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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の鬼神』 |
調査資料 第二十五輯 |
1929 |
『朝鮮の風水』 |
調査資料 第三十一輯 |
1931 | |
『朝鮮の巫覡』 |
調査資料 第三十六輯 |
1932 | |
『朝鮮の占卜と豫言』 |
調査資料 第三十七輯 |
1933 | |
『朝鮮の類似宗敎』 |
調査資料 第四十二輯 |
1935 | |
『部落祭』 |
調査資料 第四十四輯 |
1937 | |
『釋奠·祈雨·安宅』 |
調査資料 第四十五輯 |
1938 | |
『朝鮮の鄕土娛樂』 |
調査資料 第四十七輯 |
1941 |
무라야마 사진자료는 그러니까 1929년부터 그가 일본으로 돌아갔던 1941년까지13년동안 8권의 조선민속 사진집에 들어 있다. 총 5,371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사집집들에서 그는 각 사진에 설명까지 달아 그 촬영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조사자료라는 성격상, 각급관공서(各級官公署)의 관리를 동원하여 조사시킨 내용이 많은 듯 싶은 점, 또 무라야마 자신은 '사람에 대하여 언제나 온화하게 접하였다'고 하였지만(앞의 인용, 아사쿠라씨가 들어 적은 글), 발표된 글을 통해서 보면 조선 민중과의 거리는 그다지 가까운 것이 아니었다.”
ただし, 總督府の調査資料という性格上, 各級官公署の役人を動員して調査させた內容が多いとみられること, また, 村山自身は「人に對して常におだやかに接し」たというものの(前引, 朝倉氏の聞書), 發表された文を通してみると, その朝鮮民衆との距離は殘念ながらさほど密接なものではなかった. *노무라 신이치(野村伸一)의 <무라야마 치준(村山智順) 所藏寫眞選> http://www.flet.keio.ac.jp/~shnomura/mura/index_kr.htm
우리민족에게서 탈문화는 '조상귀신'과 깊이 관련이 있다. 그러나 무라야마의 첫 저서로 꼽히는 『朝鮮の鬼神』의 머릿말에서 무라야마는 조선의 귀신신앙에 대하여 비판적인 눈으로 쓰고 있다.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조선의 민중은 인심좋게 쓰고 그 관리들은 부패한 것으로 비판한 것과 유사한 면을 무라야마의 '조선전통 정신문화 비판'에서 볼 수 있다.
“조선의 민중은 인생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의지하면서 요행(僥倖)을 기원하여 왔으며, 그것이 심해져 오늘날에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견해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조선전토에 걸쳐 민중의 행위나 습속을 꽤 상세하게 기술하면서도, 끝끝내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에 그치고 있다는 감이 든다.”
朝鮮の民衆は人生を積極的に切り開くのではなく, 「カミ賴み」から出發して, 僥倖を願うもので, それが高じて今にいたっているのだという見方である. そのためであろうか, 朝鮮全土にわたってかなり詳細な民衆の行爲, 習俗を記述しながらも, ついに上から俯瞰しただけに終わったかのような感も殘る. *노무라 신이치(野村伸一)의 앞선 인용 자료에서
무라야마는 1941년 50세 때 일본에 돌아가 조선총독부 일본 지부와 같은 조선장학회(朝鮮奬學會)에서 근무하였다는 것에서도 관리들을 동원했던 것과 함께 그의 사진촬영 활동은 조선총독부의 명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45년 그의 실가(實家)인 니이가타(新潟)의 절에 돌아가서 주지가 되었다가 13년 후에 그는 도쿄로 가서 77세 때인 1868년에 죽을 때까지 조선과 관계된 아무런 추후 발표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진활동은 이미 조선에 있을 때 조선총독부 관할하에 완료된 임무로만 실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라야마 치준이 68세때의 모습.)
