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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8일 연중 제19주일
제1독서
<엘리야는 그 음식으로 힘을 얻어 하느님의 산에 이르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4-8
그 무렵 엘리야는 4 하룻길을 걸어 광야로 나갔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5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6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7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8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30─5,2
형제 여러분,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41-51
그때에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42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4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해 - 연중 제19주일〈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이들의 언행〉
위례성모승천성당 이기양 요셉 신부님
●요한 6,41-51
어느 날 해와 달이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해가 말했습니다.
“나뭇잎은 초록색이지?” 그러자 달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나뭇잎은 은빛인걸.” 다시 달이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잠만 자고 있구나.” 해가 달을 보고 소리쳤습니다.
“무슨 소리? 사람들은 언제나 움직이고 있어.”
이렇게 둘은 서로 다른 의견을 내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달이 따지듯이 해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그럼 땅은 왜 그렇게 조용하냐?” 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지요.
“누가 그러더냐? 땅은 항상 시끄러운데…” 이렇게 해서 해와 달은 서로 싸우다가 헤어지고 말았답니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입니다. 달의 말이 맞습니까? 맞지요. 해의 말이 맞습니까? 맞지요. 둘 다 맞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서로가 자기만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주장이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 남북 분단의 영향으로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깊이 젖어 있기에 다른 것을 인정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와 다르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함에서 오는 갈등은 교회내의 신자들 안에서도 자주 보이는 모습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모든 원 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에페 4,31)라며 에페소 신자들을 질책하고 신자로서 살아야 할 삶의 지침을 주고 계십니다.
어떤 두 사람이 서로 심하게 싸웠습니다. 너무나 크게 싸워서 전치 10주의 진단이 나왔습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은 10주간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자연히 낫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싸우면서 주고받은 마음의 상처는 죽을 때까지도 낫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로써 사람을 잡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신자들은 남을 공격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사랑의 생활 을 해야 합니다. 공격적인 언어보다는 사랑의 언어가 훨씬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미사를 드리는데 어찌나 시끄러운지 저절로 고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놈들, 모두 조용히 좀 해! 조용히 못해?”
야단을 치면 딱 1분간 조용해집니다. 그리고는 또 금방 여기저기가 소란해집니다. 그 다음 주에는 반대로 미사가 끝날 때 쯤 일부러 큰소리로 칭찬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성당에서는 유치부 어린이들이 제일 미사를 잘 참례합니다. 모두 칭찬해 주세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깜짝 놀랍니다. 자기들이 시끄럽게 떠든 것을 잘 아는데 야단을 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을 받으니까 너무 이상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 때부터는 태도가 바뀝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칭찬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상처를 주고받으며 또 단절된 부분이 있다면 역시 감싸주고 칭찬해 줄 때에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시고, 성체의 삶을 살아야 할 신자들의 삶은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삶과는 달라야 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에페 4,32)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살아야합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2021년 8월 8일 연중 제19주일<쓴맛의 단맛>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8)
오늘 엘리야는 천사의 음식으로 힘을 얻고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자주 부르는 그 유명한 노래 <Panis Angelicus=생명(천사들)의 양식>가 나왔지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 살아갈 힘을 나는 어디서 얻는지 생각게 되는데
건강한 사람은 음식을 먹고 힘을 얻지 무슨 다른 것을 생각하느냐고
별생각 없이 되묻겠지만, 나이를 먹어 입맛도 없고, 음식을 삼켜도
그것을 식도로 넘길 힘조차 없게 되면 그렇게 쉽게 답을 못하지요.
사실 이 정도가 되면 내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관으로 음식을 위까지 투입을 해주거나
음식이 아니라 영양 주사를 맞아 힘을 얻게 되지요.
그러니까 천사의 음식은 이렇게 입맛도 떨어지고
내 입으로 음식섭취를 못할 때 먹게 되는 음식이며
뒤집어 생각하면 뭘 먹어도 맛있을 정도로 입맛이 왕성하고
돌을 삼켜도 소화를 잘할 정도로 식도나 위장이 튼튼하면
내가 뭐든지 먹어 거기서 힘을 얻는다고 생각하지
천사의 음식을 먹고 힘을 얻는다고 생각지도 않고
천사의 음식을 먹어 힘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사고사가 아닌 한 무슨 병에 걸려 죽든 수명을 다해 죽든
마지막의 우리는 다 먹지 못해서 죽는 것이요,
입맛도, 삼킬 힘도, 소화시킬 힘도 없어 먹지 못해 죽는 것입니다.
