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 오신 이메일 내용 입니다~ ○ 강연 제가 말씀을 드리기 전에 워낙 박식하시고 기억력이 좋으신 황군수님이 절반은 말씀하셔서 말씀드릴 게 반으로 줄었습니다. 원고 안에 전부 그 내용이 들어 있는데 국내를 떠난지 30여년 되니까 10분 20분 동안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원고를 안보면 이야기를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1회 영랑문학제를 맞이해서 고향 분을 이렇게 많이 뵙게 되니 반가움 이루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강진중앙초등학교 37회 졸업생으로 올해 나이가 72입니다. 나이가 많은 죄로 유가족대표가 되었습니다. 33년이라는 긴 세월을 해외에서 살고 보니 이렇게 원고지 없이는 말을 계속 못하게 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처음에 주최 측으로부터 국제전화로 아버님에 대한 회고담을 요청받았을 때 아버님 자랑을 늘어놓는 듯해서 굉장히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직계 유가족들의 나이들이 머지 않아 이 세상을 떠나야 된다는 진리 앞에서 더 이상 주최 측의 요청을 거부할 길이 없어 오늘 이 자리에 서기로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생존 유가족 중에서 아우들은 너무 어린나이에 아버님을 잃어서 저는 그래도 16살까지 아버님을 옆에서 모셨기에 회고담 전해줄 사람이 저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래서 이 자리에 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제1회 영랑문학제를 이토록 성대하게 열어주신 강진군 황주홍 군수님을 비롯한 김상수 과장님, 영랑기념사업회의 윤창근 회장님, 이효직 사무국장님 시와시학사의 이경 선생님 노고에 유가족들을 대표해서 심심한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멀리 서울과 대구 각지에서 고향 전역에서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문학제를 빛내주심에 여러분께 아울러 심심한 감사를 말씀을 드립니다. 혹시 김남조 선생님 오셨습니까? 오세영 선생님, 허형만 선생님, 신달자 선생님 그리고 강미정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전석홍 전 장관님 제가 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버님을 기억할 때 얼른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육중한 풍채, 우렁찬 목소리 흰모시 바지저고리, 검은색 두루마기, 광적인 서양 클래식 음악과 국악애호가, 가야금과 거문고, 북과 양금 연주, 술, 풍류, 한량, 항일민족주의자 등 머리에 떠오르면서 그분이 가장 싫어하셨던 내용을 소개해 올리면 음식 중에서 밀가루음식과 떡을 평생 입에 대지 않으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56년이 흘러서 자잘한 기억은 거의 잊었지만 제가 생각나는 것을 성의껏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유가족들이 여러분께 아버님과 관련된 내용을 알려드릴 기회가 없겠기에 회고담과 함께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제 3자들이 아버님을 뵈었을 때 건장한 풍채, 우렁차고 맑은 목소리 등 겉모습대로 호탕한 성격을 지니신 분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깊은 내면에 외모와는 걸맞지 않게 무척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이 강하게 들어나시곤 하셨습니다.
슬픈 일을 당하실 때는 남들이 느낀 슬픔의 정도보다 훨씬 강하게 느끼셨고 아름다움을 발견하셨을 때도 남달리 심취하신 경향이 강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예가 있겠습니다마는 공개된 내용을 말씀드리는 게 여러분들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유학당시 프랑스의 미뇽이란 미인의 사진이 배경이 된 그림엽서를 구하셨는데 많이 우셨다고 합니다. 다른 분 같으면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고 가벼운 탄식까지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아버님처럼 우신 경우는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녀의 사진 뒤에 직접 시를 쓰셨는데 그중 첫 두절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달밤에 이슬아침에 내 미뇽을 안고 울기를 몇 번이던고 청산은 내 청춘을 병들게 하였거니와 오히려 향내를 뿌리워 준다 시를 외우던 때 싯적이던 때 눈물을 눈물로 맞으려던 때 그때 이미 내 청춘은 병들었으나 한그릇 향훈은 늙지를 않네“ 1935년에 처음으로 발간된 영랑시집 겉장을 넘기면 “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이라는 뜻의 영문 시구절이 인용되어 있음을 여러분도 아실 겁니다. 이는 아버님이 군수님께서 잠깐 소개하신 유미주의파 시인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여리셨던 아버님인데 유독 자식들에게만은 너무도 강하고 엄격하셨습니다.
