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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섬&산) 좋은사람들--버스매일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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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후기,여행 후기 스크랩 우국충절의 정신에다 아름다운 경관까지 더한, 손죽도(‘18.3.26)
갈하늘 추천 0 조회 438 18.04.16 04:5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손죽도(巽竹島)

 

여행일 : ‘18. 3. 26()

소재지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트레킹코스 : 선착장내연발전소삼각산 왕복지지미재깃대봉(242m) 왕복봉화산북쪽 능선선착장마을길이대원사당손죽분교선착장(소요시간 : 4시간)

 

함께한 사람들 : 좋은 사람들


특징 : 여수에서 남서쪽으로 58지점에 있는 여의도 면적의 1.04배쯤 되는 작은 섬(3.015)으로 주변의 여러 섬들과 함께 손죽열도를 구성하고 있다. 섬은 대부분 산지와 구릉으로 이루어졌는데,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깃대봉(242m)을 중심으로 능선이 섬을 두르고 있다. 왼쪽 끝에는 우뚝 솟은 삼각산의 쌍봉이,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낮은 산허리가 선착장 부근까지 이어진다. 바다는 깊게 만입되어 U자 형태를 이루니 더할 수 없이 오붓하고 아늑한 느낌이다. 탐방로도 지형에 맞게 개설되어 있는데, 대체로 바위벼랑 위로 길이 나있기 때문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이곳은 원래 고흥반도에 가까워 고흥군에 속했다. 이후 1914년 일제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여수로 편입되었다. 이때 손대도(損大島)에서 손죽도(巽竹島)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원래의 이름인 손대도(損大島)는 임진왜란 때 이 섬 앞바다에서 이대원(李大源) 장군이 왜구들과 싸우다 순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이 큰 인물을 잃었다는 아쉬움으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손죽도라는 지명은 존재하였으며, 섬에 시누대가 많아 시누대섬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찾아오는 방법

손죽도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나로도 연안여객선 터미널까지 와야만 한다. 목적지로 들어가는 배가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남해고속도로(영암-순천) 고흥 IC에서 내려와 15번 국도를 타고 남진하면 고흥읍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나로도대교를 건너면 동일면(고흥군)의 본섬인 내나로도가 나오고, 계속해서 15번 국도를 타고 가다 나로2대교를 건너면 이번에는 봉래면(고흥군)의 본섬인 외나로도에 들어선다. 이어서 봉래교차로(봉래면 신금리)에서 우회전하면 곧이어 목적지인 연안여객선터미널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타고 갈 배는 오션호프 해운()조국’, 문재인정부의 민정수석인 조국씨가 아니니 오해말길 바란다. 아무튼 이 배는 하루에 두 번(8:30, 14:30) 운행되며 손죽도까지는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돌아올 때는 1시간 30분쯤 더 걸린다. 초도와 거문도를 거쳐서 돌아오기 때문이다. 돌아올 때에는 같은 회사 소속의 줄리아아쿠아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배가 교대로 운항하고 있는 모양이다. 참고로 여수항에서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같은 배의 최초 출항지가 여수항이기 때문이다. 1만원 정도의 추가 요금과 1시간 정도의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감수해야만 한다. 또한 고흥의 녹동항에서 출발하는 철부선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으나 배의 속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섬까지 경유하면서 가니 굳이 이용을 권할 정보는 아닐 것 같다.



30분 조금 못되게 달리자 손죽도이다. 섬은 하트() 모양으로 생겼다. 하트의 움푹하게 파인 부분, 즉 북쪽해변에 만()이 형성되면서 폭풍우에도 끄떡없을 만큼 안전한 항구를 만들어 놓았다. 배에서 내리자 마을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자기만의 개성을 자랑이라도 하듯 알록달록한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있다. 마을 앞은 하얀 모래사장이다. 이 백사장이 바다 속까지 훤히 보이는 파란 바다와 어우러져 있다. 한마디로 한적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래 사람들은 이런 풍경이 좋아 섬을 찾아올 것이다.




배에서 내리면 이대원 장군의 동상(銅像)이 길손을 맞는다. 하지만 조악한 관광기념품처럼 썩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목숨을 던진 장수의 비장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그게 더 친근감이 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판에 박은 듯이 똑 같은 관제(官製)의 동상, 즉 근업하고 위압적인 형상이 이어서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 동상은 이따가 만나게 될, 섬의 남쪽에 세워져있는 진짜 동상을 모사한 것이란다. 이대원장군에 대한 얘기는 잠시 후에 만나게 되는 다른 동상에서 다시 거론해 보자.