먹어야 힘을 내는데 먹을 힘도 없게 되는 시점이 우리에게 있고,
그때가 언젠가 올 것임을 그래서 저는 언제부턴가,
아마 저의 어머니가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다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난 뒤부터겠지만 생각하고 마음 대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엘리야는 이런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갈멜 산에서 거짓 예언자 수 백과 진검승부를 벌여 그들을 쳐죽이고,
이제벨에게 쫒겨 도망치다가 기진맥진하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살아갈 힘도 의지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말하기에 이르는데
더 이상 자기 힘으로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면 우리도 이럴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양식이 아닌
천사의 음식을 하늘에서 내려주실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이 천사의 음식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아라"고
하는데 이 음식은 하느님의 산 호렙에 가게 할 힘을 주는 음식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음식에 대한 입맛이 다 떨어질 때
우리는 이 음식 맛을 보기 시작할 것이고
그 맛을 들이기 시작하고 참맛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옛날 아기가 젖을 뗄 때,
엄마 젖밖에 모르고 거친 음식은 아직 입에서 싫을 때
엄마 젖에 긴기랍이나 담뱃진을 발라 억지로 엄마 젖을 떼게 하듯
인생의 쓰디쓴 맛을 보고나서야 입맛을 들이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천사의 음식을 먹게 하기 위해 인생의 쓴맛을 주신,
아니 쓴맛의 단맛을 은총으로 주신 하느님께 오히려 감사드려야겠습니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가리봉동 공동체 <여기 선교의 집>/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2021년 8월 8일 연중 제19주일/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생명의 빵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8)
바알의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그들을 몰살시킨 엘리야가 바알을 섬기는 왕비 이제벨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을 칩니다. 허탈감과 두려움으로 죽기를 간청하며 잠이 든 그에게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빵과 물을 주셨지요. 엘리야는 그 음식을 먹고 힘을 내어 걷습니다.
엘리야가 걸은 사십 일은 우리가 걷는 이 세상의 순례 여정과 같습니다. 엘리야가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였듯이 우리도 이 여정이 지나면 하느님의 거처에 이르러 그분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니까요.
복음은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을 보여줍니다.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근거리기 시작하였다."(요한 6,41)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하시자 유다인들이 수근댑니다. 먼저 그들은 하늘에서 오셨다는 표현에 걸려 넘어졌지요. 그들은 그분의 태생과 가족 등 인간적인 배경에 대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종교기득권층의 주류와 거리가 먼 나자렛 목수 출신일 뿐이니까요.
거기에다 "빵"이라는 표현은 또 어떻고요! 그들은 당신을 먹으라는 말씀에 극도의 불편함을 느낍니다. 사람이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하다니, 문자대로만 해석하자면 도저히 이해가 불가한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하지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반복해서 점층적으로 당신에 대해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추앙하는 '모세'를 뛰어넘어 파스카를 완성하실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 조상들을 광야에서 먹여 살린 '만나'의 실체를 당신 살로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은 기름진 밀로 너를 배불리신다."(영성체송)
시편 작가가 노래한 "기름진 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어놓으신 당신의 살, 성체입니다. 이 은총의 양식은 지상의 순례 여정 중에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는 동시에 이후 하느님과 함께 누릴 영원한 생명을 보증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체를 모시는 이에게 삶의 지침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4,2)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신 예수님께서 성체로 이 세상에 남으시어 우리가 영원의 경계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영원에 들어가면 그때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고 누리며 그분과 하나 될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화답송)
말씀과 성체에 맛들일수록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깨달아갑니다. 또 주님의 좋으심을 알아갈수록 더욱더 말씀과 성체에 허기를 느끼며 갈망하게 되지요.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이 어쩌면 성체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확인하는 기회가 된 듯합니다. 코로나 이전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고 성체조배를 할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호사를 마음껏 누리던 때가 아니었나 싶지요. 요즘은 박해 시기에 신앙의 선조들이 이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절감하실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서 이 감염병 사태가 끝나 마음껏 주님의 몸을 모실 수 있기를 기원하며, 여러분 마음에 성체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커지고, 동시에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는 말씀에서 더 크고 깊은 위로를 받는 나날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체는 고갈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체와 말씀을 먹으며 나날이 사랑이 되어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19주일/ 요한 6,44-51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이 되는 삶
