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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의 기원과 각 분파에 대하여
1. 기원설
- 허 왕후의 뿌리, 야유타국에서
김해허씨 허왕후의 DNA |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씨의 고향은 인도 남동부 아요디아시(市)다.그곳에 세워진 허왕후비에 후손들인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일행이 해마다 참배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8년 김수로왕은 김해 앞바다에 표착한 아유타국의 여인 허황옥을 맞아 비(妃)로 삼았다 했는데, 그 아유타국이 어디며 그 먼 타국에서 어떤 사연과 경로로 김해 앞바다까지 흘러왔는지를 살핀다는 것은 역사에 대한 대탐험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을 고고학자인 김병모(金秉模) 교수가 30년에 걸쳐 추적, 허 왕후의 뿌리를 찾아내어 그곳에 허 왕후 고향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는데, 얼마 전 한국유전체학회에서 서울대 의대교수진이 허 왕후의 후손유골의 유전물질(DNA)을 분석, 북방계가 아닌 남방계임을 확인함으로써 그 역사적 궤적을 유전학적으로 입증했다. 인도 고지도에 나와있는 아요디아의 옛 지명 아유타국에서는 1세기에 북방 월지족(月氏族)의 남침으로 지배층이 쫓겨나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인 촉(蜀)나라에 정착했다. 허 왕후의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 이라 쓰인 데서 허 왕후가 보주(普州)란 곳과 연관이 있다고 보고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의 옛 지명인 것을 알아냈다. 그곳에서 서기 48년, 전 해에 반란이 일어나 허 왕후는 창장(長江)에 배를 띄워 다시 피란길에 오른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인도 소녀인 왕후는 오빠와 더불어 삼협(三峽)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 앞바다에 이른 보트 피플이었던 것이다.이 허 왕후의 이동 지역을 꿰는 문화의 공통분모로 김 교수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바라보고 있는 쌍어(雙魚)신앙을 들었다. 아요디아의 사원이나 풍물에 쌍어가 흔하고 보주에서도 확인됐으며 김수로왕릉의 정문에도 이 천축문화인 쌍어가 새겨져있다. 허 왕후의 오라버니인 장유화상(長遊和尙)이 세웠다는 은하사(銀河寺)에도 두 쌍의 쌍어를 찾아볼 수 있다. 언어학자로부터 가락이라는 말이 인도고대어에서 물고기를 뜻한다는 것도 알아내어 허 왕후의 궤적을 언어학적으로도 입증했다. 고고학이나 역사의 쟁점들이 이처럼 유전학으로 해결될 길이 열려 기대를 부풀게 하는 허 왕후의 DNA다. [출처 : 2004년 8월 26일 조선일보 이규태 기자] |
- 한나라 선제의 황후의딸이었던 허황옥은 왕망의 신나라 망해,광무제 유수를 피해
김해로 입성
한나라(전한) 선제 기원전 74년 ~ 기원전 49년때 신하로있던 평은후 허광한의 손녀
딸이 허황옥이다. (서기 48년 김해로) 훗날 기원전8년 ~ 기원후23년 김일제의 손자
김당과 왕망이 반란을일으켜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세운다.
후한의 광무제 유수가 신나라를 멸망시키고 후한을세우자, 김당과 김륜(김일제 동생
)의 후손들은 산동반도의 투국에서 배를이용하여 강화를거쳐 경주일대로 피신을 하
게된다. (당시에는 마한의 중앙마한 목지국(월지국)에서 배려하여 경주로 옮겨살게하
였다. 온조십제는 평안남도 덕천~영원일대 호수에 자리잡고 동북쪽 동예지역의,낙랑
말갈과 대치하다 말갈에밀리자 황해도로 남하하고 있었을시기였다.)
경주로 들어온 김당일파는 중앙마한의 배려로 왕족과 신하를파견하여 살고있었던,
진망인과 박혁거세와 석탈해의 뒤를잇는 사로국/사라가있었다. 훗날 김당일파는
세력이커지자 신국을 만들었다.
김당은 조부 김일제가 한무제 유철로부터 소호금천씨성에서 딴 김씨성을 하사받은
적이 있었는데, 후한의 광무제 유수에게망하자, 김씨성을버리고 금씨성을 되찾고,
신국을만들자 수도이름을 금성이라하였다.
김륜의 후손들은 김당의 허가를받고, 경주에서 김해로 떨어져나와 나라를 세우게
된다. 김수로는 김륜가문의 후손이다. 이들은 나라를 세우자 중국 산동반도의 투국
과 신나라시절때부터 역사를 기준으로해서, 이어갔다. 그래서 역사기록을 기원전후
부터 서술되는 모순도있다.
한나라 선제의 황후였거나 황후의딸이었던 허황옥은 한나라 선제당시 신하였던,
부친인 평은후 허광한과함께 장안에있다가, 훗날 신나라정권 탄생에 협조한사실이
발각되자, 광무제 유수를피해 고향인 사천성에 머물다가, 낙양을거쳐 남쪽으로
탈출하여 바다를건너 김해로 입성하게된다.
김수로는 황후출신인 허황옥을 맞이하여 금관가야를 출범시키게된다.
(소호금천씨성을 되찾고 금씨성을넣고 나라이름을 넣게된것.)
>> 가야라는 이름을넣은것으로봐서 이미 고령가야,아라(함안)가야등이 금관가야
이전에 성립되어있었던것으로 판단된다.)
허황옥이 인도인처럼 생겼다는것은 모습이 어렴풋이 천축국 여인처럼 생겼다는것을
말함이며, 조상중에 티벳이나 위구르여인이있어서 혼혈로 태어난 조상이있어서일것
이다. 그당시 서역여인은 통칭적으로 인도인으로 불리운듯하다.
인도인들이 가장많이 분포되어있으므로........(개인적으로 위구르여인에 무게를더두고
있슴), 전한의 기반이 북쪽 감숙성, 섬서성,산서성이 기반이었으므로, 위구르인들과
아주 밀접한관계였기때문이다.
서로 장안(서안)과 낙양을 먹으려고 각축전을벌였고 5호16국시대의 난립도 장안과
낙양을 서로 먹으려고 쟁탈전을벌였다.
P/S
지금의 신장성 위구르인들은 감숙성북쪽에 위치하고있었으며, 청해성,사천성일대로
옮겨다니며 살고있었다. 훗날 흉노와 한무제의 몽염(오르도스 원정)등에 토벌되어
서쪽으로 이동하게된다.
훗날 세패로 나눠지게되는데 한패는 흉노를따라 중앙아를지나 강거,아란으로들어가
고, 다른한패는 신장성-키르키즈공화국으로 밀려나고, 마지막한패는 현재 녕하성
회족자치구에 머물고있다. (종족이 순수계,혼혈계,인도/이란계등으로 분화됨.)
>>그들은 한때 돌궐로불리워지다가,
돌궐이 멸망한후 동네팔의 쿠르간인(구리하/구려하/고려하(북경부근)에서 전쟁에패해
이동한 종족, 석가를탄생시킨 종족)과 섞이면서, 혼혈을이루어 유연으로 성장하게된다.
동쪽에있던 동돌궐은 흉노에 대패하여 강거,아란으로 들어갔다가 터키로 넘어가서 그
들과 섞였다. 서쪽에있던 서돌궐은 위구르-키르키즈공화국으로 나뉘어져 달아나 현재
에이르고있다. 한국전쟁후 한국인들은 서양사람을보면 모두 미국사람이냐고 물어보았
다. 서양인은 모두 미국인처럼 인식하고있었던것을 상기하면, 허황옥은 조상중에 모계
가 위구르인이 있어서,모습이 어렴풋이 인도풍의 모습이남아있어서, 가장많이 알려져
있는 인도인으로 통칭하여 백성들이 불렀을것으로 판단된다.
- 수로왕비 허황옥릉
김해 허씨(金海 許氏)는 경상남도 김해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 허염
(許琰)은 가락국 김수로왕의 35세손이며, 고려(高麗)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
2. 허씨의 기원
허씨(許氏)는 연원을 멀리 가락국 김수로왕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에 두고 있다. 허황옥
은 원래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서기48년)때 배를 타고 지금
의 경남 창원시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夫人唐)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
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 그 후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許氏)
로 사성(賜姓)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歸依)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成佛)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허황옥의 30세손인 허선문(許宣文)의 후손은 공암(孔巖:양천1), 30세손 허사문(許士文)의
후손은 태인2(泰仁), 33세손 허강안(許康安)의 후손은 하양3(河陽), 35세손 허염(許琰)의
후손은 김해4(金海)로 분관(分貫)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3. 김해 허씨
김해 허씨 (金海 許氏)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 허염(許琰)은 가락국 수로왕비인 허황후(許黃后)의 35세손
으로 전하며, 고려 때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며 시조의 세거지인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락군인전파(駕洛君仁全派), 호은공기파(湖隱公麒派), 중승공린파(中承公麟派), 전직공
인부파(典直公仁副派), 증성군구년파(甑城君龜年派), 판서공언룡파(判書公彦龍派), 상서공
상파(尙書公相派)등 크게 7파로 분파되었다.
[ 분파(分派), 계파(系派) ]
(4세)가락군파(駕洛君派) - 허인전
(5세)충목공파 (7세)호은공파(湖隱公派) - 허기
(7세)중승공파(中丞公派) - 허린
(7세)전직공파(典直公派) - 허인부
(4세)증성군파(甑城君派) - 허구년
(7세)판서공파(判書公派) - 허언용
(4세)상서공파(尙書公派) - 허상
4. 주요 인물
김해허씨는 고려조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서도 문과 급제자 16명, 호당 1명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조의 허유전(許有全)
과 조선조의 허백기(許伯琦)를 꼽을 수 있다. 충목공(忠穆公) 허유전은 원종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5년(충렬왕21) 감찰시사로 있을 때 폐신의 무고로 순마소에
갇힌 후 사형 직전에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98년 국학사예로서
전라도 안렴사가 되고, 1307년 감찰대부·권수동지밀직사사가 되어 지공거를 겸임
했다.
그후 전조시랑을 지낸 뒤 도첨의참리, 지밀직사사에 오르고, 1314년(충숙왕1)
가락군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의호를 받았다. 1321년(충숙왕8) 정승이 되었는데
토번에 귀양간 충선왕으로부터 간곡한 편지를 받고 그의 환국 운동을 위해 민지(閔漬)
와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양왕 호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정헌공(正憲公) 허백기는 직제학 정(楨)의 아들이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1519년(중종14)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시관을 거쳐 다음해 주서가 되었다.
그후 형조, 병조의 좌랑, 형조정랑, 경상도도사를 역임, 1529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장령, 사건, 교리, 동부승지, 형조참의, 판결사, 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동지중주부사에 이르렀다.
- 김해허씨(金海許氏) 주요인물(主要人物)
[등과(登科)·음사인명(蔭仕人名)] ▲고려조
문과(文科)
허유전(許有全)(원종조)
- 김해허씨(金海許氏) 주요인물(主要人物)
[음사인명(蔭仕人名)]
허유전(許有全)(시중공신(侍中功臣),시(諡):충목(忠穆))
- 김해허씨(金海許氏) 주요인물(主要人物) ▲고려조(高麗朝)
허유전(許有全)(호(號): 가수(加守), 시(諡): 충목(忠穆), 가락군(駕洛君)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 충렬왕때 지공거(知貢擧:시험관 : " 고려 시대, 과거의 시험관이다. 고려시대 과거의 고시관를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과거를 관장한 고시관, 예부시의 시관(試官)을 지공거, 부고시관을 동지공거(同知貢擧)라고 하였다. 역사 고시관은
대체로 지공거와 동지공거의 두 사람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제술과의 경우 문제를 출제하고 시험을 감독하며 채점과 함께 석차까지
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고려 광종 때 처음으로 지공거가 된 사람은 중국의 귀화인(歸化人)인 쌍기 (雙冀)였는데, 경종·성종 때의
지공거는 대부분 귀화인이 맡았다. 고려 문종 때 최충이 9재 학당을 처음 세운 뒤 전직 고관이나 지공거(과거시험관) 출신의 인사들이
12개의 사립학교를 세웠으니 이것이 사학 12도이다. 사학 출신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관학인 국자감이 쇠퇴하였다." )
를 지낸 허유전(許有全)이 충숙왕때 가락군에 봉해지고 첨의찬성사에 이어 정승이 되었으며
허옹(許邕)은 전리판서를 지냈으며 성품이 청렴강직했다.
조선조에 와서는 동지중추부사 허백기(許伯琦)와 목사 허수겸(許守謙)이 유명했고,
한말의 의병장 허위(許蔿)"허위(許蔿, 1854년 4월 1일 ~ 1908년 10월 21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며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아호는 왕산(旺山). 경상북도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허위는 4형제 중 막내였는데, 그의 맏형은 항쟁에 군자금을 댔고 셋째형 허겸은 의병
투쟁을 함께 했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를 내다보고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이상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4남
2녀를 동반하여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고, 사촌들도 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는
3백명의 선발대로 일본 통감부를 격파하려다 실패하고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외 독립운동가인 허겸(許兼), 허빈(許斌), 허병률(許秉律),
허형(許炯) 등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5. 각계파별
- 충목공파 5세 유전(五世 有全) / 호은공 기(麒. 7세)파(湖隱公派)
김해 허씨(金海 許氏)의 시조 허염(許琰AD 1047~1082)이 중시조(中始祖, 1세)은 가락국
수로왕비인 허황후(許黃后)[허황옥(許黃玉: ?∼188년)]의 35세손으로 전하며, 고려 때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며
시조의 세거지인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고려중엽에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으로 봉해진 염(琰, AD 1047~1082)이 중시조(中始祖,
1세)이며, 시조왕비의 35세손이다. 2세 군언(二世 君彦), 3세 현(三世 賢), 4세 연(四世 延),
5세 유전(五世 有全)으로 이어진다.