「自然と文化」第66号(村山智順が見た朝鮮民俗)
http://nippon.zaidan.info/seikabutsu/2000/00852/contents/065.htm
무라야마는 그 자신이 찍은 사진들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찍은 사진들도 수집했다는 것은 그의 ‘정보활동’의 목적에 맞았기 때문이다. 8권의 사진들 외에도 1945년 이후에에도 무라야마는 우리 민족의 민속관련3백 수십 장의 사진들이 더 있었으며 모두 6권의 앨범에 그 사이즈들도 A5 사이즈의 큰 것에서 증명사진의 작은 사진들까지 다양한 흑백사진들을 가지고 있었다.
무라야마의 사진들은 대개가 1920년대 또는 193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때는 조선총독부가 1910년대에 이미 조선 땅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농지수탈을 강행한 결과 전통 자작농 사회가 말살되고 지주농이 조장되어 농촌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1910年代の土地調査事業という名の農地收奪により, 自作農が廣範圍に崩壞し, 農村の葛藤が深刻化していく時代であった.
무라야마 사진은 심지어 조선사람의 발바닥 사진 등을 찍은 경우 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발바닥에는 사람 이름이 적힌 것을 보면 그것이 무속적인 의미를 가졌는지 아니면 문화인류학적인 관심에서 촬영한 것인지 그는 설명을 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야마의 사진자료는 광복이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 당시의 사회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남긴 경우가 되었다. 특히 필자가 무라야마 사진을 조사하던 중에 그가 남긴 우리 민족의 전통 탈 가운데 특이하게도 거대한 형태를 지닌 방상씨(方相氏)탈 사진은 다른데서 볼 수 없는 사진자료였다.
무라야마의 사진들은 한민족의 민속자료로서 희귀사진으로 가치가 있다. 그 동기는 1897년 영국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인이 쓴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 (The Korea and Her Neighbours)>과 같은 첩보용으로서 오늘날 일본인들은 조선사회의 미신 문화를 조롱하는듯한 사진소개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대단히 귀중한 민족문화 정신의 자료로 재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 필자가 그 중요한 사진들만을 선택하여 그 의미를 살펴두고자 한다. 필자가 일리노이 주립대(어바나 삼페인) 대학원에 유학을 와서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문화인류학을 함께 공부했을 때 19세기이래 식민지 팽창을 획책한 제국주의자들은 문화인류학과 고고학을 그들의 제국주의적 팽창수단으로 삼았다는 여러 증거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일본의 강제 한일병합 전후의 국제사회에서 한국문화를 '정탐한' 여러 자료들에 대한 그 비평적 시각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문서과 소풍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무라야마 준이치.
무라야마는 조선총독부의 명으로 활동한 것이다.)
아래 사진들은 무라야마 사진과 그의 사진 설명을 바탕으로 노무라 신이치(野村伸一)가 소개한 것 중에 일부는 제외하고 선별한 사진들과 그 설명들에 필자가 추가 설명을 붙이기도 했다 (괄호 안은 필자의 설명이며, 칼러사진은 필자가 참고자료로 첨부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탈 사진들과 솟대 사진 그리고 역병을 치료하기 위한 다양한 무속적 방역 미신 등은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1. 1920-30년대 활발했던 전통 탈
*장례에 쓰이던 방상시탈. 方相氏 탈. 葬禮に使われた方相氏
(방상시탈은 방상씨(方相氏)탈이라고도 하는데 네모진 얼굴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필자는 네모진 머리를 가진 향유고래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거대한 방상시탈 장례행렬. 方相氏と葬列 柩の前に立つ方相氏.
(상여 앞에 서는 방상시탈의 위치를 보여준다.)
*(1776년 영조대왕의 장례식을 그린 그림에서 방상씨 탈의 모습.)
*(중남미 인디안 탈. 위스칸신주 벨로이트 대학 로간 박물관에서 필자 촬영.
