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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F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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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교리신학원 제3차 성지순례 - 팔레스티나
Fiat사랑 추천 0 조회 128 08.09.16 20: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3차 성지순례 후기 나눔터 - 팔레스티나

 

 

지난 여름 우리 신학원에서는 제3차 성지순례(2006. 6. 17~29)를 팔레스티나를 중심으로 하여 다녀왔습니다. 저희와 함께 순례한 이선미(로사) 자매님이 순례후기를 정성껏 아름답게 글로 적어 오셨습니다. 함께 읽고 묵상하시면 좋겠습니다.

 

 

▷ 하루 : 6월 17일(인천→암스테르담→카이로)

 

아주 밝은 낮, 작은 비행기에 오른다. 간밤에 또 아팠다. 몸과 마음으로 광야  체험이 미리 시작되었다. 그리고 겨우 나아가고 있다. 오래 그리웠던 곳.


암스테르담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가 이집트를 향해 떠난다. 기내에서 또 먹은 두통약 때문에 속이 엉망으로 뒤섞인다. 뜨거운 설렁탕과 깍두기 생각이 간절하다.


밤 세 시가 다 되어서야 카이로에 도착한다. 이집트. 네 그리움의 일부였던 것들과 만날 준비를 하라. 파라오 아케나톤과 람세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나라.

 

 

▷ 이틀 : 6월 18일

카이로(기자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성가정성당, 모세기념회당, 국립카이로박물관)


대단한 열기다, 이집트의 태양. 그 강렬함에 압도당한다. 그런데도 태양 아래 온전히 나서고 싶었다. 적나라한 태양 아래 서 있는 기자의 피라미드들. 기원전 2700년 경에 만들어졌으니 거의 오천 년을 지키고 선 건축물이다. 그 가운데 쿠푸 왕의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다. 아래로 아래로 좁고 냄새 음습한 계단을 내려가 왕의 관이 놓였던 곳을 보자니 불멸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처연해진다. 엄청난 수고의 결과로 빚어놓은 피라미드들과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


황금빛 태양 아래 눈에 와락 뜨이는 붉은 꽃을 매단 나무가 있었다. 루카 복음의 ‘되찾은 아들’이 배고픔을 달래려 먹었던 열매, 바로 쥐엄나무였다. 이집트에도 요르단에도 이스라엘에도 쥐엄나무는 그 붉은 꽃을 줄곧 피우고 있었다.

 

 

스핑크스에서 바라본 쿠푸 왕의 피라미드

(커다란 나무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보는 벤자민이다)


처음에는 유난히 못 사는 지역을 지나는 거라고 생각했다. 철근을 그대로 노출시킨 채 서 있는 잿빛 집들. 이집트는 아직도 대가족이 살아서 식구가 생기고 돈이 생길 때마다 한 층씩을 올린다. 마른 흙먼지를 그대로 뒤집어 쓴 채 서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집들을 오랫동안 지나자니 가슴이 먹먹해온다. 이집트의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 위대한 파라오들의 자취는 낡은 유물로만 부서지고 있을 뿐인가. 육류를 보충하기 위해 비둘기를 키우느라 옥상에 만들어 놓은 집비둘기 집들이 더욱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자아낸다. 순한 양 같은 검은 눈동자, 곳곳에서 아이들이 조잡한 기념품을 들고 원달라를 외치고 있다.


헤로데의 학살을 피하여 이집트에 온 예수님 가족이 들렀다는 곳에 세워진 ‘아기 예수님 피난 성당’에 들어선다. 물론 콥트 교회다. 예수님 시대의 전례와 이집트의 언어가 녹아 있는 2000년의 콥틱. 검은 얼굴의 사람들이 믿는 교회. 본당 안에는 세 개의 성소, 즉 지성소와 유아 세례처와 순교 성인들을 위한 기도처가 있고, 열두 제자를 상징하는 열두 개의 기둥이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이콘도 십자 표시도 없는 기둥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이스카리옷 유다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다시 뜨거운 햇살 속에 나서 오래된 모스크들에 둘러싸인 ‘모세 기념 회당’을 찾아간다.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 기도를 올린 곳으로 4백 년경에는 성당이었다가 유다인들이 회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천백 년경에 재건된 것으로 종교적으로는 사용되지 않고 기념물로만 보존하고 있다.


나일강변의 콥트교회에 갔다가 그냥 나온다. 나뭇그늘 아래 서니 시원한 바람이 잠시 스치지만 자꾸만 어지럽다. 아무래도 햇빛 속에 너무 전투적으로 나섰던 것 같다. 국립카이로박물관에 갔는데 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1층 전시실 한 켠 의자에 앉아 오래된 이집트 유물들과 만나지 못하는 마음을 애써 달래고 있었다.


호텔에서 미사를 하고 하루의 여장을 푼다.


잠시 파란 물빛이 환한 수영장에 나갔다가 결혼식의 피로연 같은 잔치를 보았다. 하룻동안 보았던 카이로의 을씨년스러움과 대비되는 부유한 사람들의 파티. 아직도 유랑의 맛이 남아있는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오늘의 순례는 이 순간의 풍요와 분주함과 가벼운 속도 가운데서 의미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임을 생각한다. 매일의 크로노스 가운데 상존하는 은총의 카이로스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오늘의 순례이다.

 

 

 

▷ 사흘 : 6월 19일(카이로→시나이)


카이로의 일상이 시작되는 아침, 드디어 출애급의 여정이 시작된다. 우리는 카이로에서 출애급을 시작한다. ‘애급’을 떠나 우리는 ‘광야’를 향할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했듯이 사막의 밤은 신비스러울 것이다. 모든 성인성녀가 그리워하던 사막은 그 ‘아무것도 없음’으로 인하여 새로운 영성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는 은총의 장소이다. 우리는 고대로 돌아갈 수 없다. 2006년의 오늘,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순례이다.


나일강을 지난다. 도시가 온통 희뿌옇다. 경찰국가 이집트. 계엄령하의 이집트. 어둡고 음울하다, 그들의 눈망울처럼. 그 눈망울들의 깊이 모를 우울이 자꾸만 걸린다.


수에즈 터널을 지나 시나이 반도로 들어서 달린다. 오래된 먼지의 땅. 길고 긴 땅이다. 반짝이는 이집트는 없다. 더욱이 가난하고 힘도 없다. 남루한 흙먼지만 끝없이 날린다. 3500여 년의 오아시스가 있었을 우윤무사(모세의 우물)에 도착한다. 대추야자 나무가 위용을 떨치고 선 오아시스. 갈대 바다를 떠나 수르 광야로 접어들어 사흘을 걸은 히브리인들이 비로소 발견한 샘물. 하지만 그 물은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괴로운 쓴 맛’의 우물을 ‘마라’라고 하며 대체 무엇을 마셔야 하느냐고 불평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세를 통하여 단 물을 주신다.


아직도 물길을 안고 있는 우물 가로 원달라를 외치는 어린 소녀들, 비드팔찌 등을 파는 몇 개의 노점이 그늘을 만들고 서 있다. 우리는 그들의 일상을 지난다. 그들은 태양을 이고 새까만 아이는 태양빛 속에 자란다. 소녀의 눈은 하염없이 홍해를 바라보고 있다.


수에즈 홍해가 펼쳐진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빛깔. 블루사파이어다. 하지만 반대 방향은 거친 광야가 끝없다. 바람이 휩쓸어 온 ‘비니루’들이 광야의 키 작은 풀들에 엉클어져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듬성듬성 피어있는 풀포기, 가슴이 덜컹거린다.

 

 

 

마라의 샘

(그 괴롭고 쓴 맛의 샘. 저 너머로는 아름다운 홍해가 펼쳐지지만 반대쪽은 가도가도 돌산이다.)

 

이집트는 임시로 사는 곳 같다. 금방이라도 일용품을 싸들고 길을 나서야 할 것 같은 임시 숙소. 아늑함도 평온함도 느낄 수가 없다. 주님은, 풍요를 통해서도 찬양 받으시고, 이 불모지들을 통해서도 찬양 받으소서. 아름다운 땅을 보며 당신을 생각하고, 마르고 뜨거운 땅을 보면서도 당신을 생각합니다. 그나마 이 땅에 지하자원이 풍부하다니 다행이다.


아름다운 홍해의 어느 모퉁이에 내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유황온천에 들어간다. 돌산에 만들어진 동굴이다. 역한 유황냄새 속으로 들어가니 금세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아예 땀으로 목욕을 하며 숨을 고른다. 이 숨 막히는 순간조차 내 죄보다는 덜 뜨거울 것이다. 온통 달아오른 몸으로 동굴을 나오니 홍해의 바람이 거칠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땀을 말려버린다. 유황이 홍해로 흘러드는 물길에 발을 담그니 데일 듯이 뜨겁다. 홍해에 발을 담그고 몸을 식힌다. 물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이제 수르 광야에서 신 광야로 향한다. 도중에 시띰 나무 아래서 수박을 쪼개 나눠 먹고 구약시대의 르피딤 골짜기를 찾아간다.