허유전[1243(고종 30)∼1323 (충숙왕 10)]은 고려 충숙왕 때 시중(侍中) 벼슬을 지냈고, 당시
상왕이 원(元)에 잡혀간 것을 81세 병중의 몸으로 원나라로 가서 상왕을 모셔왔다. 시호는
충목공(忠木公)이다. 6세 영(榮), 7세 기(麒)이다. 고려 충숙왕(1330년대) 재위 시에 출생
하고 이조초(1390년대)에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된다. 시호는 정절(貞節), 호는 호은(湖隱),
휘(諱)가 기(麒)이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로인 송도가 함락되자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
하게 되었다. 이 때 공께서 왕을 모시고 갔다. 수도가 수복되자 중랑장관(中郞將 정5품)직
에 제수되었다. 왕이 승려 신돈을 중용하여 국정을 혼란하게 하자 신돈을 제거하려는
모의에 연루되었다가 경상도 고성 죽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신돈이 처형당하고 귀양에서
풀렸으나 송도로 돌아가지 않고, 고성군 마암 장산에 은둔하였다.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
이 건국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중용코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조용히 일생을 마쳤다. 불사이군(不事二君) 일편단심 고려의 충신임을 자부하며 한 생애
마감한 고고한 기품은 후세에 귀감이 되었기에 고성 도연서원, 송도 두문동서원, 전남
장성의 경현사, 충남 금산의 성곡사, 경기도 파주의 고려통일대전에 신위(神位)를 모시고
춘추로 제례를 받들고 있다. 기(麒. 7세)공이 김해김씨 호은공파(湖隱公派)의 파조(派祖)이다.
- 세계표(1~9세대, 분파표)
5-1. 고성 마암 세거지
• 22세손 정도(政道) : 복상이장 역임
• 22세손 정규(政奎) : 종동농협감사, 복상 이장 역임
• 22세손 정윤(政允) : 정동농협 서부지소장
• 22세손 정태(政邰) : 외환은행 서울 남산출장소 업무과장
• 23세손 태중(泰中) : 사천시 동서동사무소 근무
• 23세손 상도(尙道) : 부산 중앙고등학교 교사
• 23세손 양중(羊中) : 동아건설(주) 과장
김해허씨(金海許氏) 충목공후(忠穆公后) 호은공파(湖隱公派) (대곡, 복상)
- 경남 고성군 장산면 허씨 고가
허씨(許氏)는 문헌에는 59본(本)으로 나타나 있으나 모든 허씨는 가락국(駕洛國) 수로왕
(首露王)의 비(妃) 허황후(許皇后)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수로왕의 후예인 김해
김씨와는 혈족(血族)이 된다는 것이 역사적인 통념이다.
수로왕이 10자(아들)를 두었는데, 하루는 비(妃)가 수로왕게게 말하기를 “신첩(臣妾)은
동토(東土)의 객(客)이니 첩이 사후(死後)에 오성(吾姓)을 전하지 못함을 슬퍼하나이다.”
하니 왕이 감동하여 둘째 아들을 모성(母姓)에 따르게 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 허씨(許氏)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황태후의 35세손 허염(許琰)의 후손은 김해, 33세손 허강안(許康安)의 후손은
아양(阿陽), 30세손 허선문(許宣文)의 후손 양천(陽川), 30세손 허사문(許士文)의 후손은
태인허씨(泰仁許氏)로 각각 분관되었으나 동원(同源)이고, 나머지 55본(本)은 미고(未考)이다.
김해허씨(金海許氏)의 시조(始祖) 휘(諱) 염(琰)은 보주황태후(普州皇太后) 허왕후(許皇后)의
35세손이다. 그는 고려 문종(文宗) 때 출생하여 고려 중엽에 벼슬하면서 공을 세워 삼중대광
(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시조의 세거지인
김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시조의 5세손 유전(有全)은 사록(司錄) 연(延)의 넷째 아들로 출생, 고려 원종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5년(충렬왕 21) 감찰시사(監察侍史)로 있을 때 폐신(嬖臣)의 무고로 순마소
(巡馬所)에 갇힌 후 사형 직전에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석방되었다. 1298년 국학사예
(國學司藝)로 전라도 안렴사(按廉使)가 되고, 1307년 감찰대부(監察大夫), 동지밀직사사
(同知密直司事)가 되어 지공거(知貢擧)를 겸임했다. 그후 전조시랑(銓曹侍郞)을 지낸 뒤
도첨의참리(都僉義叅理),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고, 1314년(충숙왕 1) 가락군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받았다. 1321년(충숙왕 8) 첨의찬성사(僉議
贊成事)에 이어 정승(政丞)이 되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시조의 7세손 기(麒)의 호는 호은(湖隱)으로서 시호는 정절(貞節). 충목공(忠穆公)의 장손
(長孫)이며 총랑(摠郞) 영(榮 : 6세손)의 큰 아들로 태어나 뒤에 호은공파(湖隱公派)의
파조(派祖)가 되고, 아우 인(麟)은 중승공파(中丞公派)의 파조(派祖)로 갈라졌다.
입향조는 시조 가락군(駕洛君) 염(琰)의 20세손인 치헌(致憲 : 자 泰吉)께서 120년전
고성 마암면 장산(章山)에서 거주하다 입사천, 정동 대곡에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중 대표는 22세손 정무(政武)이며 제2대 정동의용소방대장을 역임하였으며 대곡에
거주하고, 종손(宗孫)은 23세손 시중(時中)이며 복상(伏象)에 거주한다.
5-2. 현풍(지수면 GS가는 현풍에서 내려감),고령군 구곡동 세거지
1세 허염
2세 허군자(성있는 것은 종손)
3세 허자
4세 허송죽,연
5세 (허연)허인전,소구,천기,유전
6세 (허인전) 허의,영 (유전)화,창
7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옹[가락군파] ,기[호은공파],인
8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기)유신[영산현감]
9세 허여,시[호은공 기파 생원공 시파],선
10세(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기,허유신,시) 허원하
9세 시(施)공이 호은공파 내에 생원공파(生員公派)의 파조(派祖) 구곡 입향,8세 유신의 차남
10세(十世) 원하(元廈),
11세 예(禮),
12세 이곤(以坤) 충순위(忠順衛) 벼슬
13세 영린(永璘)은 어모장군(禦侮將軍,정3품)-- 지벌리 집뒤 장군묘
14세 (12대)홍(弘)은 참봉(參奉 종9품),지벌리 뒤묘15세 명신(命申1569생), 창신(昌申), 무신(武申)
16세 (11대)
17세 (10대)
18세 (9대)
19세 (8대)
20세 (7대)
21세 (6대) -- 한의사(고조의 고조) 지벌리 집터
22세 (5대)-- 미녀고모
23세 (4대 고조부)--- 한의사 용학
24세 (3대 증조부)4명 고조 용출
25세 (2대 조부)이… 5명 증조
26세 (1대 부)호,용,도
27세,(0대)구왕,인구,태구
28세 영준,
8세(八世) 유신(惟新, AD 1374생)은 문과에 급제하고 통훈대부 영산현감이다.
영산현감공(종6품) 유신의 차남 9세(九世) 시(施)는 조선 태종 때 성균관 생원(生員)이고
고성에서 영산 현풍을 거쳐 개진면 구곡에 입향하였다. 이 때가 약 600여 년 전 조선
세종 때이다.
9세 입향조 시(施)공이 호은공파 내에 생원공파(生員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공은 구곡 입향 후 10세(十世) 원하(元廈), 11세 예(禮), 12세 이곤(以坤) 충순위(忠順衛)
벼슬을 지냈다. 13세 영린(永璘)은 어모장군(禦侮將軍,정3품), 14세 홍(弘)은 참봉(參奉
종9품, 아마 지벌리 차남인 것 같음, 아들이 한의사로??) 을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죽만 먹고 6년간 시묘살이를 해 당시 향리에서 모두가 칭송했다.
15세 명신(命申)은 1569년에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다. 정한강·김송암 양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배우고 익히며 덕성을 훈도 받아 현인이라 했다. 은거
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니 한때의 어질고 빼어난 사람들이 그 문하에서 배출됨이 많았
으니 허미수(許眉叟) 목(穆)과 정운계(鄭雲溪) 홍석(弘錫)과 같이 그 중 뛰어난 제자였다.
동생 15세 창신(昌申)은 효성과 우애를 돈독히 행한 사람이다. 그 어진 형에 아름다운
아우라 일컬어졌다. 또한 동생 15세 무신(武申)도 행의(行義)로서 드러난 사람이었다.
1637년 명신(命申, 호 癡齊)이 돌아가시고 이후 약 400년 구곡(구실) 입향 600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은 척박한 산간 농촌생활 속에서도 꾸준히 학문을 연마하고 효성과
우애를 잃지 말라는 선조들의 유훈을 지키며 열심히 살고 있다. 지금 고향을 지키며
사는 후손들은 불과 30여 가구에 불과하나 도회지와 외국으로 나가 살고 있는 종친
의 수는 400여 가구에 이른다.
5-3. 의령현 세거지
1세 허염
2세 허군자(성있는 것은 종손)
3세 허자
4세 허송죽,연
5세 (허연)허인전,소구,천기,유전
6세 (허인전) 허의,영 (유전)화,창
7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옹[가락군파] ,기[호은공파],인
8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기)유신[영산현감]
7세 허기(許麒)의 세 손자 중 장손 9세 허려는 고성
8세 장자 영산현감공 유신
9세 (허유신)장손 허려(許旅,고성 ),시(현풍,구곡),선,온
10세 (허려)허원필(許元弼,고성), 허원보(許元輔)(의령) 허원질(許元質)
11세 (허려의 차남)원보((許元輔: 1455~1507년)가 혼인 후 새살림을 의령현 가례
(嘉禮)에서 꾸렸는데,
12세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가 1478년 : 이것이 김해
허씨가 의령현에 본격적으로 살게 된 계기이다. 그때는 혼인 시기가 빨랐다는 점과
허원보의 장남 허수(許琇)가 1478년에 태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1480년 전후로
허원보가 가례로 이주하였으리라 본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허기의 둘째손자 허시
(許施)의 둘째아들 허의선(許義先: 허원보의 사촌)이 현재의 의령군 봉수면 죽전에 이주.
7세 기(麒)이다. 고려 충숙왕(1330년대) 재위 시에 출생하고 이조초(1390년대)에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된다. 시호는 정절(貞節), 호는 호은(湖隱), 휘(諱)가 기(麒)이다.
고성에 온 지 26년 뒤 1392년 이성계가 혁명을 일으키자 고려 충신으로서 절개를
지켰다. 조선 숙종 13년(1687년) 유학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흠모하여 고성에
연서원(道淵書院)을 세우고 위패를 모시었다.
5-4. 의령 봉수면 세거지
1세 허염
2세 허군자(성있는 것은 종손)
3세 허자
4세 허송죽,연
5세 (허연)허인전,소구,천기,유전
6세 (허인전) 허의,영 (유전)화,창
7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옹[가락군파] ,기[호은공파],인
8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기)유신[영산현감]
7세 (허연,허인전,허의의 차남)허기
8세 허유신(독자, 영산현감)
9세 (허유신)허려, 둘째 차남 시(許施)(현풍,구곡) 셋째 선, 넷째 온(2조부의 양자)
10세 (허유신,시) 허원하(구곡), 둘째아들 의선(許義先: 허원보의 사촌)이 현재의
의령군 봉수면 죽전에 이주
5-6. 홍천 세거지
1세 허염
2세 허군자(성있는 것은 종손)
3세 허자
4세 허송죽,연
5세 (허연)허인전,소구,천기,유전
6세 (허인전) 허의,영 (유전)화,창
7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옹[가락군파] ,기[호은공파],인
8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기)유신[영산현감]
5세허유진
6세 3째 허창
7세 2째 허귀년
8세 장남 허형
9세 추,윤,치,수 ?
10세 ?
11세 희온,희량
12세 희온 할아버지는 효동(孝童), 효손(孝孫), 효성(孝誠) 세 아들
희랑 할아버지는 장손 냉손(冷孫)
13세손 (효동의) 허세형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은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許黃玉)과 결혼해서 열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아들과
막내아들에게 허씨(許氏)라는 성을 내렸다. 허황후가 임종할 때였다. “머나먼 동쪽 나라로
시집와서 대왕을 모시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사오나 그래도
아쉬운 일이 있다면 저의 성(姓)을 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로왕은 왕비의 유언을 받아들여 한 아들보다는 아들 둘에게 성을 내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되어 둘째와 막내인 열째아들에게 모성을 따르도록 했다. 홍천군 내촌면에 있는 김해
허씨 재실에 보관 된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막내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를 이었다고
전한다.
“김수로왕의 10세손이던가, 구해왕이 신라에 나라를 넘기게 됨으로써 가락국(가야)은
망하고 그 자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되었지요.
그때 김해에 그냥 눌러 살게 된 후손들은 본관을 김해로 삼아 김해 허씨가 되었고,
하주(河州;지금의 경북 경산시 하양읍)로 옮겨 세거한 후손들은 하양 허씨, 양천에 터를
잡은 허씨들은 양천 허씨, 태인으로 거처를 옮긴 후손들은 태인 허씨가 된 겁니다.”
지금은 홍천 능평에서 주유소를 경영하고 있는 허만형 김해 허씨 홍천 종친회장이
자세하게 득관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허씨 문중과 허씨에서 갈라진 인천 이씨,양산
이씨도 같은 뿌리라며 자세한 것은 동면의 종친회 사무실로 찾아가서 알아보라고
자세를 낮추었다. 주유소 밖에는 철늦은 눈이 내려 동면을 찾는 일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김해 허씨가 50%로 자손이 가장 많고, 양천 허씨가 40%, 하양과
태인이 그 나머지를 차지할 겁니다.” 허효구 김해 허씨 홍천 종친회 총무가 허씨
성 가운데 김해 허씨 후손이 가장 많다는 화제를 앞세우며 문중 내력을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옆에는 허남설 재무담당이 가끔씩 거들었다.
“시조 할아버지 허염(許琰) 공은 고려 문종 때 출생하여 삼중대광(문관직으로
정1품)에 오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는 간략한 기록만 전해져서 상세한
생몰연대와 행적을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영서지역에서는 보통 김해 허씨를
홍천 허씨 또는 인제 허씨라고 부르는데 홍천으로 낙향한 낙향조 어른이 유자전자
허유전 공이 아니던가요?” “그 어른은 중시조 할아버지이시지요.”
필자가 평소 궁금하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허효구 총무에게 물었다.
