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쪽 깊은 향기
남녘땅엔 지금쯤 탱자꽃이 한창이리라. 요즘은 탱자나무가 흔치 않지만, 예전엔 집터를 빙 둘러 탱자나무를 심었었다. 늦은 봄 이맘때쯤 하얗게 피는 다섯 쪽 꽃은 향기가 참 좋은 데다 바람을 타고 건넛마을까지 전달되곤 했었다. 탱자나무는 울타리용으로 그만이었다. 봄기운이 사라질 무렵 여린 새싹과 함께 꽃을 피워 그 향기로 코끝을 간지럽히고 꽃이 지면 그 자리에 초록색 열매를 맺기 시작, 가을까지 매달렸다가 노란색 탱자로 변신하여 귀한 약재로 쓰인다. 예전 학질(말라리아)을 다스리는 데에 특효약이었다.
탱자 울타리는 울 밖을 살피기 편해 마당의 앞쪽에만 심었다. 가시가 날카로워 외부인의 침범이 어렵다는 점에서 마당 넓은 집에서는 즐겨 심었다. 다만 서울 등 북쪽 지역에서는 잘 자라지 않는다.
탱자에는 재밌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춘추전국시대 후기의 이야기다. 초나라의 영왕(靈王)은 패역무도한 점에서 따를만한 군주가 없는 폭군이었다. 영왕은 제(齊)나라의 재상 안영(晏嬰)이 사신단을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자, 안영의 키가 보잘것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궁의 정문 옆에 작은 문을 만들어 놓고 안영을 기다렸다.
안영은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이 그의 마부가 되고 싶다고까지 한 명재상이다. 그의 키는 '여섯 자에 미치지 못한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1m 35cm 정도의 작은 몸집이었던 듯하다. 초나라에 도착한 안영이 영왕을 뵙고자 궁정에 들어가려는데 가운데 큰 문이 열리지 않고 옆의 작은 문이 열렸다. 문 안에 있던 영왕이 큰 소리로 "그대가 들어올 문은 개문이다. 기어서 들어오라"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가 살벌해진 가운데 안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개 나라에 사자로 온 사람은 개문으로 들어가지만 나는 초나라에 온 사자이므로 개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역시 큰 소리로 받아쳤다. 이걸 기지라고 한다. 억지로 들어오라고 하면 초나라는 개 나라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영왕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대문을 열어줘라”라고 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안영을 괴롭힐 또 다른 흉계를 꾸몄다.
남귤북지(南橘北枳) 의 고사성어 유래
다음날 영왕은 환영연을 베풀고는 그 자리에 죄수 한 사람을 끌어다 놓고 “무슨 죄를 지었으며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묻는다. 죄수가 각본대로 “제나라 태생이며 절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영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안영을 향해 “제나라 사람은 원래 도둑질을 잘하오?”라며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이에 안영은 영왕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명쾌하게 대꾸한다.
“귤나무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이 나무가 회수(淮水, 중국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강) 남쪽에서 자라면 귤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회수 북쪽에서 자라면 곧 탱자나무가 됩니다. 잎은 비슷하지만, 열매는 크기와 맛이 다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말씀드리면 물과 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저 사람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라났을 때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는데 초나라에 들어와서 도둑질을 배운 것입니다. 초나라의 물과 흙은 백성에게 도둑질을 잘하게 하는 점이 있지 않습니까?”
영왕은 더 대응하기를 단념하고 흔쾌하게 웃으며 “성인과 더불어 노닥거리고 있을 일이 아니군. 내가 도리어 창피를 당했다”라고 실토한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는 남귤북지(南橘北枳)의 고사성어는 바로 이 일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듯 식물 역시 탱자처럼 환경의 지배를 받으며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며 꽃을 피운다. 다만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며 극복하고 발전하는 것이 식물과 다르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탱자나무 한 그루를 심어야겠다.
첫댓글 탱자나무에 얽힌 뒷얘기가 참 재밌습니다.
제가 어릴적 자랐던 집에도 탱자나무가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해마다 하얗게
피는 꽃이 하도 여리고 정겨워 제 어린 마음을 훔치곤 했습니다.
아쉽게도 꽃잎이 몇개였는지 세어보지를 못했네요.
지금도 집은 있는데 세어볼 수가 없네요. 퍼특 갈수도 없지만 마당에 차를 주차시킨다고 나무를 없애 버렸더라고요.
올려주신 글 읽으면서 제 어린시절을 많이 떠올렸습니다. 서정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랬었군요. 강기자님에게도 탱자나무의 깊은 추억이~.
고맙습니다.
탱자 꽃과 제나라의 재상 안영의 이야기, 잘 배웠습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자연의 지배를 받을수 밖에 없군요.
고향 옛집의 탱자나무 울타리가 눈에 선히 떠올라~/
잠간 향수에 젖게하는 글 잘 읽고 갑니다.
아하? 의외입니다. 탱자나무에 대한 추억을 모두들 갖고 게시는군요.
공감해 주신 김영희님 방경희님 감사합니다.
남귤북지 고사성어
그렇게 만들어 진 내용이나 봐요. 재밌기도 하고 환경에 지배 되는 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번성
사람은 견디고 극복하면서 발전 하고 차이와 존재의 뜻 알았어요.
탱자나무 이제는 정말 귀한 나무입니다.
탱자 이야기 하는데 유자가 생각납니다. 유자와 탱자 모양이 다르다고 합니다.
탱자나무의 추억이 저에게도 있는데~
재미 있는 서정님의 고사를 읽으니 탱자가 노랗게 달려 울타리가 되었던 탱자나무를 보고 싶어 지네요~
탱자나무에 대해 선생님의 글을 보며 알게되어 감사드립니다 ~
탱자꽃이 이리예쁜지 몰랐네요.
주로 남쪽에 자라는 식물이니 생소하고 관심이 적어서요.
향기가 동구밖까지 날린다니 우리농장울타리에 심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좋은글 좋은 소식~~
황화자님 이영옥님 윤홍섭님 이순림님~. 본문보다 더 멋진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