생가에 사랑채 넓은 마루위에 대나무 의자에 앉으셔서 기도하시듯 눈을 지그시 감고 시상에 젖어 계신 것을 훔쳐보고 당시에 초등학생이었던 저는 아랫마을의 친구들이 그리워 아버님 눈에 안 뜨이도록 몸을 낮게 굽히고 안집에서 나와 사랑채 대문 앞을 쏜살같이 달려 탈출을 여러 차례 시도 했었으나 0.5초도 안돼서 아버님께서는 그 우렁찬 목소리로 ‘현철아 !’ 하고 크게 부르시는 바람에 저는 단 한번의 탈출도 성공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를 부르신 후 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호된 매가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죠. 아버님께서는 밖에 나가면 나쁜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으니 마음에 드는 친구는 전화로 불러서 우리 집에 와 놀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60년전 당시에 강진읍에 100여대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저희 집 전화번호가 34번인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동네아이들이 항상 재미있게 뛰어놀던 기억으로 가득합니다. 봄철에 숨바꼭질을 할 때는 폭이 5~6m 길이가 20m 이상 길게 뻗은 두개의 밭에 100여 그루의 모란꽃나무들이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가 숨는 바람에 술래가 골탕 먹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버님이 만취하셔서 집에 돌아오실 때면 자식들 전원이 대문 앞에 서서 영접을 해야지, 자식 하나도 빠지고 없으면 그가 화장실에 있다가도 그 자리에 나타날 때까지 집에 들어오시지 않고 없는 자식을 계속 찾으신 바람에 자식들이 밤에 외출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입니다. 자식들이 어두워진 후에 집에 들어오면 고등학교에 다니던 누나나 형도 예외 없이 종아리에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때 일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오는 길에 친구 집에 들렸다가 생후 처음으로 책상위에서 화투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림이 예뻐서 친구에게 ‘이게 뭔데 이렇게 예쁘지?’ ‘화투의 공산이라는 거다 갖고 싶으면 가지고 가라’ 그래서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책상위에 올려놨는데 공교롭게도 아버님이 발견하셨습니다. 어디서 났느냐 추궁을 하시고 친구집에서 가져왔다니까 화를 내시고 두 번 다시 이런 것을 손에 대면 안 된다고 불이 활활 타는 아궁이 속에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 후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1월부터 12월까지 순서를 모르는 바보가 됐습니다. 이렇게 엄격하신 나머지 아버님께 안겨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사진첩을 뒤지다가 저를 안고 계신 아버님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도 한번쯤은 안긴 적이 있었구나, 하는 마음에 뿌듯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님은 앞마당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셨습니다. 마침 할아버지가 멀리서 보고 계실 때였습니다. 방안에 계시던 아버님도 이걸 보시고 빠른 걸음으로 마당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어머님을 일으키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어머님 앞에 서신채 ‘괜찮아 ?’ 하시면서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어린 생각에 왜, 손잡아 일으켜주지 않을까?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후에 어머님께 여쭤본 결과, 아내도 자식들에게도 어른이 옆에 계실 때는 아버님이 손을 잡아주거나 귀여워하는 모습, 안아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안 된다는 게 당시의 유교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즘 남편들이 그랬으면 이혼당할 일입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버님은 도쿄 음악대학 성악과 진학을 꿈꾸셨습니다. 그런데 할아버님이 너무 완고하셔서 당시의 생각으로는 성악가라는 게 예술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광대로 보는 겁니다. 큰아들이 광대가 될 수 없다. ‘네가 계속 음악공부 한다면 학비를 줄 수 없다.’ 는 할아버님의 강경한 자세때문에 성악가 되기를 포기하셨습니다. 문학에 정렬을 불사르게 되신 겁니다. 비롯 성악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아버님은 평생 음악 속에서 사셨습니다.
레코드판에 실린 서양 클래식 음악과 각종 국악을 통해서 음악감상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거문고, 가야금, 북 연주신력이 전문가들 뺨치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김소희, 박귀희, 박초월 등 훗날 국창이 된 국악의 대가들이 아버님 초청으로 집에 오셨는데 그때 마다 이 분들은 아버님의 북 실력을 믿고 고수를 대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보통 그 분들이 움질일때는 고수가 따라다니는데 그냥 오셔서 아버님의 북장단에 맞추어서 창을 하시곤 하셨습니다.
거문고나 가야금 꺼내셔서 한곡씩 타셨는데 그때 이 분들이 그 실력에 감탄하셨습니다. 아버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린 우리에게 거문고와 가야금의 차이를 설명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악기로는 피아노가 바로 거문고다 강약이 강조될 수 있는 게 거문고다. 가야금은 강약을 구분하기 힘든 오르간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설명을 하셨습니다. 비록 성악가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평생 음악 속에서 사셨습니다. 4살 전부터 초등학교 입학전까지 아버님은 어린 저를 무릎위에 앉으시고 브람스니 베토벤이니 고전음악, 거문고 산조, 춘향전, 흥부전, 쑥대머리, 육자배기, 국악 등을 감상하신 마당에 호랑이 같은 존재의 품에 안겨있다는 게 불안하고 어린이가 위축이 되서 빠져나오지 못해서 안달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서양음악, 우리 국악에 제 귀가 열리는 계기가 그때 마련된 것입니다. 사랑채 방안에는 고전음악판 앨범이 산더미처럼 벽에 쌓여있습니다. 왜냐 하면 판 하나라는 게 3분밖에 안돌아가니까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50분이 넘어가는 장곡, 앨범이 20장 모여있는 그런 앨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밖에 서울에 러시아의 세계적인 바리톤가수 샬리아핀, 바이올리스트 미샤엘만 등의 공연 때는 물론이고 도쿄에 세계적인 교향악단이 가끔 오거나 했을 때 논 밭을 팔아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도꾜에 가시곤 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비행기 여행은 생각도 못한 시절이었습니다.
많은 학자분들 논평대로 아버님의 시가 음악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아버님 자신이 광적일 정도로 음악애호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16살 소년당시 3.1운동 가담하셔 가지고 강진고향에 내려오시면서 구두속에 태극기를 감춰가지고 내려오시다가 경찰에 붙잡힙니다.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계시다가 나오신 기념으로 당시에 굉장히 두꺼운 영일대사전을 구입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영한사전이 없었으니까요. 그 사전을 구입하셔서 첫 장 넘기면 대구 감옥 출옥기념 8자가 적혀있고 그 밑에 출옥날짜가 적혀있었습니다.