1776년 영조 국장 때와 근대 조선왕실 장례식 때 사용한 거대한 방상시 탈을 그대로 닮아 있다. )
필자의 관련글: '코리안 귀신고래'를 명명했던 로이 앤드류스 생가를 찾아서
*(순종황제의 장례식 때 사용된 방상시탈)
*흥덕사지에서 출토된 망새. 국립청주박물관. 귀면와란 결국 '고래얼굴' 또는 고래를 조상으로 여긴
'고래숭배'에 연관한 무속적인 주인공의 얼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처용무를 추고 있는 장면을 그린 김홍도(1745 ~ 1806) <부벽루 연회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의 김홍도 그림의 확대 부분에서 처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아래 그림)
*위 그림의 확대사진. 처용탈의 긴 턱이 보인다.
*봉산탈춤. 황해도 사리원에서 행했던 탈춤(1). 팔먹중의 얼굴. 鳳山假面戱(1) 黃海道沙里院でおこなった假面戱. 八墨僧の顔.
(192-30년대 한국의 봉산탈춤의 탈 모양은 오늘날 남아 있는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화려한 탈 못지않게 대단한 장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리원의 봉산탈춤(2) 鳳山假面戱(2)
*사리원의 봉산탈춤(3) 鳳山假面戱(3)
*양주별산대놀이 楊州別山臺戱
*제주도의 가면희(假面戱). 1914년 6월 6일, 제주읍.
이 사진은 당시까지 제주도에서 행해져 왔던 입춘(立春)굿인 세경놀이를 6월달에 재현한 것이다. 아마 조선종독부에 의해서 개최된 것이라 추측된다. 이 행사에는 서울에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참가한 것으로 보이고, 비슷한 사진들을 다른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심우성씨 주관의 연구지『서난당』 창간호(1971)에는 이것을 포함하여 일곱장의 사진들도 실려있다.
(위의 설명은 노무라의 설명이다. 탈춤은 제의적으로 진행된 '굿'으로 대단히 활발하게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오른 쪽 탈을 쓰지 않은 이는 사당(社堂), 왼쪽은 노장(老長)이라고 생각 된다. 사진 뒷면에 남아 있는 무라야마의 메모에 의하면 「老丈及少巫(노장 및 소무)」. 그러나 노장의 과장에서 소무는 탈을 쓰는게 보통이다. 이 직전에 사당(社堂)과 거사(居士)가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대로 사당이 남은 것일지도 모른다. (노무라의 사진 설명)
무라야마의 메모에 의하면 봉산(鳳山)의 「四上佐舞」이다. 흰 僧衣인 장삼(長衫)을 입고 고깔이라는 갓을 쓴다.
(고깔과 탈을 함께 사용한 봉산탈춤)
경상도 하회 탈. 慶尙道河回の假面
(모두 9개의 탈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사진에서도 뒷줄의 한 명을 포함하여 9개의 탈이 등장한다)
서낭당 앞에 선 탈꾼(광대)들. 경상도 하회. 慶尙道河回の假面 ソナン堂の前に立ったクワンデたち.
남사당의 탈(꾼). 男寺黨(ナムサダン)の假面戱輩
(앞줄 오른쪽의 별신굿 산주를 제외하면 탈을 쓴 사람은 9명이다)
*하회 별신굿을 통괄한 산주.河回の山主 河回別神クッを統括した山主.
(위쪽 사진의 앞줄 오른쪽 인물로 보인다)
함경남도북청의 사자. 咸鏡南道北靑の獅子
(필자가 앞선 글에서 논했지만, 북청사자놀이는 신라시대의 삽살사자견 문화의 잔재라 할 수 있다)
2. 1920-30년대 한국의 전통 솟대와 장승
시장을 수호하는 솟대. 경남 군북. ソッテ(1). 市場を守るソッテ. 慶尙南道郡北.
(솟대가 시장을 수호하는 기능으로 사용된 것은 보부상들이 먼 타향길을 걷기 때문에 적용시킨 솟대로 보인다)
솟대(2). ソッテ(2).
(솟대의 날개 부분이 분실된 것으로 보인다)
솟대(3). ソッテ(3).
(마을 수호신 역할의 솟대로 보인다)
대전 시내에 있던 솟대. 黃昏のソッテ. 大田市內にあったソッテ.