인적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곳에 5세기경에 지어진 여자 수도원이 고즈넉이 있다. 손을 씻고 미사를 준비한다. 미사 내내 뾰롱뾰롱 새들이 함께 지저귄다. 게다가 파리형제들이 덩달아 하느님을 찬양하느라 사방팔방으로 날뛰고 있다. 눈과 입술에 앉은 녀석들은 입으로 후 불어도 영 소용이 없어서 줄곧 손으로 날리느라 분주했다. 옆에 계신 분들도, 맞은 편 분들도 다들 고생하는데 신부님만은 고요해 보인다. 아무래도 파리형제들이 신부님한테는 안 붙는 것 같다.


르피딤에 진을 친 백성들은 목이 말라, 어쩌자고 이집트에서 데리고 왔느냐고 불평하며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며 주님을 시험했다. 마싸와 므리바.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는 한가?”를 묻기 전에 “내가 하느님과 함께 있는가?”를 생각하라. 신부님은 강론에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라고 강조하신다. 그것은 앙갚음(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처럼 ‘사랑으로 공격하라!’

 

 

 

 

르피딤 골짜기의 여자 수도원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해가 저물어가는 이집트를 떠난다. 광야 마을의 처녀들이 웃으며 지나간다. 저 처녀들은 무슨 꿈을 꿀까. 그 생각과 꿈들에 축복을! 고지대라 귀가 먹먹해진다. 마치 메테오라 같은 느낌이 드는 시나이 산 근처의 카타리나 산장에 도착해 하루를 접는다.

 

 

해가 지고 있는 르피딤 골짜기

 

 

시나이 산장 카타리나 플라자

 

 

▷ 나흘 : 6월 20일

-시나이(시나이 산 등정, 카타리나수녀원)→파란광야→이스라엘(타바로 입국)→요르단→페트라


밤중에 일어나 시나이를 향한다. 새벽 두 시.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그것은 거룩한 긴장인 동시에 실제적인 것이기도 했다. 많이들 낙타를 타고 오르지만, 우리 일행은 아무도 낙타를 타지 않는다. 칠흑. 그리고 별들. 하늘을 올려다보니 빙빙 돌아 금세 쓰러질 것 같다. 그냥 앞만, 천천히, 다만 내 속도로 앞만 보며 산을 오른다. 보이는 것 거의 없지만,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이가 참으로 귀한 만남이다. 구약에는 감히 범접도 할 수 없었던 곳. 과연 우리만의 땅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장소에서, 낙타몰이꾼 베두인 사람들도 유럽의 젊은 순례자들도 다 아름답고 반가웠다. 구멍가게 같은 휴게소들을 지나 마침내 정상 바로 아래 휴게소에 도착했다. 아직 밤은 보잇한 빛 속에 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정상을 향한다.


곧 해가 솟을 것이다. 많은 이가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나중에는 덜덜 떨리기도 한다. 모포를 빌려 덮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어느 순간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장엄한 광경에 먹먹한 가슴으로부터 고요한 찬가가 시작된다. 이미 해가 떠오르고 많은 순례객들이 산을 내려가자 우리는 ‘시나이에서 드리는 미사’를 봉헌한다.

 

 

 


칠흑의 어둠으로부터 빛이 드러나고 있다. 비로소 보이는 거룩한 땅. 우리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 비치는 불빛을 바라본다. 시나이 산 정상에는 4세기 경에 세워진 교회 터에 1934년 다시 세운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참 뜨거웠지만 참 행복한 길이었다. 다들 무사히 기쁘게 내려왔다. 산을 올라가는 것과 내려오는 것. 아무것도 뵈지 않던 길이 날이 밝자 아찔한 돌산이었다. 하지만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여전히 한마음이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순례하듯 일상도 살 수 있다면!

 

 

 

 

시나이 산을 내려오며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날이 밝자 비로소 드러나고 있다. 내려오는 길에 만난 이정표와 하루 일을 마치고 쉬고 있는 낙타 한 마리


 

카타리나 수도원이 아직 문을 열지 않아서 뜨거워진 몸과 마음을 식히며 기다린다. 6세기에 지어진 이 수도원에서 1844년 티센도르프가 시나이사본으로 알려진 그리스어 성서 사본을 발견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모세가 하느님을 뵈었을지도 모를 떨기나무 아래 서 본다.

 

 

 

카타리나 수도원 전경과 떨기나무

 

신 광야에서 파란 광야를 향한다.


한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룩소르’ 맥주 한 잔을 마신다.


홍해를 지나고 있다. 길고 긴 바다. 방갈로들이 늘어서 있다. 시나이를, 이집트를 떠난다. 알레이꿈 살람!


이스라엘 국경을 향해 가고 있다. 깨끗한 건물들이 보인다. 그런데도 여전히 임시로 사는 집들 같다. 아마도 집의 형태 때문인 것 같다.


눈이 부신 햇살 속에서 각자의 가방을 끌며 국경을 통과한다. 이스라엘 국경의 삼엄한 절차 등에 대해 하도 들어서인지 많이들 지쳐 보인다. 유다의 이쁜 처녀들. 그러나 이스라엘 국경 타바의 그녀들은 국가와 종교에 짓눌린 피해자의 모습이다.


오후 다섯 시 지나 요르단에 입국한다.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하는 버스에 타고 왕의 대로를 달리며 아카바를 지난다. 모세는 카데스에서 에돔 임금에게, 임금님의 영토를 벗어날 때까지 오른쪽으로도 왼쪽으로도 벗어나지 않고 ‘임금의 큰길’만 따라 가겠으니 길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리하여 결국 광야로 나간다. 그 길을 3500년 지난 지금 우리는 쌩쌩 달린다. 요르단은 붉은 암반 산이다. 그래도 이집트보다는 낫다. 모래언덕, 흙언덕을 지난다. 문득 지평선이 그리워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푸른 지평선이 드러난다. 푸른 작물이, 나무가 보인다. 자꾸 이집트가 눈에 밟힌다. 페트라에 도착해 왕의 대로 호텔에 묵는다.

 

 

닷새 : 6월 21일(페트라→마케루스→메드바→느보산→암만)


페트라의 아침. 제법 서늘하다. 일교차가 심하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세 개의 달걀 모양 지붕을 가진 모세의 샘에 내려가 본다. 기념품 가게인 듯한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전히 맑은 물이 솟는 샘이 있다. 그들은 또다시 불평하고, 모세는 주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내리쳐 물을 솟게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주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아 아론과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모세의 우물
(바로 그 므리바의 물이 아직도 솟고 있다.)

 

 

페트라

 

점점 뜨거워지는 햇빛 속에 나바테아 족의 역사가 배어 있는 페트라로 간다. 영화 인디에나 존스의 촬영지로 더 유명한 협곡. 사람들의 감탄사만 없다면 고요히 아주 긴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원전 1400년 전에는 모압과 에돔의 접경으로 ‘에돔의 셀라’라고 불렸으니, 3500년의 세월이 켜켜이 배어 있는 곳이다. 암벽을 파서 극장과 목욕탕 등의 시설을 만들었던 천연 도시가 이제는 낡은 그림처럼 버티고 있을 뿐, 인간이 자연과 신들의 세계와 보다 가깝던 세월의 흔적들만 곳곳에 새겨져 있다.


붉은 사암 협곡을 따라 두려운 마음으로 걷다보니 헬레니즘 양식 건물이 웅장한 위용을 드러내고 다가온다. 이집트 여신상과 페르시아 왕관 등 여러 문명의 영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건물은 로마에 의해 제라쉬와 다마스쿠스를 잇는 교역의 거점도시였던 페트라의 번성을 짐작하게 한다.

 

 

 

 

페트라

오고가는 길의 작은 서낭당과 위용을 드러낸 협곡.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가다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건물은 지붕에 보물이 있다는 전설로 아랍인들이 알카즈네(보물)라고 부르는 장제전이다.

 

잠시 고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떨치며 다시 왕의 대로를 따라 광야를 달린다. 문득 가이드가 모두 눈을 감으란다. 잠시 후에 눈을 뜨니, 끝이 없을 것 같던 광야 저 아래로 엄청난 골짜기가 입을 벌리고 드러누워 있다. 잠시 포효를 멎춘 맹수처럼. 아르논 골짜기. 모압과 아모리인들의 경계였던 땅. 참 무수한 접전이 있었을 골짜기가 고단한 잠을 자고 있었다. 잠시 내려 그 위용을 마음에 담는다. 사방에 펼쳐진 그 광활한 풍경을 도저히 눈으로는 다 담을 수가 없다.


비록 야위고 비틀어진 채로나마 수목이 자라고 있는 요르단의 일상을 지나 헤롯 안티파스의 땅이었던 마케루스로 향한다. 훅훅한 도로 한 켠에 차를 세우고 마른 풀밭에 서서, 멀리 뵈는 마케루스 요새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아르논 골짜기 주변

 

 

그래도 요르단은 수목이 자란다.

 

얼굴을 드러내 놓기 힘든 열기다. 그런데도 세례자 요한이 갇혀 있었던 헤로데의 여름 별장까지 올라가 보기로 한다. 참 대단한 일행이다. 한마디 이의도 없이 기어이 가보겠단다. 이분들 아니었으면 평생 발길 돌려 볼 수 없을 땅을 오른다. 해발 700미터, 사해 수면보다는 1100미터나 높은 이 요새는 기원전 유다 임금이 나바테아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구축했다가 로마에 의해 파괴된 것을 헤로데가 재건한 것이다. 지금은 건물을 지탱하던 기둥들과 주춧돌들만이 그늘 한 점 없는 광활한 대지 위에 남아 있다.