김수로왕·허 황후 후손… 기묘사화 때 홍천·인제 은둔
중시조 고려 충숙왕 때 정승 5세손 시중공 허유전(許有全)
중시조 허유전(許有全)은 고려 고종 30년(1243년)에 태어났다. 원종 15년(1274년)에
등과하고 충렬왕 21년(1295년) 감찰시사로 있을 때 폐신(嬖臣;아첨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은 신하)의 무고로 처형될 뻔하기도 했다. 충렬왕 24년(1298년) 국학사예로서
전라도 안렴사가 되고 1307년에는 감찰대부, 지밀직사사가 되어 지공거(知貢擧;과거
시험을 담당하던 정3품직)를 겸임했다. 전조시랑을 지낸 뒤 도첨의참(정2품)에 까지
올랐다. 충숙왕 1년(1314년) 가락군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의 작호를 받았다.
충숙왕 8년(1321년) 수첨의찬성사(정2품)에 이어 정승이 되었다.
“원나라 토번(吐蕃) 그러니까 요즘 달라이라마가 중국 정부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인 티베트로 귀양간 상왕(충선왕)의 환국을 위해 8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흥군 민지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갔었죠. 허나 심양왕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긴 했지만 나라 위해 열정을 보이신 분이 바로 우리 김해
허씨 중시조 유자전자 어른이십니다.” 허효구 총무가 필자의 시선을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아직 대답하지 못한 낙향조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중시조에 이어 6세손 창(敞), 7세손 구연(龜年), 8세손 형(衡)으로 연결되는데,
그러니까 유자전자 허유전 공은 강원도로 낙향한 어른이 아니고. 11세손 희온 희랑
두 어른이시지요. 강원도 깊은 산골마을 홍천과 인제로 낙향한 원인은 중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 때문입니다.” 역사적 비극은 9세손 수(銖)와 10세손 지(誌)부터 시작되어
11세 희온(希溫), 희량(希良)에까지 그 여파가 미친 것으로 김해 허씨 홍천 종친회에서
발간한 “숭모사지(崇慕祠誌)”에 나타나 있다.
한말 독립운동가 허겸·허병률, 의병장 허위 배출 명가
기묘사화 때 척신 위해 피해 홍천, 인제로 낙향한 11세손 희온, 희랑 형제
“당시 수 어른은 진사요, 지 어른은 음주부 관직에 계셨으면서도 사후에 묘소마저
없는 것으로 봐서는 기묘사화 때 얼마나 풍파가 심했던지 그때의 긴박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지요. 따져보면 그 어른들이 낙향조이지만 묘소도 없고 생몰연대도
정확하지 않아 홍천으로 낙향한 11세손 희온, 희랑 두 어른을 낙향조로 보고 있습
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는 허효구 총무는 깊게 한숨을 몰아쉬고 말을
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문중의 기록이 온전히 보존되어 전해지기는 힘들었을
테고...구전에 의하면 희온과 희랑 두 할아버지는 환란을 피해 강원도 땅으로 낙향
하실 때 척신들의 위해를 피하기 위해 변장을 하고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행색을
감추고 가솔들도 여기저기 흩어졌다. 허희온과 그의 아우 허희랑은 우선 홍천
동면으로 피신하여 은거생활을 시작했다. 형세가 불리해졌다. 홍천 관아에까지
어영청 군졸들이 다녀갔다는 소문이 퍼졌다. 반역으로 몰리면 3대를 멸하는 법,
두 형제가 한꺼번에 붙잡히면 대를 이을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형 희온은
아우 희랑을 인제로 피신시켰다. 난이 평정되고 3년이 지나도 한번 흩어진 가솔
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희공, 희검, 희양 세 아우들은 그래서 영영 이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후 정국이 수습되고 죄목이 신원되어 관직을 회복했다. 홍천과
인제로 내려온 낙향조의 후손 12세손들은 정쟁의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으려고
그대로 홍천과 인제 땅에 눌러앉아 김해 허씨 세계를 이어왔다.
“홍천군 동면 속초 2리 화곡마을에 유택을 장만하신 낙향조 희온 할아버지는
효동(孝童), 효손(孝孫), 효성(孝誠) 세 아들을 두셨고, 인제읍 덕산리에 묻힌 희랑
할아버지는 냉손(冷孫)이란 아드님 한 분을 두셨는데 얼마나 사화 때 혼쭐이
나셨는지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번에는 재무담당 허남설 이사가 설명해
주었다.
서화담과 황진이, 박연폭포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한다. 그 유명한 화담
서경덕 선생과 허효동은 절친한 사이였다. 서경덕이 벼슬을 멀리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은둔거사 허효동을 만나러 왔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던가. 홍천 땅에
발을 디뎠을 때는 이미 허효동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서경덕은 한발 늦게
찾은 자신을 원망했다. 상주인 13세손 허세형은 아버지를 만나러 온 서경덕에게
아버지의 묫자리를 봐 달라고 간청했다. 서경덕 어른이 시서는 물론 풍수에도
달인이라는 말을 생전의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세천손 자리를 원하느냐 아니면 삼대정승 자리를 원하느냐?”
상주는 백세천손 자리를 원한다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평소 아버지 허효동이
후손이 약하다고 입버릇처럼 뇌이던 말이 떠올랐다. “좋은 자리를 버리게 되었
구나.” 서경덕은 삼대정승 자리를 바라보며 아쉬워했다. 사화 때 집안이 흩어져
후손이 약하다는 아비의 유훈을 따른 묘소가 지금 홍천군 동면 성수리에 있다.
“백세천손 자리에 효동 어른의 묘소를 써서 그런지 낙향조 이후 5천 세대를 넘게
문중 식구들이 늘어났습니다. 사화 때 우리 선조들이 당한 쓰라린 아픔 때문인지
지금도 우리 허씨들은 진취적이기보다는 온후하고 순박한 편이지요. 허씨 문중
가운데 초·중등학교 교장을 지낸 인물들이 백여 명은 될 겁니다.”
허효구 총무가 족보를 덥고 따로 적어놓은 기록을 펴보이며 말했다. 근대에
들어와 가문을 빛낸 인물은 독립운동가 허겸, 허병률, 의병장 허위 등이 있고
현대에 들어서 가문의 위상을 높인 사람들로는 허정 전 국무총리, 허명구 강원
학원 설립자, 허필국 전 서울체신청장, 허종구 전 강원고등학교장, 허남성
국방대학원 교수부장, 허범량 진흥청 연구실장, 허만영 전 평창경찰서장, 허만수
김화중고등학교장, 허만겸 전 철원 농협지부장, 허남열 횡성 농협조합장, 허응구
원주시 의원, 허을영 허필홍 홍천군 의원, 허만석 춘천 관리공단이사장, 허정량
전 초등학교장, 허선 연역 공군 중령, 허혁구 홍천군 의회 의사과장, 허남욱
강원대학교 교수, 허승구 홍천 좌운초등학교장, 허만봉 도교육청 장학관 등이 있다.
[출처 : 도움말 주신 분 / 허만형 김해 허씨 홍천종친회장. 허원구 전 인제종친회장. 허남설 홍천종친회 재무이사.
허우봉 홍천종친회 이사. 허남규 홍천종친회 이사, 글/사진 소설가 최 종 남]
5-6. 지수면 GS가의 김해 허씨
1세 허염
2세 허군자(성있는 것은 종손)
3세 허자
4세 허송죽,연
5세 (허연)허인전,소구,천기,유전
6세 (허인전) 허의,영 (유전)화,창
7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옹[가락군파] ,기[호은공파],인
8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기)유신[영산현감]
7세 허기(許麒)의 세 손자 중 장손 9세 허려는 고성
8세 장자 영산현감공 유신
9세 (허유신)장손 허려(許旅,고성 ),시(현풍,구곡),선,온
10세 (허려)허원필(許元弼,고성), 허원보(許元輔)(의령) 허원질(許元質)
11세 (허려의 차남)원보((許元輔: 1455~1507년)가 혼인 후 새살림을 의령현 가례
(嘉禮)에서 꾸렸는데,
?
11세 허문손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리도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11세 허문손의 대에서였다. 이후 4백여 년간 김해허씨 세거의 터로 지켜져 왔다.
이 마을 2백여 호 가운데 1백여 호가 자손들이다.
지수면 김해 허씨 가문(GS家) 다섯째 며느리인 김영자씨는 질녀인 허명자, 질부
김녕자와 함께 집안의 며느리와 딸들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 문화와 조리법을
기억할 수 있도록 이 책을 기획하고 엮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음식들을
계절별로 나눠 정리한 것도 그때그때 제철재료들을 기억하고 활용하라는 친절한
의도가 숨어 있다.
5-7. 선산 세거지
1세 허염
2세 허군자(성있는 것은 종손)
3세 허자
4세 허송죽,연
5세 (허연)허인전,소구,천기,유전
6세 (허인전) 허의,영 (유전)화,창
7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옹[가락군파] ,기[호은공파],인
8세 (허염,허군자,허자,연,허인전,허의,기)유신[영산현감]
5세허유진
6세 3째 허창
7세 둘째 허구년
8세 장남 허형
9세 셋째 허치
10세 허선
11세 허정
12세 허백기
[출처 : 선산일보 12.7.26 .선산 고아, 김해허씨 3대 옥당· 4대 문과 집안]
고려 문종때 탄생해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으며, 5세손 허유전(許有全)은 시호가 충목공으로 충렬왕조에 감찰
어사로 국자사예전조시랑(國子司隸銓曹侍郞)를 지냈고 도첨의참리밀직사사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으며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에 올랐고 충숙왕때
정승을 역임했다.
허유전의 증손자 허치가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사간원 정언 재임시절인 1444년
(세종 26) 함길도의 행성 쌓는 일을 정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성을 쌓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가뭄을 만나 억지로 쌓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바가 아닙니다. 또 진(鎭)의 백성들은 새로 옮겨 간
지가 오래 되지 않아서 이미 금년에는 다 쌓을 수 없는 일이니, 우선 풍년 들기를
기다려서 쌓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백성의 부역을 덜어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바른 소리를 하는 선비였다. 그 후 사간원 헌납,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기에
제학공파(提學公派)라 칭하고 파조이며, 묘는 용인에 있으며 부인 전주최씨의
묘갈은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한 최응룡이 찬했다.
영남의 선산(善山) 인물이다. 따라서 허치의 자 허선(許?), 손자 허정(許禎), 증손자
허백기(許伯琦)로 이어지는 명문가문이다. 특히 이 가문은 3대 옥당(玉堂)이다.
즉 허치, 허선, 허정 3대가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직제학으로 근무하였기에
‘3대 옥당’이라 칭했다. 또한 허치, 허선, 허정, 허백기로 이어지는 4대가 문과에
급제하였기에 ‘4대 문과’ 집안이라고 말한다.
이 가문은 선산고을의 조선 전기에는 3대 옥당, 4대 문과 집안은 유일무이하다.
허치는 1438년(세종 20) 식년시 문과 급제하여 홍문관 직제학 벼슬을 거친
후에 말년에 입향하여 선산에 명문가를 이루었다. 허선은 1432년(세종 14)에
태어났고 자는 자술이다. 1456년(세조 2) 식년시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 장례원 사평, 성균관 학정, 병조정랑, 이조좌랑,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했으며 세조대왕실록 편찬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 허정은 자가 희인이다.
1494년(성종 25)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 청주목사, 영천군수,
홍문관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허백기는 1493년(성종 24)에 출생하고 자는 여진,
호는 삼송, 호재이며 시호는 정헌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1513년(중종 8) 식년
진사시를 거쳐 1519년(중종 14) 기묘별시로 문과급제한 뒤 예문관 사관과
승정원 주서가 되고 호당(湖堂)에도 근무했다. 1524년(중종 19) 형조와 병조좌랑을
지내고 1526년(중종 21) 형조정랑, 1528년(중종 23) 경상도 도사, 그리고 이듬해는
진위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1년(중종 36) 사헌부 헌납, 사헌부
장령을 거처 1544년(중종 39) 사간원 사간, 홍문관 교리, 승정원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형조참의를 거처 1552년(명종 7) 충청도 공주목사 때에 김정선생의
충암집을 간행을 주관하고 발문을 썼다. 1553년(명종 8) 장례원 판결사를 지낸
다음 첨지중추부사를 거쳐서 1562년(명종 17) 동지중추부사로서 관직에서
물러나서 1563년(명종 18)졸하였으며 묘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 있다.
그는 15, 16세기의 명신들이 전시에서 작성한 책문(策文) 가운데 우수한 것들을
뽑아 편찬한 전책정수(殿策精粹)란 책에 습상책(習尙策)이란 책문이 있으며,
기묘사화에 관련되어 자손이 경기도 용인에 숨어 살아서 현재 후손들이 경기도
용인에 터를 잡아서 처인구 관내 고림리, 갈현리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허치의 둘째아들 허량(許諒)은 자가 학고이며, 호는 송재로 진사시에 입격하고,
밀양교수를 지냈다. 선산 해평에 거주한 선비로서 용암 박운(朴雲)의 외조부이다.
아들 허유(許裕)도 연산조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훈도를 역임했다.
셋째아들 허흔(許?)은 1468년(예종 즉위년)에 태어나서 진사시에 입격했고,
아들 허비(許裨)는 유학자이며 그 후손들은 선산 고아읍 파산리에 거주하고 있다.
조선전기에 이렇게 명문가로서 선산의 학풍을 주도하던 문중이 현재는 많이
떠나고 고아 파산리, 해평 괴곡리에 후손들이 살고 있다. 구미시 선산유림은
이 문중의 내력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5-8. 파주,용인 세거지
5세허유진
6세 3째 허창
7세 2째 허구년
허염을 시조로 하고 허구년을 파조로 하는 경기도 용인시 세거 성씨.
[연원]
성(姓)은 원칙적으로 아버지를 따른다. 그러나 유독 어머니의 성을 따라 가문을
창업하고 2천여 년을 이어온 성씨가 있다. 바로 허씨(許氏)다. 김해(金海)·하양(河陽)·
양천(陽川)·태인(泰仁) 네 본관의 허씨들의 시조 어머니는 인도?아유타국 출신의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許黃玉)이다.