6.25 동란으로 35년에 발간됐던 첫 시집부터 책 한권이 안 남았습니다.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완전히 집안의 벽과 대문만 남겨놓고 전부 약탈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유품이 단 한점이 없는 겁니다. 자식들이 해방 전에 아버님 때문에 학교에서 계속 선생님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한 사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 누님과 큰형님이 광주에서 서울에서 유학중이었습니다. 그 반 학생들 중에서 일본 성으로 창씨하지 않은 우리 한국성을 그대로 간직한 유일한 학생들이었습니다. 기숙사에서 있다가 방학 때가 되면 어김없이 누나와 형을 불러서 이번에도 창씨개명 하지 않으면 새 학기에 학교에 못 돌아온다고 아버님께 말씀드려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창씨하지 않은 이유를 전혀 알길 없는 자식들이니까 아버님을 붙들고 이번에 창씨를 안 하면 학교에 못 돌아갑니다. 일본 성으로 고쳐달라고 울며 보챘습니다. 아버님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응, 그래 다음에 창시한다고 그래라’ 하시면서 넘기시는 겁니다. 자식들은 이유를 모르니까 자식들은 아버님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강진경찰서 당시 고등계 요즘은 정보계 형사가 사랑채 대문 옆에 있는 순찰함에다가 아버님이 안에 계시고 다른 데 안가셨다 하는 도장을 누르고 갑니다.
생가를 가봤는데 바깥 문간채가 복원이 안됐더라고요. 사랑채는 별도로 들어오는 문간채가 있었고 대문이 따로 있었습니다. 혹시 경찰이 모르는 사이에 아버님이 빠져나가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나 하는 염려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서 아버님께 협박을 하는 겁니다. 토요일이니까 내일은 일요일인데 일본 전 국민이 신사참배 하는 날이다. 당신도 내일 신사참배 하러 나와야 된다. 항상 아버님은 그때 뭐라고 변명을 하면서 넘기셨냐면 내가 하루에 수차례씩 설사병을 앓고 있는 것을 알면서 신사에서 설사를 하면 신성한 신사를 모독하라는 것이냐 그래서 나는 못하겠다. 형사는 그 의미를 알지요, 씁쓸하게 웃고 떠나곤 하는 기억이 납니다.
전체 국민들이면 삭발령을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일제시대에 삭발 안한 분이 없습니다. 일본천황에 대한 예의다. 그런 주장이었죠? 그래서 그러한 증가가 오늘날 사진이 할아버지 기념사진에도 회갑연도가 1944년으로 기억하는데 해방 전이었을 겁니다. 아버님이 머리를 길고 장발로 나옵니다. 해방된 날까지 창씨개명, 삭발령에 불응을 하셨으니까 일본이 직장을 허락할 이가 없었죠, 반면에 아버님 입장에서는 직장을 갖는 한 일장기에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굶어 죽었지 일본 직장을 가질 수 없다. 직장 주라지 않고 바라지도 않고 해방된 날까지 무직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이 꽤 잘살았던 집인데 해방될 무렵은 재산이 거의 탕진됐습니다. 라디오를 통해서 조국의 해방소식을 접하신 아버님은 만면에 기쁨을 감추시지 못하시고 사랑채 문갑 깊숙이 감추었던 태극기를 꺼내셨습니다. 가족들과 이웃 몇 분들은 크레용으로 수백 장의 태극기를 만드셨습니다.
그 다음에 강진지역 동포들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아버님 기억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술일 겁니다. 두주불사라는 말이 어울렀습니다. 당시 친구분들은 영랑은 술 한말은 등에 지고 다니지는 못해도 배속에는 담고 다닐 분이다. 이런 평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저녁 어두워지기 직전에 술에 만취하셔서 들어 오셨는데 술을 드시고 나서 항상 그러하셨듯이 이날도 기분이 좋으셔서 양팔을 들어서 춤을 추면서 오페라 칼맨 중에 투우사의 노래가 있는데 원어로 노래를 하십니다. 잠깐 부엌에 들어가신 어머님을 부르셨습니다. 어머님이 얼른 못 듣고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당신 어디 갔어?’ 고함을 치심과 동시에 마루에 있던 연초록색 요강을 발로 걷어차십니다.
그 요강이 대굴대굴 굴러서 마당으로 떨어져 깨진 줄 알았는데 워낙 단단해서 깨지지 않았습니다. 마당에 떨어진 요강은 깨진 흔적이 없습니다. 서울로 이사 갈 때까지 썼던 기억이 납니다. 휘문중·고등학교 시절 축구선수였던 아버님은 정구에도 굉장한 실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강진 집에서는 역시 테니스 같은 걸 하셨는데 공이 굉장히 말랑말랑한 공이었습니다. 연식정구라 얘기하죠?
강진에서는 제일 선수라 할 정도로 실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도쿄에서 보통유학생들이 일본을 거쳐서 전국 시골로 전달되는데 아버님은 직수입한 정구실력이죠? 당시의 제 기억으로는 사랑채 동쪽에 그리고 강진 현재 군청 청사를 앞으로 보고 왼쪽에 정구코트가 있었고 이렇게 강진에 두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제 기억으로 당시 김현문, 김현장 굉장히 사랑하던 조카벌입니다. 또 전 문화원장님 형님되신 분 이형욱님 등과 어울려서 정구를 하시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김영배 의학박사가 대단한 정구선수였습니다. 당시 전국에서 강진의 정구실력은 알아줬습니다.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는 한손에 흰 서류를 든 백발노인 한분이 아버님을 향해서 큰절을 올리는 것을 보고 어떻게 어른이 아버님께 인사를 하나 놀랬습니다. 아버님께 여쭤보지 못하고 어머님께 여쭤봤습니다.