 

 

마케루스 요새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가두었다고 알려진 천연 요새로 사방을 둘러보아도 푸른 그늘은 없다. 이천 년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자못 궁금해지기도 했다.

 

아마도 요한이 갇혀 있었을 지하 감옥을 본다. 헤로데가 여인으로 인해 범죄하는 인간이 아니라 영원을 지향하는 존재였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저만치 사해를 바라보며 서니 문득 향연의 피리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무엇을 먹고 살까 싶은 대지에 드문 인가가 눈에 뵌다. 모압 땅을 지나며 그 여인, 모압의 룻을 기억한다. 신부님은 레비르법을 다시 상기시킨다.


우리는 메드바로 간다. 모자이크로 유명한 이 작은 마을의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 바닥에는 6세기 경에 만들어진 팔레스티나 지도가 있었다. 비록 군데군데 지워지기도 했지만 사해와 예루살렘 등의 모습이 확연히 남아 있었다. 모자이크 학교와 기념품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을 지나 메드바를 뒤로 하고 우리는 느보 산으로 향한다.

 


6세기 경에 만들어진 모자이크 지도
(사해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아남은 롯의 수도원도 지도에 그려져 있다.)

 

오늘날도 여전히 광야인 느보 산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오른다. 열려 있는 철문을 들어서니, 입구에 서 있는 기념물이 순례객을 맞이한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기념비에는 ‘모든 것들의 위에 있는 모든 존재의 아버지인 하느님’이라는 라틴어 문장이 새겨져 있다.


백 년 만에 꽃을 피우고 죽어간다는 용설란 두 그루가 마치 솟대처럼 버티고 선 느보 산 정상에 작은형제회가 세운 모세기념 성당이 있었다. 모세의 무덤 위에 있었다는 비잔틴 시대의 성당 터를 복원하여 지은 것이다.


모세가 올라간 ‘모압 평야에서 예리코 맞은편에 있는 느보 산 피스가 꼭대기’는 아마도 느보 산의 세 번째 봉우리인 시야가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곳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셨다. 단까지 이르는 길앗, 온 납탈리, 에프라임과 므나쎄의 땅, 서쪽 바다까지 이르는 유다의 온 땅, 네겝, 그리고 초아르까지 이르는 평야 지역, 곧 종려나무 성읍 예리코 골짜기를 보여 주셨다(신명 34,1-3).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온 땅을 보여 주시면서도, 그곳으로 건너가지는 못한다고 못 박으셨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삶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던 모세는 하느님에 의해 마침표를 찍는다.

 

 


느보 산 정상에 있는 모세 기념 성당

(성당 앞에는 구약의 구리뱀과 예수님의 십자가를 복합하여 만든 조반니 판토니의 작품이 세워져 있다.)

 

성당 정원에는 모세가 뱀에 물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만든 구리뱀과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랜 폭염 속에 서 있다. 많이 덥고, 성당 안도 무척 덥다. 구리뱀과 십자가를 결합한 상징물이 구급차의 상징이라고 한 가이드의 설명을 신부님께서 지적하신다. 분명히 그것은 느보 산의 십자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의술의 신으로 등장하는 아스클레피오스나 헤르메스의 지팡이와 관계 있을 것이다. 아직도 태양이 쨍쨍 비쳐서 십자가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산을 내려온다.


알로이시오 곤자가의 축일, “지금 종말이 온다 해도 난 이대로 공치기를 할 거예요” 라고 했다던 그의 일화는 오늘, 마르틴 부버를 상기시킨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의 의미.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너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것은 결국 실존을 대면하라는 요구이다. 그래야만 삶의 순간들이 생생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제 이방의 도시 암몬에 들어선다. 아름다운 왕비 라니아가 사는 곳. 암만의 호텔에 든다.

 

 

▷ 엿새 : 6월 22일

암만→요르단 강(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군사분계선 안)→야뽁 강→제라쉬→펠라→이스라엘(알렌비로 입국)→갈릴래아


토마스 모어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모든 것이 하느님께 달려 있고,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려 있다.”


광야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체험하고 확인한 곳.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모세는 누구인가,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곳.


내적인 눈으로 순례 여정의 파노라마를 보라. 호텔을 나와 암만 도심을 지나고 있다. 800미터 고지대다.


느보 산에서 내려다 보이던 모압의 평지들. 종종 베두인 텐트들을 스친다.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 히브리인들도 이곳에 진을 쳤을까? 벼라별 깡통들이 모여 있다. 그곳에 새들이 둥지를 튼단다. 나무도 깡통도 없던 시나이에서는 새들이 어디에 둥지를 틀까?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군사분계선에 들어선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다녀가셨다. 신부님은 그가 끝까지 생명의 존엄과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기억하신다. 아름다운 교황. 요한 23세는 “답답하다, 창문을 열어라”고 하셨다는데, 지금 우리는 잘 가고 있는 것일까?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군사분계선 안
(요르단 강과 히브리 백성들이 진을 쳤을 모압 평야. 오늘도 땅은 쩍쩍 갈라지고 있다.)

 

요르단 강. 바로 그 요르단 강에 선다. 많은 환상을 버렸기에 강폭은 좁고 물은 탁한 요르단 강 앞에서도 심상하다. 더욱이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다. 어디쯤에서 세례자 요한이, 어디쯤에서 예수님이, 어디쯤에서 엘리야와 엘리사가, 또 어디쯤에서 나아만이 이 물길과 만났을까. 오래된 교회 터와 정교회 성당과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곳과 강 너머 이스라엘 땅을 바라보며 요르단 강을 떠난다.


과일가게들과 꽃집들과 돌언덕들을 지나 야뽁에 내려본다. 이제는 오염물질들 때문에 폐수가 흐르는 작은 물길, 이곳에서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원전 32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요르단 강 양쪽에 만든 열 개의 도시(데카폴리스) 가운데 가장 큰 제라쉬에 간다. 점심을 먹고 나와서 오래된 나뭇그늘에 앉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 따라서 흔들리고 아잔 소리 오래된 세월을 담고 흘러온다. 제우스와 아르테미스 신전과 야외극장과 무수한 열주들. 길르앗 산지의 중심지였던 제라쉬는 아직도 유적이 발굴되고 있다.

 

 

 


제라쉬 유적들

 

나무와 산이 보이는 북쪽을 지난다. 땅이 점점 비옥해지고 있다. 광야를 기억한다. 돌산과 모랫바람과 듬성듬성한 풀포기뿐인 그 땅을. 먹고 살기 위해, 신을 찬양하기 위해 해 뜨기 전부터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양을 치는 가난한 이들. 그럼에도 제 몫의 빵 한 쪽만으로 생을 연명하는 그들을.


가난한 이들이 까만 눈망울로 손을 흔든다.


요르단에 오니 소박한 아이들이 활짝 웃는다. 길 가의 큰 나무에서 열매를 따는 소년이, 고기를 매달아놓은 정육점 앞에서 수줍게 내리깐 눈망울로.


극도의 결핍은 벽을 만든다. 이집트의 소년들. 말 한마디 긴장 늦추고 나눌 수 없던, 인사 한마디 따뜻하게 할 수 없던. 그 을씨년스러운 풍경이, 마음이 아프다. 친교를 가로막는 궁핍, 처절한 가난, 시나이 산 곳곳의 소년들!


축복하소서. 오늘 제가 스치고 있는 저 여인과 아이들. 도시와 골목과 골짜기와 모든 언덕들.

 


서쪽. 요르단 광야 쪽으로 내려가다가 느닷없이 내린다. 데카폴리스의 하나였던 펠라.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그곳에 푸른 나무들이 열주처럼 자라고 있다. 검은 눈에 검은 피부를 가진 아이들이 물가에서 한낮을 달래고 있다. 고대부터 도시가 형성될 만큼 비옥했던 땅. 그러나 지금은 뜬구름처럼 무상한 흔적만이겐네사렛 호수의 아침     멀리 티베리아가 보인다. 남아 있을 뿐이다.


요르단을 떠나고 있다. 하와이안 무궁화가 핀 알렌비를 통해 이스라엘에 다시 들어섰다. 여전히 쥐엄나무 꽃은 붉게 피고, 국경의 이쁜 그녀들 또한 여전히 경직된 표정으로 일하고 있다.


눈물을 흘리며 걷는다. 비 오듯 하는 건 땀이지만, 마음의 폭포 또한 솟구친다. 예수, 그를 기억하는 일. 이천 년 전의 그만 기억하면 되는 것인가. 오늘날의 예수는 어떤 복음을 선포하는가. 복음은 단순하다. 평화, 사자와 어린 양의 공존. 나눔,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빵을. 사랑, 네 몸처럼. 그러나, 복음이 가능할까. 순수한 종교의 세계가 아니고, 약육강식의 정치가 얽혀있는 세계에서 복음이 가능할까. 신자유주의와 기독교 원리주의자들.