오늘 복음은 어떻게 해야 영원한 생명,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을지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6,44)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셔야’(6,44)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거운 물건을 온힘을 다해 끌듯이, 강력한 사랑의 힘으로 우리를 당신께로 끌어당기십니다. 그런데 세상살이에 바쁘고, 자신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의 이 끌어당기시는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살아갈 때가 많지요. 이런 무감각과 무관심의 끝은 영혼의 어둠과 사회적 불의의 온상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바란다면 주님의 손을 잡고, 그분의 이끄심에 맡겨야 합니다. "마음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끌려가는 것이며 사람은 바라는 바대로 끌려갑니다. 진리, 행복, 정의, 영원한 생명에 끌려가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께로 끌려갈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주님의 끌어당기는 사랑에 기꺼이 끌려가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끌어당기시는 주님께 나아가려면, 먼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6,45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희생의 삶을 배움으로써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믿음은 강하게 끌어당기시는 주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분의 믿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6,48.51) 우리는 예수님의 살인 생명의 빵을 먹고 있습니까? 나아가 나 자신이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으로서 살고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 먹어야 할 빵은, 예수님께서 전생애에 걸쳐 보여주셨던 ‘남김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헌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관한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먹고 희생을 먹어야 합니다. 한없이 낮추시고 비우신 그분의 가난을 먹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던’ 거룩한 연민을 먹어야 합니다. 모든 이들을 하느님의 존엄한 인격으로 존중하시어 차별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공평과 의로움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참 행복을 위해, 예수님께서 적대자들로부터 받으셨던 오해와 배척과 조롱을 받아 삼켜야 합니다. 인간의 아픔에 끝까지 함께하신 임마누엘의 혼을 지녀야 합니다.
죄인의 회개를 기다려주시고, 박해하는 이들을 끝까지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그 마음을 받아들여야겠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억울함과 아픔 안에서 신음하는 하느님의 슬픔과 예수님의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내가 품고 있는 생각과 마음, 내가 행하는 것들 하나하나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살아 있는 빵’이 되고 있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성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복음 6장 51절)는 예수님의 한 말씀을 화두로 삼고 하루 종일 곰곰이 묵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오늘 우리 사회 전반을 한번 둘러보았습니다. 물론 저 자신과 우리 공동체에 대한 성찰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너무 비관적인 시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 사회, 그리고 우리 사회를 이끄는 지배적인 논리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보다는 그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천박한 경제지상주의에 기초한 부의 극단적 불균등은 이 시대 수많은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토록 가족들을 부양하느라 미처 노후준비에 여력이 없었던 수많은 노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외모지상주의, 출세지상주의, 그리고 저 출산 풍조는 갓난아기들의 반가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만들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새 생명이 주는 생기와 그로 인한 기쁨을 거두어가고 있습니다.
성공지상주의,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와 떼놓을 수 없는 입시위주의 교육은 이 땅의 새싹들의 숨통을 틀어막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죽음의 문화가 이 땅 위에 팽배해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만이라도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읽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병들고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치료제로서의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대로
‘야전병원’같은 교회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 시대 고통 속에 신음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어디에 누워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살펴봐야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교회에 주어지는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체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더 자주 자주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성체는 그리스도인들을 움직이도록 재촉합니다. 성체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끝, 변방으로 나아가도록 다그칩니다.
아무런 희망이나 가능성, 기쁨이나 사랑이 없는 그곳에 가서 그래도 삶은 살만할 가치가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기를 요청합니다.
나도 부족하지만 나누기를, 나도 힘들지만 더 힘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주기를 당부합니다.
매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막중한 임무 하나가 주어지는군요.
성체를 우리 안에 모신 우리는 그로 인해 ‘그리스도화’ ‘하느님화’ ‘성화(聖化)’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체를 모신 우리는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죽음의 문화에 물든 이 세상에 구원과 생명의 기쁜 소식을 외쳐야겠습니다.