당시 어머님 설명은 20년간 우리 집 논을 4마지기 800여평 되던 논을 소작한 분이라. 20년이 되니까 4마지기를 그분 명의로 바꾸어서 무료로 증정을 하는 겁니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니까 젊은 아버님께 인사를 하는 겁니다. 이러한 경우가 그 후로도 가끔 있었습니다. 20년된 소작인에게는 무상으로 논을 넘기셨습니다. 해방이 되자 아버님은 새조국 재건사업에 일익을 담당하시길 열망하셨습니다. 초대 재헌 국회의원 후보로 나가셨습니다. 민심파악에 서투셨습니다. 각 면의 면민들의 민심파악을 못하신 것 같습니다.
서울에 친척이 자가용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가용을 내려 보냈습니다. 아버님이 각 면에 다니시는데 애를 쓰신다고 아버님은 좋다고 타고 다니셨습니다. 그게 농민들에게 통하겠습니까 농민들은 좋다가도 순회 강연하는데 차를 타고 다니니까 반발심이 생기는 겁니다. 결국은 아버님께 표를 줄 사람 한분도 없는 겁니다.
4분 출마를 했는데 꼴등에서 두 번째 가장 인기를 못 끌었던 겁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시로 간접 표현해 오시던 아버님은 해방후에 정열을 애국하는 데 쏟으셨습니다. 김교수님 계시지만 아버님 시를 서정시인이다라고 마무리 지으신 분이 많으신데 제가 보기에는 해방 후의 시는 서정시보다는 애국시 현실에 참여하는 시가 더러 많이 나왔습니다.
여순반란사건 겪으시고 쓰신 시를 보면 민족끼리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좌익과 우익의 다툼 등을 우시면서 시를 쓰신 기억이 나는데 단순한 서정시인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버님이 당시 우익단체였던 대한청년단 강진지부외에도 대한독립 총석회라는 이승만후원단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날 정부수립을 위한 모체가 됐던 단체죠? 따라서 이러한 우익단체에서 활동한 아버님은 남로당계열의 좌익계인사들의 테러대상이 된 겁니다. 정구코트 뒤쪽과 안채뒤의 대밭 중심부에서 방화용도구등이 발견됐습니다. 청년단원들이 아버님 경호를 위해서 여기 저기 돌아보다가 발견된 내용인데 경찰에 연락해서 감식을 받았는데 방화용이었음을 확인해 줬습니다.
그렇다고 24시간 경찰이 지키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열려있습니다. 테러가능성에 어떻게 보면 결국은 서울로 이주해야 할 심적인 고통이 있었죠. 또 한 가지가 자식들의 교육문제였습니다. 가사는 기울고 제위 형님 두 분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하숙비 지출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마저 초등학교 여기서 졸업하고 서울 형님이 다닌 학교에 또 입학이 된 겁니다. 셋은 너무 힘든 겁니다.
테러에서의 도피, 자식들의 교육의 두 가지 이유로 서울 이주가 결정된 것으로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저의 중학교 진학을 두달 앞두고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당시 양모씨에게 집을 팔고 서울로 이주하신 게 1948년 여름의 일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서울 이주 후에도 예총전신이었던 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열심히 일하셨고 당시에 문우들인 김광섭 시인, 문학평론가 이헌구 선생, 시인 서정주 선생, 박목월 선생 등 여러 분과 거의 매일 교우를 하셨습니다.
이러다 보니까 집으로 아버님을 찾아오는 문인들의 수가 자꾸 늘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제때 친일 행각으로 국민들의 기억 속에 있던 분도 드나들었습니다. 형님이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무개 선생은 친일 문학작가로 알려져 있는데 아버님이 왜 그런 분과 교류를 해도 좋습니까?’ 제 기억에 아버님 대답이 자식 말이 옳단 말인지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네 말의 뜻은 알겠는데 일제 시대에 친일하지 않고는 밥을 먹지 못할 처지인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본이 아니게 친일하신 분들이 많다. 악질 친일파가 아니라면 해방된 조국에 기회를 주어서 새나라 건설하는데 일꾼으로 써야 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난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자기보기에는 악질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형님은 그 말씀이 설득이 안되니까 화가 나서 나가시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형님은 젊은 기분에 친일파들 숙청하고 할 때인데 형님 말이 옳습니다. 아버님 얘기는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당시 친일 안한 분이 거의 없었으니까 95%이상 지금 생각은 아버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비서로 계시던 김광섭 선생님, 이 양반이 아버님과 막역한 친구였습니다.
자꾸 아버님께 정부에 들어와서 새나라 건설에 힘을 모아 달라. 그래 가지고 공보처 차장 그리고 공보처 출판국장을 놓고 마음에 드는 대로 받아주라. 그래서 굉장히 막역한 친구인 이헌구 선생님이 계십니다. 그 분과 상의를 했습니다. 이현구 선생님이 정부고위층 자리에 관심이 많으셨던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공보처 차장직을 자기를 달라해서 아버님은 기꺼이 그렇게 하고 출판국장 자리를 받은 것 같습니다.