이제 이스라엘, 주님이 밟으셨던 땅이다. 오랫동안 그리웠습니다. 이 땅에 오다니, 이 땅을 밟다니! 고맙다, 고맙다. 뜨거움이 나를 사로잡아 오롯한 은총을 알게, 깨닫게 되기를!


이스라엘은 비옥하다. 국경을 나온다. 비무장 지대 안의 요르단 강을 지난다.


티베리아에 들어선다. 그들의 정결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마음이 답답해진다. 막달라 마리아가 살았던 곳을 지난다. 갈릴래아 호수. 참 크다. 야자수와 침엽수들, 갖가지 꽃들. 갑자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섰다.

 

 

이레 : 6월 23일
카파르나움→필리피의 카이사리아(바니야스)→텔단→코라진→타브가(진복팔단성당, 빵과 물고기의 기념성당, 베드로 수위권성당)→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묵주기도


아침. 저만치 티베리아가 바라뵈는 겐네사렛 호수에 흰구름이 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어느 날 당신이 이 물길의 어느 켠쯤 시선을 주셨을까.


막 떠오른 태양이 아늑한 빛을 주는 호숫가에서 뼛속까지 고요해진다.

 

 

 


겐네사렛 호수의 아침

(멀리 티베리아가 보인다.)


카파르나움,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의 작은 마을에 도착해 ‘예수의 도시(The town of Jesus)'라는 문패가 붙어 있는 집 앞에 선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문이 열리지 않았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자 베드로 사도와 프란치스코 성인이 우리를 반긴다. 베드로의 집이 있었다는 터에 세워진 팔각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예수성심축일, 잠시 묵상한다. 이스라엘 순례의 시작이다. 마음의 평화부터 유지하며, 생생하게 이 순간들과 맞닥뜨리자.


예수님 시대에도 회당이 있었던 자리에 남아 있는 화이트 시나고그의 기둥들과 전시된 유물들을 둘러보고 필리피의 카이사리아로 향한다.


아직 지뢰가 묻혀있다는 골란 고원을 지나고 있다. 헤르몬 산에서 눈 녹은 물이 흘러와 농경지를 적시기 때문에 농경지가 넓고 좋아서 체리, 복숭아, 사과 등이 풍성하고, 가장 좋은 포도주를 빚는 포도도 이곳에서 재배된다니 얼마나 각축의 땅이었을지 가히 상상이 된다. 이스라엘은 6일 전쟁 때 시리아로부터 갈릴래아의 물길을 확보했다. 시리아와 이스라엘 평화유지군이 주둔하는 산 아래 길에 잠시 내려서 멀리 헤르몬 산을 바라본다. 갈릴래아로 흘러드는 요르단 강의 발원지. 헤르몬 산 아랫마을에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느닷없이 이스라엘과 시리아로 갈라진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핸드마이크를 들고 한 주간의 소식을 눈물로 주고받는 풍경이 벌어진단다. 시편과 아가서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헤르몬 산 주변으로 인간의 파란만장한 삶들이 얽히고 설킨다.


보랏빛 이쁜 엉겅퀴가 누렇게 마른 풀들 사이에 피어나 있는 림로드 성채 위 길을 구불구불 달려 바니야스에 닿는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있었던 만신전의  비어 있는 벽감들로 이제는 산새들만 날아들고, 우리는 다시 무화과나무 깊은 그늘로 들어 서 바니야스 폭포를 보러 간다.


아직도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는 카이사리아. 유도화가 가을 코스모스처럼 길게 핀 길을 따라 가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편도나무와 여러 종류의 참나무들이 우거진 길을 내려간다. 거기 참으로 청량한 물길이 쏟아져 흐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랜만에 보는 물인지. 요르단 강으로 흘러드는 하천의 원류 가운데 두 번째로 큰 곳이다. 아마도 학교에서 함께 온 듯한 유다 아이들이 왁자지껄하다. 아이들의 크고 깊은 눈을 바라보며 몇 마디 나누다 샬롬하고 헤어져 텔단으로 간다.

 

 

 

필리피의 카이사리아(바니야스)
(신들의 자취는 사라지고 안내 표지판만 남아 있는 바니야스와 아름다운 물길이 쏟아지는 바니야스 폭포)

 

길가에 덩그마니 놓인 이정표 주위로 풀꽃들이 무성하다. 이스라엘인에게는 유원지여서 많은 사람이 휴식을 취하러 온다는 이곳은 아보카도며 유칼립투스며 이름 모를 무수한 나무들과 말 그대로 기화요초가 마치 정글처럼 우거져 있다. 유칼립투스가 둘러싼 단 지파의 땅. 단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요르단으로 흐른다. 물살이 얼마나 거센지 포말을 일으키며 뛰어간다.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단 지파의 삶의 터를 찾아드니, 성문이었던 자리에 세월이 모랫바람을 쌓아 작은 언덕을 이루어놓았다. 금송아지를 모셨던 제단을 새로 만들어놓았다. 제단은 절대자를 체험한 이의 표현행위다. 무수한 제단들. 신과 보다 가까이 살던 이들의 잦은 체험.  


낯선 이정표들을 지난다. 그러나 어디든 주님의 땅.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밭을 지나 점심을 먹으러 간다. 베드로고긴지, 숭어인지 암튼 맛있는 숲에서 맛있는 요리를 먹는다.


점심을 잘 먹고 올라탄 버스 안은 출렁거리는 물결같다. 다들 깊고 행복한 잠에 취한다.


갈릴래아로 가는 길에 코라진에 들른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일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21). 오랜 세월 먼지와 모랫바람이 쌓여 줄기가 땅에 묻힌 고목이 맞이하는 코라진의 풍경은 황량하다. 다만 노랑, 분홍, 보라, 빨강, 흰 꽃들만이 피어 있는 한 켠에 시나고그 터라고 추정되는 유적이 있다. 그곳에 2, 3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모세의 의자’가 남겨져 있었다.

 

 

 

코라진의 황량한 풍경
오랫동안 모랫바람이 몰고 온 흙이 쌓여서 나무 줄기가 땅에 묻히고 있다. 시나고그에서 발견된 이 현무암 의자는 2, 3세기 것으로 모세의 자리라고 불린다.

 

아름다운 호수가 바라뵈는 언덕에 세워진 진복팔단성당에 간다. 그날 주님이 주신 위로, 기쁨. 그 울림이 뜨거운 갈릴래아의 태양 속으로 스며온다.


‘일곱 개의 샘’이라는 뜻의 타브가에 있는 또 하나의 성당, 빵과 물고기 기적기념 성당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있다. 제단 앞 바닥에는 두 마리의 물고기와 네 개의 빵이 그려져 있는데, 빵 하나는 미사 때 사제의 손에 들려 있다. 또 갈릴래아 호수의 새와 물고기, 짐승들과 꽃을 묘사한 모자이크도 있는데, 뱀에게 위협 당하는 작은 새들을 큰 새가 보호하고 있다. 그 큰 새, 즉 예수님을 상징하는 펠리컨은 지워져서 거의 여백으로만 남아 있었다.

 

 


진복팔단성당과 성당에서 바라본 갈릴래아 호수

 


 

 

빵과 물고기 기적 기념 성당과 제단 모자이크

 

예수님이 제자들과 빵과 물고기를 드셨다는 바위, 멘사 크리스티(주님의 식탁, mensa Christi) 위에 세워진 베드로 수위권 성당은 공사중이었다. 많은 순례자들로 어수선한 그곳에는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사셨다는 작은형제회 수사님이 기도하고 계셨다. 공사중이라 멘사 크리스티는 보지도 못하고 나오는데 무슬림의 기도 시간인지 한 남자가 쥐엄나무 아래 풀밭에서 절하며 기도하고 있다.

 


베드로 수위권 성당 정원의 조형물


예수님 시대의 고깃배를 복원했다는 배에 올라 묵주기도를 드린다. 어부들도 쉬이 보기 어렵다는 펠리컨들이 떼 지어 호수 위를 날아오른다.


안식일이 시작되서 많은 유다인들이 와 있다. 이곳에서의 두 번째 밤,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여드레 : 6월 24일
카나(첫 기적성당)→나자렛(성모영보성당, 성가정성당, 예수님 시대의 시나고그)→타보르산→카르멜산→카이사리아→텔아비브 요파→예루살렘

 

 


카나

카나의 첫 기적 성당 제대에는 포도주 항아리가 봉헌되어 있다. 처치 스트리트에 있는 또 하나의 성당인 ‘카나 출신 사도 바르톨로메오’의 성당 묘지 너머로 카나의 집들이 보인다.

 

막달라를 지나 카나에 간다. 예수님의 첫 기적 성당. 아름답다, 작고 소박한 성당. 포도 덩굴이 조각된 제단에 항아리 여섯 개가 봉헌되어 있다. 처치 스트리트, 각 교파들의 여러 교회가 있는 카나의 골목을 지나온다. 흰구름이 종종 태양을 가리기도 한다. 카나 출신 사도 바르톨로메오 성당 옆문으로 들어가니 키 큰 로즈메리 향기 속에 묘지가 있다. 그곳에 묻힌 영혼들의 영원한 안식을 구하며 다시 골목으로 나온다. 카나. 그 골목들, 무사할까?


