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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분과 방 스크랩 한밤 마을의 두 그루 잣나무
이팝나무 추천 0 조회 59 07.01.20 20: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군위군  부계면 소재 한밤 마을은 부림 홍씨들의 집성촌이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끌지만, 마을이 조선조 반촌이 그러하듯 풍수지리설에 의해 조성 되었다는 점, 또한 옛 전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는 점을 통해 각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찾았으나 최근에는 아름다운 돌담이 있는 전국 몇 안 되는 마을로 알려지면서 그 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 마을은 10세기 전 즉 고려 중엽 재상을 지낸 홍란(洪鸞)이라는 분이 벼슬을 그만두고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홍문(洪問)이 재지 사족으로 인근 주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여말 문하사인이라는 직위에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자연을 벗하며 살다가 27살의 나이로 요절한 홍노(洪魯) 선생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호가 경재(敬齋)인 선생은 후손들에게 ‘언제나 뜻을 도(道)에 두라고 하여’ 이후 홍문은 세속적인 벼슬보다 학문에 오히려 전념하였다고 하나 실제로는 벼슬이 높은 사람과, 학자, 의병장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유훈을 따라서 그런지 주로 교육과 학문을 다루는 직책을 행하던 사람이 많았다. 

  시조공 난의 후손으로 조선 초 홍귀달(1438~1504년)은 세조실록 편찬에 관여하고 충청, 경기감사, 호조판서와 오늘날 국립대학인 총장인 성균관 대사성, 교육부총리인 대제학을 지냈으며, 연산군의 폭정에 직간을 하다 피살될만큼 언행일치의 선비로 후인들에 의해 한국의 소크라테스로 칭송되고 있다. 그의 차남 홍언충(1473·1508)은 일반 관리로서는 부러움의 대상인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혔고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공직자로서의 본분을 다하다가 예조정랑을 마지막으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꼿꼿한 선비정신은 많은 사람들의 사표가 되었으며, 특히 학문과 문장에 능해 정순부, 이택지, 박중열과 더불어 당대 문장사걸(文章四傑)로 불렸다. 경재공의 후예로 임란 시 무과 출신의 홍천뢰(1564~1615) 장군은 의병 1,500명을 이끌고, 한천, 사천 등지에서 왜적과 싸우고, 신녕의 권응수 장군과 합동작전으로 영천성을 탈환, 왜적의 승세에 결정적 타격을 가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 3등에 서훈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 홍여하(1621~1678)는 경연에서 ‘주례’를 강학 정도로 성리학에 밝았으며 1차 예송논쟁에서 서인 세력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실각되어 황간으로 유배되었으며 그들이 몰락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복권되어 병조좌랑, 사간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역사학에 조예가 깊어 고려사를 이전의 시각과는 다른 입장에서 정리하고, 내용을 부분적으로 재구성한 ‘휘찬여사’를 남겨 후대의 고려사 연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삼국시대엔 이 마을이 큰 절터였다고 한다. 당시에 마을 이름을 무엇이라 불렀는지 알 수 없으나 민간에서는 언제인지 모를 만큼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말로 “한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려이후부터 나타나는 기록에는 대야(大夜)라 했고 그후 밤 야(夜)자가 좋지 않다고 하여 밤 율(栗)자로 고쳐 대율(大栗)혹은 율리라 기록하고 그렇게 부르기도했다. 우리 나라의 모든 지명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지방제도를 중국식으로 정비하면서 비로소 한자화 되었기 때문에 한밤이란 우리말 지명을 대야 혹은 대율로 이두식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한밤이란 마을 이름이 지어진 연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지명의 유래를 연구하는 어떤 사람은 이 마을에 한 필지로 된 큰 논이 있어 이를 ‘한베미’라고 부르던 것이 한밤으로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이는 서북향으로 트인 지형적인 원인으로 밤이 잘 되어(栗木宜土) 한밤(大栗)이라 한다는 설도 있어 더 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고려조 중후기까지 이 마을에 살았던 선주민인 예씨들이 청도 이서면으로 옮겨 그 마을 이름을 “한밤”과 발음이 비슷한 “한밭”이라 한 것을 보면 중산간 지대에 넓고 큰 밭이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란 생각도 든다. 

