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1968B0494F371A472B)
함양군청 앞 학사루. 정확한 건립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신라시대에 고은 선생이 여기에 올라 시를 읊어 루대 이름이 학사루로 명명된 것으로 미루어 동시대 이전에 존재하였을 것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소실되었으며 조선 숙종 18년 (1692)에 군수 정무가 중수한 기록이 있다. 그후에도 객사 등의 동헌 부속거물과 함께 남아 있었다.1979년 함양초교에서 현위치로 이건전까지 학사루는 보존되어, 교실,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으로 겹처마 팔작지붕 이다. 1993년 함양 답사길에 들려 현판 글씨, 석등, 군청 느티나무를 찾은 듯한데 대학노트에 기록한 답사기에는 남아 있지 않아 의아스럽다. 당시에는 사진도 찍지 않았으니 본래는 답사기 업데이트 하려고 했는데 다시 준비했다. 함양읍내로 들어오면서 해설사분에게 학사루 이야기를 부탁했더니 우리가 알고 있는 유자광의 현판에서 비롯된 점필재 김종직과의 무오사화의 단초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까지 해주었다. 조선성리학의 맥의 중심축에 자리한 김숙자 선생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배푼 자취가 여기저기 보인다. 1473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성리학적 실천윤리로 백성을 다스려 봄가을로 향음례와 경노행사를 실시하고 효제와 주자가례대로 상제봉행을 권장하였으며 교육에 있어서는 길재 선생과 아버지 김숙자의 교육 방법대로 소학을 가르쳤다. 이러한 성리학의 윤리 실천으로 학행일치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함양을 찾는 수많은 문하생들이 모여들었다.
함양에 부임하였을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유자광이 학사루에 시를 지어 시판을 걸어 놓은 것을 보고 평소 그의 인품을 좋게 보지 않았던 공이 시판을 떼어 가마솥에 불을 때어 버렸는데 이로 인하여 유자광과의 감정이 악화되어 훗날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으며 두류산(지리산)을 유람 유두류록을 남겼다.
또한 차가 생산되지 않는 함양 백성들이 특산물세인 차세를 납부하기 위하여 전라도로 가서 쌀 1말에 차 1홉을 맞바꾸어 납부하는 것을 보고 이를 감면해 주기 위하여 휴천면 엄천에 토지대금을 백성들에게 보상해주고 관영 차밭을 조성하여 대신 납부함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함양읍성의 담장이 240간이나 되는데 그 지붕이 초가로 되어 있어 해마다 군민들이 부역으로써 많은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이것을 기와로 바꾸어 민폐를 덜어 주는등 선정을 베풀었다.
![1970년대 옛날에는 함양국민학교 안에 있었으며, 군립도서관으로 이용하였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story.hygn.go.kr%2Finclude%2FThumbGenerate.asp%3FVFilePath%3D%2Fprogram%2Fyesterday%2Fupload%2F13_70.jpg%26Width%3D600%26Height%3D600%26Quality%3D96) 1970년 함양초교 교정의 학사루, 군립도서관 현판도 걸려 있다...출처/함양군청
해설사분이 설명한 무오사화의 단초에 대하여 더 깊게 살펴보자. 함양군청 함양의 전설에서 옮겨왔다. 지금부터 500여년전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와 있을 당시 유자광과의 사이에 생긴 이야기다. 유자광이 종의 몸에서 천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세조에게 특채되어 당시의 훈구파에 정치적 뿌리를 박고 예종, 성종, 연산군 등 왕이 바뀔때마다 줄타기를 잘 해서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유자광이 경상도 관찰사로 발령을 받고 경상도로 내려왔을 때의 일이다. 그의 고모가 지곡면 수여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천대와 설움 속에서 살아온 서자이기에 입신양명하여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고모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어 고모에게 인사차 함양을 들렀던 것이다.
함양은 그 당시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선생이 고을 원님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이 때 김종직은 그렇지 않아도 유자광이를 기피해야 하는 인물로 여기고 있었는데 함양에 온다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관찰사라는 직위는 군수보다 높은 자리다. 함양에 오게되면 관찰사에게 깎듯이 인사를 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야 되었다. 김종직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무엇으로 보나 유자광에게 굽신거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서자 출신의 쌍놈 주제에 뭣하러 이곳에 온담. 내 어찌 그에게 고개를 숙이리.’ 하고 중얼거리며 아전에게 명하였다.
“관찰사가 이곳에 오거든 군수는 지방 순행차 출장하고 없다고 여쭈어라.”
“어디로 가시렵니까? 사또.”
“등구 마천을 거쳐 수구실로 다녀오겠다며 떠났다 일러라.”
김종직은 유자광을 만나게 되면 난처하였다. 벼슬이 높은 사람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굽실거린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어명을 받들고 공무로 오는 것도 아니고 제 사사로운 일로 오는데 구태여 만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관아를 비우고 이곳 이은대에 와서 숨어버렸다고 한다. 관찰사를 만나지 않기 위해서 이곳에 피한 것이다.