허 황후는 아들 열 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등(登)은 김씨로 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로 사성하였다.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경남 하동에 칠불사가 있다)로 성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김해김씨는
아버지의 성을, 허씨는 어머니의 성을 계승한 것이다.
35세손 허염(許琰)의 후손은 김해, 33세손 허강안(許康安)의 후손은 하양, 30세손
허선문(許宣文)의 후손은 공암(김포군 양천), 역시 30세손 허사문(許士文)의 후손은
태인에 자리잡아 각각 김해, 하양, 양천, 태인 파의 시조가 되어 분파한다. 또 허씨 중
인천이씨가 갈라진다. 그래서 김해김씨·허씨·인천이씨는 지금도 서로 결혼을 피한다고
한다.
[입향경위]
『양지현읍지』에 주북면(朱北面) 박성동(朴成洞)의 세거 성씨로 나타난다. 양지면의
김해허씨는 증성군(甑城君) 구년파(龜年派)이다.
[관련유적]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남쪽 고속도로 건너편 산에 증성군?허구년의 시조단을
비롯하여 허백기·허선·허정·허충길·허치 등의 분묘가 있고 모원재(幕遠齋)를 지어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이곳에서 김해허씨 일문이 세거하면서 많은 인물이 배출
된 것으로 전해진다.
6. 과거 급제자
김해 허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하였다.[1]
고려 문과
허유전(許有全)
문과
허눌(許訥) 허돈(許燉) 허만필(許萬弼) 허백기(許伯琦) 허석(許) 허선(許銑) 허선(許譔)
허수겸(許守謙) 허식(許湜) 허심(許鐔) 허원(許垣) 허정(許禎) 허직(許㮨) 허책(許策)
허추(許錘)
무과
허간(許侃) 허감(許玵) 허강(許𣷣) 허국(許國) 허국형(許國衡) 허권(許權) 허규(許圭)
허규(許奎) 허금산(許今山) 허당(許鏜) 허대곤(許大坤) 허대붕(許大鵬) 허대승(許大承)
허대운(許大云) 허대임(許大任) 허돌남(許乭男) 허득(許得) 허득룡(許得龍) 허민(許旻)
허복룡(許福龍) 허봉(許奉) 허선(許繕) 허성남(許成男) 허성회(許成回) 허세필(許世弼)
허숙(許淑) 허숙(許琡) 허순경(許順京) 허시일(許時逸) 허시준(許時俊) 허시환(許時還)
허심(許鐔) 허연(許演) 허영원(許榮遠) 허영한(許永汗) 허완(許浣) 허육(許稑)
허윤남(許允男) 허이충(許以忠) 허익(許榏) 허재(許榟) 허전(許銓) 허정(許楨)
허정(許珵) 허정립(許廷立) 허정은(許廷誾) 허종남(許從男) 허즙(許楫) 허즙(許楫)
허직(許稷) 허진(許鎭) 허진구(許震龜) 허집(許鏶) 허천정(許天挺) 허충남(許忠男)
허해(許諧) 허현(許俔) 허현(許鉉) 허호(許滈) 허홍립(許弘立) 허황(許璜) 허회(許澮)
허흥우(許興遇) 허희봉(許希奉)
생원시
허갑(許䘥) 허강(許堈) 허개(許介) 허건(許健) 허겸(許謙) 허관(許灌) 허광익(許光益)
허국정(許國禎) 허국필(許國弼) 허규(許䅅) 허기(許棋) 허담(許紞) 허대희(許大熙)
허돈(許暾) 허동범(許東範) 허두수(許斗壽) 허백영(許伯瑛) 허보(許俌) 허복(許輻)
허사렴(許士廉) 허사증(許思曾) 허상(許襐) 허선(許㷽) 허선(許僐) 허속(許鋉)
허숙(許宿) 허식(許烒) 허심(許諶) 허육(許堉) 허윤(許綸) 허의(許扆) 허임(許絍)
허전(許銓) 허정속(許廷㻋) 허제(許濟) 허종길(許從吉) 허주(許綢) 허준(許晙)
허충길(許忠吉) 허탁(許鐸) 허한우(許漢佑) 허흡(許㬛) 허희(許僖)
진사시
허관(許灌) 허국정(許國禎) 허눌(許訥) 허담(許橝) 허동로(許東潞) 허만섭(許萬燮)
허만필(許萬弼) 허발(許墢) 허백기(許伯琦) 허백원(許伯瑗) 허빈(許鑌)
허사렴(許士廉) 허석룡(許錫龍) 허선(許璇) 허섭(許𤫙) 허섭(許燮) 허섭(許灄)
허순(許峋) 허의경(許義卿) 허임(許恁) 허조(許祚) 허종(許綜) 허종길(許從吉)
허좌(許佐) 허찬(許瓚) 허홍경(許弘卿) 허환(許綄)
7. 집성촌(세거지)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모평리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야시대리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
강원도 홍천군 동면 속초리, 후동리
경기도 용인군 일원
경남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봉수면 죽전리
경남 고성군 마암면 일원
경남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오도리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갈산동
경북 고령군 개진면 구곡동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
종 친 회
김해허씨시중공파중앙회 032-937-1522 인천-강화-불은-두운(산)-297
김해허씨종준사무실 053-581-0144 대구-달서-이곡-1343-1
김해허씨종친회 051-863-6717 부산-연제-연산1-307-33(수협빌딩5층502호)
허씨대종회 02-2246-4350 서울-동대문-답십리-961...(우성빌딩2층관리사무실)
김해허씨종친회 051-863-6717 부산-연제-연산1-307...(수협빌딩5층502호)
김해허씨종준사무실 053-581-0144 대구-달서-이곡-1343-1
8. 항렬표 (김해 허씨)
26세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우(遇) 만(萬) | 구(九) 량(亮) | 필(弼) 남(南) | 행(行) 령(寧) | 성(成) 성(盛) | 기(紀) 범(範) | 용(庸) 강(康) | 신(新) 재(宰) | 정(廷) 병(秉) | 발(發) 규(揆)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돈(敦) 학(學) | 건(建) 숙(肅) | 인(寅) 연(演) | 경(卿) 흔(欣) | 진(震) 근(根) | 용(龍) 완(玩) | 보(寶) 성(性) | 업(業) 수(洙) | 동(東) 중(重) | 유(猷) 준(遵) |
===== 어떤 카페 지기님의 말씀 인용 ========
1988년 충목공 허유전[1243(고종 30)∼1323 (충숙왕 10)] 할아버지의 강화도 묘가 발견되기
이전 조선씨족통보에 근거한 분파로 7개파로 나누어 집니다.
충목공의 묘가 발견되기 이전에는 호은공기파, 중승공린파,전직공인부파,증성군구년파를 모두
4개의 파로 나누어 있었고, 중시조가 틀리다 보니 활동도 달리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충목공의 강화도 묘 및 두산재실을 건립, 1991년 충목공파 족보가 발간됨으로써
충목공파(호은공파, 전직공파, 중승공파, 증성군구년파 4개파 통합는 기존 4개의 분파를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김해허씨는 1988년 충목공 허유전 선조의 묘가 발견됨으로써 새롭게 파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최근의 족보 발생은 진주승산문중으로 알고 있으며 충목공파 족보는 1991년입니다.
김해허씨의 중추적인 문중은 진주 승산문중과 충목공파(호은공기파, 증성군구년파[5세
충목공의 3째 아들의 2째 6세 손자 7세]) 문중이 가장 중추적이다고 생각합니다. 김해허씨
특성상 경상남도에 집중되어 있는데, 진주 승산과 김해문중, 충목공 후손들과 대부분을
맥을 같이 한다고 보면 됩니다.
우선 3개의
1. 가락군 인전파(5세,허인전)
2. 충목공파(5세,허유전)
3. 김해 상경공파(4세, 허징)
- 상서공 상파(5세)
- 판서공 언료파(7세)
문중 어르신들이 모이신다면 김해허씨의 대동보 발간도 가능하리라 봅니다.
이 카페의 목적은 종국적으로 김해허씨 대종회 인터넷 카페의 제작으로 연결되어야 할 것입
니다. 양천허시 대종회 카페의 첫 페이지 모습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KB59&fldid=68Or&datanum=100>
많은 젊은 후손들이 자신의 파와 세손 그리고 역사를 알고 싶어 문의하는 글이 보입니다. 김해허씨의 경우 젊은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도 어디 물어볼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은 점점 더 김해허씨 전체 문중을 역사속으로 잊혀지게 만들것임에는 분명 합니다. 제가 김해허씨 대종회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을 절실해 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인터넷 사용에 어려움이 많으신데, 어르신들의 좋은 말씀을 전해줄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통과도 직결됩니다. 김해허씨 청장년들이 전통에 관심이 없다. 현대사회에서 바쁘게 사는 것도 있겠지만.... 김해허씨 청장년들의 그것을 연결하고 표출해 낼 방법이 없었던건 아니었던지요! 제가 운영자로 있는 김해허씨 사랑방에는 진주 승산문중과 충목공 호은공파(경남고성 및 의령, 고령 개진 구곡동) 문중의 어르신 들이 계십니다. 김해문중의 총무로 계시는 회원도 계시고, 이 카페 가입을 권유드리겠습니다. 지방에 가보면 김해허씨에 대한 많은 유적과 기록들이 허물어지고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
출처: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KB59&fldid=68Or&datanum=100>
======== 인용 끝 ===========
9. 허씨의 본관별
9-1) 김해 허씨
고려초기 김해를 세거지로 거주하던 허씨중에서 송도 등으로 벼슬길로 나가
먼저 족보를 만들어 주류 세거지는 늦게 본관을 만들어 김해 허씨가 허황옥
(인도印度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서 16세,서기48년)의 35세손 시조
허염(許琰AD 1047~1082)이 중시조(中始祖, 1세 )하여 늦게 분파되었다.
김해 김씨, 경주 김씨, 김해 허씨, 양천 허씨, 태인 허씨, 인천 이씨, 일본(허왕옥
의 막내 아들도 허씨) 으로 분파되어 모두 동성동본이다.
김해 허씨의 시조는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 ?∼188년)이다. 수로왕
(재위 42~199년)은 열 아들을 두었는데, 왕비의 청에 따라 두 아들로 하여금
허씨 성을 따르게 하였다. 열 아들 중 맏아들은 수로왕을 이어 거등왕이 되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서기 103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서 모두 성불하여 수로왕이
지은 하동 칠불사에 일곱 부처의 탱화(불상 그림)로 모셔져 있다.
6세기에 가락국이 망한 뒤 허씨들은 각 지방으로 흩어져 살았고, 나중에
나누어진 여러 본관(분본관, 분관)과 중조(중시조, 분관조)가 나오게 되었다.
김수로왕비의 35세손 허염(許琰)은 김해(경남) 허씨의 중시조가 되고, 33세손
허강안(許康安)은 하양(경북) 허씨의 중시조가 되고, 30세손 허선문(許宣文)은
양천(경기도) 허씨의 중시조가 되고, 30세손 허사문(許士文)은 태인(전북)
허씨의 중시조가 되는 등 많은 새로운 본관과 중시조가 나왔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부인인 수로왕비 허황옥을 연원으로 삼는 한국의 성씨이다. 김해, 양천, 하양,
태인을 본관으로 한다.
이 문서는 김해 허씨, 양천 허씨, 하양 허씨, 태인 허씨라고 입력해도 들어올 수 있다. 이 성씨가 다른
성씨들처럼 앞에 본관이 적힌 채로 항목이 개설되지 않은 이유는 다른 씨족과는 달리 어떤 본관을
가지더라도 조상이 같은 동본관계의 성씨이기 때문이다. 김해 김씨와 경주 김씨의 관계처럼 완전히
타인 관계가 아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박씨가 있다. 박씨의 경우는 이보다 더 심한데, 박씨는 54개의 본관이 모두
시조가 박혁거세 한 사람이다. 이는 신라의 왕으로서 박혁거세의 아들들과 그 후손들이 세를 불리면서,
분관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일본에 갈 때는 주의해야 한다. 일본어로 許さん(허씨)이라고 쓰면 '용서 못 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제정 이전에는 영문명이 관용적으로 Huh로 쓰는 경우가 많지만,
'Huh'라고 표기하면 '뭐라고?'라는 뜻이 될 수 있어서, 로마자 표기법에 따른 표기인 Heo와 Her, Hur
등 표기가 갈리기도 한다.
허씨 중에서도 김해 허씨와 양천 허씨가 90% 이상을 차지한다. 대개 양천 허씨는 수도권에, 김해 허씨는
경상도에 많이 살고 있다.
9-2) 양천 허씨
양천 허씨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가락국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30세손으로
전해진다. 허선문(許宣文)은 공암촌(孔巖 : 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 살면서
농사(農事)에 힘써 많은 양곡(糧穀)을 비축(備蓄)하였는데,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군량이 부족하여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군량(軍糧)을 보급해 주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과의
싸움 중 말과 식량을 제공한 공으로 그를 공암촌주(孔岩村主)로 임명하여
공암촌을 식읍으로 내렸고, 허선문은 고려 건국에 대한 공으로 삼한공신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허선문은 공암 허씨의 시조가 되었고 공암이 양천으로 고쳐짐에
따라 양천 허씨(陽川 許氏)로 불리게 되었다.[1]
9-3) 태인 허씨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비(金首露王妃) 허황옥(許黃玉)의
30세손으로 전한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부마(駙馬)였으며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태인허씨족보(泰仁許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6세손 허포(許褒)가 고려 때
기천현령(奇川縣令)ㆍ풍해도 관찰사(豊海道觀察使) 등을 지낸 후 태산군(泰山君)에
봉해졌으며, 그로부터 위로 4대(四代)와 아래 2대(二代)가 실전(失傳)되어 포(褒)를
중조(中祖)로 삼고 본관을 태인(泰仁)으로 하여 예의전서(禮儀典書)를 역임한
허잠(許岑)을 1세조로 계대하여 왔다.
