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장 병가이 어데 갔노?
59년 전 남해 진목 국민 학교 1학년 교실에서 처음 만난 병가이
선생님은 늬를 반장 시키고 나를 부반장 시켰다.
노래 잘하고 운동 잘하고 공부 잘하는 늬는
우리 반 70 명의 우상이었지.
6년 동안 반장을 하며
해마다 바뀌는 담임선생님들보다
사실 늬가 우리 반을 더 많이 이끌었다.
중고등을 따로 다닌 우리 둘은 다시
한새벌에서 만나
나는 63327
늬는 63328 학번을 부여받고
같은 반에서 공부했지.
한 방에서 자취를 하기도 하고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물려주고 물려받기도 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동아대 야간 영문과를 같이 나와
나는 중등 영어 교사로 가고
늬는 초등에도 앞으로 영어 교육이 필요할 것이라며
초지일관 초등교사의 길을 걸었다.
젊은 시절 성남 초등, 중앙 초등
A 급 학교의 좋은 반을 맡으면 엄마들의 촌지도
쏠쏠하게 들어오던 때
늬는 정박아, 지체부자유아 반을 맡아
특수 교육에 앞장섰다.
장학사, 교감을 거쳐 동기생들보다 비교적 일찍 교장이 된 너
늬가 사람들에게서 좋은 평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얼마나 기뻤던지.
- 과연 우리 반장 병가이는 멋지다.
초등 동기들 계모임, 교대 3기의 각종 모임 등을 통하여 한 달에 한두 번을 만났던 우리
노래방의 늬 18 번은 3곡이었다.
꿈에 본 내 고향
청춘을 돌려다오
정 때문에
수십 번을 들었건만
들을 때마다 감동적이고 재미있던 늬 노래
이제 늬 노래를 어디 가서 들어야하나.
늬가 9월 24일 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소식에
늬를 아는 사람들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큰지 늬가 알겠니?
평생을 늬를 ‘우리 반장 병가이’ 하며 따르던
이제 7순을 바라보는 70 여명의 진목 초등 12회 동기생들
늬가 만들다 시피 한 재부 진목 초등학교 총 동창회 회원 선후배들
부산교대 3기 동기생들
재부 남해 중학교 동창회원들
재부 남해 농고 동창회원들
재부 남해군 향우회원들
재부 설천면 향우회원들
재부 진목 마을 친목회원들
진주 류씨 화수회원들
거기에다 교직 생활하며 만든 무슨 모임, 무슨 회의 회원들이
그 넓은 동아대학교 병원 장의예식장 특 5 호실을 이틀간 가득 채우면서
늬 죽음을 애통해하고 늬가 남긴 평소의 모습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늬는 그 많은 모임들을 만들기도 하고 회장 부회장 총무 등의 일을 맡아 봉사했었지.
27일 아침 일찍 동아대 병원 영안실을 떠나 평소에 부부가 다니던
사하성당에서의 영결미사를 올리고 너의 유해와 일행을 실은 두 대의 영구차는 고향 남해로 향했다.
1호차에는 유족들과 성당의 레지오 회원들이 타고
2호차에는 일반 문상객들이 탔다.
늬는 평소에 늘 말했다.
‘부조 중에는 몸 부조가 최곱니다. 일단 참여합시다.’
늬 말처럼 2호차의 문상객들은 먼 남해까지 하루를 바쳐 몸 부조를 한 것이다.
감천 너의 집 근처에서 영정사진은 차에서 내려 20 여년을 살던 집을 잠시 올려다보았고
엄궁동의 태평양 관광호텔 앞에서도 차에서 내린 영정사진은 사고 현장을 돌아보았다.
남해 진목 마을 회관에 도착한 것은 11시 반
이장은 마이크로 마을 사람들에게 방송했다.