성체를 모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신 기쁨에만 도취되어 있다면, 그래서 계속 평화롭고 감미로운 신앙생활만 추구한다면, 그래서 무수한 이 사회 약자들의 절규를 외면한다면 결코 참되고 완결된 성체를 영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생명의 빵인 성체를 모신 우리는 이 사회를 주도하는 죽음의 문화에 맞서야겠습니다.
미사의 은혜를 맛본 우리는 은연중에 젖어든 소비향락주의, 경제지상주의와 결연히 투쟁해야겠습니다.
매일의 성체로 힘을 얻은 우리가 할 일은 돈에 함몰된 이 세상 앞에서 돈이 다가 아님을 외치는 일입니다.
없이 살아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줘야겠습니다.
돈보다 훨씬 가치 있는 대상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습니다.
유다인들처럼 더 이상 ‘수군거리지’ 말아야겠습니다.
별것도 아닌 부차적이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어떻게 하면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우리 공동체 안에, 내 가족 안에 생명과 위로의 성체로 다가설 수 있겠는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8월 8일 나해 연중 제19주일 <신앙에 핑계가 있을 수 없는 이유: 마음이 없지 도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지 않았다면 생존할 수 없었듯이, 하늘의 백성은 하늘의 빵인 그리스도를 먹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상 부모님을 알고있다는 이유로 그분이 하늘에서 오셨음을 믿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대한 믿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도움의 은총’이 있어야 함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께서 직접 이끌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도달할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총은 크게, ‘도움의 은총’과 ‘생명의 은총’이 있습니다. 생명의 은총은 생명 나무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누립니다. 그 생명 나무까지 이끄는 은총을 ‘도움의 은총’이라 하는데, 이는 ‘목동들이 본 천사들’, 혹은 ‘동방박사들이 쫓아오던 별’로 생각하면 쉽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생명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성탄 트리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 장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목동들은 천사들로,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로써 아기 예수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천사와 동방박사가 바로 도움의 은총인 것입니다.
제가 성체가 생명의 양식임을 믿게 된 것은 신학교에 들어가서입니다. 그 이전에도 믿고 영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비타민처럼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성체께서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하실 때까지 성체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임을 온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끌어 준 저의 도움의 은총은 뭐니 뭐니 해도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입니다. 5년 동안 이 책을 다 읽고 묵상하지 않았다면 사제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솟아나지 않았을뿐더러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도달하도록 우리를 돕기 위해 아버지께서 보내신 도움의 은총이 많이 있습니다.
천사는 목동들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동들만 보았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은총을 찾는 이들이었습니다. 하늘의 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동방박사들의 눈에만 보였습니다. 그들이 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누구나 그리스도를 그만큼 알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알기를 원한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에 관해 이 책만큼 자세하게 나와 있는 것은 거의 없는데도 그것을 들춰서 읽어보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도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저희 때 원조 몸짱 연예인 중 한 명이 ‘차인표’ 씨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미국에서 함께 운동하던 광수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1989년 봄, 유학 갔을 때, 김광수는 한국말을 잘 못 했고 인표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같이 운동을 하며 친해졌습니다. 2021년, 그로부터 약 3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광수 씨의 꿈은 파일럿이 되는 것이었고, 차인표 씨는 사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차인표 씨는 영화배우로 자리를 잡고 살고 있고, 광수 씨는 은행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28년 만에 그들은 중대한 통화를 하게 되었고, 광수 씨는 사업을 접고 헬스클럽을 개장하였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이 터진 것입니다. 1년 넘게 헬스클럽은 문을 닫아야 했고 급기야 광수 씨도 코로나에 걸려 3주 동안 고생하였습니다. 이때 광수 씨가 병이 나으면 각자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여 교환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무슨 버킷리스트를 할 것인지 고민하던 차에 광수 씨가 자신은 머슬마니아 표지 잡지에 나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차인표 씨도 자신도 그럼 같은 것을 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마음’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차인표 씨는 목과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망가지는 몸을 보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는 겸사겸사 시작됩니다.