배에서 내리면 건너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산과 마주한다. 아랫도리가 물안개에 잠긴 것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연출하고 있다. 아니 절해고도에서 쌍둥이처럼 솟은 두 봉우리가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잃어버린 세계로 들어가는 문() 같다는 느낌을 준다.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가졌단다. 봉우리의 끝이 뾰쪽하게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점심을 예약해놓은 민박집에다 배낭을 맡겨놓고 곧장 트레킹을 나선다. 이때 고민에 빠진다. 박근례 할머니가 직접 담가 판다는 막걸리를 트레킹을 하는 중에 마실 것인가. 아니면 트레킹을 마친 후에 마실 건가를 놓고 말이다. 과거 육지에서의 술 반입을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대부분의 섬 막걸리는 제사에도 쓰고 마을 사람들이 나눠 마시기 위해 자생적으로 생겨났다. 이제는 소주나 맥주 등 각종 술들이 배편으로 쉽게 들어오게 되었지만, 막걸리는 유통기간이 짧은 탓에 그 전통의 명맥에 의지해 오고 있단다. 아무튼 이 막걸리가 맛있다고 소문나있으니 마셔보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트레킹을 마친 후에 마시게 되었지만 막걸리 맛은 일품이었다. 한약재를 세 가지나 넣어 만들었다는 할머니의 자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은은한 한약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걸쭉한 맛은 다 마시고 난 뒤에도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시게 만들었다.



첫 번째 답사할 곳은 삼각산이다. 해안을 따라 난 시멘트포장길을 5분쯤 걷자 손죽도 내연발전소가 나온다. 이곳까지 전기를 끌어오는 게 어려웠던가 보다. 아니 직접 발전하는 게 경제적이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탐방로는 발전소 건물을 오른편에 끼고 반 바퀴를 돌도록 나있다.



그렇게 잠시 걷자 왼편 산자락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방향을 틀어 잠시 오르면 철갑 옷을 입은 장수의 동상이 나타난다. 이대원 장군이다. 약관의 나이에 녹도만호에 부임했던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 손죽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와의 전투에서 최후를 맞았다. 전투 중에 목숨을 잃었지만 실제로는 상급자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결과였다. 이대원 장군은 그해 1월 소록도 앞바다에서 벌인 왜구와의 첫 해전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왜구의 침입에 경황이 없어 상급자인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보고하지 않고 출전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장군이 공을 독차지했다고 시기하게 된 심암은 왜구가 손죽도를 점령하자 피로에 지친 100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출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날이 밝으면 군사를 더 모아 출전하겠다는 호소도 통하지 않았다. 장군은 손죽도로 향하며 응원군을 거느리고 와달라고 부탁했으나 사흘 밤낮으로 펼쳐진 전투에 응원군은 없었다. 왜구에게 붙잡힌 이 장군은 돛대에 묶여 갈고리로 찍히면서도 항복을 거부하다가 뭍으로 끌려 나와 살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다. 이왕에 나온 김에 그가 마지막 순간에 손가락을 잘라 피로 썼다는 절명 시를 옮겨본다. <진중에 해 저무는데 바다 건너와 슬프다 외로운 군사 끝나는 인생 나라와 어버이께 은혜 못 갚아 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리지 않네.>




이대원장군의 동상으로 올라가는 길 근처에서 오른편으로 또 다른 오솔길이 나뉜다. 이정표(이대원장군 묘20m/ 손죽도 갯가길20m)에는 갯가길로 표기되어 있는데, 해안을 따라 내놓은 산책로쯤으로 보면 되겠다. 총 연장이 300m쯤 되는 이 길은 끄트머리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하는 애로가 있다. 하지만 꼭 들어가 볼 것을 권한다. 바닷가 갯바위 위로 내놓은 데크로드에서 바라보는 주변풍광이 제법 빼어나기 때문이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걷다보면 어느덧 끄트머리에 닿는다. 햇살이 따뜻하다. 바람이 몸에 부딪친다. 끄트머리의 갯바위는 포토죤(photo zone)으로 제격이다. 화산암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 자체도 볼거리지만 건너편 손죽마을과 선착장, 그리고 부속섬인 반초섬이 사진의 배경으로 삼기에 딱 좋기 때문이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삼각산으로 향한다. 잠시 후 길이 둘(이정표 : 삼각산 전망대200m/ 생활폐기물 처리장150m)로 나뉘지만 왼편은 생활폐기물처리장으로 가는 길이니 염두에 두지 말자.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자마자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아래에는 무덤 한 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대원장군의 가묘(假墓)인데 경기 평택에 사는 이대원 장군의 후손들이 1990년에 만든 것이란다. 또한 해마다 3월이면 숭모제(崇慕祭)를 올리고 있단다.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울창한 산죽 숲을 빠져나오면 데크계단이 나타난다. 삼각산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계단은 바위벼랑에다 기대어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그냥 위로 향하지를 못하고 왔다갔다 갈지()’ 자를 쓰고 나서야 겨우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다. 절벽에 걸쳐있기 때문에 위험스럽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시설을 만든 지자체를 믿고 일단 올라가보자.




