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의 흔적
얼마나 많은 새들이 울다가 갔을까
발자국만 어지럽다
그나마 잎 지면 사라질
그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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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효근 시인은 김애경의 첫 디카시집 『이별이 추억으로 가 닿을 때까지』해설을 통해 디카시를 통해 길어내는 시인의 형이상학적인 인식의 내면세계가 발화되는 시적사유를 적확하게 짚어낸바 있다. 디카시에서도 이러한 사유가 가능한 근거를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프랑스 실존주의 현상학의 거두 조르주 귀스도르프의 혜안을 경청 할 필요가 있겠다.
2.
그는 하이데거를 계승한 존재론의 입장에서 사르트르 등의 실존현상학에 귀의, 철학을 구체적인 ‘인간학’으로 수립한 언어철학자로서 인문학도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받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실존적 언어능력 즉, 파롤(la parole)은 ‘타자(他者)를 향하는 말 걸기’이며 설령 독백의 경우라 할지라도 결국 ‘나(自我)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규정한다.《파롤,2021이윤일 譯 pp72) 그러니까 만일 내가 말을 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보다는 타자를 위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언어철학의 개념규정은 오늘날 ‘나(自我)와 타인간의 만남의 이음줄’이라는 시법(詩法)으로 발전되어 서정시는 물론이거니와 디카시에서도 소중한 창작적 재료로 활용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3.
김애경 시인은 그러한 파롤(la parole)을 구사하고 있기에 귀스도르프적인 시적 사유가 가능할 것이다. 그녀가 디카시를 통해 길어내고자 하는 것은 파롤이다. 곧 독자에게 말을 걸기위해, 먼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한 말투다. 그의 형이상학적 인식의 내면세계가 독자들에게 감동의 여운을 주기에 충분한 이유다. 이러한 실례를 찾기 위해 전호「새벽노을」속으로 다시한번 들어가 본다. 순간포착 된 풍경(=새벽노을)이 ‘표면(단순한 외형)’보다는 내면의 인식(자아의 다비식)’으로 감각의 ‘이음줄’이 뚜렷하다. 타자(=여기서는 자아)에 대한 말 걸기에 성공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인 내면세계인 ‘나(自我)라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이상적 세계를 향한 부활(復活)의 꿈을 위해 자신의 ‘다비식’을 경건하게 치루지 않았는가? 이러한 사유는 자신만의 파롤(la parole)을 통해 끊임없이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탈주를 모색하고자 하는 고통의 몸부림이 있기에 가능 할 것이다.
4.
이와 같은 파롤(언어능력/말투)는 인용 시「새의 흔적」에서 타자에 대한 말 걸기가 마치 핏빛 자해의 웃음소리로 들리는 듯 청명하다. 어느 서느라워진 가을 한낮 오후의 홀로 걷던 산책로였을 것이다. 태양의 그림자로 새겨진 돌담 벽화, 그 어지러운 새들의 발자국 영상은 우리들의 헤아릴 수 없는 ‘내면적 울음’들로 굳어져버린 화석이라고 화자는 말을 걸고 있다. 풍경(애기단풍 그림자)과 시적형상( 발자국)이 한 몸을 이루며 새로운 의미의 파롤(내면의 울음)로 융합되어 한 편의 알레고리적인 디카시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목과 풍경과 시적 언술이 하나의 이음줄로 이어져 서로를 밀치고 삼투(滲透)하면서 시적 의미의 자장으로 발화되고 있다. 이처럼 ‘사물은 시인을 통해서 말을 걸고, 시인은 사물을 통해서 말을 거는’ 실존의 현상학적인 파롤(la parole)은 디카시만이 지니고 있는 견고한 소통구조라 할 수 있다.
5.
디카시에서의 파롤(la parole)을 인식키 위해 행간을 조금 더 깊게 더듬어 본다. 결부에서 시인은 “그나마 잎 지면 사라질 / 그 자취”라고 말을 걸고 입을 닫아버린다. 짧은 네줄 행간의 시적진술에 숨어 사각의 프레임에 담긴 오브제를 향하고 있는 파롤의 시적 진술은 어디에 닿아 있을까? 인생은 모름지기 ‘자취’를 남길 수 있는 ‘흔적’이어야 한다는 낯설은 역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더욱이 잎이 지기 전에 내면적 울음의 흔적을 많이 남길 수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강조된 역설(paradox)로 확장 시킬 수도 있는 것은 실존적 현상학으로서의 파롤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자와 청자(독자)사이의 소통구조를 통해 인생의 혜안을 밝히는 알레고리를 차분하게 노래할 수 있는 에이전트(대변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김애경 시인의 파롤을 주목하야하는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悳泉)