9-4) 하양 허씨
하양(河陽)은 경상북도 경산군의 북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려 때에 하주,
1018년(현종 9)에 하양으로 개칭하였으며, 1742년(영조 18)에 화성현이
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하양군으로 바뀌었다. 1914년에 경산군에 편입되면서
하양면이 되었고 1973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하양허씨(河陽許氏)는 고려때 호부낭장을 역임한 허강안(許康安)을 시조로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강안은 가락국 허황후(許皇后)의 33세손으로 전하며,
말년에 호장을 지냈고 하주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본관을 하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다가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화성으로 개관하였으며 그후 하양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허강안의 손자 허작린(許綽麟)이 고려에서 검교대장군을
지냈으며, 증손 허신(許愼)은 호부주사, 동정등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개성 부윤 귀룡(貴龍)의 아들 주(周)는 우왕때 지양주사가 되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구축했고, 조선이 개국한후 한성부윤,·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 개성유후사유후,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허주(許周)의 동생 허조(許稠))는 공양왕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관직을 두루 역임한후 조선세종때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라 치사(致仕)했다.
경사(經史)에 밝았던 허성(許誠)은 한성부 판윤 주(周)의 아들로, 예조와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예문관 대제학을 재냈다. 허조(許稠)의 아들 허후(許珝)는 문종때 형조판서로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단종때 좌찬성이 되어 황보 인, 김종서등과 함께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는데 앞장섰으며,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이를 개탄하여
고기를 먹지 않아 의심을 받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그외 중추원
부사 허척(許倜)의 아들 허계(許誡)는 밀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으며, 병조참의를 거쳐 경주부윤을 역임하여 가문을 크게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하양허씨(河陽許氏)는 남한에 총 3,596가구,
14,78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9-5) 인천 이씨
인천 이씨(仁川 李氏)는 인천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경원 이씨(慶源 李氏)라
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 14년(755년) 허황후(許皇后)의 23세손인 아찬(阿飡ㆍ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등)
허기(許奇)가 신라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갔을 때 그해 11月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여
현종(玄宗)이 756년 촉(蜀)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그때 허기(許奇)는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호종(扈從)하였으며, 757년 난이 평정되어 현종이 도성으로 돌아와서 이를 가상히 여겨
시서(詩書)와 황제의 성(姓)인 이씨(李氏)를 사성(賜姓)하였다. 758年 허기(許奇)가 신라로
환국하자 신라 경덕왕은 그 공을 기려 소성백(邵城伯)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 1,500호를
봉하여 세습케 하였으며, 이로써 허씨(許氏)에서 이씨(李氏)가 되었으므로 인천 이씨 문중에서는
이허기(李許奇)를 득성조(得姓祖)라 한다. 득성조(得姓祖) 이허기(李許奇)의 10세손으로 고려
현종(顯宗) 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이허겸(李許謙)에게는 2남 1녀가 있었는데
그의 딸이 김은부(金殷傅)에게 시집가서 세 딸을 낳았고, 이 세 딸이 모두 현종(顯宗)의
비(妃)가 되었다. 인천 이씨는 허(許)씨에서 갈린 분적종(分籍宗)으로 경원 이씨(慶源李氏) 또는
인주 이씨(仁州李氏)로도 불렸다. 인천(仁川)은 경기도 중서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매소홀현이었는데 경덕왕때 소성으로 개칭, 율진군(시흥군)의 영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413년(태종 13)에 인천군이 되었으며 1949년 인천시로 개칭되고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 승격,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10. 성씨에 관한 일화
성씨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 "첩은 동토의 객이니 사후에 오성을 전하지 못함이 한이 되옵니다."
문헌에 따르면 수로왕비인 허황옥은 인도 지방에 있던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16세
때 배를 타고 지금의 경남 창원군 웅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
을 했는데 김수로 왕이 의장을 갖추어 영접한 후 왕비로 맞이했다고 한다. 그 후
10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하루는 비가 수로왕에게 말하기를 "첩은 동토의 객이니
사후에 오성을 전하지 못함이 한이 되옵니다."하니본격 가야시대 페미니스트
왕이 감동하여 맏아들 거등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여기서 두
아들은 차자와 삼남을 이야기 하는 듯 하다.) 허황후의 성인 허씨로 사성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로 성불했다고 한다
- "속설로 김해 김씨 남자는 생식기불알에 점이 있다."
참고로 이 성씨 설화는 고대 한반도와 인도 및 남아시아 일대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다.실제로 하플로 그룹 연구에서 인도에서 주로
나타나는 하플로 그룹이 한반도에 꽤 나타난다고 한다.
속설로 김해 김씨 남자는 생식기불알에 점이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같은 시조를
두고 있는 허씨와 인천 이씨에게도 적용되는 속설이다. 꽤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속설에 불과하다. 근데 의외로 확인해 본 허씨 남성들의 말에 의하면 확실히 있다고
하는 경우가 꽤 된다. 불알에 없으면 귀두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속설에도 엄청난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는데,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먼저 첫 번째 이야기는 비교적 점을 확인 하기 쉬운 남성들당연히 생식기가 밖으로
나와있으므로 자기가 스스로 확인 하기 쉽다의 점을 설명하기 위한 이야기로 보인다
-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후손은 거진 고추에 점"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남근이 너무 커서부럽다. 배필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한번 똥을 싸면 산만하게 싸는 여자가 있다하여 찾아온곳이 경남 양산이었다.
어째 이야기가 신라의 지증왕 이야기와 비슷하다 지금도 양산에 있는 산은 모두 그
여자 똥을 핵으로 가지고 있다고 전해져 올 정도로 큰 똥을 생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 여자를 찾던 어느날, 여행중 갑작스런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어느 노인이
강을 건너지 못하자, 김수로가 남근을 세워 가죽다리를 만들어 노인을 건너게 해주었다.
왕의 거시기를 밟고 가는 노인과, 거시기로 다리를 놓은 왕...흠좀무 그렇게 노인이
다리를 건어고 난뒤 담배 곰방대로 "고놈 참 용하네" 하고 거시기에 담배대를 톡!
쳤는데, 그 안에 있던 뿔똥이 떨어져 상처가 되서 남은게 점이 되어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후손은 거진 고추에 점을 달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해 김씨들 사이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허씨쪽의 버전은 조금 다르다.
허씨 쪽의 버전은 여성에게도 점이 있다는 것을 누군가 발견했는지 그것까지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관가야의 수로왕이 수로왕비와 혼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가야에 큰 불이 났다.
가야의 모든 사람들이 나와 불을 끄려고 온 힘을 다 했으나,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수로왕이 오줌발을 불이 난 자리에 쏘자 그 불이 꺼지기 시작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따라 하였으나, 오직 수로왕의 오줌발만이 그 불을 끌 수
있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수로왕비가 치맛폭을 걷어 붙이고 오줌을 쌌는데,
이 역시 효험이 있었다. 이에, 수로왕과 수로왕비가 돌아다니며 오줌을 싸고
다녔다. 무슨 물을 마셨길래 이런 짓을 할 수 있어요? 그러던 와중에 불똥이
수로왕과 수로왕비의 국부에 튀었고, 그로 인해 수로왕과 수로왕비의 후손들
에게서는 국부에서 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불로 인한 흉터가 국부에 남아 후손들에게 까지 점으로 유전되었다는
이야기로, 사실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점은 멜라닌의 발현에 의한
것으로, 발현시기의 유전의 가능성은 있을 수 있으나, 그 부위가 늘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속설은 비교적 최근까지도 거론되었으며, 실제로 어떤 주부의
증언에 의하면, 아들이 태어나자 시아버지와 그 가족들이 모두 몰려와 아이의
고추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도 한다.
진짜 유전적으로 그러한 특징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조선 후기에 횡행하던 족보
거래로 인해 지금은 무의미한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일설에 의하면, 족보 매매라는
특성상 주요 성씨에 국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허씨에게는 그러한 요소가
남아 있을 수 있다고도 한다. 허씨의 경우 허균이라는 당시 기준의 역적이 있었고,
실제로허균 이후의 문학에도 악녀 역할의 캐릭터에 허씨성이 붙을 정도로 취급이
안습이었다. 당연히 족보를 팔고 싶어도 팔리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
- 동성동본 문제
김수로왕의 아내가 허씨였기 때문에 후손 중 김수로왕의 아내의 성을 따라서
김씨에서 갈라져 나온 허씨[2]와 김해 김씨는 동성 동본관계가 되어 서로 혼인을
금한다는 옛 통념이 있었다. 여기에 김해 허씨 말고도 양천 허씨나, 같은 계열
성씨인 태인 허씨에서 갈라져 나온 인천 이씨 등 갈라져나온 성씨가 꽤 많아서
옛 통념상 동성동본이 되어 혼인을 금하는 성씨들이 제법 된다. 하지만 이것은
통념에 불과한 것이고 민법상 동성동본 금혼 제도가 있었을 때에도 일단 본관만
다르면 결혼은 가능했다. 더욱이 동성동본 금혼이 폐지된 지금에는 8촌 이내만
아니라면 결혼이 가능하다
.
- 김해 허씨가 늦게 본관한 이유
허황옥의 30세손 선문을 시조로 하는 공암 허씨 (여기서 공암은 양천의 옛 이름으로
현재는 양천 허씨라 불리는 씨족이다.), 같은 30세손 사문을 시조로 삼는 태인 허씨,
33세손 강안을 시조로 삼는 하양 허씨, 35세손 염을 시조로 삼는 김해 허씨로 분관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3]
김해 허씨가 늦게 분관한 것에는 족보체계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가야는
김해지역에 있었으므로, 당연히 허씨의 집성촌 역시 가야지역에 밀집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분관을 하게 되는 경우는 세거지가 옮겨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가야에 남아있던 허씨들이 다른 지역으로 간 허씨들이 만든 족보를 보고 이를
따라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위에 적힌 시조들은 모두 다른 성씨에서 였으면
중시조로 분류되어야 할 인물들이다.
『조선씨족통보』[4]에 따르면 71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양천,
하양, 김해, 태인, 함창, 수원, 양주 외에는 단순한 세거지명[5]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현존하는 본관은 모두 얖서 말한 양천, 태인, 하양, 김해이다.
- 허씨의 유난히 많은 외자 이름
허씨는 유난히 외자 이름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은
김수로왕의 30대손으로 양천(지금의 서울 강서양천구. 양천현의 중심지는 강서구
가양동 일대이다. 또한 가양동에 허선문이 태어났다고 하는 허가(공암)바위가 있다.)
에서 살다 고려 태조 왕건에게 군량을 바친 공로로 양천의 본관을 얻었다. 그 공로로
준왕족의 지위를 보장받아서 당시는 왕족에 한해 사용했던 외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후 지금까지도 양천 허씨들은 외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11. 현대의 인물
허(許) 씨는 가락국 김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에서 시작된다. 허황옥은 아유타국
(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다. 그는 16세(48년) 때 배에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
창원시에 있는 부인당(夫人堂)으로 들어와 정박했다. 그 뒤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한다. 수로왕과 허황후(許黃后)의 혼인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제결혼으로
기록되고 있다.
수로왕은 10남 2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이 허씨로 사성(賜姓)되면서
허씨의 시초가 되었다. 허황후가 자기의 허씨 성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원했기
때문이다. 그 뒤 허황후의 30세손 허선문은 양천허씨, 허사문은 태인허씨,33세손
허강안은 하양허씨,35세손 허염은 김해허씨로 각각 분관된다. 가락국이 신라에
망하고 그 자손들은 흩어져 살게 된 지역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허씨
일파에서 인천이씨(仁川李氏)가 갈라지고, 양산이씨(梁山李氏)는 인천이씨로부터
분관된다. 따라서 허씨, 김해김씨, 인천이씨, 양산이씨는 모두 같은 혈족이다.
함께 ‘가락중앙종친회’를 조직해 유대를 다지고 있다.
김해허씨의 시조 허 염(許琰)은 고려 문종 때 인물이며 삼중대광으로 가락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김해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김해로
하였다.
김해허씨는 고려조에 허홍재(평장사), 허유전(정승), 허 옹(전리판사)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그러나 조선조에서는 크게 번영하지 못했다. 허유전은 1321년
(충숙왕8년) 81세의 노령으로 원나라에 귀양 간 상왕(충선왕)의 환국운동을
위해 티베트까지 갔다 왔다. 그의 후손들이 가장 번창했다.
허 위는 한말 의병을 모아 일군에 맞서 싸운 의병장이다. 그는 1897년(광무1년)
이은찬, 조동호와 함께 의병을 규합해 금산, 성주 등지에서 싸웠다. 의정부
참찬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조약 반대 격문을 돌리다가 체포됐다.
일본은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 2등에 임명했지만 거절하고 낙향했다.
현대 인물은 허 정(국무총리), 허형구(변호사, 대검차장), 허종현(부산대총장,
동의대학장), 허 검(순천향대학장), 허 균(적십자병원장), 허문도(문공부차관),
허만호(대검검사), 허만훈(강원도의회의장), 허 민(연합철강회장), 허정구(삼양
통상회장), 허준구(럭키금성그룹부회장), 허택도(허씨장학회장), 허흡(대구시장),
허갑도(전국택시연합회장), 허경구(국회의원), 허만일(국립중앙박물관사무국장),
허명(사학자, 한국학연구원교수), 허문택(동아대교수), 허석구(농수산부공무원
교육원장), 허선도(국민대교수), 허성호(중앙대교수), 허신구(금성사대표이사사장),
허정호(신한병원장), 허천택(동국대교수), 허창운(서울대교수), 허훈도(대종회장),
허완구(프로씨름협회회장), 허맹구(신일산업 부사장), 허동수(호남정유 전무이사),
허동섭(공학박사), 허남훈(동력자원부자원정책실장), 허남진(금강금속회장),
허복선(제일기계사장), 허상영(중소기업중앙회감사), 허신행(농학박사),
허재구(구로구청장), 허용원(정광섬유회장), 허필은(풍림산업회장),
허학구(정호금속회장), 허형택(해양연구소장, 이학박사), 허 흠(주택은행전무),
허 후(서예가, 경기상업고등학교장), 허 기(안전기획부기획관리관),
허종성(KBS사업단감사), 허화평(청와대수석비서관), 허정훈(부장판사),
허유(시인, 한국투자금융전무), 허정삼(건국대교수), 허재구(세종문화회관장) 씨
등이 있다. (무순, 허씨 본관 및 전·현직 구분 안 됨)
본관 김해는 본래 가락국으로 가야라 부르기도 했다. 낙동강 하류 김해평야에
자리 잡은 가락국은 서기 42년에 수로왕을 시조로 받들고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당시 가락국은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문화와 풍부한 철산지를
보유했다. 양호한 해운의 입지조건을 갖춘 까닭에 일찍부터 해상활동을 통하여
한(漢)의 군현인 낙랑, 대방과 왜와 통교하여 해양왕국을 건설했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지름 22m, 높이 6m의 원형 토분의 웅장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수로왕릉에서는 매년‘추향대제’라 부르는 김해김씨 대제가 열린다.