의사의 소견을 듣고 먼저 스트레칭과 같은 운동으로 시작하여 하루 두 시간 근육운동, 한 시간 유산소 운동을 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루에 걸리는 시간은 총 6시간. 그리고 술과 기름진 음식은 끊어야만 했습니다. 차인표 씨는 바쁜 일정 가운데 하루 6시간을 만들어냈고 억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바라는 몸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6개월 후 둘은 나란히 ‘빅 이슈’라는 잡지의 표지모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팬데믹 가운데서도 친구를 통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새로운 자신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만나는 때는 자신이 부모가 되는 때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면 온전히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우리를 그리스도가 되게 만드는 수많은 도움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의 도움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 싶은 내 ‘마음’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사람의 완성은 그리스도임을 믿어봅시다. 적어도 더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만이라도 가져봅시다. 그러면우리를 이끌어 주시기 위해 우리 주위에 천사들과 별들을 많이도 배치해 놓으셨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강론
2021. 8. 8. 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 송영진 모세 신부
<나는 생명의 빵이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말하였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한 6,41-42)”
여기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우리는 저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한 말과 비슷한데(마르 6,3),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이나 나자렛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고, 그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은 사도들은 왜 믿었을까?
사도들도 예수님의 출신, 직업, 집안 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삶’과 ‘일’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아보았고(요한 1,39),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들었습니다(요한 6,68).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결국 안 믿은 사람들은 보아야 할 것을 안 보고, 들어야 할 말씀을 안 들으면서 자신들의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안 믿은 것이고,
믿은 사람들은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았고, 들어야 할 말씀을 제대로
들었기 때문에 믿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탓을 하지만, 사실은 자신들 탓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6,43-46)”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도에 응답하지 않으면”입니다.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내가 주는 생명을 받을 수 없다.”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시고,
모든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 쪽에서 그 부르심과 인도에 응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 쪽에서 능동적으로 응답해야 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출신과 직업 등을 이유로 내세우면서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삶과 일을 보고 믿는 사람은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과 인도에 능동적으로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고 인도해 주신다고 해서 예수님 없이 직접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요한 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7-51).”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신 것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지상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만나’를 주신 하느님을 올바르게 믿고 섬긴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라는 말씀은, “너희 조상들은 육신의 생명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집착하다가 멸망했다.” 라는 뜻입니다.
(‘만나를 먹고도’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었는데도’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만나’ 자체에 영원한 생명이 들어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씀에서 ‘빵’은 예수님 자신, 또는 성체를 가리키는데,
이 말씀은, 성체를 받아먹기만 하면 누구나 자동적으로, 무조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체는 아무에게나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마법의 불사약이 아닙니다.)
믿음 없이 성체를 먹으면, 그 성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또 죄 속에 있으면서 성체를 먹으면, ‘성체 모독죄’가 됩니다.
성체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이라는 말은, 그렇게 올바른 믿음과 올바른 실천으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면서 성체를 받아먹는 사람을 뜻합니다.
‘죽지 않는다.’ 라는 말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고, 또 당신을(당신만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믿는 대로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말씀은,
‘생명의 빵’은 곧 당신 자신이라는 뜻인데, ‘성체성사’를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 전세원 루도비꼬 신부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
안식년을 지내면서 겪었던 일들이 많았습니다.
일선에선 느끼지 못했던 왠지 떨어져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와글와글 북적이던 곳에서 조용한 곳으로, 해야 할 일, 정리 해야 할 것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제일 힘들고 신경을 써야 했던 부분 중에 하나가
매일 식사를 해서 먹어야 하는 불편함이었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반찬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루 이틀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주일, 이주일, 한 달을 생각해 보면 막막했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청소와 빨래를 하다 보니 하루가 금새 가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전업주부가 된 셈입니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생활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침 일찍 출근전쟁에 저녁까지 근무하고 퇴근전쟁을 치루고 나서야 집에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부지런해야 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실감한 한 해였습니다.
매일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또 남은 쓰레기는 분리해서 버려야 하고 해 주는 것만 먹었을 때와 해 주는 것과의 차이를 심하게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면서도 목을 매야 하는 실상을 겪습니다.
더욱이, 세상이 주는 기쁨과 행복이 오래가지 못함을 알면서도
늘상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들입니다.