무서움을 참는데 대한 보상은 괜찮은 편이다. 고개를 돌려보면 바닷가 기암절벽이 발아래에 펼쳐지는데 아름답기 짝이 없다.



5분쯤 오르자 첫 번째 전망대가 나타난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없다. 사방이 온통 해무(海霧)에 잠겨있기 때문이다. 그저 발아래에 펼쳐지는 바닷가 풍경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첨부된 사진도 내려오는 길에 겨우 촬영한 것이다.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자 또 다른 전망대가 나온다. 이번에도 역시 보이는 것은 없다. 아니 있다. 뾰쪽하게 생긴 봉우리 하나가 해무 너머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있다. 손죽열도에 속한 무인도 가운데 하나인 나무여도가 아닐까 싶다. 감성돔을 찾는 낚시꾼들이나 찾을 정도로 외지고 험한 바위섬 말이다.



두 번째 전망대를 지나면서 탐방로는 흙길로 변한다. 아니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암봉을 피해 왼쪽으로 잠시 우회(迂廻)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어서 나타나는 나무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정상이다. 이곳도 역시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그 덕분에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손죽도 마을이 평온하게 내려다보인다. 그 왼편에는 선착장과 반초섬이 있다. 아까 갯가길의 끄트머리에서 보았던 풍경들이다. 아니 장거리도와 소거문도까지 머리를 내밀고 있는 걸 보면 그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다. 그만큼 고도(高度)가 높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맞은편에는 삼각산의 쌍봉 중 나머지 하나가 버티고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길을 낼 수도 있음직 한데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미답(未踏)의 봉우리로 남겨두고 싶었던 모양이다. 뭔가 궁금함이 남아있어야 또 다시 손죽도를 찾아올 게 아니겠는가.



내연발전소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마을 뒤편으로 난 임도를 따른다. 삼각산을 다녀오는 데는 대략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아무튼 지지미재로 연결되는 시멘트포장 도로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벚나무를 심어놓았다. 시간이 조금 흐른다면 또 하나의 멋진 볼거리를 제공해 주겠다.



8분쯤 걷자 길이 둘로 나뉜다. 그렇다고 어디로 가야할 지를 놓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따가 능선 안부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말이다. 일단 오른편으로 들어서고 본다. 푸릇푸릇 돋아나고 있는 풀빛이 무척 고와보였던 것이 그 원인이었을 게다. 길은 무척 잘 닦여 있다. 널따란데다 경사도 별로 없을 뿐더러, 통나무로 계단까지 깔아 놓았다.



그렇게 12분 정도를 진행하자 팔각정이 지어져 있는 능선 안부에 올라선다. 깃대봉과 봉화산의 사이에 있는 지지미재이다. 지지미재는 섬사람들이 삼월 삼짇날에 꽃전을 부쳐 먹으며 잔치를 벌이던 자리라고 한다. 모든 마을 주민들이 이곳 잿마루에서 1주일 넘게 밤낮을 쉬지 않고 춤과 노래를 부르며 화전놀이를 즐겼다는 것이다. 옛날 이곳 손죽도에는 300가구에 500여 세대가 북적이며 살기도 했었다. 그때 지지미재에서 펼쳐졌다던 화전놀이는 얼마나 떠들썩했을까? 참고로 '지지미'란 이름은 화전놀이에서 유래됐다. 여수지역에선 화전을 보통 부쳐서 먹기 때문에 '부쳐리'라고 하고 지져먹는다는 뜻으로 '지지미'라고도 하는데 꽃전의 다른 이름인 지지미가 땅 이름이 된 것이다.