본관 김해는 경상남도 김해시 지명이다. 낙동강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왔다.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바꾸어 양주(良州 : 梁山)의 관할로
두었다. 1270년(원종 11) 방어사 김훤이 인접 지역인 밀성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김해도호부로 승격되어 세조 때
진(鎭)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고,
1918년에 좌부면과 우부면이 김해면으로 통합되었다. 1931년에는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과 통합하여 김해시가 되었다.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강(姜), 김(金), 나(羅), 류(柳), 모(毛), 문(文), 박(朴), 배(裵), 백(白), 서(徐), 손(孫), 송(宋), 신(辛), 안(安), 양(梁), 여(呂), 오(吳), 윤(尹), 해(李), 임(林), 전(全), 정(鄭), 조(趙), 최(崔), 해(海), 허(許), 홍(洪) 등이다.
1930년 당시 경기도 용인군, 충북 진천군, 강원도 홍천군 일원과 경남 의령군
일원, 경남 합천군 가회면, 경북 달성군 성서면, 경북 월성군 양북면, 경북
고령군 개진면, 경북 선산군 고아면, 경북 선산군 구미읍, 평북 창성군 창성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리도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11세 허문손의 대에서였다. 이후 4백여 년간 김해허씨 세거의 터로 지켜져 왔다.
이 마을 2백여 호 가운데 1백여 호가 자손들이다. 그 밖에 집성촌은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 경남 의령군 칠곡면 도산리, 경남 고성군 마암면 장산리,
경남 합천군 가회면 오도리, 경북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강원도 홍천군 동면
속초리, 경남 의령군 봉수면 죽전리, 경남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등이다. 주요파는
가락군파, 호은공파, 중승공파, 전직공파, 증성군파, 판서공파, 상서공파 등 9개 파가 있다.
항렬자는 26세 우, 만(遇, 萬), 27세구, 량(九, 亮), 28세 필, 남(弼, 南), 29세 행, 녕(行, 寧), 30세 성, 성(成, 盛), 31세기, 범(紀, 範), 32세 용, 강(庸, 康), 33세 신, 재(新, 宰), 34세 정, 병(廷, 秉), 35세 발, 규(發, 揆), 36세 돈, 학(敦, 學), 37세 건, 숙(建, 肅), 38세 인, 연(寅, 演), 39세 경, 흔(卿, 欣), 40세 진, 근(震, 根), 41세 용, 완(龍, 琬), 42세 보, 성(寶, 性), 43세 업, 수(業, 洙), 44세 동, 중(東, 重), 45세 유, 준(猷, 遵), 46세 국, 기(國, 璣), 47세 현, 옹(鉉, 甕)이다.
조선시대에 12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문과 15명, 무과 40명, 사마시 66명이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김해허씨는 1985년에는 총 29,314가구 121,607명,
2000년에는 총 37,788가구 121,031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5년 만에 8천여 가구가
늘어났다. 반면 인구는 오히려 6백여 명이 줄어들었다. 조사 과정에서 어떤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19,733명, 부산 22,032명, 대구 10,911명,
인천 2,269명, 경기 8,507명, 강원 6,699명, 충북 2,000명, 충남 3,320명, 전북 2,876명,
전남 7,075명, 경북 11,169명, 경남 24,430명, 제주 582명이다. 경남과 부산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17,170명, 부산 21,019명, 대구 12,235명,
인천 3,425명, 광주 1,034명, 대전 1,596명, 울산 4,564명, 경기 14,747명, 강원 5,502명,
충북 1,927명, 충남 1,618명, 전북 1,668명, 전남 4,215명, 경북 9,810명, 경남 20,168명,
제주 333명이다. 1985년과 마찬가지로 부산과 경남 지역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출처 " 2014.12.03 새만금일보]
12. 기타
허유전(許有全)
1243년(고종 30)∼1323년(충숙왕 10). 고려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안(安).
충주사록(忠州司錄) 연(延)의 아들이다. 원종 말기에 문과에 급제, 1295년(충렬왕 21)
감찰시사(監察侍使)로 있을 때 왕의 총신의 참소를 받아 순마소(巡馬所)에 감금되어
죽음을 당할 뻔하였으나 당시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풀려났다.
1298년 국학사예(國學司藝)로서 전라도안렴사가 되고, 1304년에 감찰대부
권수동지밀직사사(監察大夫權授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307년에 밀직사사로서 지공거가 되어 안분(安奮)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그뒤 여러 차례 승진되어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지밀직사사를 역임하였다.
1303년에 여러 대신들이 세자 충선을 폐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그는 박경량(朴景亮)·
유복화(劉福和)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세자의 위(位)를 보전하였다. 이에 충선왕이
즉위하자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1314년(충숙왕 1)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받았다.
1321년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이 되었다. 이해에 원나라
토번(土藩)에 귀양간 상왕(忠宣王)의 환국을 위하여 81세의 고령으로 민지(閔漬)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양왕(瀋陽王) 고(暠)와 그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허유전(許有全) (5세 넷째)
[고려문과] 원종(元宗) 15년 (1274) 갑술(甲戌) 원종 15년 갑술방
[인적사항]
시호 충선(忠宣)
본관 김해(金海)
[이력사항]관직 정승(政丞)
관직 가락군(駕洛君)
[가족사항]
[중손자]
[손자] 영의 아들 :기(호은공), 린
[자] 유전의 아들 : 영,화,창
[형제]인정,소구,천기,유전(5세)
[부] 송죽,2째 허연(許延) (4세) ,정
[조부] 허자(許資) (3세)
[증조부] 허군언(2세)
[고조부] 허염 (1세조,허왕옥 35세)
[출전]《고려열조등과록(高麗列朝登科錄)》
허유전 묘
고려 충숙왕 떄의 문신인 충목공 허유전(1243~1323)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충렬왕때는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여러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충숙왕 초에는 가락군에 봉해지고 충숙왕 8년(1321)에 수첨의찬성사를 거쳐 정승에 올랐다.
[정의]
고려 후기 명신 허유전의 묘.
[개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6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에 있다. 도굴된 상태로 1985년
후손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내용]
1988년 발굴 과정에서 고려 청자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점, 얇은 청동 조각 여러 점,
나무관에 사용한 쇠못 한 점, 11∼12세기에 만들어진 중국 송·금대의 엽전 19개가 나왔으며,
유골인 엉치뼈도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부장품으로 청동숟가락, 토기 등이 있었을 것이나
도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묘의 내부 구조는 구덩이를 파고, 잘라 만든 납작돌을 여러 개 밑에 깔고, 그 위에 나무관을
얹었다. 시신은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동쪽을 바라보게 하였다. 묘의 외양은 거의 정사각형
이며, 갓과 위를 잘라 만든 많은 돌로 하단을 둘러쌓아 호석으로 삼았으며, 호석의 두께는
54∼69cm이다.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으며, 묘의 크기는 남북 방향으로 493cm이며,
동서방향으로 489cm인 단분이다.
묘의 앞쪽은 두 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묘 앞에
앞문돌 두 기를 양쪽에, 묘의 앞 중앙에 ‘가락허시중공(駕洛許侍中公)’이란 글이 앞면에
새겨진 표석이 각각 세워져 있다.
표석은 쑥돌을 이용해 제작되었으며, 전체 길이는 14.4cm이고, 두께는 상단이 11.3cm,
하단으로 가면 조금씩 넓어져 17.1cm이나, 아랫부분은 묘표를 땅에 박기 위해 뽀족하게
만들어져 있다.
묘표석 앞에 네모진 단이 있고, 그 옆에 혼유석이 있다. 그리고 묘를 바라보고 좌전면(左前面)에
문인석 1기가 세워져 있다. 역시 쑥돌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사람 얼굴 모습은 새겨져 있으나
팔과 다리는 처음부터 새기지 않았던 것으로, 고려 문인석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크기는 전체 길이 105cm, 얼굴 길이 34cm, 얼굴 너비 27cm, 몸통 두께 17cm이다. 축조 당시
에는 두 기였을 것이나 한 기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허유전의 생애와 활동]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 출생했으며, 1274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1309년(충렬왕 34) 전라도
안찰사를 거쳐, 1314년 가락군에 봉해졌다. 1323년(충숙왕 10) 충선왕을 고려로 모셔오기 위해
나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1323년 내지 1324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묘는 전형적인 고려 묘 양식으로, 특히 출토된 유물들과 함께 고려시대 묘제 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13. 가야국왕 계보
가락국 종친회 (김해김씨, 허씨, 인천이씨)
: http://www.garak-seoul.com/home/main/index.php
김해허씨 대종친회 카페
: http://cafe.daum.net/Kh.daum.net
끝
[이색보고] 金氏 뿌리 탐사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1200만 인구를 자랑하는 한국 김씨들의 성(姓)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세계 최초로 '金'을 성씨로 사용한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와 한국의 김씨들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초로 김씨의 연원을 찾는 이색 탐사 리포트.
김대성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한국문자학회 부회장
최 근의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는 대체로 274개 성씨에 4500만명 가량이다. 이중 김씨는 241개의 본관을 가지고 있고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가위 민족세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세력이라 할 것이다.
김씨는 대체로 신라, 가락(가야)의 두 집단이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고, 조선조 임진왜란 이후 귀화해 사성(賜姓)을 받은 김씨가 별도로 있다. 여기다 가락계 김씨의 외가인 허씨 집안 및 허씨가 당나라 때 당태종으로부터 사성을 받은 인천 이씨 등도 범(凡) 김씨 계열에 포함된다.
그런데 김씨 계열 중 신라와 가락의 양대 김씨는 족보상 그 선조가 난생설(卵生設)이나 천강설(天降說)의 주인공으로 묘사됨으로써, 그 전의 상황을 알 수 없게 돼 있다.
신라계인 경주 김씨들은 시조를 ‘김알지’라고 한다. 또 가락계인 김해 김씨들은 시조로 가락국의 창시자인 ‘김수로’를 꼽는다. 이들 모두가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다. 어느 민족이건 시조 탄생에 대해서는 신비스러운 전설로 미화시키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김알지와 김수로가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지금으로부터 불과 2000년 전의 일이다. 이때는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이미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고, 철기를 생산하고 있었으며, 갖가지 신무기가 개발되고 있던 때였다. 그때는 나름대로 문명의 첨단시대였다.
이런 개명(開明)한 시대에 김알지나 김수로가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필자 자신이 김해 김씨지만 김수로나 그 부인인 허왕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를 보면서, 틀림없이 출자(出自)를 내놓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내놓고 말하지 못할 사연을 밝혀낸다면, 김알지와 김수로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출생의 비밀도 저절로 풀릴 것이라고 판단했다.
20년 궁금증의 주인공 '김일제'
지난 6월 초 필자는 ‘한민족 정체성을 찾는 답사팀’을 만들어 보름 일정으로 중국을 탐사할 계획을 세웠다. 지난 20년간 궁금해 마지 않던 ‘김일제(金日?)의 묘’ 존재 여부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김씨 성의 주인공 김일제, 그리고 막연하게 몇몇 전문가의 입으로만 전해오는 ‘김일제의 묘’의 실재 여부는 김씨 성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에 관심 많은 필자에게는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1978년 필자는 김알지, 김수로가 등장하기 150여년 전에 이미 김씨 성을 가진 김일제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몇 년 전 작고한 재야사학자 문정창(文定昌)씨의 저서 ‘가야사’ (백문당, 1978)를 통해서였다. 우리의 역사 연구를 강도 높게 비평하며 충격적인 논문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킨 문정창씨는 이 책에서 김일제가 한국 김씨들의 직계 선조가 된다는 것을 여러 전거를 들어 밝히고 있었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학설이었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난 89년 한국문자학회 회장 김재섭(金載燮·66)씨에게 중국의 금문(金文)을 배우면서 또 다른 사실을 알았다. 김일제의 묘가 한(漢)나라 7대왕 무제(武帝·141∼87 BC)가 묻혀 있는, 중국 섬서성 함양 부근의 무릉(茂陵)에 함께 배장(陪葬)돼 있다는 정보였다.
또 고(古)문자학을 공부하면서 김일제의 성(姓)인 김이 한무제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은, 즉 한무제가 특별히 내려준 성이었다는 것도 그제서야 알았다. 말하자면 김일제가 세계 역사상 최초로 ‘김’을 성씨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김일제가 과연 김씨의 시조가 될 수 있는 것인지, 그의 묘가 실제로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에 배장돼 있는지, 도무지 막연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한자 문화권인 동양 3국에서 성의 글자가 같다고 해서, 먼저 살다 간 유명 인물에게 족보를 갖다붙여 그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92년 중국과 국교가 트인 후부터 이제는 마음놓고 김일제의 묘를 확인해볼 수 있겠구나 하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지만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무릉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모아본 결과, 한나라 왕 무제를 도와 서역(西域)을 개척한 영웅 곽거병(�去病·140∼117 BC)의 묘는 있어도 김일제 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답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곽거병이 누구인가. 그는 바로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김일제와 그의 동생, 또 그의 어머니를 포로로 잡아온 장본인이었다. 김일제로서는 원수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과 나란히 무릉에 배장돼 있을 것이라고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빈손으로 돌아올지언정 일단 무릉을 찾아 주위에 널려 있다는 많은 묘소를 이잡듯 찾아보기로 작심하고 중국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화려한 과거병, 초라한 김일제
서안(西安)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진 무릉을 찾은 것은 6월12일 오시(午時)였다. 섭씨 34도로 땡볕이 지독했다. 일제 마이크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따가운 햇살이 정수리를 쿡쿡 찔러 올 정도였다. 습기가 없는 건조한 기후인데도 열탕에 앉아 있는 듯 온몸에서 땀이 배어 올랐다. 땀이 나면 건조한 공기가 그대로 빨아 마셔버리니, 햇볕에 내놓고 있는 얼굴이며 목이며 팔의 피부가 따가웠다.