장승(1). 長(1)
(장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한자로 '상원당장군'이라고 표현한 것이 보인다. 임진왜란 등의 명나라 장수 등의 구원군의 영향으로 보인다)
장승(2). 천하대장군. 長(2). 天下大將軍.
(한국 장승의 대표적인 사진인 이 사진이 무라야마 사진자료에서 나왔다. 장승용 나무가 굽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고래나 용 토템에 연결된 장승의 전통을 추측할 수 있겠다)
장승(3). 長(3)
(장승의 모습이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토템 얼굴과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원당장군'이 여기에서도 보인다)
*(무라야마 치준의 자료에 나오는 장승 부분)
「自然と文化」第66号(村山智順が見た朝鮮民俗)
장승에는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 외에도, 상원주장군, 하원당장군, 양계대장군, 음계대장군, 사천대왕, 사지대왕, 동방청제축귀대장군,동방적제축귀대장군, 서방백제축귀대장군. 북방흑제축귀대장군 등의 오방장군을 새겼다는 내용을 위의 자료에서 보여주고 있다.
장승(4). 長(4)
3. 1920-30년대 한국 전통 민속
여자들의 활 쓰기. 부유층의 놀이. 女性の弓のあそび 富裕層のあそび
(한국의 여인들은 시집을 가도 성을 썼고 특히 귀족적인 활을 쏘았다는 것은 특이한 '동이족'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무동. 舞童
(무동은 앞선 글에서 논했지만, 놀이문화이기 이전에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전통 토템폴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동래 줄 다리기. (고싸움) 東萊の綱引き
(고싸움은 앞선 글에서 고래잡이들의 '고래싸움'에서 작살잡이를 태우고 고래를 잡는 마을 사람들의 훈련으로 필자는 해석했다)
*정월에 안동에서 했던 차전(車戰). 正月慶尙道安東の車戰
(차전놀이와 고싸움 놀이는 우리 민족 고래싸움 전통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필자의 앞선 글에서 논했다)
정월에 복조리를 파는 사람. 正月の福そう(ざる)賣り
(복조리는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드림캣쳐(Dream Catcher)와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을 앞선 글에서 논했다)
대구의 사장 풍경. 大邱の市場風景
(흰 옷과 모자의 종류를 볼 수 있다)
일륜차. 종이품(從二品) 이상이 탔다. 一輪車. 從二品以上の者が乘った.
설날 세배. 元旦の歲拜
(설날의 세배 외에 차례상은 19세기 말 일본의 영향으로 구정을 폐지하려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조상들에게 맹새하는 의미로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여 전국화되어 오늘에 이른다. 필자의 앞선 글 참조)
* 한옥. 朝鮮家屋
(다양한 s자 형태 등의 초가지붕의 연결을 볼 수 있다).
설빔 옷 正月の晴れ着
(앞줄의 남자 아이들도 색동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식장의 부모 모습.
(2층 정자관을 쓴 것을 볼 수 있다. 요즈음 사극에서 자주 3층 정자관이 보이는데 2층이 본래 유행했다)
단오날의 그네 뛰기. 端午のぶらんこ
(쌍그네를 타고 있다. 그네의 두 버팀목은 양쪽의 만국기 줄로 고정시켜놓고 있다)
장흥의 강강술래. カンガンスッレ 全羅南道長興のカンガンスッレ.
(여성들만이 나와서 달을 보고 강강수월래를 한 것은 모계신화적인 전통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져 왔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다)
양중. クッの樂士
(한국 전통문화에도 '밴드'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홍도 그림의 '밴드'는 오늘날 에콰도르 전통 악사들의 모양과 유사하다)
4. 역병에 대한 한국 전통 액땜 주술
아이의 독감을 고치는 목걸이. 가는 새끼를 스물한 개 꼬아서 만든다. 평안남도.
子の流感を治す首飾り 細い紐を21本よって作る. 平安南道.