지지미재에서 길은 둘로 나뉜다. 이정표(손죽도항2.6Km/ 손죽마을800m)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오른편에 보이는 널찍한 임도를 따를 경우 손죽도의 최고봉인 깃대봉으로 올라서게 된다. 봉화산은 물론 반대방향이다. 깃대봉을 오르고 난 뒤에는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 내려와야 한다는 얘기이다. 아무튼 길은 차량이 다녀도 될 정도로 무척 넓다.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통신시설을 관리하기 위해 내놓은 임도일 것이다. 대신 경사는 무척 가파르다. 올라가는 게 만만찮다는 얘기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헉헉대며 10분 정도를 오르자 드디어 깃대봉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이나 이정표 등 이곳이 깃대봉의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식이 일절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이다. 그저 여수연안 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서 세운 통신시설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인노릇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VTS(Vessel Traffic Service), 즉 해상교통관제센터는 항공기의 관제를 실시하는 관제소의 해상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CCTV와 레이더, 육안, AIS(Automatic Identification System, 선박자동식별장치) 등을 이용해 각 선박의 침로. 속력 등의 정보를 이용하여 각 선박간의 위험, 충돌 여부를 확인, VHF를 이용해 관제를 실시한다. 뿐만 아니라 입/출항 보고, 기상 악화 시 통제. 사고 발생시 통항관제의 업무도 수행하고 있다. 참고로 깃대봉이란 이름은 1896년 무렵 일본이 지도 제작을 위해 측량 기점으로 산꼭대기에 기를 꽂았던 데서 유래한단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뛰어난 편은 아니다. 동북쪽 방향으로만 시야가 열리면서 장거리도와 소거문도, 그리고 암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선이 나타날 뿐이다. 주변의 잡목(雜木)들 때문에 그마저도 아랫도리가 잘려나가 버렸다.



지지미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봉화산으로 향한다. 깃대봉 방향과는 달리 오솔길 수준이다. ! 깜빡 잊을 뻔 했다. 팔각정 주위에 정성들여 꽃밭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 섬사람들의 화전놀이 재현(再現) 계획에 대한 기사를 본 것 같은데, 그 일환으로 조성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화전놀이가 계획대로 재현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화전놀이를 하는 날에 외지 사람들이 찾아와서 예전처럼 북적이는 잔치가 됐으면 한다는 주민들의 바람도 첨언되어 있었는데 그 바람이 꼭 이루어졌길 기대해본다.



오솔길로 들어서자마자 이정표(손죽도항 2.5Km/ 목넘전망대 30m/ 깃대봉 500m)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오른편에 목넘전망대가 있다니 어찌 들어가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그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조금 전에 다녀온 깃대봉을 물론이고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손죽도의 남쪽 해안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봉화산으로 향한다. 조선시대 왜구나 적의 침입을 주변 지역에 미리 알리기 위해 설치한 요망소가 있었다는 산이다. 길은 산비탈을 헤집으며 나있다. 그러다보니 여의치 못한 곳에는 계단을 놓기도 했다. 물론 벤치도 빼먹지 않았다. 이왕에 경관 좋은 곳에 왔으니 쉬엄쉬엄 즐기면서 걸어보라는 배려일 것이다.



잠시 후 이정표(손죽도항 2.3Km/ 깃대봉 700m)와 함께 세워진 진입금지라는 팻말이 보인다. 밧줄난간 뒤에 보이는 암봉에 올라가지 말라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봉화산의 정상이라는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배낭을 벗어놓고 살그머니 올라가본다. 옛날 봉화대가 있었다는 산이니 그에 걸맞는 공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넓었다. 그러나 봉수대의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정상표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봉수대가 있었던 자리답게 진행방향의 능선은 물론이고 왼편의 마을전경과 동북쪽 해안의 깎아지른 듯한 기암절벽이 내려다보이는 등 조망은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사진게재는 생략하기로 한다. 같은 풍경들을 이따가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게 더 화려하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탐방로는 해안의 기암절벽을 끼고 이어진다. 길은 아찔한 벼랑을 끼고 계속되는데, 그마저도 부족했던지 아슬아슬한 벼랑의 위에다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조심조심 난간에 의지해 아래를 내다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코발트빛 바다가 반짝이고 있다. 눈길을 조금 돌리니 천애(天涯)의 해안절벽이 눈에 차오른다. 아름답다. 눈물겹도록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런 때 쓰는가 보다.