그런데 햇볕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긴가 민가 하던 김일제의 묘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더냐는 속담은 역시 들어맞았다.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가 부실했을 뿐이지, 현장에는 김일제라는 인물에 대해 해설을 해놓은 책자와 묘지 안내 간판까지 걸려 있었다.
김일제가 한국 김씨의 시조든 아니든 간에 2100년 전 김씨 성을 가진 인물의 묘는 현재의 지명으로 중국 섬서성(陝西省) 흥평현(興平縣) 남위향(南位鄕) 도상촌(道常村)에 있다. 김일제의 묘는 한무제가 묻혀 있는 무릉의 들머리에서 동쪽으로 1km나 떨어진 곳이다. 또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그 가족들을 포로로 잡은 곽거병의 묘에서 보면 동쪽으로 우뚝 서 있었다.
중국측 묘지안내 자료에 의하면 김일제에게 할당된 묘역은 1만8748m2. 묘의 높이는 12m, 분묘 동편의 길이는 41.2m, 서편이 41.9m, 남편이 35.5m, 북편이 36.3m로 1479평방m2에 이르렀다. 묘는 남쪽을 바라보고 누워 있었다. 아마 경주의 천마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김일제의 묘는 무릉의 주인공인 한무제의 묘나 한나라의 기반을 굳건히 한 곽거병, 위청(衛靑) 장군 등의 묘 규모에는 비할 바가 못 됐다. 곽거병의 묘역은 경내에 웅장한 담벼락을 두르고 있었고, 그 들머리에 무릉박물관을 만들어 화려한 연못과 높은 관망대까지 조성하는 등 그것만으로도 관광명소로 만들어두었다. 반면 김일제 묘는 사대부 집의 대문간 청지기가 사는 집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김일제의 묘역은 주위가 담벼락 대신 밀밭과 과수원이 울을 치고 있었다. 입구에 해당하는 묘의 코앞에 배나무 과수원이, 옆구리며 머리 쪽에는 밀밭이 들어서 있었다. 말하자면 입구나 출구가 모두 봉쇄된 무덤이었다.
아무리 봐도 조금은 섭섭한 대접을 받는 묘였다. 빈정대는 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그저 한무제의 미덕을 칭송하기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한 묘라고나 할까.
김일제가 한족(漢族)이 아닌 흉노족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무릉박물관에서 팔고 있는 무릉 관련 책자에는 김일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흉노왕의 태자로 비록 잡혀와 노예가 됐지만 한무제에게 충성을 다한 공으로 ‘투후(?侯)’라는 천자(天子)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받을 수 있었고, 죽어서는 제왕이 누워 있는 능의 옆에 묻힐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러나 김일제의 묘는 현지에서 ‘미티(Miti)’라고 부를 뿐, 실제로는 그가 누구인지 왜 이런 묘를 만들어 두었는지 관심 밖이었다. 스포트라이트는 무릉과 곽거병의 묘이니, 그곳에만 관광객이 모일 것은 뻔하다.
묘하게도 중국의 역사에 굵은 선을 그어놓은 영웅 곽거병의 묘 앞에는 곽거병의 전공을 새긴 ‘마답흉노석상(馬踏凶奴石像)’이라는 석조물이 조성돼 있다. 말 그대로 곽거병이 타던 천리마가 흉노족을 짓밟고 있는 형상이다. 답사팀은 말에 짓밟힌 흉노족이 곽거병이 죽인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아닐까 생각했다. 적어도 답사팀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김일제 묘에 분향하다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 왕실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100여년 동안은 후손들의 참배가 거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이후 지리멸렬해졌고,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은 내놓고 이 묘를 찾을 후손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아직 이렇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일제의 묘 꼭대기는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린 듯 잔디가 벗겨져 사방으로 흙색의 붉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뱀이 기어가는 듯 여러 갈래의 산책로 같은 길이 나 있었다. 묘에 오르지 못하도록 계획적으로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묏등 전체에는 무릎까지 오는 키 작은 가시나무가 고르게 덮여 있었다.
이곳에서 밀과 옥수수를 재배하고, 사과 과수원을 하고 있는 장지염(張志廉·50)씨는 할아버지대부터 3대째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장씨는 “작년 2월인지 3월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만주 요령성에 있는 60∼70대의 할아버지 두 사람이 찾아와 자신들이 김씨라고 하면서 묘에 절을 하고 갔다”고 말했다. 그 외에 이 묘를 찾는 사람은 아직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김일제 묘에는 남쪽에 있어야 할 묘비가 보이지 않았다. 답사팀은 처음에는 묘비가 없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적어도 무릉에 배장될 정도의 묘라면 묘비가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이 나서서 묘비 수색 작업을 벌였다.
아니나 다를까. 묘의 남쪽 정면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무작정 과수원 속으로 20여m 들어갔더니 묘비가 있었다. 묘비는 어른 키만한 배나무 사이에 들어앉아 있어 눈여겨 찾지 않는 한 발견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배밭 주인인 50대 아주머니가 뛰어와 허락도 없이 들어갔으니 고발하겠다며 심하게 투덜대는 것을 달래느라 한참 고생했다.
답사팀 중 김씨 성을 가진 일행이 인사라도 올리고 가자고 제안했다. 이번 여행의 중요 목적이 김일제의 묘를 찾는 것이었으므로 모두가 찬성했다. 그러나 배나무 과수원 속에 있는 묘비 앞에는 차례를 지낼 손바닥만한 공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묘의 동쪽 넓은 터에다 말리고 있는 밀짚을 약간 걷어내고 간단한 차례상을 차렸다.
한국에서 만든 순수한 우리 향을 피우고, 전남 승주에서 신광수(申珖秀)씨가 직접 만든 작설차를 올렸다. 제주는 답사팀 팀장인 김세환(金世煥·70)씨가 맡았다. 신라 김씨 계열의 의성 김씨(義城金氏)인 김세환씨는 답사를 나서기 전 김알지가 탄강했다는 경주 계림을 찾아서 중국의 김일제 묘를 찾으러 간다고 고유제를 올릴 만큼, 김씨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후배들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눈치였으나 그는 차례를 지내는 동안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답사팀 모두가 경건하게 차례를 올렸다. 과수원의 나무에 달려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축문으로 삼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그리고 묘소를 한 바퀴 돌며 좋은 날을 잡아 차례다운 차례를 올릴 것을 다짐했다. 답사팀은 물론 김일제가 김씨의 시조가 된다는 전제하에 이렇게 차례를 올렸던 것이다.
1000km의 사막, 河西走廊
그러면 과연 김일제는 역사에 어떻게 등장하고 있을까. 답사팀은 그 역사의 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김일제라는 인물이 태어났던 기원전 2세기경 김일제를 둘러싼 내외 사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가 흉노의 왕으로 살고 있던 땅은 지금 서안 북쪽 땅인 무위(武危)의 언지산 (焉支山)과 돈황(敦煌)의 삼위산(三危山)이 있는 감숙성(甘肅省) 지역이다. 휴도가 이웃나라 왕인 곤사왕 (昆邪王)의 꾐에 빠져 죽고 일제와 동생 윤(倫), 그의 어머니 알지(閼氏)가 한나라 곽거병에게 포로로 잡힌 곳이 바로 삼위산이다.
동쪽 아래에 있는 한(漢)나라 측에서 보지면 이 지대는 오초령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신강에 이르기까지 길이가 1000km에 이르며, 그 폭은 40∼100km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지역을 계곡으로 보았던지, 황하의 서쪽을 달리고 있는 긴 복도라는 뜻으로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 부른다.
비록 복도라고 부르지만 결코 좁지 않은 광활한 지대다. 좌우가 험악한 산맥과 사막인 탓에 이 기나긴 지대말고는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이 없다. 따라서 이 지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서역으로 갈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사막지대로 이어지는 이 땅은 황량하기 짝이 없지만, 해발 4000∼5000m인 기련산맥(길이 800km)에는 3000여개의 빙하가 2000km2의 거대한 얼음 호수를 형성하고 있어 멋진 대비를 이룬다. 여기서 녹아 흘러내린 물이 곳곳에 강과 호수를 이루고 넓은 오아시스를 형성한다.
이 오아시스 지대에 넓은 초원이 펼쳐져 목축이 번성하고, 비옥한 땅이 개간돼 농업이 발달해 감숙성의 곡창지대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곳은 또한 동서무역의 관문으로 이곳을 지배하는 민족이라야 중원 땅을 부리는 힘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진(秦)나라는 감숙성 천수(天水) 땅에서 나라를 일으킨 뒤 섬서성 북서쪽에 있는 이곳 하서주랑을 차지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진시황제가 죽고 나자 간신들은 시황의 태자 부소(扶蘇)를 살해하고, 동생 호해(胡亥)를 내세워 천하를 주무르다 한고조인 유방에게 나라를 뺏긴다.
이때 훗날 재탈환을 꾀하고자 서북쪽으로 망명해간 세력이 태자인 부소의 계열, 즉 휴도왕 계열이라는 것이 한국문자학회 김재섭씨의 시각이다. 어쨌든 휴도왕 세력은 이곳에 근거지를 두고 계속 한나라를 넘보았다.
한편 한나라를 세운 한 왕실은 이 하서주랑을 손에 넣지 않고는 하루도 편한 날을 보낼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땅이었다. 대대로 중원을 통치한 이들은 이곳에 사는 종족을 야만시해 흉노족이라고 낮춰 불렀다.
흉노의 생활과 풍속은 한족과는 판이했다. 초원과 물을 찾아 이동해 다니면서 털로 짠 파오(천막)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은 늘 전투 태세였고, 무엇보다 말을 가까이했기에 기동력이 뛰어났다.
한무제와 곽거병의 등장
한나라에서는 7대 임금으로 16살난 무제가 즉위한다(기원전 140년). 무제는 즉위와 함께 흉노정벌을 왕조의 제1과제로 삼았다. 한제국의 세계쟁패를 위해서 흉노를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흉노정벌에 노심초사하던 무제는 이웃 월지국이 흉노에 짓밟혀 하서에서도 서쪽고원으로 옮겨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신하인 장건(張騫)을 파견해 월지와 동맹하여 흉노를 협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건 일행은 되레 흉노에게 붙잡혀 10년 동안이나 유배당했다가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귀국하지 않고 월지왕을 찾아가 월지와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편안히 안주하고 있던 월지를 움직일 수 없어 13년 만에 귀국한다.
그러나 장건은 매우 유용한 정보를 갖고 온다. 대원이라는 나라에는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천마(天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무제는 흉노보다 뛰어난 기동력을 갖추기 위해 대원정벌에 나서서 수많은 천마를 얻게 된다. 천마를 얻고 나서부터 무제의 정벌이 순조로워진다.
드디어 무제 휘하의 위청(衛靑) 장군이 흉노정벌에 나선다. 기원전 121년 봄, 곽거병이 1만명의 정예군단을 편성해 위청 장군과 합류하면서 하서지방 정벌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한무제의 부인인 위황후 언니의 아들로 태어난 이가 곽거병이다. 그는 이모부인 무제의 총애를 받았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시중이 되었으며, 위왕후의 형제인 외삼촌 위청 장군을 따라 흉노정벌에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우게 된다.
곽거병은 먼저 광대한 초원지역인 언지산(焉支山)을 공격한 후, 이어 기련산 너머로 달아난 흉노를 쳐부수어 4만명 이상의 흉노를 포로로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당시 광활한 하서지방 중에서도 노른자위 땅을 다스린 통치자는 곤사왕(昆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이었다. 한나라의 정벌군에 계속 밀리던 곤사왕은 흉노의 천자(天子)인 선우의 질책이 두려워 일제의 아버지인 휴도왕을 설득해 투항키로 한다. 그러나 휴도왕은 투항을 거부하고 전쟁준비를 한다. 그러자 곤사왕은 휴도왕을 꾀어내 죽여버리고 4만명의 무리와 함께 곽거병에게 항복하고 만다. 곽거병은 항복한 흉노군을 이끌고 장안으로 개선했는데 10만의 대군단이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전한다.
이후 곽거병은 무제를 도와 서역개척에 지대한 공헌을 세웠다. 젊은 나이로 무려 여섯 차례나 출정, 번번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24세 때 갑자기 요절해버렸다. 이에 무제는 비통해 마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위청 장군과 함께 곽거병의 묘도 자신의 능에 배장되도록 했던 것이다.
김일제라는 인물은 한무제가 아니면 역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김일제는 한나라의 역사서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傳)’에 상세히 설명돼 있다. 물론 철저하게 한인(漢人) 본위로 기록했겠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놀랄 만한 역사의 사실들을 찾을 수 있다. 필자는 20여년 전 문정창씨의 ‘가야사’에서 처음 김일제를 만난 이후 ‘한서’의 ‘김일제전’을 찾아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서(漢書)’의 김일제 전(傳)
―칭찬해 이르기를(贊曰), 김일제는 이적(夷狄)의 사람으로 그의 모국을 잃고 한의 궁중에 매인 노예였으나 임금을 독실하게 공경하고 타일러, 스스로 충성스러움과 믿음이 나타나 공적에 의해 상장(上將)이 되고 나라를 후사에 전해 자손은 대대로 충효로 이름나고 7대 왕에 걸쳐 궁중을 돌본 일, 어찌 그리 성했는고. 본시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김일제의 자(字)는 옹숙(翁叔),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어머니 알지줂閼氏줃와 동생 윤(倫)과 함께 한관에게 몰수돼 황문(黃門)에 옮겨져 말을 길렀다. 이때가 나이 14세였다. 그 뒤 무제는 잔칫날에 말을 검열하였다. 거기엔 후궁의 여인들이 가득히 모여 있었다. 일제 등 수십인이 차례로 말을 끌고 어전 아래를 통과했는데 여인들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자가 많았다. 그런데 오직 일제는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2촌, 용모는 엄숙하고 끌고 있는 말 또한 살지고 훌륭했으므로 임금이 기이하게 생각하고 물어보니 사실대로 대답했다. 임금은 기특히 여기고 즉일로 목욕시키고 의관을 주어 마감(馬監)으로 임명했다. 곧 시중부마도위 광록대부(侍中附馬都衛 光祿大夫)에 올랐다.