![함양 학사루 느티나무](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cha.go.kr%2Funisearch%2Fimagefiles%2Fnatural_monument%2F20090528145208018000.JPG)
함양초교의 학사루 느티나무...점필재 선생이 심었다고 전해온다 유자광이 함양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 와서 보니 듣던 바와 같이 산수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이다. 마음놓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서정적인 고장이다.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한 수의 시로 남기고 싶었다. 그는 대관림을 돌아보고 소고대의 절경을 바라보면서 내려와 학사루에 올랐다. 그리고 아전에게 필묵을 준비해 주도록 하였다.
“이 아름다운 고장에 와서 그냥 돌아갈 수 있느냐.”
잠시 후 유자광이 시 한수를 읊었다. 그리고 그 시를 현판으로 만들어 학사루에 걸어놓았다. 그리고 사사로운 볼일로 온 것이기 때문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목적지인 고모댁으로 떠났다. 유자광이 떠났다는 전갈을 받고 김종직은 관아로 돌아왔다. 그 후 학사루에 올라보니 새로운 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이상히 생각한 김종직은 아전에게 물었다.
“여봐라, 저기 새로 걸려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예, 관찰사 유자광 사또께서 걸어놓고 가셨습니다.”
“무슨 현판인데.”
“네,시를 한수 읊어 현판으로 걸어놓은 것인 줄로 아옵니다.”
“아니, 유자광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고매하신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 쌍놈의 작품이 걸릴 수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내려라.”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면 무엇하리 쌍놈은 쌍놈이니라.”
“내려서 어찌하리까?”
“아궁이에 넣어버려라.”
김종직은 대노하여 호통을 치고 그 현판을 철거해 버렸다. 말은 날개가 돋히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날아가게 마련이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 이야기가 유자광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나으리, 나으리의 시가 함양의 학사루에 걸릴 자격이 없다하여 김종직이가 그 현판을 철거했다 하옵니다.”
유자광은 그 말을 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 출신이 떳떳하지 않아 열등감에 쌓여 있는 유자광이고 보면 그럴 수 있다. 김종직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치도록 적개심을 느꼈다고 한다. 흔히 말하기를 이 현판 철거사건이 후에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한 빌미가 되었다고 하는데 김종직 선생이 관직을 그만두고 밀양으로 낙향할때 문하생들이 서울에서 정자에 술상을 차려놓고 송별시회를 가졌다.
초청하지도 않은 유자광이 이곳에 들러 인사를 하면서 선생에게 술잔을 권하여 마지못해 잔을 받게되자 선생의 제일 나이 어린 제자 홍유손이 '무령군 대감! 송별시 한수 지어 보시우! 후세 사람들 중 누가 또 대감의 시를 현판해서 걸지 모르지 않습니까 ?' 함양 학사루 사건을 빗대어 확실하게 비꼬는 말이었다. 이에 유자광은 벌떡 일어나며
'난 글을 모르는 무관 아닌가? 자네 같은 선비가 짓는 시를 내가 어이 짓겟나. 어허 고인한 손이로고...'
하면서 총총히 사라졌다. 당시에 세도도 막강하였고 벼슬도 높았던 유자광은 선비들로부터 이렇게 모욕을 당하자 기를 쓰고 빌미를 찾아 무오사화를 발생시켜 선비들을 몰살 시켰던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6A6A494F371A482C)
함양초교, 현관 바로 앞에 석탑재가 조경석으로 사용되었다. 화단을 조성한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데 지금이라도 들어내어 다른 곳에 전시 보관하였으면 좋겠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6857494F371A492B)
아래 사진 배례석 크기로 미루어 3층탑 초층 탑신 면석 부재로 보인다. 한 개 면석에 두 면의 우주를 모각한 형태의 석탑 부재로 보인다. 함양읍내 이은리, 보림사, 함양중, 함양교 등의 석불과 연관성을 면밀히 조사하여 한 곳으로 옮겼으면 좋겠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275BE494F371A4920)
탑신재 바로 옆에는 안상이 새겨진 배례석으로 추정되는 석조물이 놓여 있다. 상부의 흔적은 훼손되었지만 연화문이 곱게 핀 석탑 앞에 놓였던 배례석이 분명해 보인다. 공사를 시공한 업체 관계자를 탐문한다면 어디서 가져 온 것인지 쉽게 추적 가능하리라 여겨진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B46474DFB151F33)
해인사 원당함 다층탑 앞 배례석 함양초교 정원의 배례석도 훼손되기 전에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빠른 조사가 시급히 진행된어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를 본래의 위치로 옮겨야 한다. 관광 함양의 명성과 전통과 문화의 고향이라는 자부심은 이런 작은 일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하기에 함양군청 등 지자체에서 주저하면 함양의 의식있는 민초들의 적극적인 결단을 기대해 본다. 2012.02.24 |
첫댓글 선과님의 집념에 감동 또 감동,,,
그리고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
돼지코에 금고리라더니
선과님의 노력이 가치를 모르는 자들에겐...어휴~~~~!!!!
염불은 관심없고 젯밥에만 관심있는 세금도둑들이네요
에효..
안타깝습니다
요즘 공무원들은 민원을 가장 무서워 하는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포기하면 잊혀질까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