(가는 새끼를 21개 꼬았다는 것은 매듬새를 말한다. 21도모(度母)의 수호를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목걸이는 장식용이기 이전에 수호신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대부들의 갓에 단 관자 매듭도 이와 같은 기능을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한국전통 갓이나 사령들의 관줄에도 매듭이 있는 관자 끈이 있다.
본래는 무속적인 '21매듭'의 의미를 지녔을 것이다.
새를 이용해서 점을 친다. 鳥占い
(필자의 글 <문화비평: 월드컵 '문어 점쟁이'와 알렉트로먼시(Alectromancy)>에서 동물 점에 대하여 다룬 바 있다)
바가지를 판자 위에 놓고 문질러서 그 소리로 콜레라 귀신을 쫓아낸다. 전남. 瓢簞によるコレラよけ.
瓢簞をこすったときの音でコレラの鬼神を追いやる. 全羅南道.
(바가지 신화는 신라시조 신화에 많이 등장할 정도로 오랜 도깨비 무속에 남아 있다. 흥부전에서 박속에서 도깨비가 나와 놀부를 혼내는 것 또한 이러한 바가지 무속의 하나이다. '바가지를 긁는다'는 말에는 남편의 나쁜 습관이 귀신들린 것으로 보고 그 귀신을 쫓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전북 무주의 영등 할망 제단. 나무 가지 위에 바가지를 놓는다. 茂朱のヨンドゥン婆さん迎え.
全羅北道茂朱のヨンドゥン婆さん迎えの祭壇. 木の股の上に壺を置く.
(영등 할멈 제단이 나무 깰때기 위에 바가지를 둔다는 것은 새벽별이 비치는 정화수 바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액병신을 막아내는 채. 惡鬼よけのふるい
(아메리카 인디안들의 드림캣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한국 전통 채걸이)
액운을 짊어진 제웅. 厄拂いの人形(ひとがた). 厄運を負わされたチェウン.
(나쁜 귀신을 집안에서 몰아내는 제웅 굿은 오랜 전통 '짚 도깨비' 굿의 하나이다)
길가에 버려진 제웅(1). 道端に捨て置かれたチェウン(1)
(짚으로 만든 인형을 사용한 제웅은 역병을 대신에 가지고 간다고 믿었다)
길가에 버려진 제웅(1). 道端に捨て置かれたチェウン(2)
(필자의 어린 시절 이와같은 짚도깨비 제웅굿을 한 뒤에 개울가에 버려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도 옥수수 잎으로 만든 '제웅 인형'이 있다)
옷을 입힌 제웅. 병을 고치기를 위해서 이 제웅을 길가 또는 강에 버린다. 황해도. 衣を着せた人形(ひとがた).
病氣を治すためにこの人形を道路や川に棄てる. 黃海道.
(옷을 입히는 경우는 귀족 집안에서 행했을 것이다)
집안을 지키는 별신이 체재하는 것을 알리는 기. 「戶口別星公使令旗」라고 쓰여져 있다. 痘瘡神の滯在を知らせる旗. 每日痘瘡神をもてなす. 「戶口別星公使令旗」と書いてある.
(장례식 때 지붕에서 초혼을 하는 의식 또한 이러한 지붕 위의 별신 모시기와 연관이 되어 있다)
눈에 들어 온 액기를 쫓아낸다. 眼病拂い. 目に入った厄鬼を追いやる.
(사극에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다)
눈병을 앓았을 때 三身一目魚의 그림을 그리고 눈에 바늘을 찌르면 낫는다고 믿었다.
「汝自三身一目魚/一目有難況又針/ 汝今拔去吾目針/吾亦拔去汝目針」 라고 쓰여져 있다.
眼病治療のまじない. 眼病にかかったときは 圖のようなものを書いて目に針を刺すとよくなる.
「汝自三身一目魚/一目有難況又針/ 汝今拔去吾目針/吾亦拔去汝目針」 と書いてある.