여기에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기쁜 소식은 다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을 먹기 위해서 그만한 노력이나 절대적인 매달림이 부족한 우리에게도 거져 내어 주시는 생명의 빵입니다.
아무 대가도 없이, 당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믿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하시면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진지한 물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중대한 결심이 지금필요한 때입니다.
의정부교구 전세원 루도비꼬 신부님
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 한정수 베드로 신부님
나의 삶이 예수님의 삶이 되도록
오늘 복음말씀은 요한복음 말씀으로 당신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기쁜 소식입니다.
성체성사의 교리는 우리 그리스도교만의 특이한 교리인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교리가 있고, 그 종교를 만든 교주들이 있지만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는 말씀을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성서에서 먹는다는 동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뜻의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 원문에 따르면 “사람을 죽인다, 학대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 봉헌의 길, 봉사의 길을 가면서 우리의 삶을 하느님 아버지께 내어드린다는 것입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했을 때, 기억에 남아 있는 새로움은 성찬의 전례의식이었습니다.
늘 미사를 참여하면서 보았던 성찬례인데, 제 자신이 직접 미사를 주례하면서 주님께 올리는 성찬례는 특별했습니다.
제 자신이 성찬례를 거행하며 성체와 성혈을 들어올렸을 때, 제 자신도 들어올려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사제도 하느님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들어올려져 봉헌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 또렷한 의식으로 마음 속에 각인되었습니다.
이제 막 사제가 되어 첫 번째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저에게 예수님은
“너는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느냐?”(마르 10, 38)고 물으셨고
저는 “예, 할 수 있습니다”(마르 10,39)고 대답하며 성체와 성혈을 제대 위에 들어올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수행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요한 6,51)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음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신앙인으로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우리의 삶의 여정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양식이 되고, 미사 중에 거행하는 성체성사에 깊이 참여하며
비로소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음식은 먹는 사람의 체질을 변화시키고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남깁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체질이 변화되고,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로 세상을 꽃피우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혜로운 신앙의 눈을 가지고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을 끊임없이 성찰케하는 성체성사는
그 어떤 보화보다 더 가치 있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미사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성체의 의미를 되살리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성체로 우리 모두의 삶이 예수님의 삶이 되길 바라며,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먹고 마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일치를 이루길 기도합니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 건강하시고, 소임을 다 마치고
우리 의정부교구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길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의정부교구 한정수 베드로 신부
나해 연중 제19주일 강론 : 부정(否定)보다 긍정(肯定)의 힘으로! (박태범 라자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19주일입니다.
요즘 연중 17, 18, 19, 연속 3주 동안 전례 말씀에서 동일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연중 시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1독서와 복음은 먹는 이야기이고 제2독서는 영적 교훈입니다.
제1독서에서 엘리야가 천사의 빵을 먹고 기운을 차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홀로 남은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혼자의 힘으로 바알의 예언자 450명과 대결하여 멋지게 승리로 이끌었던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기쁨도 일장춘몽이요 인생은 허무했습니다. 기쁨이나 영광이라는 것도 물거품이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바알 예언자 450명을 학살했기 때문에 바알의 광신자였던 이세벨 왕비는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는 줄행랑을 놓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야도 권력과 완장 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 도망칩니다. 메마르고 갈증 나게 하는 사막에서 엘리야는 기진맥진하여 잠이 듭니다. 이렇게 쓰러져 잠든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구워낸 빵과 물”을 주십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사십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산(시나이 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하느님을 다시 체험하고 용기를 얻고 다시 돌아와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다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천사의 빵과 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빵과 물을 주시어 위기와 시련을 극복하게 합니다. 