해방직후이기 때문에 아버님같이 직장 한 번 안 가졌던 분이 내가 뭐 차장을 해야 되겠느냐는 얘기겠죠. 근데 당시에 소신껏 일을 해보려 해서 일을 열심히 하셨는데 당시 공보처장이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서 데려 오신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국내사정을 모르죠? 이 분이 일일이 아버님이 하는 출판행정을 간섭하는 겁니다. 아버님이 국장권한까지 처장이 간섭을 하면서 아버님 야적인 기질이 발동돼서 자리를 걷어차고 나왔습니다.
출판국장 재직시 기억이 남는 것 한두 가지 소개해 올리겠습니다. 제 학교가 가까운 관계로 아버님과 퇴근시간이 맞을 때는 아버님과 같이 집에 돌아갔고 그렇지 않으면 혼자 돌아갔습니다. 제 눈에 비친 아버님의 복장, 특이한 게 다른 분들은 중앙청 공무원으로 양복을 입고 나오시는데 이 분은 평소에 입던 그대로 한복을 입으시는 겁니다.
안에는 모시저고리 겉에는 검은색 두루마기 공무원 중에서 다른 분이 한복 입으신 것 본적이 없습니다. 출판국장 취임을 축하하는 야유회가 당시 뚝섬 광나루에서 열렸습니다. 지금은 서울의 복판이 됐지만 당시에는 자연 그대로의 강, 집 한 채는 커녕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 직원이 수영과 게임으로 야유회를 즐기는데 한국사람들 모이면 노래 시키잖아요? 아버님에게 노래 한곡 해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저는 어릴적 술에 취해서 한두 줄 하신 것을 들었는데 전곡 들어본 적이 없잖아요? 관심이 대단했죠. 그런데 눈을 지그시 감으시더니 유행가가 아닌 시조가 나옵니다. 근무하는 직원들 중에 시조를 이해하신 분이 몇 분이 있습니까? 제 눈치에도 절반은 놀래고 절반은 실망한겁니다. 재미있는 유행가나 가곡을 해 주지 않고 시조가 나오니까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그 기억이 납니다. 요새 말로 코드가 안 맞는 겁니다. 듣는 사람과 부르는 사람이. 아버님이 아신다는 게 유행가 레코드판이 집에 없었으니까 서양음악과 국악뿐이었습니다.
1950년 6.25 터지기 두달전 4월 어느 날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가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 친구분이었으니까. 장지에서 마지막에 때를 입히는데 문우 십여명이 둘러앉아서 회고담 중 난데없이 한 분이 “자! 석영을 따라서 이 세상을 하직해야할 다음사람 누구냐?”하고 질문을 던지는 어느 분의 말에 아무도 대답을 안고 고개를 푹 숙입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게 아버님입니다. ‘다음 차례는 내 차례일세’ 문우들이 체구가 좋으신 분인데 병원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놀랜 겁니다. 농담으로 한 것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6개월 안되서 돌아가신 거죠. 그때 문우들이 유가족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려줘서 우리가 안겁니다. 자기가 다음으로 간다고 하더니 정말 갔네, 영감으로 다음에 자기 차례라고 느끼신 것 같습니다.
지금부터 20년 전 아까 말씀드린 대로 아버님의 회고담은 거의 끝나고 아버님 주변에 일어난 일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한때 강진 고향분들 사이에서는 강진군에서 생가를 사들여서 기념관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유품들이 유가족들의 비협조 때문에 단 한점도 없다. 전시관을 만들려 해도 유품을 구할 길이 없다. 아주 유가족들이 못됐다는 겁니다. 그러나 당시 유가족의 실정을 너무 몰라서 한 오해였습니다.
1950년 6.25직후 우리 가족들이 살던 서울 신당동 집은 인민군들이 아버님 가족들을 납북할 목적으로 정문 앞에 배치해서 24시간 감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당시 수송편이 원활하지 않으니까 차근차근 이번에는 이 동네까지 납북할 사람 보내고 하니까 오래 걸렸습니다. 그 차가 오면 또 보내고 우리 집에 그런 기회가 곧 온다는 거죠.
다행히 아버님이 6.25때 바로 도피하시는데 성공을 한겁니다. 혹시 밤이라도 이 분이 집에 들어오지 않겠느냐 경비원 세운 목표가 그것이고 그런데 유가족들은 반대로 경비원이 언제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기회 그런 시간을 주지 않을까? 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경비원은 저 밑에 있고 내려다 보였습니다.
어느 날 경비원이 안보인 겁니다. 교대근무시간때 우리가 신호를 해서 빨리 도망친 겁니다. 그래서 전 가족이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고 가재도구는 그대로 놔두고 그렇게 탈출을 한겁니다. 아버님은 당시에 공보처차장이었던 이헌구 선생님과 6월 27일 낮 2시에 우리 집에 차를 가지고 오셔서 아버님을 모시고 남하를 하시겠다. 약속을 하시니까 그 친구 말을 믿고 집에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전화로 확인하니까 남하하신 뒤라 나가신지가 서너 시간이 지나신 겁니다. 친구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셨죠. 더 있으면 인민군이 자꾸 들어오니까 할 수 없이 농부로 가장하고 북한으로 보면 아버님은 큰 죄인이죠. 사회주의 경향을 띠었던 문학서적을 전부 출판국에서 몰수한 일을 하셨으니까. 불과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하기 서너 시간 전에 피신을 하신 겁니다. 친척집 지하에 숨어계시다가 유엔군 국군이 서울 수복할 때 우리 집 신당동 그 지역까지 국군탱크가 지나가고 합니다. 태극기가 날리면서 우리가 살던 집은 전부 수복이 된 겁니다.