‘류병관씨의 영구차가 도착했습니다. 마을 회관에 빈소를 마련했으니 문상하실 동민 여러분은 지금 곧 마을 회관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부산서 올라간 레지오들, 일반 문상객들은 회관의 홀에 준비된 점심을 먹고 마을 사람들은 영정 사진 앞에서 헌작, 재배로 늬 모습을 떠올리며 울먹였다.
어릴 때부터 마을의 자랑이었던 너,
고향 마을의 여러 행사 때마다 모습을 나타내며 금일봉을 찬조하고
2부 사회를 도맡아 보며 마을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 너
마을 사람들의 공동 회갑연이며 7순 잔치며, 마을 회관 준공식 등 이벤트 때마다 너는 부산서 불려 올라와 너의 인생관 ‘몸 부조’ 정신을 실천했다.
그러니 마을의 노인들에게 늬 죽음은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 아이구 우리 병가이 불쌍해서 우짜노 불쌍해서 우짜노 -
퍼질러 앉아 엉엉 우는 사촌 누나의 애절한 울음이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을 또 한 번 뜨겁게 했다.
연죽이란 산골 마을에 있는 화장장에 도착한 것이 오후 2시경
화구 바로 앞에서 레지오들이 주관하는 미사를 5분여 올린 후에
유족들의 곡소리 진동하는 가운데 너의 시신은 그 뜨거운 화구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우리도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정다운 친구들과 오래 오래 살고 싶다고
아침마다 천마산 등산을 하며 건강을 다지던 너
여행 때마다 아내 분이 여사가 남편에게 좋다는 온갖 보약을 사 주었고
인공치아 임플랜트를 하고 이제 살만하다고 질긴 고기도 잘 먹던 너
그러던 늬가 2시간 만에 한 줌 재가 되다니
인생은 본래 이렇게 허무한 것인가.
관대신 유골함을 실은 영구차는 고향 진목마을로 향했다.
마을 뒷산 대국산에 마련되어있는 진주 류씨 납골당
소방도로로 만들어둔 임도가 좁아 영구차는 못 가고
작은 봉고차로 사람들을 실어날랐다.
꼬불꼬불 산길은 반이나 풀로 덮여 봉고차는 조심조심
깊고 깊은 산골짜기로 오른다.
산이 높아 전망은 좋지만 이렇게 깊은 산속 납골당
늬 이름이 박혀있는 작은 칸막이 속에 너의 유해가 들어간다.
이 작은 잠자리에서 너는 이제 영원한 잠을 자려는가.
납골당 앞에서 마지막으로 제물을 차리고 미사를 올린다.
레지오 회원들의 정성이 갸륵하다.
유족들, 끝까지 몸 부조를 한 문상객들도
너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늬는 우리 곁을 떠났다.
늬가 간지 벌써 열흘이 지났건만
시도 때도 없이 늬 얼굴이 떠오른다.
나는 이렇게 맛있는 거 먹고
친구들과 테니스 치고 산에 가고
재미있는 텔레비전 보고
재미있는 소설 읽으며
재미있게 사는데 늬는 지금 어디 있노?
정말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영원한 복락을 누리나?
거기서 엄마 아버지 만나 재미있게 사나?
제발 그래 다오.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즐겁게 살아라.
그 좋은 목소리로 마음껏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너의 육신은 비록 한 줌 재로 화했지만
너의 영혼은 결코 스러지지 않고 이 우주 어디엔가 꼭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 세상 1년이 저승에선 하루라고 하니
그래 한 달만 기다려라
그 안에 우리 모두 늬 곁으로 간다.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늬 얼굴
떠오르는 늬 생각
- 병가이가 죽다니 병가이가 죽다니
우리 반장 병가이가 죽다니 -
이제 늬를 보려면 저 세상 밖에 없단 말이가
아아, 우리 반장 병가이 어디 갔노 어디 있노?
- 9월 24일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한 고 류병관 친구의 명복을 빌며
삼가 고인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칩니다.