갑자기 평평한 흙길이 나오는가 싶더니 왼편으로 길이 하나 갈려나간다. 이정표는 세워져 있지 않지만 손죽마을로 연결되는 길일 게다. 잠시 후 길은 또 다시 바위벼랑의 위로 이어진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경사가 심하거나 위험하다 싶은 곳마다 나무계단을 놓아 위험성을 제거했으니 마음 놓고 주변경관을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런 점을 감안했는지 이 구간에도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세 번째 전망대를 지나자 주변 풍경이 크게 변한다. 이번에는 초지(草地)로 이루어진 구릉(丘陵) 형태의 언덕이 나타나는 것이다. 바람이 섬의 잔등을 타고 넘는 초지의 들판에서는 바로 곁에 있는 장거리도(네이버 지도에는 반초섬)와 소거문도는 물론이고, 그 너머의 먼 바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 이 부근에서 손죽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깜빡 잊을 뻔 했다. 이번에는 이정표(손죽도항1.5Km/ 손죽마을200m/ 깃대봉1.5Km)까지 세워놓았다. 지지미재에서 이곳까지는 35분 정도가 걸렸다.




편의 조망도 훌륭하다. 발아래에 있는 손죽마을은 물론이고 그 건너에 버티고 선 삼각산이 그 늠름한 자태를 드러낸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암봉이 손죽도 제일의 절경답게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만들어준다.



멋진 볼거리를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듯이 이곳에도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다. 보여주는 풍경이 아까와는 또 다르니 거르지 말고 꼭 올라가 보자. 꽤 여럿의 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저 섬들은 한꺼번에 아우를 경우 손죽열도(巽竹列島)가 된다. 중심 섬인 손죽도를 비롯하여 소거문도와 광도, 평도 등의 유인도와 반초섬, 나무여, 갈키섬, 검둥여 등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손죽도가 가장 규모가 큰 섬이어서 손죽열도라 부르게 되었더란다.




전망대를 지나자 제법 높은 산봉우리가 앞을 막는다. 누군가는 이곳을 마제봉이라고 적고 있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봉우리로 오르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경사가 완만해서 별 무리 없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바위벼랑에서 멀리 떨어져서 길이 나있기 때문에 볼거리는 별로 없다.



봉우리를 넘자마자 정자 하나가 잠시 쉬었다가라며 길손을 붙잡니다. 그래 잠시 쉬었다 가보자. 정자에 오르니 아랫어미 너머에 있는 반초섬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길게 늘어선 손죽열도의 많은 섬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무인도로, 기껏해야 10분이면 섬을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어 무시하기 쉽지만, 낚시꾼들 사이에는 조황이 좋기로 정평이 난 섬이다. 반초섬 너머로는 코발트빛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보트 한 척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한마디로 멋진 풍광이다. 이런 풍광이 놓치기 싫었는지 조금 아래에다 또 다른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정작 반초섬은 머리꼭지만 보이고 그 너머에 있는 손죽열도에 속해있는 또 다른 무인도인 지마도(池馬島)가 선명하게 시야에 잡힌다. 섬의 정상부분이 질마()처럼 오목하게 들어갔다 해서 질마섬으로 부르다가 지마섬으로 변했는데,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고 한다.




이젠 본격적인 하산만 남았다. 탐방로는 구릉처럼 완만하면서도 펑퍼짐한 언덕을 따라 나있다. 그래선지 울타리 안에 놓아먹이는 염소들이 간간이 보인다. 울창한 산죽 숲도 보인다. 곧고 굵은 것이 거의 대나무 수준이다. 하긴 저 정도는 되었기에 손죽도(巽竹島)’라는 이름을 낳았지 않았겠는가. 산죽 숲을 빠져나오면 선착장이 나오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오늘 트레킹은 총 3시간 15분이 걸렸다. 그러나 소요시간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변 경관에 따라 걷는 속도가 제멋대로였으니 말이다.