나자렛으로 간다. 많은 것이 뒤엉켜 있는 듯한 마을. 분주한 그들의 오전 속으로 우리는 순례중이다. 동방정교회의 성모영보 성당인 마리아의 우물 교회 앞에 선다. 성모님 당시 이 동네의 유일한 우물이었기 때문에 성모님도 이 우물로 물을 길러 다니셨을 것이고, 이곳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았다고 동방정교회 전승은 전한다. 동방교회에는 전승 이외의 전설들도 많아서 그림에 나타나는 전설들을 보면 성모 신심이 무척 강하다. 수많은 이콘들. 동방의 모든 성인들이여,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섬세하고 소박한 문양이 고요하게 새겨진 테라코타 입구를 들어서 일곱 개의 계단을 내려가니 아직도 물이 콸콸 흐르는 샘이 있다. 어머니 마리아, 처녀 마리아의 우물.


이제 가톨릭의 성모영보 성당이다. 성당 밖 벽에는 세계 각국의 성모님이 모셔져 있다. 살베 레지나가 끊이지 않는 나자렛. 종소리가 꽃향기처럼 흩날리는 땅, 순례자는 주님을 마음에 담고,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들은 낯선 일상을 살고 있다.


성가정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 요한 세례자 탄생일. 소리인 요한, 그 실체를 좇아 우리는 왔다. 소리이며 영상인 나자렛, 그 뿌리를 좇아 우리는 왔다. 세례자 요한의 ‘겸손’과 투철한 자기인식. 성모님의 겸손과 투철한 책임. 주님의 은총 아니고서야 인간이 그렇게 단단할 수 있을까. 그토록 깊이, 그토록 겸손하게, 그토록 영웅적인 삶. 그리스도와 동일시하지 않은 요한.


성가정성당, 혹은 성요셉성당 지하에는 감춰진 듯 세 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요셉의 정혼과 꿈과 임종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 그의 삶만큼 소박하고 드러나지 않게.

 

 

 

 

나자렛

성모영보성당의 외관과 본당. 성모영보성당 바로 옆에 성가정성당 혹은 성요셉성당이 있다.

 

저자거리를 지나 예수님 시대의 시나고그에 간다. 그날, 고향에 오신 예수님은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 들어가서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 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시나고그를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동방 가톨릭교회에 들어간다. 휘장이 드리워진 지성소. 아직도 우리는 갈 길이 멀다. 비좁은 길에 순례객들이 계속 들고난다. 저자로 나가는 입구에 고즈넉이 앉아계신 비오 신부님이 분주한 우리를 배웅한다.


나자렛을 떠난다. 예수를 환영하지 않았던 고향. 그래서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으로 가셨다.”

 


나자렛에서

예수님 시대의 시나고그와 그 곁에 있는 동방 가톨릭교회에 들러 다시 나오는 골목 어귀에서 비오 신부님의 배웅을 받는다.


타보르 산으로 간다. 이제 꾀가 나는 것일까. 점심을 먹고 폭염 아래 나서니 택시를 탄다는 얘기가 반갑다. 몇 대의 택시에 나눠 타고 해발 588미터인 타보르 산에 오른다. 경사가 아주 심해서 차가 구불구불 곡예하듯 오른다.


시에스타 중이어서 문이 닫힌 거룩한 변모 성당 밖에 앉아 잠시 타보르 산으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 귀를 기울인다. 요르단 강 계곡과 골란 고원, 이즈르엘 평야와 사마리아 산악 지대, 나자렛과 카르멜 산, 그리고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당신의 죽음에 대한 대비였다. 또한 그 변화는 제자들의 것이기도 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마태 5,8). 그들은 보았다. 그들이 ‘보게' 된 것이다. 시에스타가 끝났다. 종이 울린다.

 

 

 

타보르 산 정상에 있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성당과 내부

 

타보르 산을 내려온다. 팔레스타인 지역이라 모스크가 있다. 올리브 나무 그득한 드보라의 고향 마을을 지난다. 카르멜 산으로 가고 있다. 노랗고 작은 꽃들이 흐드러진 길 가에 1세기 경의 돌무덤이 열려 있다. 문을 닫았던 둥근 돌도 그 곁에 있다. 카르멜 산, ‘하느님의 포도밭, 카렘 엘’이라는 유래가 아름답다. 지금은 카르멜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지만 기원전에는 무수한 신들에게 바치는 예배가 끊임없었던 곳. 엘리야 예언자는 당시 만연한 혼합종교에 빠져 주님을 배신한 동족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주님을 증거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종살이에서 구해낸 야훼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풍요는 바알과 아세라가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팽배한 혼합종교와 농경사회의 특수성 안에서 주 하느님만을 고백한 이들은 얼마나 명료한 정신으로 살았던 것일까. 예로보암의 금송아지가 일상이었던 삶의 자리에서. 십자군 성채였던 수도원 옥상에 올라 사방으로 펼쳐진 땅을 내려다본다. 정원에 세워진 엘리야 예언자의 사자후가 들리는 듯하다. “참 하느님이 누구신가?”


 

카르멜 산 수도원 마당에는 엘리야가 열두 개의 돌로 제단을 쌓았다는 자리에 칼을 높이 쳐들어 바알 예언자를 막 내리치고 있는 엘리야 예언자의 석상이 있다.


다시 산을 내려와 지중해의 한 켠, 로마 시대의 수로가 남아 있는 카이사리아에 내린다. 해변에는 많은 사람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다. 기원전 헤로데가 건설했다가 로마 총독이 주재한 행정도시로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주목 받는 항구의 하나였던 곳. 원형극장과 십자군 시대 성벽, 시장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곳에서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에게는 처음으로 코르넬리우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텔아비브에 들어서 우리는 요파로 간다. 가이드가 헤르츨에 대해 언급한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해 시오니즘을 태동시킨 사람. 결국 그의 뒤를 이은 바이츠만이 2차 세계대전 후 밸푸어 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이스라엘의 건국을 실현시켰다. 이스라엘로서는 민족적 비원의 성취였으나 그로 인해 야기된 현실이 너무도 답답하다.


텔아비브의 지중해변, 많은 이들이 오후의 망중한을 즐기고 있다. 정비된 도시와 중심가와 해변을 지나 요파에 닿는다. 오래된 도시 요파, 베드로가 코르넬리우스와 관련된 환시를 본 집이 그 골목에 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그러나 그 집은 닫혀 있고, 우리는 골목을 나와 저물어가는 도시를 걷는다. 거기 베드로 성당이 있었다. 저녁 미사가 봉헌되고 있는 성당에 잠시 들어갔다가 지중해변에 선다. 노악사가 바이올린으로 아베마리아를 연주하는 해변에 아이들이 해맑게 뛰놀고 있다. 저물어 가는 지중해 푸른 물결에 모스크의 초승달이 선명하게 비친다. 거대한 벤자민들이 늘어선 요파 거리를 벗어나 텔아비브 외곽을 지난다.

 

 

 

시몬의 집이라고 쓰인 집의 문은 닫혀 있고, 해지고 있는 지중해변 모스크의 초승달이 선명하다.

 

이제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 해가 진다, 비옥한 땅 위로. 높이 솟은 빌딩들 틈으로. 그리고 넓은 옥토가 이어진다. 또 귀가 먹먹해진다. 맥도날드 불빛이 어스름 황혼에 노랗게 빛나고 있다. 불빛이 밝혀진 예루살렘에 들어선다. 아름다운 언덕, 안식일의 조용한 도시. 유다교 복장을 한 다섯 소년이 지나간다. 영원한 ⋯⋯ 도성. 영원⋯⋯의 의미가 가슴을 울린다. 어두워지고 있다. 예루살렘에 축복을! 정신이 명료하다. 정말 맑다. 감사한다, 이 순간.


“저는 당신께서 계시는 집과 당신 영광이 깃드는 곳을 사랑합니다”(시편 26,8).

 

 

아흐레 : 6월 25일
예루살렘(올리브산 예수님의 눈물성당)→소금산→마사다→엔게디→쿰란→예리코→예루살렘


예루살렘의 아침. 대단한 햇살이다. 66만 인구의 도시.


1967년 6일 전쟁 동안 이스라엘이 요르단으로부터 앗은 지역인 올드시티를 지나 올리브 산으로 간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아름다운 제단이 있는 예수님의 눈물 성당, 도미누스 플래빗. 제단 너머로 바위돔 황금빛 지붕이 태양에 빛나는 시온산이 보인다.

 

 

 

 

도미누스 플래빗, 주님의 눈물 성당

눈물을 형상화 했다는 지붕과 시온 산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제단, 그리고 암탉이 제 날개 밑으로 병아리들을 모으고 있는 아름다운 제단화

 

예수님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위해, 예루살렘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다.” 이 성당 역시 작은형제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예루살렘, 평화의 도시. 평화의 사도인 프란치스코의 자취가 예루살렘과 잘 어울리면서도, 예루살렘이 결코 평화의 도시이지만은 않은 현실이 아프다.

 

 

 

도미누스 플래빗에서 바라본 시온 산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위돔과 멀리 성모영면성당이 보인다.)


