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관념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반면, 뒤를 잇는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관점을 택한다. 관념이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관념을 만들어낸다는 입장이다. 이데올로기, 즉 우리가 어떤 것을 믿는 방식은,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경제적인 요인으로 형성이 된다고 한 마르크스. 신이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만들었다고 말한 마르크스. 그는 인간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느냐"라는 행동에 대한 질문으로 개별성,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보편적 인간성이라는 것은 없고, 우리는 ‘노동'을 함으로써, 타인과의 어떤 관계에 위치함으로써 (부르주아지를 위해 일하는 노동자, 혹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공장소유주) ‘우리'가 된다.
니체는 언어에 집중한다.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고, 언어의 숨겨진 ‘정해진 규칙'들을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의식화하는데, 규칙과 규범이 정해진 언어에는 제약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니체는, 진리의 왜곡은 언어가 초래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의식에 집중한다. “나의 의식은 이 구조적인 무지에 의해 결정적인 방법으로 사고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있"다 (p.38,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타츠루).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전부 의식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는 있다.
추가로 다윈은 자연과학자이지만, 사회적/생물적으로 결정된 (socio- biologically determined) 의식에 집중한다. 이는 나중 20세기 이후 뇌과학 (cognitive science)의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는 어떤 뇌를 가지도록 진화해왔고, 그 뇌의 구조와 기능, 작용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같이 우리를 억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이 왜 ‘School of Suspicion’으로 불리는지 알겠는가? 개별적인 인간보다 어떠한 큰 구조 속에 위치한 관계망 속 인간에 집중하기 시작한 시기의 태초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을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 (통시적, 공시적으로도) 위치해있는가? 그것이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그들은 던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00년대 문학이론은 번창했다. 이는 텍스트의 '의미'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다는 핵심적인 아이디어의 시작이었다. 텍스트 속 깊이 있는 의미는 발굴해내야 찾을 수 있다. 그저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을 의심하고, 그 속의 무의식, 억압의 매커니즘이 무엇이 있는지 고찰해보자. 이것이 현대 문학 이론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문학 텍스트 속 숨겨진 진리에 다다를 수 있게 노력하는 것.
다음번에는 소쉬르의 언어학적 구조주의와 다른 구조주의 학자들과 문학이론과의 연관성을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참고:
Introduction to Theory of Literature | Open Yale Courses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우치다 타츠루
[출처] 문학이론과 구조주의 정리|작성자 정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