신당동쪽에 자꾸 포가 떨어진 겁니다. 반공호로 피하셨습니다. 자기 집에 반공호 없는 분들이 많으니까 반공호 있는 이 집으로 막 몰려오는 겁니다. 아이들과 부인들이 들어오니까 자리를 양보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그때 포탄이 떨어진 겁니다. 유가족들이 분명히 기억하기는 이미 신당동 앞까지 국군과 미군이 점령한 뒤니까 아군의 포탄이 떨어진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 가지고 포탄에 쓰려지셨는데 바로 복막염으로 변하신 걸 몰랐습니다. 의사들은 없었고 그랬으니까 아버님은 바로 그다음 날 돌아가시게 됐습니다. 유가족들은 세상에 보이는 게, 참 세상이 슬프게 보이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 실의에 빠져있고 옛날에 살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와보니까 옛날 살던 집이 아닙니다. 창문부터 전부 없는 겁니다. 가재도구는 물론 책 한권 그 당시에 천여 권 책이 소장되어 있었던 게 한권이 없습니다. 유품 하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굉장히 실의에 빠졌죠. 그러한 경과를 모르고 강진에 있는 친척분이 추측으로 얘기하신 것 같습니다. 유품이 있는데 강진군에서 사들인 생가에 협조를 안 한다. 그렇게 어느 신문에까지 보도되었다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저도 언론계 종사한 사람입니다. 기자들의 생리라는 게 굉장히 가까운 친척분들이 그런 얘길 하면 믿는 겁니다. 유품이란 게 한 점도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밖에 고향 분들이 아버님을 위한 행사를 치를 때마다 유가족들의 참석을 권유했었습니다.
그때마다 이 분은 전화를 거셔가지고 왕복여비가 어디인데 서울에서 여기 까지 오시느냐, 당시에 아버님을 잃고 유산 완전히 탕진되고 집도 수리할 비용도 없었습니다. 강진 서울 왕복은 상상도 못합니다. 자신이 처리할 테니까 오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유가족들의 고향방문 횟수가 많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강진군에서 생가를 사들인 후에 복원공사를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제가 귀국을 했을 때 기회를 잡아서 생가를 보기 위해서 내려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전에 살던 생가와 달라진 점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군에서 여유가 생기면 옛 생가 그대로, 전에 없던 것이 들어와 있는 것 없애줬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드립니다. 사랑채 앞마당에는 화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입구 양쪽에 딱 들어서면 탑이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선생님들 기억하실 겁니다.
탑이 양쪽에 있었습니다. 그 탑이 어디서 온 것이고 아버님께 얼마주고 사왔느냐 여쭈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절터였고 그 절에 있던 탑들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군에서 없앤 것이 아니라 약탈당했을 겁니다. 그걸 복원할 길은 없다고 봅니다. 원래 사랑채 지붕이 기와지붕이었습니다. 군수님에게 며칠 전에 말씀드렸는데 해방되기전 4, 5년 전쯤에 기와로 바꾸었습니다. 이사 가기 전에 기와였습니다. 근데 복원된 것을 보니까 초가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분이 고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기와집으로 다시 복원돼야 되지 않겠느냐하는 생각입니다. 또 사랑채 앞 문간채가 복원이 안 되어 있습니다. 대문이 두 개입니다. 사랑채대문, 안채대문 사랑채대문에 소를 기르던 마구간이 있고 조상대대로 쓰시던 상여가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화장실이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되어 있으면 어릴 때 안집에서 나와서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었죠, 대문을 내려다보시니까 금방 탄로 난겁니다. 사랑채 서쪽 뒤쪽에 모란꽃 나무가 4그루 뒤쪽에 6그루 20m이상 전부 모란꽃이었습니다. 집중되어 있는 겁니다.
지금은 여기 저기 관광객을 위해서 앞 공원 가꾸어놓으신 것 같습니다. 모란 잎이 봄이 되면 피기 시작하면 넓지 않습니까? 숨어 들어가면 술래가 못 찾습니다. 제가 와서 보기를 옛날에 있었던 것은 아닌데 군에서 매입한 후에 생가안내판을 전에는 알루미늄 판이었는데 지금은 바꾸었던데 그 내용에 아버님을 자식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신사참배, 삭발령, 창씨개명 불응내용이 빠져있습니다.
그런 중요한 게 빠져있을까? 그게 들어가야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세상에 잘못 알려진 어머님 두 분이 계시는데 앞으로 정정되기를 바랍니다. 아버님이 14살 때 집안끼리 혼인이 이루어졌습니다. 두 살 위인 신부가 불과 1년여 만에 공부하실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의 함자는 김해김씨 은은자 풀초자, 김은초 어머님이 옳습니다. 세상에는 김은하로 잘 못 알려져 있습니다. 아버님이 두 번째 결혼하신게 제 생모인데 소개되기는 김귀연으로 나옵니다.