미사가 끝난 후 잠시 시온 산을 바라본다. 멀리 성모영면 성당부터 황금빛으로 빛나는 바위돔까지, 그리고 예언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히브리인들이 묻혀있을 묘지들과 바알과 아세라 목상의 재가 뿌려졌던 키드론 골짜기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콘크리트벽을 지난다.


하느님이, 이 땅을 걸었다. 하느님이, 이 땅에 계셨다. 목마르고 배고프고 분노하고 눈물 흘리고 마음 아파하고 기도하며 이 땅에 사셨다. 유비쿼터스 하느님이 형체를 가진 존재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육화하셨다.


사해 쪽으로 간다. 유목민들의 정착촌을 지난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생활 습관, 즉 식사나 손님 접대 같은 일상을 관광 상품화한다. 시대의 흐름이 그들도 변화시킨다. 둔덕들이 펼쳐진다. 누런 흙. 또 다시 시레벨 아래로 들어선다. 해저 150미터다. 멀리 느보 산이 보이고 예리코가 보인다. 아름답다. 황량한 언덕들. 달궈진 살처럼, 철처럼 버티고 선 언덕들.


엔게디가 거기 있었다. 오아시스가 있어서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이곳의 동굴로 숨어들었다. 대추야자 나무 울창한 엔게디의 키부츠가 펼쳐진다. 햇빛이 좋아서 수십 년만 지나도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단다.


뜨거운 황야의 한복판에 있는 마사다를 지나 한참을 가다 보니 사해가 끊어진 곳에 수심이 깊지 않았던 뭍이 드러났다. 해변이 너무도 아름다운 엔보케그를 지난다. 해변이 아름다울 뿐더러 50여 가지 광물이 함유된 사해 물이 치료 효과도 있어서 사람들은 이곳에 즐비한 ‘해변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며 지병을 치유하고자 한다.


해발 600미터에서 흘러내리는 빗물들이 만드는 협곡을 지나니 소금산이 드러난다. 소돔과 고모라가 끝나던 날, 롯의 아내가 돌아봤다는 바로 그곳에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여인의 형상으로 바위 하나가 서 있다.


다시 길을 거슬러 마사다로 간다. 작은 계곡들을 품고 있는 누런 협곡들. 대단한 지형의 파노라마다. 금세라도 굴러내릴 듯한 돌산들.


마사다. 무너진 보루. 기원전 100년 경에 구축된 천연 요새로서 헤로데가 궁전으로도 사용했던 이곳에는 당시의 번영을 엿볼 수 있는 모자이크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후 66년 유다 독립전쟁 때에는 기지로 사용됐는데, 2년이나 저항하던 960여명의 유다인이 포로가 되기보다 자결하는 쪽을 택해 항쟁의 종지부를 찍었다.


절벽 높이가 사해 해면에서 400미터 정도 되는 이 요새를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참 아득하다. 가파른 벼랑 아래로 사해가 보이고 황량한 땅뿐이다.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곡식저장소와 회당과 장군들의 막사와 공중 목욕탕, 그리고 비잔틴 시대의 교회터.


해외에 사는 유다인들도 성인식을 즈음하여 마사다에 와서 밤을 새우며 조상들을 뜨겁게 기억한다. 기억의 현재화. 그 예배를 통해 그들의 시오니즘은 확대 재생산된다. 그 역사, 안타까운 일이지만, 결국 오늘날 불행한 분쟁의 뿌리가 된 역사. 물리적인 ‘땅’에 대한 집착이 유다교의 편협을 고착시켰다.


잠시 엔게디에 들른다. ‘들염소의 샘’이라는 엔게디에 들염소 몇 마리가 노닐고 있다. 쥐엄나무 곁에서 멀리 다윗이 숨어 들었다는 동굴을 바라다보고 내려온다. 다시 버스에 올라 우리는 쿰란으로 간다. 1947년 한 베두인 사람이 사해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에세네파 사람들이 살았으리라고 추정되는 쿰란에서는 이사야 예언서 전편을 비롯하여 총 600여 개의 고사본이 발견되었다.

 

그들이 정결한 영육으로 성서를 필사했을 필경실에서는 멀리 사해가 부연 빛으로 내려다보인다.

 

 

 

쿰란

(1947년 최초의 발견 이후 발굴된 11개의 동굴 가운데 제4동굴이 보인다.)

 

예리코에 들어가려 한다. 아주 위험한 일인 모양이다. 아랍 지역인 예리코는 순례자들에게 안전한 지역이 아니다. 아주 낡고 가난한 마을로 들어선다. 오랜 세월의 풍상이 느껴진다. 가득 찬 긴장감을 애써 털어내며 황급히 내려,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셨다는 산을 뒤로 하고 사진을 찍는다.

 


예리코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예수님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유혹의 산이다.)


자캐오의 집과 키 작은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올라갔던 나무를 보고, 아랍인 버스기사의 친구네 과일가게에서 팔레스타인의 과일을 사다 먹는다.


다시 검문소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모세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곳의 하얀 모스크를 지나고, 다시 시레벨 표지를 지나 유다 광야에 접어든다.


예루살렘에 들어서 유다 정통 종교인들의 동네를 지난다. 안식일이면 전혀 차가 움직이지 않는 동네. 아예 한계선을 그어놓은 동네. 잠시 그들의 안식일을 그려본다.


텔레비전 시청과 인터넷 접속이 금지되어 있지만 그들은 열심히 지킨다. 이슬람과 유다교. 그들의 경건함과 엄격한 규율 준수 등이 시대의 흐름과는 융화될 수 없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그들의 삶의 양태가 부럽기도 하다. 삶의 자리에 실재하는 신의 존재. 삶과 신앙의 괴리가 보다 적은 그 삶. 유다인들의 삶의 언저리에서, 그들의 관습에 신경쓰고 존중하며 샬롬을 보낸다.


예루살렘의 해가 진다. 대단한 폭염이었다.

 

 

열흘 : 6월 26일

예루살렘(최후의 만찬 성당에서 미사, 성모영면성당, 베드로회개성당) →베들레헴→예루살렘(벳자타 연못, 안나성당, 기혼샘과 실로암, 서쪽벽)


예루살렘의 아침. 하얗고 꽃이 피고 깨끗한 시간이다. 출근하는 사람들. 분주하지 않다. 검은 정장 차림의 유다인들이 핸드폰으로 통화하며 걷는다.


힌놈 골짜기를 지난다. 몰록에게 제 아들딸을 바치느라 불 속을 지나가게 한 ‘살육의 골짜기’, 결국 죽음의 구렁텅이로 영원한 징벌을 뜻하는 게헨나 골짜기.


최후의 만찬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미사. 강론을 듣는 대신 금쪽 같은 10분 동안 묵상을 한다.


바닷물로 젖어드는 소금인형처럼 예루살렘, 시온 산의 거대한 기운 속에 어린 내가, 어리석은 내가, 주님 앞에서 송두리째 무너진다.

 

 

미사가 끝나고 마르코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모스크에 올라간다. 세 개의 기둥이 아치로 버티고 선 그곳에는 이미 많은 순례객이 있다. 하기아 시온, 거룩한 땅의 골목들. 십자군 시대에 만들어 놓은 다윗의 무덤을 찾는다. 커다란 석관을 덮은 천 위에는 ‘이스라엘 왕 다윗이 살아서 여기 계시다’고 쓰여 있다는데 너무 좁아 오히려 답답해졌다.


성모님이 제자들과 여생을 보냈다는 곳에 세워진 성모영면 성당에 들어간다. 지하성당에는 구약의 여섯 여인, 즉 하와와 미리암, 유딧과 룻과 에스테르와 라헬이 모자이크된 천장 아래 영원한 잠에 든 성모님의 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잠시 촛불 밝혀진 성모님 발치에 머물다가 1층으로 올라간다. 성당 바닥에는 열두 명의 예언자와 열두 제자, 그리고 별자리 12궁도가 모자이크 되어 있다. 하기오스 하기오스 하기오스.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 바치는 삼중 찬미와 한 분이신, 거룩한, 민족들의 빛이신, 이새의 뿌리에서 돋아나신 예수님. 그리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을 외치는 요한이 성당을 채우고 있었다.


초세기부터 기념 성전이 있었던 이 땅은 무수한 부침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비잔틴 양식의 성전이 있었고, 대성전이 건립되었다가 페르시아군과 이슬람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으며, 십자군이 다시 기념성전을 지어 성모님께 봉헌했지만 그 또한 이슬람교도에 의해 파괴되었다. 지금의 성당은 20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다.

 

 


성모영면 성당에 안치된 성모님 상. 그 위 천장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구약의 여섯 여인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뜨거운 성당 밖으로 나와 성벽을 끼고 걷는다. 베드로 회개 성당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본다. 성당 정면에는 예수님의 심문 장면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친다. 종소리가 가까이서 굵게 울린다. 닭이 울었다. 그 순간 비로소 깨었다.


카야파의 집이었던 이곳에는 지하에 감옥들이 있다. 사상범, 정치범을 수감했던 곳에 내려가 본다. 지금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으나 당시에는 죄인의 어깨에 줄을 매달아서 구멍으로 내려 보냈다. 그 순간 예수님의 고독. 깊은 구렁 속에, 어둡고 깊숙한 곳에 내던져진 그 밤.