이 천사의 빵과 물은 엘리야에게 생명의 음식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빵’의 구약적 예표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를 밝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난주에 하신 말씀과 연속선 안에 있습니다. 요즘 전례에서 지난 연중 17주에는 오병이어의 기적, 지난 18주에는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오늘 연중 제19주를 맞아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연속적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빵’에 관해 요한복음 사가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4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라고 기록하고, 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부언하여 기록합니다. 하늘에서 온 빵에는 모세와 그 백성들이 먹었던 만나도 있었고, 엘리사가 빵 20개로 100명을 먹인 보리빵도 있고, 오늘 엘리야가 먹은 구운 빵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징이요 표상이었지 생명의 빵 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재천명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이미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일까요? 해답은 오늘 제2독서에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을 먹고 마시는 주님의 지체답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합당한 자세에 관해 들려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당부하십니다. 요 며칠 전에 동기 신부와 통화하면서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나는 용서가 참 어렵다’고 하니까 자기도 어려웠는데 일부러 그 원수에게 물질적으로 선행을 베풀다 보니 용서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의도적으로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줬다는 식입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시도해 보십시오. 잘 될지? 분명한 것은 용서를 구하지 않는 데 선불로 용서하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그것은 사안이 가볍거나, 이미 선행하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으로 용서를 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 사안에 관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거나 잊을 수는 있지만 용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망각’이라는 아주 고도의 선물을 우리 DNA 안에 넣어주셨습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에페4,31)
원한(pikria, bitterness), 격분(thymos), 분노(orge), 폭언(krauge), 중상(blasphemia), 악의(kakia) 등의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소모적인 감정이 공동체나 사회를 지배할 때 그 안의 모든 사회적 질서와 인간관계는 온전해질 수 없고 파괴된다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실제로,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 두 경우 모두 상호주체적인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뿐만 아니라 제 경험으로는 공동체적 차원을 떠나 개별적 개체로서의 한 인간으로도,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내 바깥을 둘러싸고 있고 또 마음 안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심장의 혈관이 막히고, 한쪽 눈이 멀고, 통풍이 옵니다. 그리고 한 개체의 인간성을 유린하고 파괴합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매 순간이 괴롭습니다. 연옥이 따로 없습니다. 목을 매달고 싶은 심정입니다.
왜냐하면, 원한이란 쓸개의 쓴맛과 같은 적개심을 품은 마음이고, 격분이란 격렬한 복수심이 격발하는 것이며, 분노란 폭력적인 감정이나 혐오감을 나타내는 말이며, 폭언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격렬하게 욕설 등 언어로 공격하는 것이고, 중상이란 야비한 말로 다른 사람을 모략하는 것을 의미하고, 악의는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악한 감정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기초신학에 의하면 악행은 덕행과 그 수행 방법이 다릅니다. 신망애 삼덕과 나머지 긍정적인 덕행들을 닦기 위해서는 은총을 바탕으로 단순히 그것을 닦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악덕은 그 악덕을 자꾸 의식하기보다 그것과 반대되는 긍정적인 덕(德)을 신장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인간은 그 악덕을 거부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더욱더 집요하게 우리의 영혼을 파고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는 다욱더 우리의 생각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래서 그 반대되는 긍정적인 덕행들을 많이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원한, 격분, 분노, 폭언, 중상, 악의 등의 악덕들과 반대 되는 덕(德)은 순서대로 은혜(친절), 용서(경탄), 호감(희열), 칭찬(격려, 위로), 연대감(공감), 사랑 등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악덕들을 잊어버리고 은혜(친절), 용서(경탄), 호감(희열), 칭찬(격려, 위로), 연대감(공감), 사랑 등 덕행을 생각하고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은 원한, 격분, 분노, 폭언, 중상, 악의 등의 악덕들이며 다른 한편 우리가 키워나가야 하는 것은 은혜(친절), 용서(경탄), 호감(희열), 칭찬(격려, 위로), 연대감(공감), 사랑 등의 덕행입니다. 하지만 버려야 할 악행과 키워야 할 덕행이 너무 많으니 다 기억할 수도 없을 것이기에 우선 버려야 할 악덕 하나와 키워야 할 덕 하나라도 선정해서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한, 격분, 분노, 폭언, 중상, 악의 등 이 중에서 내가 꼭 버려야 할 악행 한 가지를 선정하면 어느 것입니까? 그리고 은혜(친절), 용서(경탄), 호감(희열), 칭찬(격려, 위로), 연대감(공감), 사랑 이 중 어느 것이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덕행입니까? 하나씩 선택하여 꼭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수군거림이나 구시렁거림은 원 플러스 원으로 꼭 넣어서 말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부정의 수군거림보다 생명의 긍정적인 언어를 골라 사용하면 이번 한주간도 행복한 바이러스가 만발하는 한 주간이 될 것입니다. 아멘.
작성자 라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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