(위의 설명에 보면 汝自三身一目魚는 원문에서 一目三身魚의 잘못된 표기인데 물고기 세 마리를 그려넣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물고기와 눈이 닮은 데서 비롯된 무속이었을 것이다.)
*( 一目三身魚 부적의 1906년경의 사진. 참고로 첨부해 둔다)
위의 <일복삼신어> 부적의 내용의 뜻은 다음과 같이 해설할 수 있다. 번역은 필자가 한 것이다.
여본일목삼신어 (汝本一目三身魚)
일목유난상가실 (一目猶難尙可失)
여욕발거아안정 (汝欲拔去我眼精)
아역발거여안정 (我亦拔去汝眼精)
너는 본래 눈 하나에 몸이 세 개인 물고기
한 개의 눈뿐이라 오히려 놓치기는 어려우니
너는 내 눈을 빼어 가기를 바랄테고
나 역시 너의 눈을 빼어 가리라.
이러한 해석은 눈병을 고치는 무속이면서도 어쩌면 동아시아의 한반도의 위기에 대한 고난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의미는 없었을까?
칼을 찔러서 말라리아를 없앤다. 강원도. 刀を差してマラリヤ退散. 江原道.
(액운을 물리치기 위한 무속에서 모형이나 그림을 사용한 풍습)
쇠머리, 마늘로 장티푸스를 막는다. 경기도. 腸チフスを防ぐ牛の頭とにんにく. 京畿道.
(전통 무속에서 쇠머리, 돼지머리를 사용한 것은 선사시대 고래잡이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래를 유인하기 위하여
사슴고리를 바다에 던져 넣었는데 때로는 쇠머리를 사용하기도 했다. 필자의 앞선 글 참조)
짚신으로 역병신을 막는다. わらじによる惡疫よけ.
마늘의 강렬한 냄새로 전염병을 예방한다. にんにくによる傳染病豫防. にんにくの强い臭いで傳染病を豫防する.
(단군신화의 마늘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도 마늘종류의 풀이 난 곳은 신성시 여겼다)
말라리아의 치료. 절구공이를 짚으로 싸고 새끼로 매고 사람이 자주 왕행하는 거리에 두면 효과가 있다고 함.
マラリアを治す杵の藁包み. 人の頻繁に往來する道に 杵の藁包みを捨てると效果があるという.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은 이와 같은 절구공이(홍두깨) 무속에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狗"자와 "虎"자를 팔에 쓰면 림파선의 종기에 효과가 있다고 함. "ぐりぐり"の治療
狗の字と虎の字を腕に記すとリンパ腺の腫れ物に 效果があるという.
(문신의 무속성을 볼 수 있다)
自然と文化」第66号(村山智順が見た朝鮮民俗).
(노무라의 설명에서 그 뜻이 불명하다고 했지만, 다른 자료에 의하면 전라남도에서 말라리아를 치유하기 위한 주술로 환자의 이름을 발바닥에 썼다고 한다. 환자가 남자면 왼쪽 발바닥에 여자면 오른쪽 발바닥에 이름을 썼다고 한다)
*(평안북도에서 임신부가 난산일 때 그 임신부의 발에 風자를 쓰면 순산한다고 믿었다.
남편의 발에는 天을 써서 순산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自然と文化」第66号(村山智順が見た朝鮮民俗).http://nippon.zaidan.info/seikabutsu/2000/00852/contents/044.htm
환자가 있는 방 앞에 걸린 맥주병. 황달을 치료한다. ビ-ル甁による黃疸治療.
患者のいる部屋の前にビ-ル甁を掛けると 黃疸がよくなるという.
(맥주는 오늘날도 담석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미국인들의 민간치료법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마마에 의한 죽음은 하늘에 돌려야 한다고 해서 주검을 나무위에 안치했다. 樹上の弔い
天然痘による死は天に返さなければ ならないといって屍を樹上に安置した.
(김알지 신화에서 나무에 걸린 금궤의 의미는 무속적인 하늘과 연관한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환자의 옷 갓등을 나무에 걸면 금방 병이 나아진다. 평남. 홍역(마진)은 물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니는 것에 유래한다.