마을로 돌아와 골목길로 들어선다. 이대원장군의 사당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섬마을은 대개 거센 바닷바람을 막기 위한 돌담이 흔하다. 이곳 손대도 사람들도 역시 작은 돌들을 정성스럽게 쌓아 울타리를 만들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그 돌담 사이로 골목길이 이어진다. 그 돌담에 자연의 손길과 사람의 손길이 더해져 한 폭의 그림 같은 길들을 만들어 냈다. 오랜 세월 동안 바닷바람과 싸우며 이끼를 얹었고, 담쟁이넝쿨이 돌담을 보듬으면서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그냥 돌담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되어버린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돌담 울타리에다 따로 문을 내지 않은 집들도 많다. 몇 곳을 기웃거리니 집집마다 훌륭한 정원을 꾸며놓은 게 아닌가. 언제인지 정확하진 않지만, 이곳 주민들 사이에서 정원을 가꾸는 게 유행처럼 퍼졌다고 한다. 울창한 난대림의 숲처럼 가꿔놓았는가 하면 손바닥만 한 뜰에도 나무와 꽃을 심었다. 또 어떤 집은 분재를 내다놓기도 했다.



수령이 250년이나 되었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감싸고 있는 마을의 중앙에 이르자 자그마한 사당(祠堂)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이대원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렬사(忠烈祠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39)’이다. 이 사당은 1590(선조 23)에 최초로 건립되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퇴락과 수리를 거듭해 오다가 1983년 마을주민들의 정성으로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번엔 이대원장군의 사후(死後)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자. 임금은 패전과 군율 미준수 책임을 물어 심암을 조사할 것도 없이 의당 형구에 채워 본도로 이송한 뒤, 문에서 참수하여 여러 진에 조리를 돌려야 된다.’고 하여 서울 당고개에서 효수(梟首)시켰다. 우수사 원호와 다른 여러 장수들도 문책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겠지만 조정에서는 적의 재침에 대비하여 군기를 수리하고, 봉수나 망대의 일을 단속하는 등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했는데, 특히 전라도의 연해지역에 대한 방어책이 강화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방비가 튼튼한 전라도로 들어오지 않고 부산포로 들어온 이유란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사당 옆에는 효자비도 세워져 있다. 이곳 손죽도를 우국충절과 효를 덕목으로 살아온 마을이라 부른다고 해도 나무랄 이는 없겠다.



마을 안길을 한 바퀴 돌아 동네를 빠져나오니 아까 삼각산을 가면서 지나갔던 도로가 나온다. 그 길가에 초도초등학교 손죽분교가 자리 잡고 있다. 조그만 섬치고는 건물이 커다란 편이다. 하긴 1923년에 문을 열었다니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때는 분교(分校)3개나 거느렸을 정도로 번성을 누리던 이 학교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1985년에는 자신이 오히려 초도초등학교의 분교로 내려앉고 말았다. 현재는 거문초등학교의 분교라고 한다. 모교였던 초도초등학교가 폐교(廢校)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란다. 아무튼 각진 돌을 쌓아 지은 이 학교의 건물은 기억해둘만한 내력을 갖고 있단다. 마을 주민들이 건너편 산자락에서 바위를 깨서 손수 지게로 져 날라서 지어냈다는 것이다. 운동장에는 책 읽는 소녀상과 횃불 든 소년상이 나란히 서 있다. 운동장 한쪽에도 유관순 의사와 정재수 효자상, 이승복 어린이의 낡은 동상이 푸른 바다를 보고 있다.



에필로그(epilogue), 손대도는 가고 싶은 섬에 선정(2017)된바 있다. 전남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인데, 존재 자체가 친환경적인 섬을 개발하되, 토목사업을 통한 개발행위를 하지 않고 공정여행·착한여행·생태여행지로 조성하는 게 목적이란다. 주민들이 섬을 떠나지 않고, 고향을 떠나 도시 노동자로 떠도는 청년들이 돌아와 '살고 싶은 섬'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2015년 여섯 개의 섬(여수 낭도, 강진 가우도, 고흥 연홍도, 완도 소안도, 신안 반월박지도, 진도 관매도)이 최초로 선정된 이래, 2016년 장도와 생일도가 합류하였고, 2017년 기점·소악도와 함께 손죽도가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섬 전체에서 인위적인 색체를 지우려 한 노력이 엿보였다.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수천 년 동안 바람과 파도에 부대끼며 스스로 멸할 것은 멸하고 겨우 살아남은 고유한 생태계를 개발이라는 침입자로부터 막아주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주민들이 겪어야할 불편 또한 무시할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주민들이 떠나지 않고, 오히려 고향을 떠났던 젊은이들이 돌아오게 만드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섬사업이 성공하길 비는 것은 나만의 아집(我執)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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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8.04.16 15:23

    첫댓글 멋진 사진 후기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 18.04.16 22:49

    좋은 곳 안내해 주신 옥타브대장님 덕분이지요.
    내가 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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