성당 마당에는 성수대의 원형으로, 정결례를 위해 사용되던 5세기 경의 성수대 가 보존되어 있었다. 비잔틴 시대 교회의 유물로 발견된 것이다.

 

 


베드로 회개 성당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2).


다시 힌놈 골짜기를 지난다. 이제는 극장이 들어서기도 하고 보랏빛, 붉은 빛, 화려한 꽃들이 피어 있다. 1967년까지 요르단과의 국경선이었던 정통 유다교인들의 마을을 지난다. 안식일이면 그들은 동네 안의 회당에서 기도한다. 길 가 꽃밭에 스프링클러가 물을 뿌리고 있다. 가는 물방울이 풀밭을 적신다.


베들레헴으로 간다. 차가 막힌다. 헤브론 길을 지나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간다. 베들레헴, 작은 도성이여.


커다란 모스크가 선 예수님 탄생 성당 앞 광장에는 노인들이 악세사리를 들고 원달라를 외치고 있다. 성당 바로 곁으로 프란치스칸이 운영하는 순례자 숙소 까사노바가 보인다. 화재로 소실되었던 곳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다시 만든 이 성당은 외침에 대비해 입구를 줄여서 지금은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다. 무수한 등불이 천장에 매달린 본당 안은 어둡고 기괴하기까지 하다. 예수님이 태어난 동굴로 내려가 커다란 별이 새겨진 제단에 엎드려 경배한다. 동방박사를 인도한 별이다. 또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동굴 위에 세워진 성당은 무수한 등잔이 드리워지고 무척 어두워서 기괴하기까지 했다. 정면의 오른쪽 제단은 그리스 정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카타리나 성당의 지하에는 예로니모 성인이 성서를 번역하던 동굴이 있다. 그는 이런저런 모든 것을 피해 베들레헴으로 떠나와 자리를 잡고 수도 생활을 하며 성서를 번역했다. 신구약성서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한 이 성서는 트렌토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아 대중적이라는 뜻의 불가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곳곳에 작은 십자가가 있는 동굴 한 쪽에 그의 묘비명이랄 수 있는 문구가 쓰여 있다. “나의 안식이 영원히 여기에 있다. 내가 하느님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칸과 살레시안들의 교육 기관이 있는 마을을 지나 베들레헴을 떠난다. 어린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구걸을 하고, 까만 피부가 햇빛에 더 새까매진 노인들이 목걸이와 가방 등을 들고 흥정하려는 어둡고 낡은 동네. 길가 벽에는 정치 지도자인 듯한 이들의 사진이 영화 포스터처럼 붙어 있다.


예수, 하느님이 이곳에서 나셨다!


이스라엘 국기가 달린 가정집들을 지나고 미국식 카페들을 지난다. 폭탄 테러의 염려 때문에 카페나 식당의 입구에는 어김없이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방을 조사한다.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벽에서도 가방을 검사할 것이다. 다윗왕의 길을 통과해 무슬림의 묘지를 지나 사자문으로 들어간다. 다시 양의 문을 통해 벳자타 연못 앞에 선다.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다는 기록처럼 제법 큰 못이다. 등덜미로 시원한 바람이 인다. 아름다운 바람, 고마운 바람. 여기서 예수님은 서른여덟 해를 앓던 이를 치유해 주셨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38년, 모세의 광야도 38년이었다. 인간의 한 세대를 의미하는 날수.


지금은 물이 말라 못이었다는 흔적만 남아 있는 벳자타를 한바퀴 돌고, 안나와 요아킴이 살던 곳으로 성모님이 태어났다는 안나성당에 들어간다. 천장이 아주 높고 단순한 본당. 장식이 없어서 더 그렇겠지만 이곳은 소리의 공명이 무척 아름다워서 우리도 성모님께 찬가를 불러드린다.


다시 양의 문을 나와 버스에 오른다. 순례자의 무수한 발길에 닳은 길은 미끄러울 만큼 반질거린다. 겟세마니 성전과 즈카르야의 묘와 예수님 유혹 성전을 지나 지저분한 쓰레기 하치장을 돌아서 무화과나무들 무성한 실로암 발굴터를 지난다. 좁은 길을 조금 더 올라가 기혼 샘이 있는 곳에 내린다. 젊은 여인들은 삼엄한 눈빛이지만, 하얀 옷에 까만 치마를 입은 비둘기 같은 아이들은 이방인에 아랑곳없이 맨발로 놀고 있다.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 차리라”(즈카 8,5). 한 남자가 흥겨운 듯 서글픈 듯 재즈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유다 임금 히즈키야는 아시리아의 침공에 대비해 이곳 기혼 샘의 위쪽 물줄기를 막고 땅 속으로 수로를 만들어 성 안으로 물을 끌어들였다. 그 히즈키야 수로를 통해 물이 공급되었던 실로암 연못에도 들른다.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성벽의 서쪽 벽 부근은 사람들로 붐빈다. 솔로몬이 지어 봉헌했던 성전은 기원전 587년 바빌론에 의해 파괴되었고, 유배에서 돌아온 후 재건한 제2성전 또한 유다 전쟁 시에 파괴되었는데, 이때 남은 부분이 바로 이 벽이다. 더욱이 지성소와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이 벽에 대한 유다인들의 애정과 경외가 특별한데, 나라를 잃고 흩어져 있던 유다인들이 성전을 찾아 성서를 읽으며 통곡하며 탄원했기 때문에 통곡의 벽이라고 불렸다. 


유다인만이 아니라 많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간단한 가방 검사를 하고 서쪽 벽에 들어선다. 유다인들의 비탄을 상징하는 곳. 예사롭지 않은 심정으로 다가선다. 성벽은 양쪽으로 분리되어 여성과 남성의 구역이 다르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는 성벽으로 들어간다. 그들 틈에서, 뜨거웠던 한낮의 열기가 남아 있는 벽에 두 손을 대고 함께 기도한다. 마치 사랑을 잃은 저녁처럼, 생의 절망에 맞닥뜨린 밤처럼 그들이 운다. 알 수 없는 그들의 탄원에 내 마음도 들썩이며 마음을 보탠다. 주님, 기도를 들어 주소서.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성전을 봉헌하던 날 솔로몬의 기도는 자못 인간적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인간에게 다 내어주셔야 한다. 또한 그는 기도한다.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이라도 당신의 위대한 이름과 당신의 강한 손과 당신의 뻗은 팔 때문에 먼 땅에서 찾아와 이 집을 향하여 기도하면, 그의 호소를 다 들어주십시오.” 

 

소녀들도 성서를 읽으며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왜 우는 것일까? 개인적인 것인지 종교심에 의한 것인지 문득 궁금해지기도 한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한 감흥은 그다지 크지 않다. 예루살렘의 저녁, 오늘은 덜 힘들었다.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벽. 여성과 남성의 구역이 나뉘어 있다.

 

 

열하루 : 6월 27일
예루살렘(비아 돌로로사, 예수님무덤성당, 벳파게, 주님의 기도성당, 예수님승천경당, 베타니아, 겟세마니)→아인카렘(요한탄생성당, 성모님 방문기념성당)→엠마오


아마도 그 길, 우리도 걷는다. 닭이 홰치고 새들의 날카로운 소리가 범벅이 된다. 예루살렘의 새벽, 서늘한 공기 속에 비아 돌로로사를. 광인인지 경건한 사람인지 한 유다인이 경전을 암송하며 지나간다. 진한 향신료 냄새가 나고 신문배달원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다. 곳곳의 쓰레기 더미들. 크고 작은 혼돈 속에 있다. 거룩한 도성, 거룩한 성막, 사방에 갇혔다!! 십자가에, 혼돈, 그 사랑에. 그 고통. 산도 없고 십자가도 없고 성당들이 세워졌다. 인간의 정성으로 만들어놓은 것들은 때로 이질적이다. 진한 향 냄새에 문득 숨이 막힐 것 같다.

 

 

 

비아 돌로로사, 그리고 십자가에서 내려지셨다.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마침내 예수님 무덤에 닿는다. 예수님은 이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리스도교 여섯 종파가 관할하고 있는 이곳은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을 자아낸다. 그야말로 많은 민족들이 “자, 주님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올라가자”(미카 4,2)고 모여들었다. 민족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언어와 자신들의 관습과 자신들의 역사 안에서 그분의 길을 걷고 있다.


예수님의 무덤에서 그분을 기억하고 예배한다. 은총이다. 감사 드린다.


미사가 끝나고 잠시 묵상하며 성전을 돌아본다. 수많은 제대들과 성상들, 경당들, 오래토록 타고 있는 촛불들. 이천 년의 냄새, 그리고 낯선 냄새가 영혼에 스민다. 불에 탄 시리아 정교회의 경당에 들어가서 옛날 동굴 무덤을 본다.


장엄미사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파이프오르간. 마치 함성처럼 울린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경당들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았다는 헬레나 경당에 내려가 본다. 그 바로 위에는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헬레나 경당이 있다.