우리 어머님의 할머님이 처음 결혼하신 분이 안씨였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일찍이 외할아버지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는데 생활이 어렵고 하니까 몇 년후에 재가를 하셨는데 그게 김해 김씨입니다. 그래서 후에 어느 정도 나이가 차서 본래의 성을 복원합니다. 순응 안씨로 안귀연. 요즘 어느 책에나 김귀연, 김은하 두 분 어머님 성함이 잘못 나왔기에 이번 기회에 말씀드립니다. 다음은 영문판시 번역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한국시인들의 시가 영문으로 번역된 지가 오래입니다. 아버님 시는 번역이 부분적으로 나오는데 시집전체가 번역되어 나온 적이 없습니다. 아버님의 시는 영어로 번역하기에 어려운 시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번역하는 분들이 다 도망을 갑니다. 번역하기가 참 까다롭다는게 영문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왜냐 하면 가장 많이 알려진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날, 뚝뚝을 뭐라고 번역을 할 것이냐? 어려운 문제입니다. 아버님의 시중 특성이 다른 시인과 다른 것은 너무도 전라도방언이 많습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영어로 어떻게 번역하느냐. 그러다가 제가 미국에 가서 계속 수소문해서 한국문학을 40년 강의하신 시인 겸 교수님이 계시는데 교포 교수님이십니다.
워낙 명망이 높으니까 제가 뵙고 아버님 시 번역을 의뢰를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냥 번역할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미국은 그게 안 통합니다. 무조건 시 한편에 얼마 딱 정해집니다. 저한테 번역된 내용이 왔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출판할 수 없게끔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뭐냐면 예를 들어서 “강물”이라고 하는 시에 “잠자리가 서러워 일어났소, 꿈이 꼽지 못해 눈을 떴소”.에서 “잠자리”를 곤충의 “잠자리”로 번역을 해놓은 것이라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유명한 시인이 아니라면 말을 안 합니다.
시인이 앞뒤 구절 읽어보면 알죠? 도대체 출판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부분은 얼마나 실수가 많겠느냐 그렇다고 번역료를 안 줄 수가 있습니까? 번역료를 100% 보내주었습니다. 출판을 안 한 겁니다. 출판하면 망신 보통망신이 아닙니다. 제가 불효자식이 되는 겁니다. 출판을 중단해버렸죠. 제 밑에 불문학을 전공한 아우가 있습니다. 이 아우는 계속 버릇처럼 얘기합니다. 형님, 아버님 시 번역하는 것 않됩니다. 번역하면 엉터리 번역이 됩니다. 아버님 시는 번역 안하는 게 상책이라. 자기가 문학을 하니까 아는 것입니다.
제소신은 그렇습니다. 90편의 시를 번역하는데 서양권 문화에 사는 사람들이 그 중에 열편이라도 “야! 이거 멋있는 시다”라고 느낄 수 있다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한국에 영랑이라는 시인이 있는데 멋있는 시가 있다. 동생의 뜻에 어긋나게 자꾸 번역작업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국내 유명한 영문학자를 통해서 최근에 미국선교사의 아드님이 40여년 일류대학 강의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은퇴를 해서 자기 고향에 오셨습니다. 제가 연락을 드렸습니다. 제 아버님 시 번역을 해주시죠?
이 분이 아버님 시 자기도 봤는데 굉장히 어려운 시인데 제가 할지 모르겠습니다. 시집을 하나 보내주시고 거기에 따른 한국계 교수님이 해설한 해설집을 보내주십시오. 여러 가지 보내드렸습니다. 이 분이 다는 어렵고 3분의 2만 번역하겠다. 자기가 미국사람으로 한국문학을 한 사람인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겠다. 지금 타협중입니다. 틀려도 다 해라 이중에 몇 개 바라지 않는다. 금년 말 늦어도 내년 봄까지는 영문판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유명한 아버님을 두었기에 유가족들이 마음으로 고생한 것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유가족들이 서울로 이사 간 게 1948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15년이 흐른 후에 1963년도 강진 어느 지역에서 태어난 분이 1999년도, 7년전에 수필집을 냈습니다. 책 추천서 당시 신문에 보도됐던 서평, 책 광고를 보면 저자가 영랑이 살아있던 생가에서 태어난 자기는 영랑의 손녀다. 책안에 들어가면 조카손녀로 나옵니다.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작년 10월에 서울에 친척 한 분이 이러한 내용을 아느냐고 연락이 와서 저는 모르겠다해서 그 수필집을 보내왔습니다. 전혀 내가 모르는 사람이 15년 후에 우리 아버님의 손녀딸로 태어날 수 있느냐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수소문을 해봤더니 강진군 군동 쪽에서 태어난 분인데 이분이 화가입니다. 책도 씁니다. 글재주가 좋은 것 같습니다. 서울대 미대 미술 관장님으로 계시는 유명한 화가인데 이 분이 추천서를 썼는데 문장이 기가막히다 했더니 알고 보니 영랑의 손녀딸이었다고 추천서에 나오는 겁니다.
강의하고 있는 대학교수이고 남편은 의사로 굉장히 수입이 좋은 여자인데 이 사람이 우리 집안사람 아닌가하고, 족보를 뒤져봤습니다. 친척으로 나옵니다. 그런 근거가 있으니까 거짓말을 했겠구나. 우리의 할아버지 뻘로 썼으면 문제가 안되는데 생가에서 태어난 손녀 이것은 곤란하다. 수소문해보니 출판사에도 돈이 밀려있고 유가족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겁니다. 깨끗하면 어차피 할아버지뻘 되는 거니까 그래라, 그런데 돈이 밀려있는 겁니다. 출판사에서 저에게 항의합니다. 돈 좀 받아달라. 그래도 그때까지는 법적인 문제는 생각을 안 합니다. 젊은 사람이 실수를 했겠지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1,300권은 이미 팔렸습니다. 지금 책방에 가도 책 못 구합니다. 나머지 200권중에서 증정본 빼고 100여권이 전국도서관에 펴져있는 겁니다. 유가족 바람은 도서관에 나가있는 책만은 회수를 하거나 열람중지를 취해 달라. 전국에 도서관을 관장하는 문화정책과와 대화를 해봤습니다. 저자가 이것을 회수를 해달라 해도 이것은 국가의 재산이다. 안된다.