일제는 임금에게 가까워진 이래 전혀 과실이 없어 임금의 신임과 사랑을 받아 상을 받은 것이 누천금이나 되었다. 임금이 밖에 나갈 때는 함께 타고 갔으며 안에 있을 때는 좌우에서 모셨다. 주위에서 “폐하가 망령이 들어 한 오랑캐의 애새끼를 얻어 도리어 귀하고 중하게 여긴다”고 수군거리니 임금은 그 소리를 듣고 더욱 후하게 대하였다.
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일제와 윤)을 가르침에 매우 법도가 있어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가상히 여겼다. 병으로 죽자 어명으로 감천궁(甘泉宮)에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휴도왕 알지(休屠王閼氏)’라고 표제를 붙였다. 일제는 그 초상을 뵐 때마다 예배하고 쳐다보고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걸음을 옮겼다.
투후 벼슬을 받다
―일제가 임금은 좌우에서 모신 지 수십년에 이르렀다(이 사이에 일제는 임금을 암살하려 하는 자를 잡아내 더욱 임금의 신뢰를 받았음). 임금은 일제에게 궁녀를 주었으나 절대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임금이 그의 딸을 후궁으로 삼고자 했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그의 독실과 근신이 이와 같아 임금은 더욱 기이하게 여겼다.
임금이 앓아 눕게 됐다. 무제는 모하라(임금을 암살하려 한 자)를 토벌한 공으로 일제를 ‘투후(?侯)’에 봉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일제는 무제에 이어 즉위한 임금(昭帝)이 어리므로 봉을 받지 않았다. 어린 임금을 보조한 지 1년 쯤 지나서 일제는 앓아 눕게 되고 병이 깊어졌다. 대장군 곽광이 임금께 진언하여 일제는 드러누워서 열후(列侯)의 인수(印綬)를 받았다. 하루가 지나서 죽었다(나이 50세로 추정). 장례에 필요한 물건을 주고 묘지를 주어 경차와 무장병을 딸려 장송하니 군대의 진을 펴고 무릉에 이르렀다. 시호를 경후(敬侯)라고 하였다.
―일제의 두 아들 상(賞)과 건(建)은 원래 시중(侍中)이 되고 소제(昭帝)와 나이가 비슷해 함께 기거했다. 상은 봉거도위(奉車都衛)로, 건은 부마도위(附馬都衛)가 되었다. 상이 투후를 계승하여 두 개의 인수(印綬)를 차게 돼 임금이 곽장군에게 이르기를 “김씨 형제가 모두 두 개의 인수를 달게 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으니 곽광이 대답하기를 “상은 아버지의 벼슬을 이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했다. 그때 나이 모두 8, 9세였다.
선제(宣帝)가 즉위한 뒤 상은 태복(太僕)이 됐다. 그런데 곽광 장군이 모반의 낌새를 보이자 상서하여 곽씨의 딸인 부인과 이혼을 했다. 임금도 이를 애처롭게 여겼으며 이로 인해 상은 연좌되지 않았다. 원제(元帝) 때 광록(光祿)의 훈(勳)을 받고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 그 나라는 없어졌다. 선제에 이어 제위에 오른 원제(元帝) 초에 일제의 차남인 건(建)의 손자 당(當)을 투후로 봉하여 일제의 뒤를 잇게 했다. 다시 당의 아들인 성(星)이 투후를 계승한다.
정리하자면 일제는 한무제로부터 김이라는 성을 받고 가장 아끼는 신하가 된다. 무제를 암살하려는 자를 무제 앞에서 격투 끝에 체포한 공으로 한나라 제후국의 왕인 ‘투후’라는 벼슬까지 받는다. 일제의 아들 상(賞)도 투후가 되나 일찍 죽고, 후에 5대손인 성(星)까지 투후 벼슬을 받아 제후국의 왕이 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런데 여기서 김일제 일가에 자주 등장하는 ‘투후’라는 이름은 놀랍게도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 비문에서 다시 나타난다. 지금 경주국립박물관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비석은 윗부분 전체가 없어져버렸고 비의 아래 둥치만 남아 있다.
현재 탁본으로 남아 있는 비문의 글자는 원래 비문의 일부밖에 되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계보가 완전치는 못하다 하더라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신라 왕가의 가계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점이다.
자취를 감추었던 문무왕비가 다시 발견된 것은 1796년(정조 20년)에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다. 이는 당시 경주부윤을 지내던 홍양호(洪良浩·1724∼1802년)에게 보고됐고, 홍양호는 이를 탁본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비문은 발견 당시에 이미 글자의 반수 이상이 심하게 마모돼 완전하게는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비문에서 중요한 것은 문무왕의 출자(出自)가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유득공 (柳得恭·1749∼?)이 그의 저서 ‘고예당일기’에서 언급한다. “신라의 김이 김일제의 김인가?” 그러나 유득공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문무왕의 비문에는 문무왕의 선대(先代)가 누구 누구라는 것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그 선대를 표시하는 글자들은 ‘화관지후(火官之后)’니 ‘투후’니 ‘성한왕(星漢王)’이니 해서 지금 사람들이 보면 무슨 암호처럼 잘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럼에도 문무왕 비문에 남아 있는 글자를 조립해 분석을 해보면 과거의 많은 금석문에서처럼 조상을 미화해서 신화로 꾸미는 가식이 없다는 점이 돋보인다.
비문에 남아 있는 문무왕의 출자는 문무왕 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7단계로 구성돼 있다. 이 7단계 인맥 계보를 구체적 역사에 잇대어 설명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 이르지 못한 고조선이나 삼한 등이 이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도 풀릴지 모른다.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BC 2300년대
② 진백(秦伯): BC 650년대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BC 200년대
④ 투후(?侯): BC 100년대
⑤ 가주몽(駕朱蒙): BC 50년대
⑥ 성한왕(星漢王): AD 20년대
⑦ 문무왕(文武王): AD 660년대
옆에 덧붙인 연도는 문자학회 김재섭씨가 주장하는 것이다. 문제는 ①의 ‘화관지후’가 사람의 이름인지 당시의 관직 이름인지 ②의 ‘진백(秦伯)’이나 ③의 ‘파경진(派鯨津)’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후대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신라 문무왕 당시에는 이런 글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새겼을 것이다.
일단 결론부터 추단해 본다면 ①의 화관지후는 BC 2300년 경 관직 이름으로 현재로서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임금인 순(舜·재위 9년 BC 2320∼2312), ②의 진백(秦伯)은 진시황제의 20대 선조인 진 목공(穆公), ③의 파경진씨(派鯨津氏)는 진나라가 망하면서 안전지대를 찾아 경진씨를 파견한 휴도왕, ④의 투후는 김일제, ⑥의 성한왕은 김일제의 4대손인 김성(金星)으로 이 성한왕이 바로 김알지라는 것이다.
'신라인은 소호김천씨의 후예'
기타 역사서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존재한다. 신라 6촌장들이 진나라에서 망명해 온 사람, 즉 ‘진지망인(秦之亡人)’이라는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의 기록도 있고, 점필제 김종직의 ‘이존록(훙尊錄)’이나 ‘삼국사기 백제본기’ 끝머리에 붙여진 김부식의 논찬과 같이 “신라인이 소호김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고 했다”는 기록도 있다. 말하자면 한국 김씨의 선계가 소호씨 계열임을 말하는 것이다.
묘하게도 중국이 신화시대로 간주하고 있는 삼황오제시대의 한 사람인 소호김천(少?金天·재위 7년, BC 2474∼2468년)은 진나라와 연관된다. 진나라가 세워질 때 서방의 신을 모시고 나라의 기틀을 잡았다는 백제사(白帝祠)가 등장하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白帝)는 소호김천을 가리키며 백제사는 소호김천을 위한 사당이었다.
또 진나라가 망하고 진나라 왕족 계열인 휴도가 서쪽 돈황으로 피난 가서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는 금인제천(金人祭天)의 금인(金人)도 소호신(少?神)을 이르는 말이 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문무왕 비문에는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侯祭天之胤)’는 글이 등장하게 된다. 또 한나라 무제가 일제에게 성을 내리면서, ‘제천금인’한 휴도왕의 왕자니 성을 김(金)으로 했다는 것과도 연결이 될 것이다.
게다가 다른 것은 제쳐놓더라도 ④의 투후와 ⑥의 성한왕이라는 이름은 한나라의 역사서인 ‘한서(漢書)’에 관직 명칭으로 나온다. 실제로 ②의 진백과 ④의 투후 사이의 역사 기년을 추적해보면 진나라 멸망과 투후가 생긴 내력이 중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족보와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사항은 ⑥의 성한왕이 과연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문무왕 기록은 이런 등식이 성립해야만 해독될 수 있다.
다시 당시의 역사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한고조 유방(劉邦)이 세운 한왕조는 13대 200여년 만에 왕망에게 나라를 뺏긴다. 그 후 15∼17년 만에 다시 나라를 찾게 되니, 역사에서는 이를 후한(後漢)이라고 부르며 이전의 전한(前漢)과 구별한다.
왕망(王莽·BC 45∼AD 23년)은 한왕실 10대 원제(元帝·BC 49∼33년)의 황후 왕씨(王氏) 가문 출신이다. 11대 성제(成帝·BC 33∼7년)가 즉위하자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영상서사 (大司馬大將領尙書事)가 되어 정치권을 장악했고 왕망 역시 38세(BC 8년)에 재상격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어 한왕실을 장악한다.
그런데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인 셈이다. 당은 일제의 후손으로 이 당시에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 계열과는 외가 사이였던 것이다.
왕망은 9살의 어린 평제(平帝)를 옹립, 13대 제위에 올리고 자기 딸을 황후로 삼는다. 4년 만인 기원후 5년 어린 평제를 독살하고 9대 황제였던 선제(宣帝)의 현손인 2살짜리 영(孀)을 제위에 올리고 섭정을 하다 서기 8년에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신제국(新帝國)’을 세웠다.
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왕실에 깊숙이 개입해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계열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물론 왕망이 전권을 장악함으로써 외가인 김씨 계열은 모조리 정치 실세가 됐음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왕망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유씨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만에 망했다. 이렇게 됐으니 신제국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계는 필사의 탈출을 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와 요동, 한반도의 서북과 남쪽 김해 및 제주도, 바다를 건너 일본 규슈와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때 만든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는 것은 왕망과 정치일선에 같이 참여했던 세력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대륙 밖으로 이동한 흔적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따라서 문무왕 비문과 왕망의 시대를 종합적으로 고려해보건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바로 성한왕, 즉 일제의 5대손인 성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편 일각에서는 김일제의 자손 중 또다른 김씨들이 가락으로 대거 이동해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핵심으로 꼽히는 사람이 김일제와 같이 포로로 잡혀온 동생 윤(倫)이다. 윤은 일찍 죽고 그의 아들 안상(安上)이 투후 벼슬과 동격인 도성후(都城侯)가 됨으로써 자손이 번창하게 된다. 그리고 윤의 4대손이자 안상의 3대손 탕(湯) 역시 왕망의 실패 이후 이 땅으로 망명해 오는데, 바로 그가 김수로라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투후 일제의 5대 자손이 신라 김씨계이고 윤의 5대 자손이 가락김씨계가 된다는 것이다.
가락의 시조 김수로의 직계가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가계라면 가락 김씨의 시조할머니 허왕후는 인도에서 온 공주라는 설도 설득력이 없어진다. 허왕후의 인도 아유타 공주설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다. 양자강 상류 보주에서 양자강을 타고 내려와 김해로 왔다는 설 등 그야말로 설왕설래다.
문정창씨는 “허왕후의 유입과정과 그 상황 등에 비추어 김수로 일문은 신제국이 망한 후 발해연안 또는 산동반도 지방에서 항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 아성이 무너졌으므로 유랑하여 한반도에 온 것 같다”고 한다.
한 왕실에 등장하는 허씨
실제로 허왕후의 출자 또한 뒤바뀔 공산이 많다. ‘한서’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단언은 할 수 없을지언정 허왕후가 한 왕실 출신이라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한 왕실에서 김씨계와 허씨계 두 집안은 초창기부터 강하게 얽혀 있었다. 허씨는 9대 선제(宣帝)의 황후였다. 김일제의 동생 윤(倫)의 아들 도성후(都成侯) 안상(安上)과 황후 허씨의 아버지 평은후(平恩侯) 허광한(許廣漢)은 7대 무제(武帝·재위 141∼87 BC), 8대 소제(昭帝·재위 87∼74 BC) 이후 왕실의 외척으로서 당대를 주도한 곽씨 일파와 정권경쟁의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곽씨 일파의 허황후 살해음모를 들춰내 공을 세우게 된다.
10대 원제(元帝·재위 BC 49∼33), 11대 성제(成帝·재위 BC 33∼7), 12대 애제(哀帝·재위 BC 7∼1), 13대 평제(平帝·재위 BC 1∼AD 5)와 신제국 왕망의 멸망시기까지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는 외척과 공신의 후손으로 황제의 부마인 허광한과 안상의 자손이 서로 혼인한 사이인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허광한의 경우는 황후가 된 딸만 있었고 그의 두 동생도 각각 박망후(博望侯) 요성후(樂成侯)가 되었다. 마지막 신제국에서 허광한을 이은 경(敬)과 박망후를 이은 병(竝), 또 병을 이은 보자(報子), 요성후를 이은 상(常) 등을 보면 김수로가 되어 가는 도성후 탕(湯)의 왕후인 허씨의 출자가 어느 곳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잃어 버린 역사를 되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정창씨나 김재섭씨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득을 해도 한번 각인된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김일제가 김씨의 직계가 아니라고 해도 좋다. 일단 가설을 세우고 이를 증명하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할 것이다.
학계에서 인정하든 말든 고문자학은 중국인 학자가 신화 전설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신농과 황제 소호김천 등 삼황오제시대가 실제의 시대라고 명쾌하게 증명하고 있다. 지금 한국문자학회는 역사의 시작시대인 삼황오제시대가 또한 고조선시대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이를 증명해내고 있는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일 것이다.
[출처] 허씨의 기원과 각 분파에 대하여|작성자 Khan4H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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