 

 


예수님 부활 성당 입구


호텔에 들어와 밥을 먹고 로비에서 잠시 쉰다. 이제 예루살렘에서의 반나절이 남았을 뿐이다. 어때? 내게 묻는다. 변화? 혼돈이 남는다. 뒤섞이고, 뜨겁고 혹은 서늘한. 하느님. 하늘과 땅이 만나고, 당신이 기어이 죽어서 차가운 돌에 눕혀졌다. 그리고 부활했다. 그 모든 행위의 까닭은 인간의 죄 때문?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죄를 짓는다. 범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형태로도? 회개는 정신의 문제 아닌가, 감정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은 본연의 것이며 동시에 인간의 보편적인 한계다. 한순간이라도 감정을 멈추거나 오롯이 정결하게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건 지력과 의지로써 정신을 제어하고 정신의 지향을 바로 하는 것. 내게도 회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올바른 방향, 그것이 숙제다.

 

 


벳파게

수많은 군중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다(마태 21,8).


벳파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머물렀던 곳으로 간다. 군중은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 라고 외치며 그를 맞았다.


주님의 기도 성당 지하에는 예수님이 종종 머무시기도 하고,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는 동굴 경당이 있다. 다함께 주님의 기도를 드리고, 세계 80여 개 국어로 쓰인 주님의 기도가 걸린 회랑에 오른다. 한글 기도문도 있다. 카르멜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성물방에 들렀다가 주님의 승천 기념 경당으로 간다. 아주 작은 경당이다. 비잔틴 시대에도 십자군 시대에도 승천을 상징하여 지붕 없는 경당을 지었다. 그후 무슬림들이 돔을 만들어 올려 현재는 모스크가 되었다. 경당 안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남겨졌다는 발자국이 찍힌 바윗돌이 있다. 그 발자국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인일 뿐이다.

 

 


주님의 기도 성당
성당 정원의 벽과 아름다운 회랑에 각 나라의 언어로 씌어진 주님의 기도가 걸려 있다.


베타니아.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가 살던 동네에 간다. 현재의 지명은 아랍어로 엘 아자리야인데 ‘하느님 친구의 집’이라는 뜻이란다. 분리 장벽 때문에 빙 둘러가느라 다시 시레벨을 지난다. 소박하지만 촌스런 분수가 있는 마을로 들어선다. 버스에서 내려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라자로네 집 성당에 들어간다. 제대 정면의 아름다운 그림 속에서 예수님은 “Ego Sum Resurrectio Et Vita(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한다. 성당을 나가 좁은 골목으로 몇 걸음 오른 곳에 라자로의 무덤이 있다. 무수한 발자취 때문에 미끄러운 돌계단을 한참 내려간 곳에 예수님의 친구 라자로가 묻혔던 동굴 무덤이 있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사랑하는 친구.

 

 


베타니아 라자로의 집 성당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다시 다마스쿠스 문을 지나 구세주의 성당, 예루살렘 주교좌 성당을 바라보며 달린다. 예루살렘의 가장 번화가를 지난다. 차가 좀 밀린다. 그러나 참 한가롭다. 사람들은 많지 않고 급하지도 않다.


점심을 먹고 겟세마니로 간다. 그 밤, 근심과 번민에 휩싸여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 그리고는 붙잡히셨다. 그 장소에 세워진 겟세마니 대성당은 16개 나라의 보조로 완성이 되어서 여러 나라 민족의 대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성당 마당에는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수령이 3천 년인 올리브나무 여덟 그루도 있다. 죽은 줄 알았던 나무에서 다시 새순이 돋고 있는 올리브!


예수님이 종종 기도하셨다는 겟세마니 동굴을 보러 갔지만 문이 닫혀서, 바로 곁에 있는 동방정교회의 성모님 무덤교회에 내려가 본다. 교회 밖에서 어린 아이들이 올리브나무 가지를 팔고 있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물결처럼 반짝이며 흔들린다. 발코니에 제라늄을 잘 키우기로 유명한 호텔을 지난다. 고약한 제라늄 꽃 냄새가 파리 등을 쫓는단다. 주택가. 하얗고 작다. 그러나 소박한 정원들에 풍성하게 나무가 자라서 아늑하고 평화롭다. 문득 이집트 생각이 난다. 정통 복장을 한 그들의 행색을 생각하니 유다인들의 하얀 셔츠와 잘 다린 바지는 귀족의 모습이다. 이스라엘 박물관을 지난다. 잦은 전쟁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드물어서 그 조각들을 모아 전시를 하고 있다.


유다의 산골 지방 아인카렘으로 가고 있다. 포도원밭의 샘이라는 예쁜 이름의 마을에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맞았다. 즈카르야의 집, 요한이 태어난 곳에 지어진 세례자 요한 성당의 마당에는 노란 아카시 나무가 큰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그 그늘 속 벽에는 여러 나라 말로 쓰인 즈카르야의 노래가 걸려 있다. “아기야, 너 지존하신 이의 예언자 되리니 주님의 선구자로 주님의 길을 닦아 죄 사함의 구원을 주님의 백성에게 알리리라.” 그 아기, 제 길을 올곧게 간 사람. 요한의 길을 생각한다.


작은 마을의 오르막길을 따라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한 기념 성당에 간다. 고요한 마을에 아름답게 지어진 성당이다. 여기서 두 여인, 하느님을 믿은 신실한 두 여인이 만났다. 성당 마당의 벽에 여러 나라 말로 쓰여진 성모 마리아의 찬가를 우리도 함께 바친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방문 기념 성당에 가득한 아름다운 성화들

 

 

 

성모님 방문 기념 성당
성당 밖 벽에는 아름다운 타일 위에 쓴 마니피캇이 걸려 있다.

 

엘리사벳이 머물렀던 곳으로 여겨지는 1층과 성모님에 관한 아름다운 성화들이 그득한 2층 성당. 성당 밖 곳곳에도 정성스런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아쉽지만 아인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간다. 엠마오라고 추정되는 세 군데 가운데 가장 근접한 곳이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발한 정원을 지나 본당에 들어가니 수사님이 파이프오르간 연습을 하고 있다. 낡은 성당 안, 어둡고 닳았다. 잠시 오래된 고요 속에 앉는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2).

 

 

 

엠마오 성당에는 빛바랜 성화 속으로 파이프오르간이 흐르고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마지막 기념 사진을 찍고 신부님은 말씀하신다. “우리는 거룩한 땅을 찾아 서쪽으로 왔다.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뵙고 머물기를 청한 것처럼, 이제 기회가 주어질 때 우리도 주님을 알아뵈어야 한다.” 서쪽을 향해 걷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은총을 허락하신다.


이스라엘에서의 여정이 끝났다. 남는 마음이 이미 없다. 가볍다. 기쁘다.


저녁을 먹을 때 호텔 식당에서 레어버드의 심퍼시가 흐른다. 그 마음, 예수님이 가지셨던 마음. 


...... And sympathy is what we need, my friend,
...... now half the world hates the other half
       and half the world has all the food
       and half the world lies down and quietly starves
       cause there's not enough love to go round ......

 

여전히 사랑은 부족하다.

 

 

▷ 열이틀 : 6월 28일(텔아비브→암스테르담→인천)


구약의 탈출과 신약의 구원사적 사건을 아우르는 여정이었다고 신부님은 말씀하신다. 밤 두 시경에 호텔을 나와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으로 간다. 예수님의 땅이며 하느님의 영원한 도성인 예루살렘!


공항으로 가는 길에 대략적인 예비검문이 있다. 아랍인 기사의 신원 확인을 위해 잠시 기다린다. 예리코와 베들레헴에 들어갈 때는 아랍인인 그의 신원이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랍인이라는 그의 신분이 약간의 브레이크가 된다. 우리는 일회일 뿐이지만 기사는 매번 힘든 노릇이겠다. 이들의 일상에 축복을 보낸다.


지루하고 긴장되는 출국수속을 마치고 네덜란드로 간다.


수세기에 걸친 바다 간척사업으로 일궈진 네덜란드의 땅이 내려다보인다. 아름다운 농지와 가는 물길들. 태양이 곳곳의 물길에 비쳐 보석처럼 반짝인다. 목초지에 사람은 뵈지 않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들만 뵌다. 삽상한 가을 같은 날씨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풍차마을에 가서 치즈와 나막신 등의 제조 방법을 구경한다. 무량한 하늘, 아름다운 풍광이다. 순례의 마지막 미사를 드릴 만인의 어머니 성당에 간다.

 

 


아름다운 풍차마을 전경


1945년부터 1959년까지 암스테르담에 발현하신 성모님은 이 세상에 십자가를 다시 세울 것을 요청한다. “이 세상에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이웃 사랑은? 진리는?” 마리아는 고통스럽게 외치며 촉구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라. 그 이외에는 평화가 없다. 사랑과 정의와 진리 없이 인류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제대 한 켠에 계신 성모님은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는 무수한 양 떼 위의 지구를 밟고 서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만인의 어머니 성당


광장들과 벼룩시장, 잠시 암스테르담의 정취에 젖고 기어이 네덜란드의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네덜란드를 떠난다. 오후 네 시 남짓, 공항 근처에 도착한다. 우리가 타고 갈 KLM이 보인다. 아, 다시 스키폴 공항이다. 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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