麻疹治療. 患者の服や帽子などを木に掛けると すぐによくなるという.平安南道.
はしかは水にはまって死んだ者の靈魂が 浮遊することに由來するという.
(물에 빠진 사람의 의관이 나무에 걸리는 것에서 연유했을 것이다)
병으로 죽은 닭을 나무에 걸리면 짐승의 병을 예방할 수 있다. 평남. 鷄で獸の疫病をふせぐ.
病死した鷄を木に掛けておくと 獸の病氣が豫防できる. 平安南道.
(위쪽의 사람의 의관을 나무에 거는 것과 서로 같은 의미로 동물의 경우에 죽은 닭을 사용했을 것이다.)
백일해는 환자의 수인(손바닥 도장)을 붙여 놓으면 완쾌된다. 전남. 手印による百日咳治療 全羅南道.
(열손가락과 백일을 연결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활과 화살로 역병신을 막는다. 평남. 弓矢による疫病よけ 平安南道
적리를 고치는 방법. 그릇 위에 젓가락을 십자형으로 놓고 안에 물을 붓는다. 이 물을 마시면 치유된다고 함.
赤痢よけ. 器の上に箸を十文字に置きなかに水を注ぐ. この水を飮むと治るという. 慶尙北道.
빗자루로 역병신을 막는다. ほうきによる疫病よけ
(빗자루는 쓸어버린다는 의미에서 동서양이 모두 의미를 부여했다. 도깨비와 싸우다 빗자루 몽댕이가 아침에 남았다는 것도
이러한 빗자루 무속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서양의 스포츠 응원에도 빗자루가 등장하는 것은 서양의 오랜 빗자루 마녀 무속
등에서 유래하고 있다)
"宋進士宅入納"이라고 쓴 것을 거리에 버리면 병이 낫는다고 함. 疫病送りの書狀.
"宋進士宅入納"と書いたものを道に棄てると 疫病がよくなるという.
(무속의 굿에서 길에 버리는 것은 멀리 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길에 버려진 굿의 잔재를 건드리는 사람에게 그 병이 옮겨간다고 믿었다)
병의 원인이 묘지에 있다고 해서 묘를 개장한다. 治療のための墓の手入れ
(풍수와 조상귀신 숭배의 문화는 전통 무속 곳곳에 남아 있다)
고추의 적색으로 병을 예방한다. 唐辛子による病氣よけ
(붉은 색은 피를 의미하여 많은 무속에서 붉은 색으로 병이나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붉은 내의를 입거나 북은 고추를 지붕에 말리는 것도 무속적인 부분이 첨가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마 예방을 워한 나무(1). 天然痘よけ(1). ムラの入口に立てられた,天然痘除けの木.
(액운의 대상을 상징하는 물건을 나무에 걸거나 매두는 것은 앞선 사진들에서도 볼 수 있었다.
밤새 도깨비와 싸우다가 아침에 보니 빗자루 몽댕이가 나무에 매여 있더라는 이야기는 분명
이러한 주술적인 지푸라기 도깨비를 헛보고 씨름한 결과로 풀이된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마마 예방을 워한 나무(2). 天然痘よけ(2). ムラの入口に立てられた,天然痘除けの木.
여자 아이들이 하는 각시 놀음 인형. 閣氏あそびの人形.
女の子たちのやる閣氏あそびの人形.
5. 한국전통 무속과 굿
*무라야마 치준의 자료에 나오는 무신도.
済州島旧川外堂の巫神図]済州大学校博物館蔵
「自然と文化」第66号(村山智順が見た朝鮮民俗)
*(무라야마 치준의 자료에 나오는 무신도)
「自然と文化」第66号(村山智順が見た朝鮮民俗)
*(무라야마 치준의 자료에 나오는 무신도)
「自然と文化」第66号(村山智順が見た朝鮮民俗)
*(무라야마 치준의 자료에 나오는 무신도)
「自然と文化」第66号(村山智順が見た朝鮮民俗)
제주도의 신방. 濟州島の神房.