첫댓글 남계야! 자네의 그 서운한 마음은 누구보다 클 것이네. 나도 교대에서 가장 접촉을 많이 했던 친구가 그였다네. 같은 남해 출신이라는 인연에다 마음도 잘 통하였기 때문이었다네. 우리는 교대뒤의 그의 조그만 자취방에서 도시락을 김치국밥으로 만들어 먹곤 하였지. 졸업식날 막걸리파티를 같이 한 유일한 친구, 우여곡절 끝에 갑자기 입대하면서 그 사실을 알린 유일한 친구, 군 휴가 때 처음 찾아간 친구가 그였다네. 이제 줄줄이 이어지는 아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싶네. 영혼이 있다면 그도 자네와의 추억들을 회상하고 있을 걸세. 자네 말처럼 한 달 뒤엔 만날거라 행각하니 좀 위로가 되는 듯하네
59년을 형제 처럼 함께 살아온 知己之友를 잃은 남계의 애절함을 통감하오. 우리 동기들 뿐만 아니라 설강이 머물었던 곳마다 그가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넓소. 안타까움과 아쉬움은 한량 없지만 고인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잘 생각나지 않구려. 다만 생전에 하던 말대로 동기들이 더 단합하고 뜻을 모으는 것이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길이 아니겠소. 다시 한번 故人과 유족에게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눈물을 닦아가며 읽었습니다. 살아 생전에 아름다운 일 많이 하셨기에, 그 향기 오래도록 동기들과 지인들의 삶 속에 머물것입니다. 60년 지기를 잃고 바위보다 더 무거운 슬픔과 아픔 속에 계신 남계님! 힘내십시요.
버드나무님,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시리겠습니까? 멀리 떨어져 사는 저도 이렇게 가슴 한 편이 빈 듯하고 동창회 모임에 갔을 때 회장으로 너무 따뜻한 배려를 받고 그 때의 훈훈함이 오늘까지 이어가고 있는데 훌쩍 가셨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남해중, 남해 농고와는 저도 아주아주 깊은 인연이 있는데 이제사 알았군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가신 류병관님을 위해서라도 우리 더욱 결속해야지요.
50여년간의 우정, 반장 부반장의 류병관 류근모동기의 애틋한 정이 우리를 울리는 군요. 평소 설강은 온유하고 그러면서 강직한 훌륭한 교육자이시고 인간미 넘치는 동기였지요. 뒤 늦게 공항에서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었답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머물 것입니다. 버드나무님 부모의 죽음, 형제의 죽음, 친구의 죽음이 제일 안타깝겠지요. 언젠가는 갈길이라하지만 저승에서도 필요한 사람인지? 이토록 빨리 가다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채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원색보다 더 진한 남계의 우정은 겸허함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의 방향을 안내하는 듯하다. 고 유병관 친구여 깊어가는 가을 밤 정든 시골, 쏟아지는 달빛아래 별빛세례로 축복을 받으며 편안히 잠드소서! 생전의 너의 봉사와 사랑을 배경으로 한 위대한 업적은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빛을 발할 것이로다. 남계의 글을 읽으니 탄실한 실상의 반석위에 선 진실의 울림이 사람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킴을 증명한 글이었다.
어느 친구도 그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59년 知己를 보낸 남계의 충격은 컸겠네요. 한새벌에서 63학번을 부여받은 이후 45년 동안 그와 맺은 소중한 인연들이 새록새록 피어나는데.... 안타갑고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 정말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영원한 복락을 누리나? 제발 그래 다오.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즐겁게 살아라. 그 좋은 목소리로 마음껏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너의 육신은 비록 한 줌 재로 화했지만 너의 영혼은 결코 스러지지 않고 이 우주 어디엔가 꼭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렇게 절친했던 친구를 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애통해 하는 남계의 그 확신이 믿음으로 바뀔 것이오. 당신의 그 아름다움도 영원하시길 바라오. 삼가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