고,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조선 통치가 불가함을 천명하고 독립을 청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강화회의는 우리에게 대표권을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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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독립선언을 주도한 동경 유학생들. 한인청년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조용은, 장덕수, 이광수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적극 추진하도록 권고하였다. 이에 고무된 동경 유학생들은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의 심장부 토쿄에서 2월 8일 독립선언을 하였다. 이 2·8독립선언은 3·1독립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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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으로 차려진 고종황제의 빈전.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서거하였다. 일본인에 의한 독살이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민중들의 분노는 끓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조선 유학생들이 중심이 된 2·8 독립선언이 도화선이 되어 3월 1일 오후 2시 30분 경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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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와 만세운동을 위하여 비밀리에 모여 태극기를 제작하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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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장례일인 3월 3일보다 이틀 앞선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태화관에 모였다. 오후 2시, 이들은 이곳에서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총독부에 전화를 하여 자발적으로 체포되었다. 지도부의 이러한 행적은 뒷날 여러 가지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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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21,000부를 인쇄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8부에 불과하다고 한다. 선언문 첫머리에 착오가 있다. 我朝鮮이 我鮮朝로 표기되어 있다. 그만큼 인쇄가 급박하여 미처 수정한 겨를이 없었다. 보성사는 일제에 의하여 즉시 폐쇄되었고 1919년 6월 28일 다시 소각되어 터만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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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고종황제의 장례 행렬. 3·1독립운동은 고종황제의 서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종은 죽으면서도 독립을 도왔다는 말이 항간에 돌았다. 3월 1일에도 만세 시위 군중들은 탑골공원에서 고종황제의 빈전이 있는 덕수궁의 대한문으로 이동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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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를 이용하여 만든 태극기. 태극기는 만세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 으레 만세 시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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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관련 기록물들을 영상으로 보고 있는 아이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3·1만세운동은 1,548회에 2,046,938명이 참가하였다. 사망자는 7,509명, 부상자 15,849명 수감된 사람이 46,306명에 이른다. 일제는 848회에 50만여 명으로 발표하였다. (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사에 의하면 만세 시위는 1,716건으로 밝혀졌다. 박은식 선생의 기록에 신빙성을 더해 주는 통계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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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운동에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일본의 경찰력으로 진압이 불가능하자 3월 11일부터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만세운동의 희생자들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위 사진은 1919년 4월 4일 이리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문용기선생의 피묻은 옷이다. 문용기선생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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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의 전형을 보여주는 제암리 학살 사건 재현 현장. 4월 15일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제암리에 와서 동네 주민 23명을 제암리 감리교회에 가두어 놓고 불을 지르고 총격을 가하였다. 이날 모두 29명이 살해되었다. 주범 아리타는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를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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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 기록화. 제암리 학살은 AP통신 테일러 기자와 캐나다 선교사로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스코필드에 의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테일러는 사건 다음날 16일, 제암리를 취재하였고, 스코필드는 사건이 있은 후 3일 뒤인 4월 18일, 자전거를 타고 제암리에 도착하여 사건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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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순국선열 위령제. 1982년 유해발굴 작업이 있었다. 유해 23위를 수습하여 9월 29일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이다. 학살 현장에는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제암리 학살을 사진을 기록하여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린 스코필드 박사는 외국인으로 유일하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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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시위 지도. 헤드폰을 쓰면 만세소리를 들을 수 있다. 3·1만세운동은 초기에 지도부가 와해되었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전개된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천도교나 기독교에서 주도한 경우가 많았으나 나중에는 학생들이나 농민, 그리고 기생조합이 주도한 시위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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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는 3월 13일 100여 명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KBS에서 제작한 만세운동 지도에 의하면 1919년 전체 1,921회에 1,211,978명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만세 시위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에 가장 많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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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광장. 다양한 계층의 민중들이 각기 독립만세운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3·1운동 이후에는 특정한 계층이 독립운동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자각한 민중들이 스스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독립운동도 무장투쟁, 의열투쟁, 소작쟁의, 파업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3·1운동은 비록 독립을 쟁취하지 못하였지만 조선 민중들이 스스로 각성하였다는 점이 최대의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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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자료에서 벗어나 이곳에 오자 아이들이 이제 활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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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에 참석하면서 사람들의 정치의식은 자연히 높아졌다. 3·1운동 이후 민중들은 자연스럽게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지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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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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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단연 인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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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독본. '사람답게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민중들의 계몽이 독립운동의 첩경임을 알고 많은 지식인들이 노동야학이나 농민강습소를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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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이번에는 순종의 장례식 날 서울에서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사회주의 계열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날의 만세 시위는 원산, 평양, 대구, 개성 등 도시 지역으로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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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10주년이 되는 해인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대규모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학생들이 한국 여학생들을 희롱하면서부터 사건은 시작되었으나 곧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되었고 다음해까지 전국적인 동맹휴학과 항일시위로 이어졌다. 이후 학생들이 독립운동 활동에 큰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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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함성 전시관을 나서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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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로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