제주도 신방에 의한 굿. 濟州島のクッ. 濟州島の神房によるクッ.
(신이 거하는 신방이란 무당의 본부이기도 한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동해안에는 이러한 신방이 사찰이 된 경우가 있다)
제주도의 개인굿. 濟州島の個人クッ.
평안남도의 무당. 平安南道のム-ダン
경주 무당들의 기우제. 강가에서 제단을 만들고 또 용의 그림, 배등을 준비해서 춤을 추었다.
雨乞い. 慶州の巫女たちによる雨乞い. 川に祭壇を設け, 龍の繪や船などを準備し踊りを踊った.
(용과 바다의 배라는 의미는 처용무가 그렇듯이 대단히 중요한 '고래잡이 무속'에서 유래했다고 생각된다. )
나주의 신청(神廳). 羅州の神廳
(사당의 하나)
강릉의 별신굿(1). 江原道江陵の別神クッ.
애기를 기원하는 바위(2).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부암리. 子授けの岩(2). 京畿道高陽郡恩平面付巖里.
(바위에서 득남 기원을 한 것은 바위 암호에서 여신이 거한다는 오랜 전통의 무속적 기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중에 이러한 여신바위는 보살바위로 변이된다)
호랑이를 탄 산신(1). 虎に乘る山神(1).
(호랑이를 탄 장수 또는 호랑이를 탄 신선은 호랑이=신선(장수)의 의미를 지닌 신화적인 배경을 가진다)
무당(3). ム-ダン(3)
(고깔은 오랜 역사를 가지는 무속의 중요한 코드이다. 고깔은 고래머리를 닮아 있다는 것은 신라 배에 있는 토우둘에서 보여준다)
하회 마을의 삼신(1). 河回の三神(1).
(수목신앙의 오랜 전통을 몰 수 있다)
하회 마을의 삼신(2). 河回の三神(2).
(신라 때의 나무신앙인 수신신앙을 바탕한 굿은 국가적인 무당들이 치뤄냈다)
덕물산 위에 있는 최영 장군 부부상(1). 德物山上の崔塋將軍夫婦(1). 開城.
(못다한 한이 있는 장수들은 무속의 우상적인 장수가 되었다)
덕물산 위에 있는 최영 장군 부인당. 개성. 開城德物山上の夫人堂.
(무속에서 모계적인 힘을 믿는 증거의 하나)
무당이 모시는 귀신조각. ム-ダンの勸請する鬼神彫刻
서낭당과 바친 것. ソナン堂と供物.
국사당. 서울 남산. 國師堂 ソウル南山.
고깔의 모양이 山形 보관을 쓰고 있다.
무라야마는 조선에 들어와서 우리 민족의 전통 민속과 그 정신세계를 탐구하기 위하여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한민족의 전통 정신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 사진들을 소개한 노무라 신이치(野村伸一) 또한 무라야마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무라야마 치준(村山 智順)인 남긴 것은 그러한 마을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던 사진들이었으나, 또 한 걸음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면 지금은 사라져 가고 있는 민속세계의 여러 면모가 더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村山智順 所藏寫眞選』은 그러한 시각으로 다시 보아야 할 것이다
村山の手元に殘ったものは, そうしたムラ人の生のなかにはいりかけてとどまった寫眞ではあるが, あと少しだけ人びとの胸のうちに踏みこむならば, 今は失せようとしている民俗世界の諸相がはっきりとみえてくるものとおもわれる. 「村山智順所藏寫眞選」はそうした思いでみなおされるべきものとおもわれる.
일본인들은 서울 남산의 국사당을 허물고 그들의 신사를 세워 강제로 참배를 시켰다. 광복후 남산 신사는 불타버리고 일본인들의 종교는 한반도의 어디에도 남아 있지 못하게 된 것은 침략자로서 일본인들의 문화가 우리 민족의 정신에 아무런 감명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10/25/10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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