이 곳은 부림 홍씨들이 마을을 개척한지 천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니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지사(地師)들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들 나름대로 이름을 붙이니 어떤 지사는 주변의 오도봉(머리), 옥소덤(빗), 보경들(거울) 등이 어우러져 옥녀가 산발하고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빗는 형국이라 하여 ‘옥녀산발형’,이라하고, 어떤 이는 배를 닮아 ‘선형(船形)’이라고도 하며, 어떤 이는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들판 가운데 장고처럼 자리 잡아 ‘장고형(長鼓形)이라고도 불렀다. 장고형이란 표현은 이 지역을 오래전부터 부계(부는 장고란 뜻)라 불러온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도 오랜 세월을 지나오면서 겪은 일들이 수 없이 많고 모두 다 그럴듯한 명분이 있는 것 같아 딱히 꼬집어 어느 형국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그럴듯한 것은 배 모양 즉 선형이 아닌가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발생한 대홍수로 69명이란 희생자가 생겨 그런지 아직도 마을 한 복판에 샘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전설이 있어 우물을 변두리에 파고, 그것도 부족해 마을 북쪽 소나무 숲에 솟대의 모습으로 오리를 조각한 진동단(鎭洞壇)을 세워 큰 물살에도 자유자재로 헤엄쳐 다니는 오리처럼 마을이 안전 하라고 기원했던 풍습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마을 중심 공간에는 학문을 숭상하는 홍문답게 주로 마을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던 1632년(인조 10)년에 건립된 목조건물 대청(경북 유형문화재제262호)이 자리 잡고 있어 여느 마을과 분위기부터 사뭇 다르다. 또한 그 옆에는 역시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가장 큰집 남천고택 일명 상매댁이 고색을 듬뿍 머금고 단아한 모습으로 서 있다. 기록에 의하면 약 250여 년 전 홍우태라는 분이 살림집으로 지었다고 하는 데 사랑채 쌍백당(경북 문화재 자료 제357호)의 명문으로 보아 1836년(헌종 2)에 새로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채와 사랑채, 집안에 사당을 모신 전형적인 영남 사대부가의 집 구조를 하고 있다.

쌍백당(雙伯堂)이라는 당호는 뒤 안에 있는 200여 년 생의 큰 잣나무 2그루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답사를 하면서 한밤이란 마을과 이 마을을 개척한 부림 홍문의 일반적인 이야기를 찾아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잣나무에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몹시 당혹스러웠다.

왜냐하면 이 나무를 두고 각기 다른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에 어느 것이 사실일까 하는 점이고 또한 그것을 알아보려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산과 나무의 전설’ (산림청임업연구원 1988년)에 의하면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에 있는 잣나무는 홍씨 문중에서 받드는 나무로 종중에서 지은 노래헌(老來軒) 대청에서 잠을 자다 꿈에 용이 이 잣나무에서 내려와 노래헌 기둥에 몸을 감기에 깨어나 바로 다음날 과거일이라 응시하여 급제했다 하여 이 나무를 등용목(登龍木)으로 신성 시 하여 대대로 내려오면서 받들고 있다.”는 전설이 있고,

‘군위의 향맥’ (군위군 2004년)에는 이와는 상반되는 내용으로“군위군 대율리에 9대째 글로서 이름 높은 홍인규라는 분이 있었다. 어느 해 이 집안의 자제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떠난 후 풍수장이가 찾아와서 조부와 풍수지리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본래 이곳은 신령스러운 봉우리의 뒤에 위치하여 음기를 띠고 있어 나무를 심지 말아야 하는데 나무를 심어 음기를 더 하고 있어 마당에 있는 잣나무를 베어야 합니다.’ 하여 그 풍수장이는 마당에 서 있는 오래된 잣나무를 가리키며 말 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과거보러간 손자의 조부는 손자를 생각하고는 ‘대체 어떻게 하면 좋소.’ 하고 물으니 ‘나무 윗부분을 잘라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서둘러 오래된 잣나무의 윗부분을 끊어 버렸다. 며칠 후 과거를 보러간 손자가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어찌하여 과거를 보지 않고 돌아왔느냐?’고 물으니 과거보기 전날 꿈자리가 몹시 뒤숭숭하여 이튿날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니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하였다. 조부가 생각하니 잣나무를 벤 그날과 같은 때이므로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며 풍수장이가 영특한 점이 있구나 생각하였다. 이 후 이 집안에서는 그 오래된 잣나무를 베지 않고 그대로 두어 지금도 윗부분이 잘린 채로 마당에 서 있다. 그리고 큰 벼슬은 아니 하나 이 집안은 9대째 글로써 유명하며 대를 이은 전통이 남다른 면을 갖고 있다.” 고 한다 하였다.

 

두 이야기를 풀이해 보면 우선 같은 잣나무를 두고 전해지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마을에서 오래된 잣나무라고는 이 나무 밖에 없고 또한 자세히 보면 윗부분이 잘라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앞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래헌이라는 집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다. 따라서 경재선생이 남긴 벼슬하지 말라고 한 유훈(遺訓)과 실제 벼슬보다는 학문을 중시했다는 뒷이야기가 부합된다. 그러나 남천고택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는 점이 또한 발견된다. 종중에서 펴낸 자료 ‘부림홍씨 문화유적안내’에 의하면 잣나무가 있는 남천고택에는 경재선생의 9세손인 홍우태(洪宇泰)라는 분이 살았고,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의 명부인 문과방목에서 우태의 아들 홍귀서(洪龜瑞)가 1761년(영조 37) 정시에 병과로 합격한 기록을 확인할 수 있어 등용목 이야기도 영 엉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홍문의 수도 줄고, 여느 농촌이 그러하듯 젊은이들은 대처로 나가고 자제들을 교육하던 동천당 등 강학소도 텅 비어 거미줄이 처 있을 정도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나마 돌담밖에 없는 것 같다. 세월의 무상함에 무엇인들 잊혀지지 않으랴 만 잣나무이야기는 서로 상반되지만 또한 상반되는 것은 통하는 점도 있는 바 두 이야기 모두 다 맞는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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