한 가지 예는 마광수예를 들면서 유가족들이 제소를 해라, 판결문을 갖고 와서 유가족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전달해줘야 회수하든지 열람을 취소하겠다. 문화정책과장이 왜 제소를 안 하느냐 하는데 저는 뭘 염려를 했냐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손해배상액이 나옵니다. 영랑가족이 돈을 얻어먹을려고 소송한 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 오해가 듣기 싫어서 계속 소송을 미루어온 건데 안 됩니다. 할 수 없이 문화공보부측 요청에 따라서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보도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소송중이고, 또 한 건 이것은 젊은 학자 시인 한분이 실수를 하신 것 같은데 아버님과 평소 친교관계를 가졌던 이 동네 현구시인은 집안의 형님입니다. 김현구, 김현철 현자돌림입니다. 아버님과 굉장히 가까운 사이었습니다. 아제, 조카 해 가지고 옛날 어릴 적에도 우리 집에 자주 오셨고 오시면 다른 얘기는 없고 문학관계 토론하시고 이 분 전집을 그 분이 냈습니다. 냈는데 저는 그것도 몰랐습니다. 나온 지가 3년이 지났다는데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미국으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이러이러한 책이 나오는데 거기에 보니 현구라는 시인이 “m부인에게”, “m부인의 추억”, “어린 너는 철새처럼 날아가고” 세 편의 시를 1918년도에 만들어서 아버님께 증정했다. 그런 시인데 우리 아버님의 본 부인이었던 김은초 어머님은 김씨인데 왜 이분은 m부인이냐? 현구형님의 차남되는 분에게 조회를 했더니 그 분이 말을 가볍게 했습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본부인이 아니고 서울에 또 첩이 있는데 첩의 소생아들이 있다. 이렇게 했으면 이 분이 유가족들에게 조회를 했어야죠? 조회를 전혀 안하고 책을 낸 겁니다.
각주를 썼는데 그 분 연보를 보면 뒷줄에 1918년 4월 영랑의 첫째 부인 아무개 사망 또 그 해에 현구시 m부인에게, m부인의 추억 등이 나옵니다. 그것만 봐도 누가 봐도 김현철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거기에 관한 시다. 위로 한다고 아버님께 바친 시라고 가운데에 쓰여있다는 겁니다. 1918년 15살때 아버님이 어렵게 돈을 얻어다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 본부인은 강진에 있고 서울에는 첩이 있다. 상식적으로 가능합니까? 그러한 얘기입니다. 한번 보면 알만한데 어떻게 저자가 실수를 했을까? 그런 것을 알아봤더니 전집 주인되는 시인의 둘째 아드님이 실수를 한 것을 그대로 받아쓴 겁니다. 제가 고심을 많이 했습니다. 1건만 소송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두 건의소송 건이 잡혔어요. 미국에서 나온 김에 공교롭게 전남에 사시고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광주변호사를 찾아서 소송준비를 2건을 했습니다.
한 분 즉 뒤의 분은 처음부터 유가족들에게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용서해달라고 실수했다고 해서 준비는 해놓고 소송제기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뭐라고 했냐면 강진지역에만 그 책이 배포되었으니까 강진지역에 나온 신문과 잡지에 사과성 글을 싣겠다. 약속을 했습니다. 이번에 여기 와 보니까 전혀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화를 냈습니다. 약속을 아직까지 안 지키면 당신 말을 어떻게 믿느냐? 어젠가 강진신문에 나왔다고 합니다. 광주 남도일보라는 신문에 똑같은 사과성 글을 냈다고 합니다. 원래 그런 것이 재판이 되면 승소한 사람의 요구대로 원고가 주장하는 중앙지 3건, 지방지 3건 등에 전면광고를 해라 1건에 8백만원, 9백만원 합니다.
그럼, 그 교수는 유가족들 요구만 응해도 몇 억이 없어집니다. 그게 안되서 유가족들이 백보 양보해서 사과문 광고를 내라. 이 분이 그것도 어려웠던지 조그맣게 그렇게 해서 냈다고 합니다. 그런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시간이 너무 흐르는 것 같아서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유가족들에 대해서 소개를 했으면 좋겠다는 어떤 분의 말씀이 있어서 말씀이 길어졌습니다마는 잠깐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아시니까 그만두고 동생이 67세 유럽 오스트리아에서 국립은행 은퇴해서 은퇴생활하고 있습니다. 40년째 살고 있습니다.
현재 직계유가족 손자가 20명 그 다음에 증손자가 25명 외국에 손자 중에 대학교수가 하나 있고 변호사, 목사가 하나씩 있습니다. 국내에 장손이 여기에 참석했고 현대자동차 과장으로 있습니다. 소프라노 성악가가 하나있고 의사가 둘 있고 약사가 하나 세 명의 의사사위가 있고 증손녀인 피아니스트 성원양은 소프라노 성악가의 딸로 금년 이대 음대를 졸업하고 5월에 독일 유학 예정인데 전국음악가협회 콩쿨과 오스트리아 국제 청소년 콩쿨에서 각각 1등을 한 굉장한 재원입니다. 그 오빠 되는 성윤이란 친구는 고려대학교 일본어 문학과 재학생으로 일본 무사시노대학교의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돼 유학중입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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